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 - 심리학자가 만난 조선의 문제적 인물들
김태형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영조(英祖)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노론에 초점을 두고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인식에 한몫 한 것들 중 하나가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들이 강한 나라라는 것이다.

 

영조가 노론의 공세와 협박일 수 있는 강경 주장을 물리쳤다면 비극적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다소 애매하고 절충주의적인 눈으로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관계를 보아온 것이다.

 

사도세자가 미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덕일 소장의 책을 읽고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 책이 김태형 님의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이다. 저자에 의해 개진된 바 사도세자가 지극히 정상적이었음은 물론 살신성인적 인물이라는 글은 설득력면에서 최고이다.

 

사도세자가 살인성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과 무관한 소론 전부를 마구잡이로 죽이려 한 영조와 노론에 맞서 살신성인적 행동을 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심리적 병에 기인해 극단적으로 수직상승하던 영조의 폭주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서서히 하강했다.

 

영조의 미친 학살의 만행에 죽음을 무릅쓰고 제동을 건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너무 다른, 희생양을 자처한 의인이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가 비슷한 처지의 연산군과 달리 개혁군주, 학자군주가 된 것을 훌륭한 부모 밑에서 생애 초기와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으로 보는 등의 정조에 대한 저자의 치밀한 분석 역시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영조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숱한 괄시(恝視)와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며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 기반한 종() 여성적 태도 및 남성 불신(마마보이적 인간 유형)과 열등감을 가졌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는 외향감각적 정체성도 가졌다. 영조는 "경이 비록 백번 머리를 깨트리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당인들을 갈아 마시겠다." 같은 말을 상시적으로 할 만큼 난폭하고 공격적이었다.

 

노론과 한 패가 되어 경종(景宗)을 핍박해 후계자로 등극한 죄책감(저자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 장희빈의 아들'을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심증을 제시한다)도 영조가 보였던 주요 특징이다.

 

영조는 돌려치기, 떼쓰기, 변명과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흔히 사용했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죄의식과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아들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냉혹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억울함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도세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노론이 난리를 쳤지만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결국 영조였다. 교활(狡猾; 간사하고 나쁜 꾀가 많음)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노론에 책임을 전가했다.

 

"중증 환자" 영조는 아들을 죽인 죄를 씻고 아들을 죽이게 만든 노론에게 복수하는 길로 세손 정조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택했다. 영조는 혜경궁 홍씨(한중록에 남편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기록한, 정조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종() 여성적 태도를 보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열다섯에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고, 그리고 자신 앞에서만 그랬다고 썼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갑작스런 발병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직 한 사람(혜경궁 홍씨) 앞에서만 증세를 보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차분하고 의연했던 사람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 살해에 책임이 있는 친정의 무고함을 강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해 '한중록', 그것도 젊어서가 아닌 노회한 나이에 의도적으로 썼다.

 

혜경궁 홍씨가 택한 것은 남편을 버리고 임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아들 산(; 정조의 이름)이었다. 심리학자가 개인 또는 개별 사건에 대한 미세하고 정치(精緻)한 분석에 능하다면 역사학자는 큰 틀을 잡고 사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능한 것일까?

 

어떻든 적어도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등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가 최고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특별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정조가 아버지의 죽음을 정서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면 무의식적 억압을 통해 당시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그는 영락 없이 정신질환을 앓았을 것이라는 지적(61 페이지)이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원인보다 자각할 수 없는 원인이 야기하는 감정적 에너지가 더 큰 심리적 병으로 이어진다. 정조는 공정함에 목숨을 걸고 역사왜곡을 극도로 싫어한 인물이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잘못도 솔직히 인정하는 건강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65 페이지)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발걸음은 조선을 개혁해나가는 노정(路程)과 일치했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이 뜨거워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도 더해갔다. 정조가 개인적인 복수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킨 것은 사회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67 페이지)

 

정조는 정서적으로 매우 안정된 아이였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정조는 놀라운 감정 통제 능력과 인내심을 소유하고 있었다. 저자는 그런 정조의 놀라운 면을 이야기하며 생애 초기에 다져진 이런 능력은 바로 사도세자가 정신병자가 아니었다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라고 말한다.

 

또한 성선설을 믿은 정조의 면모 역시 정상인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 저자는 가해자는 자아가 병들어 자기 혐오감을 갖고 그로 인해 분노 감정이 잔인성을 띤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도세자와 정조가 전략가 유형으로 함께 분류된다고 말한다. 감정적 친밀감이 상당했으리란 생각을 할 수 있다.(76 페이지) 저자는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는 숨막히는 순간 누구도 사도세자를 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상황에 정조가 눈물로 호소한 정조를 이야기한다.

