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는 정신분석 - 노답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우리 시대의 질문 4
김서영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헬조선이란 말은 이제 자명해 보인다.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지만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사지 않고 정지은 교수님의 ‘왜 사랑하기가 점점 힘들어질까?’ 강의를 듣는 데 그쳤었다. 하지만 좀더 체계적이고 명확한 분석과 대안 제시를 확인하기 위해 출간 3개월만에 책을 구입했다.

필자들을 대신해 ‘사랑과 연합’ 등의 책을 쓴 이성민 님이 정신분석가 홍준기 님의 말을 인용해 설명했듯 오늘날 심리 문제의 70 – 80 %는 사회적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책의 다수의 필자들이 의거(依據)하는 이론은 라캉 정신분석이론이다. 물론 정신분석은 분파도 다양하고 같은 진영 내에서도 이론(異論)이 있다.

백상현은 ‘한없이 가벼운 존재의 매혹: 정말 멘토가 필요할까?’란 글에서 정신분석의 윤리가 말하는 멘토란 진리를 전달하는 존재라는 말로 운(韻)을 뗀다. 백상현에 의하면 라캉이 말하는 진리란 우리 자신을 규정짓는 현재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재앙이며, 흔히 창조적이라고 불리는 ‘도래할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형태의 지식이자 지혜이다.

백상현에 의하면 멘토란 텅 빈 공백을 선물하는 사람이다. 백상현은 정체성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지키려는 습관에서 벗어 날 것을 주문한다. 백상현은 사회가 제시하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면 자아는 소외되고 거부하면 자아가 파괴될 수 있는 난국을 말한다. 정체성을 거부하면 나는 흩어지고(우울증), 수용하면 타자의 삶을 반복하게 된다.(소외)

백상현은 정체성으 혼돈을 겪는 환자에게 사회적으로 공인된 안정적이며 정상적인 자아 모델(멘토)을 흉내내도록 유도하는 것을 마취라 부른다. 환자의 자아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인간 주체란 텅 빈 구멍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그곳에 거짓 지식을 봉합하려 하기 때문이다.(23 페이지)

백상현은 유령과의 조우를 제안한다. 우리의 자아가 속해 있는 현실 세계의 존재 질서가 균열을 일으키면서 현시하는 유령적 비 – 존재의 출현과 주체가 만나는 사건을 말한다. 백상현은 공백의 유령의 존재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백상현은 자연의 순리와 인간사의 이치를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는 생각은 가장 기만적인 환상에 불과하다고, 어떤 사회적 규범과 제도도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29 페이지) 백상현은 진리란 지식의 정점이 아니라 균열점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앎 즉 무지를 위한 지(知), 없음을 사유하는 기술을 말한다.

김소연은 ‘무엇을 알 것인가?: 경험의 빈곤과 정신적 쇠약에 대처하는 정신분석적 공부법’에서 우리 사회의 학력 인플레 현상을 진단한다. 김소연은 신의 죽음이 선포된 세계에서 앎은 또 다른 지배의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고 말한다.(43 페이지) 김소연에 의하면 근대의 지배 계급은 자본가 계급이며 따라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지식을 (소용) 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효과적인 착취를 수행한다.

백상현이 봉합을 말한 것처럼 김소연도 봉합을 말한다. 후(後) 혁명적 새 주인으로서 과학적 담화로써 지배관계를 합법화하는 대학담화가 설명할 수 없는 X의 존재를 애초부터 아예 없었던 것으로 봉합하는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김소연은 주체는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된 존재라는 깨달음이 있기 전에 주체가 누렸던 무한한 만족감으로서의 향유(jouissance)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 과정에서 박탈(거세)당한다는 사실을 전한다.

