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 왜곡에 대한 비판
폴 르블랑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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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책의 비판이 되는 로버트 서비스의 <트로츠키>를 읽고 있지만, 예전에 읽은 스티븐 스미스의 <러시아혁명(1917년에서 네프까지)>를 읽다보면 로버트 서비스의 책이 참으로 제대로 쓰여졌다고 생각할 수 없다. 스탈린과 거의 동급이란 설정자체가 다소 치킨인듯, 나중에 한 번 요 책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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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2014-05-1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버트 서비스는 좌파에 대한 악의적 왜곡과 공격을 업으로 삼고 있는 우파 자유주의 저술가입니다. 그의 책 <코뮤니스트>를 읽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날 지경이죠. 아마도 '공정성'이란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저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와 비슷한, 아니 이보다 더 심한 저자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폴 존슨이죠)

만화애니비평 2014-05-13 13:47   좋아요 0 | URL
따악 하고 동물농장 흰색돼지인 스노볼이군요. 끝과 처음만 읽어보니 악의적인 책이라고 생각만 들더군요. 마르크스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책들을 읽다보니 이것은 무슨 러시아혁명을 알로 보는 기분이더군요.
트로츠키가 스탈린과 같다는 말에서 웃음이 나오더군요. 물론 트로츠키가 성격이 거만하고 인하무인격인 것은 알지만, 최소한 자신의 이기심으로 움직이지 않은 사람인데, 너무 비하하니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요
 
변호인
양우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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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유명한 철학가이며 사상가인 토크빌은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이란 도서를 내었다. 그 책은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원인과 근본을 찾은 책이며, 앙시앵레짐이란 이름에 대한 구체제의 모순을 지적했다. 구체제가 모순인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영주지배력이 소멸하고, 점차 프랑스가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국가예산이 부족하고, 지방의 농민이나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며, 도시에 몰려도 도저히 국가적인 가난은 해결되지 않은 점이다. 이에 대한 루이16세는 온갖 노력은 기울이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디찬 날카로운 단두대의 진한 키스였다. 키스가 너무 깊고 깊어 그의 입이 아닌 목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지고, 목은 광장의 군중에게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략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는가? 루이16세는 심약한 왕이나, 악랄한 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백성의 가난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가엽게 생각했으나, 자신의 조롱거리 중에 하나인 장 자크 루소의 소문을 듣고 웃었지만, 장 자크 루소의 서적 <에밀>이란 영향으로 루이16세는 열쇠와 자물쇠를 만드는 것이 취미였다. 그리고 그 사치가 심하여 나라의 살림을 휘청하게 만든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전의 작은 밭은 가꾸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부가 노력해도 왕 자체가 나라를 바꾸기가 어려웠다. 이미 군주정은 자신의 지배력이 미쳐도, 그 지배력이 미치는 곳에서 모두 다 동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루이16세의 목은 사라졌고, 그 후에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목도 사라졌다. 이렇게 민주주의 역사에서 세계적으로 첫 문을 두드린 프랑스대혁명은 매우 잔혹하게도 사라져 버렸다. 그런다고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영향은 전 유럽으로 퍼졌고, 오늘날 세계가 자유주의 내지 민주주의라는 헌법국가로 된 것도 루소와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이 컸다. 그런 흐름은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아니 우리나라도 1948년 제헌절을 맞이하여 정식적인 헌법이 정립되었고, 헌법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정부의 전신으로 보았다.

 

헌법이 존재하는 곳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민주주의의 주인과 권리는 모두 국민이다. 대한민국 헌법 조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 제1의 법이고, 제일 높은 법이며, 그 누구도 건들 수가 없는 신성한 법이 바로 헌법이다. 헌법을 보면 어디를 봐도 국민이 주인이고, 국민이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 대한민국 법률의 으뜸이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아주 비극적인 일에 말렸을 때 이 책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과연 헌법을 수호하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의문을 품었다. 헌법을 보면 국민만이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인류공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진리이고 철학인데,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는 게 이상한 존재로 되는 것이다.

 

철학사상적으로 헌법을 수호하는 것이 보수주의 철학이나, 보수주의 철학이 없는 보수주의는 자신의 이름을 버린 것과 같다. 가령 미국 링컨 대통령이 흑인을 백인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조치한 것은 남북전쟁 역시 있으나, 그가 하려던 과업이 미합중국의 건국이념과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초대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미합중국에 대한 자유롭고 평등이 존재하며, 그 누구에 의해 자신들의 주권을 침해받지 못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체계를 만들었다. 그래서 어떠한 부당한 불평등 내지 부당함을 강요할 수도 혹은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미합중국의 국민이라면 부여해야 했다. 천부인권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나 흑인인신매매가 시작되고, 가혹한 노동착취와 인종차별이 이루어졌다.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은총과 평화를 내리기 바라는데, 정작 그들은 신의 은총과 평화 대신 몽둥이와 채찍으로 선사했다. 그런데도 자기끼리 모이면 은총과 평화라는 헛소리를 내뱉는다. 링컨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보수적이라 보며, 그의 당은 현재 미국에 존재하는 공화당이다. 그런데 그의 공화당은 보수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의 건국이념, 즉 미합중국의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보수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헌법의 가치처럼 국가는 3가지의 기관으로 나눌 수 있다. 입법, 행정, 사법으로 말이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국가는 3가지로 나누며, 그것은 서로의 권력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그 견제로서 독재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한다. 3권 분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입법이라고 한다. 입법이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모든 근본적인 법적인 근거와 그 근거로 통해 자국민과 세계적인 평화와 번영을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들의 이익과 가치를 위해 상대방의 가치와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인간이 아니라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정신을 파괴하는 반국가적인 존재다.

