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 - 라캉과 함께 한 헤겔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형일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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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선 출판사 인간사랑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리 인기 있는, 더군다나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유독 특수에 가까운 주목과 경탄의 대상이 되며, 철학자라기보다 록스타의 광휘에 값하는 시장가치를 향유하는 지젝이라고는 하나, 그 생산하는 글의 소화가 프링글스의 섭취나 코크의 음용처럼 간이한 작업일 수는 없고, 더군다나 그의 "리즈 시절" 풋풋함과 생경함, "덜 익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박사 학위 논문의 출간이란, 여간 큰 마음을 먹지 않고는 감행할 수 없는 작업일 텝니다. 지젝의 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대 철학의 이단적 기린아 그 미미한(?) 시작이 어떠하였는지를 구경할 수 있는 좋은 문헌을, 이처럼 한국어판으로 읽을 수 있게 됨은 차라리 특권에 가깝습니다.


지 젝의 리즈 시절 그 족적을 엿볼수 있는 이 책은, 젊은 시절에도 뚜렷이 드러났던 그 특유의 독설, 비유, (간간히 드러나는) 독선과 과장, 재치, 그러나 이 모두를 관통하는 일관된 풍의 사항 장악 능력, 메타적 총괄과 비틀기, 낯설게하기의 현란한 테크닉, 전혀 다른 두 현상의 귀결적 일치, 일견 얼척없어 보이는 퓨전과 수렴의 레시피 시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엄하고 숭고한 위상과 아우라의 그 거인("유럽 철학이 그라는 샘물로 모여 들고, 이후의 모든 흐름이 그로부터 발원한")과, 무의식과 언어의 미심쩍은 중매인, 나쁘게 말해 포스트모던의 도살자인 자크 라캉과의 전혀 내키지 않을(헤겔 입장에서 그럴다는 거죠. 라캉은 아마 대환영이었을 겁니다. 프로이트에게마저 희극배우의 코스츔을 입힌 게 그이니까요) 앙상블, 랑데뷰를 논문 한 편, 아니 이정도로 두툼한 책 한 권에서 "주선"하고 있는 게 그입니다. 라캉이 생전에 이 재간꾼을 보았으면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요(헤겔의 if 대입은 아예 상상하지 말기로 합시다. 국가를 이성의 최고 발현채(소위 "인륜")로 삼은 그 엄숙주의자에게 걸렸으면 지젝은 아마 아드리아의 검푸른 심연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밥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지젝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훤히 밝은 박식형 지성입니다. 이 내용을 한번 보세요.


지 젝은 정말 발칙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근본 없는 풍기 문란, 반달리즘의 폭거가 아닌, "알 거 다 아는 처지에서의 짐짓 광대짓"이므로, 도통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아닌 말로, 한다하는 포스트모던 진영의 논객들도 이 지젝에 대한 호불호가 극으로 갈립니다. 진영에 따라 깨가루가 되게 까이는 게 이 지젝입니다. 그런데, 그 각처의 백화제방식 입장, 입장 입장, 혹은 담론, 담론, 담론들도, 결국은 헤겔로 표상되는 이 이성지상주의, 엄숙주의, 관념론의 래디컬, 교조적 교주를, 유효하고 인문적인(?) 방법으로 전복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으니, 요런 지젝의 발칙하고 눈에 거슬리나, 결론과 파장 면에서 "이쁜 짓"이 되고 마는 이런 발랄한 개그를 용인하고, 나아가 동경할 수밖에 없는 거죠. 사실 지젝의 장난은 정말 재능이 뚝뚝 넘쳐 흐르는, 재롱이 예술로 승화한 케이스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quid pro quo를 두고 "오인"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좀 아리송했는데, 바로 다음의 역주(왼쪽 페이지 아래를 보세요)에서, 그 상세한 해설이 이뤄집니다.

주형일 박사님의 명쾌한 해설이 아니었으면 책 독해도 어려웠고,

소중한 지식을 얻을 기회도 놓쳤을 겁니다.


저 는 책 제목만을 보고 과연 무엇이 전개될지 책을 받아볼때까지 예측을 전혀 못했습니다. 잘 디자인된 표지를 보고, 그제서야 아하! 했습니다(인간사랑 출판사의 창의인가요, 아님 원서가 저리 되어 있었나요? ).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는게, 히스테리 환자가 숭고한 거여, 이게 아니라, 역대 존재했던 그 많은 환자들 중에, 가장 숭고한 자("le plus sublime des hysteriques")가 바로 그 헤겔 대왕님이다. 저자는 이 소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숭엄한 철학의 大帝를 고작 히스테리 환자로 끌어 내리는 데에, 우리의 자끄 라캉이 도구로 활용되고 있구요. 참 민망한 일입니다.