김소연은 지식이 진실의 매개가 아니라 기만적인 알리바이의 수단이 될 때 세상은 헛돌기 시작하고 역사는 멈춘다고 지적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다.(48 페이지) 정신분석은 당신이 있게 될 곳은 당신의 환상을 횡단해야만 당도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해준다. 당신이 당신의 환상의 매듭을 푸는 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의 핵심이다.(51 페이지)

김소연은 모든 매듭은 고유하며 당신의 매듭은 오직 당신만이 풀 수 있음을 전제하며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인 대타자에게 의존하는 대신 당신 스스로 주체로서 향유하고 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남들이 무엇을 욕망하든 무소의 뿔처럼 오직 당신만의 욕망의 힘으로 가라고 말한다.(52 페이지)

이성민은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를 (얼마나) 원할까?’란 글에서 기존의 정신분석이 수직적 관계와 수직적 이해방식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며 ‘동기간: 성과 폭력’이란 책을 낸 줄리엇 미첼을 언급하며 한국에서의 형제자매라는 수평적 관계는 꼭 수평적이지만은 않다고 주장한다.

이성민은 문화란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지 특수성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65 페이지) 이성민은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간에 서열을 정해주는 데는 문화적 이유가 있지만 사회적 관계에 그런 서열을 도입하는 데는 아무런 문화적인 것도 없다고 말한다. 이성민은 기적이나 학교에서의 관계를 제 1세계, 사회에서의 관계를 제2 세계라 부른다.

이성민에 의하면 제2 세계에서 제1 세계의 호칭(형, 동생 등)을 유지하는 것은 제1 세계가 제2 세계를 침범하는 것일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제2 세계가 제1 세계로 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66 페이지) 이것이 바로 사회적 증상이다. 이성민은 제2 세계에는 평등주의적 문화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것은 서양발 이념이기 이전에 성인의 독립성 그 자체가 문명 속에서 언제나 요청해 온 그 무엇이라 결론짓는다.(67 페이지)

정지은은 ‘왜 사랑하기가 점점 힘들어질까?’에서 낭만적 사랑이 사라진 시대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성에 대한 미성숙한 태도와 도착적 태도를 구분한다. 정지은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인간의 정의는 결여와 욕망의 존재라고 말한다.(78 페이지) 한 번 충족되면 그만인 욕구와 달리 욕망은 욕구로 해소되지 않는 결여를 함축한다. 라캉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 말했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란 말은 욕망은 타자를 욕망하는 것이면서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의미이다.(78 페이지) 정지은에 의하면 사랑의 본질은 사랑하는 자를 욕망의 주체로서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 정지은은 손에 닿을 수 없는 보물이라는 의미에서 아갈마(agalma)라 불리는 대상 a는 타자 안에서 타자보다 더한 것, 타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라 설명한다.

대상 a는 사랑을 발생시키는 그 무엇이다. 정지은은 스피노자를 정신분석의 관점으로 해석한 미란 보조비치의 작업을 소개한다. ‘암흑지점’이란 책에서 보조비치는 타자 안의 무엇이 내게 기쁨의 원인이 될 때 나는 타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정지은은 정신분석이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낭만적 사랑도 처음부터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85 페이지) 아갈마는 사랑 대상 안에 있는 파괴할 수 없는 보물,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보물이다.(86 페이지)

대상 a는 사랑을 발생시키지만 도달할 수는 없는 어떤 것이다. 타자 안의 대상 a는 그(녀)의 인격 전체를 매혹적으로 만든다.(87 페이지) 대상 a는 내가 원초적으로 상실한 어떤 것인데 다만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저 대상 a 때문에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 대상은 사랑하는 주체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으로서 자아 이상에 가깝다.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는 인격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충동의 대상이 된다. 욕망의 원인인 대상 a가 이 대상 a를 포함하는 타자로부터 떨어져 나와 충동의 부분 대상이 될 때 욕망의 주체는 충동의 노예가 된다.(88 페이지) 정지은은 사람은 사라지고 충동의 부분 대상만 넘쳐나는 현실을 우려한다.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는 은폐됨으로써만 기능한다.

정지은은 성을 충동을 만족시키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사용하자고 말한다.(89 페이지) 정지은은 사토리(さとり: 득도) 세대가 행복감도 크지만 불안감도 크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정지은에 의하면 욕망의 주체는 신경증적 주체이다. 병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주체는 신경증적 주체이다.(90 페이지)

욕망의 주체는 항상 결여 속에 있다. 이는 주체의 욕망이 영원히 만족할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는 주체임을 의미한다. 정지은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랑, 그럼으로써 서로에 대한 삶 전반에 대한 욕망을 촉발시킬 수 있는 사랑, 결코 비대칭적 위치에 있지 않은 두 연인에 의해서 언제나 재창조되는 사랑을 긍정적 사랑이라 부른다.