 

웃기지만, 우리는 그런 헌법파괴자가 도리어 큰 소리를 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도 있고, 과거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떤 국회의원 자제가 한 말이 생각난다. 국민의 니즈(Needs)를 만족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말은 분명 사실이다. 국가라는 커다란 조직이 국민 하나 소수에 대해 모두 만족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 소수 하나 하나가 모인 것이 국가라는 것이고, 그들을 당장 만족하지 않더라도, 만족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헌법의 규정처럼 그들에게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기한 것처럼 인간에게 superego(초자아)와 id(무의식) 사이에서 ego(자아)가 나온다. 그 국회의원은 평소에 아마 대중매체로 통해 superego를 보여주었다면, 대중매체가 은폐된 그들만의 공간에서는 id로서 살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id적인 발언을 할 경우 어떻게 될까?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비난이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런 id라는 무의식적인 솔직함이 아들의 입에서 나왔고, 그 아버지라는 분은 대국민 사과를 했으나, 그 실상의 뿌리는 결국 누구인가? 이래저래 다시 생각해본다면 그 아들의 발언은 개인의 신념과 자유에 대해 권리가 있었다. 단지 권리만 생각했을 뿐, 그 자유와 권리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왜 이렇게 생각나는 것일까? 자유주의 철학사상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은 무척 크다. 자유주의 철학과 통칭 자유주의를 말하는 사람의 간극에서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는 서로 상극이 되는 코미디로 보여준다. 더 코미디인 이유는 대한민국은 대학생이 되면 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선거권에 대한 권리는 바로 정치제에 대한 권리로서 이어진다. 정치제에 대한 권리를 이제 막 가지거나 혹은 가질 수 있는 단계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 발언의 권리는 존중한다. 단지 책임의 대가는 무거울 뿐이다.

 

아마 프랑스대혁명의 불을 붙인 볼테르의 말처럼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이다.”에서 생각하면 그렇다. 이제 그의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그 말을 했다. 하지만 국민의 민심은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토크빌의 <앙시앵레짐과 프랑스혁명>에서 이런 유명한 문구가 나온다. “민주주의는 가장 전체주의가 되기 싶은 체제이다.”로 말이다. 사실 프랑스대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실행하고, 그 뒤에 나폴레옹과 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프랑스를 민주정이 아닌 군주정으로 만들었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미개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프랑스란 나라는 세계적으로 철학과 예술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 되었다. 세계적인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프랑스에서 배출하고, 프랑스가 가진 문화유산은 그 어떤 나라보다 찬란하고 위대하다. 그 미개한 인간들이 처음에는 갈 길을 잃고 방황하여 계속 미로에 갇힐지도 모른다. 그 미개함에서 자신들이 있는 자리는 결국 미개한 인간들에 의해 존재한 것이다. 미개한 인간들의 대표로서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상식과 지식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면 나는 상식보다는 지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상식은 편한 데로 생각하고, 어려운 부분은 제외하려는 인간의 나태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지식을 생산하여, 그 지식을 독점하면 권력의 중심에 있게 된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대중들은 기피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모른 채 당할 수밖에 없다. 지식의 권력화에 대항하는 것은 지식인 점에서 지식과 권력은 모순된 관계로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읽은 소설이 지식과 권력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더 나아가 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해 논하게 되는 작품이다. 2014년 1,100만 명의 관객 수를 돌파한 영화 <변호인>이 다시 소설 <변호인>으로 다가왔다. 영화를 보면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 그런 질문을 받거나 고민해야 한다면 참으로 답답하다.

 

헌법을 수호하고, 헌법의 정신으로 변호인이 법정 앞에서 서는 것은 헌법의 정신을 수호하는 보수주의 철학이다. 링컨이 조지 워싱턴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당시 공화당이 추구한 헌법정신이다. 헌법정신을 지키고, 헌법에 명시된 발언을 하는 것이 틀렸다고 한다면 도대체 반국가인사는 누구로 되어야 하는가? 물론 행정부의 권력이 사법부를 휘어잡고, 입법부까지 통제되면 그 나라는 더 이상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국가이고, 그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천국일 뿐이다.

 

소설 <변호인>은 현존의 인물과 사건은 각색하여 새롭게 작품이다. 현대소설이나 영화에서 배고픈 과거와 배를 주리면서 힘들게 살던 서민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재는 좀처럼 없다. 한국영화를 보면 대부분 조폭 내지 느와르, 코믹섹시 내지 멜로물일까? 별로 알고 싶지 않거나 또는 별로 떠오르기 싫은 이야기를 이 영화와 소설에서 다룬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아니 소설 <변호인>은 많은 이야기와 생각을 준다. 변호인의 무대가 되던 1980년대의 부산, 그곳은 분명 내가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직 나이가 어려 국민학교(國民學校)라는 곳을 막 다니기 시작한 시절이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송변이 최루탄을 먹던 시기다. 공안정국이던 시절에 멋도 모른 어린 나이의 나는 어른들로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다. 잘못하면 끌려가서 개죽듯이 맞고 병신으로 된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죽음이라는 생물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즉 죽음이란 관념이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본능적으로 죽는 것에 대해 느끼나 죽는다는 의미 자체는 모른다. 그런데 죄 없는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구타와 폭행에 시달리고,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까지 한다.

