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이희근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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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궁궐이 다섯 개나 되는 곳은 서울 뿐이라며 이를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 님의 글을 읽고 민중적 관점의 책이 뭐 없을까 찾다가 이희근 박사의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을 발견했다. 4년 전 나온 이 책이 이제 내 관심의 대상이 되다니...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를 깰 때가 되었다는 저자는 백정을 북방 유목민의 후예로 정의하며 백정의 비율이 평민의 1/4에서 1/3에 이른다고 전한 '성종실록'을 언급한다. 저자에 의하면 구한말 고종의 고문으로 왕실에 머물렀던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자신의 눈에 비친 조선은 단일민족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샌즈는 한반도에 끊임없이 대륙 및 해양 계통의 인종들이 유입되었다고 보았다. 조선은 유교의 명분과 질서, 엄격한 위계와 혈통을 중시한 숨막힐 듯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에서 백정들이 차별을 받았으리란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당시 성인 남자들보다 훨씬 키가 크고 장대한 데다가 눈의 색도 확연히 달랐다.

사냥에 탁월했던 그들은 갖바치(가죽 장인: 匠人), 도한(도축업자) 등으로 세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백정은 이류(異類), 이종(異種), 호종(胡種), 별종(別種) 등으로 불렸다. 왕조 초기부터 위정자만이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화척 등의 부류를 별종 즉 이방인으로 취급했다. 조선에서 백정은 평민조차도 상종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백정은 일상생활의 모든 구석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았다. 백정들은 명주옷은 말할 것도 없고 양인의 평상복인 소매 넓은 겉옷조차 입을 수 없었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조차 늘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 불렀을 정도로 굴욕적인 차별을 받았다. 저자는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진짜 서울 토박이는 한반도 재래 거주민이 아니라 깊은 산에 둘러싸인 곳에서 호랑이, 표범, 멧돼지와 조류를 사냥하며 살았던 거란족의 후예라고 보는 게 옳다고 말한다.(66 페이지)

예종 무렵 고려의 남경은 지금의 서울이다. 당시 왕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거란족이 동원되었다. 당시 거란족 출신이 상당수였다. 당시(11세기 초) 고려인과 거란인은 서로 포로로 잡혀가거나 자발적으로 상대국으로 도망하는 일이 빈번했다.(72 페이지) 수만 명의 거란군이 포로로 잡혀왔다.(75 페이지) 고려는 그렇게 한반도에 정착한 거란족을 양수척이라 불렀다.

고려의 관료들은 평소 사냥으로 단련된 양수척(화척, 재인)의 전투능력을 알고 그들을 원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인력으로 썼다.(81 페이지) 꽤 많은 몽골족이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제주인도 몽골 출신인 것이다. 우리 역사는 그 역사적 풍상(風霜) 못지 않게 다양한 이족들이 왕성하게 넘나들었던 곳이다.(85 페이지)

'세종실록'에 평안도와 황해도에 몽골족의 후예가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88 페이지) 고려에 정착한 몽골족은 육식 문화 보급의 주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소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다. 살생을 죄악시하는 불교 탓이기도 하지만 소는 사람 대신 땅을 갈아 곡식을 심게 해주고 무거운 짐을 운반해주는 동물이기에 식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104 페이지)

조선 왕조에 이르러 소고기 소비량이 증가했다. 소는 유교식 제례에서 성인인 공자나 천자의 제상에 올리는 희생(犧牲)이었다. 세종은 유독 우금령(牛禁令)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농업보호정책 차원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했다.(117 페이지) 소를 잡지 못하게 하니 고기 뿐 아니라 가죽 값이 상승했다. 가죽 소비량이 증가해 밀도살이 부추겨졌다.

