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8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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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비슷한 것'은 한 달 가량 계속 됐다. 한 달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잠을 맞이하지 못했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이제 자볼까 생각한다. 그러면 그 순간 마치 조건반사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잠을 청하면 청할수록 되레 잠이 깼다."      

 

여자는 지금 17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 병원에 가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가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치과의사인 남편과 초등학생인 아들은 그녀가 한잠도 못 잔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고, 그녀는 이건 혼자서 처리해야 할 종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술을 마시고, 과일을 먹고, 책을 읽는다. 긴 러시아 소설이 읽고 싶어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꺼내 든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기에, 그녀는 한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날이 밝으면 다시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냈다.

 

 

그녀는 매우 신속하고 기계적으로 집안 일과 할 일을 마치고, 틈만 나면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10시가 되자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함께 자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렇게 연속되는 각성이 2주째에 접어들자 불안해졌지만, 이상하게도 피부가 전에 비해 훨씬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있었으며, 몸에서도 터질 듯한 생명력이 넘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점차 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도서관에 가서 잠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무덤덤하게 기계적으로 이런저런 가사 작업을 하고, 일주일에 걸려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으로 세 번 읽는다. 과거에 아주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온갖 발견과 수수께끼들, 그리고 톨스토이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가 한눈에 내다 보였다. 그녀는 점차 점차 잠 못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이번에 다시 읽고 알았는데,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을 거의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기에 있었을 감정의 떨림이며 흥분의 기억은 어느새 모두 스르르 빠져 나가고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 내가 책을 읽으며 소비한 막대한 시간은 대체 뭐였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 프랑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와 만나 근사한 그래픽 노블로 재탄생했다. 아홉 편의 작품 중 <잠>은 <TV피플>이라는 소설집에 수록되었고, 카트 멘쉬크의 일러스트레이션과 함께 아트북으로도 출간된 적이 있다. 평범한 가정 주부가 어느 날 가위눌림과 기분 나쁜 꿈을 꾼 뒤로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관해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어딘가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에 열린 결말로 긴 여운을 남겨 준다.

 

잠을 자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이 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를 되짚어 보게 만든다. 이상하게도 잠을 자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어떤 책이든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피곤하지 않았고, 어떤 난해한 대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본연의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잠을 버림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확대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깨달음이었고, 당연히 그녀의 삶은 그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는 독창적 이미지 연출을 선보이면서도 원작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 대사 등을 왜곡 없이 담아냈다. 덕분에 원작의 문장들을 고스란히 보면서도, 창의적인 컷 분할과 디테일한 그림으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굉장히 하루키스러우면서도, 또 반대로 완전히 낯선 느낌이 공존하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텍스트로 읽으면서 상상했던 공간과 배경, 인물들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구체화시켜서 볼 수 있다는 매력과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촘촘히 글자만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도 너무 좋고 말이다.

 

이번에 출간된 하루키 단편 만화선은 <빵가게 재습격>,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 <셰에라자드>, <버스데이 걸>, <사랑하는 잠자>,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일곱 번째 남자>, <잠>, 그리고 <타일랜드>까지 아홉 편이다. 세트로 구매해도 소장용으로 좋을 것 같고, 원하는 작품만 개별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하루키의 작품을 색다른 분위기로 만나면서 단편 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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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즐거움 - 우리가 사랑한 작가들의 매혹적인 걷기의 말들
존 다이어 외 지음, 수지 크립스 엮음, 윤교찬.조애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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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해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국인들은 걱정에 찌들고 조급해하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에 오늘을 담보 삼아 불만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걷기는 이런 삶에 내리는 처방이다. 약을 짓는 것과 같은 기대감과 목적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로감이 쌓일수록 약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봄날 즐거운 마음으로 언덕 너머로 산책하기. 추운 겨울 날씨에 밖으로 나가보기. 발이 땋에 닿을 때마다 마치 불이 이는 것 같고... 이런 희열감이나 탁 트인 길을 걸을 때 느끼는 즐거움에 대해 미국인들은 거의 모르고 지낸다.            p.51

 