 

1987년 1월 박종철 서울대학교 학생이 형사의 심문 중에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는 소리에 죽었다. 아마 이런 형사가 존재했다면 바로 특수공작부대로 투입되어 내공으로 장풍을 쏘아 북한의 군부수뇌를 제압하면 정말 북한은 붕괴할지도 몰라, 북한 내의 쿠데타가 일어나 대박의 통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해본다. 하지만 장풍을 쏘는 것이 가능한지 다시 알아봐도 그것은 거짓말로 탄로 났다. 조금 아쉽겠지만, 박종철 학생은 고문으로 죽은 것이다. 그는 어떤 이적행위도 하지도 않았고, 증거도 없었으나, 이른바 헌법 제12조에서 금지한 고문이란 것을 받아 그래 된 것이다.

 

헌법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다. 그런데 국가의 녹록을 먹는 자가 국가보다 위에 있는 국민을 잡아 폭행과 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날에 가진 역사고 현실이다. 역사라는 과거의 시간이나, 현실은 지금의 공간적인 상황이지만, 그 무섭고도 차가운 비극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 대법원 판결에 의해 억울하게 고문당하고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 무죄선언이 된 것을 보았다. 사법사형의 불법성이 헌법의 가치 아래 부당함이 제기되었으나, 그렇게 당한 사람은 여전히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헌법이 국민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는데, 헌법의 이름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참 궁금하다.

 

소설 <변호인>은 영화 <변호인>처럼 속물 변호사가 우연히 자신이 즐겨가던 국밥집 가게아들이 부당한 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보고 속물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모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조금 가슴이 저리는 이유는 인권 변호사란 말은 너무 잘못되었던 것이다. 법의 정신은 원래 약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변호사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변호하나, 그 변호 자체도 인권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인권을 위해 존재해야 하나 인권 변호사만이 인권을 존중한다. 그 나머지 변호사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여전히 그렇지만 <변호인>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되는 부분은 페이지 177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 아들 건우, 연우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브레이크 안 걸리는 세상에서 살게 할라고예, 사무장님 아들 병국이도 이런 세상에 살게 하모 안 된지요.”이다. 자신에게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참을 수 있지만, 자신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지켜줘야 한다. 그런데 지키는 것 자체가 어렵고, 그것이 틀린 것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예전에 읽은 도서 중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내용이 생각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중국에서 독립운동 하시다가 일본군에 잡히어 감옥에서 고문과 병으로 인해 순국하신 분이다. 그분의 일대기에서 이런 내용이 생각한다. 조선은 바로 가족주의에 병이 걸려 있다고 말이다. 자신의 가족의 안위만 보고 나머지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것을 말이다. 확실히 그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의 이익은 챙겨도 타인의 존재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단재 선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이 국가를 병들게 한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렇다. 그렇지 않았다면 계속 우리는 끊임없는 비극을 피하고도 남았을 터이다.

 

소설 <변호인>을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영화 <변호인>이 생각나고, 그 영화의 모티프가 되던 인물, 그리고 그가 하려는 것을 되새겨봤다. 모든 니즈를 만족할 수 없더라도 그 니즈를 만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하지 못한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여 반사교면 정신으로 더 좋은 내일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가치고 숙제다. 읽으면서 계속 심리적으로 불편한 내 가슴 속에서 희망이란 단어를 생각해봤다. 과연 있을까?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단지 그 희망이란 단어보단 단지 절망적인 현실이 생각날 뿐이다. 그런다고 현실도피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항상 분노가 존재한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기도 하나, 감정의 동물이다. 인간의 분노는 이성보다 감정에 가깝다. 감정에 휘둘린 인간은 이성을 잃은 채 돌발행동을 한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을 무시하여 정말 이성이라면 어떨까? 위에 있었던 그 발언의 문제점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판단력 미스다. 가령 이성의 영역에서 다루자면 독일 관념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이성에 대한 연구에서 칸트의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니 자신이 진짜 이성적으로 탁월하고, 지성이 넘친다면 칸트의 서적을 읽어봐라.

 

그러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런 내용이 나올 것이다. 이성이 이성으로서 이성을 보여주는 것보다 이성이 윤리로 통해 이성을 보이는 것이 진실한 이성이란 점을 말이다. 윤리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다. 윤리는 이성보단 감정에 의해 조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길가다가 어린아이가 다치거나 혹은 아직 고등학생이 아무 죄도 없이 바다에서 가족과 재회하지 못한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는 이성에 의해서일까? 감정에 의해서일까?

