라이따이한
김우영 지음 / 푸른사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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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따이한, 라이라는 한자어인 래()로 의미는 오다는 말이고, 따이한은 대한(大韓)이라는 의미이다. 즉 한국이 온다 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래라는 말이 베트남에서는 혼혈아이를 아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가령 흑인에 대해 깜둥이라 하는 것과 농촌사람들을 촌놈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책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은 소설이듯이 역시 소설 내용도 예사롭지 않았다.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라이따이한이라고 하여 전쟁에서 어느 전투원이 베트남여자를 운명적으로 만나 이별을 그리는 단순한 전쟁이란 비극적인 이데올로기를 로맨스란 환상으로 가려운 것이 아니라 전쟁과 낭만에서 태어난 암울한 비극의 씨앗에 대해 적은 것이다. 참고로 이 소설은 단편소설집들을 모은 것들인데, 10편이 되는 단편소설들을 모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느끼는 예사롭지 못한 점들은 너무 예사로운 이야기들을 마치 그 사람의 입장과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적어간 것이다.

 

특히나 답답한 일들이 있으면 막소주를 마신다는 것처럼, 서민의 애환과 소외된 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만든 사회구조라는 점에서 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라이따이한 소설은 총 10편으로 구성된 것처럼 (1) 625전쟁 시 1.4후퇴로 개마고원 산자락 고향을 내버려두고 내려온 어느 순박한 노인의 이야기 통일 꽃”, (2) 중 수교로 통해 한국사람들이 중국에서 가서 중국 교포나 현지인과 만나 남겨진 2세에 대한 슬픈 이야기 한궈쓰성츠”, (3) 성실한 농부가 소 육성사업 실패에 따른 인생좌절에 대한 이야기 까치다리 동동”, (4) 일제강점기 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팔 하나 잃은 노인의 귀국 이야기 상봉”, (5)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인데도 버림받은 베트남가족 이야기 라이따이한”, 김삿갓이 먼 과거서 현대 첨단기술로 통한 세계일주를 다룬 세계 특사여행”, 수술 시 수혈 받은 피가 에이즈로 감염되어 인생의 좌절을 겪는 몽실대과 그 남편의 이야기 악파의 피”, 과학자들의 미래지향적 과학이야기 우리들의 천국”, 가난한 문필가 남편과 그 가족들의 가난함 일상과 오순도순한 이야기를 다룬 자화상”, 한국 시인이 몽골처녀와 한눈에 반해 서로 결혼한 찐따화 니엔거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게 생각한다면 낯설 수 없는 이야기나, 낯설 수밖에 없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게 된다.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정보와 교통 발달,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한다고 여겼으나, 정말 그렇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보통 서사라는 것이 개인적 영역이 아닌 보편적 영역이나, 이 이야기는 현대에 살아가는 어느 특정인물에게 일어난 것을 적어가고 있으므로 매우 개인적인 보편성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하여 그런 인물들이 우리에게 전혀 새롭지 않은 존재다. 그러다 보니 더욱 새롭다고 여긴 것이다. 우리가 언제나 접하는 TV와 미디어 세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의 반에 반도 안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실제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사회생활이나 학교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TV의 이야기로 가득 메우는 것을 본다. 우리는 현실에 살아가는 존재인데, 왜 현실이 아닌 드라마의 이야기가 더욱 현실 같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이 책의 뒤편에 가면 안용산이란 시인이 적은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글쓰기는 바로 이 시대와 살아가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게 세계와의 부딪침이다. 그래서 인식과 표현을 두 날개로 삼아 힘차게 날아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또 다른 문구가 있다. 문학가인 구인환 교수의 문구처럼 <소설은 스탕달의 말대로 인생의 길가에 비추는 거울이다. 그 거울에는 처절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삶의 양상이 다채롭게 비친다. 일상생활의 살아가는 즐거움과 슬픔 그리고 한이 서리어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과 미움 갈등과 평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며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초탈의 철학이 숨 쉬게 된다. 또한 격동의 역사 흐름 속에 민족의 수난과 그 극복 또 전란과 평에의 희구가 숨가쁜 현실을 이룬다.>

 

정말 이 소설은 인간의 한이 몸서리치는 소설이었다. 단지 어느 개인, 그것도 딱 집어내어 농촌사람, 베트남 어느 3대 모녀, 중국의 어느 모자, 몽골의 어느 아가씨, 고향에 다시 온 할아버지, 고향을 그리워한 어느 할아버지, 에이즈에 걸린 부부, 입안에 생선가시가 걸려도 병원비 몇 천원이 아까워 그냥 빠질 때까지 노력하는 문필가의 아내, 모두 일반사람이고, 흔히 볼 수 있어도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들은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것들만 찾지, 어둠 뒤에 소외된 자들에게 항상 무관심의 장막으로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엔 깊은 아픔과 여운이 남는다. 글자도 모르면서 고향의 첫사랑을 그리워해 하모니카를 부는 마고원 할아버지의 슬픔에서 이들은 외롭게 혼자 쓸쓸히 죽어간 이웃일 수 있고, 에이즈에 걸린 부부는 그저 착실하게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인데도 한 순간에 모두에게 멀어져야 하던 비극일 것이다. 몽실댁이 둘째 딸과 막내딸을 위해 떼어내는 모습은 참 애처롭다. 막내가 엄마의 젖을 먹으려고 추워서 엄마의 품에 안기려고 해도 엄마 몽실댁은 강제로 부정한다. 그녀에게 들어간 악마의 피가 그녀의 아이들에게 가지 않도록 말이다. 게다가 둘째 딸에게 밥을 직접 지어 먹으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남편과 자신은 라면을 끓여 먹는다. 마지막에 몽실댁은 자신의 언니네 가족에게 두 딸을 맡기고, 남편과 같이 자신의 고향인 몽실골로 간다.

 

이렇게 허무한 운명처럼 이들에게 닥친 고난에서 정말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특히 진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중에 하나가 사할린에서 돌아온 어느 징용당한 할아버지다. 팔을 잃어 외로이 러시아에 있다가, 러시아인과 결혼했으나, 그녀마저 죽고, 고향으로 영구귀국을 한다. 돌아오자 환영보단 소외가 심했다. 자기가 살던 집인데, 오히려 타국살이보다 낯설었다. 예전 아내는 재혼을 하고, 일가친척들은 모두 외면한다. 자기처럼 돌아온 위안부 할머니는 자신이 돌아왔다고, 주변 친척 중에 혼삿길 막았다고 인연까지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이런 일들은 종종 본 것 같았다.

