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라는 본명을 가진 최연 시인의 갤러리 엠에서의 ‘그림에 들다‘ 전시회가 23일(수요일) 17시 30분 오픈된다고 들었다.

전시 장소가 인사동 소재의 갤러리여서 좋다. 그곳에 들고 갈 시집을 사기 위해 물은 몇몇 서점들로부터 하나 같이 그 책은 매장에 없어 주문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책을 주문해서 배송받지 않고 직접 가서 받아야 그날 가지고 갈 수 있기에 마음썼는데 종로 반디앤루니스가 있던 곳에 새로 들어선 종로서적을 통해 내일 이후 책을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어제 모임 후 가본 이 종로서적은 예전 그 종로서적이 아니라고 한다. 지난 해 12월 14년만의 부활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옛 반디앤루니스 종로점 자리에 들어선 현 종로서적은 옛 종로서적 창시자 가족과 아무 연관이 없이 이름만 같은 서점이라는 뜻이다.

반디앤루니스 지점들 중 접근성이 가장 좋은 종로점이 문을 닫은 후 찾기 어려운 사당, 잠실, 목동점 등에 가느라 힘이 많이 들던 차에 종로서적이 들어서게 되어 반가웠는데 어제 가보니 서점이라기보다 책도 파는 팬시점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교보도 영풍도 그러니 그런 흐름이 대세인 것 같다. 듣기로 서울의 대형서점들이 출판사로부터 돈을 받고 목 좋은 자리의 매대에 책을 진열시키게 한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결국 돈이 많은 출판사가 만든 질 낮은 책이 가난한 출판사가 만든 양질의 책을 팔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매대를 사는 출판사도 고육책으로 즉 적자를 감수하며 그렇게 하고 있으니 출판계는 이제 끝났다는 탄식은 충분히 공감을 산다.

나는 눈에 잘 띄는 매대가 아닌 구석 구석의 책들을 적극적으로 찾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일주일(토, 일 제외한 5일)에 나오는 책은 1000종이라고 한다. 이러니 선택되지 않고 폐기되는 책들이 많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책 구매 지침은 좋은 책들이 조금이나마 더 많이 빛을 보아야 한다는 당위에 근거한 것이다.

책만이 지식의 원천은 아니지만 진득하게 사유할 수 있는 것은 책이 유일하지 않은지? 그럴 리 없겠지만 우리의 이런 불합리한 출판계의 관행 때문에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한 책들만 남는 세상이 된다면 어쩌겠는가.

가치 없는 획일적인 세상이 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책을 구입하면 낭패를 겪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 매장을 찾아 내용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면 찾는 책이 없어 주문하고 집에서 받아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두고 오프라인 매장이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묻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바쁘겠지만 발품을 팔아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곳에 들러 내용을 확인하고 책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도서관이 많아지는 것을 토건 중심 정책이라 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책을 좋아하는 입장으로는 빌릴 수 있는 책 권수도 성에 차지 않고 새 책 구매 신청 권수도 있으나마나인 수준이어서 미흡하기만 하다.

정부와 출판계 차원의 대책이 마련되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독자들이 책좀 많이 읽고 쉬운 책보다 인문학의 무게감 있는 원전들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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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 콤플렉스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의 책에서였(다고 기억한)다.
김현 선생이 새것 콤플렉스란 개념을 제시한 것은 공부하는 사람이 진득하게 하나의 주제를 연구하지 못하고 유행에 휩쓸려 새 것을 찾아 다니고 그것에 어느 만큼 익숙해지면 또 다른 새 것을 찾아 가는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새것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이 어떤 기제로 그렇게 하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나는 가끔 새것 콤플렉스는 아니고 새것에 대한 열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자평을 하곤 한다. 익숙한 것들을 남다른 시각으로 보려는 것 또는 서양 이론과 동양 이론을 비교해 하나의 틀에 담아내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제 일정을 마친 후 서점에 들러 책을 훑어보다가 정치학 박사 김용신의 ‘성리학자 기대승 프로이트를 만나다‘란 책을 알게 되었다.

퇴계(退溪)와 사칠리기(四七理氣) 논쟁을 한 유명한 학자인 고봉(高峯) 기대승의 사상과 프로이트 이론을 비교한 책이니 흥미를 자극하는 책이다.

퇴계와 고봉의 논쟁을 퇴고논쟁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때의 퇴고는 완성된 글을 다시 읽어 고치고 다듬는 것을 의미하는 推敲가 아니다.

하지만 退高 논쟁을 推敲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논의를 거쳐 진리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글을 쓸 때에는 아무리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알기 쉽게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특히 학자들의 말을 인용할 때는 너무 어려운 것은 쉬운 말로 약간 바꾸는 노력까지 한다고 말한다.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다.

이제 고독하게 몰입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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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여행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가본 사람은 물론 그곳에 살던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프랑스 파리를 서술했다는 칸트. 그가 다시 흥미를 자극한다.

전쟁(2차 대전) 때문에 적국 일본을 방문할 수 없어 간접 자료들만으로 정확한 일본 분석서인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과 함께 생각해볼 문제이다.

