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평생을 수치심과 싸워온 우리의 이야기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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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록을 만들어라. 그것은 당신의 이야기다. 그것으로 뭘 할 건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좋은 의도 또는 성차별적이고 구시대적인 핑계로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가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묵살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당신의 것, 당신만의 것이다. 그것은 진짜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다. 우리가 이 목록들을 우리의 역사, 우리의 유산, 우리의 일부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것의 어마어마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9

 

한 여자는 상사의 성희롱에 겁먹어서 이직할 자리를 구하지도 않고 직장을 그만뒀다. 어느 성 노동자는 강간을 신고하려다가 경찰관에게 비웃음을 샀다. 한 여학생은 학교에 가던 도중에 성인 남자들이 자신을 향해 외설적인 표현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으며, 한 자매는 공원에서 소풍을 즐기다가 낯선 남자의 신체 부위를 강제로 봐야 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경험담 중 극히 일부인 이러한 사례들은 결코 머나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공공기관 간부가 여성 직원들에게 화장 좀 하고 다니라는 성차별 발언을 해 파면 당했고, 학교에서, 회사에서, 지하철에서 거의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상의 풍경이다.

 

이 책의 저자인 로라 베이츠는 2012년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라는 사이트(everydaysexism.com)를 만들었다. 2015년 전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사연은 10만 건에 이르렀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 왔다. 이 책에 수록된 온갖 불평등 이야기들, 성차별적인 농담, 부적절한 신체 접촉,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직장 내 차별, 성추행 등의 사건은 여성들 각자의 ‘목록’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이것은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한테도 말해본 적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라 베이츠는 생각한다. 여성의 삶이 오직 성별 때문에 공포, 학대, 괴롭힘, 차별로 얼룩지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라고 우리는 반복해서 서로에게 말해야 한다. 서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슬퍼하고 애도하고 화내고, 이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 미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우리가 겪은 괴롭힘과 억압이 아니라 그런 일이 없었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가 무력하고 상처 입고 웅크린 피해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중 다수, 아니, 대다수가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뜻이다.            p.240~241

 

이 책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일상화된 불평등의 원인을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 시스템에서 찾는다. 그 누구보다 평등을 지향해야 할 교육, 경찰, 사법, 정치, 언론이 어떤 식으로 여자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그들의 입을 막고 좌절하게 하는지 들여다본다. 여성들이 제일 먼저 취해야 할 가장 작고 간단하고 시급한 저항의 행동이 바로 목록을 만드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더 많은 여성들이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싶어졌다. 사람들의 무관심이나 우리가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의 일축으로 인해 잊고 잃어버리고 도둑맞은 순간들을 깨닫고 분노해 그 순간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나긴 이야기 목록을 거의 모든 여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자초한 것일 수도 있다고, 운이 나빴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바꿀 이유와 힘은 이미 우리에게 있다.

 

길을 걷다가 남자들이 모여 있으면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조명이 어둡거나 나무가 우거진 곳을 피하기 위해 멀리 돌아가기, 혼자 살지 않는 척하려고 자동응답기에 남자 목소리 녹음해놓기, 가짜 결혼반지 끼기, 친구나 연인에게 내 위치를 전송하는 앱 사용하기, 화장실에 여럿이 같이 가기, 호루라기나 경보기 가지고 다니기,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옷차림 바꾸기 등등... 이는 여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습관들의 목록이다. 이는 거의 매 순간 내 안위를 걱정해야 함을 경험으로 배우는 세상,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고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믿게끔 사회화하는 세상 속에서 자란 결과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새삼 개탄하게 된다. 차별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그들의 세계를 깨부수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들이여, 지금 당신의 목록을 만들기를.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당신만의 이야기를 담은 목록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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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라진 날
할런 코벤 지음, 부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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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은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선택과 나쁜 결정들, 여러 갈림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페이지가 둔 어떤 수가, 그녀가 통과한 어떤 문이 아이를 이런 지옥 같은 곳으로 이끌었을까 생각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을까. 어쩐 점에서는 당연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비효과. 하나를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만일이라는 단어가 꼬리를 물었다. 과거로 돌아가 무언가 바꿀 수만 있다면... 페이지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훌륭한 딸이었다. 나쁜 일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했고, 아주 작은 일로 문제가 생겨도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러면 사이먼은 참지 못하고 아이를 꾸짖었다. 그때 참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p.100~101

 

