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호세 무뇨스 그림 / 책세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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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웠다. 물론 그동안 다른 작품들을 즐기면서 새롭게 이방인을 구상할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재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재미는 더욱 특이했다. 그래픽노블이라 하여 글자 텍스트만이 아닌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소설을 보는 이에게 더욱 더 상상력을 자극하게 한 점이다. 기존에 그래픽노블보단 라이트노벨이라 하여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던 것을 읽다가 그래픽노블을 읽으니 그것과 다른 맛이 느꼈졌다.

 

프랑스 문학과 더불어 프랑스는 만화 역시 예술적이다. 만화로 보는 프랑스작품들은 아주 무거운 주제에 대해 만화라는 창으로 통해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지나가고, 그 후에 아주 사나운 폭풍처럼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일러스트를 보면서 이방인 마지막에 죽음을 달콤한 매력으로 느끼는 뫼르소의 뒤 이야기를 상상했다. 예전에 프랑스대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에 의해 죽음을 당한 당통이 생각난다.

 

당통의 죽음에서 그는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가면 그 목을 대중들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자신의 죽음을 모두에게 알리라고 했다. 마치 뫼르소의 자기의 죽음을 분노로 일그러진 대중들의 증오에서 비로소 삶의 흔적을 발견한다. 죽음 앞에 두고 삶의 흔적을 알린다는 사실이란 정말 슬픈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지난 시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순이 넘어 병으로 돌아간 뫼르소의 어머니나, 사람을 죽여 기요틴 아래 목이 날라가는 뫼르소나 죽음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왜 그는 이토록 외로우면서 외로움조차 느끼지 못한 이방인이 되었는가? 뫼르소의 과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인간이란 어느 특정 사건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마련이었다. 뫼르소는 아버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얼굴조차 모른 아버지란 점에서 그의 어머니만이 유일한 가족이다. 뫼르소는 학업을 중단한 적이 있다. 자신이 원한 꿈이나 이상은 모두 그 때 버렸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에 의해 꿈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난에 의해 포기했다.

 

왠지 그냥 보기엔 현실적 상황과 대치되는 인물, 뫼르소는 어머니를 양로원에 처음 그렇게 보내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서 며칠 동안 울었다는 점에서 뫼르소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떠나보내며, 학업의 중단처럼 뫼르소는 인생의 의미를 버렸다. 수동적인 인간, 타성에 젖은 인간, 그저 무의식적 리비도를 마리에게 뿜은 뫼르소, 결혼과 사랑은 이미 머릿속에 별개의 세상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날에 가서 무기력한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혐오감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원하지도 않아도 억지로 호들갑을 떨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진심 마음이 괴로운 할 사람이 오히려 태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는 이미 허무로 가득한 인간이고, 그 허무조차 감지할 수 없었다. 그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알았던 것은 새벽이 동트는 감옥에서 기요틴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어머니가 모든 순간에서 죽기 전에 왜 다리는 저는 남자노인과 애인처럼 지내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이 죽기 전에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한 것이다. 마지막 꺼지는 그 시간이야 말로 모든 걸 불태운다는 느낌이었을까?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항상 권태로움에 젖어 살았다. 제일 참을 수 없는 것은 타는 듯이 불타는 햇빛이다. 모든 것을 신기루로 보이게 하는 그 태양에서 뫼르소는 충동을 느꼈다.

 

그에겐 죽음이란 감각은 없었던 것은 이미 죽음이란 관념적 사유조차도 포기한 게 아닐까? 사형선고 받은 후에 성직자가 오자 뫼르소는 두려움에 떨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 앞에 성직자 위로를 받을 것이나, 뫼르소는 성직자의 상투적인 말투에 겁이 났다. 죽음보다 더 두려움 권태로움과 사람들이 만들어버린 지겨운 현실이 뫼르소에게 제일 큰 공포인 것이다.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혼자 밤하늘을 보고 소금기가 날리는 이 알제리가 더 마음이 편한 것이 인상적이다. 물론 인간에게 죽음이란 괴로운 일이다. 기요틴에 잘린 머리 그것은 어떤 것일까? 프랑스에선 기요틴이 20세기 중후반까지 통용되고 있었다. 기요틴 아래에는 짚풀로 된 것들로 갈아놓는데, 그 이유는 기요틴의 칼날이 인간의 목을 지나가는 순간 피가 뿜어 밑으로 폭포처럼 쏟아 붓기 때문이다.

