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감각 - 파리 서울 두 도시 이야기
이나라.티에리 베제쿠르 지음, 류은소라 옮김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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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감각'은 프랑스인 남편이 본 서울과 한국인 아내가 본 파리 이야기를 1, 2부로 배치한 플라뇌르(flaneur) 에세이이다. 플라뇌르는 어슬렁거리는 눈으로 도시를 걷는 만보객(漫步客)을 의미한다. 책의 1부는 프랑스인 남편의 이야기인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고 2부는 한국인 아내의 이야기인 도시라는 공동체이다.

두 저자는 서문격의 글인 '들어가며'에서 플라뇌르를 언급한다. 자신들은 천천히 걸어다니는 산보객인 플라뇌르일 것이지만 플라뇌르의 산책이 꼭 우연한 산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말을 생각하게 한다. 호시우행이란 호랑이처럼 관찰하고 소처럼 끈기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두 단어는 맥락이나 의미면에서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느슨하게 걷고 즐기듯 다소 흐트러지게 움직이는 걸음 속에 예리한 시각을 갖춘 것은 두 저자를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보면 정중동(靜中動)이라고도 할 여지도 있다.

'풍경의 감각'은 두 저자가 취한 그런 남다름의 산물이다. 사실 프랑스인 남편이 서울에 대해 논하고, 한국인 아내가 파리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포석이다. 표지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인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을 생각하게 하는 그림인 표지는 우산 쓴 두 저자 중 한 사람은 지구의 북반구 같은 곳에서 아래로 머리를 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남반구 같은 곳에서 바로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대는 글로벌한 시대이다. 여행 자체가 일상화되었고 그런 흐름에 따라 해외 여행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프랑스인 남편은 서울에 대해 이방인이고 한국인 아내 역시 파리에 대해 이방인이다. 그렇기에 두 저자는 낯선 곳을 알기 위해 독서로 철저 준비를 했다. 그 가운데는 풍수 책도 있다.

파리의 눈으로 본 서울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프랑스인 남편(티에리 베제쿠르)은 우리의 풍경들과 다른 파리의 풍경들을 이야기한다. 서울의 일상이 파리의 일상보다 우월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우월한 것은 우리의 카페에서는 노트북을 펼쳐 검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파리의 카페는 테이블이 너무 작아서 노트북을 올려놓을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낳은 것은 자유로운 생각들이 만나고 부딪히고 강화되고 확산된 파리의 카페들이었다.(34 페이지) 병렬적 나열이겠지만 파리의 카페들에서 생각을 나눈 지식인들이 멋지게 보인다. 베제쿠르는 우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과 파리의 공동묘지, 장례의식이 가진 뚜렷한 차이를 언급한다.

도시가 변하는 속도도 주요 비교 사안이다.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도시들은 완전히 바뀌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세대들이 그 뒤를 잇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한 세대 안에서조차 도시가 여러 번 다시 태어난다. 한국에서 고궁들이, 서울이 오래된 도시임을 환기하는 장치가 된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한국에서 주택은 우리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 이상으로 사고 다시 파는 재화나 주택 임대업의 아이템이다.(105 페이지)

베제쿠르는 한국의 것도 분류를 한다. 절과 교회가 그것이다. 베제쿠르는 절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풍수 책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아내 이나라는 대학생 시절 홀로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순전히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기차를 탔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장식한 뒤 기차의 의미를 짚는다. 기차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근대적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187 페이지) 기차에 얽힌 인간과 사회의 이야기가 풍성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국인 아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속도의 차이가 낳은 정서의 차이, 세상의 변화이다.