그 간 지젝의 담론을 익히 읽고 친숙해진 독자라면, 이 까마득한 시초의 저작을 읽고서 이후의 과정과 발전을 역으로 더듬어 보세요. "아하, 이 사람의 재롱도 시기에 따라 이런 이런 변천을 거쳐 커가는 거였구나." 싶을 겁니다. 저는 또, 이 책을 헤겔 연구가들에게 권해 주고 싶습니다. 사실 그는 너무도 어렵고, 때로는 히스테리컬 마인드의 집요함이라야 이해할 수 있는 수수께끼 같은 담론의 장벽으로 꽁꽁 무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마치 피카소가 12세 때 렘브란트처럼 붓을 놀릴 수 있었다고 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 헤겔에 대해 알 것 다 아는 자가 풀어주는 한마당 아니리입니다. 때로는 패러디를 통해, 정전의 진의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진지한 연구에 지치고 때로는 장벽을 절감하던 이에게, 에너지 음료처럼 청량감을 제공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단, 그런 분이라면 과용 과음은 금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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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북한사회 신체왜소의 정치경제학
김영희 지음 / 인간사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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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람이 성장기에 적정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적정한 골격을 못 갖추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우월한 유전자의 현저한 발현이 작용하는 경우는, 그 결과에 큰 차이가 발생하겠으나, 이는 극히 예외일 뿐이죠. 그래서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저처럼 왜소하고 빈약한 체구를 하고 있는 곡절도, 그저 못 먹고 자란 탓이겠거니 하며 예사로 넘깁니다. 우리 남한 사람들도, 1970년대 이전 빈곤의 문제가 해결을 보지 못 했을 시절에는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특히 나이 든 세대는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통일 후,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영양이 충분히 그곳 주민들에게 공급된다 해도, 이미 자라야 할 때 자라지 못한 체격이 정상으로 복원되지는 않겠습니다만, 사람의 가치가 그 인격에 주안이 놓여 있지 외형, 외모의 문제가 본질은 아니라는 점 우리가 내심으로는 인정하기에, 혹은 그저 곭치 아픈 불우이웃의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에서, 우리는 이 "체격왜소화" 문제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런데 저자 김영희 선생의 입장은 크게 다릅니다. 최소한, 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며, 사실 작고 왜소한 체격은 현실적으로 사소한 문제는 아닙니다만) 현상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과 타고난 존엄을 모독하는 독재 권력 고유의 폭력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들의 체격 왜소화는 그 파멸적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 자체의 병증을 폭로하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저 못 먹고 굶주려서 몸이 저 모양이 된 게 아니라, 시스템 차원에서 끊임 없이 인민을 억압하고 순응화하며 "개조"하는 폭압적 장치가 너무도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라는 겁니다.


저 자 김영희 선생은 다양한 사례와 통계를 인용합니다. 식량 공급의 병목 현상, 혹은 일시적 기근은 구(舊) 동구권에서 공통적으로 겪은 체험입니다. 실제로 옛 동독 지역의 거주민의 경우, 서독 주민에 비해 신장의 열등성이 두드러졌음은 통계로도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 면밀한 조사와 검증에 의하면, 비록 여러 차례의 정책 실패로 인해 식량과 영양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사실은 있으나, 일정 기간 단위의 칼로리 공급 누적량은 극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거죠, 그런데도 왜 신장과 체중의 차이가 현격하였는가. 또 통일 이후 거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왜 유독 "여성"에 한해서 신장 차이가 쉽게 해소되고 있지 않은가(다만 어떤 통계의 해석으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는군요)의 의문은 용이하게 해결되지 못한다는 거죠.


저 자는 이와 관련, 북한 주민들의 신체 왜소화는 단지 영양결핍이 원인이 유일한 작용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권력의 폭압과 이로 인한 주민의 자발적 체념이, 신체왜소화를 불가피한 추게로 고착시켰다는 주장입니다. 뭐랄까, 우리의 은근한 선입견, 혹은 상식 차원에서 앞뒤가 맞는 가설입니다. 꼭 영양의 문제가 아니라도, 집에서 너무 엄한 교육을 받아 기를 못 펴고 지내는 아이들의 경우 이상하게 움추려들고, 기를 못 펴고 지내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그런 애들은 심인성 요인으로 인해 키가 안 크는 경우도 흔하죠.

보시다시피 책의 태도는 다양한 출처로부터 통계자료를 정확히 인용하면서

치밀한 논지를 전개합니다.



