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나무를 심다
김은경 지음 / 북촌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정조(正租)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중에 이런 구절을 만났다. “정조는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의 여덟 글자를 써서 소주합루(小宙合樓) 문에 걸어 두었다. ‘변방도 뜰처럼 가까이 하고 오랑캐도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정조는 이로 인해 어려움도 많이 겪었던 듯 하다.

즉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노론의 심환지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지금 정조는 독살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할 수 있다. 이런 즈음에 김은경 교수의 ‘정조, 나무를 심다’를 읽게 되었다.

정조는 조선 최고의 식목왕으로 불린다. 정조는 열한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최후를 맞는 비극을 겪는다. 저자는 정조가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에 갇혀 숨을 거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타고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되살아나 자신과 조선왕실을 지켜줄 거라 확신했으리라는 말을 한다.(23 페이지)

정조가 즉위 후 7년 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릉인 현륭원에 심은 나무만 1200만 그루였다. 이런 사실을 비롯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기록들을 담은 ‘정조, 나무를 심다’는 조선왕릉과 5대 궁의 나무 심은 기록을 “치열하게 들여다본 결과물”이다.

사도(思悼)세자란 호칭은 영조가 뒤주에서 목숨을 잃은(임오화변) 아들의 지위를 세자로 회복시킨 뒤에 붙인 시호(諡號)이다. 장헌(莊獻)세자란 호칭은 정조가 아버지의 시호를 높인 것이고 장조(莊祖)는 고종이 추존한 이름이다. 사도세자가 묻힌 곳은 수은묘(垂恩墓),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 융릉(隆陵) 등으로 바뀌었다.

저자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 격상되었듯 사도세자의 사후 지위도 나무가 자라듯 높아진 셈이라고 말한다.(25 페이지) 정조는 나무 심은 기록을 꼼꼼히 기록할 것을 명했다. 정조가 7년간 현륭원에 나무 심은 가록물이 소가 땀을 흘릴 정도(한우충동汗牛充棟)로 많았다(27 페이지)고 하니 놀랍다.

기록된 것은 나무 심은 날짜, 심은 사람, 감독자, 장소, 자원하여 나무를 심은 사람, 나무 종류, 그루 수, 캐온 곳, 캔 나무를 운반한 사람, 나무 가격, 나무를 심은 이들에게 지불한 품삯 등이다.

정조는 그 기록들을 한 권으로 정리하라는 명령에도 한 장의 문서로 정리, 보고한 정약용을 칭찬했다. 물론 정조는 즉위한 해에서 시작해 승하한 해까지 나무를 심었다. 저자는 1800년 정조가 승하했지만 그가 심은 나무의 생명력은 씨앗에서 씨앗으로 전해져 아직까지 여전하다고 말한다.(35 페이지)

저자는 일제에 의해 철저히 뜯겨나간 경희궁(慶熙宮) 터에 들어서면 쓸쓸함이 극대화되다가 마음이 정리되고 의로 받는 느낌이 들곤 한다고 말한다.(37 페이지) 저자는 경복궁과 구별하기 위해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東闕)로, 경희궁은 서궐(西闕)로 부르게 된 사정을 말한다. 정조가 즉위한 곳이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경희궁을 걷다 보면 정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고 말한다.(38 페이지)

경희궁은 처음에 경덕궁이라 불렸는데 이것이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시호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으로 불리게 되었다.(39 페이지) 저자는 정조를 조선이라는 나무가 북풍한설을 맞아내면서도 틔워낸 새싹으로 비유한다.(38 페이지)

저자는 열세 살에 왕손으로 책봉(冊封)되어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정조가 10년 넘게 경희궁에서 책과 씨름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정치력을 배우는 동안 몸과 마음이 동궁 인근의 나무들과 함께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말한다.(40 페이지)

정조는 여러 나무의 생태를 잘 알았다. 정조는 숲 박사였다. 정조는 다양한 나무를 심도록 명했다. 소나무, 개오동, 흰느릅, 느릅, 이나무, 오동, 가래나무, 옻나무 등..정조가 심도록 한 나무들은 농사 짓는 백성들이 쉽게 심을 수 있는, 먹고 사는데 유용한 것들이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나무와 곤충, 새 이름을 비우던 책은 ‘시경’이었다.(52 페이지)

그런데 정조가 나무를 배운 것은 경희궁을 통해서였다. 살아 있는 나무들을 보고 배운 것이다. 정조에게 나무 심기는 혀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정조는 유독 단풍나무 종류를 많이 심도록 했다. 정조는 심은 나무를 철저히 관리할 것을 명했다.