 

별군직(別軍職)이 세손을 데리고 나가라는 영조의 명을 거행하기 위해 세손을 손으로 안으려 하자 사도세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별군직에게 호통을 친 것을 상기시키며 사도세자가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면 심리적 공황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웠기에 아들을 대하는 별군직의 무례함에 그다지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한다.(78 페이지)

 

만일 사도세자가 자기 목숨만을 중시하는 소인배였다면 이 시점에서 어린 아들을 이용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들을 결사적으로 부둥켜안은 채 못 간다. 이 아비를 두고 어딜 가느냐? 이제 네가 영락 없이 아비 없는 신세가 되겠구나하며 한바탕 곡을 했을지도 모른다.(78, 79 페이지)

 

사도세자는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죽음은 이미 각오한 터였다. 단지 그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런 죽음은 아버지의 이름에, 아버지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불효가 되기 때문이다.(79 페이지)

 

정조는 안정된 정서와 뛰어난 감정통제 능력,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 적은 양의 분노 감정, 자기반성 능력, 자신감과 자부심, 공정함과 신중함, 독립성 등을 가진 강철 같은 의지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전략가로 분류된다.

 

정조를 일러 다혈질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음을 지적하며 저자는 다혈질이란 감정기복이 심하거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을 지칭하는데 정조는 감정기복이 크지 않았고 분노 감정도 매우 잘 통제했으므로 다혈질이라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다혈질은 영조이지 정조가 아니다.(93 페이지)

 

정조는 천주교 문제로 노론이 계석 남인들을 공격하자 노론 영수인 이이명의 문집 소재집에 수록된 서양인 소림대와 진현하다란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해 신하들을 제압했다. “천주교와 유교가 비슷한 점이 있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입 다물라는 것이었다.(95 페이지)

 

조정의 수구보수세력에게 겹겹이 포위된 정조는 개혁에 장애가 되는 낡은 정치판을 뒤바꾸기 위해 정치공작을 진행했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신사임당은 부모 관계가 무척이나 좋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자랐기에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좋은 어머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을 깊이 사랑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감정적으로 밀착된 아들이었지 마마보이는 아니었다.(147 페이지) 신사임당과 이이의 관계는 아주 건강한 모자 관계의 전형이다.

 

반면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힘겨운 속세에서 벗어나 신선놀음을 하고 싶어 한 은둔자, 마음씨가 착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나며 개방적이고 온화한 사람이었다.(149 페이지) 저자는 이이가 한편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측은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한테 혼나면서 살아가는 답답한 아버지에게 화가 났을 것이라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처럼 세상에서 후퇴하려고만 한 무능력하고 비겁한 아버지를 보며 자란 아이들은 사회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가 화목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어느 일방만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객관적으로 아버지에게 잘못이 많다고 보면서도 동시에 어머니도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주기를 원한 듯 하다.(156 페이지)

 

어머니의 역할이 있고 아버지의 역할이 있는데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아버지 같은 어머니였음에도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것을 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아버지의 영향력을 무의식적으로 받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든지.

 

이이는 당쟁을 조장하면서 서로 상대 당을 심하게 공격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이준경이 조정에 붕당(朋黨)의 조짐이 있다는 상소를 올리자 이이는 이를 강력 비난했다. 이이가 잘못 본 것인데 이는 후에 실제로 붕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당쟁을 없애려면 무조건 덮어둘 것이 아니라 시시비비를 공정하게 가려야 하는데 이이는 그런 언급 자체를 싫어한 것 같다.

 

이는 어린 시절 겪은 부모의 불화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158 페이지) 이이는 어머니가 죽자 사회에 대해 불안을 느끼며 크게 방황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아버지가 좀처럼 뚫고 나가지 못한 사회 진출에 대해 심한 불안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160 페이지)

 

이이는 가공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가진 전략가로 세상에 태어났다. 이이는 감각형인 신사임당을 통해 직관형이 가질 수 있는 비현실성, 지나친 추상성 등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이이는 그런 까닭에서인지 추상적인 이론을 다루는 성리학에도 능통한 동시에 항상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책 대안도 제시할 수 있었다.(165 페이지)

 

이이와 선조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외다리에서 아들과 아버지로서 숙명적으로 만났다. 선조는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와 여러 면에서 비슷했다. 선조는 이이기 아버지상을 투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춘 운명적인 인물이었다.(175, 176 페이지)

 

이이는 처음에는 선조와 사이가 좋았지만 그 이후 선조에 대해 잦은 비판을 했다. 남들이 보기에도 선조에 대한 이이의 비판은 상당히 과격했으나 열등감이 심한 선조로서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을 삭였을 것이다.(177, 178 페이지) 이이의 심한 선조 비판에는 진정성이 있었다.