하 지만 이는 실증적 증명이 어려운 인과관계입니다. 김영희 선생은 이의 타개 수단으로, 미셸 푸코의 유명한 권력 억압 기제 이론을 원용합니다. 사회과학의 한계를 메타적 인문 통찰로 뛰어넘어려는 영리한 시도입니다. 이미 미셸 푸코는, 권력의 개별 침투성이 단지 의식의 조작, 세뇌, 자발적인 체제 참여를 통한 환상의 창출, 자기 기만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넘어, 그 구체적인 신체의 변형에까지 물리적 흔적, 위력의 발휘를 남긴다는 주장을 화려하고 치밀한 문장으로 세상에 전대한 바 있습니다. "몸"이 담론의 중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도 그 즈음인데요. 통계 기초 자료의 수집 곤란성(그러나 이 책에는 기대 밖으로 다양한 자료와 소스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뿐 아니라 이런 데이타를 활용하여 모델링을 구축하는 방식 역시 체계적입니다)이라든가, 이론 자체의 형이상학성은 물론 구체적인 논증과 소통, 결과로서의 납득 과정에서 적잖은 난관이 존재하지만, 인문학과 철학이 주는 매혹으로 우리는 이를 상쇄하고 보상 받습니다.


북 한 사회의 인구학적, 사회적 곤경과, 진보 좌파적 스탠스를 언제나 견지했던 푸코의 논변이 이처럼 연결되는 건 다소 역설의 아우라가 풍깁니다. 저는 그러나 이 책이 문제를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는 데에 방점을 두고 싶습니다. 이 논의는 이 챋으로 완결을 본 게 아니라 치밀한 논쟁과 재검토의 과정을 통한 재구축의 스텝을 예비합니다. 가능하면 저자분 스스로가, 이 책의 속편격으로 발전적인 신저 출간을 앞당겨 주셨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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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치 - 이정희 교수의 정치평론
이정희 지음 / 인간사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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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희 교수님은 한국 학계의 존경 받는 원로 중 한 분입니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교단에 서서,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스승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훈육했고, 다른 면에서는 신문, 잡지, 기타 종교 매체를 통해 기고, 파급하는 글을 통해, 정치인을 향해 그 다심하면서도 준엄한 충언을 보내었고, 시민들을 향해서는 순간의 격정과 분노, 혹은 좌절과 체념을 삭이고 지양하여 진정한 통합과 화해의 공동체 형성에 창발적 동참의 손길과 노고를 보탤 것을 주장해 온 지식인입니다.


이 정희 교수님의 강단 외 활동, 강연하시는 모습을 한 번도 못 접하신 분이라고 해도, 그분의 칼럼이나 시사 평론을 일간지에서 읽으신 분은 제법 많을 줄 압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정희 교수님이 동아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등의 중앙지에 기고를 시작하신 시점이 무려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의 일입니다. 교수님은 이 시기부터 무게 있는 기고 활동을 시작하셔서, (이 책에 실린 아티클 기준으로) 2011년 가을까지 집필을 이어가시고 있습니다. 2011년 가을이면, 오세훈 시장의 급작스러운 사퇴로 이른바 시민후보 박원순씨의 부상, 그리고 그 전부터 서서히 수면 위로 역량을 노출하던 안철수 원장의 대두가 가시화하던 무렵입니다. 과연 가장 최근의 칼럼을 보면, 다음 연도에 전개될 정치적 대격변의 파란을 예견이라도 하듯, 신중한 자세로 도도한 민심의 흐름을 정치인들이 직시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럼마다 당시의 시대 배경을 분명히 엿볼수 있어요.

이 킬럼은 2002월드컵과 지방선거를 화제로 삼고 있네요.


잠 시, 책에 실린 칼럼의 시간적 범위를 살펴 보죠. 노태우 정부 중엽부터,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의 정부를 거쳐, (시쳇말로, 한국에 노씨가 몇 명이나 된다고 벌써 두번째의 노씨 대통령이 나오냐는 말까지 들었던) 참여 정부 노무현의 시대, 그리고 후반에 어지간한 레임덕에 시달렸던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장장 5인의 대통령들을 다 지켜 보고 쓴소리와 충언을 아끼지 않은 기록입니다. 지식인의 고뇌와 사색, 충심어린 걱정이 녹아 있는 대 다큐멘터리입니다. 그 커버하는 세월의 범위가 무려 25년입니다. 25년이면 갓난아기가 장성하여 자기 핏줄을 생산하고 어엿한 경제 활동 인구로 탈바꿈하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그 세월 동안 이 학발동안(사실 머리도 여전히 검으신 편이지만요)의 노스승은 준엄히, 그러나 따뜻한 시선으로, 권력과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의 그 걸어가는 여정을 지켜 봐 왔습니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랑의 정치>입니다. 정치 칼럼이므로 제목에 "정치"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정치라고요? (갑자기 어느 화제의 대형 교회 이름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왠지 안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우리 나라처럼, 정치가 그 최소한의 생산 기능을 하기는커녕 정쟁과 이권 다툼만을 일삼고, 나아가 국민들을 사분오열시키는 정치의 예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죠. 그런데도 이 교수님은 그 온화한 표정과 인상에 걸맞게, 천연스레 "사랑의 정치"를 논하십니다.


