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7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 문답으로 이해하는 고구려 역사 지식과 정보가 있는 북오디세이 6
김용만 지음, 장선환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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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대한 책이지만 조선 등과 비교할 만한 여지가 있는 책이다. 조선 세조는 ’병요(兵要)‘라는 책을 읽으라고 하면서 “당 태종과 수 양제가 직접 고구려를 공격했어도 이기지 못한 일 등을 만약 사람들로 하여금 듣게 하기를 어제 일처럼 한다면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병요는 세종 때 정인지 등이 편찬한 병서다.

 

그런데 1593년 조선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치는 문제로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 유원외는 선조에게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라고 알려졌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시민이 독서와 농사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맞게 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럼 고구려는 처음부터 강한 나라였을까? 그렇지 않다.

 

고구려는 서기 전 37년 추모(鄒牟)왕이 세운 나라다. 먼 옛날 존재했던 고구려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고분 벽화다. 물론 벽화는 단지 그림일뿐이어서 시대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려주지는 못한다. 가장 중요한 자료는 고구려가 망한 지 500년 정도 지난 시점에 쓴 ’삼국사기‘라는 책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쓴 ’신집‘, ’유기‘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동시대에 당나라, 일본의 역사책들에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있어 이런 책들을 서로 연결하여 살펴보면 고구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책은 아니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만든 성벽, 기와, 그릇, 무덤, 무덤 속 물건, 비석 등이 유용하다. 서울시와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에서 고구려 군사 기지가 15개 발견되었고 임진강변에서는 호로고루 등 고구려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주몽이 아니라 추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활을 잘 쏴서 얻은 별명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압록강 북쪽의 환인현 오녀산성을 고구려의 첫 수도로 보고 있다. 추모왕은 자신을 천손의 자손이라고 내세우며 고구려 사람들이 강한 자부심과 단결력을 갖도록 이끌었다. 추모왕은 동부여 금와왕과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화부인은 미혼모이자 집에서 버림받고 두 번째 부인 생활을 한 여자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그녀를 매번 동맹 행사에서 부여신(夫餘神)으로 섬겼다.

 

그것은 그녀가 아들 추모에게 말을 고르는 법, 활과 화살을 고르는 법, 곡식 고르는 법, 나라를 세울 때 필요한 많은 일들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혜의 여신, 생명의 여신, 물의 여신, 풍요와 곡식의 여신이었던 셈이다. 고구려 여성들은 결혼, 상속, 외출 등에서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았다.

 

어떻든 마굿간지기를 하는 등 금와왕의 아들들에게 핍박을 받던 추모왕은 동부여를 떠나 새 출발을 했다.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만족했다면 고구려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모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벤처 사업가라 할 수 있다.(김수로왕을 우리나라 최초의 페미니스트라 한 경우가 기억난다.)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에도 경당(扃堂)에서 배운 활쏘기를 열심히 익혔다.

 

고구려 사람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까지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란 책 읽기와 활쏘기 등이다. 조선 시대와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달리는 말 위에서 활쏘기를 잘하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했다. 부여와 고구려에서 주몽은 요즘 말로 스타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사냥은 군사훈련이었다. 추모왕의 두 번째 부인인 소서노가 비류, 온조를 데리고 고구려를 빠져나가자 국력이 약화된 고구려는 유리명왕이 결혼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으려고 했다.

 

첫째 부인인 송씨 왕후가 1년만에 죽자 화희와 치희를 새 왕후로 맞이했다. 둘은 사이가 안 좋았다. 큰 힘을 가진 화희 세력에 눌린 유리명왕은 치희를 붙잡을 수 없었다. 궁궐을 빠져나간 치희를 데려오지 못한 유리명왕은 혼자 궁궐로 돌아오며 황조가를 불렀다. 당시 강국은 부여였다. 유리명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다.(평지성인 국내성과 함께 도성을 이룬 산성이 환도성이다.)

 

이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물이 풍부했고 사냥과 농사 등에 모두 유리한 곳이었다. 장군총, 태왕릉 등이 국내성 일대의 유적들이다. 유리명왕의 아들 무휼은 고구려를 위협하는 부여에 맞서 승리를 거둔 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되었다.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의 아들인 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와 사이에 자명고 이야기가 전한다.

