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빙, 설한, 미홍은 의견일치를 보지를 못했다. 미홍은 궁으로 가면 안 된다고 했고, 한빙은 궁에 가서 따져봐야한다 했다. 설한은 복잡한 얼굴로 결정을 내리기를 하지 못했다.

“어떡할테냐. 궁으로 가는 건 막지 않겠다만 권하지는 못하겠다. 모반으로 내명부에 소가 들어간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런 거라면 아니라고 밝혀야하잖아요.”

한빙은 그렇게 대꾸했다.

“근데 왜 하필 내명부였을까요?”

복잡한 생각에 생각을 하던 설한이 말했다.

“응?”

미홍은 뜻밖의 말에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물론 미홍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밝혀서는 안되는 비밀이었다.

“그러네? 듣고 보니...미홍. 어째서 내명부죠?”

외명부와 내명부.
세상을 다스리는 겉과 속.
외명부는 황제가 실무를 보는 실질 세상.
내명부는 황후가 다스리는 궁의 내부.
강호는 무림의 우두머리인 황제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공간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적자생존의 싸움을 결말내는것은 최고수 황제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글쎄다...황제께서 워낙 바쁘셔서 그런 게 아닐까...”

“......”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촌남매가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우물쭈물 말만 삼킬 뿐이었다. 황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대는 한때 강호의 협객이었지. 내 목숨을 구해준 것도 그대의. 무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었을 터...나는 그대를 사관에 올릴 때부터 그대에게 내 목숨을 넘기기로 했다네. 그대에게 한번 더 목숨을 빚지겠...-

그는 그 이후에 황후가 하는 말을 귀에서 지웠다. 다만 마지막 말은 지우지 못했다.

-이번에도 내 목숨을 한번 더 구해주게. 안거이의 자식 둘을 다 없애서...황제의 혈통은 내명부 내에만 있도록...-

안거이...
그는 한숨을 쉬었다. 금방이라도 보검의 용이 튀어나올 정도로 강한 힘을 검집에 주었지만 그는 칼을 빼지 않았다.

-그대가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대의 친우 거미를 풀겠네...그를 위해서라면 그대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청주 드세요.”

그 셋이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있을 때 객잔의 심부름꾼으로 있는 아가씨가 그들에게 잔을 주고 술을 따라주었다.
청주는 향기롭고 샘물같은 맛이 났다. 청아하면서도 독하고, 독하면서도 순했다.
아가씨는 살짝 살짝  자신의 어깨를 주무르는 등, 약간 불안한 거동이었다. 물론 설한과 미홍은 보았다.

“미홍...저 아가씨가...”

“알고 있다. 좀 있으면 저분이 먼저 말씀하실 것이야...”

“오래간만에 사관님이 오셔서 객잔이 빛이 나네요.”

그녀는 초승달같이 눈을 반쯤 감았다. 그리고 생긋. 마치 옥으로 만든 옥수수알을 보는 듯 했다.
금고리 하나 안 했지만 청초하게 빛나는 것이 그녀의 청춘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설한은 청주때문에 취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한빙은 그가 왜 그러는지 자알 알고 있었다. 한빙은 뭉툭한 구두코로 설한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오부인. 남편께서 안 보이시는군요...요즘 힘든 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오부인?
그 말에 설한의 얼굴이 시시각각 흐려졌다.

“많이 몸이 안 좋아서요. 예전에는 요리도 곧잘 하시던 분이 방안에만 틀어박혀 계신답니다.”

“아, 그럼 이 환단을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전에 제게 부탁하셨던 것입니다.활인환단이라고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미홍은 환단을 건네주면서 가볍게 오부인의 등의 점혈을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약간 구부정했던 오부인의 어깨가 펴지면서 어릿어릿 보이던 멍이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설한은 하나라도 놓칠 수 없는 장면인 듯 그 장면을 유심히 보았다.그리고 오부인을 향한 설한의 눈은 소년이 부인을 보는 것이 아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무영검주가 한번 스치고 지나간 인연으로 바뀐 그의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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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검은 그림자가 휙휙휙 날았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마치 새처럼 날아가는 모양이 얼핏 보면 박쥐를 닮았다.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날아가는 그 모습에 새들은 어쩌면 그들이 부러울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검을 휘두르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당하지 않는 강한 짐승이었다. 
그들은 지금 무영검주를 쫓고 있는 중이었다. 세속에 오래 드러나지 않던 무영검주가 세상에 나왔으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무영검을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절반, 선대 무영검주를 죽여 승계받은 그녀의 자리를 또 빼앗을 마음이 절반...

무영검주는 바위에 앉았다. 가까이 좇아오는 자들은 멀리 유인해서 보내더라도, 나머지 후발대들은 어찌할 것인가?천명이 넘어가는 모양이니 한꺼번에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애롭거나 쉬운 여자가 아니었다.
무영검주는 오래된 협객들 중 하나였다. 협이 어떤 것인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검 하나를 들어보일 뿐.