이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 사랑의 정치" 컨셉이란 알고 보면 단순한 구조입니다. 상대르 인정하는 시선에서 모든 것을 시작합니다. 나의 생각이 소중하고 가치 있듯, 한 발만 물러서서 남의 입장을 바라보자는 겁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되는 가치는 대화와 타협입니다. 그런데, 기계적이고 마지못해 보이는 소통이 아니라, 진정을 담아서 행하는 한 발짝씩의 양보야말로, 이런 살벌한 시국(저 25년 동안 우리는 단 하루도 전쟁하듯 대치하는 여야의 대결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습니다)에서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의미에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그처럼이나 간단하고, 또 현실에서 그만큼 구체적인 성과도 도출할 수 있다니, 들어서 마음만 편한 게 아니라, 우리가 부대끼며 그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사회 전체를 살갑고 따뜻하게 만들어주기까지 합니다.


이 렇게 사랑을 자연스레 정치와 변증법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 교수님 개인이 지닌 신앙의 배경이 작용하는 바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는 평화신문 등 가톨릭 계열의 매체에 기고하신 글들의 분량이 제법 됩니다. 이 교수님은 그 다정하고 온화한 인상에서도 엿볼 수 있듯, 상생과 공존의 이념을 정신과 영혼 속에 가득 담은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런 실천의 경력에서, 이처럼 현실적이면서도 정의롭고 온건한 말들이 나올 수 있겠죠,


저 는 개인적으로 이 칼럼집을 역사책처럼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칼럼의 배경이 되는 갖가지 역사적 이벤트들이 빼곡히도 나열되고 있습니다. 제 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잡음, 노태우의 민자당 탈당, 김현철 사태, 한보 비리, 대통령 자식들의 스캔들, 고건 대행의 등장, 김석수 총리 지명 등등 칼럼을 읽으면 이 시대에 이런 일들이 다 있었나 하는 생각에 현대사 책 한 권 읽은 듯 노곤함이 밀려 옵니다. 그 갖가지 파란과 이벤트가 긍정적 성격보다는, 현대사의 치부와 모순을 노출하는 성격이라서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노지식인이 내놓으시는 처방은 한결 같습니다. "사랑의 정치!" 이 다섯 글자입니다. 간단한데도 간단하지만은 않은, 이 시대의 화두가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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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마티스, 걱정 마 - 류마티스를 만나고 더 행복해진 젊은 주부 이야기
와타나베 치하루 지음, 한고운 옮김, 유창길 감수 / 큐리어스(Qrious)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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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병은 내비치고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병을 숨기면 병이 안으로 더 곪고 몸을 망친다고 하죠. 저는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실 몸이 한 군데도 아픈 데가 없어서, 건강의 소중함을 차라리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막상 몸이 아프고 신체의 기관이 물리적으로 손상된 분들은,  그 "정상적임"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통감합니다. 특히 이 책의 주제인 류마티스처럼, 사람의 동작에 있어 필수적으로 작동시켜야 하는 부분, 관절의 아픔을, 움직일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지속적으로 느껴야 하는 분들의 고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이라고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노화의 자연스러운 증상인가 보다 하고 체념이라도 한다지만, 젊은 나이에 끔찍한 통증을 숙명처럼 동반해야 한다면, 그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일도 없다고 추측합니다. 모든 일은 결국 물리력의 동원보다는 멘탈의 싸움인데, "아 나는 아직 나이도 아닌데 왜 이런 병이 왔을까?"하는 자괴감이 벌써 앞선다면, 어떻게 병마와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약물 투여건 어떤 요법의 실시도, 이런 정신의 위축과 퇴조로 벌써 질병에 그 사람이 기선을 제압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책은 류마티스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위한 내용입니다. 병은 전문가가 아는 게 아니라, 그 병으로 죽을 고통을 겪고 어찌해서건 그 모면의 방법을 고민한 분들이 더 잘 알더군요. 제가 아는 분 중에도 어린 아기가 혈우병에 걸려 모진 고통과 절박한 위험을 겪어야 하는 분이 계십니다(세상에 과연 하늘의 도리와 법칙이 있는지 참 기가 막힌 것이, 하필 왜 이런 착한 분들한테 몹쓸 게 들러붙어 괴롭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놀고 먹으며 타인에 민폐나 끼치는 악성 분자들은 그 남아돌아가는 시간을 주체 못 해 끝도 없는 망상에 빠져 자연과 사회를 모독하는 중인데, 이런 병은 그런 인간들한테나 좀 가 줘야 공평한 거 아닐까요?). 그런데, 이분 가족들도 해당 질병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유형적, 그리고 정신적인 도움을 크게 입는다고 합니다. 정보화 사회의 폐단이 엉뚱하게 작용하여 쓸모없는 글이나 남발하여 백수들의 스트레스 배설 창구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런 유익하고 고마운 채널로도 작용하는 걸 보면 빛과 어둠이란 언제나 쌍으로 같은 길을 가게 마련이다 싶네요.