 

호동은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의 모함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한 결과였다. 낙랑 공주를 죽게 한 자책 때문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다른 세력권의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특정인들을 무시하지 않고 두루 포용한 나라였다. 광개토왕이 등장한 뒤 고구려가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포용력 때문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죽지 않고 무덤에 머문다고 생각했다. 장군총에 사용된 돌 가운데 무게가 수십 톤에 되는 것들이 있다. 이 돌들은 집안시 외곽의 채석장에서 캐내온 것들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막상 장례일에는 북 치고 춤 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내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왕릉비문의 1/3은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다. 330여 가구가 무덤을 지키는 사람으로 차출되었다.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많은 무덤 때문에 살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반면 고구려가 수도를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긴 중요 이유 중 하나는 압록강을 이용한 수상 교통의 이점, 물고기 등의 수산 자원을 얻기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초기에 좌식자라 불리는 소수의 전문 군사 집단이 전쟁을 담당했지만 나라가 커지면서 전쟁에 동원해야 할 군사 수가 많아짐으로써 일반 백성들에게도 군사 훈련을 시켜 군사로 썼다. 그래서 경당을 세워 글공부, 말 타기, 활쏘기 등을 가르쳤다. 391년에 등장한 광개토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큰 아버지 소수림왕이 세운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배출된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들과 경당에서 교육 받은 백성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경당은 지방에도 세운 사립학교이고 태학은 서울에 세운 국립학교였다.

 

391년부터 412년까지 광개토왕이 재위한 21년 기간 고구려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광개토왕의 최초 업적은 거란족을 정벌한 일이다. 당시 광개토왕은 엄청난 수의 소와 말을 끌고왔다. 이는 고구려 농업 발전의 큰 기반이 되었다. 잉여 생산물은 물자 교환으로 이어졌고 상업 및 국제무역을 이끌었다. 이웃 유목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대신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하게 되었다.(126 페이지)

 

광개토왕이 고구려의 영토를 빠르게 확장한 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 군사령관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고 철갑옷을 입은 군사들을 대량 육성하고 왕의 친위군인 왕당군과 수군을 별도로 육성하여 수륙 양면에서 입체 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법, 교육, 종교 등의 뒷받침도 빼놓을 수 없다. 광개토왕은 땅만 넓힌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잘 사는 나라, 당당한 대국으로 변모시켰다.

 

서기 400년 신라는 왜와 가야의 침략을 받자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신라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는 물론 가야까지 공격하여 금관가야를 멸망시켰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신라 수도 경주에 100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의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간섭했다.

 

광개토왕은 신라, 백제를 완전히 통합할 의지가 없었다. 반면 왜국은 아주 철저하게 악당의 무리로 보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와 문화적으로 다른 나라를 아주 분명히 구분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동부여 사이에 동질감을 갖는 민족의식이 생겨났다고 본다.

 

광개토왕은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들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며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에 따라주기만 한다면 굳이 멸망시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뿐 아니라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계속 싸워야 했기 때문에 두 나라를 자국의 영토로 삼지 못했다. 신라, 백제는 후에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해 땅을 빼앗기도 했다.(110 페이지)

 

고구려 사람들은 요하, 송화강, 눈강, 우수리강, 혼하, 태자하,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등 수많은 하천을 누비면서 다량의 수산자원을 획득했고 풍부한 물을 이용해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이전까지 바다의 왕으로 군림했던 백제를 물리치고 난 후다. 광개토왕은 백제 수군의 핵심 기지이자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진 관미성을 점령했다.

 

이어서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관미성의 위치는 논란거리다.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위치한 오두산성이라는 설과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의 화개산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나는 개인적으로 후자는 주장자 때문에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에서 거듭 이긴 것은 바다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백제 개로왕을 상대로 스파이 역할을 한 고구려의 도림 스님은 장수왕 시절의 사람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주로 먹은 음식은 쌀, 조 같은 곡식이다. 고구려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다. 고구려의 전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기동성을 가진 말이었지만 농민들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소였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왕이다. 국내성은 압록강을 이용할 수 있지만 주변에 넓은 평야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물론 북쪽으로도 크게 영토를 넓혔다. 39세에 죽은 광개토왕과 달리 장수왕은 98세까지 살면서 고구려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고구려는 자주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기에 신분의 상하를 물론하고 같은편이라는 일체감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동맹은 왕, 귀족, 일반 백성까지 함께 즐기는 거대한 축제 마당이었다.

 

임진강변의 무등리에서 5, 6세기 고구려 군량 창고에서 쌀과 조가 발견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입식 생활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방 전체가 아닌 잠을 자는 공간만 온돌방으로 꾸몄다. 이를 쪽구들이라 한다. 나머지 공간에는 의자, 평상, 장방을 놓았다. 고구려 남자들은 바지와 저고리를 기본 복장으로 착용했다. 윗옷은 활을 쏠 때의 편의를 위해 옷을 여민 끈을 왼쪽에 두는 좌임(左) 형식이었다.