한 걸음씩 꾸준히 걷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누구나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된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고개를 들어 길을 잘 살피면서 차곡차곡 발걸음을 쌓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때로는 별다른 목적지 없이 걷게 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혹은 사색에 잠겨 걷는 시간을 우리는 산책이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것은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대부분 산책이라는 행동은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역시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별다른 일정이 있지 않은 날에도 만보는 거뜬히 걷는다. 매사에 급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산책을 하는 순간만큼은 어딘지 여유로워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자동차를 타고 달려갈 때는 미처 볼 수 없는, 천천히 걷기를 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 또한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걷기를 예찬한 작가들은 꽤 많이 있었다. 걷기를 사유의 방법으로 택한 철학자와 작가들에 대해서는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책을 통해 만난 적이 있다. 이 작품에도 등장했던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등은 리베카 솔닛의 책에서도 만났던 작가들이다. 걷기에 대한 열망이 어떻게 문학적인 사유로 발전되었는지 대문호들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일은 설레임을 안겨 준다. 갈수록 모든 것이 짧아지고, 빨라지는 세상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 책을 통해 만나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걷기에 대한 예찬은 삶을 조금은 느리게 돌아보라고, 조금 더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원을 거닐며 자연과 하나가 되고, 사색을 통해 내면 깊숙한 곳을 파고들기도 하고, 걷는 시간을 창작 활동으로 연결시키기도 한다.

 

 

 

마거릿은 7월 말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성한 숲은 나무의 진한 녹음으로 어두워 보였고 그 아래에서 고사리가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을 받고 있었다. 날씨는 무덥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거릿은 아버지 옆에서 나란히 걸어갔는데, 가벼운 발걸음으로 고사리를 밟아 특유의 향을 느끼면서 잔인한 기쁨을 맛보았다. 따스한 햇빛과 향긋한 공기로 가득 찬 공터에는 야생 식물이 햇빛 아래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었고, 빛을 받아 생기 있는 허브와 꽃 들도 보였다. 이러한 삶, 적어도 이 산책만큼은 모두 마거릿이 기대한 대로였다. 그녀는 이 숲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p.251

 

이 책은 17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문호들의 '걷기'를 주제로 한 글들을 모은 앤솔로지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윌키 콜린스, 제인 오스틴, 토머스 하디, 에밀리 브론테, 조지 엘리엇, 찰스 디킨스 등 서른네 명의 작가들이 시와 에세이, 소설 등에서 '걷기'라는 주제로 쓴 글들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걷기를 통해 어떻게 문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자연과 우리 본연의 자아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일평생 28만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하는 윌리엄 워즈워스에게 걷기는 창작 활동의 일부이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거의 매일 산책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으며, 마크 트웨인은 걷기의 즐거움이 대화를 나누는 데 있다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여행기를 유쾌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불면증으로 고통받던 찰스 디킨스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노숙자의 시선으로 밤 산책을 묘사했고, 앨프리드 테니슨은 도보 여행이 중요한 테마가 되는 시에서 걷기를 통해 슬픔을 표현했다.

 

걷기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책속 문장들 또한 우리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크게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지만, 사실 어디서부터 읽어도 상관없다.  걷기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산책자의 내면을 다룬 장,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향하는 도보 여행을 다룬 장, 걷는 존재들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글들을 모은 장, 그리고 관찰자가 되어 배회하는 도시 산책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장으로 구분되어 있어 원하는 대로 골라 읽으면 된다. 이렇게 작가들이 길 위에서 써내려간 사유와 감성의 문장들을 책 한 권으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앤솔로지만의 특별한 점이 아닐까 싶다.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인생을 걷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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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 만화선 6
양윤옥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Jc 드브니 각색, PMGL 만화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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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그길로 사라졌어요. 연기처럼. 그 뒤로 전혀 아무 소식도 없어요. 24층과 26층 사이 계단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아홉 편이 각각 한 권의 만화로 재탄생했다. 프랑스 만화가 PMGL과 아트 디렉터 Jc 드브니는 독창적 이미지 연출을 선보이면서도 원작 소설의 스토리와 인물, 대사 등을 왜곡 없이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원작의 문장들을 손실 없이 담아내 하루키 소설 특유의 글맛을 살렸고, 창의적인 컷 분할, 디테일한 그림에는 애독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의미와 장치를 가득 채웠다. 권마다 그림체를 다르게 해 단편소설 각각의 분위기를 살렸다. 〈빵가게 재습격〉과 같은 초기작부터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를 거쳐 〈타일랜드〉 〈셰에라자드〉 등 최근작까지 만나볼 수 있다.