바야르는 예의 그 칸트 이야기를 한다. 바야르에 의하면 칸트는 한 번도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언제나 동일한 도정(道程)을 따라 산책했지만 낯선 나라들에 대한 묘사와 해설을 한 사람이다. 바야르는 자신의 책을 칸트에게 바친다고 말한다.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를 내세웠던 칸트는 신비주의 신학자인 스베덴보리가 놀라운 초능력을 보이자 처음에는 인정했다가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는 스베덴보리가 펼치는 형이상학이 도덕 신학적 관점에서 가질 수 있는 의의만을 인정했다. 칸트는 상상력의 소산은 지성적 판단에 의해 검토되고 규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베덴보리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대화재를 480km나 떨어진 곳에서 생중계 하듯 설명했다.(설명이 사실과 놀랍도록 일치했다고 함)

스베덴보리는 스웨덴 사람이다. 헬렌 켈러도 소속되었던 새 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이론가인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 등의 책은 성경 만큼이나, 어떤 때는 성경 이상의 참고서로 통한다는 느낌을, 1년여 시간을 마지못해 동참하며 받았다. 지난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의 일이다.

칸트가 열하(熱河)를 여행한 연암(燕巖)처럼 외국 여행을 할 기회를 얻었다면 열하일기 같은 여행기를 썼을까? 칸트는 왜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 밖을 여행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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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자연의 법칙들은 어둠 속에 있었네. 하느님이 말씀하시길,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온 세상에 빛이 가득했네.(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이는 18세기에 활약했던 영국의 유명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시인 자신보다 더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이 “그때 신이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빛이 생겨났다.”는 구약 성경 창세기(1장 3절)의 한 구절을 바탕으로 나온 말이라는 사실도 유명하다.

포프의 저 말은 뉴턴의 묘비에 새겨진(명銘) 글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리차드 바이스는 ‘빛의 역사’에서 교황을 뜻하는 Pope라는 말 때문인지 뉴턴의 묘비명을 “교황이 쓴(말한)” 것이라 말한다.(228 페이지)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론물리학자 레너드 서스킨드는 증거와 숫자를 나열하고, 더하고 나누고, 도표와 도형을 계량한 박식한 천문학자를 보며 알 수 없게 금방 따분하고 지루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 나와 홀로 거닐며 촉촉하게 젖은 신비로운 밤공기 속에서 이따금 하늘의 별들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고 말한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 – 1892)보다 알렉산더 포프의 감정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했다.(‘우주의 풍경’ 172 페이지)
휘트먼에게 별은 자연과학으로부터 느낀 따분하고 지루한 감정에 대한 해독제였을까? 그가 데이트 상대 여성으로부터 “별이 참 예쁘네요.”란 말을 듣고 “현재 이 지구상에서 별이 빛나는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말을 했다는, 핵융합 반응과 질량 결손(缺損)에 따라 빛을 내는 별의 원리를 처음 밝힌 한스 베테(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이과 바보 문과 바보’ 58 페이지) 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런데 우리는 ‘빛이 있으라’는 신의 말씀으로 빛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경외(敬畏)를 느끼지만 우치다 다츠루가 그랬듯 그 구약 성경 구절로부터 빛보다 소리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우치다 다츠루 지음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139 페이지)을 왜 읽지 못하는 것일까?

다츠루는 소리야말로 빛의 기원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절대자에게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지? 그리고 빛이 있으라는 말로 인해 빛이 생기게 되었기에 소리가 빛의 기원이라 하지만 엄밀히 말해 신의 의지(意志) 또는 사유가 빛을 있게 한 것이다.

빛과 소리를 차별화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츠루의 의도는 신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금기이지만 청각적으로 표상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음성을 표상보다 근원적인 지향적 차원으로 간주하는 유태교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빛과 소리를 전혀 다른 것이 아닌 파동(波動)의 상이한 종류로 볼 수는 없을까?(빛도 파동이고 소리도 파동이다.) 형상으로 신을 표현하는 것은 불경하고 소리로 신을 표현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가?(다츠루는 신의 티자성을 훼손한다는 표현을 썼다.) 생각해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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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새 책을 구입해 반납했다. 돌아오는 길에 김현 평론가가 ‘행복한 책읽기’에서 건망증에 대해 한 말을 생각했다.

옛날에는 건망증이 심하다는 말을 잊음이 많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출처는 이태준(李泰俊) 전집이다.

아울러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한 말도 음미했다.

“A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지시하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하고 B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C라는 책을 참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이 모험들 속에서 나는 나의 인생의 시간을 탕진하고 낭비했다..”는 말이다.

보르헤스가 말한 ’책‘이 문자 그대로의 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많지도 않은 서가에서 인용해야 할 것을 찾아 한참을 두리번거리곤 하는 사람이 나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을,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공허하고 계산을 거치지 않은 자료는 맹목이라는 말로 설명한 책도 내가 찾아 다닌 것들 중 하나이다.

결국 검색을 통해 만난 한 리뷰를 보고 그 책이 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란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 리뷰는 내가 쓴 것이다. 꼼꼼하게 기록해두지 않아 벌어진 웃긴 일이다.

그래도 나는 주(主)인 내용에 비해 부(副)인 책 제목, 저자 이름 등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기억일 것이다. 생각과 자료 모두 결국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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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8-18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구할 수 없는 한전숙 선생님의 현상학 책을 모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잃어버리고 현금으로 배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6개월쯤 지나 이사를 준비하다가 책상 뒤 공간에서 그 책이 발견되었는데, 갖다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제가 먹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책이 지금은 또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네요. 사람의 책 욕심이란 뭘까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8-1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시군요... 현상학 책이라면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절판된 책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궁금증도 생깁니다. ^^ 책 욕심은 가장 신선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