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정의 지속적인 도살 금지 조치로 백정은 생계수단을 잃고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도축(屠畜)과 사냥이 백정의 일이었다. 당시에 호환(虎患)이 심했다. 호환은 일상적이었다. 능침(陵寢)도 그런 피해를 입었다. 호랑이의 소굴이 되기까지 했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인 광릉이 대표적이었다.(133 페이지)

왕조는 개창 직후부터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는 금송령(禁松令)을 내렸다. 특히 서울을 지킨다는 북 현무(玄武)인 백악, 남 주작(朱雀)인 목멱, 좌 청룡(靑龍)인 낙산, 우 백호(白虎)인 인왕산 등에서는 소나무 벌채를 일제 금했다. 이 때문에 도성 근처는 소나무가 울창했다. 호랑이의 최적의 서식 또는 은신처가 된 것이다.

백정들은 발군의 호랑이 사냥꾼이었다. 개국 직후인 태조 이성계 때부터 호환은 위정자들의 최대 고민이었다. 세종때의 재상(宰相) 최윤덕(崔潤德)이 평안도 안주 목사로 있을 때 수만 그루의 버드나무를 고을 남쪽에 심어 수해를 막고, 고을 사람을 해친 호랑이를 잡아 죽여 민원을 해결해 칭송이 자자했다.

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 덕이다. 어머니가 죽자 이웃의 백정 집에 맡겨져 자란 것이다. 백정은 위정자들에게 자주 징발(徵發)되었다. 유랑민들인 백정은 조선에서 농민 되기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왕조의 개국과 함께 조정의 지속적인 도살 금지 조치로 백정은 생계수단을 잃고 생계형 범죄행위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백정을 호적에 올리고 토지에 안착시켜 농사를 짓도록 하고 만일 도축을 하거나 농사를 짓지 않고 유랑할 경우에는 범죄로 간주해 처벌하는 것을 제민화(齊民化) 정책이라 한다.(제민의 제는 가지런 할 제이다) 행장(行狀)은 조선 시대의 여행 증명서를 말한다. 백정은 행장 없이 여행할 수 없었다.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백정을 제민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 물론 이는 왕국 구성원들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백정들은 유랑 금지 및 도축 금지로 이중의 어려움에 당면하게 되었다. 농상(農商)만을 천직으로 여긴 조선의 위정자들은 소 사육을 장려하는 정책을 생각하지 못했다.(218 페이지)

우의정 맹사성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관리들은 평민이 가죽신을 신지 못하게 하는 등의 금지령만을 양산했다. 특권의식의 발로이자 단견(농상 외의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이었다. 백정들이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도축 금지와 유랑 금지(= 사냥 금지)때문이었다. 백정들은 자기들끼리의 혼인과 소고기와 소 가죽 수요 증가 등으로 번성했다.

인구 증가로 그들의 범죄율이 늘었다. 관군에 대적할 정도였다. 왕국의 교화사업이 실패했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백정 출신 도둑떼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경기도 양주 출신의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은 명종 때 3년간 활약했다. 사실 백성들은 임꺽정 무리의 보복(신고에 대한)을 두려워 했는데 그보다는 자신들의 재산만 약탈하지 않는다면 굳이 이들을 고발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도적이 성행했던 주 원인은 수령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재상들의 탐오(貪汚)였다. 임꺽정이 의적(義賊)이라는 관념이 생겨난 것은 명종실록 사관의 기술 및 분석 때문이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守令)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라는 분석, 윤원형(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동생)과 심통원은 외척의 명문거족으로 물욕을 한 없이 부려 백성의 이익을 빼앗는 데에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큰 도적이 조정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라는 기술(255 페이지)을 보라.