 

이는 중원 지역 사람들의 우임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바지 또한 말을 타기 편리한 복장으로 중원 지역 사람들의 치마와 다르다. 후기에는 점점 소매가 커지고 바지도 통이 넓어졌고 우임으로 옷을 입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고구려 남자들은 대부분 머리에 상투를 틀고 모자를 썼다. 가장 즐겨 쓴 것은 절풍이라는 고깔모자다.

 

한국인을 백의민족이라 하지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 흰옷 입은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고분 벽화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무덤 네 벽에는 현실 세계를 그렸지만 천장에는 하늘 세계를 그렸다.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생활 풍속 장면과 장식 무늬를 많이 그렸다. 막강 고구려는 551년 백제, 신라의 공격을 받고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왕위에 있을 때는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렸지만 귀족들이 권력을 잡은 만큼 왕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551년 돌궐이 유연을 무너뜨린 뒤 고구려를 침략했다. 돌궐의 침략으로 고구려는 많은 군대를 북쪽에 배치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돌궐은 양국 사이에 있는 거란, 말갈 등의 통제권을 놓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이때 백제에는 성왕, 신라에는 진흥왕이 있었다.

 

고구려는 순식간에 지금의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 해당하는 영역을 잃었다. 고구려는 평화 제의를 해온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내주어야 했다. 553년 신라는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를 빼앗았다. 백제 성왕이 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 삼국 가운데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간의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한강 유역을 전부 차지하는 승자가 되었다. 이는 결국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어졌다.

 

신라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가까운 한강 유역과 함흥 평야까지 차지하자 고구려는 35년에 걸친 대규모 공사로 장안성(현재 평양시 중심)을 만들어 586년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북쪽 땅을 되찾으려다가 전사했다. 아무리 공주와 결혼했다 해도 온달 자신이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왕의 사위로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온달은 행운아가 아니라 부단한 노력으로 신분마저 뛰어넘은 영웅이었다.

 

당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려는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이세민과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는 유목민들과 때로 연합하고 때로 일부 부족들을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두고 이들을 활용하여 적국과 싸워나갔다. 고구려는 유목민 제국을 존중하고 도움을 주고 받았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은 1)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의 장기화, 2) 내분과 배반, 3) 변화에 대한 대응 지연 등이다. 당나라는 혼자 힘만으로 고구려를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신라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요동 방어망이 워낙 튼튼하여 공략하지 못하자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거란족, 말갈족 등을 꾀어내어 고구려를 약화시켰다.

 

668년 고구려는 공식적으로 멸망했지만 당시까지 산성, 요동성, 안시성, 북부여성 등 대부분의 성들을 신라 - 당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성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 전쟁을 시작했다. 남의 지배받는 것을 싫어한 고구려 사람들은 당군을 몰아내기 위해 때로 신라와도 손을 잡았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흥분하기보다 우리부터 먼저 고구려를 바로 아는 것이 지금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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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배달된 지방세(地方稅) 고지서를 보고 뚱뚱해도 세금 내냐고 물었다는 한 아들의 아재 개그를 보며 작년 초의 일을 떠올린다. 전기한 모 아빠의 아들은 地方을 脂肪으로 바꾸어 말을 한 것인데 지난 해 나는 정녕 지질 해설사가 너무 많다는 소신있는 말을 했었다. 그때 옆의 한 신입 여 해설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요. 저를 포함해 뚱뚱한 해설사들이 참 많아요"라고 답했다. 실력 없는 지질해설사들이 너무 많다는 소신에 찬 발언은 어이 없게도 외모를 두고 한 문제적 발언이 되고 만 것이었다.

 

地質이 脂質로 읽힌 이 사건은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종결되었다. 당시 나는 해명도 하지 못하고 긍정도 하지 못했다. 교훈은 무엇일까?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를 포함해 모든 해설사들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이라는 편이 더 타당하다. 오늘 코문리가 고문리가 되었다는 설화를 언급한 한 해설사를 보고 '만날 그 타령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필요한 것은 언제나 역량강화다. 아직 (실력 없는) 지질 해설사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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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만난 한국사
김용만 지음 / 홀리데이북스(Holidaybooks)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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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를 전공한 저자가 한국사에서 숲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말한 책이다. 생태적 관점에서만 주목받았을뿐 문명사의 관점에서는 방치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전제다. 이는 수렵 채집민에 대한 편견을 지양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간단히 말해 수렵 채집민은 야만인이 아니다. 저자는 진정한 야만 사회는 문명사회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문명사회를 세련된 야만의 사회로 본다. 저자는 삼국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전혀 다른 역사가 보일 수 있다고 진단한다. 이렇듯 숲을 키워드로 해 시대를 나누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사안이 조선 후기에 우리 역사 무대가 한반도에 불과한 반면 삼국시대에는 만주와 연해주를 포함한 드넓은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삼국시대의 무대는 숲이 울창한 무대였다.