 

 

먼저 만나본 것은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라는 작품이다. 이 단편은 '도쿄기담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픽노블로 연출된 스토리가 원작 단편소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탐정이 여성 의뢰인을 만나 실종된 사람을 찾아 다니는 것이 주요 스토리인데, 의뢰의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을 찾아 달라는 내용이다. 남편은 같은 아파트의 24층에 사는 시어머니 집에 갔다가 26층인 그들의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탐정은 26층과 24층 사이를 샅샅이 뒤지면서 계단을 지나가는 이웃들과 말을 나누기 시작한다. 과연 사라진 남자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근데 아저씨, 여기서 뭐 하고 있어요? 어제도 여기 있었죠, 언뜻 봤는데."
"이 근처에서 뭘 좀 찾고 있어."
"뭘 찾는데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문 같은 걸 거야. 잘 모르겠네. 어쩌면 그건 문조차 아닐 수 있어."

 

의뢰인의 시아버지가 삼 년 전에 전차에 치여 돌아가신 뒤, 시어머니는 불안신경증에 걸렸다. 특히나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증세가 심해지곤 한다. 시어머니는 그들 부부가 살고 있는 맨션의 다른 층으로 이사를 왔고, 부부는 26층, 시어머니는 24층에 살고 있었다. 불안신경증세가 생길 때마다 그들이 내려가서 진정시켜 드리곤 했다고 한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사건 당일, 골프를 치러 갈 예정이었으나 비가 오는 덕분에 취소되어 집에 있었다. 일요일 오전, 어머니에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고 현기증이 난다고 전화가 왔고, 남편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침 식사를 준비해달라고 아내에게 말한다. 이십 오분 뒤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와 어머니가 안정되셨으니 지금 계단으로 가겠다고, 배가 고프다고 한다. 아내는 팬케이크를 굽고, 베이컨을 볶으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어머니 집에 전화했더니 한참 전에 돌아갔다는 얘기만 하시고, 남편은 아무 소식도 없이 그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평소에도 비좁은 곳에 밀폐되는 걸 참을 수 없어했던 남편은 엘리베이터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계단을 이용했다. 그러니까 그는 24층과 26층 사이의 계단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지갑도 면허증도 신용카드도 시계도 없이 맨손으로 말이다. 누구나 별다른 이유 없이 생에서 그저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는 것, 물론 실제로 일상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 사라지는 초현실적인 사건은 상상 속에서만 벌어지곤 하지만 말이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의뢰인과의 마지막 통화 후에 탐정은 생각한다. '나는 다시 어딘가 또 다른 곳에서 찾아 다닐 것이다.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라고. 처음부터 의뢰인의 의뢰는 받지만 사례비는 받지 않겠다는 탐정의 미스터리한 사연 또한 그렇게 여운을 남긴 채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딘가 불가사의하고 기묘해서 전혀 실제로 벌어질 것 같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소설이 아니라 만화 형식으로 읽다 보니 그게 또 어쩐지 현실감을 부여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에는 다소 낯설게 느껴졌던 그림체가 읽다 보니 너무도 하루키의 작품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굉장히 색다른 그래픽노블 작품이었다. 소설을 보다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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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디자인 - 자기만의 감각으로 삶을 이끄는 기술
아키타 미치오 지음, 최지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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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설 때는 유머와 좋은 기분을 주머니에 넣어두자." 저는 이 문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제가 썼지만요... 나 자신을 풍경이라고 생각했을 때 이왕이면 아름다운 풍경이면 좋겠다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주변에서 보면 내 모습도 풍경의 일부일 뿐이거든요. 세상이 아름답길 바란다면 그 풍경의 일부인 나부터 먼저 그렇게 되자는 거죠. 제가 좋은 기분을 특별히 더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p.19