 

이이는 빈번하게 조정을 들락거렸다. 이이의 반복되는 진퇴는 당연히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이이가 나뿐 결과를 초래할 것이 예견되는데도 진퇴를 거듭한 것은 왜일까? 하나는 이이의 사회 불안, 다른 하나는 무의식에 각인된 이원수 신사임당 관계 때문이다. 이이는 아버지로 인해 사회불안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은둔을 했다.

 

또한 이이가 정신적 아버지로 여긴 이황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더욱 불행하게도 선조는 아버지와 매우 비슷했다. 신사임당은 자신이 이원수에게 가한 충고와 비판이 먹히지 않으면 냉전으로 맞섰다. 이런 유형이 이이에게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185 페이지) 부부 사이에서는 줄다리기가 바람직하지만 사회에서의 그런 점은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저자는 이이가 친여성적이고 성인(聖人)을 지향했기에 여성에 대해서는 그런 책략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남성인 아버지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186 페이지)

 

허균은 어머니의 건강한 양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당한 채 자랐다. 그의 아버지 또한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아주 엄격하기만 했다. 그 결과 허균은 생의 에너지가 부족해 몹시 우울해졌고 성품이 괴팍한 반항적인 인물이 되었다. 저자는 허균의 의식이 진보적인 사상을 적극 수용했지만 병약한 무의식은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 결과 한 길을 올곧게 갈 수 없었다고 설명한다.(205 페이지)

 

허균은 한평생 꾸준히 일기를 썼고 피난을 가서도 날마다 글공부를 했으며 틈만 나면 독서를 하고 독후감을 썼다. 또한 지속적으로 글이나 시를 지었으며 주기적으로 그것들을 묶어 책으로 엮는 등 매우 꼼꼼하고 성실했다.

 

허균 같은 유형은 학문이나 예술에 뛰어나고 언어능력이 출중하다. 이공계 쪽에는 별 흥미가 없다. 비상한 기억력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태어난 허균은 학문 수준도 높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시나 소설을 직접 창작했을 뿐 아니라 타인의 작품들을 높은 안목으로 비평했다.(232, 233 페이지)

 

지도자 유형은 열정적이고 창조적이며 온화하고 동정심이 많다. 타인의 동기(動機)나 의도를 탁월하게 간파하여 적절한 정서반응을 할 수도 있다. 허균은 그런데 분노가 많고 자제력이 부족했으므로 상대방의 좋지 못한 동기나 의도를 읽어내면 바로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지도자는 갈등을 잘 견디지 못한다.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대가로 타인들과 갈등관계를 형성해놓고도 초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허균은 그러지 못했다. 저자는 중종반정을 털끝 만큼도 예측하지 못해 하루아침에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아이 연산군, 이이첨을 철썩 같이 믿고 있다가 배신당해 손쓸 사이도 없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지도자 허균의 말로(末路)는 그들의 성격 특성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고 설명한다.(234 페이지)

 

허균은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그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는 어린 허균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고 단지 엄하게만 대한 아버지를 미워하는 한편 그 아버지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한 마음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240 페이지) 그런데 허균과 같은 처지(어머니의 건강한 양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당한 채 자랐고 아버지는 엄격하기만 해서 사랑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답은 무엇일까?

 

허균은 무엇을 해야 했는가? 저자는 허균이 사회개혁을 위해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반항했다고 말한다.(240 페이지) 어린 시절의 부모와의 관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를 중요시하면서도 결국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듯 하다.

 

물론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허균은 어떤 길을 걸어야 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당연하기에 그런 것일까? 계속 소급해 올라가야 하기에 그래서인지 저자는 어린 시절 그런 환경을 만든 부모의 책임을 거론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허균은 자아가 약한 사람이어서 반성 능력이 없었고 불안과 공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말한다.(259 페이지) 저자가 인용한 이덕일 소장의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허균이 진정 혁명을 의도했는지에 대해 확언을 하지 않았다. 반면 저자는 허균은 성격적으로는 혁명을 지도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263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허균은 생의 에너지가 부족하고 정서가 불안정했으며 자아가 약해 공포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한 인물이다.(262 페이지) 나는 물론 저자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허균이 혁명을 준비하지 않았음을 주장한 것에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허균은 때로 맑은 정신이 들면 머리로는 개혁을 주장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백성들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개혁을 추진하지도 않았다.