옛 시절의 동료들은 다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운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검객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현명함. 그것은 그녀의 시대의 검객들은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감 하나를 믿고 힘들을 겨루었다.

“거기 검이 멋지구만.”

상대하기 어려운 자는 피한다. 그것이 그녀의 응대법이었다.

바로 오늘 같은 상대를 만난 날이 그러했다. 비는 추적추적 오는데 쫓아오는 자들은 계속인데다가 눈앞의 자는 넝마를 뒤집어썼지만 얼핏 보기에도 제법 재주 있어 보이는 자였다. 8개의 금속다리를 가지고 서 있으니 말이다.

“아, 그렇게들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모조품.”

그녀는 원래 말을 길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설녀에게 한 수 가르친 것도 그저 빙타편이 어떻게 생긴 건지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서였다. 소문이 워낙 길게 나는 아이니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모조품이라고? 한번 보여주지 않겠나?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보물만 감정했거든.”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여차하면 빼앗을 것이라는 건 그녀도 이 자도 알고 있었다.

“싫다고 대답은 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그에게 검을 던져주었다.
그는 그녀의 반대편 돌위에 앉아서 검을 감정했다.

“거짓말만 하는군.”

그는 그녀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검의 내력이 장난이 아닌데...”

“한번에 아시다니 대단하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미줄이 날아왔다. 눈썰미 좋은 그녀는 그 거미줄이 옛 소문의 금강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녀의 검이 좋아도 금강석으로 만든 실을 상대하긴 힘들었다.
그녀는 검을 거두어들이고 얼른 머리 위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역시 변함이 없군. 무영검주.”

“...설마하니 옛날 금강사를 썼었던 거미인가?죽은 줄 알았는데?”

“...그것 참.”

거미는 금강사를 거두어들였다.

“내 이름을 아는 자를 상대로는 약해진다는 말이지.”

“...무영검을 원하는 거라면  없다.”

그녀의 은근 딱딱한 어조에 거미가 대꾸했다.

“그렇게 무뚝뚝할 건 없지 않나.”

“거미를 상대로는 그렇게밖에 말을 못하지. 또 몇몇 협객의 목을 쳐서 궁에 보관하려고?”

“...딱딱하시긴. 예전에 부드럽게 굴었던 남자도 있었으면서. 내려와서 앉게.”

퐁 하고 거미가 자신의 몸을 두른 넝마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한 잔 어떤가?”

“허튼 수작을 하면 무영검의 진맛을 보게 될게야. 무영검이 그냥 붙은 호칭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테니.”

“......”



그녀는 가볍게 나무 밑 바위로 뛰어내렸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있어.”

“음?”

무영검주는 거미가 내미는 술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빙타편의 행방을 아나?”

“......”

“찾으면 죽이게?”

그녀의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에 따라 다르지.”

“기억력이 없어진 것 같아서 내가 말하자면 그건 황제가 빙궁주에게 선물로 하사한 거야. 그거 하나 찾으려고 일부러 나올 필요는 없었다고. 아니, 사실 그건 핑계고 무영검을 찾으러 온 거 아냐?”

“...내가 일부러 ‘검의 숲’속에 걸어갈 거라 생각하나?”

검의 숲. 그곳은 무영검주가 거주하는 깊은 산골에 있는 그녀의 집이었다.
한때 진짜 무영검주가 그곳에서 검을 만들고, 검법을 수련하며 살았었다.
그는 어느날 금강사에 목이 졸린 채 발견되었고, 그녀는 그때부터 무영검주라 자칭하며 살았다.
무영검은 워낙 귀한 검이었기에 검의 숲 어딘가에 꽂아놓고 그녀는 그것보다는 못하지만 검 중에는 가장 강한 검인 월영검을 지니고 다녔다.

“하긴 그 다리로는 안되겠지. 다리가 그 사이에 6개나 늘었네. 다리 관절이 많이 아픈가?”

“검의 숲에서 많이 다쳐서 다리를 늘렸지...”

그녀는 자제하려고 애썼다. 옛 무영검주는 금강사에 목이 졸려 죽었다. 금강사를 쓸 수 있는 건 거미 뿐이고, 그녀는 언젠가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그래서 그를 만날 때까지 죽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를 언젠가는 만나리라고 생각했지만...아직도 그녀는 그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흥, 그때의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한가롭게 빙타편 회수나 이야길 하다니.”

그녀는 솔직하게 본심을 드러냈다.

“...아, 걱정하지 않아. 네가 아무리 검법이 신묘하다한들, 내 금강사를 이겨낸 자는 없었으니...”

“그래?”