 

소설 <변호인>에서 송변은 매우 감정적인 날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그런 분노라는 감정이 있었기에 가정 이성적인 법을 다루는 변호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도 영화에서 하나의 가상이고,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처럼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처럼 그 당하는 당사자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억울한 사람이 힘이 없다면 단지 죄인이 되는 것이 현실의 도덕이라면 그것은 옳은 세상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대한민국은 헌법의 조문대로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인이어야 한다. 읽는 순간 그 생각만 들었던 소설 <변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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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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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그 제목이 나온 것은 페이지 258~259 사이였다. 그것은 이 소설인 마리암과 더불어 전형적인 아랍미인이던 라일라에 대한 이야기에서였다. 그녀는 매우 지적이고, 의식 있는 아버지와 매우 격정적인 어머니를 둔 어린 시절에서 자신의 아버지 바비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하루 종일, 카불에 관한 한 편의 시가 머리에 떠돌더구나. 사이브에타브리지라는 시인이 17세기에 썼던 시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고 /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으리.’ 전에는 전체를 다 외웠었는데 지금은 두 줄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구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란 제목적 의미를 생각하면, 지금은 비록 어렵고 힘들고 괴로웠지만 언젠가는 좋은 날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숫자적 의미로서 천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 보통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의미할 때, 천군만군이란 말도 사용하고, 백과사전이란 말과 백가지를 의미하는 사전도 있다. 결국 백(百)이란 숫자는 매우 많고 많은 것을 의미하고(서양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디드로 위주로 저술한 백과사전도 그런 의미), 천과 만도 결국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천과 만은 높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인간의 수명이 길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구수가 많지 않았기에 숫자적인 관념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태양은 지구에서 하나 뿐인 존재이고, 천 개의 태양은 1,000일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에서 나오는 지붕 위의 희미하는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다는 것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어두운 현실 앞에 언제까지나 그것만이 되풀이 되는 게 아니라 분명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소설에서 첫 부분은 주인과 하녀에서 태어난 마리암이란 소녀로 시작하여, 마리암이 반강제적으로 결혼하면서 정착된 장소 인근에 살던 라일라를 만나고, 이 둘은 서로 이웃이었으나, 잔인하고 끔찍한 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면서 라일라는 마리암과 함께 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 생각난 사람이 있었는데, 에릭 홉스봄이란 영국 사상가 겸 역사학자로 그 저술한 서적 중에서 <극단의 시대>라는 도서가 있고, 또 뒤에 <폭력의 시대>라는 서적이 나왔다. 극단의 시대는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로 위장한 관료주의와 비밀경찰국가, 자유주의라는 이름 앞에 시장지상주의의 대립이었다.

 

특히 이 둘의 대립된 이데올로기는 각종 민폐를 일으킨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쿠바와 남이의 피바람, 그리고 이 소설의 배경인 아프카니스탄도 피할 수 없다. 그곳은 소련에 의해 침공되었고, 소련의 저지를 위해 민족중심적 이슬람 세력과 더불어 자유주의 진영에서 무기와 세력을 지원받았다. 그래서 처음에 이슬람에 의해 지배되던 아프카니스탄에서 여성이 사회생활하고, 얼굴을 내밀고 다니며, 자신의 의지로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여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나마 소련의 침공으로 인해 여성들에게 교육과 직업 그리고 사회적 참여권이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었을 것만 같았다.

 

대신 이슬람 세력과 소련군의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가고, 그런 과정에서 1990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소련군은 모조리 그 땅에서 흩어진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손에는 무기가 쥐어져 있고, 자신들이 전쟁에서 했던 것만큼 현실에서 이상적 가치 대신 실리적인 욕망으로 가득했다. 여자들의 얼굴을 가리고, 여자들이 어디를 갈 때 혼자서 가지 못하며, 병원에서 임산부가 출산하는데도,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반시대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시계는 21세기로 가고 있는데, 이슬람 탈레반의 행동들은 구시대로 가고 있다.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어렵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면 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남편 라시드의 폭행과 학대행위를 참을 수 없어 도망치려 했지만, 붙잡혀서 심한 구타를 당하고, 결국에는 라시드를 살해하는 경지에 이른다. 마리암의 서명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처음에는 억지로 끌려 결혼하여 혼인증명서에 사인하는 모습을, 다음은 감옥에서 재판받고 사형선고에 사인하는 것을, 그녀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하라미라는 천박한 여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고, 어머니 나나가 자살 후에는 라시드의 폭행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어 자신의 인생에서 즐거움이 없었다.

 

그런 마리암이 유일한 희망인 라일라의 딸 아지자였다. 아지자만이 마리암을 따라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기에 마리암은 라일라가 처음에는 미웠지만, 라일라와 아지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라시드를 죽였고, 그녀는 AK47 소총이 자신의 머리에 겨냥되는 것을 인지한 채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살면서 제대로 좋은 인생을 살지 못했다. 그저 나나하고 살던 때가 제일 행복한 편이다. 그런 고된 생활에서 죽음은 최악의 고통이며,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 나는 신이란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신을 믿지 않는다. 유신론적인 가치는 인정하나, 신이란 결국 오만한 인간에 의해 멋대로 이름이 팔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리암에게 알라신은 무엇을 주었는가? 차라리 나나와 살 때 친절한 늙은 파이줄라의 가르친만이 진실한 알라신이 존재했다. 알라신은 모두에게 자비롭고 위대하다고, 그러나 현실의 알라신은 파괴와 암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가면이었다. 사실 그런 점은 이슬람만 아니라 십자군 원정과 레바논 전쟁, 나치의 행위들처럼 거대한 종교가 거대한 파시즘의 자궁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슬람권의 그런 비참한 이야기는 이미 사트르피 마르챤의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어느 정도 보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고문당하여 죽고, 여자들은 억압당하고, 어린 아이들은 이슬람과격 테러조직에 가서 자살요원이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프카니스탄의 비극적 이야기를 다룬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보면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나름 이렇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고, 그런 것이 소설 속에 이루어진 점이 씁쓸했다. 그래도 제목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만큼 마지막은 불행 중에서 찾는 행복은 있었다. 천 개만큼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나, 그것을 만들려는 라일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911 미국 테러사건이 생각났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과 같은 소설을 읽을 때 조금 아픔이 아프고, 불편한 이유는 항상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되는 보복과 가해행위는 본래의 당사자가 아니라 엉뚱한 사람들에게 간다는 것이다.