7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 디자이너로 활약하는 아키타 미치오는 지금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트위터리안이기도 하다. 그는 제품 디자이너로 켄우드, 소니 등의 제조업체에서 일했고,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제품 디자인에 폭넓게 참여해왔다.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20년이 넘도록 자신의 문장을 블로그에 기록해왔고, 뒤늦게 시작한 트위터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느낀 것을 짧게 올리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팔로워 수가 10만 명이 넘는다. 그는 '좋은 기분으로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기분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은 가장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문장들을 두고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트위터에서 못 다한 더 깊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집을 나설 때는 유머와 좋은 기분을 주머니에 넣어두자는 문장부터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좋은 기분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고방식부터 다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보면 내 모습도 풍경의 일부일 뿐이니, 그 풍경의 일부인 나부터 아름다운 풍경이 되자는 것이다. 단순히 기분이 좋아서라거나 주변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였으면 해서가 아니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애용은 하더라도 애착은 갖지 말자'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특정 인물이나 조직, 브랜드에 집착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 그래야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집착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다는 것, 그래서 그는 기대하지 않고, 특별함을 바라지 않고, 억지로 보람을 찾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장 주의하려고 하는 건 멋있어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단 물건을 빈틈없이 채워놓지 않으려고 조심해요. 괜찮은 물건을 과시하듯이 늘어놓으면 꽤 멋있게 보일 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추구하는 이미지는 좋은 물건을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것이에요. 신중하게 장식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무심코 있는 게 멋있어요. 하지만 상품 하나하나는 신경 써서 고릅니다. 언제든 물건이 말해주니까요. 무심코 있으면서도 말하는 힘이 있는 물건을 좋아해요. 이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p.188~189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면 주위에 기대하지 않는다, 애용은 하더라도 애착은 갖지 않는다, 힘들게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사랑받기 위해서 비굴해지지 않는다, 정직한 것과 솔직한 것은 다르다, 형태가 없는 모호한 것을 쫓지 않는다, 호기심을 적극으로 낭비한다, 무조건 상냥한 태도가 친절은 아니다, 나의 형태를 단정 짓지 않는다 등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기분을 살피고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작은 일에 신경쓰지 않고 대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마음과 아무리 바쁘더라도 여유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나 비슷한 수준의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업무에 관련된 유용한 팁들도 가득하다.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궁금한 부분들에 대한 꼭 필요하고, 알기 쉬운 내용들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의 답변들도 있었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집요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대해, 아키타 미치오는 '말을 70센티 높이에 놓는다'라고 상상하고, 던지는 게 아니라 슬쩍 두는 방식으로 말하라고 대답한다. 상대방이 가져가고 싶을 때 가져가기 편하도록, 너무 낮지도 않고 너무 높지도 않은 높이에 말을 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쓸데없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들게 호감을 얻으려 하지 않고, 서로 지치지 않는 관계 맺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인생을 오래 살아온 만큼의 깊이와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46년 차 디자이너가 들려주는 삶을 디자인하는 법을 배워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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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원의 지적 여정
데버라 워런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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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u(독감)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병입니다. 원말인 influenza는 이탈리아어로 '별이 끼치는 영향influence of the stars'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굴뚝의 flue(연통)와 혼동하면 안 되겠죠. 물론 개의 flews도 전혀 다른 것으로, 일부 견종의 '축 늘어진 윗입술'을 가리킵니다. 그것으로 침을 사방에 뿌려대는데 저희 집에서 키우는 뉴펀들랜드종 강아지는 용케 천장까지 침을 날려 보냈답니다. 어쨌든 요즘 부모들은 세균 걱정에 벌벌 떨면서 틈만 나면 손 세정제를 찾죠. 자식을 고치 속 애벌레처럼 꽁꽁 감싸서 키우는 셈입니다.            p.90~91

 