정조가 아버지의 사당(祠堂)인 경모궁(景慕宮)에 나무를 심은 것은 효도 차원이었다. 저자는 정조가 나무들이 정치로 바쁜 자신을 대신하여 언제나 아버지 곁에서 푸른 그늘을 드리워 아버지를 지켜주기를 소망했다고 말한다.(80, 81 페이지)

정조가 아버지의 사당에 화색이 도는 단풍나무를 심으라고 한 것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야 했을 때 삶을 마친 아버지께 선물을 하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81 페이지) 저자는 정조의 나무 심기와 규장각을 통한 인재 양성을 같은 차원으로 본다. 장차 인재로 클 어린 아이들을 이르는 꿈나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정조는 즉위 직후 왕립도서관이자 인재 양성소인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창덕궁 후원에. 정조는 왕과 그 가족만의 공간이 후원에 신하들을 초대했다. 규장각 각신과 검서관들이다. 외규장각은 강화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국내의 변란이나 외적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의도였다. 창덕궁 후원에서 꽃을 감상하고 낚시를 하며 시를 지은 모임을 상조회(賞釣會)라 한다.

저자는 사람을 키우고 학자를 키워내려 했던 정조가 규장각에 소나무를 심어 학자들이 자라는 것을 소나무와 함께 지켜보았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서른 세 살의 정조를 아버지가 되게 한 존재는 순이었다. 세 살에 세자로 책봉된 순은 다섯 살에 홍역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후에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얻는다. 참고로 왕의 장례를 국장(國葬)이라 하고 세자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 한다.

정조는 문효세자의 공간으로 새로 세운 중희당(重熙堂)에 천문관측 기구들을 설치했다. 왕세자 책봉식은 바로 이 중희당에서 거행되었다. 세자의 무덤은 풍수적인 길지보다 찾기 편하고 가까운 곳을 원칙으로 세운다. 문효 세자가 묻힌 효창공원 자리인 효창묘(孝昌墓)도 그렇다.(문효세자의 사당은 문희묘文禧廟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풍수지리적 명당에 자리 잡은 한양의 지세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지맥을 보호하고 소나무 벌목을 금지했다.(136 페이지) 정조 당시 문효세자의 묘 조성을 위해 자기 돈을 쓰고 자신 또한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있었다.

왕릉에 가장 많이 심는 나무는 소나무이다. 그런데 소나무는 옮겨 심는 과정에서 살아 남는 비율이 낮다. 정조 14년 가을에 심은 나무는 소나무 45만 그루로 이때 심은 것들은 모두 흙을 붙여서 옮겨 심은 것들이어서 이식 성공률이 높았다. 소나무는 옮겨 심는 것보다 씨를 파종하면 더 잘 살아 남는다.

경관을 조성하려면 이식하는 것이 더 낫다. 정조는 두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으나 옮겨 심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161 페이지) 소나무의 이식 성공률을 높이려면 대토(帶土)해야 한다. 뿌리에 흙을 붙여서 옮겨 심는 것이다.

정조는 송충이를 잡으려고 백성들이나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 구양수(歐陽脩)의 시에서 “관전 스무 냥으로 벌레 한 말을 사들이면 잠깐 사이에 잡은 벌레가 산처럼 쌓일 것”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잡은 벌레의 무게에 따라 값을 쳐주도록 했다.(177 페이지)

계지술사(繼志述事)를 줄여 계술(繼述)이라 한다. 선왕이나 조상의 뜻과 업적을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실은 계술하는 것을 가장 큰 효로 여겼다. 조선왕실은 나무심기도 계술을 했다. 식목왕 정조의 택목(擇木)에는 왕릉을 풍성한 숲으로 가꾸려는 마음과 백성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려는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었다.(199 페이지) 잣나무 이야기이다.