 

한편 조선 전기까지 수렵, 채집은 농민들에게도 중요한 생산 활동이었다.(19 페이지) 우리나라에서 숲은 행정 용어 또는 법률 용어로 산림이라 한다. 산이 국토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숲은 대개 산에 조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산과 숲을 함께 말해야 한다. 물론 산지가 많다고 반드시 숲이 많은 것은 아니다.(2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숲은 배움의 공간이자 종교를 탄생시킨 장소였다. 숲속에서 살려면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스톤헨지에 대해 알아보자. 스톤헨지는 영국 남부 윌트셔 주 솔즈베리(Salisbury) 평원과 에이브버리에 있는 선사 시대의 거석기념물에 있는 환상 열석 유적을 말한다. 이는 수렵 채집민의 천문학 지식이 반영된 유적이다. 천문학은 농민만이 아니라 수렵 채집민에게도 중요했다.

 

숲은 도시와 달리 인구 밀도가 낮아 병원균 전파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할 수 없다. 7세기 지중해 세계를 휩쓸었던 페스트는 산림이 울창했던 중부유럽의 숲을 지나면서 쇠약해졌다. 이는 병원균을 전파하는 쥐들이 숲속에서 이리, 올빼미, 족제비 등을 만나면서 많이 죽었기 때문이다.

 

농경민은 유목민이나 수렵민보다 인구 증가 속도가 빠르다. 수렵민과 유목민은 아이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출산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농경은 한 번 시작하면 중도 포기가 어려운 생업 활동이다.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노동력도 많이 필요하다. 집단 노동 과정에서 설계자, 지휘자, 잡일을 하는 사람 등이 구분됨으로써 집단 내에 계급, 신분, 빈부 등에서 차별이 생겨났고 주변 집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의 구분이 생겼다. 이는 도시, 그리고 국가 탄생의 시발이 되었다.(40 페이지)

 

권력자들은 통제, 징세(徵稅) 등의 이유로 농경을 권장 또는 강요했다. "국가에서 비록 재인(才人)이나 화척(禾尺)의 무리들로 하여금 유이(流移)하지 못하도록 하더라도 호패가 있지 않은 까닭으로 이사하는 것이 무상하고 농업을 일삼지 않습니다.“란 태종실록의 한 구절이 단적으로 증명하는 바다.

 

저자는 말한다. 장벽 안에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와 문명이 농경민의 전유물도 아니라고. 물론 농업, 유목, 수렵은 고정 불변의 대상이 아니다. 숲에서 성장한 고구려 추모왕에 대해 알아보자. 추모왕은 수렵민 출신이지만 그가 세운 고구려는 농업국가로 발전했다. 수렵민이 국가를 세웠지만 수렵과 채집만으로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자화자찬하자 육가(陸賈)라는 유생(儒生)이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했다.

 

로마에서 숲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일신교인 크리스도교가 수용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 숲이 감소한 원인 중 하나는 산신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 유교의 이념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기 때문이다.(93 페이지) 19세기에 등장한 동학 등 신흥 종교들이 유일신 신앙을 내세우고 일신교인 크리스트교가 조선 사회에 빠르게 수용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는 숲이 사라져 백성들이 신앙하던 다양한 신성성이 크게 약화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정된 과녁이 아닌 움직이는 동물을 맞히는 활쏘기로 인재를 뽑았다. 강궁(强弓)을 빠르고 정확하게 어떤 자세에서도 쏘려면 오랜 세월 연습해야 한다. 물론 평상시 농사만 짓던 농민들이 쉽게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이다. 추모(鄒牟)왕은 한 발에 맹수를 사냥할 수 있었다. 구석기 시대에 주먹 도끼를 잘 만드는 사람이 신랑감으로 인기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도 사냥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인기를 얻었다. 사냥 능력은 가족 부양 능력과 직결되었다. 수렵 채집 사회는 단순 수렵 채집 사회와 복합 수렵 채집 사회로 나눌 수 있다. 단순 수렵 채집 사회는 환경이 예측 불가능하고 가변적이어서 이동을 자주 하고 전쟁이 드물며 노예도 없고 종족간의 경쟁도 없으며 식량을 저장하는 것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다.

 

복합 수렵 채집 사회는 변동이 적고 예측 가능성이 높고 이동을 적게 하고 정주(定住) 경향이 강한 사회다. 숲은 전쟁 때문에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다. 전쟁터로 숲이 선택되는 순간 숲은 크게 훼손된다. 승리하기 위해 숲에 불을 지르고 무기나 목책 등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마구 베기도 한다. 군사들의 숙영(宿營)을 위해 땔감용 나무를 베어내기도 한다.

