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노론에 초점을 두고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인식에 한몫 한 것들 중 하나가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들이 강한 나라라는 것이다.

영조가 노론의 공세와 협박일 수 있는 강경 주장을 물리쳤다면 비극적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다소 애매하고 절충주의적인 눈으로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관계를 보아온 것이다.

사도세자가 미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덕일 소장의 책을 읽고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 책이 김태형 님의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이다. 저자에 의해 개진된 바 사도세자가 지극히 정상적이었음은 물론 살신성인적 인물이라는 글은 설득력면에서 최고이다.

사도세자가 살인성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과 무관한 소론 전부를 마구잡이로 죽이려 한 영조와 노론에 맞서 살신성인적 행동을 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심리적 병에 기인해 극단적으로 수직상승하던 영조의 폭주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서서히 하강했다.

영조의 미친 학살의 만행에 죽음을 무릅쓰고 제동을 건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너무 다른, 희생양을 자처한 의인이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가 비슷한 처지의 연산군과 달리 개혁군주, 학자군주가 된 것을 훌륭한 부모 밑에서 생애 초기와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으로 보는 등의 정조에 대한 저자의 치밀한 분석 역시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영조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숱한 괄시(恝視)와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며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 기반한 종(從) 여성적 태도 및 남성 불신(마마보이적 인간 유형)과 열등감을 가졌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는 외향감각적 정체성도 가졌다.

영조는 ˝경이 비록 백번 머리를 깨트리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당인들을 갈아 마시겠다.˝ 같은 말을 상시적으로 할 만큼 난폭하고 공격적이었다.

노론과 한 패가 되어 경종(景宗)을 핍박해 후계자로 등극한 죄책감(저자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 장희빈의 아들‘을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심증을 제시한다)도 영조가 보였던 주요 특징이다.

영조는 돌려치기, 떼쓰기, 변명과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흔히 사용했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죄의식과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아들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냉혹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억울함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도세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노론이 난리를 쳤지만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결국 영조였다. 교활(狡猾; 간사하고 나쁜 꾀가 많음)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노론에 책임을 전가했다.

˝중증 환자˝ 영조는 아들을 죽인 죄를 씻고 아들을 죽이게 만든 노론에게 복수하는 길로 세손 정조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택했다.

영조는 혜경궁 홍씨(한중록에 남편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기록한, 정조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종(從) 여성적 태도를 보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열다섯에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고, 그리고 자신 앞에서만 그랬다고 썼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갑작스런 발병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직 한 사람(혜경궁 홍씨) 앞에서만 증세를 보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차분하고 의연했던 사람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 살해에 책임이 있는 친정의 무고함을 강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해 ‘한중록‘을, 그것도 젊어서가 아닌 노회한 나이에 의도적으로 썼다.

혜경궁 홍씨가 택한 것은 남편을 버리고 임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아들 산(蒜; 정조의 이름)이었다.

심리학자가 개인 또는 개별 사건에 대한 미세하고 정치(精緻)한 분석에 능하다면 역사학자는 큰 틀을 잡고 사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능한 것일까?

어떻든 적어도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등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가 최고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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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시집들과 시 비평서들을 읽고 리뷰하고, 이런 저런 시들을 외우고 시 낭송회에 간 것 외에 내가 시에 들인 정성은 거의 없다.

쓴 적도 없고 강의는 둘째 치고 시에 대한 느낌을 말한 적도 없는 것이다. 물론 논문 같은 리뷰로 몇몇 시인 분의 호평을 받고 리뷰 대회에서 입상을 했지만 대수는 아니다.

몇 년 전 대구의 박 ** 시인의 시집 리뷰를 올린 뒤 가진 당사자와의 통화에서 나는 리뷰를 잘 쓰니 시도 잘 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다독을 필히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갖는 것이라 생각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 리뷰와 시 비평 리뷰의 끝은 시 쓰기라고 생각하신 것인지도.

정신분석 비평을 하는 전기한 시인의 비평집을 다시 들춰본다. 프로이트 전집을 읽고 계시다는 시인.

나 역시 최근 읽은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이란 정신분석 책을 읽고 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느슨한 관심을 다시 팽팽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술할 수 없지만 이 책에 나온 거울 단계, 대타자(大他者) 등의 개념 때문이다.

그런 내가 시와 관련해 “어느 고마운 신이 내린 구원의 인큐베이터“라는 말을 할 만한 상황을 맞았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밤에 열리는 시인들의 시 감상 및 창작 강의를 들으러 가게 된 것이다. 물론 시 창작보다 내가 더 기대하는 바는 시를 이해하는 것.
월 단위로 신청을 받는 이 모임은 2017년 한 해 내내 계속된다. 당월 모임이 끝난 뒤 다음 달 신청을 받는다고 하니 꽃길이 열린 것이라 할 만하다.