정조 22년에는 홍살문 내외에 잣나무를 심었다. 홍은 붉다는 의미의 red가 아니다. 팥죽색에 가까운 색이다.(204 페이지) 잣은 해송자(海松子)라 한다. 송자(松子)는 소나무 씨앗이 아니라 잣을 말한다.(210 페이지)

정조가 현륭원(顯隆園)에 심은 나무 가운데 하나인 버드나무는 경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했다. 버드나무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20미터까지 자라기에 차폐 역할을 한다. 성종은 백성들이 창경궁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빨리 자라는 버드나무를 심도록 명했다.(238, 239 페이지)

경복궁 경회루에는 버드나무가 연못을 따라 자라고 있다. 저자는 경복궁에서 4년간 방문객들에게 설명하는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개량한복을 입고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경복궁에 대해 떨리는 목소리로 안내를 하면서 경복궁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만 아는 길로 방문객들을 안내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시간들 속에 버드나무가 있다고 말한다.(241 페이지)

버드나무의 솜을 유서(柳絮)라 한다. 정조는 봄이 올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현륭원을 찾았다. 아마도 그는 길가에 심어진 버드나무의 연초록 물결과 소나무의 진초록 물결을 가르며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245 페이지)

창덕궁 후원 옥류천(玉流川) 권역에는 청의정(淸漪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조선왕실은 농사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 정자 앞에 작은 논을 만들어 직접 벼를 심고 거두었다.(247 페이지) 이를 친경(親耕)이라 한다. 왕이 농사짓는 밭을 적전(籍田)이라 한다. 왕비는 친잠(親蠶)을 했다.

영조와의 대화에서 농사짓는 이유와 뽕나무를 심는 이유에 대해 거침 없이 답한 정조는 실제 누에를 직접 보지 못했고 친잠례(親蠶禮: 양잠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예)때 처음 누에를 보았다.(248 페이지)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은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다.

정조는 현륭원에 오얏나무도 심었다. 오얏은 자두의 옛말이다. 현재는 자두가 표준어이다.

대한제국 문장(紋章)에 오얏꽃잎이 그려져 있다. 오얏꽃은 꽃잎이 5장이고 꽃잎마다 꽃술이 3개씩 있으며 3송이씩 뭉쳐서 핀다.(262 페이지)

저자는 정조가 단지 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나무들과 더불어 훌륭한 인재들을 심었다고 말한다.(276 페이지) ‘정조, 나무를 심다’는 정조를 나무와 연결지어 논한 색다른 책이다. 정치사가 아닌데 이렇게 흥미로운 것은 저자의 필력 때문이다. 정조의 서재 또는 책을 다룬 책이 있는지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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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1-31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조대왕을 다룬 책들은 많지만, 나무를 주제로 조명한 서적은 처음인 듯 합니다. 말씀처럼 색다르면서도 내용이 수박겉핥기 수준이 아니고 깊이가 있어 보입니다. 좋은 서평 읽고 갑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1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케모마일 님 감사합니다... 색다른 책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성인의 문해력이 아주 낮다고 하지요. 글을 읽을 줄 알지만 뜻을 잘 모르는 것이지요. 어려운 구문일수록 더 그렇지요. ** 님의 말처럼 글이 쉽고 짧고 간단하고 재미있으면 좋지요. 그러니 글 쓰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멋을 부리고 난해한 개념들로 지식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 글은 명쾌하고 쉽고 재미있게 쓰도록 해야겠지요.