이 책은, 어느 일본 여성이, 자신이 어떻게 해서 난치병 류마티스로부터 낫게 되었는지, 그 다양한 투병 과정과 극복의 여정을 담은 내용입니다. 병을 치유하는 예수를 두고 당대의 그 지방 사람들이 기적을 칭송했다고 하지만, 기적이라는 게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저자, 와타나베 치하루 같은 분이야말로 미라클 메이커입니다. 이 분은 처음에. 당치도않는 병마가 자신의 육체에 똬리를 틀었음을 알고 너무도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꾼 것이, "나는 내 몸의 주인이고, 내 몸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느끼는 내 몸에 대한 책임감은,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도 통한다. 나에 대한 사랑은 세계에 대한 애착이자 책임이며, 나를 소홀히하는 마음가짐은 곧 인격의 불성실로 지탄받아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나는 류마티스에 대한 선전을 포고한다."였죠.


이런 고백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병법에서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불태."라고 했습니다. 백전 백승이 아니고, 백번 불패도 아닙니다. 그저 불태, "위태롭지 않음"에 그칠 뿐입니다. 병 역시 마찬가지죠, 만약 어떤 병에 걸려서 완치가 된다면, 그건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해야 할 기적입니다. 한번 손상된 육체는 기껏해야 더 이상의 악화를 막고 상처가 아물 뿐이지, 그 흔적까지 말끔히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건 열역학 제2법칙에 반하는 결과죠. 병은 걸리지 않기를 바라야 할 뿐, 일단 걸린 후에 예전에의 건강을 온전히 회복하길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리를 받아들인다 함은, 이 병이 내 몸 속에서 그 최소한의 상흔만 남기고 빠져 나가길 유도하는 겁니다. 약물 치료로 통증을 죽이고, 그 통증을 죽이면서 몸도 함께 죽이는 식으로는 도저히 병이 낫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결론은 뭘까요? 자연 치유 요법이죠. 병과 함께 내 몸도 못살게구는 방법이 아니라, 병도 다스리고 내 몸도 고이 만져주는 그런 방법이라야, 난치병 류마티스가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저자분이 하는 말이 그겁니다. "나는 류마티스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뜻하지 않게 내 몸에 들어와 그 일부가 된 병을 어르고달래야, 그 병이 자연스레 제 갈 길로 소멸한다는 그런 의미의 사랑입니다. 내 몸을 함부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 몸을 그저 화학 반응의 대상으로 삼는 무식한 약물에 함부로 맡길 수가 없습니다.


자 연 치유 요법이라고 하면 무조건 사이비로 모는 일부 몰지각한 의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질병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해야 할, 가장 원초적인 의무와 소명을 배신하는 악한들입니다. 도움이 되는 수단이 있다면, 지적 호기심에서라도 그 분석의 눈을 들이대어야 올바른 일인데, 그저 무작정 눈을 감고 배척하기에 바쁩니다. 이런 자들 중에 종교를 믿는 이들도 있는데, 2000년 전에 가장 낮은 이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온 그분의 정신이 뭐였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종교와 직분을 이중으로 배반하는 이런 부도덕한 이들을 저자가 만나지 않은 덕에, 그나마 그 병이 일찍 나았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참으로 신기한 사례가 많이 나옵니다. 양의이지만 침구학을 스스로 터득한 덕에(한방식 혈로를 따르지 않고, 서양 의학에서 가르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자기가 고안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잠시의 촉진만으로도 내방한 환자의 병증이 뭔지 훤히 알아맞히는 명의 중 명의입니다. 의사의 본분이 무엇일까요? 서투른 지식으로 권위만 내세울 게 아니라, 찾아 온 환자의 바로 지금 그 고통을 낫게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저자의 곁에는 좋은 들이 많이 있어 주었기에, 그런 기적도 이처럼 확연하게 그 발현을 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저자 뿐 아니라, 한국인 역자도 똑 같은 류머티스 환자로서, 그 글자 하나하나를 옮기면서 쏟은 정성이 매 구절마다 느껴지는 놀라운 책입니다. 제이슨 윈터스 티가 과연 그리도 효험이 있나 해서 알아봤다는 역주에서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지은 사람이나 엮고 파는 입장이나 조금의 거짓, 상술 없이 오로지 진실과 건강의 보급에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빚은 책을 보면서, 환자 아니라도 책을 읽는 보람, 나아가 세상을 사는 맛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하는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올해 초에 <하나와 미소시루>라는 책도 읽어 보았는데요, 그 책과는 달리 이 책은 해피엔딩이라 더 반갑고 통쾌했습니다. 류머티스 환자가 아니라도, 우리 사는 세상이 과연 어떤 방법으로 힐링되어야 하는지 깨달음을 얻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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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지갑을 열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 적게 써도 행복해지는 소비의 비밀
엘리자베스 던, 마이클 노튼 지음, 방영호 옮김 / 알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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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열기 전에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과연 잔고가 얼마나 있는 상황에서 내가 이 물건을 사려 하는 건지, 더 긴급한 다른 용처가 내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혹시 그 긴요한 지출처를 내가 잊고나 있었던 건 아닌지, 그 전에, 내가 지금 지갑을 주머니 안에 넣어 두기나 한 건지? 이런 항목들도 머리 속에서 체크해야 할 것들입니다만, 그런 일들은 일상적 의미의 "빈틈없음"에 불과합니다. 어찌 보면 요즘 같은 팍팍한 세상에, 그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행위만큼 기본적입니다. 지갑이 내 생명줄을 쥐고 있는 판에, 그런 기초마저 챙기지 않다간 생존 자체가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HAPPY MONEY입니다. 돈이야 당연히 그 소지자(所持者), 소비자(消費者)에게 행복감을 안겨 주는 법인데 뭔 새삼스러운 소리인가, 하실 분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잠 시 샛길로 빠지자면, 이 책 p62를 보세요. 지폐 사진을 보여주고 초콜릿을 제시받은 학생들은, 초콜릿 귀한[?] 줄을 모르고 한 입에 소비해 버렸다는 실험결과가 나오죠. 돈을 보여주니, 도리어 행복감을 지레 상실하는 우리들! 이로 보아, "돈 = 행복"이란 등식이 꼭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건 그저 말장난이구요. 리뷰의 본론에서 상세히 논하겠습니다). 같은 돈이라도, 이를 어떻게 소비하느냐("무엇에" 소비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에 따라, 그 결과와 만족도가 천차만별로 갈린다는 게 이 책의 핵심논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은 "How Can We Make Money Happier?"를 가르쳐 준다고도 하겠습니다.