뉴욕 증권가에서 일하는 사이먼, 소아청소년과 의사인 아내, 명문 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새 학기를 준비 중인 아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던 그의 삶은 딸인 페이지가 마약에 빠져 가출해버린 뒤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착한 딸이었던 페이지는 대학에 가서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 에런을 만나게 되면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에런은 페이지를 마약에 빠뜨렸고, 그녀가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장본인이었다. 사이먼은 수소문 끝에 길거리 공연을 하며 구걸하는 모습으로 있는 딸을 발견하지만, 페이지는 아빠를 마주하자 다시 도망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얼마 뒤 사이먼은 에런이 살해당했으며, 그와 함께 살던 페이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딸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한다. 딸을 구하려는 아빠의 여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할런 코벤의 신작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평범한 일상의 균열이 깨지면서 시작되고, 누군가 사라지면서 본격화되는데, 평범한 우리의 주인공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숱한 역경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믿음과 비밀, 그리고 거짓말과 진실 사이를 오가는 거듭되는 반전으로 아찔한 스릴을 선사하며 치밀하게 설계된 퍼즐 조각이 하나둘 맞춰지기 시작한다. 할런 코벤의 작품들은 롤러 코스터처럼 극강의 스릴과 재미를 선사하는데, 이번 작품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모든 캐릭터와 사건이 한 방향으로 향해 달려가며 빈틈없이 정교한 작품이 만들어졌다. '단언컨대 할런 코벤 최고의 작품'이라는 언론평처럼 스릴러의 거장이 제대로 솜씨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위험한 순간에 봉착하면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한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총알을 보고 피할 수 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시간은 일정하게 흘러간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어릴 때는 모든 경험이 새로워서 기억이 신선하고 깊게 각인된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특히나 틀에 박힌 일상에 갇힐수록, 새롭고 선명한 기억이 거의 생성되지 않아서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느낀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 시간이 영원히 멈춘 것처럼 느껴지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어른들에게는 눈깜짝할 만큼의 시간이다. 지금, 사이먼이 총알을 뚫고 울려 퍼지는 루서의 외침을 듣는 이 순간, 사이먼에게 시간은 끈적한 시럽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p.443~444

 

이야기는 사라진 딸을 찾아 나선 사이먼을 중심으로 미국 전역을 돌며 ‘타깃’을 사냥하는 2인조와 실종사건을 추적하는 FBI 출신 사설 여성 수사관 엘레나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사이먼은 아내인 잉그리드와 함께 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에런이 살해당한 곳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잉그리드가 총을 맞고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게 되고, 사이먼은 아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슬픔을 애써 누르며 에런의 죽음에 얽힌 비밀과 딸과의 관계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로부터 의뢰를 받고 청부 살인을 하는 2인조의 정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이 사이비 종교와 뭔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고,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별개의 사건을 추적하다가 뜻밖의 고리로 연결되며 알게된 사설 수사관 엘레나는 뛰어난 수사 실력으로 사이먼에게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두툼한 페이지의 중반에 이르러서도 독자들은 전제척인 그림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그만큼 정교하게 짜인 구성에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럴 것이다 자식이 바깥세상에서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자신이 부모로서 충분히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너무 엄격하거나 느슨한 부모는 아니었는지, 자신이 아이를 키우면서 내렸던 결정들을 수백만 번 되묻고 곱씹게 된다. 파멸의 불씨가 될 만한 모든 순간을 곱씹고 찾으려고 해보지만, 사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어둠이 아이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이 사이먼 역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책하고, 돌아본다. 특히나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고, 한발 물러나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 더 좋은 아빠가 되는 길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자신이 뭔가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아내 대신 나서서 총을 맞을 수도 있었다고, 딸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보호했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지만, 그럴수록 독자들은 이야기에 점점 더 몰입하게 된다.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방심할 틈을 주지 않는 작품이었다. 최근에 나왔던 할런 코벤 작품 중에 가장 완성도 높고 뛰어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니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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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만세 - 100%의 세계를 만드는 일
리베카 리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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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일을 하다 보면 만나는 모든 사람이 책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책을 쓰지 않는다면 쓰는 방법이나 어떻게 하면 책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지 조언을 구할 수도 있고, 한발 나아가 당신에게 책을 쓸 생각이 있는지 물어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덕에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오늘도 돌아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작가는 엄밀히 말하면 한 사람이 아니다. 괜찮은 작가라면 그는 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느느 수많은 사람일 것이다" 라고 쓴 바 있다. 그 '한 사람'은 작가가 보여주기로 선택한 것을 통해서만 우리를 찾아온다. 그를 찾을 단서란 작가가 사용한 모든 단어와 그 단어의 탄생에 얽힌 뒷이야기뿐이다.              P.29