아니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첫 순서가 지난 뒤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참여를 통해 나는 내가 좋아하던 시가 제대로 된 이해에 근거한 것인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고 새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에 매혹될 수도 있다.

강의는 시인들이 하지만 들을 준비를 하고 시간이 지난 후 음미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도 기꺼이 감내해야 할 가시밭길임은 물론이다.

‘시경(詩經)’을 통해 나무 이름을, 꽃 이름을, 새 이름을 배웠다는 조선의 선비들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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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해설 공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맞는 말이지만 관심이 있는 만큼 찾아나선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제 심정을 대변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북촌, 인사동, 혜화동, 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종로 3가 뒷편의 익선동과 종묘 옆 봉익동 등 아담한 동네의 내력을 밝힌 책이 나왔습니다.

20세기 초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1888 ~ 1965)이란 분과 그 분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 이야기를 담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2017년 2월 1일 출간)란 책입니다.

구한말 일본 공사관이 있던 예장동에서 충무로 1가의 진고개 일대에 이르던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청일전쟁 승리 이후 남대문로 일대로, 러일전쟁 승리와 국권침탈 이후로는 청계촌 남쪽 대부분으로 확대된 데 이어 북촌마저 잠식될 위기에 처했을 때 위력을 발휘한 분들이 바로 조선인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업자)들이었지요.

이 분들은 가회동과 익선동 등의 필지를 쪼개 오밀조밀 붙은 작은 한옥들을 지었습니다. 이 분들에 의해 북촌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히 일본인들의 진출은 막히게 된 것이었지요.

북촌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정세권이란 분은 부동산 개발업자였지만 이익에 눈먼 자본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서민들을 위해 월세나 전세 형태로 집을 제공하기도 한 이 분은 신간회를 후원했고 조선 물산장려회의 실질적 성공을 이끌었고 조선어학회에는 건물과 토지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강탈 당하기까지 하며 민족운동에 헌신했던 정세권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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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노론(老論)이 아닌 다른 시각을 견지(堅持)하는 이덕일 사학자. 그는 누군가가 역사의 음지(陰地)에 묻혀 있다 해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준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이다.

그가 예시하는 인물들의 면면들은 다음과 같다. 아계 김일경(金一鏡: 1662 – 1724), 백호 윤휴(尹鑴: 1617 – 1680), 명재 윤증(尹拯),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소현세자 등등..

김일경은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윤증은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했다. 이가환, 이승훈은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 사형되었다. 소현세자는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었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시대와 불화했던 스물 다섯 학자, 선비들을 오늘 이곳으로 초대한 책이다. 정도전, 조식, 이경석, 윤휴, 정제두, 유득공, 최치원, 이장옥, 허난설헌, 허균, 홍경래, 정하상, 김개남, 김육, 이익, 유수원, 이긍익, 박제가, 천추태후, 김시습, 김일손, 유몽인, 강홍립, 이광사, 김창숙 등이다.

정도전은 고려말 토지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대다수 농민들이 몰락한 시대였다. 조선 개창의 원동력은 토지 개혁이었다. 정도전이 토대를 마련했다. 정도전은 친명 외교정책을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갔지만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난으로 남은,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과 함께 살해됨으로써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난다.

남명 조식(1501 – 1572)은 칼을 찬 선비였다. 조식은 벼슬에 나가면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초야에 은거하면 가난 속에서 도를 찾는 선비가 되겠다는 원나라 허형(許衡)의 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조식은 과거(過擧)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조식의 거듭된 출사(出仕) 거부는 천거(薦擧) 당사자인 이황(1501 – 1570)과의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조식은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조식은 처사(處士)의 재야 정신을 죽는 순간까지 지녔다.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곽재우, 정인홍 등...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 – 1671)은 인조 대에 주화론(主和論)을 주청한 인물이다. 척화(斥和) 즉 주전(主戰)론이 대세인 시대, 척화론이 아니면 사대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에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上國)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 외에 길이 없었다.