이나라도 파리와 서울을 나란히 놓는다.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인 반면 프랑스에서는 꽃도 자유분방하다.(206 페이지) 이나라가 파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곳이 유학(留學)지이기 때문이다. 이나라는 랜드마크 건축물은 무용하지 않지만 어떤 랜드마크가 도시의 정체성을 대단하게 창조하거나 상징할 것이라는 기대는 호들갑이라 지적한다.(243 페이지)

베제쿠르가 문이 그렇듯 다리도 인간을 연결하고 분리시키는 능력의 기호(29 페이지)라고 말했다면 이나라는 다리는 한편으로는 나누는 장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하는 장소라 말한다.(247 페이지) 다리는 두 사람, 두 세계를 연결짓기도 하지만 적대적인 사람, 적대적인 세계를 분리한다.

이나라가 한국에서는 꽃이 너무 공식적이라는 말을 했다면 베제쿠르는 서울의 풍경은 과히 준법의 풍경에 가깝다는 말을 했다.(262 페이지) 이나라는 시민의 최우선 윤리는 무조건적인 준법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65 페이지) 준법정신은 경직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나라는 서울 이야기도 많이 한다. 프랑스 이야기를 하려면 당연하다.

비교 없는 이야기는 무의미하다. 비교는 우리 것들 사이에서도 프랑스의 것들 사이에서도 행해진다. 우리가 은밀한 별실을 좋아한다면 서유럽의 유명 식당들은 대체로 전망을 제안한다.(291 페이지) 베제쿠르가 절이 개신교 교회보다 더 한국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했다면(73 페이지) 이나라는 은밀함의 공간이 무조건적인 배제나 궁극적인 차별의 공간은 아니고 보여주기의 공간이 무조건 자유의 생산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295 페이지)

플라뇌르를 목적을 갖는 것으로 보는 두 사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다. 자신만의 독특하고 예리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말해주는 시각이다. 깊게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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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 테스트가 페부커들의 게시 글을 보고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에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단어로 ‘게리는‘이라는 단어가 선정되었다. ‘게리는‘이 무슨 뜻일까?

게리는 지난 2012년 일반 관람객이 없는 이른 시각에 자신과 일행들 몇몇만 종묘를 특별 관람하게 해달라고 해 어렵게 꿈을 이룬 분으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9 - )이다.

그는 종묘 정전 만큼 장엄한 곳은 다시 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다.

1985년 국립 로마박물관을 설계한 건축가 라파엘 모네오(Rafael Moneo; 1937 - )가 지난 6월 한국을 찾았다. 이 분은 세계 건축계에서 드물게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대스승으로 알려진 분이다.

게리가 표면적으로는 삼성 리움 미술관 특강을 위해 한국에 왔지만 실은 종묘 정전을 보러 온 것이라면 모네오는 서울대 강연을 위해 한국에 오자마자 덕수궁, 광화문, 서촌 등을 찾았고 종묘에서는 해설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모네오는 종묘에 대해 담장 밖은 바쁜 서울인데 담장 안 종묘는 전혀 다른 영적인 세계라며 감탄했다. 영적인 세계란 내 식으로 말하면 잠시 세속의 번잡함과 어수선함을 잊을 수 있는 곳이다.
종묘가 이런 찬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반갑고 궁(宮)보다 묘(廟)를 더 좋아하는 내 취향이 인정받은 듯 해 기쁘다.

나는 물론 묘(墓)도 묘(廟) 만큼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능(陵), 원(園), 묘(墓) 가운데 능을 좋아하는 것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이고 묘는 대군, 공주, 옹주, 귀인 등의 무덤이다.

해설사로서 필수인 연구팀으로 왕릉연구팀을 선택하며 나는 종묘 연구팀도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섯 곳에 산재해 있는 궁궐, 수십여 곳에 나뉘어 있는 능과 달리 종묘(宗廟)는 한 곳에 있지만 그 주인공들은 궁과 능의 주인공들과 같다.

그러니 이야기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계속 한 곳에서만 모인다는 점이 걸림돌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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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5월부터 2007년 1월까지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의 광어 양식장에서 일할 때 신암리 통신이란 블로그 카테고리를 운영했었다.