 

한궈쓰성츠와 라이따이한에선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타국으로 발을 넓히며 타국의 여인과 짧고 허황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특히 라이따이한에서 할머니는 월남전에 한국인의 아이를 얻고, 그 중 딸아이가 한국베트남 수교로 출장 온 한국인의 딸을 놓는다. 그래서 3대 모녀가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라이따이한 1세인 딸의 아이가 뇌성마비환자였다. 아버지란 작자는 도망치고,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이 모녀들을 돌보던 한국인 선교사가 노력하나, 선교사에게 돌아온 말은 차갑고 이기적인 답이었다. 그나마 월남전에 온 남자는 괜찮았다. 미안하다는 말과 조금의 돈을 부쳐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사경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이 책의 저 모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슬펐는지 작가는 진안 운장산의 최승호 시인이 만든 라이따이한의 노래라는 시를 읊는다.

 

엄마는 예 있는데, 아빠는 어디 있나

얼굴도 못 본 나, 새똥처럼 던져놓고 아빠는 어디 갔나 어디로 갔나

<메콩강> 줄기 따라 핏줄 이리 흐르건만

모르겠네 모르겠네 뿌리를 모르겠네

내 나이 스물 넘고 서른 넘어도

모르겠네 모르겠네 아빠 아빠 나라 <따이한>

궁금치도 않다던가 뿌리놓은 씨앗들

야자수 뒤흔드는 <스콜> 바람에 행여나 오시려나 아빠의 소식

그러나 바람만.....무심한 바람만.....

무정한 아빠처럼 그저 그냥 그렇게 지나네요.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낯선 세계의 모습이나, 그 세계의 그들에겐 매우 현실적으로 참담하고 암담할 것이다. 자기의 몸을 망친 것도 모자라 이들의 한은 너무 철저했다. 이념과 전쟁에 상관없이 그저 순박하게 살고 싶던 그녀들, 폭탄이 떨어지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난 이웃들, 옆집 처녀는 배의 창자가 터져 그날 먹은 음식까지 알 정도라 했다. 이 부분이 나올 때 폭격으로 인해 나체로 길가를 달리던 어린 베트남 소녀의 사진이 기억났다. 그 사진은 퓰리처상을 받은 네이팜탄 소녀였다. 사실 네이팜탄 소녀나, 개마고원에서 내려온 마고원 할아버지나, 징용당한 할아버지나 모두 아무런 죄가 없이 그저 세월의 잔인함 속에 어둠의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이야기하기 싫어한다. 아픔의 기억은 사라지려 하나, 그 사라진 기억 너머에는 아픔의 공간까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책을 읽으며 짧은 여운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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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늄의 밤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 씨엔씨미디어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게르마늄의 밤을 우연히 내가 아는 분에게 선물로 받았다. 집안에 초등학교 자녀들이 있어서 혹시나 보면 정신적인 영향이 있을 것 같아 받은 것이다. 책 제목에서 게르마늄이라 하여도 금속성 원자이고, 인간의 몸에는 게르마늄이 좋은 것으로 안다. 건강에 좋으면 멸종위기 동물이라도 잡아먹는 한국사회에 게르마늄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표지를 보니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란 점에서 상당히 문학적으로 높은 작품을 느꼈다.

 

그리고 표지 우측 상단에 붉은 글씨로 18세 미만 구독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또한 표지는 엄청난 표정으로 일그러진 인간이 자신의 몸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듯 외치는 표정이었다. 한 마디로 고통과 좌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기에 메인 자였다. 책 제목과 표지도 그렇고 목차에서 마광수 교수와의 대담 역시 잊을 수 없을 것이리라. 마광수 교수하면 한국사회에서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서 외설로 낙인찍힌 자로서 그의 성적 도착적인 유희는 많은 논란을 한국사회에 불러 일으켰다.

 

아직까지 유교적인 문화에 몸이 젖어버린 한국사회에 게다가 서구 기독교문화 유입으로 과다 망상적으로 심각한 결백증들은 이 사회의 병적인 존재로 되었는지 모른다. 전에 어느 책에 이런 문구를 보았다.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는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많이 친한 학자인데 그가 남긴 말로는 "성의 억압이 파시즘 낳는다."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가장 음탕한 사회에서 금욕주의가 싹튼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단어가 아닌가? 성적욕망을 무리하게 억압하고 부정하고 뭔가 죄를 부여하는 한국사회에서 변태적이고 관음적인 욕망이 꽃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오히려 억압을 하기에 그 억압적 충동이 역으로 변태적인 존재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엔트로피라고 하여 인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욕구불만이 쌓여만 간다. 문제는 그 불만사항은 아주 작게 조금씩 해소하기 보다는 더욱 더 압박을 가한다. 마치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죄인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종교적인 가치관이 중요시 되는 세계에서 그것은 모든 것으로 부정된다. 하나의 성(聖)적인 체계가 잡힌 곳에는 그 모든 것이 부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기야 말로 더욱 더 부정과 부패 악이 처참하고 잔혹하고 때로는 승화되기도 한다. 이 책 게르마늄의 밤에서는 더욱 심각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작가인 하나무라 만게츠는 아주 독특하게도 짧은 학력과 제대로 된 세상살이를 보지 못한 듯하다.

 

오히려 왜곡된 세상과 어려운 삶에서 그의 필력은 매우 현실적인 것을 지나 추함과 더러움으로 가득했다. 그런 부정적인 삶의 관조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을 알게 된다. 인간은 추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추함은 추하다고 인정해서 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한 주제에 추하지 않고 그것을 가면으로 씌운 채 성(聖)스러운 이데올로기에 매여 모든 것을 회피하는 것이 추한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로우는 그런 성(聖)스러운 것을 변태적 성(性)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차라리 거룩하고 아름답다고 외치는 성당 안의 이야기는 한낱 위선과 오만이었다. 이 책의 배경을 보니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후라는 점이고, 주인공 로우가 중학교 시절이 미군의 창고에서 나온 식량으로 목숨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1일 1인당 생활금액 120엔, 1945년 지나도 120엔 역시나 작은 돈인가? 미군이 주는 통조림, 전분으로 목숨을 부지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미군이 준 음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어떤 비스켓을 열어보니 구더기가 나왔다고 한다. 유통기간이 지난지 몇 년이나 지난 것이었다. 모든 미군들이 주는 음식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폐기물이었다. 폐기물을 먹고 살아가는 로우에게 희망과 꿈은 없다. 현실의 일그러진 모습에 그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학대하고 때로는 그 날카로운 복수의 화신은 남에게 이어진다. 집단이지메, 동성애, 변태적인 성적 유희 등등 말이다.