정경훈은 ‘불안에서 향유로: 행복한 자아로 가는 길’에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며 자아는 원래 타자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환상 즉 타자에 의해 매개된 이미지이기 때문에 증상은 고통임과 동시에 향유라는 사실을 거론한다.(97 페이지) 정경훈은 주체는 기표의 생산물이라 말한다. 기표의 세계는 상징계이다. 정경훈에 의하면 기표(울음 소리, 제스처, 말 등)가 본질적으로 몸의 욕구 자체를 직접 표현할 수 없기에 기표화하지 않는 비(非)의미가 발생한다.

이것을 소외라 한다.(98 페이지) 라캉은 아이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상상적 동일시라 부른다. 자아는 생래적인 실체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소외된 이미지를 자기로 착각함으로써 구성된다. 거울은 물질적인 거울일 수도 있고 일상생활에서 아이의 이미지를 비추는 거울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98 페이지)

잘 생겼다, 너무 먹어서 뚱뚱하네 등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은 기표이고 이는 자아를 구성한다, 기표 연쇄를 대타자라 한다.(98 페이지) 주체가 대타자와 동일시하는 것을 상상적 동일시라 한다. 자아는 주체의 참된 본질이 아니라 주변 대타자의 담론과의 동일시 즉 허상적 관계에 의해 형성된 구성물(허상)이지만 자아는 주체의 삶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100 페이지)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생물학적 욕구와 달리 아이가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형성된 것이기에 대타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100 페이지) 이상 자아가 대중매체 등의 담론에 의해 상징계의 수준에서만 형성되었다면 이 담론에 대한 비판은 그런 이상 자아를 해체하고 새롭게 바꿀 수도 있지만 이상 자아에 상상계, 실재계의 차원이 모두 작용하는 강력한 환상이 있다면 사태는 매우 복잡해진다.

날씬한 몸매의 이상 자아가 초자아로 작용해 뚱뚱한 주체를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음식 섭취 거부가 발생할 수도 있다.(102 페이지)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환유와 은유의 운동을 통해 구성된다. 욕망의 대상이 이모에서 이모의 날씬한 몸으로 운동하는 것은 환유적이다. 하나의 기표가 다른 하나의 기표를 대체하는 경우 특히 복수의 기표를 대체하는 경우 은유적이다. 아이돌 A와 그의 성공을 모두 대체하는 경우가 은유이다.(103, 104 페이지)

외모 욕망은 근본적으로 개별 주체가 대타자 담론에 의해 형성된 외모 이미지를 이상 자아로 내면화/ 동일시할 때 일어난다.(107 페이지)

김석은 ‘왜 한국인은 그렇게 돈에 집착할까?’에서 돈에 집착하면서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를 존경하지 않고 돈 이야기를 터부시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이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논한다. 이런 태도는 정신분석의 대상이다. 김석은 항문기 아이처럼 돈의 방출이 아니라 축적에만 몰두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관계를 파탄시키고 이기주의를 낳는 악의 원천이 된다고 지적한다.(122 페이지)

돈은 성장 과정에서 배설물의 역할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다음 단계인 남근(男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버지가 대표하는 초자아의 힘과 권력을 지시하는 것이 남근이다. 남근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과신하는 심리의 원인이기도 하다. 남근이 거세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듯 돈은 언제 우리를 떠날지 모르는 불안한 대상이다.(124 페이지)

남근은 결국 누구도 소유하지 못하면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무한 욕망의 기표로서 인간을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고리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라캉에 따르면 소비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는 것은 주체의 욕망이 아니라 자아의 상상적 욕망에 불과하다.(1215 페이지) 김석은 돈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돌려놓기 위한 지혜가 필요한 때임을 강조한다.(132 페이지)