 

전쟁으로 숲이 파괴된 대표적인 곳이 평양이다. 고구려 후기 수도로 수십만 명이 모여 살았던 평양은 612년, 661 ~ 662년, 667~ 668년 3회에 걸쳐 수당 군의 침략을 받았다. 668년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에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평양 일대가 크게 황폐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쟁이 문명 발전을 촉진한 반면 숲은 빨리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나무는 무기의 재료나 무기 제작을 위해 땔감으로 사라졌다.

 

7세기 동아시아는 대전쟁의 시대였다. 농사 짓고 평화롭게 살기가 어려운 시대였다. 이 때 필요한 것은 강인한 수렵민 전사였다. 하지만 그들이 야만인 무법자 살인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을 지키기 위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 활과 창을 든 사람들이었다. 자연을 거스르며 땅을 뒤엎고 세상의 질서를 인간 중심 특히 특정한 개인인 황제 중심으로 바꾸려고 했던 자들이야말로 잔인한 전쟁광, 살인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에 아부한 자들이 기록한 역사서에서는 그러한 전쟁광을 성군, 영웅으로 기억하라고 강요해왔다.

 

강철이 등장하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권력자의 힘은 커졌으며 대규모 벌목이 이루어졌다. 거대 국가가 등장했다. 벌목용 도구인 도끼는 권력자의 상징이 되었다. 권력자의 힘이 숲의 신보다 우월해지면서 숲에 대한 경외감이 사라졌다. 과거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 만들었다.(현재는 바닷물을 햇빛에 말려 소금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나무가 많이 소비되었고 이보다 더 많이 금속 생산을 위해 나무가 소비되었다.

 

숯 생산지는 철산지 가까운 곳에 있다. 철 생산과 숯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목재가 부족해서 3~5세기 가야의 묘제가 나무를 사용한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바뀌었다는 연구도 있다. 숲은 공기부족으로 인해 나무가 불완전연소되어 만들어진다. 숯은 1200도까지 타는 연료다. 기와집이 많아진 것도 숲에 치명적이었다. 기와도 높은 온도에서 구워야 하기 때문에 연료인 나무를 대량으로 소비하게 된다.

 

민둥산은 비가 오면 빗물을 저장하지 못 한다. 산 아래로 빗물이 마구 흘러가면서 흙이 평지로 쓸려 내려간다. 산에서 붕괴된 토사는 농경지를 파괴하고 강바닥을 높였고 결국 강을 범람하게 하여 홍수를 만들고 농사를 망치게 한다. 나무가 없는 숯은 구름을 만들지 못해 비도 적게 오게 하고 내린 빗물도 빨리 고갈시킨다. 이로 인해 큰 가뭄이 발생한다. 외적과 전쟁을 많이 했던 고구려는 초기부터 힘을 과시하기 위해 궁궐 건축에 집착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음식은 절약했지만 궁궐 치장은 좋아했다. 조선 중기 이후 백제 미륵사, 신라 황룡사, 고려 광통보제사와 같은 거대한 사찰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불교가 배척되었던 것도 원인이지만 숲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좋은 목재들이 사라진 탓에 거대 사찰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이기봉의 '임금의 도시'를 통해 조선의 건축물이 크지 않은 것은 유교의 검소 문화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을 접한 기억이 난다.

 

유교 문화는 검소 문화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조선은 중종 시대를 거치며 사냥 횟수가 급격히 줄었다.(268 페이지) 인종, 명종, 선조는 사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왕이 무예를 연마하고 사냥하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왕이 사냥을 나가지 않은 것은 단순히 신하들의 반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 왕은 간편한 무복(武服)을 입고 소수의 호위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으나 유교적 예법이 자리를 잡으면서 왕들이 궁궐 밖을 나갈 때 수많은 시종과 호위 군사들이 따라가면서 비용이 점점 늘었다. 사냥에 온갖 격식을 갖추다 보니 사냥으로 인한 피해도 커졌다. 군사 훈련이나 식량 마련을 위한 수렵민의 사냥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269 페이지)

 

고려 시대에 흔했던 2층 건축물이 조선에서 많이 만들어지지 못했던 것은 그 시대에 숲이 훼손되어 기둥으로 사용할 좋은 목재를 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사찰은 백성들로 하여금 불교를 신앙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 성소다. 사찰이 많이 건립되고 거대화될수록 나무가 많이 잘려나갔다. 전생에 공덕을 쌓은 덕에 현세의 부귀를 얻게 되었다는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이 불교의 연기설이다.(179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불교의 운판, 목어, 범종 등이 새, 물고기, 뭍짐승들에게 불법을 널리 알린다는 표면적 목적이 있지만 숲속에서 동물들의 접근을 막는 기능을 한다는 주장이다. 절에서 피우는 향(香)도 온갖 벌레를 쫓는 역할을 했다.(181 페이지) 사찰은 신도들의 숙박을 위해 원(院)을 만들었다. 다량의 땔나무가 필요했다. 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사찰에서는 나무로 숯을 만들어 팔았다. 물론 스님들은 사찰 주변에 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경치를 보존하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여겼다.