 

남자가 남자에게 침과 가래를 요구하여 먹이고, 남자가 남자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입으로 애무하여 끈끈한 액체가 나와 변태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때 그들은 처음에 거부했으나, 잠시 후에는 그것에 맛을 들어버렸다. 인간의 어두운 감정과 비극성을 기저까지 내려간 것이다. 그런 로우가 사회에 나가 살인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살인 동기가 여자와 남자 중에서 여자가 자신의 성적인 부분을 농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의 깊은 공간에 자기를 담구지 못한 채 남자의 동성애에 더렵혀져 있었다. 아니 이제는 오히려 거기에 쾌락과 불쾌함의 알 수 없는 모순에 빠졌다.

 

그래서 여자를 죽이고, 그 여자와 관계있던 남자도 죽였다. 그런 후에 다시 성당이 있는 고아원에 온 것이다. 그는 와서 농장 일을 도왔다. 그는 와서도 어두운 과거에 붙잡혔다. 원장 신부에게 변태적 성적 유희를 도와야 했고, 그 덕분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지만 여자에 대해 몰랐다. 어느날 아스피란트 1호(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여자)가 우연히 로우와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녀는 하얀 블라우스를 둘러도 유방의 관능적인 매력을 숨기지 못했고, 타이트 스커트와 잘룩한 허리는 매우 요염했다.

 

어느 부잣집의 딸로 수녀가 되기 위해 온 그녀는 마치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듯했으나,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매우 성적으로 도착적이고 강렬하고 격렬했다. 로우는 그녀의 고통과 아픔을 듣다가 그녀를 안았으나, 사실 그녀는 안아주기를 바란 것이다. 로우는 일반적 나체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몸매가 부각해주는 의상을 거친 여성에게 성적인 자위행위로 만족했다. 그것은 나체의 여성보다는 뭔가 페티시한 요소에 끌리는 남성의 성적 도착에 가깝다.

 

두 사람의 성교에서 그는 여자와 동정임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여성의 성적 쾌락에 따라 갔다. 입과 입에 서로 맞추고 혀를 주고받으며, 한손은 가슴에 한손은 은밀한 샘에 가져가고 있었고, 아스피란트 1호의 팬티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온갖 기교와 성적 도발로 로우를 본능적 인간으로 만든다. 그녀는 정녕 사랑을 원할까 아니면 여자이기를 바랄까? 책을 읽으면 그녀는 본래 수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원래 사랑하던 남자와 눈이 맞다가 임신했지만, 부모의 강압 아래 아사피란트 1호는 소파수술을 했다.

 

즉 자신의 자궁 내막들을 기구로 긁어내어 강제로 낙태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자궁에 상처를 입었다. 결국 그녀는 임신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여자로서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녀는 인생의 좌절과 더 이상 자신이 여성으로 살 수 없으며, 죄를 지었다는 원죄적 의식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싶었다. 죄를 지어보고 싶은 것은 결국 자기가 살아있음을 알고 싶은 것이다. 로우와 성교에서 과연 그녀는 음탕한가 아니면 불결한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냐는 말에 대답은 아니라는 점이다.

 

상황에 닿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나,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성을 확인하기 위해 변태적 섹스를 원했다. 로우는 그녀의 마수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풀린 것인가? 로우는 동성애적인 경험을 했고, 끝에는 프랑스계 미국인과 일본인 혼혈아 잔에게 성적인 변태적 행위를 부탁받는다. 잔은 남자이고, 그는 마음이 어리나 로우의 충동적이고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모습에 동경한다. 남자이면서 잔은 로우의 성기를 애무하고 로우는 부끄러워한다.

 

중학교시절 로우는 미우라라고 하는 상급생에게 강제로 동성애를 눈뜨게 되었다. 그때 강요받은 로우가 처음에 거부하다 끝내는 미우라에게 더 변태적인 요구를 했고, 그 제안의 좌절은 미우라의 음낭이 터지는 사건까지 연결된다. 그의 변태적인 성적행위는 아스피란트 1호에 의해 풀린 것일까? 아니면 다른 길로 들어간 것일까? 마지막 모습에서 더욱 더 심각한 변태로 되는 것일까? 하지만 끝을 보면 로우는 자신의 어둠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인다.

 

그것이 마치 일상이라도 되듯이 말이다. 인간의 어둡고 부정한 모습을 인간들은 거부한다. 오히려 자기들이 그러면서 남에게 하나의 올가미를 덮어씌우고 한다. 로우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있는 그대로 분출했다. 로우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던 모스카 신부가 죽기 전에 로우는 모스카 신부의 휠체어를 이끌고 고해성사를 한다. 그가 고백하는 것들은 모두 부정하고 더럽고 추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추하고 더럽고 동물보다 더 전투적인 존재임을 고백한다. 모스카 신부는 그를 오히려 더 세속적 인간보다 위에라고 한다. 게다가 그런 말을 다른 수도사로부터 나온 말이다. 더럽고 추하고 난폭하고 성적인 본능으로 뭉친 로우가 왜 고귀할까? 인간의 더러움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숨기기보단 오히려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그가 인정하고 그 사실조차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생각해보면 극단적이기는 하다.

 

