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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내 거처(居處)에 몇 명의 인물들이 다녀갔다. 한 명의 포스트맨과 몇 명의 작가, 한 명의 화가, 몇 명의 작곡가가 그들이다.

포스트맨은 몸으로 왔고 몇 명의 작가와 한 명의 화가, 몇 명의 작곡가는 대화에 호출된 사람들이다.

클래식 LP 200여장을 가져가라는 말을 듣고 휴일에 맞춰 내 거처에 온 박**는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좋아해 자신의 명함을 조르바와 관련된 것으로 장식한 우체국 택배 담당 직원이었다.

간색(間色)인 자색(紫色)이 순색(純色)인 적색(赤色)을 빼앗는 것을 경계한 공자(孔子)의 후예인가, 생각될 만큼 그가 건넨 명함은 순수하게 붉은 색이었다.

‘soul bar(장차 차릴 것이라는 재즈 카페) 우체부, 박 조르(조르바의 그 조르)‘라는 그의 소개 문구가 약간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자신처럼 우체부 일을 했던 작가 찰스 부코스키를 호출했고 나는 그의 선택에 영향을 받아 소방수, 자동차 외판원 등의 일을 하며 글을 쓴 커트 보네거트를 호출했다.

그가 가고 난 뒤 나는 19세기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중요한 풍경화가인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불러냈다.

너무도 유명한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란 그림이다. 이 그림은 페친의 페친인 한 프랑스 시인이 프로필 사진으로 올린 그림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제목 그대로 방랑하는 한 남자가 안개로 채색된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물리학자 레오나르도 콜레티는 ‘명화로 보는 32가지 물리 이야기’에서 이 그림을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일화와 겹쳐 설명한다.

콜레티에 의하면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하이젠베르크는 대학 연구원으로 일하던 괴팅겐에서 ‘꽃가루와 문명의 이기(利器)로부터 벗어난 헬골란트 섬’으로 가 수소원자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시도했던 공식들을 되새기는 나날들을 보냈다.

그 섬은 자신만의 의미와 영감을 찾는 데 맞춤한 곳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할, 원래로 돌아가야 할 출발점이기도 했다.

떠나야 할 때와 돌아가야 할 때, 머무를 때와 움직일 때를 잘 알아야 할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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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해설사 동기들 여덟 명과 함께 남양주 실학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남양주에 사는 동기의 자원 해설을 듣고 점심 식사를 할 식당을 찾았습니다.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저녁 바람 부드럽게‘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겸 식당을 찾았습니다.

문화해설사들이지만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지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아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 제목이고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온 곡 제목이라고요.

낭만적인 작명 스토리를 가진 60대의 여사장님과 ‘저녁 바람 부드럽게‘를 시작점으로 삼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떤 작곡가를 좋아하느냐는 물음을 주고받았는데 저는 바흐, 말러, 브람스, 슈만을 이야기했고 그 분은 베토벤과 막스 브루흐를 이야기했습니다.

약간 어수선한 식당 분위기 탓에 저는 부르흐를 부르크너로 알아 듣고 반가워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막스 부르흐의 ’콜 니드라이‘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좋아한다기보다 아는 곡이란 말이 맞을 것입니다.

저는 부르흐의 곡을 단 한 곡만 아는데 그 분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좋아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남양주의 수려한 경치, 실학박물관 앞이라는 천혜의 입지, 저녁 바람 부드럽게라는 낭만과 카페겸 식당까지...더구나 5월이었기에 더욱 멋지고 부럽고 그랬습니다.

이상은 페친 윤선님의 콜 니드라이 게시를 보며 생각해낸 바들입니다.

지난 수요일(8월 9일) 경복궁 수업 시간에 건축가인 선임(先任)께 제가 맡은 지난 6월의 종묘 해설을 이야기를 하며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몇해 전 삼성 리움 미술관의 특강 요청을 받고 입국했지만 사실은 종묘 정전(正殿)을 보러 왔다는 말을 한 것을 해설에 넣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런 에피소드들을 해설에 담으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즉석에서 한 동기에게 르 꼬르뷔지에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명 건축가이지요. 그 동기는 모른다고 답했고 선임은 일반인들이 전공 밖의 전문가들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렌조 피아노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역시 건축가입니다.

모차르트의 ’저녁 바람 부드럽게‘도 마찬가지 경우일까요? 곡을 들었을 수는 있지만 곡 이름을 기억하고 작곡가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것인가요?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지휘자까지 가려 듣는 매니아들에 비하면 저는 아무 것도 아닌데 관심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매니아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세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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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니게 철두철미(徹頭徹尾)란 말을 듣는다. 욕지연화장 두미문세존(欲知蓮華藏 頭尾問世尊)이란 말을 떠올린다.

연화장 세계를 알려거든 석가 세존께 처음과 끝을 물으라는 말이다. 통영에 가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문구 자체에 통영을 지시하는 내용은 없다. 통영에는 욕지도,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가 있다.

