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희는 감옥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구진을 보았다.

“나가자.”

“...당신은 알고 있었어?”

구진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양파가 통째로 썩어가듯, 그의 배우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 자식이 나랑 공주랑 경인씨를 재면서 그러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경인의 뺨을 가죽 장갑으로 후려쳤던 그 순간, 다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경인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정사정 없이 뺨을 후려갈겼을 때, 잠시 여소장의 만나기 위해 왔던 부하직원들이 다희의 팔을 꺾었다.

-이거 놔! 배우한테...-

-너한텐 이것도 과분해!-

경인이 부풀어오른 뺨을 만지면서 말했다.

-우리 그이한테 들러붙어서 그동안 얼마나 귀찮게...-

-...살인은 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어. 어설프게 사람 몰아가지 마!-

-감옥에 들어가면 알게 되겠지. 끌고 가.-

여소장이 얼음처럼 냉랭한 어조로 부하들에게 말했다.

-영창에서 잠시 머리나 식히시오.-

“설마 그랬겠나.”

구진이 달래듯이 그녀의 머리를 쓸었다.

“편지가 왔어. 당신 오기 10분전에.”

“...그...그래.”

시길이 사건의 진행을 전혀 알지 못하고 쓴 편지라는 걸 알면서도 구진은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당신 보기에.”

“...음...”

“시민회관형 배우야?”

“...시민회관형?”


그제서야 그는 공주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전혀. 너는 시민회관형 배우가 아냐. 너처럼 재능, 미모가 받쳐주는 배우가 따로 있을리가...”

“그 녀석이.”

“......?”

“나를 시민회관형 배우라고 했어. 감히...신성한 무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나한테, 무엇보다 무대를 사랑하는 나한테 시민회관형 배우라니! 아니, 좋아. 시민회관형 배우더라도 나는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그렇게 살아가지 않아! 여자 셋 중에서 가장 돈많은 여자나 선택하는 그런...!”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희는 컥!하는 소리를 뱉았다. 순간적으로 숨이 막힌 듯 했다.
구진은 그녀의 등을 쓸어 내리면서 독사의 독액을 그녀의 귀에 부었다.

“그래...넌 시민회관의 사람들 하나하나를 미치게 하는 그런 명배우가 될 거야. 그리고 거울을 두고 연기하는 그런 가짜 배우보다 더 뛰어난 그런 배우가 될 거야...거울이야 없으면 그만이지만, 너는 거울이 아니라 폭풍을 앞에 둔 바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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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설한은 한빙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린 소녀가 어느샌가 표독한 강호인이 되어버린 듯한 그 모습이 낯설어서였다.
그가 처음에 빙궁에 들었을 때에는 천진난만한 아기였는데, 아니, 빙궁을 떠나기 전만 해도 그러했는데...
자신의 사촌 동생의 모습이 참 많이 달라보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무영검주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참 아름다운 여성이구나...라는 생각이 하나, 헛된 피 흘리지 아니하는 무림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둘...

“안 자고 뭐하느냐.”

창가에서 달빛을 받으며 미홍이 말했다.

“아...그게...”

“빙아가 그렇게 예쁘냐?”

그의 말에 설한은 얼굴을 붉혔다.

“한빙이 몇살인데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단지...마음이 어지러워서...”

“검주를 생각한 게로군.”

미홍이 들고 있던 옥퉁소로 설한의 허리께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강호에 한번 출행한 남자 생각에 여인, 아니면 무공인 것이지.”

“......”

“오늘 본 빙아의 모습을 잊지 마라. 무영검주는 잊어도 된다.”

“.....네?”

“여자란, 강호의 여자란...관세음보살과도 같단다.얼굴이 한 개는 아니거든.”

“...남자는요?”

“보고 싶은 얼굴만 보는 게 그게 남자란다. 그리고 그건 얼굴을 갖지 못한 강호의 여자는 단명한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잘 알게 될 게다. 무영검주와는 자주 만날 지도 모르고...”

“.......”

“자, 잠이 안오면 내 퉁소 음률이나 하나 들어볼테냐? 황산에 꽃지다. 라는 새로운 곡이란다.”

 보따리를 엉덩이에 깔고 미홍이 중얼거렸다.

“항상 미워하지도 못하고, 항상 사랑하지도 못하네. 천개의 얼굴에 천개의 번뇌를 담나니...
 마음에 그대를 모셔놓고 꽃 한송이를 피운다. 꽃송이 피듯 그대 얼굴 피고...
 
그렇게 두 사람은 달빛을 받으며 퉁소를 연주하고 듣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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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백작.”

진기혁은 머리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우리 잘못입니다.”

“무슨 말씀이신?”