아스피란트 1호와 성교 이후 테레시아 수녀가 그 일을 물어보자, 그는 대답으로서 테레시아 수녀에게 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바지 안의 강력한 욕망을 내보였다. 30대 수녀의 옷을 양파처럼 벗기고, 수녀 역시 벗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물처럼 숨을 나누며, 로우의 본능의 상징물에 붉은 피와 임파액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몇 일 전에 모스카 신부에게 테레시아 수녀에게 자신의 아이를 낳게 할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낳고 싶어도 낳을 수 없는 아스피란트 1호, 생명을 낳을 수 있는데도 낳을 수 없는 테레시아 수녀, 여기서 많은 모순이 오고간다. 그런데도 로우는 죽음과 불능, 그리고 부패하여 죽어버린 것들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이레지, 소가 겨울철 여물과 같이 먹는 영양제를 만들면서 그것이 부패하고 발효되나 그것을 먹은 소는 큰다고 했다. 음식물폐기물이 있는 곳에 썩어가는 음식을 넣으며, 그것으로 농작물을 키우고, 돼지도 키운다고 했다.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한 것으로 키운 것을 우리가 먹는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쓰레기를 만들고 먹지 않는가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추한 것은 무엇인가? 성적인 변태적 욕망과 행위 그리고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행위, 그런데도 그것보다 더 추하고 더럽고 끔찍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종교를 비하할 생각은 없으나(물론 일본과 한국의 종교나 사회적 관념은 다르나),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고 그것을 성스러운 존재로서 마치 없는 것처럼 속이는 위선이 아닐까 싶다. 행동적 죄는 가벼울지라도 그 죄에 대한 외면과 회피에서 인간은 더 큰 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로우가 존경하고 사랑한 모스카 신부는 마르고 늙은 노인이다. 그는 다리를 사용하지 못한다. 2차 대전에 스파이에게 고행성사를 받고 난 뒤에 일본군에게 잡혀 고문 받다가 그래 된 것이다. 그래도 그는 고해성사를 알리지 않은 채 그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로우의 눈에는 모든 것이 얼간이고, 병신이고, 변태고, 욕망덩어리고, 어리석은 존재로 여겼으나 오로지 모스카 신부만이 사랑스럽고, 모스카 신부의 죽음에서 난폭한 로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내린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과 진정한 성스러움은 타인의 악적인 부분까지 다 안고 갈 수 있는가이다. 차라리 안고 가지 않으면 자신이 표출할 수밖에 없다. 로우의 난폭한 폭력과 변태적 성적도착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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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송무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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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어디선가 많이들 들어본 소설 이름일 것이다. 그 말로만 들어본 위대한 개츠비를 나를 비로소 접해 보았다. 물론 이 책이 아닌 많고 많은 좋은 소설이 있겠으나, 이 책을 읽은 후에 나하고 친분이 있는 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미국의 1920년을 알려면 위대한 개츠비를 보는 것이어야 하고, 미국의 1930년을 알려면 앵무새 죽이기를 보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앵무새 죽이기를 물론 나는 읽어볼 예정이다. 그러나 적어도 1920년 미국시대를 보면서 개츠비란 인물을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까 말까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닉이란 인물은 미국 동부에 위치한 명문대학 예일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게다가 경영학까지 전공하여 증권에 대해 잘 아는 엘리트적인 도시남이다. 그런 그가 개츠비를 통해 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닉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는 점이고, 그 곳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란 점이다. 그리고 닉에게 자신의 집에 초대한 개츠비는 1차 세계대전에 같은 사단에 있었던 장교였다. 닉은 개츠비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왠지 이상하게도 닉 주변에 있던 닉의 사촌인 데이지, 데이지 주변 인물 베이커, 데이지 남편인 톰 등은 끊임없이 개츠비에 대해 경계, 흥미, 애정, 분노 등의 감정을 두르고 있었다.

 

개츠비란 인물은 매일 밤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와서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도록 파티를 주선한다. 그는 엄청난 재산과 부드러운 매너, 그리고 그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제시함으로 그의 주변에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니 수많은 루머와 그를 다룬 신문기사까지 나오니 개츠비란 정말 유명인사라는 점을 여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개츠비가 아무리 예일대학 출신인 닉이라도 그토록 그에게 정중하고 특별하게 대우해주는 이유는 있었다. 닉은 난폭한 부자인 톰의 아내인 데이지와 친척 관계였다. 초반에 그가 찾아간 곳은 톰과 데이지가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 데이지도 만나고 톰도 만나고, 덤으로 베이커를 만났다. 이들에게서는 미묘한 냄새가 났다. 당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였고, 한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었으며, 게다가 금주령이 내리진 시기였다.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고, 여러 가지로 세계적으로 정신이 사나운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느낌이 이래저래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른바 기회의 제국인 미국에 대해서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 개츠비란 인물은 자기 자신에게 매우 철저하게 관리하였고, 수 많은 노력과 인내를 감수했다. 그는 처음에 가난한 청년이었다. 그가 장교로 있을 때 데이지를 만났으나, 데이지는 미국 중상류계층의 아가씨로 사교무대에 정신이 팔려있었고, 그런 데이지를 좋아하던 개츠비는 군인이었으나 가난하여 그녀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개츠비가 놓치게 되자 데이지는 톰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며, 하녀를 고용하여 딸의 보모로 사용할 정도이니 그녀의 남편인 톰은 정말 부자였다. 하지만 그는 난폭하고 거만하고 한편으로 이기적이었다. 개츠비가 예전에 자신의 아내가 좋아한 사람이라 알자 그의 과거를 알아보고 폭로하고, 아내 몰래 정비소의 부인을 정부로 만들었으니 이중적인 인간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런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과연 그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뛰어다니고 살아왔냐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인생은 불행이다. 그는 가난으로 사랑하는 데이지와 멀어지고, 게다가 전쟁터에 가서 소령까지 달고 제대했으나, 너무 가난하여 군복에 훈장을 단 채로 다녔다. 전쟁은 끝나고 모두 전쟁이란 위험은 생각에서 사라지고, 유흥과 사교에 빠진 미국이었다. 브로드웨이의 거리에서 재즈와 뮤지컬 공연은 흥청망청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발버둥 치려는 데이지, 그 속에서 유명세를 누리려고 부정한 경기와 온갖 이기심으로 뭉친 미녀 베이커양, 그런 여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제왕적 권위를 내세우는 톰에서 미국의 1920년은 그야말로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물론 90년 전후의 이야기를 도출한 것이라고 하나,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다지 차이 없어 보인다.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아 꿈을 접는 청년 개츠비, 그런 꿈을 찾기 위해 금주령 시기에 술을 팔아 거부가 되었으나, 그에게 과거의 절망은 이별을 고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뒤에 비극적인 톰의 정부의 죽음, 그 죽음에 대한 복수로 개츠비는 아무런 꿈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간다.

 

닉은 개츠비를 처음 만나 그가 죽고, 죽고 난 뒤의 일들을 정리해간다. 개츠비의 아버지가 닉에게 찾아오자, 개츠비의 아버지는 가난한 아들이었으나, 자신의 매사에 열심이었고, 그런 개츠비가 아버지의 잘못된 습관을 말하자 폭력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고 개츠비가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아꼈는지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몇 년 전에는 가난한 자신에게 집을 사주었다고 한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집을 나간 아들이 말이다. 개츠비란 인물이 금주령 시대에 밀주를 하여 부를 불린 것은 결코 용서받을 일이 아니나, 개츠비란 인물 자체를 보자면 그는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부를 찾아 헤매어도 결국 데이지를 찾을 수 없었고, 이 세상에서 뼈만 남기가 사라졌다. 성공의 미국이란 1920년이란 사회상이었으나 막상 그 사회란 차갑고 냉정하고 겉과 속이 다른 사회였다.

 

허무와 위선은 과대하게 포장했으나, 원조 상류인 톰은 개츠비를 인정치 않았으며, 여자 역시 상류층만 보고 따라갔다. 그래도 개츠비는 몸부림을 치었지만, 닉이 보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들은 그저 멍하니 떠나가고 있었다. 이 책에서 조금 재미있는 부분은 왜 미국의 기회의 땅이라고 해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을 보면 가정부로 필란드 사람인 점이었고, 그녀가 평소에는 일은 열심히 하고 있으나 미국이란 사회문화에 그다지 적응하지 못한 점과 즐겁지 않음을 나타난다.