김석은 ‘권력의 자리를 바라보는 두 입장: 왜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생각할까?’에서 지도자를 절대시하는 것이 북한에만 있는 것인지? 묻는다. 김석은 보통 북한 수령제의 권위주의적이고 잔혹한 일인 통치 형태를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한심한 독재체제라고 비난하지만 한국인의 정서에도 합리성보다는 감성에 순응하고 정치 지도자를 아주 특별하게 바라보는 권위주의 정서다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137 페이지)

김석에 의하면 우리 국민은 대통령이자 정치 지도자를 자주 욕하지만 합리적인 유권자의 비판적 태도에서 기인하기보다 마치 아니가 부모를 원망하는 듯한 심리적 평가인 경우가 많다.(137 페이지) 정신분석 관점에서 권력은 아버지의 자리를 바라보는 심리와 연관이 있다.(139 페이지)

프로이트가 원초적 아버지의 살해와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숭배의식인 토테미즘을 공동체 형성의 원리로 강조한다면 라캉은 아버지의 빈자리와 그것을 대하는 주체의 욕망에 주목한다.(141 페이지) 라캉은 아들들이 한편으로는 아무도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환상 속에서 그 자리에 도달하려는 모순되고 금지된 욕망을 꿈꾼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법, 공동체, 권력욕의 출발점으로 작용한다.(142 페이지)

이만우는 ‘반사회적 폭력 범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서 증오의 감성은 그동안 우리의 일상생활에 널리 퍼져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성의 사회적 발생 원인과 배경을 추적하는 사회학적 연구는 미미했다고 지적한다. 이만우는 폭력 범죄는 가해자가 증오의 감성을 실행하면서 희생자에게 형태 없는 불안을 배설하고 그 불안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가해지 본인이 가진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분석한다.(162 페이지)

이만우는 우리가 증오를 남에게 부과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안에 포용할 수 있도록 증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171 페이지) 이만우는 폭력 범죄의 가해자는 우리 자신의 과장된 모습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폭력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파괴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그 충동이 문화적으로 포용되지 못한 결과 즉 병리적 문화 형태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172 페이지)

홍준기는 '세대 갈등; 절망한 청년들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서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실제 그러한 방향으로 작업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힐링 열풍과 더불어 개인심리학적 차원으로 축소되어가고 있음을 안타까워 한다.(179 페이지)

홍준기는 도대체 욕망은 무엇이고 주이상스는 무엇인가? 이러한 이론적인 문제에 몰두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라캉 정신분석을 공부하는 일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184 페이지) 홍준기에 의하면 라캉이 타자에 의한 소외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캉의 타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개념이므로 우리의 절망한 청년은 라캉 이론으로부터 별다른 해결책을 얻을 수 없다.(185 페이지)

홍준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세대 갈등은 불행하게도 아들들이 항상 패배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고 말한다.(188 페이지) 홍준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들들(청년들)이 라이오스(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의 은혜를 갈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세대의 권익, 그리고 세대간 정의의 실현을 위해, 그리고 라이오스와는 달리 힘이 없지만 아들들을 위해 희생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아버지들(부모)을 위해 지금이라도 무언가 시작하고 행동해야 하다는 것이라 결론짓는다.(191 페이지)

홍준기는 ‘불안: 우리는 왜 충분히 좋은 엄마 또는 사회적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에서 정신병리 현상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역설한다. 홍준기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역설한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가들이 주로 개인 치료에 집중해 왔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분석가 중에서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환경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동시에 주목하면서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과 임상을 수정, 확대, 재구성한 사람으로 멜라니 클라인, 월프레드 비온, 도널드 위니캇 등을 들 수 있다.(196 페이지)

정신분석은 그 어떤 다른 학문도 주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경멸해 왔던 개인의 환상과 내밀한 무의식에 주목하며 인간 해방에 기여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홍준기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아직 더 많은 이론과 개념을 필요로 한다. 홍준기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정신분석학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196, 197 페이지)

프로이트는 사회적인 영향력에 주목한 반면 라캉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불평등을 완화시켜주는 적극적 정책의 필요성을 모두 비판하고 오직 자유로운 개인의 실현이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을 낳는다는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이론을 주창한 반면 지젝, 바디우, 들뢰즈와 그 뒤를 잇는 현대철학자들은 라캉 정신분석 이론을 사회이론으로 확대하고 있지만 이들의 목표점은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관념적인 이론이다.(198 페이지)

