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프롬프트 120% 질문 기술 - 업무 속도 10배 향상!
ChatGPT 비즈니스 연구회 지음, 김모세 옮김 / 정보문화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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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OpenAI社가 챗GPT라는 생성형 인공지능 개발에 성공한 이후, 좋은 프롬프트를 하는 기술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본래 자신은 검색 실력이 좋다며, 평소 검색하듯이 하면 되지 않겠냐고도 하던데, 그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런 프롬프트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또 지금 이 책에서 보듯, 그간 프롬프트에 대해서도 연구가 많이 이뤄졌습니다. 

책은 모두 7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챕터 1에서 프롬프트가 무엇인지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이어 업무에서 활용하기, 일상생활에서 요긴하게 쓰기, PC나 스마트폰과 연동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쓰기, 가장 모범적인 프롬프트의 예 등이 설명됩니다. 프롬프트 하나를 토픽으로, 이처럼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챗GPT가 어느 정도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왔는지를 확인해 줍니다. 

p26을 보면 고객 클레임에 대한 사과 방법 조사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이런 사항이야 해당 업무에 종사하는 분들만 알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대목에서 공부해야 할 포인트는, 저 프롬프트란에 써 넣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최고의 고객 지원 담당자입니다. (중략) 적절히 사과하는 방법을 5개 나열하고, 포인트를 상세하게 알려 주십시오." 이제 이런 복합적이고 특정 뉘앙스를 풍기는 질문을 컴퓨터가 알아듣고, 그 답을 자연어와 아무 차이 없는 스타일로 저렇게 내놓는 걸 보면 신기합니다. 다만 제가 아쉽게 느낀 건, 이 정도는 해당 업체에서 더 구체적으로, 더 상황에 특화한 매뉴얼을 이미 마련하고 있어야 맞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이 기능이 유용하려면, 이 분야에 전에 종사해 본 적이 없는 초보 사장님한테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업체이건 인플루언서이건 요즘은 인oo그o 같은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p37을 보면 해시태그 전략에 대해 제안을 받는 상황인데, 역시 그 질문은 자연어(自然語)스럽고 매우 구체적입니다. 질문마다 "당신은 최고의 ooo입니다."라는 템플릿 프레이즈가 붙는데, 혹시 "당신은 평균적인, 아니면 이제 갓 일을 시작한 초보 ooo입니다."로 문구를 바꾸면, 그에 걸맞게 다운그레이드된 처방이 제안될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마 그렇기보다는, 성숙한 엔진답게 "그러시군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상황에 무관하게 저는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겠습니다. 저의 대답은 최고의 ooo일 때와 같답니다."라며 너스레를 떨 것 같습니다.(실제 안 해 봤기 때문에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AI를 활용하지 않는 사장님(중소기업 경영자. 동네 자영업주 등)도 그 나름 창의력을 발휘하여 간판도 재미있게 걸고, 배달앱에다 말도 웃기고 재치있게 광고합니다. 그런데 이런 센스가 전혀 없고 뭐라고라도 홍보는 절실한 사장님이 있다면? 그때도 챗GPT에다 물어 보면 됩니다. 질문이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좋다는데, 음... 모르겠습니다. 책에 나온 예는 대단히 모범적입니다. 하지만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려면 저런 모범적인 답안보다는, 좀 힙하고 기발한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을지. 

