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명절이다. 힘들게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의 고난의 행군은 올해라고 예외는 아니다. 추석 연휴이지만 나는 올해 설 연휴 시작일인 1월 26일 창덕궁에 갔다 온 생각이 난다.

명절에 궁궐에 다녀온 것은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이 특별해서는 아니다. 정조의 능인 건능이 있는 화성에까지 갈 수 없어 정조와 깊은 연관이 있는 창덕궁, 특히 후원에 들러 인사라도 할 생각에서 다녀온 것일 뿐이다.

정조에게 인사를 하게 된 것은 별다른 사연이 있어서는 아니다. 정조 이야기를 설정한 것이 잘된 선택이었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아들 문효세자를 곁에 두기 위해 중희당을 지은 이야기, 상조회(賞釣會; 상화조어회賞花釣魚會)를 만들어 규장각 신하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하며 시를 지은 이야기 등 정조의 사연을 택해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명절을 즈음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호칭 불평등 또는 호칭 비대칭이다. 아내는 남편의 남자 동생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데 비해 남편은 아내의 남자 동생을 처남이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처남 대신 남편이 아내의 남자 동생을 부르는 존칭이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 왕실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열에 관심이 간다. 창경궁 공부를 할 때도 그런 점이 대두된다. 창경궁은 성종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할머니),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 한씨(작은 어머니), 추존왕인 덕종 비인 소혜왕후 한씨(어머니) 등 세 분의 대왕대비를 위해 수강궁 터에 지은 궁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안순왕후와 소혜왕후는 서열을 놓고 갈등했다. 안순왕후는 소혜왕후의 손아래이지만 남편이 왕이 된 경우이고 소혜왕후는 손위이지만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뒤 아들(성종)에 의해 추존 왕이 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손위, 손아래 여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남편이 왕이 되었는지 아닌지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가 문제이다. 창경궁은 정치를 위해 지은 궁이 아니다. 성종이 세 대왕대비를 위해 지은 여성을 위한 궁궐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하는 마음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비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창덕궁과 경희궁을 비교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리라.

조선 전기에 경복궁이 정궁이고 창덕궁은 이궁(離宮; 별궁)이었다. 후기에는 창덕궁이 정궁이고 이궁은 경희궁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은 없을 수 없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에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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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두 시간 시나리오를 장장 13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썼다. A4로 열 장을 꽉 채운 분량이다.

손가락이 아파 스마트폰 터치펜으로 타자한 후 pc와 연동된 카톡에 보내서 한글 파일로 정리했다.

다듬고 간추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어야 하니 끝난 것이 아니다.

궁궐 시나리오를 쓰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 각 궁궐이 모두 남다른 특징이 있고 애환이 있고 미덕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 9월 17일, 9월 24일 두 주에 걸쳐 정동 일원에서 해설을 하고 놀면서 궁궐이 주는 무게감에서 자유로운 나를 느꼈다.

궁궐은 비극이 횡행했던 공간이다. 그러니 어깨를 누르는 무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오버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궁궐 유람을 하며 또는 해설을 들으며 너무 가볍고 편한 모습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창덕궁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만나는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내가 좋아해온 군주이지만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정조와 정조 이후‘라는 책은 정조가 세도정치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논리를 편다.

세도 정치는 정조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물론 나는 그의 의도를 좋게 본다.

다만 아직 그 책을 읽지 못했으니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아보고 싶다.

너무 역사 이야기를 읽는데 시간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꾸 읽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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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30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궐 시나리오라는 것은 어떤 건가요??

벤투의스케치북 2017-09-30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경복궁, 창덕궁 등의 궁궐들을 해설 듣는 사람들의 취향이나 관심도, 수준 등을 고려해 설명하고 각 전각들과 관계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의 일화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syo 2017-09-30 09:24   좋아요 1 | URL
그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철저한 준비를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시나리오˝ 라는 단어를 들으니까 어쩐지 더 흥미로워져서 여쭸습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7-09-30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 이** 님의 페북에서 구약(舊約) 전공자인 독일 신학자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 – 1971)의 글을 읽었다.(9월 9일)

이** 님은 창세기 3장 20절에 대한 해설 중 폰 라트의 것이 단연 압권(壓卷)이라 말한다.

창세기 3장 20절은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란 구절이다.

주석서인 ‘창세기(Genesis)’에서 폰 라트는 이런 말을 했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신앙 행위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신앙은 징계의 말씀 속에 숨겨져 있고, 가려진 약속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여자의 모성으로 인해 유지되고 지속되는 위대한 기적과 신비로, 노고와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끌어 안는 신앙이다.˝

감동적이다. 그런데 폰 라트는 같은 책에서 “야훼 종교의 역사에서 여자들은 애매모호한 점성술을 좋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말을 하며 그리하여
여자들은 삶의 한계적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남자보다 더 유혹에 쉽게 빠지고 애매모호한 신비를 쫓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캐롤 P 크리스트 외 편집 ‘여성과 聖스러움’ 중 필리스 트리블 씀‘ 이브와 아담: 창세기 2 – 3장 다시 읽기’ 참고: 117 페이지)