 

저자는 어머니 관계가 나쁜 사람은 혁명의 낙오자가 되지만 아버지 관계가 나쁜 사람은 혁명의 배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저자는 부모 복이란 말을 한다. 허균이 부모 복을 타고 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271 페이지) 이 말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책임을 물을 것도 없고 허균 자신을 탓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연산군 편이다. 허균과 비슷한 유형이다. 연산군은 훌륭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체취를 제대로 맡아보지도 못한 채 자랐다. 마마보이인 아버지(성종)가 할머니들의 사주(使嗾)를 받아 죄 없는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이다.(275 페이지)

 

왕이 될 때까지 생존위협에 시달린 불우한 경험은 연산군의 마음 깊숙한 곳에 불신감을 심어놓았고 그의 심리를 병적으로 왜곡시켰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불신감 외에 정서불안, 애정결핍, 자신감 결여, 방어적 태도, 의존심, 심한 분노, 어린 아이 같은 성격까지 갖게 되었다.

 

저자는 어떤 사람이 하루 아침에 정신병에 걸릴 수 없듯 폭군도 하루 아침에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277 페이지) 저자는 연산군이라는 인물을 조형한 역사의 뿌리는 짧게 보더라도 수양대군의 쿠데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278 페이지)

 

저자는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충신의 시대가 저물고 간신이 날뛰는 부정의한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세조 시절에 무수히 양산된 새로운 집권층인 훈구파나 공신은 권력을 틀어쥔 채 변화와 개혁을 한사코 외면하며 갖가지 음모를 꾸며낸 조선조 최초의 집단적 보수반동세력(이이화 선생의 표현)이라 말한다.(279 페이지)

 

세조의 쿠데타를 성공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 중 한명회가 있다. 이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 세력들과 정희왕후가 성종 시기의 정치를 좌우했다.(286 페이지)

 

비록 훈구파 권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하기는 했으나 성종은 기본적으로 허수아비 왕이었다.

 

저자는 독재자 어머니 때문에 마마보이가 된 아들은 의식적으로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 있다고 말한다.(29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마마보이 성종은 유약했기에 감히 어머니에게는 어쩌지 못하고 다른 여성들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성종의 심한 여성편력도 어머니 관계의 반영이다.

 

성종이 폐비 윤씨(연산군의 어머니)에게 보인 극에서 극으로의 감정의 폐해가 연산군에게 갔을 것이다.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는 폐비 윤씨를 핍박했고 그의 지지를 받은 정현왕후 윤씨는 폐비 윤씨를 미워했다.

 

또한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는 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폐비 윤씨를 질투했을 것이다. 성종은 내시 안중경을시켜 궁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의 동정을 살펴보게 했다.

 

소혜왕후에게 매수된 안중경은 페비 윤씨가 연산군이 자라나면 복수를 하겠다고 말했다는 거짓 보고를 올려 그녀를 죽게 만드는 빌미를 만들었다.

 

마마보이와 결혼한 죄로 한때 왕비였던 윤씨는 사약을 마시고 억울하게 죽었다.

 

윤씨는 성종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정희왕후(할머니), 소혜왕후(어머니), 안순왕후(사망한 예종의 부인)의 모략으로 칠거지악 중 하나인 투기를 저지른 왕비에서 공갈협박범, 반란수괴, 독살범으로 몰려 궁에서 쫓겨났으며 결국 사약을 마시고 억울하게 죽었다.(305 페이지)

 

연산군은 생애 초기에 자칫 잘못하면 어머니처럼 죽을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냈다. 사자우리 속에서 자라야 했던 유약한 아이 연산군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유일 선택은 자발적 순종을 통해 사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강고하게 형성된 대비들 - 연산군의 병적 관계는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았았다.(315 페이지)

 

대비들의 잘못된 행동(숭유억불의 나라에서 계속 불교숭상, 연산군에게 지나친 재물 바침, 부정부패 저지르거나 범죄자들 비호, 부당 인사청탁)을 일방적으로 두둔한 연산군은 신하들의 뭇매를 맞았다.

 

연산군은 여러가지 심리적 병을 앓았다. 애정 결핍과 자신감 부족, 극단적 방어 태도, 감정 통제 능력 상실과 극단적 분노 등이다.

 

저자는 연산군의 비극을 부모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한다. 연산군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어린 아이 같은 성격을 지녔다.