그런데 p90을 보면 재미있는 주제가 나옵니다. 식재료 제조사(制造社)의 마케터로서, 제품 이름을 제안해 보라는 프롬프트에, "신선한 향기와 활기를 담은 '차바라기'로 새로운 차 경험을 시작하세요!"를 내놓는다는데, 이 대답은 일종의 광고 카피로 제시하는 건지, 아니면 앞뒤 장식 문구는 다 제거하든지 하고 "차바라기"라는 이름만 건져 가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전자라면 좀 그렇고, 후자라면 차바라기라는 하나의 시안을 비롯 여러 개를 제안받을 수 있을 테니 좋을 듯합니다. 후자 쪽이라면 막 사람한테 영감 떠오르기를 기다리기보다, 이 챗GPT 컨설팅이 훨씬 좋겠습니다. 그런데 작명도 실제 이름이 얼마나 좋냐보다 작명가 누구한테 받았냐가 더 대중에게 어필하듯, 상표 이름도 챗GPT보다는 손혜원 같은 사람에게 받아왔다고 홍보를 해야 더 잘 먹힐 것 같습니다. 또 이게 식재료 제조사인지, 아니면 완제품 마케터인지에 따라 답이 다를지도 궁금합니다. 

일본책이 원서다 보니 하이쿠[俳句] 작성(p109)도 챗GPT한테 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시도는 일본 자체 개발 인공지능 연구 과정을 통해 10년 전부터 이미 시도되었더랬는데 성과가 괜찮았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단조롭다(하이쿠는 특히나, 관행대로만 지으면 아주 밋밋한 실패작이 나오기 쉽습니다)는 생각이 든다면, "독창적인" 등의 키워드를 프롬프트에 넣으라고 합니다. 영문 첨삭(p123) 같은 건 대단히 유용한 기능이겠는데, 사실 이런 것도 이미 20년 전 MS 워드(p148)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한 기능이었습니다. 엑셀 함수를 보여 주고 이게 무슨 기능인지 풀어 줄 수(p140)도 있다고 합니다. 

문제를 풀고 직접적인 해설을 받는 등의 기능은 컴퓨터가 잘 하지만, 메타적인 사고는 인간에게만 가능한 걸로 여겨졌습니다. p158에는 메타정보 생성하는 방법도 나오는데, 다만 이게 컴퓨터 입장에서는 메타라는 의미가 크지 않을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 7장에, 여태 검증된 가장 효과적인 프롬프트들이 표로 정리되었으므로 시간없는 이들에게는 이 부분만 참조시켜도 될 듯합니다. 깔끔하고 멋진 책이었네요.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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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입문 - 프랑스어권의 비트겐슈타인 입문 필독서
롤라 유네스 지음, 이영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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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베이루트 소재 성 요셉 대학교에 재직 중인 학자입니다. 책 뒤표지를 보면 "프랑스어권의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라는 말이 있는데, 레바논은 1차 대전 후 프랑스의 관리 하에 들어갔었고, 사실 19세기에 이미 나폴레옹 1세가 지중해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며 투르크로부터 빼앗아 온 상태였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정 시대에 베이루트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시설이 성요셉대학교입니다. 앞표지에 나온 원제 "Introduction a(아 그라브) Wittgenstein"이라는 문구만 봐도 불어로 원래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학계의 원로이신 이영철 부대 명예교수가 번역했습니다. 역자 서문 p13을 보면, 원저 중 독어나 영어로 된 문장은 가급적 (불어 원서로부터의) 재인용이 아닌 원문으로부터 번역했다고 밝히시는데 이런 점만 봐도 벌써 믿음이 생깁니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에 죽은 비트겐슈타인은 그 후로도 끊임없이 재해석되었는데 그의 사상적 깊이와 입체성이 증명되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타고난 지능 자체가 범상치 않아서 천재 캐릭터 자체가 주는 매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저자 서문 p17을 보면 공산주의자, 소련 간첩(p61 이하 참조), 동성애 아이콘 등으로 매번 거듭나고 재해석되는 그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어조가 느껴지는데, 이 중에는 "탈식민의 기수"도 있습니다. 저자도 레바논 사람이다 보니 이런 시각에 특히 공명하는 듯하며, 이렇게 성격 규정을 한 사람은 인도 델리大 교수 비나 다스(Veena Das)입니다. 본문이나 권말 참고문헌 소개에도 이 여성학자의 풀 네임이 나오지 않아서 제가 이 후기에 따로 적어 둡니다. 