그녀는 내심 이빨을 갈면서 조용히 말했다.

“저 앞에 빙타편을 가진 자가 있으니, 그래도 1000명은 넘으니 조심해서 회수해. 다 끝나면 찾아줄테니.”


이이제이.적으로 적을 상대한다. 그녀는 거미가 아무리 강해도 3일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다 죽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쳤을 때 거미의 목을 친다. 그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거미라고 해서 목이 철갑일리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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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는 성안시라는 곳이 배당되었다. 성안 백작 민시길.

“어서 나가시죠. 백작님.”

“아,네.”

주례의 재촉을 받고 그는 대기실에서 실내로 향했다. 실내는 바깥의 찬란한 햇살이 비쳐 눈부셨다.
그는 얼굴을 밖으로 돌리려 애썼다. 지금 이 시간이면 경인의 결혼식이 중반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없이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가 다희처럼 격한 성정이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경인은 얼마 후에는 안정을 되찾고 그를 바라봤듯이 다정한 얼굴로 기혁을 볼 것이다.
그녀는 중산층의 여인이었다. 집을 원하고, 돈을 원하고, 다정한 남편과 아이들을 원했다.

다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는 분노했다고 들었다. 그가 보낸 편지를 갈갈이 찢어발기고, 왕을 향한 쇳소리를 질렀다고.
아마 그녀는 시길은 결코 공적인 자리에서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결코 그를 자신의 마음에서 내려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젠 그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공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난 당신을 선택했겠지...나의 마돈나.-

왕실의 주례가 천천히 주례사를 읊었다. 그는 그의 옆에서 반지를 기다리는 공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여윈 손가락에 치수가 약간 큰 반지를 끼워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미나 공주님과 부마 민시길 백작의 결혼식이 완료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눈부신 섬광들.
그는 공주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섬광은 더 요란하게 터졌다. 그들의 결혼의 시작을 알리 듯이.

-당신을 배반했고 앞으로도 배반하겠지. 우리는 애초에 만나지 않는 것이 옳았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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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신부는 눈물 한방울을 반지에 떨어뜨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버진로드로 걸어갔다.

“아름다운 신부로군. 하지만...”

“신랑이 바뀌었다지...신부 요청이었다던데...신랑이 누구더라?”

“아냐. 이름만 바꾼 것 같던데. 저 사람도 민백작이라잖아.”

여소장은 신부의 손을 신랑에게 건네주었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민기혁 백작.”

“걱정마십시오.”

민백작은 여소장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결혼식 전까지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신부가 미인이라는 점이 그를 만족시켰다.
신부는 결혼식 전까지 그의 출입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왔다는 말만 들으면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그가 있는 거실까지 들려왔다.

-그 바보가 저절로 자기 복을 찰 줄이야.-

왕의 명령으로 급하게 충성맹세가 이루어졌고, 그 이후에 자동적으로 약혼이 이루어졌다.

“웃지 말아요.”

그의 얼굴을 향해 면사포를 쓴 신부가 싸늘하게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실없이 웃을 수 있지? 이런 날에?”

주례가 주례사를 막 하려다가 잠시 기가 막혀 신부에게 주의를 주려고 했다. 민기혁도 순간적으로 신부가 충동에 못 이겨 면사포를 집어던지고 나갈까봐 겁을 집어먹었다. 

“저...”

신부의 목소리가 작았기에 기혁은 이내 마음을 놓았다. 이 여자도 내심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겠군.

“원하지 않는 결혼인 건 압니다만...노력하는 남편이 되겠습니다.”

“...됐어요. 이제 와서 어쩌겠어.”

속살거리는 신랑신부의 모습에 주례는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주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왕가 직속의 결혼식장에서 공주와 시길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경인과 기혁의 결혼식과 동시에 진행되므로, 경인은 이 결혼식 생중계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시길에게는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준비 다 끝났어?”

공주의 말에 시길이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몸 괜찮아?”

공주와는 사이가 좋아지면서 두 사람은 예전부터 연인이었던 것처럼, 부부였던것처럼 움직였다.
아니, 원래 두 사람은 타고난 배우였다. 실생활면에서 위선이라 할 수 있는 그 분야에서.

“벌써부터 유산할까봐?”

“하긴.”

“내가 유산하면 당신은 날 버리고 나다희에게 가겠지? 그건 안돼.”

공주가 웨딩드레스에 발을 비틀거리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왕가의 파격덩어리였던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검정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왕은 기가 막혀 하면서 그게 장례식이지 결혼식이냐고 받아쳤다.

