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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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이 책을 본 후에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그 이유는 나는 그다지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고, 게다가 소설 중에서 추리물은 더 읽지 않는다. 추리물이란 탐정물 내지 성룡이란 유명한 배우가 연기한 <폴리스스토리>라는 영화도 있다시피 결국 범인이 잡히든지 안 잡히든지 혹은 경찰이나 탐정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라는 이분법적인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추리물이나 심리적인 요소가 강한 경찰이야기란 패턴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와 같은 것은 오히려 범인이 가려진 것보다 범인이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범인이란 존재가 원래 있음으로 하여 범인 자체에 타켓을 맞추는 설정에서 우리는 정말 중요한 벽을 놓치게 된다. 이전에 우로부치 겐이란 아주 실력 좋은 소설가 겸 각본가의 명작인 <psycho-pass>를 보는 순간 말이다. 작품 내의 범인은 정신분석적인 스캐너에 의해 돌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위험이 없다. 그래도 여전히 살인을 하고, 그 살인은 충동적이기보단 하나의 이성적인 자유에 의해서 실행된다. 자유라는 이성의 절대적인 의지는 결국 자유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진행되어 그것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무의식적인 반응 내지 혹은 순간적인 행동은 결국 하나의 미학을 관찰할 수 없다. 미학적인 요소에서 이성이란 광기로 통해 하나의 승화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죄 없는 여자의 목의 대동맥을 베고, 그것도 모자라 살인을 옆에서 시키려는 그의 범죄가 말이다. 스노우맨도 마찬가지다. 스노우맨의 범죄는 상당히 미묘하다. 한국과 같이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말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보다는 포괄적 자유주의에서 더 나아가 한국식 자유주의가 존재한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아주 적합하더라도 솔직히 개인의 자유권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 않는다. 한국식 자유주의는 옆에서 오덕질을 하거나 코스프레를 하면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을 할 수 있는 신기한 자유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대다수 남들이 어느 특정인을 신나게 깔보고 놀릴 수 있는 자유를 말이다. 따라서 <스노우맨>에서의 한국식 자유주의는 참으로 어렵다. 근본적 이유를 생각하면 소설을 종점이 되어 다시 의미를 찾아가면 안다.

 

예전에 이슬람 문화권에서 어느 여자가 다른 남자와 풍문이 돌아 그 집안에서는 명예살인을 거행했다고 한다. 한국식으로 보면 남편 잃은 여편네에게 자살을 권고하여 열녀탄생을 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스노우맨>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바로 당신의 아이에게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가 진짜 친부일 가능성은 15~20%일 것이다! 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친자소송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피가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저기 15~20%를 지나 0.15~0.2%도 힘들 것이다. 나하고 결혼하기 전에 어느 인간에게 그 다리를 벌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스운 사실은 내가 다른 여자의 다리에 들어가도 오케인 게 수컷의 본능이고, 남이 오는 것은 싫은 것 역시 수컷의 욕심이다. 소설에서 물범인가? 바다에 사는 포유류 육식동물이 자신의 새끼를 출산한 암컷을 죽이는 이유가 바로 암컷이 또 다른 수컷이란 교미를 한다는 점이다. 내 옆에 생물학 석사를 졸업한 동료를 입을 빌리자면, 인간도 역시 동물적 기관을 지니기에 동물이나 짐승이나 남자들은 같다고 한다. 단지 그 같다는 점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불안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에서 진정한 자유가 시작되나, 이성의 자유에서 이성 자체가 완벽한 이성이 아니라 하나의 감정 중에 속한 것이다. 인간의 질투가 정당한 진리와 정의로서 철퇴를 내린다. 정의의 칼을 외치는 영화나 만화에서는 가능하나, 현실에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들은 최악의 쓰레기들이다. 그런 점에서 <스노우맨>은 최악의 쓰레기가 가장 도덕군자인척 하여 더러운 짓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버럴 잡지 사장놈이나 혹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와 다른 남자하고 성행위로 자신이 태어난 이유로 살인마가 되는 합리적인 정신병자도 말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납득을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원래 분리된 존재이나, 아들과 어머니는 본래 함께인 존재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였던 존재에 대한 배신과 분노에 모자라 자신에게 쏟아진 신체적 낙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책에서 정말 북유럽은 그런지 안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참으로 남자나 여자나 가볍게 성행위를 하고, 파티에서 그냥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와서 대화를 나누고, 여자가 남자 허벅지를 만진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미 이 소설은 한국의 정서에서 동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이를 죽일 생각도 없이 오히려 잘 키운다. 한국이라면 아마 낙태하거나 고아원에 보낼 가능성이 높다. 작가의 시점으로 따라가면 아마 Sex는 자유롭게 그러나 태어나는 애들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요나스의 아버지에서 요나스가 남의 씨앗으로 태어났으나, 그래도 요나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으로 키울 것을 맹세한다. 한국에서 그게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보면 가치관이란 기준에서 한국은 가족을 혈연이라면 유럽은 친분인 것이 강할 것 같다.