홍준기는 라캉의 충동 중심주의 또는 주이상스 중심주의가 개인 임상과 사회 문제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라 말한다.(199 페이지) 성이 억압되어 자살하는 경우는 없지만 자신의 존재가 파괴되면 자살할 수 있다고 말하는 홍준기는 정신분석학이 사회를 이야기 하더라도 그것을 좀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방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200 페이지)

홍준기는 정신분석학이 사회를 말할 때조차 여전히 개인주의적인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한계 때문에 (대안으로) 국가(에 대한 논의)를 말한다. 홍준기가 비판하는 것은 모든 개인 환원주의 및 사회 환원주의이다. 홍준기는 개인과 국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정신분석적 개념으로 불안을 극복하게 해 줄 충분히 좋은 엄마를 든다.(201 페이지)

홍준기는 멜라니 클라인을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수정, 보완, 확대해 개인과 환경 사이의 변증법을 가장 이론적인 방식으로 정립한 최초의 분석가로 정의하며 홀로 있음을 견딜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개인의 자유는 그 자유의 전제 조건인 심리적, 물질적 안정감 같은 가족적, 사회적 환경을 반드시 요청한다고 주장한다.(205 페이지)

홍준기는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는 신경증적 사회였다면 이제는 망상 - 분열적 사회가 되었다고 말한다. 모두가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정도를 넘어 박해망상 속에서 타인을 조롱하고 공격하며, 나만 좋은 엄마의 젖을 먹겠다는 망상 – 분열적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207 페이지) 홍준기는 좋은 엄마를 사회적 차원으로 말하면 사회적 국가가 된다고 말한다.

김서영은 ‘행복을 향한 삶의 방향성을 찾아서: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을까?’에서 전문가라는 이름은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며, 그 여정 속에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는 사람 즉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스스로를 연마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선물이라 말한다.(217 페이지)

김서영은 수강료가 70만원이 넘는 강남의 한 공립중학교의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하려는 부모의 눈빛에 사실 그 아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인다. 즉 아이는 내 소유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인지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찬 눈빛, 자식을 자신 마음대로 키우는 것이 정답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찬 눈빛을 말한다.(220 페이지)

김서영은 무조건 제도를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욕망에 의해 아이가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 말한다. 김서영은 구조 속에서 질문하지 않는 아이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가 자유를 획득하지 않는 이상 그는 언제나 수동적인 자세로 자신 없이 펼쳐지는 삶을 따라가게 된다고 말한다.(222 페이지)

김서영은 자아의 건강한 부분을 강화한다는 자아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한 라캉을 이야기한다. 라캉은 거짓말을 빈 말(empty speech)이라 말한다. 라캉은 주체적 언어인 찬 말(full speech)이 포기되는 지점에서 폭력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란 말해야 하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상황, 말해진 것을 듣지 않으려는 고집, 치밀하게 대비해야 하는 것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나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망각하는 태만 등을 아우른다.(229 페이지) 김서영에 의하면 세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언제나 구차하고 번거롭다. 그러나 그 구차함을 포기하는 순간 현실은 그렇게 놓친 세부들의 얼룩으로 채워진다.(229 페이지)

김서영은 프로이트는 더욱 극적인 기법인 최면과 암시 대신 자유연상이라는 구차한 기법으로 돌아섰는데 바로 그 구차함이 정신분석의 치유적 방향성을 구성하는 기반이라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다음의 말이다, 자유연상이란 내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을 뜻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증상으로 드러난 현실의 얼룩에 직면하여 자신의 환자들에게 정신분석의 목표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히스테리적 비참을 일상의 불행 정도로 바꾸는 것이라 설명했다. 일상의 불행이란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감당할 만한 불운을 의미하며 어떤 괴로운 상태에서도 에로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230 페이지)

프로이트는 삶의 방향의 원천을 에로스라 부르며 에로스가 수반되지 않는 충동은 혼돈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231 페이지) 김서영은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배려와 변화를 위한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절멸의 방향성이라 말한다.(233 페이지)