휴가를 갈 여유가 없는 마음을 이렇게 돌린다. 사실 가고 싶은 곳이 어찌 통영 뿐이겠는가?

화담(花潭) 서경덕 선생이 하도낙서(河圖洛書)를 3년간 들여다보며 철두철미하게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철두철미란 말을 음미하는 것.

태극(太極) 및 팔괘(八卦)의 효시(嚆矢)격의 그림인 하도낙서에서 도서(圖書)란 말이 유래했다. 나와도 인연이 있는 말이다.

압도당해서도 안 되고 압도할 수도 없는 책과의 인연...그 인연 때문에 하루가 간다.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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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여 오던 한글 궁서체의 비밀에 대해 들은 것은 며칠 전이다. 갈물한글서회 회원들의 연구 결과를 참고해 유지원 교수께서 정리한 글을 통해 얻게 된 통찰이다.

세계 문화사에서 여성 전문 인력들이 남성을 주도한 사례의 대표가 15세기 궁궐에서 탄생한 한글의 글꼴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궁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풀이하면 궁녀들의 한글 글씨체는 곱고 여성적이었고 인내심있는 훈련으로 표준화라할 수 있는 전범을 마련하기에 이른 데다가 여타 한글 글씨체들과는 확연하게 차이나는 품위를 지녔기에 사대부들조차 한글로 글씨를 쓸 일이 생기면 그들의 글씨체를 따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단아한 옛 글씨체라 짐작되는 서체를 만들어 궁서체라 이름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궁서체에는 옛 궁녀들의 역사가 깃든 것이었다.

긍정적 의미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례임에 분명한데 그렇게 여성 전문 인력들의 남성 주도란 말을 들으니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의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 – 1792)과 강정일당(姜靜一堂: 1772 – 1832) 등 여성 성리학자들을 다룬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에서 접한 특별한 해석 하나가 떠오른다.

지금까지 주역의 여성 괘로 읽혀오면서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오던 곤(坤) 괘가 실은 건도(乾道)의 생명의 창생에 비해서 만물의 형성과 성장을 주관하는 도로서 이로부터 비로소 몸으로 하늘의 도를 이루려는 유교 종교성이 완수된다는 것이다.(‘동방사상과 인문정신’ 수록 이선경 글 ‘易의 坤卦와 유교적 삶의 완성: 곤괘에 깃든 유교의 종교성과 인문정신을 중심으로’ 참고)

주역에 관심이 있으나 깊이나 구체성에서 부족하기만 한 내 생각에 길을 마련해줄 주장이 아닐 수 없고 흥미 있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하기에 족하다 싶다. 인간은 결국 몸으로 도를 이루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을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사고가 여성형인지 남성형인지를 가리는 테스트에서 몇 가지의 문항을 거친 뒤 내게 할당된 결과를 확인했는데 놀랍게도100 퍼센트 여성형이었다.

약간의 과장이 있겠지만 전기한 한글 궁서체 사례와 곤 괘와 건도 사이의 새로운 해석 사례를 축하하는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파우스트‘의 구절을 인용해야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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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기 작가의 ‘라하트 하헤렙‘은 내가 글에 몇 차례 인용한 바 있는 장편 소설이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창조주인 구약의 신에 의해 먹을 수 없도록 설정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의 실체에 대해 알게 되자 신이 아담과 이브가 생명나무를 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그 주위에 칼 모양의 불을 설치하는데 그것을 라하트 하헤렙이라 한다.
나는 가끔 30여년 전의 군대를 무대로 한 이 소설을 보며 요즘 군대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작가는 군 복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을 며칠만에 써 투고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작가는 군대에서는 여러 종류의 불을 만나며 군대 복무는 젊은 날의 통과의례라는 말을 했다.)

나도 작가 정도는 아니지만 벼락치기 글을 써야 할 상황에 처했다. 마감일까지 6일이 남았는데 48, 000자 정도를 써야 하니 하루에 무려 8,000자 정도씩 엿새를 써야 한다.

일과(officium?) 후 써야 하니 상당히 정신 없는 일정이 될 것이다. 그래도 혼비백산(魂飛魄散) 할 정도는 아니리라.

몹시 놀라거나 혼이 나서 혼백이 사방으로 흩어짐을 뜻하는 이 말을 보며 혼백의 그런 좌충우돌이 아닌 자연스런 귀근(歸根) 같은 것은 무엇이라 할까 생각해 보게 된다.

낙엽이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귀근은 결국 죽음을 뜻한다. 갑작스런 죽음이 아닌 자연사(自然死)를 말한다.

이럴 때 신혼체백(神魂體魄)이란 말을 쓴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혼은 양(陽) 즉 가벼운 것이어서 위로 향하고 백은 음(陰) 즉 무거운 것이어서 아래로 향한다고 말한다.

토마스 만의 장편 소설인 ‘마(魔)의 산(山)‘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가 그랬듯 힘들고 고통스런 일정 가운데 묘한 매력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느낌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과정을 돌아볼 때 가질 수 있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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