 

이혼과 재혼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여자에게 사회적인 불리함도 없고, 남자도 아이가 있는 여자와 만나 그 여자의 아이들까지 같이 놀거나 친하게 지낸다. 작가 본래가 개방적인 인물인가? 왜냐하면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음악적 지식이 필요하다. 슬립 낫이란 이름이 나올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LA메탈밴드에서 Gun's & Roses 멤버인 기타리스트 건이 속한 밴드다(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거기에 슬레이어 같은 스래쉬메탈, 레드제플린과 같은 브리티쉬하드락을 듣지 못한다면 그 느낌을 모른다.

 

섹시한 몸매를 지닌 카트리네 경관이 짝 달라붙는 가죽의상에서 스모키한 화장을 한 것을 보면 작가가 좋아하는 여자스타일이 그 경관이 분명하다. 물론 나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개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나름 지성을 갖춘 사람이기에 지성과 개성을 다 재미있게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가 뮤지션이고, 게다가 글을 보면 미국의 부시나 레이건을 싫어하는 느낌이 강하다. 1980년이나 혹은 2004년 부시나 레이건 대통령 당선을 왜 그렇게 왜치는가?

 

어째든 <스노우맨>은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추리적 요소에서 과학적 근거를 많이 인용한다. 어느 탐정물도 그러하나 사람의 혈액과 정액 그리고 타액들은 DNA라는 생물학에서 펼칠 수 있는 과학수사를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너무 의학적인 요소로 갔기 때문에 중간에 대략 범인이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이란 스스로가 나라고 떠벌리지 않은 이상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 수사극이나 탐정극은 처음부터 끝이다. 아니라면 범죄의 추적으로 통해 국가나 사회의 병폐를 찾아 근본적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스노우맨>은 그런 내용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자유로운 성행위를 인정하되, 그곳에서 자라나오는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여자의 부도덕만 잡는 게 아니라 그 부도덕은 혼자만 나온 게 아니라 합작이다. 어떤 점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가 저술한데로 모든 아이들의 부모는 모든 성인남녀다란 명제가 좋을지도 모른다. 대신 철인군주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공부와 운동, 때에 따라서는 동성애(소크라테스는 여자와 자면 아이가 태어나나 남자와 자면 지혜가 탄생한다고 하니)도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범인은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그 아이에게 더러운 창녀 같은 어머니는 필요 없다고 하나, 어머니 없는 아이는 매우 비참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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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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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가?>라고 말한다면 우리들은 흔히 국내 방송 중에 아버지와 자녀가 같이 TV방송프로그램에 나와 이런저런 체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로 생각한다. 쇼라는 것에서 TV라는 매체는 실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재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거대한 가상세계다. 딱히 내가 TV에 나오는 아버지와 자녀가 서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으나, 부모 특히 가족관계에서 언제나 소홀하게 대해지는 아버지의 존재를 생가하면 TV라는 쇼는 역시 쇼일 수밖에 없는 체계이다. 이른바 spectacle이라는 말이 있듯이 TV세계의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대중들은 아빠 어디가로 통해 재미를 느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쇼프로그램이 그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연예인 내지 특수한 사람이란 것을 아나, 한편으로 우리는 아버지란 존재가 TV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약간 따라하거나 받쳐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방송에서 나온 장소가 나오면 누구는 그곳에 반드시 가려고 한다. 자신이 원해서 가기보단 미디어의 위력이 결국 아빠 어디가? 에서 아빠 우리도 저기가! 로 변할 수 있다. 물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아이는 분명 어느 정도 지적능력이 있을 것이고, 하다못해 그곳에 가서 충분히 놀 수 있는 체력이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내가 읽은 <아빠 어디가?>는 그러지 못한 아버지가 일기로서 적은 책이다. 장 루이 푸르니에라고 프랑스 방송인이자 시나리오 작가는 하늘에 무슨 벌을 받았는지 아니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몰라도 태어난 아이 중에 아들 2명이 장애인이고, 그나마 딸은 정상인이었다. 장애인이란 이름은 그나마 복지나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된 유럽조차도 괴로운 삶의 연속인데, 우리나라는 얼마나 힘들까? 솔직한 말로 정신적 문제가 아니라 단지 육체적으로 문제만 있을 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장애인의 기준을 일정하게 만든다. 사회부적응자로 말이다.

 

물론 그런 인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누구도 자신이 혹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가진다. 만약 가진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민될 것이다. 실제로 아이를 준비하는 산모와 그의 가족들인 아이가 장애인이 되지 않을까 라는 고민 속에서 산부인과에서 깊은 호흡을 내쉰다. 후천적인 장애와 달리 선천적 장애는 매우 치명적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장 루이 푸르니에의 고통을 보면 알다시피 몸집은 계속 어린아이 수준이고, 뇌는 마치 지푸라기만 든 것처럼 텅 빈 아이들을 보면 어떨까?

 

삶은 하나의 연극이고, 그 연극은 하나의 비극과 같다. 물론 희극이라는 종점이 없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인간의 마지막은 언제나 죽음이고, 누구나 그 죽음이란 이름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인생은 비극이 되어야 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육체적인 존재를 떠나 정신적인 존재가 있다.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보자면 작가는 현세의 고통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그 고통이 삶을 넘어 죽음이란 이름을 건네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희극이다.