윤휴(尹鑴: 1617 – 1680)는 양란(兩亂) 이후 주자학 유일사상과 신분제 강화라는 복고적 노선을 걸은 노론에 반대한 인물이다. 윤휴의 사상은 주자(朱子)의 견해와 배치되었다. 윤휴는 병자호란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집권 서인에게 주희(朱熹)는 일개 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윤휴가 그와 다른 학문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서인은 격하게 반발했다.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은 중국의 다른 학자들은 주희의 주(註)를 보충했지만 윤휴는 대치(代置)했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였다.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비판했다. 그는 이이, 이황의 학설도 비판했다. 그는 이이의 이선기후(理先氣候)나 이황의 이통기국(理通氣局) 등을 보두 비판하고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웠다. 성시열은 이황이나 이이를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는 비판할 수 없었다. 송시열에게는 사서(四書)보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더욱 중요했다.(58 페이지)

태극(太極)이 기(氣)라는 윤휴의 말은 교조화된 조선 주자학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다. 주희는 만물의 근원적 존재인 태극(太極)을 이(理)라고 설명했다. 북벌 군주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昇遐)는 예송(禮訟) 논쟁을 낳았다.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예송 논쟁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당쟁망국론으로 규정지은 소재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정쟁이었다. 효종의 왕통 계승이 정당한가, 하는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1년복을 주장했다. 윤휴는 3년복을 주장했다. 송시열이 주장한 것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이었다. 효종처럼 아버지를 계승했으나 가통을 이은 적장자가 아니니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인이 1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은 두 당파가 지닌 세계관의 표출이었다.(65 페이지) 서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주자학적 정치 이념은 신권 중심의 지배구조로서 국왕은 사대부 중의 1 사대부이지 사대부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남인들은 국왕을 사대부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 받아들였다.(65 페이지)

윤휴는 북벌을 주창했다. 서인 정권은 북벌론을 명분으로만 내세웠다. 저자는 현행 교과서가 효종이 송시열 등을 동원해 북벌을 준비했다고 쓰고 이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말한다.(67 페이지) 윤휴는 양반들에게도 호포(戶布)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의 안(案)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 – 1736) 역시 주희의 이론에 반기를 든 인물이다. 정제두는 명나라 왕양명의 학설을 지지하는 양명학자였다. 왕양명은 세상 사람들 중 미친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찌 미치지 않겠으며 상심한 사람이 있는데 어찌 상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진 인물로 주자학의 신민설(新民說)을 비판했다.

백성들을 친함의 대상으로 보는 친민설(親民說)과 대립되는 신민설은 백성을 새롭게 변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학설이다. 양명학은 처음부터 금기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황이 ‘전습록변’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 주자학)의 화(禍)라고 비판한 뒤부터 금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은 양명학의 핵심을 간과한 비판이어서 잘못된 것이다.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면서 조선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 즉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고 속으로는 양명학자인 경우가 많이 생겼다. 정제두는 유일한 외양내양의 선비였다. 정제두는 양명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대신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대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단 딱지를 붙이려는 주자학자들에게 참다운 도가 무엇인지 논하자면 당당히 맞섰다.

유득공(柳得恭: 1748 – 1807)은 역사인식의 전환을 이룬 서얼 지식인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가 다시 서기를 갈망했으나 끝내 다시 서지 못하자 조선이 작은 중국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85 페이지) 저자는 소중화 사상을 사대주의의 극치로 평한다.

유득공은 정조의 배려로 관직에 오른다.(규장각 검서관) 신라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라 인식하던 시절에 유득공은 그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 인식했다. 북방 강토(疆土)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규장각에 있으면서 비장(秘藏)된 책을 쉽게 읽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93 페이지)

2부 ‘신선한 공기는 죽음보다 감미롭다‘의 첫 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로 저자의 저술 영역이 넓음을 증거하는 사례이다.

이징옥(李澄玉: ? - 1453)은 문약(文弱)의 나라 조선에서 특이했던 인물이다. 맨 손으로 산돼지를 잡았을 정도의 인물이 그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 1589) 허초희(許楚姬)는 시대의 모순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다. 둘째 오빠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를 배운 사람이다. 허난설헌은 아내의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를 조롱했다. 허난설헌에게 도교는 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도피처였다.

허난설헌은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소외 현실을 간파한 선구자이다.(128 페이지)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을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저자는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 – 1618)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131 페이지) 허균은 사주(四柱)처럼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허균은 광해군 9년 말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 폐출(廢黜) 논의에 앞장서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다산 정약용의 스승으로 알려진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 – 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익은 남인(南人) 명가 출신이지만 출생 한 해 전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부친이 평안도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 이익은 서얼과 농민, 노비의 등용을 주장하고 농사와 학문을 택한 인물이다.

이익은 당쟁의 구조를 간파하고 편당심(偏黨心)을 강하게 비판했다. 편당심 속에서 성장하면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이다.(196 페이지)

이익은 주자학을 뛰어넘어 서학도 수용했다. 다산은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란 말을 했다.(199 페이지)

유수원(柳壽垣: 1694 ~ 1755)은 경종(景宗)에 대한 충심을 간직했던 선구적 실학자로 ‘우서(迂書)’를 썼다. 유수원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몰락한 숙종 20년 출생했다. 이 무렵 집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分黨)되었다. 유수원의 집안은 소론이었다.