 

911 테러사건에서 죽은 사람들과 피해 받은 사람은 모두 민간인이고, 대부분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기의 생활에 충실하게 보내려던 시민이었을 것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주의로서 합리를 넘어 합당한 가치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그 본인에게 충실했을 것이라 여긴다. 그런 자들이 테러를 당했고, 항공기 안의 승객들도 한 줌의 재로 변해야 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인간의 극단성은 결국 폭력으로 변질되고, 인간의 폭력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하나의 정의라는 것이다. 정의의 실현은 결국 폭력에 의해 수반되는 것이다. 폭력을 멈추기 위한 폭력이 진정한 폭력을 위한 명제이나, 우리는 폭력으로서 이익이나 이권 그리고 명제로서 사용한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아쉬운 점은 바로 그런 요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단지 잔인하게 고문당하는 사람들, 로켓에 의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진 사람들, 총을 맞는 사람들, 남편에게 가혹하게 맞는 여자들, 배고픔과 추위에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가 슬픈 비극이다. 하지만 비극의 씨앗은 결국 어디인가? 물론 작가의 입장서 난감한 입장이 될 수도 있다. 그는 과격테러리스트를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폭력적 지배행위를 저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어디서부터인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단지 이런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 동조하는 것보다 왜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역사는 두 번 반복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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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다른 사람에게 추천받은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보면서, 모두 이런 말을 했다. 결코 1번 보고 이해되지 않으며, 보는 순간 다시 되돌이표를 찍기 위해 한 번 더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확실하게 말하여 1번 보고 100% 이해하기란 어려운 내용이다. 여러 가지 숨은 작품 내의 설정도 그렇겠지만, 용어자체와 그리고 용어 중에서 지명이나 음식, 가게 등과 같은 문화적인 배경에서도 그렇다. 특히 펍(Pub)이란 Public House를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에 아예 이해할 수도 없었고, 단지 그곳에서 무얼 하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단순히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알기까지도 마지막 부분에 가서 대략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광장이나 거리, 교량과 학교(그런다고 캠브리지대학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이 많으며, 전에 내가 읽어본 도서인 <극단의 시대>의 저자가 에릭 홉스봄이 캠브리지대학 출신이다)들도 그러하고, 음식문화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하천이 지형학적, 기상학적, 달의 만유인력 등의 자연적 조건에 따라 갑자기 높은 파도가 일어나 서핑을 좋아하는 mania들이 타러 오는 것조차 말이다.

 

그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여기는 한국이고, 그곳은 분명히 영국이며, 영국 중에서 수도인 런던이라는 점이다. 영미문학을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나, 이번 문학을 영미소설을 읽어본 것들 중에서 가장 현대적이었으나, 가장 현대적인 감각이 오지 않았다. 예전에 읽어본 <스노우 맨>이란 소설은 북유럽 소설이었으나, 그래도 북유럽 특유의 기상과 지형, 그리고 조건들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읽는데 그렇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영국이란 나라가 한국에게 그렇게 낯선 국가인가?

 

영국이란 나라는 영어를 사용하고, 거리상으로 상당히 먼 곳에 있으나, 한국과 많은 교류를 나누고 있는 국가 중에 하나다. 개인적으로도 영국의 old pop song을 좋아하며, 유럽에서는 역사학이나 철학, 경제학에 대해서 매우 깊이 있는 학자들을 배출하기에 영국이란 나라가 반드시 동떨어진 국가라는 생각을 하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를 읽어보면서 이렇게 영국의 영어가 한국어로 번역되어도 어렵게 느꼈는지 몰랐다. 왜냐하면 도중에 나온 대사는 너무 짧고, 1인칭 주인공이 토니 웹스터의 독백과 사유로 통해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서 시작하여 대학에 들어가고, 그리고 결혼하여 수지를 놓고, 수지를 놓은 마거릿과 이혼을 해도 가끔 종종 만나 식사와 대화를 나누고, 그런 동안에 수지는 결혼하여 토니의 손자를 놓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토니와 같은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딱히 생각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poetics)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명제가 딱하고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 명제가 등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상당하게 복잡하다. 상황적 서술이 친절하지 않고, 토니는 계속 의문을 갖고 혼자 생각한다.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예전의 여자 친구인 베로니카 포드에게 찾아간다.

 

베로니카를 찾는 것은 이 문학에서 가장 활발한 시절의 토니가 아니라 머리가 모두 빠져버려 흰색의 머리카락이 빠져 대신 흰색이라고는 침침한 눈 위의 눈썹이었을 토니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베로니카는 예전의 헤어스타일이 많이 변함없는 흰색머리를 가진 노인이다. 서로 만난 노년의 2사람에게 그 어떤 달콤한 로맨스나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힘든 기대감이다.

 

결론은 2사람이 서로 메일을 주고받고, 다시 40년 만에 만났던 점에서 이 문학은 결코 좋은 이야기로 끝맺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주인공 토니는 고등학교 친구인 에이드리언에 대한 회상과 더불어 에이드리언의 여자 친구이던 전 여자 친구 베로니카에 대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을 보면서 생각하지만, 작가가 옥스퍼드대학교 현대언어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그런지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토니카 처음 에이드리언을 만날 시점에서 친구 4인방이 즐겨 읽던 책에 대해 나는 생각해보았다.