 

미국이란 기회의 나라라고 했으나, 당시 사회상은 이미 그렇지 못했다. 개츠비와 예전에 같이 밀주를 했던 사람을 찾아갈 때 어느 고급승용차에 흑인 3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닉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을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기보단 왠지 경계하고 못마땅하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초반에 원조흰둥이가 아니면 안된다는 편견을 가진 인종주의 발언을 톰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겉으로 사교사회의 화려함을 쫓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많은 상실된 꿈과 희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개츠비가 위대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 낙오된 채로 살아야 할 그가 그것을 뛰어넘으려 안간힘을 펼친 것이다. 물론 사다리에 오르려다 결국 떨어지었으나, 그가 떨어졌다고 해도 우리라고 그 길을 올라가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길은 닉이 보는 사회와 일상처럼 모순으로 얽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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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중학생이 보는 인간 실격 -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 98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 106
다자이 오사무 지음, 성낙수.임현옥.이승후 옮김 / 신원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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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기획 중에 푸른 문학 시리즈란 방송을 보았다. 푸른 문학 시리즈란 일본의 유명한 문학가들의 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방영한 이른바 영상문학의 개념이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애들이나 보는 그런 유치하고 저속한 콘텐츠로 여기기 쉬우나 사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여 무시하지 못할 작품성이나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푸른 문학 시리즈는 바로 그런 작품성과 예술성을 토대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青い文学シリーズ라는 원제로 시리즈 안에는 여러 일본 문인의 작품을 각본을 하여 제작했다. 1번째 작품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人間失格)”, 2번째는 사가구치 안고의 “벚나무 숲의 만개 아래서( 桜の森の満開の下)”, 3번째는 일본 근대문학의 대문호인 나츠메 소세키의 “마음(こころ)”, 4번째는 카와시마 스미노의 “달려라 메로스(走れメロス)”, 5번째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거미줄(蜘蛛の糸)”, 마지막 6번째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地獄変)”이었다.

 

작품을 보면 알듯이 다들 일본 문인계에서는 내놓는 작가들이다. 이중에서 나츠메 소세키의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정말 잊을 수 없다. 또한 다자이 오사무가 좋아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같은 경우, 마치 문학소설이기보단 차라리 애니메이션 원작을 위한 각본이라고 생각할 만큼 상상력이 거대했다. 그러나 그 문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왜 그는 모습을 버려야 했을까? 추후 인간실격의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 역시 자살을 한다. 죽음이 아니라면 탈출구가 없는 그런 인간이었을 것이다.

 

다른 작품에서 인상 깊은 점은 달려라 메로스다. 이 작품은 문학소설가 작품을 쓰면서 어떤 연극 시나리오를 적는다. 그런데 이 달려라 메로스는 그야말로 고대그리스에서 보여주었던 비극시와 동일했다. 비극의 주인공 메로스 그는 친구를 볼모로 하여 동생의 결혼식에 참가한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면 왕의 노여움으로 죽게 된다. 죽고 싶지 않은 그의 무의식과 친구의 의리를 위해 죽음을 이상적 가치로 받아들인 그의 고뇌가 그 각본을 적은 작가의 심리와 일치한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나 그 주된 이야기 속에 주인공이 작가가 되어 다시 작품을 만들어 연극으로 보인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나온 것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 푸른 문학 시리즈를 보면서 애니메이션 역시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단언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원작의 토대가 되던 소설을 보면 어떤 느낌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상당히 다른 느낌일 것이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이미지로 통한 시각적 정보와 더불어 대사, OST, 효과음으로 통한 청각적인 정보를 동시에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적 정보와 청각적 정보로 통해 하나의 서사 즉 narrative를 완성하여 거기에 담고 있는 하나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해 문학소설은 이미지의 시각적 정보도 없고 더구나 소리로 통한 청각적 정보도 없다.

 

오로지 문자 텍스트로 통해서만 본인이 이미지를 생각하고 소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서사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라도 그 표현방식이 다르면 받아들이는 이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뒤의 인간실격의 스토리는 대략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는 이 작가의 사상적 특성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의 작가소개서에 나온 듯이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에 권력가에 특히 일본 자본주의 가속화와 군국주의적인 활성화로 그의 집안은 매우 번창했다. 대신 번창한 만큼 주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작가인 그인 다자이 오사무는 부유한 자기의 집안만큼 아버지에 대해 혐오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인 요조는 아버지에 대해 상당히 배척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중간 작품에 주인공 요조는 자신이 진보적인 가치관도 없었으나, 마르크스주의 청년단체에서 활동을 한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가 자기가 익숙한 세계와 다른 세계라는 점이다. 자기가 있는 세계에는 어떤 패턴에 강제로 해야 한다는 것과 거기에 어울려 맞추는 것이 싫은 요조였고, 가식적인 세계에 가식을 맞추기 싫어하여 더욱 가식적으로 대한다.

 

그냥 넘어갈 것을 억지로 오버를 하고, 그냥 거절하면 되는 것을 싫은 내색하지 못한 채 불안해하며 말없는 동의를 한다. 특히 그가 아무런 말도 없이 싫어하면서 억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과거에 나의 모습이 보인다. 너무 순수하기에 더욱 더 순수하지 않음으로 보일 수 없는 영혼을 말이다. 그는 아주 솔직하고 순수했다. 너무 순수했기에 할 말보다는 할 말이 아닌 것으로 했다. 누군가에게 가서 의지하다 싶다가 어느 순간 훌쩍 도망친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자기 내부의 이성적 가치에서 합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오로지 요조의 안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진실일 뿐이다. 더럽혀지고 싶지 않아 더 더럽혀지는 그의 슬픈 영혼 속에서 그는 정말 인간이고 싶었으나 인간실격이 된다. 무엇에 의지할 수 없는 요조, 그리고 그런 요조에게 빠져드는 여자들까지.

 

요조에게는 여자들의 공간 속에 묻혀 살아간다. 그의 최초의 여자는 어린 시절이다. 그는 아주 잘생기고 지적인 남자다. 게다가 비위 맞추는 것에 길들어진 그에게 남이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금방이라도 그 기세에 따라간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집안의 하녀에게 성적 희롱을 당한다. 그로부터 그에겐 여자라는 존재는 하나의 안식처로 보이기보단 어둠으로 끌고 가는 세계로 되었다.

 

여자에 술, 담배, 수면제, 모르핀까지 그의 인생은 오로지 타락과 정신적 피폐로 얼룩지게 된다. 이 이야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그 진리를 무시하고 파괴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아마도 작가의 심리를 반영했을 것이다. 소화 10년은 1935년,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기 전이다. 소설에서 나오지 않으나 애니메이션에서 요조의 친구 아닌 친구로 나오는 호리키는 처음에 마르크스주의자로 나오나 이후에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간다.