아무래도 비트겐슈타인 하면 일반인들이 대뜸 떠올리는 사항이 분석철학, 논리실증주의 등이겠습니다. 이 역시도 사실은 40여년 먼저 고틀로프 프레게가 정초를 놓은 분야이기는 합니다(p219). p73을 보면 역자 각주에서, 프랑스어 원서에는 (독일어로) ist라고 표기되나 이 번역서에는 영어로 is라고 표기한다고 밝힙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대단히 영어에 능통했고(물론 처음엔 서툴렀죠. p37) 그가 사상의 핵심을 공유한 지인들도 영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p73에 나오는 계사(繫詞. copular)를 설명할 때, 뜻이 같은 것 같아도 외연이 훨씬 넓은 영어의 is가 독일어 ist보다 더 적절한 예시 아니었겠습니까. 

전국시대 조(趙)의 공손룡도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폈습니다만 2300년 후의 비트겐슈타인 역시 계사로 연결되는 주부와 술부의 관계가 단일하지 않음에 주목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그저 한가하고 무익한 말장난이 아니라 불합리한 언어의 지배로부터 인간 정신을 해방시키려는 노력(p75), 언어에 의해 걸린 마법에 맞서는 투쟁(p151)임을 우리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p78을 보면 역자는 각주를 통해 부정적 사실("일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과 비사실("지구는 항성이다")을 구별하여 초보자를 돕습니다. 우리가 탈근대 탈근대 하는 건 근대의 긍정적 속성에 주목하기보다, 비트겐슈타인도 내내 예민하게 여겼던, "근대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전제로 한 반응인데,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에서 경탄이라는 반응을 제거하고, 오히려 과학의 본래 스탠스인 무관심, 냉담으로, 저런 의도된 탄성과 난리법석에 맞서라고 합니다. 번역문에서, 역자 이영철 박사님의 스타일이 발랄하십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꿈꿀 수 없는 걸 꿈꾸고 견딜 수 없는 걸 견디며 이길 수 없는 적을 이기는 낭만과 시련을 말했는데, p95에 인용되는 <논리철학 논고>의 한 구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생각될 수 있는 것을 경계짓고, 그로부터, 생각될 수 없는 것을 (따로) 경계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뒤르켐은 궁극의 인간 자유 발현은 바로 "자살"이라고까지 했는데, p115에서 저자 유네스 박사는 비트겐슈타인이 본격적으로 논하지는 않은 자살이라는 테마에 대해 잠시 곁가지 삼아 얘기를 꺼냅니다. 

생전에 비트겐슈타인이 말하지도 않은 걸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브라운 신부와 대도 플랑보의 창조자로 유명한 G K 체스터튼(비트겐슈타인보다 15년 연상)은 생전에 <정통론>에서 자살에 대해 일정 분석을 한 적 있는데, 여기서 그는 자살이 하나의 죄일 뿐 아니라, 궁극의 죄라고 합니다. 하다못해 꽃을 훔치는 도둑도 그 아름다움을 칭찬할 줄은 아는데, 자살자는 꽃밭을 아무도 못 즐기게 파괴하는 반달에 가깝다고 비유하면서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저자 유네스 박사는 비트겐슈타인과 체스터튼이 어디서 어떤 연결지점을 가진다고 여기길래 이런 대변(代辯)의 구조를 세울까요? 그 근거는 윌리엄 브레너 교수의 논문 "윤리학 기초"에서 찾습니다. 이 논문에서 브레너 교수는 체스터튼의 정통론과 비트겐슈타인의 가치중립론 사이에서 기묘한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과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암살자(p16, p225)일까요? 직업 암살자는 물론 생명들도 빼앗지만, 명성이 나려면 기술도 좋아야 합니다. 기존의 모든 엉성한 담론 기초를 일일이 지적, 비판하며 모든 체계를 다시 세워 보려던 그의 노력은 꽃밭에 불을 지르려는 게 아니라 궁극의 낙원을 지으려는 집요함이었습니다. 장자(莊子)의 비유에서처럼, 내가 지금 꿈을 꾸는지 아닌지(p182)를 명확히 알려면 제2의 데카르트가 되어 모든 걸 의심하고 끝까지 파헤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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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얼 씽 - 문학 형식에 대한 성찰
테리 이글턴 지음, 이강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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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쯤에 테리 이글턴의 <문화란 무엇인가>를 읽고 서평을 남긴 적 있습니다. 역자 이강선 박사는 후기에서 "이글턴이 이번에는 본연의 전공인 문학으로 돌아왔으며, 그것도 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사실주의를 옹호하고...(p235)"라며 이 책의 의의를 설명합니다. 이 문장을 읽고 새삼, 사실주의가 소설 장르의 완성, 정착에 그만큼이나 기여했었음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또 본디 마르크스주의의 지평 위에 서 있는 이글턴이기에, 그가 논하는 사실주의가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어느 정도나 상호의존, 포섭, 중첩, 길항하는지도 흥미롭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책에다가 제목을 "더 리얼 씽"이라 짓다니 과연 그답다 싶었습니다.  