 

피로 광장을 물들이는 것만큼 대중들에게 환호와 즐거움은 없다. 모든 것에 대한 악을 저기 보이는 기요틴의 성스러운 희생양이 있기 때문이다. 육중한 금속성의 소리가 ‘자르르’ 하면서 내려오다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그 소리는 유지된다. 단지 마지막 육중한 ‘퉁’ 하는 소리만이 들리고, 사형집행관들은 그 육중한 칼날을 위로 올린다. 올릴 순간에도 육중한 금속소리 역시 웅장하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사형수의 목이 바구니에 담기면서 목에서 터져 나오는 피방울에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사실 카니발이란 축제 역시 살육과 광기의 도가니에서 시작했다. 축제란 결국 살인과 향연의 만감이다. 그 축제의 장에서 모든 분노가 뫼르소의 목으로 인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도덕적 가치란 사실 그 시대적 상황의 권력이다. 인간에게 거슬릴 수 없는 사회적 강제이행 의무, 인간에겐 그저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축제란 결국 인간의 광기와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권태로운 사회에 축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만족하는 뫼르소는 권태를 파괴하기 위한 사람으로 마무리한다. 이 서적은 그런 권태로운 생활에 인식조차 못하는 뫼르소의 모습을 보여준다. 흑백 일러스트 역시 그런 점을 살리기 위한 호세 무뇨스의 느낌이다. 얼굴에 땀으로 넘치고, 담배만 피고, 자신과 유리된 뫼르소에게 오늘 날의 우리는 이방인이 아닌 척하는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 된 삶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없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는 자유로운 존재이나 살아가면서 구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구속조차도 자유라고 생각되는 시기가 되니 우리 인간이 타성에 익숙하면 할수록 우리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 간다. 아니면 사회의 굴레라는 적당주의 타성이야 말로 행복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가끔씩 스스로를 망치고 파괴하는지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해 존재감 확인이다. 타성이 짙은 세상에 자기의 존재란 그저 톱니바퀴에 불고하다. 이방인인 뫼르소가 이방인이 된 이유는 이미 이방인들로 가득한 세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건 권태로움이란 지겨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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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고장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임종석 옮김 / 제이앤씨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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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에 대해 읽어보는 바에서 그렇게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않는다. 차라리 실존적 자아 분열이라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좋을지 모르고, 인간의 이중적 인격에서 완벽함과 추함을 보인다면 차라리 일본 애니메이션이 좋을지도 모른다. 설국에서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공간에 기차를 타고 온 시마무라에서 주인공은 시마무라에게 시작되다가 작품 후반에 가면 요코와 코마코가 된다.

 

코마코는 시마무라에게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코마라는 말의 글자처럼 시마무라에게 큰 그 무엇이 없어 보인다. 작품 초반에서 끝까지 시마무라는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하다. 수동성으로 가득한 이 남성과 이 남성의 눈에 비추어진 요코아 코마코의 이야기는 설국이란 현실 안에도 환상이 있다고 여기게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것이 시마무라라는 존재에서 남자로서 남자다운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 모든 대화와 행동의 흐름이 코마코에 의해 돌아간다. 그저 그는 바라보고 기록하는 제3로서 독자에게 비추어진다. 무력한 그의 출신답게 예술을 탐닉하나, 그 예술의 지점에서 동양인이면서 서양의 세계를 추구한다. 동양적 문화를 알아가고 비로소 그 가치를 밝혀 두려고 할 때 오히려 서양적 세계로 가려고 한다.

 

시마무라는 결국 자신의 존재적 기반에 대해 부정하는 인간으로 나에게 보인다. 그런 그에게 코마코란 능동적 여자와 요코라는 헌신적 여성에서 농락 아닌 농락을 당한다. 요코가 코마코의 분신인 이유는 유키오라는 시계를 좋아하던 남자를 계속 가슴에 담았기 때문이다. 죽은 유키오를 위해 묘에 매일 참배하지만, 그 실체적 존재인 코마코는 가지 않는다. 자신의 해리적으로 바라봄으로 갔다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가지 않았다고 하는지, 인간의 이율배반적 요소는 설국이란 그 고장으로 하여금 묘한 느낌이 준다.