 

논리적인 사고와 차가운 말을 할 수 있었던 앨릭스는 버트런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 존재감이 떨어지는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작품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찾아가던 토니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 마지막으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에이드리언은 알베르 카뮈와 프리드리히 니체를 읽었다. 문제는 이들이 읽은 서적 중에서 대부분 대학전공자들도 처음에 어렵게 생각하는 책들이 많다. 이미 고등학교부터 기라성과 같은 근현대 철학자를 읽은 시점에서 작가가 많이 어려운 생각을 하는 점을 느꼈다.

 

그나마 토니의 조지 오웰은 나은 편이었다. 조지 오웰의 <1984>나 <동물농장>은 많은 유명한 도서고, <동물농장>은 중학생에게 추천하는 책일 정도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의 조지 오웰은 본래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토니가 읽은 도서 중에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있다는 점을 간주해보면, 토니는 확실히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1960년대 영국에서 자신이 하던 행동 중에는 베로니카와 헤어진 이후 미국에 가서 애니라는 여자와 만나 여행 동료와 더불어 침대 위에서 같이 땀을 흘리던 사이인 점을 보면 말이다.

 

그런 작가와 토니의 입장에서 1960년대 말에는 이른바 월남전이 발발했으나, 소설에서는 월남전 이야기는 없고, 시간이 흘러 다시 귀국할 때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말만 나온다. 그가 캠브리지대학의 우수한 학생이고, 게다가 전공이 윤리학이란 점을 말이다. 에이드리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토니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았고, 왜 죽었으며, 그 원인은 찾아보면 결국 자신의 여자 친구였으나, 마지막의 에이드리언의 여자 친구인 베로니카가 원인이었을 것이라 여겼다. 고등학교 시절 우수한 모범생과 뒤틀린 없는 심보 없는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은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살은 에이드리언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었다. 손목을 가로가 아닌 대각선으로 베어 과다출혈사로 사망하고, 목욕실 문에 친구들이 들어오지 말고, 경찰을 불러오기를 바랐으며, 혹시나 자신의 자살로 다른 이에게 피해가지 않도록 유언장 같은 것도 만들었다.

 

빈틈없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것이 토니에게 엄청난 충격이고, 그 원인은 누구에게 있냐는 점이다. 이래저래 시간이 흘러가면서 토니의 모습을 보면, 그가 단순한 성격은 아니나 그렇게 감이 좋은 인물이 아닌 자를 알 수 있다. 대학시절 베로니카의 집에 가서 베로니카가 야한 꿈을 꾸라는 말을 듣고 1분도 안 되어 손님용 방에 있는 세면대에 자위하여 사정하던 토니가 노년에는 그런 혈기왕성하기보단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해 작은 봉사활동을 한다.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하던가? 인간은 자기의 과거와 다르게 살아갈 선택이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현재는 나는 과거의 나로 인해 형성된 시간적 축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토니의 그런 과거의 모습에 대한 성찰과 분석, 현재는 그런 과거에 의해 축척된 주변 사람들과 현상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여 베로니카를 만난다. 왜 에이드리언은 자살을 했었는가? 처음에는 잭이란 베로니카 오빠에게 메일을 보내고, 다음에 운 좋게 베로니카와 만나게 된다. 그 원인은 500파운드라는 유산이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죽고 나서 자신에게 유산이 왔다. 그런데 그 유산 중에는 에이드리언이 일기가 있을 터인데, 일기는 베로니카가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러니 토니는 베로니카에 대한 과거 자신의 감정과 더불어, 친구이던 에이드리언의 죽음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유일한 증거이고, 재산인 일기장이 없어진다는 것은 시간을 기록한 매체가 사라지고, 에이드리언의 죽음은 영원히 자신의 의문 속에서 끝내 자신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거를 찾는 것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깊은 아픔과 고통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베로니카는 계속 포드라는 성을 따라했는지? 그리고 에이드리언의 죽음을 무엇을 말하는지 말이다.

 

마지막에 가면 토니는 과거 에이드리언과 유사하게 생긴 남자를 발견한다. 키가 크고, 눈 밑에 뭔가 생기가 없는 남자를 말이다. 나이는 대략 에이드리언과 죽은 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남자를 말이다. 그는 정상인이 아니라 약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 다가간 토니는 그의 어머니와 친구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면 토니는 포드 성을 가진 베로니카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물론 그 남자의 이름은 상세하게 나오지 않아도 아버지가 사망할 경우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유럽의 이름 짓기이니 말이다.

 

그러나 생각은 다르게 되었다. 아니 제목과 더불어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와 다르게 예감은 오히려 다른 쪽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 남자의 어머니가 베로니카가 아니라 베로니카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에이드리언의 죽음은 결국 베로니카가 원인이 되었지만, 그 직접적 원인은 베로니카의 어머니에 의해서다. 젊은 여자가 아이를 임신한 게 아니라 젊지 않고 중년의 여성이 아이를 임신했다면, 아이의 건강상태는 매우 위험했을 것이고, 또 생각하면 에이드리언 죽음 이후 베로니카의 아버지 역시 술을 지나치게 마셔 몸에 문제가 일어나 사망한 점을 보면, 계산은 맞아 떨어진다.