-머리에 뭐가 든 거냐? 제멋대로 신랑감을 지정해서 통보해놓고는 이제와서 뭐가 잘났다고 검정색 타령이야!-

-내 결혼식인데 내 신랑을 내가 정하는 게 어때서! 내가 정략결혼따위 할 줄 알았어요?-

-저번 약혼도 신랑감은 네가 정했어!-

-내게 강요한 거잖아!-

시길이 보는 앞에서 왕과 공주는 일반 가정에서 하는 것처럼 싸움을 했다. 싸움의 마지막은 화를 참지 못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따귀를 갈긴 것으로 장식되었다.

-크...크로스카운터.-

권투 용어가 생각나서 중얼거린 그에게 이내 두 사람의 비난이 떨어졌다.

-제정신인가? 백작? 결혼할 사람의 말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군.-

-맞아. 당신은 당신 부인이 왕한테 맞아도 할 소리라는 게 겨우 그거야?-

두 사람이 한꺼번에 추궁을 하자 곤란해진 시길이 중얼거렸다.

-그...그게 아직은...익숙치가 않아서...-

-익숙해져야지.-

왕과 공주는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왕의 신하이고, 공주의 남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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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북서쪽에 위치한 밀궁에 시녀 하나와 내시 하나가 손을 꼭 잡고 들어갔다.

“아이, 이러다 들키면 어떡하지?”

“걱정마. 이쪽으로는 아무도 안 와. 여긴 보물 수장고거든.”

“어머, 그럼 더 안되잖아.우리 나가자...”

소녀의 말에 청년이 대꾸했다.

“여기 보물은 걱정 안 해도 돼. 진짜 아무도 안 온다니까. 내가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데 내 말을 못 믿겠어?”

청년은 소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하지만 소리지르면 누군가가 올지도 모르지. 그러니까...조용히...”

그런 그들을 누군가가 안광을 빛내면서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궁의 수문장.
밀궁의 거미라고 불리는 자였다.

“자, 준비 되었지...?이쪽으로 와.”

청년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한쪽으로 데리고 가면서 보물들을 설명했다.

“이건 동방 용아족을 정복했을 때 그 왕으로부터 거둔 것, 이 버섯은 영자라고 하는 건데 300년전 피어난 걸 거둬온 거지. 아직까지 쪼그라들지 않아서 신비의 버섯이라고 불리고, 그리고 이 해골은...”

청년은 손에 쥔 해골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진짜 해골이다.”

“자기야, 소리 지르지 않기로 했잖아. 일부러 겁주는 거지?”

“아...아니...으아아.”

소녀의 바로 뒤에 안광을 형형히 빛내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다리는 8개인 궁중에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수문장이.

“어디보자. 그 해골은 내가 술을 부어서 마시는 술잔인데...이제 네 머리통으로 해볼까?”

청년은 그래도 무공이 강한 편인지 소녀를 나꿔챈 후 방에 뒹굴던 보검 하나를 꺼내들고 거미를 상대했다.

“호오, 용기가 가상하거니.”

거미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칭찬이 칭찬이 아닌 듯...

“그 보검이 뭔지는 아느냐? 태조가 이 왕조를 여실 때 내게 맡기신 물건이야. 나같은 천한 것이 만질 물건이 아니란 말이다.”

거미는 바닥에 늘어져 있는 보라색 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아. 한판 해보자꾸나. 가위 바위 보를 해서 네가 2번 이기면 나가게 해주며. 안 그러면 네 해골짝을 내놓아야 할 게야.”

비록 상대가 무섭기는 생겼지만 손에 쥔 것이 보검인데다가 가위바위보만 하면 된다는 말에 청년은 무섬증을 잃었다.그리고 호기롭게 말했다.

“흥! 그까짓거. 그 전에 저 소녀는 나가게 해줘.”

“오라버니!”

소녀는 거미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저희 둘다 그냥 보내주세요...잘못했으니 아무쪼록 오라버니도 그냥 보내주세요...”

“...그럴까?”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수문장이 그렇게 말했다.

“...뭐? 감히 도발을 해놓고는...”

청년이 그렇게 말하면서 보검으로 수문장의 다리를 쳤다. 애초에 그는 가위바위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어린 놈이.”

수문장은 긴 다리로 청년을 후려갈겼다. 그냥 거대한 거미의 다리가 아니라 그것은 백금과 강철로 만든 8개의 의족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손으로 든 보라색 천으로 청년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의 발에 감아 힘을 주었다.


뚜뚜뚝.


목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청년 내관의 숨이 끊겼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거미 수문장은 머리를 긁적이면 중얼거렸다.

“나라고 꼭 그러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그나저나...이거 빙타편을 감쌌던 천 아닌가? 이게 왜 이렇게 따로 나와 있지?...자고 있는 동안 누가 훔쳐갔나? 황제가 알면 큰일인데...”

그는 한동안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호쾌하게 말했다.

“좋아. 황제가 알기 전에 돌려놓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그날 거미는 밀궁의 문을 열고 8개의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거리면서 경공술을 써 수도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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