 

아니 눈을 뜨지 않은 채 잠을 청하면 장애인이던 그의 아들이 꿈에서 유명한 선수나, 배우나, 하다못해 자동차 수리공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먼저 떠나보낸 큰 아들 마튜는 자동차 엔진소리를 내기 좋아했다. 부웅부웅~ 이라고 말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듣는다고 해도 그것이 이해할 수도 이해해볼 수도 없다. 그저 스쳐가는 소음에 불과하다. 몸짓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몸짓만 내세울 뿐이다. 그래도 몸짓을 내세우는 것도 좋다. 점점 꼽추가 되어가고, 등은 펴지 못해 척추수술을 받다가 3일 만에 하늘로 가버린 마튜에겐 과연 어떤 것일까?

 

아버지 본인은 정작 담담하나, 예전에 안락사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다. 죽음이 과연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인간이 괴롭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때마다 인간 스스로 나약해진다. 동물은 죽음의 위기를 느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죽음이란 관념은 상상으로 통해 자신을 대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위기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등을 펴지 못해 괴로워하던 마튜, 하지만 마튜는 왜 괴로운지 이유조차 알 수 없다. 마튜는 죽음이란 관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을 아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 루이, 하다못해 마튜의 동생인 토마는 형의 죽음조차도 알지 못한다. 형을 찾는 것처럼 보이나 언제 존재했냐는 듯한 행동으로 집안을 돌아다닌다. 막내 딸 마리는 정상으로 태어나 루이의 이야기 속에 그저 그런 아이로 나온다. 이런 인생에 루이는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 어둠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들의 생모에게 이혼을 당해도 말이다. 그런 현실에서 루이는 아이를 돌보는 보모 조제에게 농담을 던지고, 장난감 가게에 점원에게 늘 같은 것을 사간다.

 

누가 보면 미쳤거나 혹은 실성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상황은 완전히 절망에 가까워도 그의 글은 절망보단 농담으로 가득하다. 아빠 어디가? 라고 토마가 물어보면 은행을 털러가, 자살하러 가, 나이지리아 폭포에 다이빙을 하러 간다는 말을 한다. 토마는 무엇을 대답해도 계속 같은 것을 묻고 또 묻는다. 일일이 거기에 대응하여 말해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계속 의미 없는 진담에 의미 없는 농담만 늘어놓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해도 토마는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초현실주의적 그림도 그리고, 글도 간단히 적는 모습도 나온다.

 

나름 발전이라고 하나, 그 발전은 기대감으로 이어지기에 너무나 잔혹한 발전이다. 그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루이는 자신이 그런 처지라고 기죽으려고 하지 않는다. 좋은 차를 몰고 다니며, 어디든 돌아다니려 한다. 때로는 허풍도 치고, 때로는 상상에서 허세도 부린다. 물론 허풍과 허세는 모두 현실적으로 소용이 없으나, 그것에 얽혀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비극적인 삶을 희극적인 유머로서 글로 내려간다. 작가 본인부터 블랙코미디를 잘 만드는 작가인지 글 자체도 역설적인 내용이 많았다. 누가 봐도 참을 수 없는 상황에 그의 엉뚱한 상상력과 행동 그리고 말투는 우리로 하여금 씁쓸한 웃음과 재미를 준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즐거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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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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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門)>이란 인간이 살면서 자기의 방이나 집이나 혹은 그 밖에 여러 건물이나 방과 방을 이동할 때 거쳐야 하는 하나의 통과해야 할 공간이다. 그리고 문(門)에 입(口)이 들어가면 문(問) 되고, 귀(耳)가 들어가면 문(聞)이 된다. 문은 분명히 우리가 지나가는 통과해야 할 공간이기도 하면서 과정이 되는 것이다. 문이 열리는 것과 닫히는 것에서 우리는 정말 통과하는 것은 내 방에서 다른 방으로 가기 위한 문인 것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문으로 되어야 하는 것일까?

 

작품을 읽으면 주인공 소스케는 평범한 남성으로 그 시대에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관공서 직원이었다. 그의 아내는 오요네로서 약간 병약한 몸이나 남편에게 헌신적이고 서로 사랑하며 보담아주는 여성이었다. 이들은 결혼 6년차 부부로서 어느 부부와 별 차이 없이 남편 월급이 생활하기에 조금 힘들다는 점과 기요라는 하녀가 3조(다다미) 짜리 방에 기거하는 점에서 특별한 조건이나 상황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어보면 주인공 선생 집에 하녀가 하나가 기거한 것이 생각난다. 모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 그런 것이 아니나, 하녀의 등장은 은근히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서인지 혹은 등장인물 중에 누가 건강에 문제가 있는지 꾸준히 보조역으로 등장하는 느낌이었다. 나쓰메 소세키 그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점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주인공인 구샤미군의 위장병이 있다는 점과 영어교사를 맡은 점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는 자신의 인생관을 반영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소재로 통해 여러 인간상을 들어다보고 거대한 이야기보다 거대하지 않은 이야기를 중시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는 구샤미군은 시대적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지만, 그것에 대해 상당히 무심한 점과 <문>에서도 주인공 소스케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암살당해도 무관심했다. <문>의 발표시점이 1911년이고,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일병합이 되면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근대일본역사에 대해 시대적으로 마주보고 있으나, 시대적인 흐름에 따르지 않는다.