 

하지만 세상의 진실들이 그렇게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형식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쓰기는 소통을 염두에 두는 작업이 되어야 하지만 더 난해하고 복잡한 개념, 분야, 영역의 내용들을 이해할 수 있는 훈련이기도 하지요. 충분히 생각하고 쉽게 풀어내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쉬운 글을 의도적으로 쓰려다 보면 결국 쉬운 생각, 상투적인 생각을 하는 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쉽고 재미있는 글을 위주로 독서를 하려는 것은 게으름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성인의 낮은 문해력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어려운 글을 읽게 하는 것은 무리이지요. 문제는 쉬운 글을 쓰는 사람이 일정 정도 후에 독자들의 지적 훈련을 위해 어려운 글을 쓰겠는가입니다. ** 님의 생각은 너무 안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쉽고 간결하고 재미 있는 글을 쓰면 심사위원에게 좋은 평가를 받긴 하겠네요. **님의 글은 쉽고 재미있고 짧게 쓰라는 당부 외에 들을 만한 부분이 물론 있습니다. 가령 독자들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가르치려 하지 말고 호소하라는 글은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라는 정희진 작가의 글을 참고할 만합니다. 이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주식이나 자동차 분야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글을 읽을 때 무지한 내가 문제지 어렵게 쓴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상적입니다. 동의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정희진 님 같은 분만 있으면 ˝인간이 가진 가장 나쁜 성향들 중 하나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이다. 나는 무식하다고 말하기 싫기 때문에 이거 뭐 이렇게 어려워라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말(이정우 교수 지음 가로지르기‘ 145 페이지)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인용한 김에 더 하자면 정희진 님은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고 말하며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라 말합니다.(2013214일 경향신문 기사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

 

글이 어려우면 왜 그런지 동기를 헤아려야 합니다.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인지, 장하준 교수가 말했듯 주류경제학이 자신들의 과오를 은폐하고 경제학을 엄밀 과학으로 만들게(또는 보이게) 하기 위해 어려운 수식들을 쓰게 됨으로써 어려워진 것인지, 어려운 글을 이해하지 못해 글을 요령부득으로 쓰게 되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정말 어려운 것을 전하기에 어려운 글이 된 것인지 등을 가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다층적인 난해의 스펙트럼을 한 마디로 어려운 글이라 하는 것은 너무 안일해 보입니다. 쉬운 현상이나 개념은 왠만하면 쉬운 글이 되겠지요. 하지만 어려운 현상이나 개념마저 쉽게 쓰()는 것은 일정 정도 폭력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룻만에 이해하는 무엇 무엇, 쉽게 쓴 무엇 무엇 같은 책을 놔두고 장중하고 난해한 원전을 읽는 것은 난해에 중독되어서일까요?

 

윤동주 시인이 쉽게 쓰여진 시에서 한 말을 음미해봅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떻든 최대한 풀어쓰는 노력을 기울여야 함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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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1-30 16: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지합니다. 글을 쉽게 쓴다고 해서 내용까지 쉬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같은 내용이라도 비유나 일상의 언어로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고 전문용어나 혹은 난해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과 그것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희진씨의 글은 저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려워요.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려면 쉽게 쓰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1-30 1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벤투님의 글을 읽어보니 제가 독해를 잘못했네요ㅎㅎ

˝쉬운 글을 의도적으로 쓰려다 보면 결국 쉬운 생각, 상투적인 생각을 하는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쉬운 글을 선호하는 사회는 위험하다고 말하며 쉬운 글은 내용이 쉬워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여서 쉬운 것이라 말합니다.˝

이 부분이 이 글의 요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저 생각에 동의합니다. 정희진님과 벤투님이 말하는 쉬운 글은 제가 생각하기로는 편한 글, 뻔한 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치우친 글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은 쉬운 생각들을 쉽게 이야기한다는 의미같습니다. 예를들면 여성문제, 역사문제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결국 저도 벤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것은 지향해야 하며 기존의 나쁜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쉬운 글은 지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0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습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치열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1-30 17:31   좋아요 1 | URL
벤투님 덕분에 저도 그동안 너무 쉽고 편한 책만 찾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0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아닙니다. 저도 잘 실행하지 못하지요. 또 생각이 두서없이 전개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17-01-31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점점 독해력이 떨어져서 고민입니다. 글들이 자꾸 어렵게 느껴져요ㅜㅜ 내용이 어려운 것도 있고, 번역투도 있구요. 결국 결론은 제가 공부를 더해야 하는거겠지만요 ㅠㅠ

하지만 저도 벤투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데올로기 답습은 정말 무섭습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1 0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반갑습니다. 저의 경우 꾸준히 조금이라도 읽고 긴장을 놓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책을 대하고 있습니다... 의견에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명인도 아닌데 페친 신청이 거듭 들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진짜 유명인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지요.