시길은 머리의 골이 울리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파혼...공주가 내민 조건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두 여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진기혁에게 경인을 넘기고, 구진에게 다희를 넘기라는 말은 그의 영혼 중 삼분의 이를 덜어내라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우린 그냥...”

“문서가 말해주지 않습니까. 전 깨끗이 포기하겠습니다.”

시길의 말에 진기혁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럼 결혼은 어떡하고.”

“...서류대로 원래 백작은 당신이 아닙니까. 당신이 더 잘 알겠죠. 서류에 있는 대로 당신은 경인양과 결혼하는 겁니다. 신랑만 바뀌는 결혼식이니 크게 문제될 것 없을 겁니다.”

-서류가 복잡해졌다던데.-

공주가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애초에 상속대로라면 그대는 그 여자들하곤 상관없다니까?아직 포기를  못했어?-

어젯밤에도 공주는 계속 그의 귀에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퍼부었다.
왕가의 먼 친척이 된다는 기쁨도, 엄청난 돈을 받게 되리라는 예상도 그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게 써.-

공주는 그의 손에 만년필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다희씨에게.-

뭘 이야기하려는 건지는 분명했다.

[나는 이제 부마가 되려고 합니다. 당신의 연기는 너무 질립니다. 이제 당신의 연기 상대를 하는 것도 지겨워졌습니다. 아니, 연기 자체가 지겨워졌어요. 이젠 공주의 남편이 되어 편하게 살렵니다. 당신은 이제 한물 간 연출가 노씨와 함께 적당히 인원 수 채워서 시민회관이나 도세요. 그게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립니다.]

공주가 부르는 말을 다 받아적자 공주가 입술을 살짝 혀로 핥고는 다시 말했다.

-잘 하네?-

-......-

-하나 더 쓰자.-

-......-

그는 반항할 힘조차 없었다. 공주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하는 건 분명한데...그게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경인양에게-

공주가 천천히 불러주었다. 시길은 마치 자동인형처럼 아무 감정없이 받아썼다. 그리고는 옆에 파고드는 공주를 밀어내고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연기는 항상 자신을 바라봐주는 다희를 향했다. 그리고 그런 다희를 향한 모습을 봐주는 수많은 군중들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젠 부마라는 직책이 생길 것이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자리.

-연기가 널 자유롭게 해줄 줄 알았어?-

그의 손에 밀린 공주가 악다구니를 썼다.

-아니, 그게 오히려 널 압박하고 있을 뿐이야. 다희라는 여자가 나보다 나을 게 뭔데? 엉? 넌 공주랑 결혼하는 거라고!-

그리고 시길은 눈앞에 있는 진기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경인양을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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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바짝 오른 한빙이 채찍을 날리면서 객잔에서 뛰어내렸다.

파앗!

빙타편이 뱀처럼 감아들어가며 호리병을 손에 든 여인의 손을 물어뜯을 기세로 날아갔다.
그녀는 빙긋 웃더니 호리병을 열고 나뭇가지로 빙타편을 감았다.

뚜뚝.

“어어어?”

한빙은 잠아당겼지만 빙타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원래 그녀 의도대로라면 빙타편은 상대편의 손목에 감겨 있어야 했다. 상대는 가지를 굵은 걸 쓰지도 않았다. 그저 빙타편이 오는 대로 내밀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가지는 빙타편을 팽팽하고 잡아당기고 있었다.

“한빙!”

객잔위에서 미홍이 그녀를 불렀다.

“도와주지 마십시오. 사관.”

묘령의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저가 배워야 할 것이 제법 있으니까요.”

빙타편을 당기려고 했으나 되지 않자 한빙은 한 손으로 은자를 꺼내 그녀를 향해 던졌다.
은자는 하나가 곧 세계의 모양이 되어 그녀를 향해 날아갔다. 마치 은색의 달처럼 날아간 그 은자는 여인의 정수리를 직격, 할 듯 하였으나 그녀는 이내 호리병의 내용물을 꺼내면서 잽싸게 피했다.
그동안에도 빙타편은 여전히 팽팽하게 그 가지에 묶여 있었다.

“괜찮을까요?”

설한의 물음에 미홍이 천천히 대꾸했다.

“...글쎼다.”

“웬만한 자는 상대가 안되는데...무영검주는 과연...”

호리병에서는 물이 나와 그녀를 향했던 은자의 방향이 조금 틀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빙타편을 끌어내면서 그 무게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한방에게 장을 한 방 날렸다.
놀란 한빙은 뒤로 살짝 몸을 비틀어 장을 피한 후 두번 발을 구른 후 다시 객잔위로 올라갔다.

“장하군요.”

묘령의 여인이 웃었다.

“5초식을 넘겼으니...내가 허언한 것으로 되었군요. 빙타편과 은자는 다시 돌려드리지요.”