 

연산군은 변명과 자기합리화, 배째라 전술, 신하들 모욕하기 등의 방어기제를 선보였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이상 각자 지어야 할 십자가가 있다. 선대로부터 받은 업보를 현실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내향(Introvert) - 외향(Extrovert), 감각(Sensation) - 직관(iNitution), 감정(Feeling) - 사고(Thinking), 실천(Judgement) - 인식(Perception) 등의 대립항을 근거로 조합한 16가지 성격 유형에 바탕을 둔 책이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이다.

 

모든 성격 유형이 좋은 점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는 법이라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렇기에 발전 가능성, 개인의 책임의 여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지옥도 아니고 천국도 아닌 세상이다. 바람직한 국가와 사회, 부모, 개인의 조합은 참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 저자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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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노론에 초점을 두고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인식에 한몫 한 것들 중 하나가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는 것이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들이 강한 나라라는 것이다.

영조가 노론의 공세와 협박일 수 있는 강경 주장을 물리쳤다면 비극적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다소 애매하고 절충주의적인 눈으로 영조, 노론, 사도세자의 관계를 보아온 것이다.

사도세자가 미쳤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덕일 소장의 책을 읽고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난 책이 김태형 님의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이다. 저자에 의해 개진된 바 사도세자가 지극히 정상적이었음은 물론 살신성인적 인물이라는 글은 설득력면에서 최고이다.

사도세자가 살인성인적이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경과 사건을 계기로 이 사건과 무관한 소론 전부를 마구잡이로 죽이려 한 영조와 노론에 맞서 살신성인적 행동을 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심리적 병에 기인해 극단적으로 수직상승하던 영조의 폭주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서서히 하강했다.

영조의 미친 학살의 만행에 죽음을 무릅쓰고 제동을 건 사도세자는 영조와는 너무 다른, 희생양을 자처한 의인이다.

열한 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뒤 살해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가 비슷한 처지의 연산군과 달리 개혁군주, 학자군주가 된 것을 훌륭한 부모 밑에서 생애 초기와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으로 보는 등의 정조에 대한 저자의 치밀한 분석 역시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영조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숱한 괄시(恝視)와 박해를 받는 것을 보며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에 기반한 종(從) 여성적 태도 및 남성 불신(마마보이적 인간 유형)과 열등감을 가졌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는 외향감각적 정체성도 가졌다.

영조는 ˝경이 비록 백번 머리를 깨트리더라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당인들을 갈아 마시겠다.˝ 같은 말을 상시적으로 할 만큼 난폭하고 공격적이었다.

노론과 한 패가 되어 경종(景宗)을 핍박해 후계자로 등극한 죄책감(저자는 영조가 이복형 경종;‘ 장희빈의 아들‘을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심증을 제시한다)도 영조가 보였던 주요 특징이다.

영조는 돌려치기, 떼쓰기, 변명과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흔히 사용했다.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죄의식과 열등감을 방어하기 위해 아들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냉혹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지만) 억울함과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사도세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노론이 난리를 쳤지만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결국 영조였다. 교활(狡猾; 간사하고 나쁜 꾀가 많음)한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노론에 책임을 전가했다.

˝중증 환자˝ 영조는 아들을 죽인 죄를 씻고 아들을 죽이게 만든 노론에게 복수하는 길로 세손 정조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을 택했다.

영조는 혜경궁 홍씨(한중록에 남편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기록한, 정조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종(從) 여성적 태도를 보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열다섯에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고, 그리고 자신 앞에서만 그랬다고 썼는데 저자에 의하면 그런 갑작스런 발병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직 한 사람(혜경궁 홍씨) 앞에서만 증세를 보인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극한적 상황 속에서도 차분하고 의연했던 사람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 살해에 책임이 있는 친정의 무고함을 강변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해 ‘한중록‘을, 그것도 젊어서가 아닌 노회한 나이에 의도적으로 썼다.

혜경궁 홍씨가 택한 것은 남편을 버리고 임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아들 산(蒜; 정조의 이름)이었다.

심리학자가 개인 또는 개별 사건에 대한 미세하고 정치(精緻)한 분석에 능하다면 역사학자는 큰 틀을 잡고 사태를 거시적으로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능한 것일까?

어떻든 적어도 정조와 사도세자, 영조 등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심리학자, 정조의 마음을 분석하다‘가 최고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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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시집들과 시 비평서들을 읽고 리뷰하고, 이런 저런 시들을 외우고 시 낭송회에 간 것 외에 내가 시에 들인 정성은 거의 없다.

쓴 적도 없고 강의는 둘째 치고 시에 대한 느낌을 말한 적도 없는 것이다. 물론 논문 같은 리뷰로 몇몇 시인 분의 호평을 받고 리뷰 대회에서 입상을 했지만 대수는 아니다.