 

처음에 기차를 매개가 중요한데, 영화나 소설에서 기차는 이어 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이다. 철로는 그 모양이 같기 때문에 어디든 같은 공간과 시간을 흘러가기에 철도에서 환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교각이 된다. 기차를 타고온 시마무라에게 설국의 풍경은 자신의 손에 감촉이 여전한 것부터 알 수 있다. 게이샤인 코마코에 대한 아름다운 입술에서 그는 환상을 품으로 왔다.

 

그러나 정작 환상의 세계에선 이방인적인 존재에 불과한 시마무라에게 주도권이란 없다. 단지 환상의 세계의 주인공은 환상 그 자체인가? 코마코가 만든 환상적 분신 요코의 행동에서 날카롭게 보이는 그녀의 행동을 주시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자신의 숭고한 가치에서 모순이 나타난다. 코마코가 게이샤로 활동하는 이유는 유키오의 요양비 마련이었다. 그러나 유키오가 고향으로 오면서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유키오 죽음에 매달리는 요코, 유키오 죽음에 외면하는 코마코, 지난 과거 그녀의 일기장에 유키오란 이름이 제일 앞에 있음에도 그것을 부정한다.

 

하지만 자신이 부정하는 요코에서는 그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는 그리고 유키고의 죽음과 동시에 시마무라에게 코마코에게 잘 해달라고 한다. 자신의 원체에게 육체적 교감보단 정신적 사랑을 요구하는 요코의 입장에선 자신의 인생에서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의지가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시마무라는 수동적이다. 도쿄가 현실이고, 설국에서 환상의 세계이고, 환상이 가득한 자신 역시 사라질 환상적 존재인듯 하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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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 - A Life - 고요한 밤의 빛이 된 여인
도로시 허먼 지음, 이수영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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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정치철학자로는 미국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즈다. 그의 자유주의는 포괄적인 자유주의가 아니라 정치적 혹은 민주적 자유주의다. 그것은 자신만의 자유를 위해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삶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진실한 정의란 힘이라는 도덕적 권력보다는 최소수혜자에 대한 지원에 대한 일반적 삶의 구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최소수혜자의 존재적 가치는 너무 미약하다. 오히려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 지금이나 옛날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의문에서 조금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최소수혜자에게 단지 생활의 보장이 아니라 일반인들과 같이 똑같은 선에서 달릴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는 의미다. 그것이 진정한 평등이고 그 평등이 있어야 자유라는 것이 존재한다. 당장 내일 아침을 먹지 못하거나 오늘 밤에 잠을 잘 곳이 없으면 이들에게 자유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단 한 명이라도 고통 받는 세상이라면 절대로 철학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어느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 있다. 인간에게 특히 우리 같은 일반 소시민들에게 그런 말은 하늘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다. 조각배 자체가 하늘에 뜰 수 없으며, 뜬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가끔 기적이나 행운을 바라는 것에서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자신은 스스로 되지를 않으나 뒤에서 쉽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희생이란 것은 값진 것일까?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헬렌 켈러가 남긴 문구는 너무 보편적 진리다. “우리는 언제 알게 될 것인가? 너와 내가 모두 이어져 있다는 걸, 우리가 모두 한 몸뚱이를 이루고 있다는 걸. 인종, 피부색,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정신이 세상을 채우는 그날, 사회 정의가 이루어진다.”

 

정의라는 것은 정말 단순하다. 헬렌 켈러가 말한 저 문구처럼 상대방과의 다름을 다르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방이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보고 배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어둠에 가려져 희망을 버린 채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헬렌 켈러는 사랑하고자 했다. 그녀는 성녀이기 위해 성녀가 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에서 우려 나온 이상적 가치였다. 듣고 보지 못하고 말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함이기에 더 촉각, 미각, 후각, 육감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상상력의 세계에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행위는 미국을 지나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통령이든 왕이든 심지어 일반 국민이나 길가에 뛰어 노는 아이들까지도 말이다. 그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헬렌 켈러라는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라고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장애와 더불어 타인과 세상의 불통은 그녀를 하여금 외로움과 난폭함에 젖게 만들었다.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현실, 그런 절망에서 앤 설리번의 등장은 절대적인 변화였다.