노론은 소론의 반대 속에서 장희빈을 사사하고 그의 아들인 경종까지 제거하려 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국왕으로 삼기 위해 왕세제(王世弟) 책봉(冊封)을 추진했다. 노론은 경종 1년 소론 대신들이 모두 퇴궐한 틈을 타 경종을 위협해 왕세제 책봉을 전격 단행했다.

경종은 서른 넷이었고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이었으니 젊은 왕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이때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한 인물이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였다. 경종 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는 즉위 뒤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옹하는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속마음은 노론에 있었다.(204, 205 페이지)

이긍익(李肯翊: 1736 – 1806)은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쓴 인물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편년체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수록함으로써 사료로 말하게 하는 저술 방법을 택했다. 이긍익이 택한 관점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다.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217 페이지)

물론 이긍익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료를 제시한다 해도 해당 사건을 선택하는 것은 이긍익의 몫이었다.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는 놀고 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가난을 물리치려 한 인물이 박제가이다. 서얼 출신인 박제가는 문관의 길이 막히자 무과로 방향을 전향해 정조 18년(1794년) 무과별시에 응시해 급제한다.(228 페이지)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란 말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김일경이 영조에게 한 말이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고 불의에 맞선 선비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저자는 연산군 때의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무오사화의 한 장면인데 저자는 사화(士禍)와 사화(史禍)를 이야기한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은 것을 지칭하고 사화(史禍)는 김일손, 권경유, 권오복 같은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단재 신채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단재를 식민사관의 틀을 깨고 우리 역사의 무대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가르쳐준 역사가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 기록의 한 자 한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제의 실증사학자들 이상으로 입증한 사학자이기도 하다.

사마천, 김일손, 신채호 세 역사가는 저자가 역사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종종 생각한다는 역사가들이다. 저자는 사마천, 김일손, 신채호 등이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이 분들이 당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와 대화했기 때문이라 말한다.(10 페이지) 역사는 무엇이며, 역사가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잊혀진 인물, 잘못 알려진 사건을 찾아 발굴하는 저자의 노고에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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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실마리가 될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경제학이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이다.

저자는 현대 서구 사회를 인류학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질베르 리스트(Gilbert Rist).

인류학적 관점으로 주요 이슈를 분석한 책으로 재작년 읽은 김현경 박사의 ‘사람, 장소, 환대’를 들 수 있다.

카(E. H. Carr: 1892 – 1982)가 역사보다 역사가를 먼저 보라는 말을 한 것을 경제학에 적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2011년 감명 깊게 읽은 ‘경제학 혁명’ 생각이 난다. 이 인상적인 책에서 수학자이자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오렐은 수학자 노버트 위너의 말을 인용한다.

즉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부정확한 생각을 미분학의 언어로 가장하는 기발한 습관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오렐에 의하면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은 경제학을 수학화 하는 사회과학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에 대해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것 즉 오류라고 말했다.(305 페이지)

궁금한 것은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말들이 은유(隱喩)임을 의식하는지, 이다. 은유는 엄밀한 학문인 과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이란 은유가 과학적 사실로 굳어지는 것을 보고 흐뭇해 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요즘 유행하는 통섭(統攝: consilience)도 은유이고 면역학의 자기, 비자기도 은유이다. 경제학에서 쓰이는 불황, 호황, 위축, 공황, 인플레이션, 보이지 않는 손,

낙수효과, 자유방임주의 등 숱한 용어들이 은유이다. 반등(反騰)하다, 바닥을 쳤다, 성장 동력 등도 그렇다.

물론 우리는 은유 없이 사유할 수 없다. 경제학 교수 윤기향은 고전학파들이 신봉했던 자유방임주의(laissez – faire)란 말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라란 의미의

프랑스어 laissez faire, laissez passer에서 따온 말이라고 말한다.(‘시가 있는 경제학’ 112 페이지)

문제는 자유방임주의의 예에서 보듯 잘못된 생각을 하도록 하는 위험한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영감(靈感)이 다 좋을 수는 없으리란 말이 가능하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이 아닐지?

이는 내 주된 관심사인 역사에도 분명 적용되어야 할 말이다. 관건은 1차 사료(에 대한 정독)이다.

이는 곧 ‘조선 왕조실록 연구‘ 팀에 들어가는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크로스 체킹을 염두에 둔, 겸허한 연구가 되어야 하리란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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