 

윤리학을 전공한 에이드리언이 왜 그런 자살을 선택했는지 말이다. 그는 전형적인 윤리학을 전공한 모범적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왜 자살을 하도록 만든 그런 행위를 했을까? 에이드리언에게 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았다는 과거경력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같이 사는 에이드리언에게 어머니와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은 에이드리언이 있기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토니가 베로니카의 집에 가면서 그에게 제대로 맞이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은 베로니카의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 에이드리언에게 따뜻하게 해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작품의 요지와 작가의 의지가 나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친구가 수학과 물리학을 잘 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수학과 물리학의 정답은 오로지 1개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국어 중에서 문학과 과학 중에서 비전형적인 사회과학의 경우에는 답이 하나가 아니다. 문학소설에서는 관점을 다르게 볼 수 있고, 사회과학은 관점과 사회적 조건까지 달라붙으면 답은 그 이상으로 복잡해진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죽음에서 보이는 것은 그가 느낀 죄책감이고, 그는 자살로서 마감한다. 문제는 그의 도덕군자 요소에서 그의 자살은 비겁한 도망이었다. 에이드리언의 아들은 장애를 안고 태어나, 계속 어른이 될 때까지 타인의 보호와 요양을 필요로 하나, 예산이 부족하여 봉사자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피가 묻은 돈”에서 만약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사귀지 않았다면? 그런 전제를 형성하려면 베로니카에 대해 토니가 에이드리언과 만나지 않게 했다면? 아주 미묘하고 단순한 일들이 하나의 거대한 풍파로 이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오이디푸스도 길거리를 가다가 시비로 라이오스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그는 두 눈을 찌르고 방랑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와 그의 어머니에서 태어난 4남매도 비참한 운명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 윤리, 도덕, 규칙, 정의 등과 같은 깨끗하고 좋은 말을 외치나, 오히려 우리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고, 심지어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경우가 참 많다.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는 토니가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서로 사귄다는 편지를 받고, 이에 대한 질투와 배신감에 의한 증오가 하나의 글이 되어 편지로서 그들에게 갔다. 온갖 멸시와 증오, 그리고 다시는 친구들과 재회하지 못할 것 같은 악의로서 말이다. 하지만 그 편지의 악의가 담긴 내용은 이미 현실에서 더 심한 비극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악의가 담긴 편지가 오히려 토니에게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행한 악의도 결국 그 순간만큼은 자신에겐 정의로 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조차 인지하여 반성하고 사과할 수 있는 것도 큰 용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예감을 틀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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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나쓰메 소세키 지음, 권남희 옮김 / 책만드는집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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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란 작품은 작가 본인의 작품 중에 상당히 초반에 만든 작품이다. 그 이후에 나온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와 같은 작품을 생각하면 <도련님>은 장편의 소설보단 중편의 소설에 가까운 분량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몇 권을 읽으면 생각하지만 그의 소설은 등장인물이나 주변 배경적 조건이 복잡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보통 주인공과 그 주변의 가족, 그리고 몇 몇의 주변인물 정도이다.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인물과 공간에서도 그의 소설은 상당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작은 세계만을 다루는 것 같으나, 사실 그가 다루는 소설은 그렇게 작은 세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도련님>이란 작품은 청일전쟁 전후 시대에 어느 한 남자가 물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타지의 학교의 수학교사로 부임 받아 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야기를 보면서 기차가 생긴 것이나, 혹은 학교 미술교사가 마돈나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 일본에 서양의 근대문물이 막 도입되던 시기에서의 냉철한 그의 눈썰미도 보인다.

 

우선 작품 내에서 주인공인 도련님은 진짜 도련님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어린 시절 매우 말썽을 많이 피우고, 장난을 많이 쳤으며, 장난의 도가 지나치다 못해 자기 손가락에 칼을 베게하거나 장기를 두다가 형을 때리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집안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히고, 아버지로부터는 의절선언까지 들었다. 도중에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 역시 도련님의 행실이 바르지 못해서라고 원망을 듣기도 했다.

 

삶의 목표나 자신의 길을 찾는 것보다 오로지 장난치며 시간을 보내던 도련님은 중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별 생각도 없이 물리전문학교를 진학하고, 졸업하여 수학교사로 부임되면서 그저 주변 상황이나 시대적 흐름과 관계없이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처럼 나온다. 그래도 이상하게도 도련님에게도 유일한 아군이 있었다. 도쿠가와 에도시대의 고귀한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귀족가문이 몰락하면서 도련님 집에서 하인으로 고용된 기요가 있었다.

 