어떤 명제라고 해도, 그것은 사실 진술임과 동시에 평가입니다(p48). 순수하게 어느 하나의 영역에만 속하는 언명은 비트겐슈타인의 판타지랜드에나 존재한다는 건 이미 판명 난지 오래입니다. "묘사"라는 게 철저히 기술적, 중립적으로 대상을 그리기만 한다고 여길 수 없으며, p48에서 로저 스크루턴이 말하듯, "무엇을 묘사할 때는 그것을 비난하는 힘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A 매킨타이어는 "사실 진술이 참 또는 거짓이듯, 평가 역시도 진위 판정의 대상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렇게, 이른바 객관성이라는 게 항상 기계적이고 중립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데서, 이글턴이 옹호하는 사실주의가 어디를 바라보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p63에서 이글턴은 사실주의를 중간계급이 낳은 아이라고 확인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사실주의는 귀족이 만들어낸 과장된 낭만주의, 위선적 도덕주의와 대치되어 탄생했습니다. p76을 보면, "대실재(the Real)는 본질적으로 환상적"이라는 정신분석학의 역설적 언명이 다시 소환됩니다. 사람은 원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좋아하지도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건 백일몽(reverie)이지 단단한 중력을 뿜는 대지, 부동산(realty)가 아닙니다. 대실재라니, 원 그런 건 지구상 어디에도 없습니다(자연주의에 대해서는 특히 이 책 p181 이하 참조). 

마르셀 뒤샹은 철물점에서 파는 변기 하나를 갖다놓고 "분수"라 명했는데 원래 인간의 인지라는 게 다 이런 식이며 발자크니 스탕달이니 플로베르니 하는 위인들도 결국은 모든 걸 오브제화(化)한 데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재현과 반영, 배제와 왜곡(p93) 사이의 넘나듦이 여전히 불편한데, p97에서 이글턴은 근대 사실주의의 큰 업적을, 페트라르카 식의 소네트 규칙으로부터 창작자와 향유자를 해방시킨 데서도 찾습니다. p107에서 이글턴은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며 "사실주의는 조작, 왜곡, 편파"라고까지 극언합니다. 사실 진술에 가치가 개입하는 걸 넘어 아예 대놓고 왜곡이라 규정하는 과감함에 놀랄 뿐입니다. 

p124에서 이글턴은 아들뻘 매슈 보몬트(<평론가의 임무>에서 대담했죠)를 인용하며 사실주의는 순진하면서도 정직하지는 못한, 일종의 환상에 대한 집요한 추근댐, 혹은 트롱프뢰유(tromp-loeil)라고까지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글턴의 책을 여태 읽어 온 우리가 알듯, 이글턴의 타매는 나중에 칭송으로 바뀌는 예가 비일비재하죠. p134에서 의미심장하게도 이글턴은 카프카의 <변신>을 예거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이글턴적 관점에서 사실주의의 극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사실주의를 일러 모든 직업, 신분에 대한 환상을 깼다며 띄우고, 반대로 막스 베버는 환멸(p135)의 괴로움을 개탄합니다. 