 

글자가 단어가 되고,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글이 되고, 글이 책이 된다. 우리가 읽고 있는 책 속 단어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날것의 단어들은 어떻게 합쳐져 문장이 되고, 문단을 이루고, 페이지를 채우게 된 걸까. 영국 펭귄 출판사의 편집장인 리베카 리는 20년 동안 수백 권의 도서를 편집해왔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간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어떤 식으로 독자를 만나게 되는지, 책의 겉과 속이 하나로 완성되고, 편집되지 않은 날것의 텍스트가 매끄럽게 잘 읽히는 글로 변화하게 되는 신비를 풀어낸다. 기획, 교정과 교열, 팩트 체크, 윤문, 색인 작업, 번역과 표지 디자인, 인쇄를 거쳐 하나의 책이 만들어 지는 과정은 책의 세계라는 마법을 보다 현실적이고, 다채롭게 보여준다.

 

도서관에서 가면 특유의 냄새가 있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 책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그런 냄새를 좋아한다. 아마도 아주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종이의 냄새에 반응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책의 물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종이책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을 사랑한다. 종이를 한장 넘길 때의 그 소리와 촉감, 냄새를 사랑하고, 책이라는 물건이 지니고 있는 무게와 품격, 그리고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을 때의 그 존재감까지 모두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수록된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도 매혹적이라, 도무지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파피루스에서 구텐베르크의 활자를 지나 전자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책이라는 매체에 얽힌 역사적 흐름과 번역과 교정 전후로 글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 또 어둠 속에 가려져 있는 유령 작가들의 실체와 잃어버린 글들의 리스트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했으니 말이다.

 

 

 

하루하루만 보면 여기가 출판계의 가장 우울한 면을 보여주는 곳일 겁니다. 책이 잘 팔리기만 할 거란 생각은 허상에 가까워요. 출판 사업의 기초는 판매와 반품이에요. 요즘 펭귄 출판사는 예전보다 반품률이 낮아요... 진짜 문제는 이 책이 읽을 만한가, 가치 있는가, 좋은 책인가 하는 것입니다. 책이 구간이든 신간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그 책을 안 읽었다면 구간이더라도 사실은 신간인 셈입니다. 책은 읽히기 전까지 다 신간인 거죠.
그렇다. 오래된 글은 새로운 독자를 만날 때마다 새 생명을 얻는다.                p.362~363

 

출판사에 원고가 도착하기 전에 저자와 그들의 에이전트와 기획 편집자는 글을 생각해내고, 편집하고, 재편집하고, 초고를 완성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진행한다. 마침내 완성된 글은 출판사에 도착해 편집자, 교열자, 색인 작성자, 교정자같이 그림자처럼 일하는 전문 글쟁이들을 만나고, 이후에는 디자이너와 조판자와 인쇄업자의 손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듬어진다. 하나의 글이 독자들의 손으로 향하기까지의 여정은 모두 이렇게 기나긴 과정을 거쳐서야 끝이 나는 것이다. 글의 세계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유령 작가들과 디자이너, 번역가, 인쇄업자, 에이전트를 비롯해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이들의 목소리 또한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해, 더 좋아지고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기 위해 존재한다. 베테랑 편집자가 들려주는 활자와 편집의 세계는 가슴을 뛰게 하는 만세의 순간이 깃들어 있어 더욱 특별하다.

 

이 책은 모든 책 뒤에는 좋은 글을 더 좋고 자유롭게 만들고자 애쓰는 고쳐쓰기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편집자든 에이전트든 색인가든 조판자든 인쇄업자든 디자이너든, 모두 좋은 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 글을 더 좋은 글로 만들기 위해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최종적으로 책을 집어든 독자의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실은 이 숨겨진 인력들이 뒤편에서 글에 의미와 의의를 부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출판이란 공동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 그들은 오늘도 100퍼센트라는 완벽의 세계에 가닿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들어 준 책이었다. 한 권의 책을 둘러싼 출판과 편집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좋은 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탐색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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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상 세계로 간다 - 피라미드부터 마인크래프트까지 인류가 만든 사회
허먼 나룰라 지음, 정수영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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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의 원형은 역사상 어느 대륙이든, 어느 사회든 항상 존재해 왔고 대체로 비슷한 특징을 지닌다. 우선 현실의 인간 사회가 있고, 실재한다고 믿는 사건, 정체성, 규칙, 사물이 존재하는 가상 세계가 존재하며, 두 세계 간 지속적인 가치 전달로 개인과 사회의 부와 만족감, 의미를 증진하는 과정이 있다. 이런 가상 세계는 그저 재미난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실제 사건이 벌어지는 실제 공간이며, 시간이 갈수록 만든 사람들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 잡아 현실 세계만큼 생생하고 중요해진다.          p.36