예전에 인촌 김성수의 부친(호남, 아니 전국에서 일등가는 지주였죠)은 자제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돈을 벌어들이는 일에 귀재였으나, 너는 그 돈을 참으로 멋지게 쓸 줄 아는 재능이 있구나!" 돈은 물론 뜻깊게 쓸 줄도 알아야만 합니다만, 순전히 이기적인 관점에서도, 같은 액수를 가지고서 최대한의 쾌감이 느껴지게 소비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죠? 돈은 그저 부지런만 떤다고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례해서 벌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어찌 보면 사람마다 돈 버는 고유의 능력은 한계가 미리 정해져 있으니(씁쓸한 말이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부단히 자기계발에 힘써야 하지만, 어떤 근본의 벽을 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고정된 수입으로, 가장 행복해지고 쾌감이 극대로 치솟는 소비를 할 필요, 아니 의무가 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행복해지기"야말로 모두의 지상(至上) 미션이니까요.


이 책의 제 1장은 "체험을 구매하라" 입니다. 뭔 말인가 하실 겁니다. 이 명제를 분명히 정리하면, "물건을 사지 말고, 그 돈으로 (효용이 더 오래 가는) 체험을 사라."는 말입니다. 물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즐거움과 기쁨이 서서히 감소하여, 나중에는 남은 효용이 0에 가까워집니다. 이거 무조건 동의해야 하는 진리 아닐까요? 당장 저만 해도, 책 지르고 나서 그 쾌감, 그리고 택배 배송이 이뤄지기 직전의 그 설렘, 개봉시의 그 행복감은 어디 비길 데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고 구석에서 먼지를 머리에 얺어가는 녀석들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언제 쟤들에게 그토록 설레었던가? 이럴 게 아니라, 커뮤니티에서 책나눔이나 벌여 인기나 모으면 차라리 기분이 좋아질듯? 하는 심리가 자연스럽게 일어날 겁니다. 아무 실속 없을 것만 같은 책나눔이 카페에서 그리 자주 일어나는 게 다 이런 배경이 작용합니다. 책나눔을 하는 분은, "이미 효용이 다한 책들"을 (무상)처분하면서, 대신 공짜로 이웃의 뿌듯한 정을 얻는 겁니다. 이게 바로 "물건이 아니라 체험을 사라"는 저자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p47 에 나오는 구글의 예를 보십시오, 상여금 지급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은 듯해서 코스타리카 여행의 인센티브를 실시했더니, 애사심 단결무드도 더 확고해지고 직원 개인의 만족도도 더 높더라는 겁니다(역시 구글은 이런 점, 즉 인사관리의 세세한 부분에서도 앞서가는 구나 싶었어요). p50 을 보면, 같은 티켓으로 총쏘기 체험이나 물건 뽑기냐를 선택할 수 있는 아이들의 예가 나옵니다. 전자를 고른 애들은, 같은 시간 동안 즐겨도 그 기쁨이 오래 가고 강렬해서, 같은 돈을 써도 더 큰 행복을 맛봅니다. 하지만 후자를 고른 애들은, 마약 중독자처럼(이 책에 나오는 스트로애스너 심리학 박사의 표현) 지속적으로 같은 구매를 행하지만,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르고 그저 돈만 갖다 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건 우리의 개인적 체험에 비추어도 맞는 말입니다. 같은 돈이면 상품이 아니라, 추억을 사야 합니다! 왜 우리는 대학 재학 중 동료, 선배들과의 MT 에 그토록 빠지지 않고 참석하려 애썼을까요? 공부하기도 바빴던 중고딩 시절 똑같이 철없는 친구들과 어울려 "추억만들기" 놀이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뭘까요? 추억은 "재활용"이 가능합니다. 머리 속에 넣었다 아무리 자주 빼서 돌려도, 그 효용이 덜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실상보다 몇 배는 부풀려 그 기억을 행복한 것으로 조작하기까지 합니다(이른바 무드셀라 증후군). 