늙은 할머니인 기요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련님에 대해서는 아주 지극정성이다. 다정하게 말을 붙여주고, 필요할 때는 용돈과 간식도 주었다. 도련님을 무엇을 할 때마다 칭찬을 해주었고, 옛날에 태어났다면 매우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격려해준다. 겉으로 본다면 마치 철없는 아이를 두고 오냐오냐 하면서 길러주는 할머니 같은 인물이 기요였다. 그래서 도련님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기요 만큼에 대해 매우 특별히 생각하였고, 시코쿠 쪽의 중학교에 가면서 기요를 두고 갈 순간, 만약 거기 간 뒤에 언제 기요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도 했으며, 가는 날 우는 기요를 뒤로 한 채 떠날 때에도 혼자 마치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한 도련님, 오직 기요에게만 사랑받은 도련님, 이제는 고향의 품을 떠나 낯선 곳에 가서 혼자만의 삶을 꾸려야 했다. 도련님의 새로운 인생에서 그가 살아온 행실은 전혀 좋지 못한 것이기에 잘 지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코쿠에 있는 중학교에 오면서 도련님은 어느 평범한 부임 교사처럼 행동하기보단 다른 행동을 보였다. 튀김우동을 먹고, 경단을 먹으며, 억지로 누군가 같이 할 것을 권하면 응하지 않고, 혼자 원하는 것을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좋은 인상을 줄 리가 없다. 직설적인 행동과 남의 눈치를 억지로 맞추지 않아 그는 학교 내의 선생이나 학생들에게 좋지 못한 인물로 찍혀 있었다. 특히 잠자고 있는 방에 학생들이 집단으로 장난친 것과 학생들의 장난을 억지로 잡아 해결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평범한 학교선생이 아닌 것으로 나왔다. 또한 같은 수학교사인 센바람에 대해 처음에 잘 지내는 것 같더니, 하숙집의 주인인 이상한 골동품을 강매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하자 하숙집 주인의 앙심으로 처음 소개해주었던 센바람에게 집에서 쫓겨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도 했다.

 

원하지 않는 학교생활과 원만하지 못한 일상에서 도련님이 자신의 학교에 뭔가 있다고 여긴 것은 낚시하러 가면서다. 빨간 셔츠 교감과 미술교사 딸랑이와 같이 낚시하러 가면서 자신에 대한 험담과 더불어 센바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다. 게다가 새로 이사 간 하숙집으로 가면서 끝물 호박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끝물 호박선생은 도련님이 학교 내에서 좋아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아니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 하던 사람이었다.

 

끝물 선생은 집안이 쇠락하여 약혼녀와 결혼하지 못하게 되고, 억지로 다른 지역으로 부임까지 가야했다. 집안이 쇠락한 것도 모자라 약혼녀와 부임 문제에서 도련님은 그 내막을 알게 되고, 때마침 센바람도 골동품을 강매하려고 하던 하숙집 주인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알면서 다시 도련님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도련님은 처세술에는 매우 능하지 못한 인물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은 남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도 싫어하며 도리어 솔직한 것을 좋아한다.

 

기요가 말한 것이나 스스로 도련님이 귀족집안의 후예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는 점에서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사회가 어떤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소문을 듣고 흘리고 남의 흉을 보는 좋아하고, 인간이 인간으로 가져야 하는 인간성에서 도련님으로 통해 본 사회란 위선이 가득한 곳이었다. 정규학사를 나온 사람들이 근대사회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었고, 기요와 같은 인물은 막부시대 귀족의 후손이나, 몰락한 이상 그저 하인에 불과했다. 근대문명의 유입과 더불어 메이지유신은 과거와 근대의 혼란 속에서 인간의 정신을 발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퇴화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교양인으로서 행동하기보단 오히려 어설픈 지식으로 잘난 척하고, 그것까지 좋다 하더라도 남이 곤란한 상황을 이용하거나 혹은 억지로 몰아넣기도 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도련님이 있는 마을에서 큰 행사가 있었는데, 중학교와 사범학교 학생 간의 싸움이 일어났다. 싸움이 일어나면 교사들이 말릴 생각 없이 그저 도망치기 바쁘고, 오히려 말리던 도련님과 센바람이 중간에 맞으면서 싸움 말리던 사람들은 싸움을 끝을 내려고 했다. 덕분에 경찰에게 연행되어 간단히 취조 후에 풀려났다.

 

그런 상황에서 신문에서 도련님과 센바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2사람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이 문제로 센바람은 학교에서 강제로 사표를 쓰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의 싸움을 말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삼아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찍어 내는 행동에서 <도련님>의 소설에서는 시대가 변했다고 하여도 사람들의 이기심과 질투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지식인이어야 할 이들이 지식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을 보고 <도련님>이란 소설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고, 사람들의 입이 싸다는 점, 타인을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짓, 남의 작은 행동에는 큰 망신을 주면서 정작 그 망신을 주려는 자들은 도덕적으로 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이때까지 자신의 뜻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는 도련님이 훨씬 인간다워 보인다. 끝물 호박선생이 다른 곳에 가면 자신의 월급이 올라가는데도, 그 돈을 받지 않는 점이나 혹은 끝물 호박선생을 궁지로 내몬 딸랑이와 빨간 셔츠를 골탕 먹인 것도 그렇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은 매우 작은 공간의 사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이야기가 사소하지 못하게 여기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도 사람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도련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여기저기 일어나는 것이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신시대의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할 도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히려 골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지금 만약 도련님이 현실에 있다면 더욱 곤란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으면 딱히 에도시대를 찬양한 사람은 아니나, 적어도 그의 글에서 에도시대의 삶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적어도 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 맞게 노력하려 했으나, 이제는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9세기 한국의 위대한 철학가이면서 정치인이던 다산 정약용 선생 역시 시대의 흐름에서 농민을 괴롭히고 착취하던 양반과 관료들의 특권의식을 비판했다. 그런 점의 그 분의 시조 한편을 보면 문구에 단군의 시대보다 못하다 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과거로 통해 보는 현실에서 보는 사회와 그 사회에서 보는 인간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인간은 잘 변하지 않은 존재라고 한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는 그런 시대의 변화에도 억지로 따라가도 거기에 묻히지 않으려 했다. 고집불통인 도련님과 같은 인물이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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