몇 년 전 대구의 박 ** 시인의 시집 리뷰를 올린 뒤 가진 당사자와의 통화에서 나는 리뷰를 잘 쓰니 시도 잘 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의 다독을 필히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갖는 것이라 생각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 리뷰와 시 비평 리뷰의 끝은 시 쓰기라고 생각하신 것인지도.

정신분석 비평을 하는 전기한 시인의 비평집을 다시 들춰본다. 프로이트 전집을 읽고 계시다는 시인.

나 역시 최근 읽은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이란 정신분석 책을 읽고 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느슨한 관심을 다시 팽팽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술할 수 없지만 이 책에 나온 거울 단계, 대타자(大他者) 등의 개념 때문이다.

그런 내가 시와 관련해 “어느 고마운 신이 내린 구원의 인큐베이터“라는 말을 할 만한 상황을 맞았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밤에 열리는 시인들의 시 감상 및 창작 강의를 들으러 가게 된 것이다. 물론 시 창작보다 내가 더 기대하는 바는 시를 이해하는 것.
월 단위로 신청을 받는 이 모임은 2017년 한 해 내내 계속된다. 당월 모임이 끝난 뒤 다음 달 신청을 받는다고 하니 꽃길이 열린 것이라 할 만하다.

아니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첫 순서가 지난 뒤 프로그램을 알게 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참여를 통해 나는 내가 좋아하던 시가 제대로 된 이해에 근거한 것인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고 새로 만나는 시와 시인들에 매혹될 수도 있다.

강의는 시인들이 하지만 들을 준비를 하고 시간이 지난 후 음미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당연히 내 몫이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도 기꺼이 감내해야 할 가시밭길임은 물론이다.

‘시경(詩經)’을 통해 나무 이름을, 꽃 이름을, 새 이름을 배웠다는 조선의 선비들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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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해설 공부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맞는 말이지만 관심이 있는 만큼 찾아나선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제 심정을 대변하는 책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북촌, 인사동, 혜화동, 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종로 3가 뒷편의 익선동과 종묘 옆 봉익동 등 아담한 동네의 내력을 밝힌 책이 나왔습니다.

20세기 초 기농(基農) 정세권(鄭世權;1888 ~ 1965)이란 분과 그 분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 이야기를 담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2017년 2월 1일 출간)란 책입니다.

구한말 일본 공사관이 있던 예장동에서 충무로 1가의 진고개 일대에 이르던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청일전쟁 승리 이후 남대문로 일대로, 러일전쟁 승리와 국권침탈 이후로는 청계촌 남쪽 대부분으로 확대된 데 이어 북촌마저 잠식될 위기에 처했을 때 위력을 발휘한 분들이 바로 조선인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업자)들이었지요.

이 분들은 가회동과 익선동 등의 필지를 쪼개 오밀조밀 붙은 작은 한옥들을 지었습니다. 이 분들에 의해 북촌에는 조선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히 일본인들의 진출은 막히게 된 것이었지요.

북촌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정세권이란 분은 부동산 개발업자였지만 이익에 눈먼 자본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서민들을 위해 월세나 전세 형태로 집을 제공하기도 한 이 분은 신간회를 후원했고 조선 물산장려회의 실질적 성공을 이끌었고 조선어학회에는 건물과 토지를 기증했다고 합니다.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강탈 당하기까지 하며 민족운동에 헌신했던 정세권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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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이덕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노론(老論)이 아닌 다른 시각을 견지(堅持)하는 이덕일 사학자. 그는 누군가가 역사의 음지(陰地)에 묻혀 있다 해서 무조건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준은 역사의 음지에 묻혀 있는 이유이다.

그가 예시하는 인물들의 면면들은 다음과 같다. 아계 김일경(金一鏡: 1662 – 1724), 백호 윤휴(尹鑴: 1617 – 1680), 명재 윤증(尹拯),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 소현세자 등등..

김일경은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윤증은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했다. 이가환, 이승훈은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 사형되었다. 소현세자는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었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는 시대와 불화했던 스물 다섯 학자, 선비들을 오늘 이곳으로 초대한 책이다. 정도전, 조식, 이경석, 윤휴, 정제두, 유득공, 최치원, 이장옥, 허난설헌, 허균, 홍경래, 정하상, 김개남, 김육, 이익, 유수원, 이긍익, 박제가, 천추태후, 김시습, 김일손, 유몽인, 강홍립, 이광사, 김창숙 등이다.

정도전은 고려말 토지개혁을 주도한 인물이다.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대다수 농민들이 몰락한 시대였다. 조선 개창의 원동력은 토지 개혁이었다. 정도전이 토대를 마련했다. 정도전은 친명 외교정책을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갔지만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난으로 남은,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과 함께 살해됨으로써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난다.