김서영은 전문가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스스로의 장단을 찾고 그 장단에 맞추어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이를 뜻한다고 말한다. 김서영에 의하면 그는 주변 사람들이 지겨워할 정도로 같은 일 또는 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모든 구차하고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세부들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며 느린 걸음으로 기약 없는 외로운 싸움을 끝내 견뎌내는 사람이다.(234 페이지)

김서영은 정신분석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연구하는 실천적 학문이라 말하며 이것에 실천적인 변화를 위해 사회, 정치,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을 분석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말을 더한다,(236 페이지) 김서영은 아이가 말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아이에게 진정한 금수저를 쥐어주는 행위라 말한다.(237 페이지)

프로이트의 조언은 단순하다는 것이 김서영의 결론이다. 그것은 통제하고 조절하려는 의식의 명령을 잠시 내려놓고 내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내 아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귀 기울여 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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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다정한 호칭‘이란 시집을 사야겠다. ‘벚꽃의 점괘를 받아적다‘,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역방향으로 흐르는 책‘, ‘바람의 지문‘ 등의 주목할 시들이 수록된 책이다.

읽지 못해 느낌만을 말할 수 밖에 없기에 하는 말이지만 저 시들은 따뜻하고 낭만적이고 거기에 시인만의 남다른 시선이 더해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정한 호칭‘이란 제목이 그런 생각을 하게 했을 수도 물론 있다. 화음독서(花陰讀書)라는 말을 하고 싶다. 꽃 그늘 아래서 책을 읽는 것을 말하니 능소화(凌霄花) 정도의 꽃이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역방향으로 흐르는 책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은유와 수사(修辭), 낭만 등에 주조를 두는 산문은 싫어 하지만 시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한다. 시에서의 그런 점들은 즐길 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정시의 그런 점은 덫이 될 수도 있다. 자기만의 시선 또는 특색이 결여될 경우 밋밋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다정한 호칭‘을 시인만의 남다른 시선이 담겼으리라 말한 것은 제목의 신선함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정말 그런지를 확인하려면 시집을 구입해 정독하는 수 밖에 없다.

산문보다 어려운 시를 즐기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때 시집 한 권을 아우르는 리뷰를 써야한다는 부담감을 잔뜩 품고 있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수록 시들 가운데 한 편에라도 공감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난해한 시성(詩性)에 대처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책 자체를 대하는 방식에 생긴 변화를 반영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요즘 내 독서는 책 한 권을 통독하고 리뷰를 쓰는 방식을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신 읽기보다 쓰기에 비중을 둔다.

시에 익숙해지는 방식을 말하는 이수명 시인/ 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

이수명 시인/ 평론가는 시인이 펼치는 새로운 감각을 자꾸 접하다 보면 시가 난해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고, 시는 분석하면 난해하니 즐기라고 말한다.(2016년 9월 30일 중앙일보)

인상적인 것은 다음의 말이다. 세상의 흔적이랄까, 불분명하고 작은 것들이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뚜렷한 자리를 갖지 못한 채 돌아다니다가 미처 언어로 표명되기 전 어떤 이미지를 만나 표출되는데 그게 시가 되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렇게 미지의 것, 불분명한 것, 흔적 같은 것을 언어화 해야 하기에 시는 산문과 다르게 은유, 수사 등에 주된 근거를 두어도 무방하다.

덧붙일 말은 시에 못지 않게 시평론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에게 당분간 시는 읽기가 쓰기보다 더 비중 있는 장르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읽는 것과 쓰는 것(시가 아닌 시에 대한 느낌)이 균형을 이룰 때 나만의 시선을 갖춘 채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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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고 싶으나 아직 이해하기에는 요원(遼遠)한 시로 느껴지는(물론 내게) 김수영
시인의 시에 그나마 친근해질 계기가 되는 것들은 내가 처한 상황과 공명하는 종로, 광화문, 왕궁 등의 시어가 있는 시들이다.