 

이에 반해 요조는 그 세계에 빨려 들어가지 못한다. 자신은 그런 전체적이고 숨 막히는 곳에는 살 수 없었다. 단체생활을 거부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행동을 하는 요조, 그런 주제에 사람을 정말 그리워하는 요조, 그의 절망은 삶에 대한 희망이나 꿈보다는 현실 자체에 대한 무기력한 자신을 혐오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되지 못하고, 자신이 믿었다고 생각한 것은 더 큰 배신으로 돌아왔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운명이고, 그저 자신을 몰아넣을 수밖에 없는 젊은 청춘이었다. 아니 슬픈 청춘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미남자에 예술과 문학까지 두루두루 아는 지식청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에겐 그 세계란 그저 숨도 쉬기 어려운 세계였을 것이다. 강제적으로 억지로 따라야 하는 것이 사회의 규율과 도덕이 되어버린 따분한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에 물들어 갈 수 없는 작가와 요조이었기에 더더욱 타락한다. 오로지 타락하는 자신에게서만 자신이 있을 공간이라 여긴 것이다. 작품 마지막에 요조는 정신병원에 갔다가 어느 시골 바닷가에서 늙은 노파의 시중을 받은 채로 살아가나 여전히 약물에 의존하고 살아간다. 27살인데도 40대처럼 보이는 흰머리들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괴롭고 슬펐음을 상기시킨다.

 

부끄러운 자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 밑에서 눈치를 보며, 아무 의지를 품지 못한 채 죽어간 자신을 말이다. 인간실격을 보면 요조는 정말 겉으로 본다면 인간이하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인간이하로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광인이란 존재는 근현대사회로 들어서며 분리와 격리 그리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진정한 광인은 자시만의 세계를 마음껏 보일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종교, 철학의 승화자이다.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은 세계와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마음이 병들어가는 요조, 그가 단순히 인간답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보다 그가 인간다움을 잃은 채 낙담하는 이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말 상식인지 그것이 도리어 인간 자기 자신에게 독으로 물들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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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재다 3 - Seed Novel
하람 지음, Nardack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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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재다 이번에 읽은 3번째 권으로 하여 작품 내의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가 된다. 솔직히 이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일반적인 소설과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에서 라이트노벨 그 자체만으로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이란 공통성을 인지하여 평가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보통 라이트노벨의 경우 스토리텔링 경로가 환타지와 비일상적이라면 인간의 현실적 일탈이 강하게 요구된다.

 

따라서 현실성이란 부분에서 크게 결여된 라이트노벨은 현실과 괴리감을 주는 것으로 작가와 독자 모두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은 박탈감과 허무감으로 채울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부분은 문학소설에서 있으며, 문학의 기본이며 모든 서사의 최초인 신화조차도 그러하다. 인간이 신화에 매료되는 이유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적어도 신화에는 현실의 인간이 될 수 없거나 혹은 대리적으로 되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화의 인물이란 모든 것을 안고 책임을 져야 하는 하나의 상징 내지 희생양으로 보일 수 있다. 신화 속의 주인공은 언제나 어떤 과업과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 필수적인 plot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들을 라이트노벨이라고 없다고 할 수 없다. 차라리 현대사회의 인간들에게 보이는 현실에 대한 비현실의 만족이 라이트노벨이 독자에게 주는 하나의 쾌감일 것이다.

 

그런다고 모든 라이트노벨이 탈현실과 비현실로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인간관계 설정만 그렇지 시간과 공간이 현실의 이야기를 상당히 반영하는 것도 있다. 라이트노벨이 현실적인 일탈과 도피로서 나타난 이야기가 있다면 오히려 현실적인 부분과 현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보인 일본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에서는 분명 현실과의 괴리감, 이질감, 도피감이 상대했다. 현실배경이 아니거나 현실적 인물이 아니거나 현실적인 공간이라 하여도 세계관 내지 인물들이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일본 라이트노벨에서도 현실적인 상황을 제법 표현하는 것이 보인다. 그런 점들로 볼 때 이번에 내가 읽어본 그녀는 천재다는 기존 한국의 라이트노벨이 비현실적 내지 비일상적인 부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번 3번째 책을 읽다보면서 1번째, 2번째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이 작품에서 왜 윤시아란 인물이 그렇게도 강압적이면서 작은 반응에도 그렇게 하는지 말이다. 그것은 물론 단순히 주인공 평범이의 잠시 입원함에 따른 부재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보자면 평범이가 옆에 없어 라고 보기보단 인간 사회라는 집단적 무리에 대한 이질감 내지 동질감의 차이였다.

 

3번째 권을 읽다보면 평범이는 중학교2학년 때 맹장염이 걸린 일화에서 그동안 윤시아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윤시아와 평범이는 분명 3번째 권에서는 15년이 아닌 16년 친구로 나온다. 그러나 왜 이토록 윤시아가 평범이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다. 윤시아의 주변 사람들이 평범이와 만날 때 하는 이야기는 오로지 윤시아가 다루는 이야기는 평범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윤시아의 존재가 천재소녀라는 점에서 천재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보통, 일반적, 대체로 라는 단어를 지닌 인식과는 상당히 먼 언어이다. 특수하다는 것에서 오는 낯설음은 이미 1번째와 2번째 권에서 다루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나오는 것이 3권이었다. 사실 이 책에서 그녀는 천재든지 아니든지 평범이라는 남자주인공에게 윤시아는 언제가 연인으로 되어야 할 구조 즉 plot을 가지고 있다.

 

그런다고 하여 그 plot의 기본이 되는 하나의 극적 사건은 평범이가 걸린 맹장염이 아니라 그 맹장염으로 인해 학교 부재 시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들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기를 망설이는 것일까? 그녀는 천재다는 곧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기 때문에 보통 사람과 차이날 수밖에 없다. 천재들은 천재들 사이에서 인식하는 보편성이 있으나, 그 보편성은 현실 속의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성에 다가가지 못하는 점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저 머리 좋고 예쁜 여학생이 고학년으로 갈수록 너무 공부를 잘하게 되자 모든 사람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질투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질투의 대상은 여학생이 아니라 남학생들 사이까지 번진다. 남녀가 분리된 성이라고 할지어도 여학생이 학급의 반을 차지한 이상 그 반이 되는 존재들도 나머지 반에 같이 동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군중심리로 나보다 우월한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는 하나의 적개심으로 나타낸다.