 

앤 셜리번이란 헬렌 켈러에게 말하여 인생 그 무엇과 바꿀 수도 바꾸지도 못할 존재다. 세상의 단절 그리고 인내심으로 태어난 헬렌 켈러의 사회화, 단지 안타까운 것은 앤 설리번이 순수한 마음으로 헬렌 켈러를 대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자신의 가난과 지난날의 고통과 상처를 뛰어넘기 위해 앤은 몸부림을 친 것이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결국 동생과 고아원에 맡겨진 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나마 삶의 위안이던 동생마저 병으로 죽자 앤의 인생은 파탄을 맞은 것처럼 보였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아 수술과 치료를 통해 겨우 볼 수 있던 앤, 그녀는 헬렌이 있는 남부까지 오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그래도 그녀는 헬렌과 만나 헬렌으로 통해 세상을 배웠고, 그리고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느꼈다. 나는 장애를 안고 있던 그녀들이 가진 뜨거운 욕망에 놀랐다. 앤은 존 메이시라는 연하의 지식인과 결혼했고, 헬렌 역시 자신을 흠모하던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하려고 했다. 장애인이란 이유로 사랑조차 허락하지 않은 사회적 통념과 가족들의 억압에서 헬렌의 성적 욕망이 제일 인간다워 보였다. 하지만 결국 앤과 가족에 의해 무산되었고, 그녀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결혼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들 성인으로서 바라본 헬렌의 모습에서 저렇게 여성의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균형 잡힌 몸매에 푸른색으로 된 인조 안구로서 사람들을 대해주길 바란 것이다. 헬렌에게 가장 큰 속박은 세상도 그렇지만 주변 인물이었다. 자신을 세상에 내보내 준 것은 분명 앤, 폴리, 넬라 였으나, 세상 사람과의 대화를 막은 것도 이들이었다. 헬렌이 보여준 기적은 모든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이들은 헬렌을 통해 성공과 부를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자기에게 가장 좋은 후원자였으나 차후에 가장 그녀와 앤을 공격하던 에너그노스와 그가 퍼킨스학교는 헬렌을 인간으로 대하기보단 오히려 하나의 도구로 대했다. 헬렌으로 통해 얻어질 명성은 행운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사실 앤이 한 노고였다. 단지 퍼킨스학교에 머문 점에서 모든 것을 공치사하려는 이들에게 헬렌의 인생에서 역정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가 작문한 글이 다른 작가의 글이란 점에서 맹비난을 받은 헬렌에게 생각해보면 그런 모방이라도 장애를 가진 자가 그것을 과거에 읽고 기억했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를 공격하기 바빴다. 헬렌 켈렌이 성녀로서 살아온 만큼 그녀는 뜨거운 투쟁을 하였다. 헬렌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성도 중시했다. 1917년 2월과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헬렌은 열렬히 러시아혁명을 지지했다. 심지어 자신은 마르크스와 레닌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당시 FBI의 국장인 에드가 후버에게 감시를 받았으나, 헬렌은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아무런 단서를 주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단서를 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도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된 사람보다 그곳에도 인간의 이성이 있는 즉 휴머니즘을 찾는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헬렌에게 중요한 건 사상과 국경이 아니었다. 고통 받는 자들의 안식과 평온이었다. 록펠러나 카네기와 같은 대부호들이 미국의 대자본으로 성장할 때 헬렌은 이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가난한 자들을 옹호했다. 모두 흑인들에 대해 경멸하고 무시할 때도 흑인들도 인간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헬렌은 천사인 동시에 때로는 피하고 싶은 존재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없어도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용기였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있는 의지를 외치는 그녀에게 가녀린 육체이나 그 정신은 그 누구보다 강했다. 단지 그녀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지원을 해주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과 생활의 안위를 바라는 사람들이 괴로워지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헬렌 역시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경제적 관념이 없었기에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기심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헬렌은 가난하고 단아한 이미지만 강조하는 것에서 지난 호사스럽고 부유한 것도 같이 받아들였다. 옆에 있던 코디네이터 폴리의 입장에서 매우 불쾌하겠지만, 헬렌은 주는 것만큼 받는 것을 정성스레 간직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이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개를 좋아한 만큼 개를 사는 것에 대한 비용과 기르는 비용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헬렌과 주변사람들은 경제적 관념이 없기에 이기심은 없으나 없는 만큼 현실적 상황에 대응이 느렸다.