백정은 한반도 주민들의 정주(定住), 정착(定着), 고정(固定)의 생활 유형에 충격을 준 그룹이다.(257 페이지) 백정은 결국 원래의 정착민과 통혼을 거치면서 한반도 정착민의 일부로 뿌리를 내려갔다. 그들은 조선 후기에는 왕조의 수호자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로부터 조선을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백정들은 천부적인 전사였다.(261 페이지) 그들은 여진족 토벌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노비나 다름 없던 백정들에게는 전쟁이, 가문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267 페이지) 백정, 천인들이 임진왜란 와중에 전공을 세워 고위직에 오르자 사대부들은 반발했다.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는 자신의 책 '극동회상사기(極東回想私記)'에서 두 차례의 양요때 백정 출신 사냥꾼의 영웅적 행위를 묘사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대에 맞서 싸운 주력군은 백정 출신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전력 열세 속에서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프랑스, 미국의 병사들에 강렬히 저항했다.(309 페이지) 조선시대에 남자 어른은 상투를 틀고 갓을 썼지만 백정은 보통 사람들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죄인이라며 쓰고 다닌 패랭이를 썼다. 늘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331 페이지)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1896년 백정의 갓 착용이 허용되었지만 차별과 박해는 여전했다. 그런 백정들이 당당한 신민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관민공동회로 인해서이다. 조선시대에 백정이 받은 차별과 박해를 보면 외국에서 온 결혼이민자나 노동자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 겹쳐진다.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은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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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를 가진 책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을 읽고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많은 날들을 보낸 내게 도움이 될 여지가 별로 없는 책임에도 구입한 것은 제목이 가진 매력 때문이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사회화로서의 성장이 개인에게 억압적인 과정임을 라캉의 이론 등에 의거해 쓴 책이고 여성 시인들의 시를 분석한 책이기도 하다.

저자 양효실은 예술가를 전시주의자 또는 노출증자로 정의한다. 양효실에 의하면 전시는 상처를 자랑하는 것이고 노래하는 것이며 즐기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예술가란 소통하려는 욕망과 감추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에 의해 추동(推動)되는 사람이란 말을 했다.

위니콧처럼 볼 수도 있고 양효실처럼 볼 수도 있다. 다만 예술가가 아니지만 드러내는 듯 감추는 나는 위니콧의 말에 마음이 간다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약용의 순정함과 곡진함을 마음에 두지만 표현에서는 감추는 법을 잘 활용하는 글을 쓴 박지원 같은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란 부제와 달리 저자는 자신의 글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 겉모습은 어른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만큼이나 약한 이들을 학대할 뿐 여전히 화해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인 나에게 지침이 될 글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 오랜만에 미학자의 유려한 사유를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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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끼리는 돈 이야기를 하고 부자들끼리는 예술 이야기를 한다.. 톨스토이가 한 말이라고 한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 같은 것이 돈이 아니겠는가? 문화방송 김소영 아나운서가 '예술 감상 초보자가 가장 알고 싶은 67가지'에서 이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돈 이야기에 이런 저런 화제들이 생각난다.

...

1) 2004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인 황인숙 시인이 한 말; "내게도 생전의 김수영 선생과 닮은 데가 있다. 일상적 고민의 반 정도는 돈 문제라는 것. 약간의 물질적 보상에 문득 우화등선하는 느낌이다."

2) 그림 재테크; 예술에 관심 있는 부자들이 하기에 적당한 것일까, 아니면 돈에 관심 있는 예술가들이 하기에 적당한 것일까?

 

3) 정신분석 이야기: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의 한 꼭지인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필자 성미라는 19세기 말 신경증에 걸린 귀부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이 등장했다는 말을 했다.

 

귀부인 역시 돈과 관련이 있다. 필자는 시간당 7만원의 돈을 지불하며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는 말을 한다.

 

시간당 7만원은 상당한 액수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고액만을 문제삼는다면 문제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증상을 소멸시키는 데 있지 않고 주체가 증상과 화해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백상현 지음 '라깡의 루브르' 98 페이지)

 

그러니 인내는 필수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긴 세월을 견디는 참을성의 문제이지만 그것 역시 돈과 긴밀히 연관된 것이다. ‘라깡의 루브르’에는 오귀스틴이란 15세의 소녀 이야기가 나온다. 19 세기 말을 살았던 그는 성적 피해를 당해 마비와 발작을 겪게 되어 샤르코 박사의 최면술 치료를 받는다.