 

스님들은 고기를 먹지 않은 대신 과일, 버섯, 잣, 고사리, 칡, 도토리, 밤 등을 주요 식량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서는 산림을 잘 관리해야 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불교 교리는 숲의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않고 생태계를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찰에 따라 산감(山監) 스님을 두어 도벌꾼과 산불을 감시했다. 신라 말 이후 한반도의 숲이 참나무에서 소나무로 우세종이 바뀌면서 숲에서 돼지를 방목해 키우기가 어려워졌다.(소나무가 고려 시대 이후 우세종인 된 것은 인공 조림의 결과다.)

 

이에 돼지는 밭에서 나는 곡식 등을 먹고 살게 되어 사육 비용이 올라갔다.(도토리는 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다. 도토리라는 단어의 어원은 돼지의 옛말인 돝에서 왔다.) 돼지가 부정적 짐승이 된 것은 이렇듯 숲이 변했기 때문이다.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는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에 비해 건물이 크고 화려했다. 그 만큼 숲을 많이 훼손했다. 산림이 소수에게 편중된 문제를 개혁하려던 공민왕의 정책은 권문세가들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를 거듭했다. 고려는 모피와 인삼 등의 공물을 잘 납부하는 사람들만의 나라였던 것이 아니라 숲에서 사는 사람들에 의해 굴러갔던 나라이기도 하다.

 

조선에서 나무 심기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임금은 정조였다. 영조가 청계천 준설 사업을 자신의 치적으로 삼았지만 정조는 준설 작업의 근본은 나무를 심는 것이라 하였다. 소나무의 가장 큰 단점은 생태계를 단순화하는 것이다. 소나무는 다른 식물의 생장을 억제하는 테르펜과 같은 타감(他感) 물질을 만들어 다른 나무들이 숲속에 자리 잡는 것을 막는다. 범과 같은 맹수가 사라지고 숲이 신의 거주지라는 외경심이 사라지면서 숲은 함부로 다루어졌다.

 

조선 후기에 온돌이 크게 보급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산에 먹을거리가 많아서 굳이 화전(火田)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후기는 사정이 달랐다. 17세기 세계적인 기온 저하로 조선에 대기근이 들었다. 1670 - 1671년 경신대기근은 무려 1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조선 시대 최악의 재난이다. 갑인예송이 일어난 1674년은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지 몇 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현종은 기해예송이 일어난 1659년부터 갑인예송이 일어난 1674년까지 재위했다.)

 

조선 후기에 화전이 크게 는 것은 재해 탓만은 아니다. 인구가 늘면서 만성적으로 토지가 부족한 때문이었다. 화전은 국가에서 세금을 걷지 않고 왕실과 종친 소유의 궁방, 주요관청, 개인에게 세금 징수 권한을 떼어주는 절수(折受) 대상으로 적격이었다. 화전을 관아에 신고하면 신고자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지세를 지방관청에 내게 된다. 왕실과 종친 소유의 궁방(宮房), 각 군영, 각급 관청 등 권력을 가진 기관들이 절수에 근거하여 화전을 적극 개발했다.

 

19세기 세도가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절수 대상 토지는 더욱 늘어나고 숲의 사유화와 화전은 점점 확대되었다.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이 분리된 조선에서 왕실이 앞장서서 절수를 옹호한 탓에 화전 확대를 막기 어려웠다. 생활이 어려워진 하층 농민들은 광산으로 몰렸다. 광물을 캐내려면 갱도가 필요하고 갱도를 지지하려면 목재가 필요하다. 또한 캐낸 광물을 정제하는 과정에 땔감이 필요하다. 조선은 광산 개발을 억제했다. 그런 만큼 숲의 변화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숲 파괴의 결정적 원인은 경작지 증가, 화전 개발 등이다. 숲이 줄어들자 사냥감이 부족해졌고 수렵채집민의 생활이 빈곤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땔감을 채취한 곳이 화전으로 개간되며 시장이 차츰 줄어들어 연료 공급이 끊겨 자기 제작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은 화전의 악순환을 막을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풍수지리에서 숲은 비보(裨補)와 염승(厭勝)에 이용된다. 비보는 지세의 부족한 점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으로 연못을 파거나 인공 산을 만들거나 나무를 심어 보완하는 것이다. 염승은 외부의 흉한 기운을 차단하기 위해 장승, 사찰 등을 세우거나 나무를 심는 것이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자원은 풍부하지만 나무를 마구 베어내어 도성 주변에 나무가 없는 나라였다.