 

윤시아는 분명 중학교를 좋은 중학교로 갈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 평범이를 따라 일반 중학교로 왔다. 그녀는 이미 중학교 2학년 평범이 없는 그 시기까지 이미 질투와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도 대해주지 않은 그녀에게 평범이만이 여전히 평범하게 대해주었다. 덕분에 중학교 2학년 시기에 평범이의 부재는 그녀에게 심한 따돌림을 넘어 집단적인 학교폭행까지 이어졌다.

 

아무도 말도 안 걸어주고 무시하는 것까지는 정말 양호한 편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시아의 신발 안에 압정을 넣고, 선생님이 안보면 때렸으며, 가방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게다가 여자 아이들은 화장실로 끌고 가서 강제로 교복까지 찢어 버리는 행동도 하였다>. 그들의 행동에는 일절 양심이나 윤리적 판단의식은 없다. 인간의 집단적인 심리는 자신의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따돌림을 넘어 집단 괴롭힘은 윤시아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이며 트라우마다. 1권에서도 왜 윤시아가 일탈행위를 시도 했는가에서 오직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던 최후의 방패가 평범이었다.

 

평범이는 너무 평범하고, 그런 평범함으로 윤시아에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윤시아는 평범이를 평범하지만 특별한 존재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함으로 자기를 대해주는 평범이도 지치기 마련이다. 윤시아와 평범이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는데, 윤시아는 평범이가 그저 옆에만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평범이는 그것이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윤시아가 들고 오는 책은 모두 평범이에게 어려운 책이었다. 평범이만이 아니라 모든 보통 사람들에게 난해한 도서였기 때문이다.

 

물론 윤시아에겐 그 책들은 하나의 간단하고 쉬운 것들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간단함은 자신에게 통용될 뿐이지 평범이에겐 낯설은 벽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윤시아는 평범이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런 윤시아를 바라보는 평범이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나약함에 쓴 웃음을 짓는다. 그런 평범이에게 다른 위기가 온다. 온몸이 몸살로 앓아 누울 지경에 있을 때 그가 교장에게 호출 받아 가서 윤시아가 얼마든지 좋은 대학교 심지어 세계 명문대학교에서 오라고 할 정도인데, 평범이 때문에 평범한 대학교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평범이에게 더욱 더 시련으로 오는 것은 윤시아가 자기를 따라오는 것만이 아니라 그 따라오는 문제로 윤시아가 많이 힘들어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교장은 사실 윤시아가 좋은 명문대학에 가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학교로 가주길 바란 것이다. 자신의 학교에 수재가 있는데, 그 수재가 평범한 대학에 가는 이상 자신들의 입지가 죽는다는 이유다. 이 역시 평범이가 느껴야 했던 자신 주변의 학교라는 공간이며, 그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인 만큼 오로지 이권과 명예만 탐내는 야만스런 어른들의 세계였다.

 

그런 고민의 기로 사이에 다른 천재로 통해 평범이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윤시아를 승화시키기로 한다. 이때까지 윤시아는 평범이에게 따라붙고 평범이만을 보고 살아왔다. 이제는 반대로 평범이가 윤시아를 따라가는 것을 결심했다. 평범이의 반의 반장 서유미, 그녀의 집에서 반장 동생 현석이와 꼬마천재 이유리의 대화모습을 보았다. 외우기와 연산능력만으로 세계 최고인 현석이나 그것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그에게 이유리는 현석이의 능력을 개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윤시아 때문에 고민하던 평범이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천재들은, 발전하지 못한 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면 금방 죽어버리니까요.>, 사실 천재를 다룬 소설이나 역대 내가 알던 천재적인 인간들의 삶을 보면 그런 것 같다. 가령 독일의 문학과 철학, 예술비평에 큰 업적을 남긴 발터 벤야민이라는 사람은 2차 세계 대전 독일 나치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강박관념으로 권총자살을 한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도 억압된 민족현실 속에 좌절한 이상(李箱, 1910.8.20.~1937.4.17.)이라는 문학가도 있다.

 

이상의 소설 “날개”를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박제가 되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말이다. 그는 일제총독부 치하 아래 불온사상자란 이유로 탄압을 받아 체포되다가 병보석으로 풀린 후에 병원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의 인생에서 천재적인 예술성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 죽어갔다. 그런 것은 현석이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이유리와 윤시아, 최수정은 현실 속에서 보통 사람과 다른 두뇌를 가질망정 신체구조나 외양은 모두 비슷했다.

 

그들은 처음과 다른 것이라 단지 내면의 차이로 인해 다름으로 차별을 받았다. 거기에 비해 현석이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래서 그는 살아도 죽어버린 박제처럼 살아오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이유리와 윤시아의 덕분으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보이는 것만큼 평범이에겐 하나의 고문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 박제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박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 평범이는 윤시아를 위한 이별연습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길은 최수정의 사촌에게 전화하여 그녀의 유학준비 부탁과 윤시아의 부모에게 찾아가 그녀의 유학을 설득한다. 평범이의 존재는 이미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의 방문에 윤시아의 부모님은 내딸을 주려면 5년, 즉 윤시아가 대학교 졸업 후에 준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이후 먹고 살기 어려워서 딸이 일할 수 있는 나이까지 기다려 달란 윤시아의 아버지 말에 평범이가 얼마나 윤시아에게 큰 기둥인지 다시금 확인했다.

 

떠나고 보내고 싶지 않아도 자유로운 학은 날개를 크게 벌려 나는 것이 아름다운 법이니, 닭장 속에 작은 날개를 보고 혼자 우는 평범이나, 그의 결단은 이제 자신만 바라보는 윤시아가 아니라 자신도 윤시아를 바라본다는 것을 결심하는 것이다. 그의 노력에서 가장 큰 역할은 윤시아가 자신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평범이가 윤시아의 그늘이라 생각했으나, 사실 윤시아의 그늘이 너무 깊고도 커서 그것마저 그늘인지 몰랐던 것을 말이다.

 

그는 중학교 친구 준석에게 부탁하여 윤시아를 괴롭힌 동기를 찾아내어 윤시아에게 사과하도록 했다. 중학교 시절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서인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윤시아의 가슴에 새겨진 가시를 하나 둘씩 빼도록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윤시아가 가고 싶은 곳을 향했다. 그곳은 바다. 거친 파도와 모래가 펼쳐진 넓고도 시원한 공간을 말이다.

 

이 작품에서 본 것은 생각보단 리얼리즘 요소를 많이 반영했다는 점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심지어 TV 안의 드라마에서 경제적인 관념에 대한 부재가 많은 반면 여기에 나온 평범이는 몇 개월 동안 겨우 모우고 모은 용돈을 지갑에 넣어 윤시아를 위한 데이트를 진행한다. 그리고 저녁 해변가에서 그는 드디어 윤시아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중학교 때 괴롭게 만든 사람들에게 용서받기, 고3 수능이 앞인데도 방학 때 매일매일 그녀와 보낸 시간들, 오늘 여기 바다에 데리고 와서 그녀를 위한 마지막 이별여행을 말이다.

