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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판매 주식회사 ㅣ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2
로버트 셰클리 지음, 송경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에는 사연이 있다. 특이한 제목과 수많은 찬사들에 힘입어 주문한 것 까지는 좋은데, 책이 오기 하루 전 '집에 있는 책' 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것이다(먼산). 분명히 읽었었다. 한 10년쯤 전에… 살펴보니 1975년 출판물이더구만. 어쨌건 책은 왔고, 고민하다 반쯤은 점심값 날렸다는 생각으로 뜯어서 읽은 결과, 다시 읽은 감상은 의외로 만족스럽다. 10년 전 물건이 '1975년에 어울리게' 적당히 생략되고 삭제된 느낌이었다면 이 2005년작(?)은 거의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모험소설이 아니며 SF도 아닌 진지한 철학소설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떠나지 못한 영혼과 죽지 못한 시체와 죽지 않기에 거리낌없이 타인을 죽이는 버서커들이 날뛰며, 더할나위없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디스토피아는 겉보기에는 밝고 활기차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1984] 정도는 유원지로 보이게 할 만큼 암울하다. [1984]의 빅 브라더가 사람의 행동과 삶을 감시하고 통제했다면, 이 22세기의 대기업은 사람의 영혼과 죽음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말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구 교회' 사람들의 외침은 광신적이면서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이 세계에서 인간답게, 1958년 기준으로 인간답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기준으로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토마스 블레인의 행동이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기에 시대는 압력이 되어 그를 덮친다. 이런 압력에서 벗어나 그저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그에게는 지난한 일이지만, 그러나 한 번의 죽음, 한 번의 살인, 약속된 내세, 수없이 많은 인생을 거쳐 도덕적인 각성의 시기를 거친 그는 마침내 '인간다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기에 이르른다. 이 죽음은 자의타살자(?) 헐의 귀족적으로 덧씌워진 자살 게임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진정으로 인간다운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블레인을 가장 확실하게 지원한 것이 도덕도 이성도 의지도 아닌, 이 디스토피아를 창조한 부모의 한 짝, '과학' 이라는 점이야말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 한 사건도, 단 한 문장도, 단 한 단어도 의미없이 끼어든 것 없는 예술적인 문학작품, 단순한 SF 소설이 아닌, SF의 세계관을 빌어쓴 강렬한 풍자소설. 10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읽은 [불사판매주식회사]는 이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작가 로버트 셰클리는 "SF의 틀에 끼워넣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장편 속에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토록 소설의 끝이 다가오는 것이 아쉬웠던 작품도 없었으며, 이토록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볼 수 있기 바라게 된 일도 처음이다. 그의 단편을을 읽고 싶다. 그의 장편들을 읽고 싶다. Azzie Elbub 시리즈를 읽고 싶다. 무엇보다 단편 Specialist를 읽어보고 싶다. 영어사전은 지금 내 손에 있으니, 원본을 구하러 22세기로 가 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