루카치는 당연하게도 이 책 곳곳에서 이글턴의 까마득한 선배처럼 멘토처럼 모셔져(?) 결정적일 때마다 논거로 피난처로 활용됩니다. 이글턴이 할 말은 애저녁에 루카치가 다 해 놓지 않았을까요? 루카치가 불멸이 아니기에, 그가 미처 못 한 말은 우리가 이글턴에게 마저 듣는다고 간주해도 되지 않을지. 이 독후감 서두에서 제가 바람 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p163 이하에서 본격 논의되는데 재기발랄하신 이글턴도 여기서는 우리 독자의 예상 범위를 크게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p201 이하에서 이글턴은 신교와 구교의 차이까지 논급하며 구교가 다분히 생과 세계에 대해 환상을 유지하길 원했다면 신교는 금기를 해제하고 생의 불쾌함을 사람들 앞에 그대로 노출한 공(?)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실주의를 향해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이 책의  주인공은 사실주의이기에 (그에게서 정말 흥미롭게 들을 수 있을) 포스트모던에 대해서는 p217 이하에 아주 짧게만 논의됩니다. 짧은 예고편만이지만 이상하게 재미있는데 다 그의 썰 푸는 재능 덕인 줄 우리가 익히 압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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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위의 아이들 라임 청소년 문학 64
남예은 지음 / 라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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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단편이 실렸습니다. 대체로는 해피엔딩이지만, 주인공들이 워낙에 좋지 못한, 불리한 처지에서 시작하다 보니, 이 정도면 그래도 (독자가) 만족하고 마음을 추스려야 하는 건지 조금은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여튼 모든 작품들이, 비관과 절망을 딛고 일어나 현재에 충실한다거나,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어린 독자들에게 착한 심성을 심어 줄 듯하긴 합니다. 

<나쁜 사랑>. 우리 나라에는 대성동이라는 마을이 있죠. 휴전이 된지 71년이 지났고, 그간 우리 나라는 세계적 선진국 반열에 들 만큼 발전한 데다 행정 질서도 정밀하게 정리되었다 보니, 아직도 한반도 영토 내에 이런 곳이 있냐며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TV 프로그램에서 곧잘 다루듯 휴전선 직근의 그 대성동 마을입니다. p14에서 오준구가 로운이(주인공)를 놀리며 "삼팔선에서 온 촌놈"이라 할 때 저는 이 소설의 배경이 꽤 오래 전인 줄 착각했는데, 그곳이 대성동을 가리킨다면 말이 되긴 하는 소리입니다. p20의 로운이의 대사에서 대장동은 아마 대성동의 잘못인 듯합니다. 

세상에 나쁜 사랑이 과연 있을까요? 물론 혼외관계, 불륜, 근친상간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고 비난 받는 종류도 있습니다. 그런 부도덕한 사랑은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고, 아직 어린 로운이가 지설연과의 풋사랑에 구태여 그런 부정적 의미를 덧씌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운이는 간만에 대성동을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아빠가 그걸 했는지 안 했는지, 믿을지 안 믿을지가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이미 우리가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거지.(p41)" 이 말은, 무섭도록 현실에 충실한 인식, 각성의 산물일 수도 있고, 너무도 메말라 감정의 싹이 새로 피어날 여지가 없어진 황폐한 마음의 표백일 수 있습니다. 무튼, 로운이가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설연이와 잘해보겠다는 결말로 보여 안도가 됩니다. 아빠는 아빠고 아들은 아들이죠. 