바흐의 종교 칸타타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 수에 맞춰 200명의 친구만 유지하고 싶다는 말을 한 바 있는데 그 수를 80명이나 상회하는 친구를 사귀게 된 것입니다.

바흐의 세속 칸타타 수인 16을 더해도 80은 참 많은 오버입니다. 수난곡, 오라토리오, 마니피카트, 미사 등을 다 더하면 될까요?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승천 오라토리오. 마니피카트, b 단조 미사, 루터교 미사... 더 아는 성악곡도 없습니다.

저는 전에도 한 번 말한 바 있듯 친구보다 팔로우란 말이 더 마음에 듭니다.

언젠가는 친구 신청을 모르는 척 놔두면 그 분이 팔로우로 남을지 아니면 신청을 취소할지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지요?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페북에서 읽기에는 긴 너무 긴 글을 계속 올리는데도 진심으로 성심껏 읽어주는 분들이 많고 좋아요 클릭에도 인색(吝嗇)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제 글은 길 뿐 아니라 너무 진지하고 무거운 글들인데...제 글의 단점을 너무 잘 아는 저는 지난 1월 5일 종묘(宗廟)에 가서 해설사께 흥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윤** 해설사)은 자신은 모니터링에서 자주 최하위를 차지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흥미가 없어서이겠지요?

그런데 제가 지난 1월 19일 고궁박물관 시연에서 생전 처음 시나리오가 재미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한 분이 아닌 두 분에게서 말입니다.

재미있다는 말은 스토리가 연결되어 감동을 주든지 기대를 계속 갖게 할 경우에도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든 고맙습니다.

누군가는 감사하다는 말은 일본식 언어이고 당신은 신(神) 같다는 의미를 가진 우리말인 고맙습니다는 말이 진짜라고 하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그런 점 외에도 자칫 ‘간사(奸邪)하다‘가 될 수도 있고 ’감시(監視)하다‘가 될 수도 있으니 가능하면 고맙다는 말을 써야 할 것입니다.

주저리 주저리 쓴 글이 되었습니다.

하나 부탁드릴 말씀은 ’쌓아서 구원에 이르려는 심리‘(페북에서 적용하자면 친구를 많이 두어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심리) 즉 바벨탑 무의식(정식 용어는 아닌 듯 하고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김영민 교수께서 쓰신 용어입니다.)이 아니시라면 ’좋아요’ 클릭도 좋지만 그보다는 피드백을 원한다는 점입니다.

‘좋아요’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수(數)로 환원되지만 댓글은 살아 있는 거울 같은 것이지요. 정신분석학자 라캉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생각하며 유난히 엷고 어룽진 쪽을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보고 텃밭에 나가 귀퉁이가 찢어진 열무잎에도 대보고 그 위에 앉은

흰누에나방의 날개에도 대보고 햇빛 좋은 오후 걸레를 삶아 널면서 펄럭이며 말라가는 그 헝겊조각에도 대본다는 나희덕 시인처럼 댓글은 제게 거울이 될 것입니다..

아니면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윤동주 시인처럼 댓글은 제게 우물 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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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그린 2017-01-30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과 글을 재밌게 표현하고 싶어서 이책 저책 보지만 쉽지 않죠 ㅎ 그래도 두 분께 따뜻한 피드백 받으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전 요즘 채사장님 책 보고 많은 걸 느끼는데요 고유명사 사용을 줄이고 유추와 비교를 섞어서 쉽게 설명하는 방식에 감명 받은 바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한 분 두 분 인정 해주시는 분이 나타나길 꿈꿔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1-30 15:51   좋아요 1 | URL
네.. 반갑습니다.. 좋은 책을 만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열심히 하시면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영민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요...그래도 그 우직한 공부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상당히 정교하고 전문적인 책이다. 아홉 분 필자들의 논의가 다 읽을 만하지만 정신분석가 김서영 교수의 전문가에 대한 논의는 참 인상적이다.