 

메타버스란 현실세계와 거의 같은 활동을 할 수 있는 3차원 가상 세계를 일컫는 말로,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 처음으로 등장한 개념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추세로 인해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점차 주목받고 있는데, 가상현실(VR)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해 게임처럼 즐기는 것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처럼 사회, 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한 메타버스 플랫폼 업체에서는 가상의 추모공간에서 성묘, 참배를 할 수 있게 하고 있고, 온라인 가상 공간을 이용해 상담과 교육 등의 활동을 하고, 이산가족들에게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메타버스 공간도 있다. 메타버스 공간에서 음반 발매 쇼케이스를 진행하기도 하고, VR콘서트를 하거나 팬미팅을 하기도 한다.

 

가상 세계의 현실감이 이렇게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메타버스와 가상 세계를 일시적인 유행이나 더 화려한 비디오 게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가상 세계와 디지털 메타버스가 왜 중요한지, 왜 우리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인지, 왜 앞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될지 총망라해 알려 준다. 인문학적 관점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미래 메타버스의 설계도를 그려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서이자, 우리를 미래로 이끄는 가이드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메타버스가 IT 투자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화려한 신기술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 존재했을 때부터 지녔던 본성, 현실에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본성의 가장 최신판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신이 될 수 있는 세계를 하나 개발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이곳 나름의 기준으로 실제 사람도 있어 당신이 지시하는 그대로 수행한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그 세계에 머물다가 현실의 일상으로 돌아왔더니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어떨까? 다른 세계에서 아무리 전지전능했어도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못 준다면 얼마나 맥빠질까? 이런 세계 간 부조화는 처음부터 예고된 불행이나 다름없다. 두 세계가 의미를 중심으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33

 

지난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왔고, 그 세계를 현실의 삶에서 중요하게 취급했다. 동물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현실 세계부터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고고한 가상 세계까지, 인류는 태초부터 온갖 기발한 방법으로 여러 세계에 동시에 존재해왔다. 첨단 장비도 없이, 오직 언어와 상상력만으로 말이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며 내세의 삶을 준비했고, 다양한 문화권의 제례 의식과 마녀, 유령, 도깨비 등은 모두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 세계를 꿈꾸고 믿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니 가상 세계는 과거에도 지금도 단순한 놀이터가 아니며, 가상 세계를 상상하고 만들어 그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활동도 놀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피라미드, 올림푸스로 대표되는 고대 가상 세계부터 로블록스, 마인크래프트와 게임의 형태로 만들어진 현대의 가상 세계까지, 인류 역사와 함께해 온 가상 세계들을 살펴본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상 세계와 디지털 메타버스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도록 말이다. 이집트의 사후 세계 신앙부터 경기 결과에 따라 거리 행진 또는 폭동으로 번질 수 있는 프로 스포츠 팬의 열정까지, 역사상 인간이 상상한 세계는 현실 세계와 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소통해왔다. 메타버스는 단순히 가상 세계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모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메타버스에 세워질 가상 사회가 현실의 삶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낫게 할 것이라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고대부터 인류에게 현실 세계보다 중요한 가상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도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 인공 지능, 암호 화폐 등의 기술 혁신으로 대충 설명하는 각종 메타버스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이 책은 인류 역사와 심리학의 관점을 함께 엮어 내어 메타버스에 대해 통찰력 있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어 인문학적으로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메타버스의 미래가 어디로 향하는지 엿보고 싶다면, 좋은 메타버스를 알아보는 안목을 기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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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형 인간의 하루 - 찰나의 영감이 최고의 콘텐츠가 되기까지 필요한 습관
임수연 지음 / 빅피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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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독특한 상상력과 유연한 체질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분방한 태도라기보다 규칙적인 창작 사이클에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정세랑 작가는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자신이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대에 꾸준히 원고를 쓰는 유형의 창작자다. 더 나은 작업을 위해 외부의 콘텐츠를 흡수하는 시간도 의식적으로 갖고, 실제로 직간접적인 영감을 많이 얻는다. 정세랑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어렸을 때 사랑했던 범우사 세계문학선과 솔 세계문학판에서 접한 고전이 생각보다 자극적이어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거나, J.R.R. 톨킨,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작가의 현대 소설과 다양한 만화책도 열심히 섭렵했다는 이야기를 신나게 전해줬다.          p.86~87