 

구샤미군이나 소스케는 러일전쟁이나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아무런 이유를 부여하지 않음이다. 단지 나쓰메 소세키는 그런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하면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가 외국 선수와 시합하거나 혹은 그 선수가 외국에 있는 기업에 들어가서 시합하여 우승해도 우리에게 당장 생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우리의 심리적인 만족으로 이어진다. 물론 오요네의 오빠인 야스이라면 모르겠다. 야스이는 소스케의 셋방을 내준 사카이의 동생과 같이 몽골을 돌아다닌다.

 

그렇게 다닌 이유는 조선을 침략하여 점령하여 중국과 몽골에 가기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주인공 소스케에겐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소스케에겐 지금 당장 월급의 액수가 올라 식사를 제대로 하고, 추운 날에 따뜻한 방에서 쉬고 싶을 뿐이다. 하다못해 지붕의 비가 방으로 새는 것도 막고 싶고, 자신의 치아 내부가 썩어 이가 아픈 것을 어서 빨리 치유하고 싶다. 마치 소스케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런 살림 걱정과 아픈 치아로 고민하는 소스케에게 그저 인생이란 자신의 아내인 오요네와 옆에 하녀 기요와 오순도순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결혼할 때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비뚤어진 것이다. 결혼 6년 동안 소스케와 오요네 사이에 아이라곤 1명도 없었다. 그런다고 아내인 오요네가 임신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요네는 총 3번의 임심을 했으나, 아이들이 유산을 하거나, 출산해도 오래 가지 않아 모두 죽은 것이다. 3번의 실패는 부부의 마음을 어둠에 향하게 하고, 그 어둠 속에 서로 의지하던 것이다.

 

오요네가 건강이 좋지 않을 때의 모습에서 소스케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남동생인 고로쿠에게 큰 소리도 못하는 못난 형이었으나, 아내인 오요네가 아플 때 소스케는 남동생에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어서 의사를 불러오라고 지시한다. 평소 고로쿠는 행실이 좋지 않았다. 공부나 학업에 열중인 것도 아니며, 일을 할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부잣집 도련님과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하여 소스케는 고로쿠에 대해 어릴 적의 자신과 같다고 한다. 소스케의 아버지가 생존할 당시 소스케는 경제적으로 매우 여유가 있었으며, 그런 점이 자신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산을 정리하던 중에 작은 아버지에게 맡기면서 자신의 가산이 점점 탕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1000엔이 지금의 1000만 엔이 넘는 가치라면 다소 의아할 것이다. 고로쿠가 아무리 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는 중고등학생에 이제 대학생이었다. 그에게 투여된 돈이 700엔이란 점은 소설을 보더라도 납득가지 않았다. 작은 어머니는 소스케 사촌이 경영하고픈 회사에 돈을 넣은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따지지도 못한 소스케는 그저 아버지의 유품인 병풍만 챙길 수 있었다.

그것도 처음에 골동품 가게 갈 때는 7엔에서 어느덧 35엔으로 늘었으나, 알고 보니 사카이는 그 병풍을 2배 이상의 가격으로 구매한 것이다. 세상물정을 모르는 것보다는 세상이란 사회와 별개로 살아가는 소스케와 오요네 부부에게 조금 어둡고 소외된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어둠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소스케는 교토대학을 다녔을 때 오요네를 만났다. 그가 오요네를 처음 만난 시기는 야스이의 집에 가서 오요네가 야스이와 같이 있을 때였다. 야스이는 오요네를 두고 누이동생이라 했으나,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작품에서는 누이동생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불륜이라고 한 것이었다. 소스케는 야스이 집으로 가끔 놀러갈 때 야스이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다고 오요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야스이가 없을 때 번역자 해석처럼 소스케는 오요네와 같이 그림자 모습이 나올 때 이미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은 것이다. 만약 야스이와 오요네가 친 남매였다면 야스이에게 말하여 결혼식을 올리면 되는 것이나, 나중에 이 2사람은 모두 야스이를 피해 도망치듯이 사라진다.

 

덕분에 소스케는 학교에 퇴학을 당하고, 야스이 역시 학교에서 나쁜 대우를 받게 된다. 그런 야스이가 사카이의 남동생과 같이 일본 동경에 왔다는 것은 소스케에게 매우 고민되는 일이다. 그는 가마쿠라에 있는 절에 가서 문(問)을 들어가고 나갈 때 스스로 질문하고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문(問)과 문(聞))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가 들어간 문이란 공간은 그저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흘러간 것이 아닐까 싶다. 돌아와서 사카이에게 동생 고로쿠의 사회공부를 위해 부탁하는 것은 나오나 결국 그 맺음은 고로쿠 스스로가 사카이와 약속한다.

 

추운 겨울이 가고 이제 따뜻한 봄이 온다는 오요네의 말에 소스케는 다시 또 겨울이 온다는 불안한 암시를 던진다. 소스케는 자신의 가정경제의 파탄이란 문제도 있었지만, 결국 오요네와의 불륜관계가 평생 심리적 압박으로 온 것이다. 오요네가 한 번 기회삼아 점쟁이에게 점을 보러 갔을 때 오요네가 계속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는 어떤 사람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것은 결국 소스케의 친구인 야스이에 대한 배반이었다. 과거에 대한 잘못과 회한은 평생 부부의 가슴을 누르고, 서로의 죄책감은 서로를 통해 극복하고 있다고 해도 그 극복은 현재상황이지 앞으로의 인생이 아니다.