<코르셋>. 보통 여권주의자들이, 강요된 여성다움을 탈피하자는 뜻에서 이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 작품과는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생선가게를 하는 엄마와 혼자 사는 하연수는 수영 선수로서 자질이 있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중도 포기하고 엄마 일을 돕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또래남자 친구 기선우와 사이에 애를 배게 됩니다. 선우가 그렇게 나쁜 애이거나 한 건 아닌데, 여튼 애다 보니 능력이 없고, 결과적으로 무책임한 남친이 되었습니다. 

연수는 벼랑 끝까지 몰린 처지에서 (철없는) 친구 고지은의 엉뚱한 도움으로 탈출구를 찾게 됩니다. 이 돈으로 엄마 암도 치료하고 숨을 좀 돌리겠다 싶을 때, 결국 일이 좋지 않게 풀려 돈을 다 반납하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가 참 생각이 바르고(비록 다혈질이지만) 심지가 곧은 분이라서 연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서긴 하는데... 솔직히 독자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워집니다. "이만하면 부족할 게 없는 밤이었다.(p96)"는 마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반어입니다. 문순태의 작품 <어머니의 땅>도 생각이 났습니다. 

표제작인 <선 위의 아이들>은 학폭이 소재입니다. 주인공 서인우는 최기호라는 불량배가 주도한 학폭으로 오영수를 괴롭히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치고 지금 자택에서 두문불출하는 중입니다. 최기호의 부친이 택시회사 사장인데 하필이면 인우 아빠가 그 회사에서 일하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인우 아빠 역시 대단히 성정이 곧은 분인지, 직장 내 위치는 돌아보지도 않고 "영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라며 바른 증언을 할 것을 다그칩니다. 이 와중에 최기호와 그 모친은 인우를 회유하려 집에까지 찾아오는데 이런 쓰레기 양아치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아 죽어야 마땅하죠. 위층에 세들어 사는 6살 정운이가 내는 소음은 인우에게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상징하기도 하고, 그 역시 한계 상황에 몰린 가정의 일원으로서 사건의 위기를 고조하는 주요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인우는 많은 고뇌 끝에 결국 바른 선택을 하고 그 결정은 두 가정, 아니 세 가정을 구하는 듯합니다. 

<지하철 1호선>. 주인공 서상희는 대부업을 하는 엄마 덕에 잘살긴 하지만 결함 많은 가정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친구 강민지를 은근 질투합니다. 상희는 그저 질투할 뿐이었지만 누군가는 몇 걸음 더 나아가 민지네를 완전히 파멸시킬 마음을 먹었나 봅니다. 소설에서는 "사기"라고 표현하지만 제 생각에는 양도담보 계약이었던 것 같고 여튼 이게 부도덕한 짓이었던 건 틀림없습니다. 민지는 극한 상황까지 몰려 모든 것을 잃고 그 예쁜 얼굴에 상처까지 입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열심히 새 삶을 삽니다. 청소년들이 이처럼 꿋꿋하게, 과거에 집착 않고 현재를 사는 건 물론 좋은 일이지만, 저 같으면 도저히 이렇게는 하기 힘들 것도 같아요. 여튼 감동적인 네 이야기를 읽으니 마음이 깨끗하게 맑아지는 듯해서 좋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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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당신께, 다르마 톡
영화 지음, 대지 외 옮김 / 어의운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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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 전쯤인 4월 12일에 영화 스님의 <선 명상(운주사 刊)>를 읽고 서평을 올렸습니다. 이 책은 스님이 미국에서 포교 활동을 하며 남긴 대중 법문 모음입니다. 그래서인지 문체가 매우 쉽고 형식이 자유롭습니다. 읽다 보면 스님이 특유의 그 자애로운 웃음을 웃으시며 내게 말을 건네는 듯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말씀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하고, 세상의 티끌에 찌든 마음이 깨끗이 씻어지는 듯합니다. 과연 고승의 높은 경지는 말 한 마디로 중생의 번뇌를 잠재우는 것인가 봅니다. 