그녀가 다시 가지를 슬쩍 앞으로 당기는가 했더니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휘리리리리릭!

빙타편은 마치 감아놓은 천이 풀어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한빙쪽으로 던져졌다.
그 바람에 다시 중심을 잃은 한빙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미홍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개입할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저 여인, 무영검주가 실제로 목숨을 거둘 생각이었다면 한빙의 목숨을 경각에 달렸을 터.
세상은 넓고 선인이 많은 만큼 악인도 많은 법이니까.

“무기가 좋다고 다 좋지는 않은 법이지...”

묘령의 여인이 생긋 웃었다.

“소저들이 깨닫는 바가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짐꾸러미에서 또 다른 호리병을 꺼내 간을 내놓으라는 소녀에게 내밀었다.

“치료가 될 진 모르겠으나, 한번 써보시지요. 요즘 저도 간이 좋지 않아 장복하고 있으니 도움이 될겝니다.”

소녀가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미홍이 그녀를 불렀다.

“검주. 검주의 약짓는 솜씨는 어디로 가지 않았구려...요즘은 또 어디에 있소?”

“구름 따라 구르는 돌따라 그리 지내고 있지요. 황산에 꽃이 많이 피었던가요?”

그녀는 그렇게 대꾸했다. 미홍은 별다른 말 없이 멍 하니 서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분은 명의로 소문난 분이시다.괜한 설녀 간보다는 그게 나를 것이니 갖고 가거라. 한번에 한방울이면 충분할게다.”

객잔에 있던 자들은 그제서야 미홍과 검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패설사관이나 무영검주나 강호에 발을 들이는 일이 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들이기에 오늘 그 건방진 설녀와 검주의 대결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검주님!!!”

무리들 중에서 검주에게 인사하겠다고. 덤비다가 객잔에서 그대로 굴러떨어진 자도 있었다.

“무영검주님!!!”

한빙은 엉덩이에 멍이 엄청 들었는지 투덜거리면서 아예 다리를 뻗어버렸다.
그러나 놀란 눈매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자존심이 있어 무영검주를 외면할 뿐이었다.

무영검주는 호호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내 바람처럼 사라졌다.
무영검주를 연호하던 강호인들도 재빠르게 경공술로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누굽니까?”

설한의 말에 미홍이 대답했다.

“모든 검과 도의 주인. 무영검주라고 한다. 한번쯤은 다들 들어보았을 이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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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은 부모로부터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터뜨렸다.

“무슨 말이에요! 파혼이라뇨!”

“전하께서 원하신단다.”

여소장의 난처한 미소가 경인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애초에 원하지 않던 약혼이니 차라리 왕의 제안이 그에게 맘에 들었을 것이었다.

“그 공주 유명하잖아요! 나쁜 방면으로! 왜 갑자기 그렇게 되는 거에요!”

“공주님을 모욕하지 마라.”

“내 약혼자는 고작 며칠 전에 만났을 뿐이잖아! 그런데 임신이라는 말도 안되는!”

경인이 늑대처럼 사납게 대들자 여소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애가 자신이 알던 원래 딸이 맞던가?

“하여간 혼례식은 예정대로 할 계획이란다.”

“저요? 아니면 민시길 백작의?”

그녀가 또록또록한 어조로 되묻자 소장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둘 다.”

민지린 여사가  경인에게 대답했다.

“어째서요? 파혼인데, 어째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되는 거죠? 설마하니 백작이 분신술을 쓰나요?”

“가문에 가장 가까운 친척이 나타났단다. 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야. 얘야. 그렇게 되면 재산도 상속받을 수 있고...민시길 백작이 약속했다더라...너도 그 사람을 만나면 마음에 들거야.”

“천만에!”

경인은 가까이 있던 러시아 인형을 들어서 바닥에 집어던졌다. 와장창!
안에 들어있던 사기 인형들이 겹겹이 박살이 났다. 마치 그녀의 복합적인 마음처럼.

“어차피 그런 거죠? 너란 애는 아무나 좋아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요! 민시길 백작의 멀끔한 얼굴에 반한 것처럼 이번 남자도 얼굴이 멀끔하니까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네가 전하께 그 이야기만 안 했어도...”

“무슨 이야기?”

경인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 여자가 살인범이라는 이야기? 어차피 다들 떠들던 이야기잖아요! 그 여자 항상 기분 나빴어요. 왜 남의 약혼자를!”

침묵 가운데 누군가가 그녀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실로 들어섰다.
너무나 조용한 태도여서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파앙!

긴 가죽 장갑이 말할 사이도 없이 경인의 뺨을 후려갈겼다.

파앙!

두번째로 경인의 오른쪽 뺨을 후려갈긴 후에야 다들 그녀가 나다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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