 

극복해야할 지난날의 과오가 바로 문(門)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들의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다고 아예 없다고 하기에는 이 소설에 등장한 인물의 모습이 너무 우리 삶과 유사한 면이 많다. 시대적으로 1910년 전후 일본이고, 나는 2013년 한국이지만 인간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나 관심사는 유사하다는 점이다. 인간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서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 반성을 보인다.

 

딱히 작품으로 통해 사회비판이나 혹은 시대정신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모순이란 굴레에 우리 스스로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모순에 갇힌 채 속박 받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참 곤란한 경우도 많다. 예전에 읽은 <마음>에서 친구인 K를 배신한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에서 그 선생님은 지난 과거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죽이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자신의 과오나 죄를 모르거나 혹은 속일 수가 있어도, 그 본인은 그 과오와 죄를 모르거나 속일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속이는 짓은 자신에 대한 오만과 기만일 수 있다. 그런 점으로 인해 소스케는 왠지 넋이 나간 사람 보이기도 하고 소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런 어중간한 행동에는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자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門)을 여는 것은 본인인 것을 작중의 소스케나 우리 모두 안다. 하지만 그 열어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소스케는 보여준다. 인간이 자신의 잘못된 과거와 마주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문(門)은 현재의 자신이 잘못된 과거의 자신을 열어볼망정 끄집어낼 수 없는 벽이 존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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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8-1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 역시 항상 성실한 감상문을 올리시는군요.

만화애니비평 2013-08-11 17:34   좋아요 0 | URL
그것이 바로 오덕력의 기본입니다!!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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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라는 영화가 예전에 개봉된 사실을 알았다. 평소 대중영화보다는 차라리 대중들이 기피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혹은 예술영화 쪽으로 보는 편이었다. 대중들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들이 보는 영화는 결국 Cliche라는 정해진 패턴을 늘 따라가야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게다가 영화내용의 스토리와 더불어 그 스토리 안에 담론하는 의미까지 고려한다면 분명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작가의 숨소리를 제대로 받아볼 수 없는 것이 한계라는 점이다. 작가의 글이 독자에게 문자서사로 통해 이미지를 요구한다면 영화는 그저 이미지로서 관객에게 전달된다.

 

의식적인 사고능력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수용만이 존재하기에 같은 작품이 문자서사와 영상서사로 나오는 것은 상당한 차이점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원작이 있는 영화를 잘 안 보려고 하는 이유는 원작에 대한 충실성과 더불어 그 충실성을 넘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영역도 같이 드러낼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다. 물론 영화 <은교>는 관람하지 않았고, 단지 소설 <은교>만을 읽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 듣기론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아이에 대한 집착적인 관심과 성불구자로서의 질투심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장면은 소설을 읽다보면 나온다. 그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유서를 적을 때 분명 70에 가까운 나이라고 한다.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당뇨증세로 인해 각종 합병증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고가고 있던 한 노초였다. 그런 노초에게 죽기 전에 만난 한은교라는 소녀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소설 제목이 <은교>라서 은(銀)과 교(橋)라는 은으로 만든 다리라고 생각했다. 막상 생각하여 은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이름조차 주변에서 본 적이 없다. 은교라는 작품이 결국 한 소녀의 이름이고, 그 한 소녀에 대해 늙은 시인과 중년을 바라보는 서지우라는 작가가 서로 라이벌 의식을 느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치정적인 부분과 은교에 대해 젊은 남성의 왕성한 성욕을 과시하는 서지우만의 모습만을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내에서 두 남자가 한 소녀에 대해 가지는 마음은 상당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가? 혹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점이다. 은교라는 소녀는 분명 17세일 때 시인 이적요를 만났다. 이적요는 20대는 혁명을 위해 살았고, 30대는 감옥에서 살았으며, 40대 이후에는 시인으로 살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에서 그 태풍의 주변에 머문 자였다.

 