동해남부선이 지나던 그곳은 지금도 낭만과 아쉬움의 정서를 교차하게 하는 근원지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간절곶에서 5분 거리인 그곳에는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술을 마시며 바다를 보기에 좋은 횟집이 있었다.

그 횟집은 약간은 모호한 그리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페북에서 우포늪 통신사 역할을 하시는 손 시인의 글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오늘 글에는 수달이 목격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를 보고 내가 생각한 것은 달제어(獺祭魚)라는 말이다.

수달이 물고기를 잡은 뒤 먹지는 않고 제사를 지내듯 늘어놓고 있는 것을 뜻하는 이 말이 어떤 계기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중요한 것은 수달을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수달은 다른 곳에도 있으니 가시연꽃을 비롯한 우포의 수생식물들과 짙은 청록을 보려는 것이다.

올해는 궁궐 순례를 많이 했다. 지난 8월 창경궁에서는 청설모(청설모가 아니라 청서靑鼠라 해야 맞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를 보았고 7월 창덕궁에서는 너구리를 보았다.

당시 청설모를 보면서 나는 저 동물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말을 해설사에게 했다. 함께 해설을 들었던 누군가가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색해보니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청설모는 나무 위에서 살고 다람쥐는 땅 위에서 살며, 청설모는 잣을 좋아하고 다람쥐는 도토리를 좋아하는 등 습성이 다르고 청설모는 겨울잠을 자지 않고 다람쥐는 겨울잠을 자는 등의 차이도 분명하다.

어떻든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는데 말하고 싶은 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그리움 또는 아쉬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궁궐 시나리오를 쓸 때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쉽고 간결한 글, 관심을 유도하는 질문과 미션 제시 등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나는 새로움과 독창성 등도 염두에 둔다. 물론 이로 인해 글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요즘 열 가지 서울의 색을 시나리오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하고 있다.

그 색들은 서울의 건축문화유산과 나무와 자연의 원소들을 연상하게 하는 색이라고 한다. 궁궐 기둥의 빨간색, 궁궐 기타 영역의 갈색, 가을 거리의 은행나무의 노란색, 한강의 물결이 드러내는 은백색 등이다.

왕조시대의 유산인 궁궐은 죽은 건축 유형이다.(조재모 지음 ‘궁궐, 조선을 말하다‘ 4 페이지) 그럼에도 궁에 갈 때는 마음이 늘 설렌다.

미지의 영역이고 거대 건축물이고 문화 유산이기 때문일 것이다.(궁은 십년을 드나들어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가볼 수 없는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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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9-08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도시에는 산이 도심에 있는데요. 그곳에 친구와 함께 등산 혹은 산책을 갔어요. 간식으로 해태 에이스 크랙카를 가지고 갔는데요. 그곳 정상에서 에이스 크랙카를 먹는데요. 아 글쎄, 청설모 한 녀석이 쫄랑쫄랑 제 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리곤 앞발을 모아 들고 나 좀 하나 달라는 표정으로 서 있지 뭡니깤ㅋㅋㅋ 크랙카 한 조각을 주니까 오몰오몰 바삭바삭거리며 받아 먹더라고요. 넘 귀엽고 기특하더라고요. ㅎㅎㅎ

그래서 산에 갈 때는 한동안 늘 에이스 크랙카를 가지고 가곤 했죠. 에이스 크랙카 은박지를 구겨서 바시락바시락거리는 소리를 내면 그 신호를 듣고 청설모가 어디선가 다가옵니다. 청설모도 에이스 크랙카가 맛있는가 봐요. (아니 아니 인간들이 청설모한테 나쁜 식습관을 들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연식만 해오던 청설모가 인공식인 과자를 먹고 해롭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하더군요.) 어쨌든 언제부턴가 청설모들이 인간과 친해진 것은 분명해요. 저 같은 경우 산에만 가면 청설모들이 다가오는 경험을 합니다. 걔들한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을 때는 얼마나 아쉽던지요. 그리고 에이스 크랙카(크래카, 크래커)는 참 질리지도 않는 추억의 과자입니다. 지금도 저는 에이스 크랙카를 먹으면서 댓글을 쓰고 있네요 ㅎㅎㅎ