‘시골 선물’이란 시에서 김수영 시인은 “종로 네거리도 행길에 가까운 일부러 떠들썩한 찻집을/ 택하여 앉아있다...”는 말을 했고,

‘거대한 뿌리’란 시에서는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屍口門)의 진창을 연상하고...”란 말을 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서는 “왜 나는 조그만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란 말을 한다. 이 시어들 또는 이 시들만으로 김수영 시인이 성큼 친숙해졌다고 말한다면 오버일까?

한 후배가 내게 형하고 이야기를 하면 또는 형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이 부도덕하게 느껴져 불편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쎄 내가 그렇게 도덕적인 사람인가?

어떻든 이는 김수영 시인에 대한 평가를 보고 생각한 일화(逸話)이다. 이은정 평론가는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 안온했던 일상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 4 페이지)고 말한다.

1950년 지적 취향이 통하는 김현경과 동거를 시작한 김수영 시인은 생계를 위해 양계업을 하기도 했다.

강진으로 유배되어 온 다산(茶山)이 면회온 큰 아들편에 작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 글에 닭 이야기가 있다.

“네가 양계를 한다고 들었다... 진실로 농서를 숙독해서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 보렴... 또 간혹 시를 지어 닭의 정경을 묘사해 보도록 하라... 만일 이익만 따지고 의리는 거둘떠보지

않는다거나, 기를 줄만 알고 운치는 몰라 부지런히 애써 이웃 채마밭의 늙은이와 더불어 밤낮 다투는 자는 바로 세 집 사는 마을의 못난 사내의 양계인 것이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하려는지 모르겠구나.”

이 편지 글을 요약하자면 공부하고 즐기라는 말이 될 터이다. 다산 선생의 말씀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김수영 시인은 어땠을까?(양계를 어떻게 했을까?) 묻는다면 실례일까?

다산이 전한 말씀을 김수영 시인에게 한 것으로 상상하면 실례일까?

물론 그저 순수한 호기심일 뿐이니 그리 불편해 하지 마시길...즐김과 공부 또는 즐김과 일, 이는 즐김 속의 일(공부)을 말하는 것이다. 계속 내가 지향해야 할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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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14만평(경복궁은 13만평)의 면적 가운데 후원(後苑)이 차지하는 면적은 10만평으로 비중으로는 무려 70퍼센트가 넘는다.(‘13만평 – 9만평: 69퍼센트‘를 이야기하는 논자들도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정조가 세운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이 있었고 동산, 연못, 정자(亭子), 연경당 등의 건물을 볼 수 있다.

창덕궁이 경복궁을 제치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 된 것은 동아시아 궁궐 건축 및 정원 디자인의 뛰어난 원형으로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룬 형식의 탁월함을 인정(우동선, 조재모 외 지음 ‘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 유산 열두 가지‘ 87 페이지)받은 결과이다.

창덕궁 후원 감상의 미덕은 아름답고 독특한 정자들을 감상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는 바 가을 단풍이 든 후원 및 정자 감상은 그 중 최고일 것이다. 정자들 가운데 유일한 기록을 지닌 것들이 몇 있다.

관람정(觀纜亭)은 한국 유일의 부채꼴 모양의 정원으로 파초를 본떠 만든 나뭇잎 모양의 편액(扁額)도 그렇다.

폄우사(砭愚榭)는 정자 사(榭)자를 쓴 유일한(?) 정원이다. 폄우란 말은 어리석은 사람에게 침을 놓는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왕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 폄우라는 말과 함께 음미할 사연이 부용정(芙蓉亭)에 있다. 두 다리가 연못에 잠겨 있어 사람이 발을 씻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지만 다른 사연이 있다.

옛 중국에 창랑(滄浪)이란 강이 있었는데 여행객들이 강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닦았지만 흐릴 때는 발만 씻고 지나갔다.

공자는 이를 물이 빌미를 제공했기에 벌어지는 일로 해석했다. 모든 일은 자신이 하기에 달렸다(자취지야: 自取之也)는 의미의 말이다.(최종덕 지음 ’조선의 참 궁궐‘ 155 페이지)

이런 깊은 사연을 음미하면 자기만의 감식안으로 아름다움과 함께 의미를 반추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자기 하기에 달렸다는 말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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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막 문화유산해설의 세계에 입문(initiation)했다. 그런 내게 어울리는 말은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학인(學人) 정도의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설명하는 과제가 내게 남아 있다.