남명 조식(1501 – 1572)은 칼을 찬 선비였다. 조식은 벼슬에 나가면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초야에 은거하면 가난 속에서 도를 찾는 선비가 되겠다는 원나라 허형(許衡)의 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조식은 과거(過擧)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조식의 거듭된 출사(出仕) 거부는 천거(薦擧) 당사자인 이황(1501 – 1570)과의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조식은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조식은 처사(處士)의 재야 정신을 죽는 순간까지 지녔다.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곽재우, 정인홍 등...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 – 1671)은 인조 대에 주화론(主和論)을 주청한 인물이다. 척화(斥和) 즉 주전(主戰)론이 대세인 시대, 척화론이 아니면 사대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에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上國)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 외에 길이 없었다.

윤휴(尹鑴: 1617 – 1680)는 양란(兩亂) 이후 주자학 유일사상과 신분제 강화라는 복고적 노선을 걸은 노론에 반대한 인물이다. 윤휴의 사상은 주자(朱子)의 견해와 배치되었다. 윤휴는 병자호란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집권 서인에게 주희(朱熹)는 일개 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윤휴가 그와 다른 학문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서인은 격하게 반발했다.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은 중국의 다른 학자들은 주희의 주(註)를 보충했지만 윤휴는 대치(代置)했다고 주장했다. 송시열에게 성리학은 학문이 아니라 종교였다.

윤휴는 사상의 절대성을 비판했다. 그는 이이, 이황의 학설도 비판했다. 그는 이이의 이선기후(理先氣候)나 이황의 이통기국(理通氣局) 등을 보두 비판하고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내세웠다. 성시열은 이황이나 이이를 비판할 수 있어도 주희는 비판할 수 없었다. 송시열에게는 사서(四書)보다 사서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더욱 중요했다.(58 페이지)

태극(太極)이 기(氣)라는 윤휴의 말은 교조화된 조선 주자학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다. 주희는 만물의 근원적 존재인 태극(太極)을 이(理)라고 설명했다. 북벌 군주 효종의 갑작스런 승하(昇遐)는 예송(禮訟) 논쟁을 낳았다.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예송 논쟁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당쟁망국론으로 규정지은 소재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정쟁이었다. 효종의 왕통 계승이 정당한가, 하는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1년복을 주장했다. 윤휴는 3년복을 주장했다. 송시열이 주장한 것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이었다. 효종처럼 아버지를 계승했으나 가통을 이은 적장자가 아니니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인이 1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이 3년복을 주장한 것은 두 당파가 지닌 세계관의 표출이었다.(65 페이지) 서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주자학적 정치 이념은 신권 중심의 지배구조로서 국왕은 사대부 중의 1 사대부이지 사대부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남인들은 국왕을 사대부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 받아들였다.(65 페이지)

윤휴는 북벌을 주창했다. 서인 정권은 북벌론을 명분으로만 내세웠다. 저자는 현행 교과서가 효종이 송시열 등을 동원해 북벌을 준비했다고 쓰고 이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말한다.(67 페이지) 윤휴는 양반들에게도 호포(戶布)를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휴의 안(案)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 – 1736) 역시 주희의 이론에 반기를 든 인물이다. 정제두는 명나라 왕양명의 학설을 지지하는 양명학자였다. 왕양명은 세상 사람들 중 미친 사람이 있는데 내가 어찌 미치지 않겠으며 상심한 사람이 있는데 어찌 상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진 인물로 주자학의 신민설(新民說)을 비판했다.

백성들을 친함의 대상으로 보는 친민설(親民說)과 대립되는 신민설은 백성을 새롭게 변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학설이다. 양명학은 처음부터 금기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황이 ‘전습록변’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 주자학)의 화(禍)라고 비판한 뒤부터 금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은 양명학의 핵심을 간과한 비판이어서 잘못된 것이다.

양명학이 이단으로 몰리면서 조선에는 외주내양(外朱內陽) 즉 겉으로는 주자학자를 자처하고 속으로는 양명학자인 경우가 많이 생겼다. 정제두는 유일한 외양내양의 선비였다. 정제두는 양명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대신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대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이단 딱지를 붙이려는 주자학자들에게 참다운 도가 무엇인지 논하자면 당당히 맞섰다.

유득공(柳得恭: 1748 – 1807)은 역사인식의 전환을 이룬 서얼 지식인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렀다.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가 다시 서기를 갈망했으나 끝내 다시 서지 못하자 조선이 작은 중국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85 페이지) 저자는 소중화 사상을 사대주의의 극치로 평한다.