 

모든 일에서 좋은 일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때에 따라서는 난제가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특이한 점은 자신이 원하거나 혹은 우연히 들어온 물품들이 화재나 사고로 사라져도 그것에 연연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앤의 이혼한 남편인 존이 집을 불태워 모든 것을 날리는 순간조차 말이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그녀가 욕심보단 차분한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진정 강한 정신은 그런 대담한 모습인가? 그런다고 시위에 참가하여 죽어가는 노동자의 모습에서는 상처를 받는 헬렌에서 강함은 약함에 대한 포용임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세상이 빛이 된 이유는 그녀 자신은 분명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가 빛이라고 여긴 것은 어둠 속에서 보통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과 그 불굴의 의지였다. 헬렌은 그런 자신의 업적에서 모든 것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까지 그 자비의 손길을 뻗으려 했다. 장애를 가진 이유로 차별 받는 부당하며 오히려 이들을 일반인들과 같이 살게 해주려고 했다. 그런 모습을 그녀를 성녀를 만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헬렌의 기적 같은 모습과 그 외모에 비중을 높였다.

 

그녀가 원한 여성들의 참정권 내지 보수적인 기독교에서 출산제한 조치를 거부한 것을 문제를 삼았다. 21세기에서 당연한 것이 20세기에는 당연하지 않았다. 헬렌은 모든 것이 거부당한 것 같은 세상에서 자신의 세계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강한 정신만큼 앤, 폴리의 죽음을 지켜 볼 때는 마음이 힘들었다. 특히 아버지의 죽음에서 자신을 초대하지 않은 가족들의 사연에서는 매우 애통한 심정을 내비추었다. 그녀가 행복한 인생이냐고 물어보면 헬렌은 그렇다고 할 것이다. 단지 그 길은 평탄하지 못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어둡고 침묵에 갇힌 세계에 자신이 있었기에 가시밭길을 넘어 모두의 마음을 열어주는 인생을 걸었고, 뜨거운 가슴이 있었기에 고요한 진리를 모두의 가슴을 다시 뜨겁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일구어 놓은 자리에 많은 장애인들이 자신의 꿈과 미래를 열어갈 수 있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는 숙제가 많다. 언제인가? 국내 무슨 국제 행사를 열리는데, 거리에 있는 장애인들을 모두 강제로 보이지 않게 했다고 한다. 단지 세계 정상들이 보고 좋지 못한 인상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이것을 본 헬렌 켈러라면 아마 눈물을 흘릴 것이다. 헬렌이 진정 바라는 것은 이들이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관용과 배려의 미덕이 살아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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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현 - 조선 최고 어의가 된 마의
장웅진 지음 / 황금책방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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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전쟁 수단에서 차량을 이용한 수송이나 이동수단이 없는 경우에는 당연히 제일 중요한 이동 및 수송수단은 말이었다. 물론 수송은 당나귀나 노새 그리고 소가 좋았으나 긴급을 요하는 수송에서는 말을 제외할 수 없는 것이다. 군에 있을 때 생각나던 부분이 있는데, 전쟁에서 화학전을 벌이는 이유는 바로 인마(人馬)를 살상(殺傷)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말의 기동력은 1차 세계대전에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아직 장갑차들의 발전 수준이 미미했으며, 숲이나 산과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 말의 사용은 필수적이다.

 

현대전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기계기술의 발달은 말이 전쟁터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20세기 초반까지는 분명히 전략수단으로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으며, 그것이 시간이 과거로 가면 갈수록 더 위력을 발휘했다. 말이 가진 기동력은 인간의 발과 비교할 수 없으며, 말의 발굽에 짓밟혀 죽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현대사회 이전의 전쟁에서 말은 곧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략적인 영역이었다. <마의 백광현>에서 백광현은 인간을 치료하는 의술이 아닌 말을 치료하는 의술을 배운다.