벤투의스케치북 2017-09-08 01:13   좋아요 1 | URL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란 구절이 있는 나희덕 시인의 ‘시월’이란 시 이야기를 했었지요. 아늑하고 고즈넉한 시이지만 다람쥐를 잡아먹는 청설모가 있어 의아하다는 말을 했던 것인데 검색 해보고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이스 크래커는 예전에 많이도 먹던 것이지요. 달지도 않고 약간 짠 맛이 나는 독특한 맛이 자꾸 입맛을 당기게 한 과자였지요.

청설모와 얽힌 사연이 재미 있습니다. 그것도 교감(交感)이겠지요.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입맛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요. 도심에 산이 있는 도시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고려의 풍수와 조선의 풍수는 다르다는 점이 생각납니다. 고려는 비보(裨補)의 개념이고 조선은 명당(明堂)에 관심을 기울이는 개념이었지요. 아, 나희덕 시인의 ‘시월’도 첫 구절이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산문을 여는 여기...”이지요. 재미 있는 댓글 감사합니다. ^^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분석의 기법 중 하나인 자유연상(Free Association)이 생각난다. 특히 정치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언어, 자유연상을 정신분석에서 중요한 것으로 강조했다.

 

자유연상의 관건은 두서 없이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 소망과 기억 등을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내로남불도 자유연상으로 볼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합리적인 생각, 책임감 있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머리가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생각들에 잠식되었다면 표현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을 사명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기야 머리에 온통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들어차면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오류가 (개인의) 진실을 알게 하는 수단이 되지만 공공의 장에서의 그런 자유연상적인 발언은 양식(良識)있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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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음력 7월 보름)가 백중(百中)이었다. 백중은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도 한다.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구한, 붓다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목련존자의 효성(孝誠)으로부터 비롯된 절기가 우란분절이다.

“오늘은 우란분절. 효성 깊은 목련존자가/ 아귀도의 고통 받는 어머니를 위해/ 고귀한 불공을 드린 날이었다지, 그후/ 여러 가지 음식을 盆에 담아 조상의 영전이나/ 부처께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네./ 우란분. 우란분. 심한 고통이라는 뜻이지...

아니면 어머니, 우란분 우란분/ 그 화분 속에 심어/ 내 두개골의 대지 그 아늑한 밀실 속에/ 보관하여 세상풍파 더 이상 미치지 못하도록/ 어머니를 한번 잉태할 수는 없는 것인가...” 오랜만에 다시 읽는 김승희 시인의 ‘우란분절‘의 주요 부분이다.

이 시를 보며 종법질서와 장자 우선 원칙을 고수했던 유교의 효는 어떨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자현스님에 의하면 유교의 효는 아버지에 대한 효, 남성 중심의 효라면 불교의 효는 어머니에 대한 효, 여성과 관련된 효이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 니은 디귿!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과/ 현란을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습니다”

김승희 시인의 ‘유서를 쓰며’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다.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 모성에 대한 인식이 인상적이다.

자신에게 자리매김된 모성성의 시인이라는 말이 묘하게 불편했다고 말하는 나희덕 시인은 ‘모성성 – 불모성을 건너는 다리’에서 모성도 분명히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이 든 예는 모성성을 상징하는 여신 데메테르나 그녀의 할머니 가이아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64, 65 페이지) 보라는 칸딘스키가 “냉각된 빨강”이라 표현한 색이다.(‘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57 페이지)

티에리 베제쿠르는 유럽의 회화는 무엇보다 동일 계열 색의 끝없는 뉘앙스와 미묘한 색조의 변화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한다.(‘풍경의 감각’ 133 페이지)

세상을 고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효율성과 게으름, 상투성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유연성과 새로운 시각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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