필리스 트리블은 창조주는 여성을 만든 후 명백히 good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강호숙 기독인문학 연구원(硏究院) 박사는 ‘예정론,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기를!’이란 페북 글(9월 6일)에서 이런 말을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자로 만드신 것, 그리고 자녀 못 낳는 거 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건데, 왜 여성들을 타박하고 억압하고 정죄하는가?“

이 말은 선택과 유기의 이중 예정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이중 예정론이란, 필요할 때는 예정론을 내세우고 그렇지 않을 때는 예정론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들이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것으로 수용하고 여자를 비난할 때는 예정론은 고려하지 않는 것 즉 여자들이 현재 보이는 모습들을 하나님의 섭리(攝理)의 결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용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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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1877 – 1962)와 칼 융(1875 – 1961)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아야 할 작가, 사상가이다.

이런 점은 내가 몇 년 전 읽은 책들과 현재 읽고 있는 책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맹난자 님의 ‘주역(周易)에게 길을 묻다’,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 김혜령의 ‘불안이라는 위안’...

정확히 말하면 헤세가 융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한다. 융은 자아와 그림자를 말했다.

융이 말하는 자아는 내가 누구라고 인식하는 자신이고 그림자란 내가 보려 하지 않거나 이해하는 데 실패한 부분이다.

누구에게나 대면하기 고통스러운 부분이 있다. 지난 번 네임테스트가 FBI가 나의 지나친 진지함을 범죄로 파악하고 있다는 말을 하며 부연(敷衍)한 설명에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진지함은 위험하다는 말이다. 모든 진실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떤 진실이 고통스러운 것이리라.

김명인 교수의 ‘불을 찾아서’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여러 부분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구절이 “입술이 타는 긴장으로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대면하는 방황의 시간이 좀더 허락되기를 바란다.”는 문장이다.

자신의 것이든 사회의 것이든 근본적인 문제들과 맞대면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헤세로 가는 길’에서 저자는 헤세가 카프카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말을 한다. 나는 이는 헤세가 온전해지기 위해 치른 노력이라 생각한다.

온전해지는 것은 융이 강조한 바이다. 융은 주역에 능통했고 헤세는 심취했다. ‘불안이라는 위안’은 불안은 위안으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기쁨이 기쁨에 그치지 않고 슬픔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듯 불안도 그렇다고 말한다.

‘주역에게 길을 묻다’는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으로 화(化)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두 책의 메시지는 상통한다. 다만 심리학자인 김혜령은 불안, 슬픔 등을 위안으로 바꾸는 인위(人爲)의 지혜를 말한다는 차이가 있다.

융의 주역은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 즉 정신의 분열을 통합하기 위한 차원으로 무의식을 완전히 의식화할 것을 강조한 융이 택한 방법론이다.

나는 서툴지만 주역 대가들의 책이 읽고 싶어지는 것을 보며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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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 혼수 상태에서 철학자 베르그송은˝여러분, 5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란 말을 했다.(황수영 지음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 23 페이지)

베르그송은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할 때 마지막을 늘 저 말로 장식했다. 소박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메마름을 떠올리게도 하는 말이다.

˝베르그송은 수다쟁이 즉 중언부언 이야기하는 정신에 대하여 아름다운 메마름la bele aridite을 대표한다. 베르그송은 증류법에 의하여 지속(持續)의 농축된 알코올을 얻기 위해 인생을 어지럽게 혼란시키는 문법적 범주와 형식적 말의 논쟁에서부터 인생을 정화시키려고 하였다...

단순성의 평화로운 대양 속에 베르그송적인 기쁨이 그렇게 만난다. 페느롱Fenelon의 순수한 시간의 근원인 하늘처럼 레퀴엠이나 13개의 소야곡Treize nocturnes이나 이브의 노래la chanson d’ Eve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가브리엘 포레의 무한한 밤의 평화가 단순성의 대양 속에서 만난다..”(김형효 지음 ‘베르그송의 철학‘ 192 페이지)

마음 맞는 몇 사람이 만나 나누는 따뜻한 차담(茶談) 같은 곡이라 생각하며 가브리엘 포레의 피아노 4중주 CD를 누군가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나는 포레의 피아노 4중주가 베르그송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이 내게 자신의 시를 읽어 줄 때 나는 그것에 충분히 관심을 가지고 그의 생각 속에 들어가서 그의 감정 속에 빠져들고 그가 구절과 단어들로 흩뜨려 놓은 단순한 상태를 다시 체험할 수 있다.

그 때 나는 그의 영감에 공감한다. 나는 그것을 영감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가분의 행위인 연속적 운동에 의해 좇는다.”(‘창조적 진화’ 316 페이지)고 말한 베르그송.

베르그송이 시인의 영감에 공감한다고 한 것처럼 나 역시 작곡가의 영감에 공감한다. 그 작곡가의 이름은 가브리엘 포레이다.

이번 가을에는 포레의 따뜻한 곡들(진노의 날이 없는 진혼곡, 피아노 4중주, 피아노 5중주 등의 실내악곡들)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베르그송의 철학을 읽을 것이다. 평화로운 가을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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