 

씨네 21 임수연 기자가 만난 이 시대 최고의 크리에이터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의 대본을 쓴 정서경 작가,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지인 PD, <지구에서 한아뿐>, <피프티 피플>을 쓴 정세랑 소설가,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 배우, 뮤지션, 미술가인 백현진, <다큐멘터리 국가대표>의 이은규 PD, 플랫폼의 경계 없이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변승민 제작자까지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단순한 인터뷰집이 아니라, 그들이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루틴은 무엇이고,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기 위한 방법은 어떤 게 있는지, 몰입하기 위한 노력 등 창작 활동과 관련된 주제에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과 드라마 <작은 아씨들>로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호평을 받은 정서경 작가는 '쓰지 않는 삶과 쓰는 삶 사이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들려 준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고, 집안 일도 해야 하며 아내와 엄마로서의 모습과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일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이런 저런 집안일들을 하다 작업실로 출근하면 20분 정도 워킹패드 위를 걷고 씻으면서 집안일을 지우고 대본을 쓸 수 있는 머리를 만든다고 말이다. 그날그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다 쓰려고 하는 편이라는 정서경 작가는 지금 강동원, 전지현 주연의 <북극성>이라는 작품의 대본을 쓰는 중이다. <작은 아씨들>을 함께 했던 김희원 감독의 작품으로 배우들을 위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초기 단계부터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지인 PD는 현재 후속작 <정년이>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놀 땐 노는 것에만 집중해야 창작의 영감도 얻을 수 있는 거라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한 번 보고 재미있는 것은 계속,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보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몰두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창작자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사적인 경험을 재료로 보편타당성을 가진 이야기를 창작하는 데 무려 7년을 쏟아 부은 그는 가장 최적화된 편집술을 탐구하는 과학자이면서 명상과 마사지가 가져다 주는 영감을 믿는 능동적 테라피스트다. 후자가 개인의 고통을 고백하고 타자와 교류하게끔 도와줬다면, 이를 한국 현대사와 연결 짓고 영상 매체로 옮겨내는 일은 이성과 기술의 영역이 된다. 김초엽 작가의 동명의 단편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펙트럼>을 준비 중인 김보라 감독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타인의 기성 텍스트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시행착오를 겪고 루틴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도 원래 고수하던 창작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는 흥미로운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p.125

 

장르 소설과 문단 문학, 드라마와 K팝까지 전방위로 글을 쓰는 정세랑 작가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다 작가로 데뷔한 케이스라고 한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처럼 독특한 상상력의 이야기를 써왔는데, 최근에는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의 대본을 직접 집필했고, 걸그룹 아이브의 서머 필름 내레이션을 쓰는 콜라보레이션에도 도전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유연하게 콘텐츠를 창작해내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인터뷰 후반에 정세랑 작가가 고른 절판 위기의 좋은 책들이라고 5권의 책이 소개되어 있어서 체크해두고 찾아 보려고 한다. 좋은 책이라고 꼭 사랑 받는 것은 아니어서, 정말 좋은 책인데도 절판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세랑 작가가 아끼는 책들이라고 하니 꼭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도 흥미로운 인터뷰들이 많았다. 크리에이터들의 창작 공간이나 영감을 받은 물건 등도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고, 김보라 감독이 몸과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법이라던가 백현진의 일상에 영감을 불러 일으킨 곡들의 리스트, 이은규 PD가 흥미롭게 본 아카이브들, 변승민 대표의 업무 툴 등 창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그들만의 팁들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창작이라는 것이 적확한 인과관계를 거쳐 완성되기보다는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을 동반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이러한 창작자들의 예술적 영감에 도움을 주었던 것들의 리스트야말로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소중한 보물 같은 것이니 말이다. 이들 창작자들은 모두 분야도 다르고, 작업 스타일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기만의 습관을 만들고, 매일 반복하는 루틴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작은 최선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창작물이 되고, 사랑 받는 컨텐츠가 된 것이다. 왜 모두에게 주어진 똑같은 24시간을 보내는데도, 누군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했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창작형 인간의 24시간은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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