 

17세기 유럽 역시 숲이 극도로 파기되어 생태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유럽은 석탄 발견, 신대륙 식민지 획득을 통해 대위기를 극복했다. 조선은 그런 행운이 없었다. 조선의 석탄은 쉽게 불이 붙지 않는 무연탄이다. 연탄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연료는 오직 나무와 풀뿐이었다. 철을 녹이고 선박을 만들고 공장을 돌리고 기선을 움직이고 각종 기계를 만들려면 나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산업화에 가장 중요한 자원인 연료가 조선에 부족했다.

 

조선에서 소수자가 된 수렵민을 산척(山尺)이라 한다. 이들은 외세가 쳐들어왔을 때 나라를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은 그들을 멸시하면서도 필요시에는 그들의 무력을 이용하고자 했다. 산척 대신 포수(砲手)가 등장했다.

 

숲은 생물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는 앞으로도 숲은 인간에 의해 수없이 변화를 겪을 것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가 아무리 신의 경지에 다가설 만큼 진화해도 인간은 숲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강조한다. ‘숲으로 본 한국사’는 새로운 관점이 돋보이는 책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숲을 지켜야 한다는 당위를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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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분석으로 발견한 상위 5% 리더의 습관
고시카와 신지 지음, 김정환 옮김 / 밀리언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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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으로 분석한 상위 5퍼센트 인재의 공통점을 밝힌 책이다. 저자는 기업 혁신 컨설팅 회사 설립자인 고시카와 신지다. 저자는 동정(同情)이 아닌 공감(共感), 일방 제안이 아닌 공궁(공동 궁리)을 강조한다. 리더십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의미다. 상위 5퍼센트 사원과 상위 5퍼센트 리더의 차이가 중요하다.

 

개인을 생각하는가, 팀을 생각하는가가 차이다. 회사는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유능한 리더가 이끄는 하나의 팀을 구축한다. 흥미로운 점은 상위 5퍼센트 리더는 걷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점이다. 단 의식적으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했는데 이 경우는 걸음이 빨랐고 사무실이나 복도에서는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걸으면 육체 건강에는 좋지 않지만 좋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많이 했다. 그들은 첫 한 마디와 마지막 5분에 집중한다. 그들은 의의와 목적을 선언하고 숫자를 언급하면서 상대방의 기억에 남도록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팀원보다 뛰어나지 않다. 팀원의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리더의 역량이다. 그들은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중한다. 그들은 무모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들은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성공하는 공식을 그대로 흉내내서는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보다는 과거에 실패한 사례를 깊게 파고들어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성공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이성보다 감정을 중시한다. 그들은 팀원들의 감정에 가까이 다가가서 문제가 발생한 메커니즘을 함께 생각한다. 그들은 절대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들은 답을 이끌어내도록 지원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팀원을 만든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연간 목표와 행동 목표는 공유하되 실행 방법은 팀원에게 맡긴다. 그들은 회의에서 최대한 말을 아낀다. 리더가 말할수록 팀원은 침묵한다. 그들은 결과보다 관계구축에 초점을 맞추고 협력 체제를 만든다. 팀원들이 실패한 부분을 들어 질책하기보다 다시 실패하지 않을 방책을 궁리해 다음 계획을 세우고 새롭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의욕보다 시스템을 믿는다. 그들은 지속적 성과를 이루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이질적 인재를 환영한다. 그들은 업무 처리 능력이 낮은 팀원을 우수한 팀원으로 메우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팀원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 부분을 다른 팀원으로 보완하려 하기도 한다.

 

무작정 열심히 일하는 방식은 오히려 리스크가 더 크다. 리더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팀원들은 오히려 압박감을 느끼고 위축된다. 그들은 이런 점을 잘 안다. 그들은 전달하는 것이 아닌 전해지는 것을 지향한다. 그들은 그만둘 일을 결정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그들은 팀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그들이 맞장구 치는 가짓수는 5가지 이상이다. 말이 끝나지 않았을 때 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시간과 에너지가 유한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영역에 투입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어제의 지식을 과감히 버린다. 그들은 의욕이나 피로감에 좌우되지 않도록 자기성찰의 시간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제어한다. 그들은 우연한 만남을 끌어들여서 자기 성장으로 연결한다.