본래 태풍의 눈은 항상 고요하나, 태풍의 주변은 강력한 바람과 비가 태풍이 지나가는 모든 것을 박살낸다. 군부독재시절 야당 정치인 쪽에 일한 이유로 지명수배자가 되고, 그 이전에는 가난함에 시달렸다. 그는 시인이란 엄청난 이름을 얻기 전까지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자유를 위해 희생한 점이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시인 이적요는 <은교>에서 매우 뛰어난 문학시인이었다. 시적 영감과 더불어 그의 명성을 모든 이들에게 칭송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적요는 자신의 이름처럼 적요했다. 아니 오히려 적적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에 언제나 누군가에게 보상받지 못한 어둡고 깊은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에 같이 들어왔는데, 모두 1년이 되기 전에 나가고, 그들이 다시 이적요에게 찾아와 회유하는 장면에서 그의 고집과 더불어 인격이 보인다. 그렇게 이적요는 자신의 청춘을 희생했다. 유일하게 그가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이 D라는 한 소녀였다. 자신보다 분명히 나이가 많은 D라는 소녀가 어릴 적에 자신이 위기에 빠질 때 구해준 것이다. 부모님은 몸이 불편하여 적요에게 아무런 것도 해주지 못한다. 아마 피가 흘릴 정도로 맞은 적요와 그 적요를 문과 벽을 경계로 병든 아버지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은 병든 아버지란 사실을 복선으로 제공한 것 같았다.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거세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권위에 따른다. 적요의 아버지는 라이오스처럼 권력도 없고 그저 죽어가는 사람이고, 그는 거세의 위험을 적요에게 주지 않았다. 오히려 병이 들었기 때문에 아들을 주변의 폭력에서 구원해줄 수 없었다. 그 구원자는 D라는 소녀다. D라는 소녀의 이미지만이 유일한 적요의 안식처였다. 적요는 평생 D라는 소녀를 만나지 못한 채 외로운 인생을 보냈다. 그런 D라는 소녀가 과거의 존재했으나 현재는 그 시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과거라는 것이 하나의 사실이기도 하나 또한 과거는 하나의 환상에 가깝다. 우리는 과거로 인해 현재를 구축하기도 하나 현재와 멀어지기도 한다. 그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적요에게 은교가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뜻한 햇빛을 맞으며 평온하게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은교를 보자말자 늙은 시인의 마음은 마치 17세 은교처럼 17세의 소년으로 간 기분이었다. 은교가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서지우에게 말한다. 할아부지가 오히려 더 젊다고 말이다. 육체적인 나이로 지우가 어리기에 그는 자신의 라이오스인 적요에게 충성하나 한편으로 은교로 통해 거세하고 싶었다.

 

자신의 다부진 몸과 거친 성행위로 은교를 지배할 수 있다는 집착을 말이다. 물론 적요도 은교에 대해 성적인 충동이 있었다. 하지만 지우와 달리 적요는 명곡의 팝송에서 항상 등장하는 eagles의 <Hotel California> 가사와 더불어 은교와의 성행위를 꿈꾼다. 그러나 그가 망상에서 즐기는 성행위는 지우와 다른 모습이다. 그는 은교를 하나하나 모든 것을 느끼려 했고, 지우는 오로지 자신의 페니스로서 남근적인 상징성을 보이려고 했다. 왜냐하면 지우는 자신의 작가로서 등단한 계기가 적요가 만들어준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지우는 재능이 없었고, 적요에겐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었다. 그래도 지우는 적요를 존경하고 사랑했고, 지우는 적요가 부족한 것을 알기에 그를 보살펴 주었다. 게다가 적요는 자신의 사망 이후 모든 자신의 신변을 지우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20대 같이 혁명을 꿈꾼 한 여성과의 짧은 추억에서 나온 자신의 친아들에게도 그러하지 않았다. 가족이란 인연의 끈에서 피보단 오히려 세월이란 물을 택했다. 아니 물보다는 술이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적요는 소주를 무척이나 좋아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 은교는 지우와 적요의 일기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오히려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겼으나, 지우의 일기를 넘어 적요의 일기를 보는 순간 얼마나 적요가 자신을 사랑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은교는 적요에게 할아부지라고 부른다. 자신의 친할아버지도 아닌데도, 적요는 그것이 좋다고 한다. 사실 지우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했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 그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아슬아슬한 관계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 일정한 틀에 박힌 공간에 부자 같은 남자가 2명이 있을 때는 무척이나 가깝게 지내나, 그 사이에 여자가 1명이 들어갈 경우 그 균형을 파괴된다. 그런 소설이나 혹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에도 많다.

 

어떻게 보면 <은교> 역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요소가 매우 심하게 반영된 것 같았다. 대신 남근중심적인 사회에서 <은교>는 탈(脫)남성적인 권위의식을 말하려고 한 것 같다. 이지적이고 늙은 남자와 감성적이고 어린 여자는 이분법적인 요소를 지닌다. 인간에게 자연과 문명이란 것은 언제나 자연은 문명에게 속박되어 지배당해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은교는 오히려 자연이란 소녀라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대로 움직인다. 움직이지 못할 때는 오직 강제로 지우의 손에 이끌려 성행위를 할 때이다.

 

소녀에서 이미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자신의 처녀성을 떼어버린 것에서도 할아부지라고 부른 적요의 글이 은교에게 더 크게 닿은 이유는 은교만이 유일한 적요의 어린 신부이고 소녀이고 아름다운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직 어린 중고등학생 아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같이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나만의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미학자로서 좋아하는 진중권 교수의 이야기가 인상이 깊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 대해 알몸이 되어 같이 이불에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성행위인지 아닌지 그때는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새처럼 더욱 발육이 좋은 아이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은교가 눈물을 흘린 이유, 그것은 은교에 대해 느끼는 적요의 사랑은 몸은 70이란 Seventy일지 모르나, 은교를 만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사랑은 Seventeen이었다는 점이다. 17과 70이란 시간적인 한계는 육체적으로 분명 존재하나 적요는 그것을 넘고자 했으나, 이미 검버섯이 피어나는 썩어가는 자신의 육체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알기에 그 한계를 넘고자 하는 금기를 깨고 싶은 신화적 욕망이 바로 <은교>라는 소설인 것 같았다.