단어의 세계에서는 옛 단어와 새 단어가 서로 경쟁한 끝에 옛 단어가 힘을 잃고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개념을 가리킬 적당한 말이 없을 때 기존의 단어를 활용하기도 하며, 한 단어가 서로 교류가 없는 여러 문화권으로 전해져 각기 다르게 분화하기도 한다. 언어는 돌연변이의 연속이며, 단어는 생명체처럼 진화한다. 의도도 목적도 목표도 없이, 앞 못 보는 아메바처럼 이리저리 되는 대로 나아간다. 단어의 기원을 파보면 자잘한 실수가 굳어진 것들이 노다지처럼 쏟아지는데,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만 해도 원래는 '털가죽'으로 된 신발이었으나, 구전되면서 동음이의어인 '유리'로 바뀌어 그대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은 평범한 일상의 단어들을 통해 영어 어원의 미로를 탐험한다. 저자인 데버라 워런은 취미가 라틴어와 프랑스어 독서이고, 영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며, 프로그램 언어로 코딩을 하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언어라면 가리지 않고 빠져드는 언어 덕후인 동시에 다채로운 수상 경력에 빛나는 시인이기도 하다. 영어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석이 아니라, 이곳저곳 샛길로 빠지면서 온갖 것에 참견하고 놀라운 재미를 찾아내며 단어의 기발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베이글, 비스킷, 에클레르 같은 먹을거리부터 뮬, 튀튀 같은 패션 아이템, 소렌토나 팰리세이드 같은 자동차 이름까지 익숙한 사물들에 숨겨진 배경과 사연을 읽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별 생각없이 사용하는 모든 것들에는 각각 이름이 있게 마련이고, 그 이름에는 긴 역사가 서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은 굉장히 흥미진진했다.

 

 

 

단어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무의미한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숨소리 한번 내는 것과 다를 게 없죠. 그러나 단어는 곧 역사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로지 언어가 변천해온 모습을 통해서만 과거를 살펴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OK,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전쟁과 국경선, 유물도 중요하지만, 단어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평범한 일상과 비범한 모험을 생생히 전해주는 수단이니까요. 단어는 스냅사진이 아니라 천년짜리 영상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언어는 멈추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이 해도 다 할 수 없는 게 ‘말’이니까요.              p.321~322

 

과일이 들어간 관용어는 긍정적인 것이 많은데, 달갑지 않은 과일들도 있다. go bananas, 그러니까 바나나로 돌진하면 '화가 나서 돌아버리는' 것이 되고, 레몬 lemon 은 '불량 상품', 말린 자두인 prune 은 '불평꾼'이 되며, sour grapes, 즉 시큼한 포도는 '못 먹는 감'이 되는 식이다. '미끄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는 우리 말과 뜻이 같은 관용어로 '썩은 사과 하나 때문에 다른 사과를 다 버린다'고 하고, '누군가의 손에 들린 복숭아'라는 단어가 '동료를 밀고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빵’이라는 이름에 관한 역사는 ‘빵’ 자체의 역사만큼이나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고, 꽃은 이름의 기원을 알고 나면 더 예뻐 보이는 게 많았다. 청바지의 탄생에 엮여 있는 남유럽의 두 도시 이야기를 비롯해 ‘격리’를 뜻하는 영단어의 어원에 중세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이 라는 배경이 있었다는 사실 등 역사의 구석구석, 골목골목을 다니며 단어의 지도가 완성되어 간다.

 

윌북에서 출간된 단어와 어원에 관련된 책들을 재미있게 읽어 왔다. 마크 포사이스의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수지 덴트의 <옥스퍼드 오늘의 단어책>, 앤드루 톰슨의 <걸어 다니는 표현 사전>, 그리고 앨버트 잭의 <미식가의 어원 사전> 등 세상을 둘러싼 단어들과 그것의 유래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는 책들을 인상깊게 읽었다면, 이번에 나온 데버라 워런의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도 분명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음식, 술, 꽃, 옷, 동물, 색깔, 지명, 스포츠, 게임 등등 삶의 모든 부분을 두루 살펴가며 각 단어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외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단어를 익히게 되어 학습 효과도 있을 뿐더러, 시작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저자의 입담이 무겁거나 진지하다기보다 유쾌하고 장난스러워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단어 너머에 숨어 있는 의미심장한 사연이 궁금하다면, 삶의 도처에 있는 단어들의 기원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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