 

약점을 드러내서 인맥을 넓힌다. 팀원이 어떨 때 일하는 보람을 느끼는지 알고 싶을 경우 “자네는 어디서 일하는 보람을 느끼는가?”라고 대뜸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 뒤 “나처럼 일하는 보람을 느낀 적이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답한다고 한다. 의식을 바꾸기는 어려우니 행동을 먼저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절대 바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디어는 틈새 시간에 나온다. 그들은 이것, 저것, 그것 등 지시대명사를 사용하는 빈도가 매우 낮다. 명확히 전달할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용사나 부사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이미지를 전하기 위해 말이나 표정 등을 사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칭찬으로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그들은 부정적 피드백도 기분 좋게 한다. 긍정적인 피드백을 먼저 함으로써 상대가 부정적 피드백을 받아들일 분위기를 충분히 만들 필요가 있다. 고개를 끄덕일수록 대화가 즐거워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상대방이 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열린 질문과 닫힌 질문을 상황에 맞춰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대화가 막힐 때는 닫힌 질문을 한다. 상위 5퍼센트 리더는 설득력이 뛰어나다. 글쓰기기 필요하다. 그들은 상황을 탓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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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리는 논어 한마디 - 거친 물결에 흔들리는 삶을 잡아줄 공자의 명쾌한 해답
판덩 지음, 이서연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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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공자가 자신이 겪는 고통과 근심을 겪었다는 데에서 위안을 받았다. 공자는 도(道)와 먹을 것 사이에서, 도에 대한 걱정과 가난에 대한 걱정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지침이 된 인물이다. 저자는 ‘논어’를 읽고 근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를 공자의 글에 비추어 이야기하고자 한다.

 

술처럼 달콤한 사이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구절이다. 청나라 대학사 장정옥은 일 중독에 빠진 황제 옹정제를 보필했다. 그들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가 지켜졌다. 장정옥은 황제가 자신을 찾지 않으면 굳이 찾아가지 않았고 옹정제는 장정옥을 공적인 일에만 불렀고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하지 않았다.

 

군자의 사귐은 물처럼 담백하고 소인의 사귐은 술처럼 달콤하다고 한다. 물처럼 담백한 사귐이 필요하다. 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인자요산 지자요수를 보자.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로 알려진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르게 본다. 어진 사람의 즐거움은 산과 같고 지혜로운 사람의 즐거움은 물과 같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사실 어진 사람은 왜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왜 물을 좋아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다. 저자는 인자요, 산.. 지자요, 수라고 읽는다. 어짊을 추구하는 사람은 내면의 덕을 쌓기에 산처럼 중후하고 포용적이며 관대하고, 지혜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배움을 좋아하며 즐기기 때문에 흐르는 물처럼 활달하고 역동적이다. 어진 사람은 안정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을 좋아한다. 어진 사람은 오랜 시간 즐거움을 느낄 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은 다양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어짊과 지혜로움은 함께 추구되어야 할 덕목이다. 산과 물이 어우러져야 아름답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상반되는 두 어구 또는 사상을 내세워 주제를 강조하는 대조법을 많이 사용했다. 어짊과 지혜는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군자와 소인은 어떤가? 저자는 군자와 소인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군자와 소인은 완전히 다른 두 유형의 사람이 아니며 단순히 누구는 군자이고 누구는 소인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군자적 면모와 소인적 면모가 두루 존재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에게 소인적 면모가 더 많을 것이다. 공자는 방탕하게 행동하지도 않고 자신을 너무 구속하지도 않는 평온한 중용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중용은 논란이 있는 개념이다. 상론할 수 없고 다만 평온한 경지는 뿌리를 뽑는, 끝까지 하는, 용감한 태도가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덕목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다. 군자는 염옹은 남면(南面)을 할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군주가 될 사람이라는 말이다. 반면 자공은 호련(瑚璉)이라 평했다. 호련이란 기장과 피를 담아 종묘에 바치는 제기(祭器)다.

 

이는 자공이 고귀한 인물이지만 아주 비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다. 공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또는 지혜롭게 말했다. 저자가 든 ‘나를 살리는 논어 한 마디’ 가운데 행불유경(行不由徑)을 빼놓을 수 없다.

 

지름길이 주는 욕망의 유혹에 발을 딛지 말라는 말이다. 군자대로행과 상응하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인지생야직(人之生也直)과도 통한다. 저자의 책은 인자요산 지자요수가 아니라 인자요, 산, 지자요, 수라는 해석에서 가장 빛난다. 의문이 풀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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