 

모든 생물에서 발생되나 특히 인간에게 곤란한 것이 종기라는 것이다. 상처가 나면 피부조직이 곪아 그것이 심한 통증과 함께 때로는 신체에 큰 부담을 주어 사망하게 이른다. 과거 조선의 왕을 보면 종기로 인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외에도 상처를 입은 후에 종기가 터져 죽었다는 사료도 존재한다. 전염병에 대한 대처방안이 약하던 시절에 잠깐 스친 상처도 죽음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상처는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게도 존재했다. 백광현을 따지고 보면 지금에 와서 수의사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수의사들을 보자면 집에 강아지를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의사에 대해 매우 존경의 눈빛으로 볼 것이다. 사랑하는 강아지의 재롱을 볼 수 없다는 게 심리적으로 크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말을 치료하는 자에 대해 백정만큼 천하게 여겼다. 인간을 고치는 의원도 중인이나 하는 짓으로 봤으니 말을 고치는 일은 얼마나 소홀하게 여겼을까?

 

그런 마의를 선택한 백광현이 이제 말이 아닌 인간을 고친다? 그것은 상당한 방향을 일으킬 사건이었다. 말의 종기를 고치다 인간의 종기를 고쳐보다가 실수로 죽게 되자 그가 고된 일을 보면서 염라대왕이 의원들이 살려준 인간만큼은 아니나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 보였다. 시대적으로 임진왜란 지난 후에 한참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니 전국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민심은 흉흉하고 위정자들은 당파싸움에 하루가 조용할 틈이 없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현상은 역시 예송논쟁, 효종이 죽은 후에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된 두 차례의 예법에 관한 논쟁으로 붕당정치의 피로서 서로 복수하는 정치싸움이었다. 물론 임진왜란 전에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다투던 것도 있으나 남인과 서인의 당쟁은 수백년을 거쳐 내려오고, 정조의 죽음으로 서인의 승리하였으나,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야 했다. 덕분에 정치가들은 국정에 대한 심의나 판단보단 정치적 이익과 패권을 위한 당쟁에 참여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 책에서 그런 점이 백광현은 인술로서 어의를 맡으려 하나, 그것을 시샘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의 어머니를 치료하는데, 모든 의원들이 자기에게 내려진 처벌이 무서워 몸을 사리고 있을 때, 궁중 마의인 백광현에게 종기치료를 잘 한다는 이유로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만약 실수로 대왕의 어마마마가 승하하면 그의 목이 다른 의원들의 목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토록 간사한 것일까? 대왕대비의 종기를 짜내고 무사히 치료하자 이번에는 다른 의원과 대신들이 모함한다.

 

대왕대비의 고통스런 치료과정을 보고 치료를 그만두란 어명을 거역하고 치료하자, 아무리 결과는 좋아도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권이 흔들리니 엄중의 처벌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분명히 치료의 완결은 백광현이나 임금의 은총은 이상하게 다른 자에게도 돌아갔다.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시샘의 눈빛이 도사린 것이다. 인간에게 정치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꼭 해야 할 의무와 도리를 지키기보단 자신의 이권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합심하는 당시 실료들을 보면 지금의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임금은 나라의 임금이 아니라 신하들 속의 임금이었다. 신하들의 눈빛에 동조하지 않으면 어느 날 독살되거나 혹은 반정이 이루어진다. 인조반정에 광해군에게 명에 대한 충성에 반발한 그들이 이제는 청에 대한 충성에 의해 효종의 죽음과 소현세자의 죽음이 의문스럽다고 하니 그 얼마나 무서우랴? 백광현이 초로를 지나 이제 중늙은이가 될 때, 집에 귀가 중에 자객이 와서 자신들이 고용한 의원의 사주로 잔혹하게 살해할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질투는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 자세를 망각한다.

 