 

<은교>라는 소설에서 다른 맛은 단순히 치정과 질투만이 아니라 가볍게 스쳐가는 우리의 흔적이다. <은교>의 주인공인 적요와 지우는 시인과 소설가이고, 은교는 처음과 달리 시인을 하고 싶어 한다. 주인공이 소설가이고, 소설을 만든 사람도 소설가다. 물론 소설가이기에 소설을 쓰는 것은 당연하나 문학소설에서 반영된 인간의 역사 역시 놓치지 아니했다. 적요라는 한 인물로 통해 그동안 우리가 이렇게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어릴 적에 느낀 그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진 것인가? 우리는 과연 진정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을까? 라는 것이다.

 

은교를 만나기 전의 시인인 적요는 세간에서는 기념관을 세우고 시청공무원이 바쁘게 돌아다닐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붙여진 호칭이나, 처음 <심장>이란 소설을 지우에게 줬을 때 자신이 기획하고, 지우의 이름으로 알려진 것에서 문학을 다룬다는 그 지식인의 세계를 비웃었다. 그래서 <은교>라는 작품은 그저 3남녀의 관계만 보는 것은 절대 바르지 못한 선택이라 들었다. 문학은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혹은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 자체가 하나의 문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에서 “시(詩)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지식인의 책임은 민중의 삶을 보고 끄집어내는 것이지 오히려 민중을 분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문화라는 것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주입하는 셈이다. 수업시간에 처음 적요의 수업에 들어온 지우에 대해 적요는 우리가 말하고 느끼는 것은 정말 개인이 느끼고 말하는 것인지 혹은 그렇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강제로 부여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 살아온 적요가 은교로서 자신의 본위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은교>를 읽으면 남녀 간의 적나라한 성행위도 많이 표현되어 있고, 이른바 물장사라고 불리는 세계도 나온다. 노골적인 성행위와 더불어 은교에 대한 섬세하고도 시적인 표현에서 오히려 문학소설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본연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 않은가 싶었다. 단지 그것이 그 자체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다양한 부분에서 그 중에 하나라는 점을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추악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추악한 부분을 인정하고 인식하기에 오히려 추악함을 막을 수 있다. 그 추악함을 부정하고 자신과 분리되었다고 여기는 순간 인간의 추악함이 드러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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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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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제는 마지막에 나온다. 그 주제는 부여된 chapter처럼 “2012년의 카밀라 혹은 1984년의 정지은”, 이 2여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희재라는 남자였다. 아주 선량하고 박식하며 자신의 한계와 고통 그리고 심연의 세계를 보려고 했던 남자를 말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란 소설의 발달은 카밀라, 한국어로 동백꽃이란 영문이름을 가진 여자가 한국에 오면서부터다. 그녀가 이런 계기가 된 것은 양어머니 앤이 돌아가시고, 양아버지 에릭이 재혼하면서이다. 가족의 구성에서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마음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야 했다.

 

인간이라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양아버지 에릭의 재혼과 동시에 카밀라에겐 짐이 온다. 거대한 25㎏나 나가는 박스가 6개, 총 무게가 150㎏이니 그녀의 나이가 24살이라면 5.125㎏/년을 가진 박스가 되는 셈이다. 물론 그녀는 1988년에 태어나 2012년 진남시로 다시 되돌아간다. 그것은 인간이 다시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삶과 동시에 죽음이란 세계를 발을 밟는 것과 같을 것이다. 처음 간 곳은 진남여자고등학교, 유독스럽게 자신을 증오스럽게 바라보는 신혜숙 교장, 그리고 신혜숙 교장의 남편 최성식, 이들의 만남을 모든 것이 어긋난 시계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 어긋난 시계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라 생각하나 오히려 그것이 발단이 되어 모두를 절망의 바다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이희재가 마주나온 중학생의 정지은과 어엿한 아가씨인 정희재, 그들에게 다시 시작해야할 이야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을 읽다보면 역사적 시간적 흐름과 그 역사적 흐름에서 일어난 개인적 비극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이 이 소설에서도 역시 전혀 무관하지 않은 소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관할지역 도교육감으로 나오려고 하는 최성식, 그에겐 언제나 24년 전의 비극이 뒤를 따르고, 그를 보는 아내 신혜숙 교장 역시 불신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은 정지은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정희재를 카밀라로 만들고, 사회에 나가서는 각각의 인생에 충실한 주부, 섹스 프리스타일 커리우먼, 심지어 여성감독까지도 말이다. 그들의 인생은 모두 어느 일에서 시작된 것이다. 1984년 마치 조지 오웰이 만든 소설 <1984>처럼, 그 암울한 시간은 모든 비극의 씨앗이다. 아니라면 미국 선교사 딸인 엘리스가 연못에 빠져 죽어 영원히 부모와 재회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도는 것이 원인일까? 적어도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민담에서 엘리스의 죽음은 단지 소문만 무성하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양관이란 곳에서 엘리스를 보던 사람은 이희재이니깐.