지난 1월 25일 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확인한 우여곡절 끝의 합격(合格) 소식을 알린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그간 형식과 내용 때문에 고심 하셨습니다. 이제 형식을 갖추셨으니 마음껏 내용을 펼치십시오.” 동기의 댓글이다.

오독(誤讀)인지 모르지만 기본 지식을 갖추었는지를 검증받는 형식을 통과했으니 이제 내 고유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내용을 마음껏 전하라는 말로 읽히는 글이다.

물론 기본에 충실한 고유성(固有性)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학자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천고(遷固)라는 호를 가졌다.

이 호는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의 천(遷: 옮길 천)과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의 고(固: 굳을 고)를 합한 말이다.

닮으려는 두 학자로부터 천고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것은 원칙을 지키되 융통성도 발휘하라는, 또는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연성도 지키라는 의미가 담긴 명명(命名)이다. 이 말이 내게 시사적임은 물론이다.

이덕일 소장에게 천고라는 호를 지어준 분은 노사(蘆沙) 기정진 선생의 학맥을 이어 한학을 하신 이준영 선생이다.(강원도민일보

2017년 1월 2일 기사 ‘“100만 촛불 민심 현대판 반정 적폐 청산 계기 삼아야“’)

일본의 대표적 다독가인 교육학자 사이토 다카시 교수에 의하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답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똑같은 질문에도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대답을 했다.

공자는 하나의 정답이란 없으며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답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사이토 다카시 지음 ‘내가 공부하는 이유’ 134, 135 페이지)

하나의 정답이란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의미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이 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여시아고(如是我考)라는 말로 나를 설명하고 싶다.

그것은 하나의 객관적 사실을 다르게 전하라는 말이 아니라 팩트에 충실하되 그것들을 잇고 꿰는(미륜: 彌綸) 방식은 새롭고도 공감할만 해야 한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누구나 시연(試演)을 통해 경험한 바이겠지만 해설사의 가장 큰 마이너스 요인은 긴장 탓에 또는 준비 부족 탓에 암기한 내용을 듣는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대상의 표상(表象)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라 말했다.(프랑수아 다고네 외 지음 ‘삐딱한 예술가들의 유쾌한 철학 교실’ 137 페이지)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여러 공동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예술가 마르잔느 사트라피는 대중으로 표상되는 평범하고 흔한 생각에 맞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들조차 자신의 작품을 대중들 앞에 발표하려고 노력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서울대 스페인어문학과 김현균 교수는 ”그대들의 선배가 너무 많이 타자(他者)의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인식과 태도)에 노출되었으므로 그대들은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을 세워보거라“고 말한 고은 시인의 말을 예로 든다.

김 교수에 의하면 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갖추는 것이다.(배철현 외 지음 ‘낮은 인문학’ 203 페이지)

이는 낯설게 보기를 강조하는 김영민 교수의 지론(‘공부론’ 159 페이지)과도 통한다. 김영민 교수가 곡진하게 주문하는 것은

‘전문성 – 아마추어리즘’ 그리고 ‘조건 – 한계’ 사이의 변증법적, 생산적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는 자명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니 다르기에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소용 없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소용이 된다는 장자의 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자네의 이론은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혜자(惠子)에게 소용이 없는 것이야말로 소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끝없이 넓지만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디딜 수 있는 넓이 뿐이라고 해서 발바닥 밑면만을 남겨두고 그 주위의

땅을 파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 그래도 발바닥 밑만이 소용있겠는가라는 말로 일침을 가한 장자(莊子)의 말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이지만 그것은 수많은 인간의 담론들을 거쳐 나온 또는 수많은 인간의 담론들에 실려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문화유산과 문화유산 아닌 것들의 관계를 엄격히 구별하는 것이다.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학인(學人)에게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흥미롭고 또 궁금하다. 설레고 긴장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 시기를

돌이켜 아쉬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을 내되 늘 새로운 눈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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