백광현이란 인물은 그런 정치세계와 사회의 비극 속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않은 인물이다. 일찍이 백광현의 아버지 백의원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려도 정작 자기 마누라와 딸을 살리지 못한 채 도망치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마의 백광현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도 역시 무시하지 못하고, 그런 갈등과 관련하여 신분제의 한계성에 탄식한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압록강 근방에서 몇 년이나 있어야 했던 홍단이의 아들이나, 중인출신으로 손가락질을 받다가 임금의 어의가 되어 겨우 인정받지만 직급 역시 높지 않은 백광현에서 능력 있다고 다 되지 않은 사회란 정말이지 답답하기 짝이 없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은 자기 자식을 잡아먹고, 현실과 맞지 않은 법과 제도들은 여전히 구중궁궐 높은 분들의 뱃속은 불리되, 저잣거리에선 사람들이 굶어죽는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가 나오더라도 무서운 가렴주구 앞에서 무용지물이어라. 어느 아낙네가 3개 무덤 앞에서 우는데, 모두 호랑이에게 먹혔다는 것이다. 시아비, 지아비, 아들 그러나 정작 호랑이 없는 곳에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관리들이란 점에서 왠지 모르게 다산 정약용이 늘 지적한 이야기가 다시 내 기억 속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남아메리카의 혁명가이던 체 게바라가 젊은 시절 자신의 사촌 형과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한다. 2사람은 본래 의과대학을 다니던 학생이었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남미의 현실을 보면서 사람을 고치는 의사보단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세상을 고치는 것에는 자신의 미약한 힘에서 아무 것도 될 수 없었고, 결국 총을 잡아야 했다. 백광현은 조선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환자를 고치는 것보단 그 고칠 수 있는 사람을 고쳐야 했다.

 

권력에 비틀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다시 권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구조에서 마의 백광현이 보여주고자 하는 정치적 입장은 당파를 초월한 인간중심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인간중심적인 발언은 백광현이 대왕대비의 병을 낳게 하면서도 백광현 집에 물품들이 선물 온 것을 가지고 트집만 잡던 백관들의 한 소리가 생각난다. 비겁한 자들은 평소에 백성을 위한 게 아니라 꼭 시기적 상황에서 외치니 참 이런 모습을 보면서 혀를 끌끌 하며 차는 내 자신의 아쉬움만 더해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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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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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언제나 뭔가 반드시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그 강박관념은 우리에게 마치 편집증 환자처럼 자신의 심리를 날카롭게 만든다. 그런 날카로운 자신에게서 탈출하는 것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난감한 일이다. <악기들의 도서관>에서 그런 현실에서 여러 가지 소재를 8가지 이야기로 나눈다. 다 소개하기는 그러하나 1번째 이야기인 자동피아노, 우리는 음악이란 매체를 어떻게 여기는가? 솔직히 말하여 음악에서 답답한 클래식도 피곤하고, 섹시한 여자들이 섹시한 옷과 섹시한 포즈로 섹시한 가사를 보는 것도 지겹다.

 

그냥 섹시한 매력을 보고 싶다면 미스 유니버스에 나오는 후보들의 비키니 수영복을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포즈도 잡아주고 예쁘게 미소 지어주니 얼마나 훈훈한가?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각본과 연출이 필요하니 말이다. 어째든 자동피아노에서 우리는 소리에 대해 어떻게 여기는가에서 중요한 부분이 있다. 본문에서 “음악은 단순히 소리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콘서트홀에서의 음악은 피아니스트의 동작, 손끝의 움직임, 발놀림, 표정, 관객들의 헛기침 소리, 박수소리가 피아노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소리로만 이루어지기 위해 어느 죽음을 앞둔 피아니스트는 절대로 공연장에서 공연하지 않고 음반 속에 피아노소리만 존재했다. 그의 라이브는 전화기 너머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음악소리야 말로 정말 진실했다. 모든 것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단지 나의 음악적 성향은 혼자 조용히 듣는 것도 좋으나 모두 같이 즐기는 것이다. 예전에 락콘서트에 가면 밴드보컬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공연 보러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오늘 공연은 관객은 없어요. 오늘 공연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는 겁니다. 자 그럼 준비되었나요? 모두 목이 터져 내일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르는 겁니다.”

 

내가 바란 음악은 저런 것이다. 관객이 관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의 또 다른 연주자로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얼마나 근엄하게 딱딱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이런 비슷한 일화는 엇박자 D의 이야기다. D는 매우 엉뚱하다. 합창부를 들어간 이유는 다른 사람과 동기가 다르다. 그는 진짜 노래를 하고 싶었다. 이에 반해 다른 학생들은 자습하여 공부하거나 졸거나 혹은 딴 짓을 한다. 오직 D만이 열정적으로 처음부터 합창부의 단장이 되겠다고 자진하고, 곡은 무엇이며 그 외 여러 가지로 의욕적 활동을 했다.