백 원을 내고, 십만 원으로, 아니 가격 책정이 불가한 희소품으로 만드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건 남한테 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반면 내가 오늘 당장 페라리를 샀다고 해도, 15년 지난 후에 과연 그 녀석이 어떤 쾌감과 긍지를 나에게 안겨 줄까요? 예전 어느 교수님이 하 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1년 끌어봐, 뭐라도 그냥 구루마야." 제아무리 영품이라도 감각상각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추억은 이와 달라서, 15년의 세월이면 거꾸로 최고 우대의 복리 이자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아니, 익스포넨셜 함수로는 그 표현이 불가할 것입니다. 에 리히 프롬의 "소유나 삶이냐"는 유명한 명제(그리고 책 제목)도 생각이 나네요. 소유는 그저 일시적인 쾌감을 불러 올 뿐, 그것이 준 기만적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 장의 제목은, "물건이 아닌 생, 존재를 구매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2장의 제목은 "특별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사 실 조금 추상적이라는 느낌도 듭니다만, 핵심은 그겁니다. 자주 소비하지 말고, 드물게 소비하여 매번 그 음미, 향유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라는 의미입니다. 이 내용은 앞 1장의 내용과도 한 줄기 맥락이 닿습니다. 인간은 결국 기억의 동물이라서, 기억의 조작(좀 삭막한 말입니다만)을 통해, 똑같은 조건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게 대전제였는데요. 저자(들)은 이른바 cheerometer, 활기 온도계라는 개념을 써서, 자연계의 수은 같은 물질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인간만의 특수 기제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바깥의 추운 날씨에 호되게 시달리다 온 수은주는, 실내로 들어오면 그저 25를 가리킬 뿐입니다. 수은이라는 애가, "아, 난 지금 이 기온에 감사하고 있어." 같은 느낌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그냥 리셋과 적응을 반복하다, 수명이 다하면 폐기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릅니다. 추위에 시달리며 바깥을 헤매다 맛본 25℃ 는, 예전 그 안온한 시절의 당연한 소비 대상이었던 그 흔한 여건이 아닙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축복이고, 우리는 그로부터 무한의 희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바로 "기억'이라는 회로를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물리량이나 자극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기쁨, 혹은 불쾌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죠.


이 장은 특히나 재미있는 예가 많이 나옵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주인공 찰리는 가난한 탓에 10센트짜리 초콜릿을 두고 한 달을 재어 먹습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매 bite는, 투르크의 술탄이 베어먹는 진미의 효용을 몇 배는 초과하는 지복의 순간일 것입니다. 좋은 걸 마구 써버리지 말고, 아껴서 소비하라는 겁니다. 능수능란한 안마사는 서비스의 도중에 약간의 term을 두어서, 마사지의 효용이 극대에 달하게 만듭니다. 맥 도널드의 맥립 간헐 판매 전략, TV 쇼의 중간 광고, 이 모든 게 다 마찬가지 기법입니다. 영화도 정상적인 극 전개를 인위적으로 끊고,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전환하는 수법이 다 이런 미학효과를 노린 거죠. 이어서 써버리지 말라는 겁니다. 아껴 쓰면 매번이 특별해진다는 뜻입니다.