 

그 결과 완치되지만 완치 이후로도 16 개월간 병원에 머물며 히스테리를 재현한 대가로 월 15 프랑의 돈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병원에서 도망치듯 사라지는데 그 이후의 삶은 알려지지 않았고 사망 날짜마저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히스테리 재현은 자기 소멸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영화와 건축; 영화가 제작자(감독이 아닌 돈을 대는 사람)의 재력 및 안목 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장르이듯 건축도 건축주의 재력과 안목, 추진력 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장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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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독지 절문근사(博學篤志 切問近思)는 넓게 배우고 뜻한 바를 돈독히 하며, 간절하게 묻고 알기 쉽게, 실생활에 가깝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성복 시인의 수미재(守微齋)에 절문근사(切問近思)라는 말이 쓰여 있다는 글을 읽고 그 의미나 기원, 내력 등을 찾다가 절문근사 앞에 박학독지(博學篤志)가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희의 ‘근사록(近思錄)’에 있는 근사(近思)가 이 말에서 비롯되었다. 박학독지 절문근사의 출처는 논어(자장 子張)이다.

수미재란 작은 것을 지키는 집이라는 뜻이겠다. 지킨다는 것은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이겠다. 배워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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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旌善)에서 발원한 동강(東江)이 흐르는 곳, 영월(寧越). 이 가운데 청령포(淸泠浦). 이름이 참 좋다. 맑을 청, 깨우칠 영/ 물 이름 영을 쓴다. 청령포 세 글자는 모두 물 수(氵)가 들어 있는 단어들이다. 내 사는 곳을 흐르는 연천의 한탄강(漢灘江)도 세 글자 모두 물 수(氵)가 들어 있다. 주지하듯 한탄강의 한탄은 원망이나 한스러움을 뜻하는 恨歎이 아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한스러운 기록을 뜻하는 恨中錄이 아닌 한가한 가운데 쓴 기록이라는 의미의 閑中錄이듯.

 

북한 지역인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김화군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들어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시, 연천군을 차례로 흐르는 한탄강. 지난 금요일에서 일요일인 그제까지 모친(母親)께서 단종(端宗)이 한스런 세월을 보낸 청령포, 그리고 단종이 묻힌 장릉(莊陵)에 다녀오셨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에 있고 장릉은 영월군 영월읍에 있는데 그 두 곳에서 단종의 한(恨)과 억울(抑鬱)을 생각하시고 분명 우셨을 것이다. 나 역시 단종을 생각하면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 생각이 나 마음이 참 많이 아프다. 창덕궁에서 칠일만에 청령포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한스러웠을까?

 

너무도 억울하고 황망하게 남편과 헤어지고 노비가 되어 팔십을 산 정순왕후 송씨의 사연은 또 어떤가. 모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중죄인의 귀양지를 뜻하는 유형지(流刑地)라는 단어를 단종이 살았던 청령포에 대해 써도 되는 것일까? 죄인이 아니라 억울한 희생자일 뿐인 그가 살았던 그곳에 대해 말이다. 내가 만일 영월에 살아 단종을 해설할 기회가 생긴다면 슬픔을 누르기 위해 많이 애를 쓰게 될 것이 틀림 없다. 세종(世宗)대의 안정과 위업(偉業)은 부왕 태종이 벌인 유혈극 덕분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세조가 흘리게 한 피는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거의 예외 없이 가족 중의 누군가를 죽인 조선시대의 왕들을 패륜 군주로 표현한 인류학자 김현경이 생각난다. 김현경은 선거의 미덕을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본다. 조선 왕들의 친족살해를 왕의 개인적 품성과 무관한 구조적 문제로 본 김현경의 말은 참고 할 만하다. 하지만 세조의 패악에 대해서까지 그런 시각을 던지고 싶지는 않다. 구조적 문제 이전에 세조의 품성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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