전문가라는 이름은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그 여정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 사람 즉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스스로를 연마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선물‘이란 말,

전문가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스스로의 장단을 찾고 그 장단에 맞추어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이를 뜻한다는 말,

전문가는 주변 사람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같은 일 또는 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모든 구차하고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세부들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며 느린 걸음으로 기약 없는 외로운 싸움을 끝내 견뎌내는 사람이라는 말 등이다.

음미할 말이다. 이 가운데 느린 걸음으로 기약 없는 외로운 싸움을 끝내 견뎌내는 사람이란 말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정녕 기약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겠지만 모든 최선을 다한 뒤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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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신분석 책을 완독했다.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이란 책이다. 이 책은 읽는 과정을 통해서는 물론 리뷰를 쓰는 과정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끄는 책이다.

아홉 분의 필자가 참여한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정신분석이란 하나의 목소리로 환원되지 않지만 하나의 목표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정신분석이 하나의 목소리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은 홍준기 님의 진단에 힘입은 결과이다.

홍준기 님은 프로이트는 사회적인 영향력에 주목한 반면 라캉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는 말, 안토니오 네그리가 불평등을 완화시켜주는 적극적 정책의 필요성을 모두 비판하고 오직 자유로운 개인의 실현이 자유로운 연합을 낳는다는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이론을 주창한 반면 들뢰즈, 바디우, 지젝 등은 라캉 정신분석 이론을 사회이론으로 확대하고 있지만 이들의 목표점은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관념적인 이론에 있다는 말을 한다.

반면 정신분석은 하나의 목표로 수렴된다. 여러 필자들의 논의가 조금씩 다르지만 정신분석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학문이라기보다 히스테리적 비참을 일상의 불행 정도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자 방법론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불행이란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감당할 만한 불운을 의미한다. 정신분석가 백상현 교수 역시 유사한 말을 했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증상의 소멸이 아니라 주체가 증상과 함께 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다.(‘라깡의 루브르‘ 98 페이지)

다른 해석의 여지, 반론의 여지가 있지만 수용할 만하고 앞을 보는데도 유용한 시사점이 되리라 생각된다. 아홉 필자의 글이 모두 시사적이고 유용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신분석가 김서영 교수의 논의이다.

전문가에 대한 논의인데 가령 이런 글이 그렇다. ‘전문가라는 이름은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그 여정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 사람 즉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스스로를 연마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선물‘이란 말, 전문가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스스로의 장단을 찾고 그 장단에 맞추어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이를 뜻한다는 말, 전문가는 주변 사람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같은 일 또는 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모든 구차하고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세부들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며 느린 걸음으로 기약 없는 외로운 싸움을 끝내 견뎌내는 사람이라는 말 등이다.

정신분석은 모든 사람은 소외된 존재, 신경증적인 존재라 말한다. 이 말을 모든 사람은 불행한 존재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상술할 수 없지만 이는 욕망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소외된 존재인 타자 그리고 그의 욕망에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둘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말 정도를 할 수 있다.

한때 정신분석은 버리기 위해 읽는다는 말을 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사회 및 환경 문제를 동시에 주목하며 프로이트 의 임상과 이론을 수정, 확대, 재구성한 멜라니 클라인, 도널드 위니캇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임옥희 님의 ‘페미니스트 정신분석이론가들‘(2016년 10월 출간)을 읽어야겠다.

페미니즘, 마르크시즘, 정신분석의 길항 관계를 정리한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어머니의 계보학‘으로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 한계를 극복하려 한 멜라니 클라인의 작업이다.

이 책은 갈등하지만 서로 얻을 부분이 있는 삼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책이어서 기대가 크다.

임옥희 님은 ˝우리 사회에서 마르크시즘 - 정신분석학 - 페미니즘은 서로 충돌하고 긴장을 요구하는 삼각관계인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다(‘페미니즘과 정신분석‘ 10 페이지)

‘페미니스트 정신분석 이론가들‘은 꼼꼼하게 읽되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히 버리는 독서의 첫 사례가 될 책이다. 먼 길을 가는데 필요한 나침반 같은 것이 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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