 

평범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아버린 윤시아에겐 평범이의 이별통지는 잔인하고도 슬펐다. 눈물 한번 제대로 그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은 윤시아가 평범이 때문에 계속 흘린다. 유학가란 그 말에 눈물로 절규하며 평범이에게 내가 싫어지냐 말에 평범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윤시아를 보며 평범이의 키스는 그의 마음속 깊이 윤시아를 사랑한다는 진심을 보였다. 그런 이별의 첫사랑 친구들은 그렇게 집에 돌아오고 다음날 윤시아를 비행기로 보낸다.

 

아무리 윤시아가 평범이에게 기대된 것은 맞으나 여전히 주도권은 윤시아다. 출국 전 여자친구에게 키스 한번 해주지 않는다고 평범이를 다그치는 윤시아의 슬픈 눈에 평범이는 나중에 빚으로 받는다고 한다. 그런 평범이에게 꼭 날아오라는 윤시아, 그녀도 사실 알고 있다. 평범이는 평범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오기 너무 힘들 것이란 사실을, 그래도 그녀는 기다림을 안고 미국으로 간다.

 

보통 이런 장면이라면 보통 서사적으로 엔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엔딩이 엔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엔딩 너머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그건 2번째 권에서 평범이가 윤시아에게 실없이 고백한 장면부터 시작해서 미국으로 가는 장면까지 말이다. 윤시아는 미국으로 가도 평범이는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결단에 옳다고 하나 너무 괴로워한다. 그는 대학진로에 많은 고비를 겪는다. 심지어 담임마저 포기하라 한다. 게다가 미국 명문대학교에 간 그녀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그의 마음은 아프다. 물론 그 이야기들은 빨리 사라지기도 하나 그만큼 그의 가슴은 허전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평범이의 사투는 괴롭고도 먼 길이다. 그는 자신도 윤시아를 따라갈 것이라고 발버둥 친다. 매일 3시간도 못 잔채 9월 모의고사에 당당하게 자신도 윤시아를 따라 갈 것이라고 쓴 고배를 마신 채 말이다. 하지만 그가 9월 모의고사 당일 그는 쓰러지고 좌절을 한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윤시아의 이름만 외쳐댄다. 그의 절규는 한편으로 다른 여자의 마음을 울린다.

 

내가 보기엔 반장 서유미는 이성적으로 평범이가 싫어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저돌적으로 몸을 날리기 때문이다. 모의고사 보기 전에 쓰러진 그를 찾아온 반장에게 평범이는 반장을 윤시아와 혼동을 한다. 꿈과 현실을 이미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범이의 뺨에 차갑고 왠지 낯설지 않은 손바닥은 윤시아의 손이 아니라 반장의 손이었다. 현석이 동생을 돌보다가 반장에게 뺨을 맞은 평범이의 몸이 서유미의 손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분간했지 못했다. 단지 마지막에 들린 <미안, 남자와 키스하는 취미는 없어>라는 반장의 아쉬움과 안도심의 말에 평범이는 잠이 든다.

 

2번째 권을 보면 반장은 평범이에게 자신을 좋아하냐 말에 평범이는 물론 반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정확하게 답내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 윤시아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고 혼자 이야기하는 평범이에게 반장은 더 이상 평범이에게 미련을 둘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비오는 날에 우산이 없던 평범이에게 교실 구석에 있는 낡은 우산을 주면서 같이 가자는 평범이의 제안에 <미안, 나는 남자애랑 같이 하교하는 취미는 없어>라고 했다. 하지만 평범이가 받은 우산은 너무 낡아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 우산이었다. 아마 이 우산을 가지고 교실로 다시 반장에게 찾아갔다면 같이 하교했을 것이다.

 

평범이의 특징은 역시 평범함도 있지만, 보통 많은 남자처럼 둔한 점도 있었다. 우연히 마중 나온 이유리의 대화 속에 이유리의 안도감과 더불어 한심스럽다는 느낌이 같이 묻어져 나온 것이다. 그런 평범이기에 앞도 뒤도 볼 것도 없이 계속 윤시아에게 달려간다. 비록 모의고사에서 쓴 잔을 마셨지만, 수능당일 그는 자신을 향한 외로움을 향해 뛰어갔고, 수능 후 시험결과 평범이의 성적은 평범하지 못했다.

 

이젠 고등학교가 끝이고, 그의 수능성적은 자신을 말린 주변까지 말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닭이 닭장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닭의 날개는 날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바쁜 청춘을 보내고, 그의 얼굴에 수염이 나고 군대까지 전역한 아저씨로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이니, 윤시아와 헤어진 6년이 되었다. 그는 6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마지막 장면에서 늦었다고 토라진 것처럼 보이는 윤시아와 키스를 나눈다. 역시 아메리카에 있던 그녀일까? 6년 전 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평범이는 망설이고, 윤시아는 망설이는 평범이에게 빚을 졌다고 한다. 이제 그 빚을 갚는 장면에서 닭장 속에 있는 닭은 날개짓을 한다. 비록 그 기간은 매우 길고, 자신은 괴롭고 먼 길을 달렸어도 말이다. 마지막에 평범이는 평범이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주영재라는 이름으로 윤시아에게 불린다.

 

윤시아에게 그저 평범이는 평범이라고 불렸을 때는 자신이 평범이에게 다가간 것이나, 이제 주영재는 자신에게 평범이가 돌아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나는 이 둘의 관계를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과정을 무슨 일들로 통해 가는 것인가이다. 그 길은 재미난 이야기도 있지만, 한편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녀는 천재다라는 라이트노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서 인물 설정은 평범이 주변에 천재가 윤시아, 최수정, 서현석, 이유리 라는 4명이 있어서 어느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천재 4명이 모인다는 사실은 사실 어렵다.

 

단지 4명이 모였다는 가정 아래 시작되는 서사에서 현실 속의 대한민국의 사회 통념과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로 리얼리즘 적이라고 볼 수 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최근에 읽어본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이후로 현재 문학이 죽었다는 일본 문학비평가 및 철학자의 말에서 현대문학이 너무 영화처럼 혹은 영화를 위한 이야기로 변질되었다는 내용을 보았다.

 

어떻게 보자면 그녀는 천재다를 읽으면서 사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재보다는 실제 영화적인 속성이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한 영화, 그것은 너무 현실적이기에 비현실 속에 빠지도록 하는 하나의 장치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영화나 문학소설과 다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서사적인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렇지만 다소 아쉬운 점은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한 라이트노벨이었기에 조금 식상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과 그런 식상한 면이 있기에 충분히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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