2장 말미에는 약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권을 구입하게 하는데, 상품을 "200달러짜리 근사한 식사"로 내걸었더니, 그렇지 않고 "그냥 현금 200달러"가 걸려 있을 때보다 더 구매자가 증가하더랍니다. 이건 경제학의 기본 상식에 반하는 내용입니다. 현금 200달러와 식사 200달러는, 전자가 후자를 확실히 "지배(dominate)"하는 선택안입니다. 전자로는 후자가 커버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의 소비까지 가능하니까요. 그런데도 왜 이런 상식에 반하는 결과가 나왔을까요? 해답은 일단 저자들의 해석으로는, 물건이 아닌 체험의 가치를 우선시하는(이 책 1장의 결론) 선택 심리가 작용했고, 다음으로 프로테스탄트 문화권 특유의 분위기로, 200달러 식사를 행운의 유도가 아닌 금전 지출로 시도하는 건 이유 없는 사치라는 죄의식이 작용한다는 겁니다.(그래서, 복권의 매개가 아닌 그냥 선택의 경우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게 저자들의 함의로도 읽힙니다) 마지막으로, 어차피 200달러라면 별반 그럴싸한 상품을 살 수도 없을 거라는 지레 포기하는 심리가 작용하기도 한다는 거죠. 이 결과는 상당히 논란을 유발할 패러독스가 가득한 소재인데, 책의 주제에서는 약간 이탈한 감이 있으나 여튼 흥미로운 읽을거리였습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했다면 아마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3장은 더 신선한 내용을 제시합니다. 좀 논지의 구체화가 더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돈 중심 물건 중심이 아닌, 시간 중심으로 사고를 바꾸라는 겁니다. 바쁘면 행복하고, 그로 인해 통장잔고가 늘어나면 비례적 행복이 체감되어야 마땅하겠으나,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전보다 더 행복감이 줄어든다는 게 공통적인 현대인의 고민입니다. 환승 코스의 항공편이 가져다 주는 금전적 이익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 몇 푼을 아끼겠다고 공항 대기석에서 어리석게 시간을 내버리는 당신! 당신이 불행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돈 몇 푼을 더 쥐어주고서라도 직항로를 골라서,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십시오. 정 할 일이 없으면 개라도 끌고 나가 산책을 시키세요. 생각지도 않던 잘 통하는 이웃을 만나 즐거운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사서, 그 시간으로 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행복을 사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맞는 말 아니겠습니까? 


4장은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소비하라는 주장입니다. 지를 때의 그 쾌감은 누가 대신 설명해 줄 수 없을 만큼 짜릿하지만, 그 즐거움이란 고지서의 공포로 곧 상쇄됩니다. 이는 어쩌면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는 말로 바꿔 쓸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quid pro quo, 무엇을 얻으면 하나를 내놓아야 합니다. 거저 재화를 획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싫고 꺼려지는 체험을 앞에다 밀어넣어, 나중에 찾아올 긍정적인 요소로 그 불쾌를 잊는 선택, 전략이 현명합니다. 판매자들은 다양한 전술을 고안하여, 소비자가 과연 지출을 했는지, 그의 소중한 예산 일부가 빠져 나갔는지조차 감을 못 잡게 하는 초스피드결제 시스테을 개발했습니다. 그게 바로 이 책 p159에 나오는 "페이위드스퀘어"입니다. 너무도 빠른 순간에 결제가 이뤄져서, 사람들은 물건을 도둑질이라도 한 듯 착각하며, 결국 돈 나갔다는 상실감이 없어서 같은 물건을 또 사게 된다는 겁니다. 무서운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인터넷 구매의 장점도 있음을 지적합니다만, 배송 기간이 오래 걸리는 사실은, 오히려 충동구매를 막아준다는 거죠. 매장의 화려한 유혹은 별 필요도 없는 물건을 금세 사게 만드는 점에서, 인터넷 쇼핑보다 위험하다는 겁니다. 돈을 먼저 내고 나중에 소비하라! 명심해야 할 철칙이 아닐 수 없네요.


5장의 시사점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 동양권이야 개인보다 집단을 중시하는 연대의 이데올로기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지만, 서양은 어디까지나 개인에서 시작해서 개인으로 끝납니다. 타인에게 피 같은 내 돈을 기부하라? 도덕 차원이 아닌, 경제학 관점에서야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지만,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존재의 가치가 확인되는 동물입니다. 개인의 고립된 효용함수나 성취감의 산물이 아닌, 네트워크 속에서 확장된 자아의 존중을 받는 데서 오는 뿌듯함과 행복은 다른 걸로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 관적이고 모호한 "행복"의 영역에서는, 논의의 초점이 shift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관적 긍지나 자족에 빠질 수 없는, 회사라는 집단을 단위로 두어도 결론이 같을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론을 제시합니다. 이긴 팀에게 개인별 상여들 지급한 경우와, 다른 팀원 동료들을 위한 지출이 의무로 붙은 상여를 지급(대신, 팀원은 형식적 배려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선물을 동료에게 해야 합니다)한 두 경우를 비교했더니, 전자가 훨씬 승률이 낮아졌다는 거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서, 자신을 위해 자기가 소비하는 뻔한 인과의 사슬에서는 정해진 쾌감밖에 못 느낍니다. 대신 남에게 선물을 받으면, 설사 비슷한 비용을 지출하여 답례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서로간에 남아 있는 순효용은 그저 개별 구입, 지출을 했을 때보다 더 크다는 말이죠. 한중일에서 부조 문화가 그리발달한 것도 다 이런 앞선 지혜를 미리 터득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게 좀 심해서 잔머리를 굴리다보니 더 불쾌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여튼 서구의 과학이 이 점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대목이었습니다.


만사는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같은 씀씀이라도 쓰는 방법과 절차를 바꾸어서, 몇 배의 기쁨을 누리는 게 가능하다는 희망적인 결론을 이 책으로부터 받는다면, 그런 우리가 현명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방영호 선생의 번역이 참으로 매끄러웠다는 점 첨언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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