유득공은 정조의 배려로 관직에 오른다.(규장각 검서관) 신라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라 인식하던 시절에 유득공은 그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 인식했다. 북방 강토(疆土)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유득공은 ‘발해고’ 서문에서 규장각에 있으면서 비장(秘藏)된 책을 쉽게 읽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93 페이지)

2부 ‘신선한 공기는 죽음보다 감미롭다‘의 첫 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이다. 신라 시대의 학자로 저자의 저술 영역이 넓음을 증거하는 사례이다.

이징옥(李澄玉: ? - 1453)은 문약(文弱)의 나라 조선에서 특이했던 인물이다. 맨 손으로 산돼지를 잡았을 정도의 인물이 그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 1589) 허초희(許楚姬)는 시대의 모순에 시로 맞서 싸운 저항시인이다. 둘째 오빠의 배려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한시를 배운 사람이다. 허난설헌은 아내의 사부곡까지 음탕으로 몰던 사회를 조롱했다. 허난설헌에게 도교는 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는 도피처였다.

허난설헌은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 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소외 현실을 간파한 선구자이다.(128 페이지) “용모인들 남에게 떨어지리오/....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 손으로 가위 잡고 가위질하면/ 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 남 위해 시집갈 옷을 짜고 있건만/ 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저자는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 – 1618)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131 페이지) 허균은 사주(四柱)처럼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허균은 광해군 9년 말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 폐출(廢黜) 논의에 앞장서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다산 정약용의 스승으로 알려진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 – 1763)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익은 남인(南人) 명가 출신이지만 출생 한 해 전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부친이 평안도 벽동군으로 유배되었다. 이익은 서얼과 농민, 노비의 등용을 주장하고 농사와 학문을 택한 인물이다.

이익은 당쟁의 구조를 간파하고 편당심(偏黨心)을 강하게 비판했다. 편당심 속에서 성장하면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이다.(196 페이지)

이익은 주자학을 뛰어넘어 서학도 수용했다. 다산은 둘째 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란 말을 했다.(199 페이지)

유수원(柳壽垣: 1694 ~ 1755)은 경종(景宗)에 대한 충심을 간직했던 선구적 실학자로 ‘우서(迂書)’를 썼다. 유수원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몰락한 숙종 20년 출생했다. 이 무렵 집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分黨)되었다. 유수원의 집안은 소론이었다.

노론은 소론의 반대 속에서 장희빈을 사사하고 그의 아들인 경종까지 제거하려 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국왕으로 삼기 위해 왕세제(王世弟) 책봉(冊封)을 추진했다. 노론은 경종 1년 소론 대신들이 모두 퇴궐한 틈을 타 경종을 위협해 왕세제 책봉을 전격 단행했다.

경종은 서른 넷이었고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이었으니 젊은 왕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이때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한 인물이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였다. 경종 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는 즉위 뒤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옹하는 탕평책을 표방했지만 속마음은 노론에 있었다.(204, 205 페이지)

이긍익(李肯翊: 1736 – 1806)은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쓴 인물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편년체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수록함으로써 사료로 말하게 하는 저술 방법을 택했다. 이긍익이 택한 관점은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이다.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217 페이지)

물론 이긍익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료를 제시한다 해도 해당 사건을 선택하는 것은 이긍익의 몫이었다.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는 놀고 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가난을 물리치려 한 인물이 박제가이다. 서얼 출신인 박제가는 문관의 길이 막히자 무과로 방향을 전향해 정조 18년(1794년) 무과별시에 응시해 급제한다.(228 페이지)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란 말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김일경이 영조에게 한 말이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고 불의에 맞선 선비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저자는 연산군 때의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이미 죽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무오사화의 한 장면인데 저자는 사화(士禍)와 사화(史禍)를 이야기한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은 것을 지칭하고 사화(史禍)는 김일손, 권경유, 권오복 같은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단재 신채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단재를 식민사관의 틀을 깨고 우리 역사의 무대가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가르쳐준 역사가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 기록의 한 자 한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제의 실증사학자들 이상으로 입증한 사학자이기도 하다.

사마천, 김일손, 신채호 세 역사가는 저자가 역사를 업으로 삼게 되면서 종종 생각한다는 역사가들이다. 저자는 사마천, 김일손, 신채호 등이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이 분들이 당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와 대화했기 때문이라 말한다.(10 페이지) 역사는 무엇이며, 역사가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잊혀진 인물, 잘못 알려진 사건을 찾아 발굴하는 저자의 노고에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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