 

하지만 막상 합창부가 학교축제 1개월 전부터 연습했지만, 거기서 가장 못한 사람은 D이었다. 그만이 엇박자이었다. 우리는 엇박자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 그저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관념 아래 조금이라도 틀리면 배제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개성이란 무엇인가? 20년 훌쩍 지난 후에 40살의 주인공이 D를 보자, 그의 공연에 대한 기획에 참여한다. 마지막에 학교에서 부른 그 곡, D가 학교선생에게 뺨을 얻어맞고 거기다가 비참하게 끝이 나버린 그 곡을 엇박자로 된 상태로 나온다.

 

단지 엇박자가 20명 중에 1명이 아니라 모두가 엇박자였다. 오히려 그것은 조화로운 사운드로서 관객에게 선율을 제공했다. 엇박자가 서로 모여 화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조화로운 세상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에 놓이기를 바라는 사회적 통념일까? 그런 지루함에서 탈피하기 위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면 2사람의 미취업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매번 입사시험에 떨어지는 그들, 엉뚱한 행동에 모두 어이없어 한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최후의 아방가르드인 상황주의자의 행동들을 따라하는 듯한 느낌이다.

 

면접 중에 실타래를 풀고, 마술쇼를 하고, 온갖 잡동사니 짓을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매번 쓴맛의 불합격과 그 뒤를 찾아오는 술맛만 맛볼 뿐이다. 이들이 우연히 실타래를 제대로 풀지 못해 지하철 안에서 실타래를 풀어보자고 했다. 우연히 신문기사에 뜨고 이들은 성공한다. 그 일이란 면접관을 맡는 것인데, 그것 역시 하나의 지루한 단계가 되었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원하는 것을 이루면 결국 권태로움이 된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어릴 때 나의 꿈은 대통령이나 우주비행사 같이 스케일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면 충분히 할 만하다. 하지만 하고 나면 어떻게 해?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이 가뿐 현실에 허우적대는 나로서는 알기란 어렵다. 단지 뭔가 이룬다면 다음 목표가 생기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그 자리에 만족할 수 없다. 그냥 만족하고 있다고 여겨질 뿐이지. 본래의 원한 목적은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항상 옆에 있어도 찾을 수 없다. 현실의 조건과 위기, 그 모든 것이 나의 벽일지 모른다. 거기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인가? 무방향 버스에서 사라진 어머니는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간 것인가?

 

일상 속에 가려진 나의 모습에 지친 것은 아닌가? 진정한 내가 찾으려 한 맛깔 나는 느낌이란 무엇인가? 무지개가 7개고, 음도 7개다. 세상은 소리로 이루어진 무지개처럼 조화로움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색이고 소리다. 우리는 자연적인 색과 소리를 찾았는가? 아니면 디제이가 억지로 끼워 맞추어 넣은 것처럼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말이다. 작가가 초반부터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완벽한 것은 없고 계속 변화하는 점, 소멸에서의 미를 찾아가는 것 같다.

 

시작도 끝도 없기에 지금도 시작인가? 끝인가? 이 소설에서 특이한 구성은 남자 2명이다. 심사위원의 평도 그러하나 남자 두 명의 관계이다. 남자는 항상 현실에서 뭔가 충분한 삶을 살기보단 부족하거나 미흡한 존재다. 죽기 전의 남자, 실직자, 미취업자, 교통사고자, 가족이 행방불명, 불법음반복제자 등을 보면 말이다. 항상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자들이 남자와 남자라는 관계 속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심사평처럼 여성은 없다. 있다면 헤어진 여자 친구와 행방불명된 어머니나 그리고 친누나다.

 

그러나 헤어진 여자 친구처럼 관계가 소멸되고, 행방이 불명하기에 소멸된 존재란 점, 친누나가 결혼한 여성이란 점에서 이 역시 배제할 수 있는 여성이 형성된다. 그런다고 남성우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에 오면서 남성들은 오히려 꿈이 커지기보단 작아지고 사라져간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나 남성들에게 로망이란 것이 있다. 단순히 연애나 부와 권력을 떠나 그 자체로서 자신이 원하는 세계가 있다는 점이다. 단지 이번 도서의 작가인 김중혁씨는 스토리전개를 음악에 맞추었다. 혹시 아니라면 인간이 스스로 살아있는 그 자체에서 예술이 되어보자는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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