p72 등에서 영화 스님은 자신의 스승인 선화상인에 대해 말합니다. 사람이 종교라는 걸 갖게 된 동기는 불멸(immortal)에의 지향이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몸에 아픈 데도 없고 매일매일이 즐거우며 신체 기능도 정점에 달한 듯합니다. 물론 어린이는 근육도 약하고 잦은 전염병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대신 몸에 기운이 넘쳐나고, 쓸 수 있는 힘에 비해 몸이 참 작습니다. 그래서 열심히도 뛰어다니고, 적게 먹어도 활력이 폭발할 듯 생성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스님도 책에서, 인체는 13세가 절정이며 이후로는 그저 쇠퇴할 뿐이라고 하시는데 어떤 의미에서 정곡을 찌르신 듯합니다. 

아무튼 선화상인께서는 도교의 가르침을 예로 들며, 사람은 무려 일만년을 살 수 있는 비결이 있으며, 이는 수련자가 일생을 걸고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말씀을 했다는 게 영화 스님의 증언입니다. 만 년이라니 너무 허황되지 않은가? 게다가 정통 불도도 아닌, 인접 종교의 가르침이라니 말입니다. 다만 만 년이라는 숫자에 지나치게 구애받기보다, 바른 호흡과 명상의 수행으로 몸에 잔고장 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또 번민과 증오, 불안, 걱정, 강박 같은 것 없이 편안한 생을 영위할 수 있다면, 이야말로 신선이라든가 천계인의 삶을 사는 것에 근접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라는 것도 결국 상대적인 성격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한 1년은, 아프고 괴롭고 불안한 십 년보다 더 가치있다고 볼 수도 있죠. 

관음보살은 세상 사람들의 근심과 고통과 신음과 애로를 멀리서 눈으로 보듯이 들으며 챙기신다고 해서 이름이 그리 지어졌습니다. p126에서 영화스님은 스승인 선화상인에 대해 회고하며, 자신만 아프다고 힘들다고 울면서 불평하는 속 좁은 염원을 관음께 보낸다면, 과연 이를 보살님이 미쁘게 보시겠냐며 이기적이고 소견이 좁은 우리들을 비판, 질타합니다. 세상 곳곳에서는 부조리와 잔인함과 탐욕이 판을 치며, 간악한 자들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괴롭히고 착취합니다. 부처님은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며 세상에 나만의 의지, 욕망, 집착이라는 게 다 허상임을 일찍부터 가르치셨거늘, 자신의 작은 불편을 침소봉대하여 떠드는 짓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미숙합니까. 

참된 행복이란, 그래서 일체를 놓아버려야 비로소 내 손에 남는다고 스님은 말합니다. 안 잡히는 걸 애써 쥐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행복은 나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선 명상>에서도 스님께서는 결가부좌의 미덕을 설명하며,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수록 몸의 고통은 점차 잊혀지는 놀라운 이치를 체험하라고 권했습니다. 이 책 p175에서도, 스님은 우리가 몸을 꼬아 가부좌로 앉을 수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이냐고 가르칩니다. 아파서, 혹은 그렇게 태어나서, 몸 하나 뜻대로 가눌 수 없는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다르마라는 게 알고 보면, 우리한테, 일체의 잡되고 삿된 걸 버리고 진리를 향해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인 줄 알게 된 우리한테, 다 이익을 주게끔 애초부터 설계가 된 것(p242)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출산의 고통이 그렇게나 심했는데, 아이를 또 낳을 수 있겠어요? 부처님이 산모에게 이리 묻자, 산모는 "내 아이가 다르마를 말할 수 있다면, 앞으로 일곱 번은 더 낳을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답니다. 아이가 바르게 자라고 순수함을 지킬 수만 있다면 자신의 어떤 아픔과 고난도 감내하겠다는 게 어머니의 마음이요, 또 곧 부처님의 대자대비함입니다. 스님은 지극히 오묘한 궁극의 이치를 가장 쉬운 말로 전달하며, 청중들도 행간에서 군데군데 등장하여 열렬히 영화스님에게 호응하는 듯한, 어떤 현장감까지 담긴 멋진 책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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