 

그 엘리스를 보고 겁먹은 사람은 이희재의 아버지의 정부였으니 말이다. 모든 비극은 1984년 진남조선의 한 현장이었다. 이희재의 아버지는 조선소의 사장이고, 지은이의 아버지 그리고 지은이를 증오하던 미옥의 아버지는 희재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조선소의 현장노동자였다. 그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길 바라며 시위를 했다. 사장은 당장 용역깡패를 부르고, 깡패들과 대치하던 노동자 중에 4명이 죽고, 그 시위를 주도한 지은의 아버지는 자살을 했다. 모든 비극은 그곳에서 탄생한다. 왠지 노동자의 죽음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내 아버지가 노동자여서 그런가? 이 소설을 읽는 도중, 내 방에 들어온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배에 가신 아버지가 다시 온다. 기관실 옆에 있는 숙소 온도가 60~70℃ 정도 된다고 말이다. 우리 동네에도 조선소가 있었고, 이 소설에 등장하던 지은이의 아버지와 그 주변사람들도 그런 비극을 겪는 것을 역사적으로 목격한다. 어느 역사적인 비극이 결국 개인의 비극이 되고, 그 비극은 다시 다른 이들에게 비극으로 되어 평생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영향이 된다. 인간이란 결국 자신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 잃은 미옥과 지은, 미옥은 시위주동자인 지은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그의 딸인 지은이를 증오했다. 게다가 지은이를 사랑해주던 최성식 선생님을 보며 질투까지 했다. 매우 낡은 학교도서관에서 그것도 발랜타인데이 때 남몰래 초콜릿을 최성식 선생님에게 주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지은이에게 이길 수 없었다. 따라서 지은이가 매우 미웠고, 그녀의 나쁜 소문과 그리고 그녀를 궁지를 몰아넣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추한 모습은 추후 아들이 발견한 마을 민담, 전설로 통해 스크린 화면으로 비춰진 자신의 동기인 영화감독의 입에서 나온다. 그 동기는 미옥이 보이지 않으나 마치 앞에서 그녀의 과거를 캐묻는 것처럼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아우라를 보여준다.

 

모든 비틀림은 비단 국내만 아니다. 카밀라를 입양한 앤과 에릭, 그리고 카밀라를 사랑하던 유이치까지다. 사실 친부는 정지은의 오빠가 아니나 그렇게 포장된 그곳, 카밀라 아니 정희재는 자신은 사람으로 살아갈 의지를 잃고, 자살을 시도하기 위해 바다로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죽기만을 위해 바다에 빠진 게 아니라 그 바다에 빠져 평생 만나지 않을 어머니 지은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바다의 차가운 물결이 희재의 뺨을 스쳐갈 때, 그것은 지은이가 소녀인 자신보다 성장해버린 딸의 부드러움 생명을 느끼고 싶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서 우연히 희재를 구한 지훈, 만약 지훈이를 그렇게 만나지 않고, 정상적으로 진남바닥에 봤으면 동네 누나 동생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지훈은 군에 가기 전에 희재를 위해 스쿠터를 모는 왕자가 되었다. 왕자는 백마를 타는 것이 맞는데, 왕자는 멋지게 등장해야 하는데, 왕자가 되어버린 남자는 오히려 아무 의도도 없이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것과 희재의 생명의 은인인데도 오히려 희재의 자아 찾기에 동참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비와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 우산 안에 서로 붙어있는 그들은 친구보다 연인에 가까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지은이란 어머니의 죽음을,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러나 중요한 건 지은이가 최성식을 사랑한 것을 사실이나 더 중요한 점은 지은이는 자신의 배에 있는 희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점이다.

 

단지 그의 아이가 아니라 나의 아이라는 점이다. 그녀의 자살은 엘리스처럼 사라져간 희재를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면 희재라는 이름이 노트에 새겨진 것처럼 이희재를 생각한 것인가? 이 모든 우연에서 우연으로 되어버린 필연적 숙명은 비틀어져 버린 몇몇 영혼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만약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선택의 기점을 잡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희재는 젊은 시절에 지은이의 구원을 해주는 것보다 같이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약 이희재가 아버지 이상수를 말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갓 작은 일들이 엄청난 일들로 발달해 간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처럼 파도는 바다에서 매우 사소한 일에 하나이다. 그 파도가 넘치는 바다에서 바다는 파도가 그저 스쳐가는 일이다.

 

그 스쳐가는 일이 아무렇게 여기지 않은 바다처럼, 만약 바다가 그 파도처럼 스쳐가는 일을 정말 생각했다면 어떻게 될까? 파도는 바다가 있기에 가능하나, 파도가 없다면 바다는 움직이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물론 파도의 원리는 지구와 달의 운동에서 생기는 조석과 간만의 차이고, 기압과 수온 그리고 바다지형도 포함되나 말이다. 그래도 파도가 있기에 우리는 바다라는 것을 눈으로 움직이는 생명처럼 볼 수 있다. 그 생명이 가득하여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파도! 그것이 바다가 파도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시간의 장벽을 넘을 수가 없다. 후회의 시절, 지은이가 실어증에 걸리고, 마음을 열어준 선생과의 밀애, 그리고 아이의 헤어짐, 오빠의 누명, 카밀라의 회귀 이 모두가 비극의 연속이다. 혼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세계, 하지만 크나큰 세계도 작은 세계가 모여진 세계다. 그 작은 세계에 대해 우리는 꿈을 다시 꿀 수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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