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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뿔이다 - 어느 헤겔주의자의 우리 철학 뒤집어 읽기
전대호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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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의 '철학은 뿔이다'는 헤겔주의자인 저자가 김상봉, 이진경, 김상환, 이어령 등을 실명 비판한 책이다. 저자는 자칭 주체주의자이다. "주체라는 개념에 어마어마한 의미, 역량, 직접성, 현실성 등을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반면 이진경, 김상환은 존재주의자란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저자는 양쪽 모두에 진리가 있다는 생각을 늘 견지하려 애쓰는 헤겔주의자이다. 저자는 주체는 반드시 행동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존재와 결정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저자는 공부가 깊어지면 자신이 잠정적으로 편갈라본 존재파/ 주체파가 동전의 양면으로 밝혀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한다.(존재파는 주로 자연의 광활함 앞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고 주체파는 시장의 난장판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다; 15페이지) 철학에서 주체는 기독교의 구원, 불교의 불성과 같다. 저자는 김상봉과 자신의 주체관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가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저자는 주체성이란 무엇보다 자기의식에 존립한다는 김상봉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주체란 자기를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라는 상식적 정의를 나란히 놓는다.(주체는 자기관계이다.) 김상봉은 홀로주체성을 비판하고 서로주체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김상봉은 자기상실을 동반할 때 참된 의미에서 자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점은 김상봉이 말하는 만남이 결속을 특징으로 한다면 저자가 말하는 만남은 싸움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자신이 이해한 헤겔의 주체이론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으려 한다.


저자는 자신에게 주체의 본질은 시스템 안의 나와 시스템 밖의 나가 나누는 대화라고 설명한다. 주체 안에는 반드시 깊은 균열이 내재한다. 저자는 김상봉이 자유는 이야기하지만 그 짝에 해당하는 책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헤겔의 변증법은 항상 이미 어디에나 있는 자기거리(距離)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과정이라 설명한다. 상반된 둘을 모아 하나의 통일체를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변증법은 자신이 아는 변증법의 정반대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저자에 의하면 대화는 주체의 본질적 활동이며 다른 이름이다.


저자에 의하면 진짜 생각은 보편적인 나와 특수한 나가 나누는 진짜 대화이다. 모두 각자는 내면에서 진짜로 생각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동등한 상대로서의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다. 특수한 나와 특수한 너가 진짜로 대화하려면 특수한 나가 이미 내면에서 보편적 나와 대화하고 특수한 너 역시 이미 내면에서 보편적 너와 대화하고 있어야 진짜 대화가 이루어진다. 진정한 대화에서 나를 변화시키거나 유지시키는 것은 나 자신이다.(41 페이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관계는 객체화(사물화)와 결부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은 항상 객체화된 나와 객체화된 너로서 만난다. 그러면서도 주체로서의 나와 주체로서의 너를 인정한다. 여기에 신비가 있고 이 신비는 나가 사물화된 나를 주체로서의 나로 인정하는 것과 똑같은 신비이다.(44 페이지) 인간은 생각된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하곤 한다. 거꾸로 있는 그대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다시 생각된 대상으로 재조명되기도 한다. 서양근대철학은 주체(생각된 대상)와 객체(있는 그대로의 대상) 사이의 넘나듦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사상이다.(45 페이지)


저자는 김상봉이 주객관계를 일종의 주종관계로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고 말한다.(46 페이지) 저자는 나의 주체는 항상 이미 서로이며 홀로라고 말한다.(52 페이지) 저자는 김상봉이 자꾸 아픔이나 고통 같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품지 않은 주체는 아예 주체가 아니며 서양 사상은 대체로 이런 주체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58 페이지) 저자는 헤겔의 아우프헤벤의 번역어로 거두다란 말을 선택한다.


숨을 거두다란 표현이 부정적이라면 구호단체들이 고아들을 거두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말을 하며 저자는 두 번째 의미를 간과하지 않는 것이 헤겔 철학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낀다고 말한다.(59 페이지) 거두다란 표현이 지양(止揚)하다란 표현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이 저자의 추가 설명이다. 김상봉이 말하는 자기상실이 마음대로 없앨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실재하는 자기거리를 뜻한다면 자기상실은 한국적 주체만의 특징이 아니라 모든 주체의 특징이자 근본구조이다.(60 페이지)


저자는 김상봉이 한국철학의 부재를 한탄하지만 한국어 사용자들의 삶 자체가 이미 한국철학이라고 본다. 철학이 꼭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헤겔이 말하는 목적론이란 보고 또 보고 끝까지 보아야 정체를 안다는 의미이며 헤겔이 말하는 전체란 풍요 그 자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진경의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논하며 거울을 주체로 놓은 이진경을 비판한다. 주체는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모든 각자인데 어떻게 사물인 거울을 주체로 설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이진경이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주체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한 냉혹한 비판이라 설명한다.(84, 85 페이지) 저자는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이진경 자신은 그런 코드에서 해방되어 보편의 관점에서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란 질문을 던진다.(85 페이지) 멋진 공격이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예의 때문에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사실 자유로운 만큼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아닌지?


이렇게 말하면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인간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도 아니고 전적으로 부자유스러운 존재도 아니라 말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이진경이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며 논의를 이어나가는 것은 이진경 자신은 그런 코드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뿐 아니라 인간이 가진 한계를 인식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이진경이 주체를 영 오해하는 것은 아닐까, 라고 말한다. 저자는 분리와 거리두기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라 말한다. 분리는 단절을 의미하고 거리두기는 새로운 관계설정을 함축한다는 것이다.(92 페이지)


자기 자신에게까지 거리를 두는 존재라고 말하는 저자는 데카르트의 의심이 거리두기의 하나라고 덧붙인다.(이진경은 근대철학은 주체를 신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성립했다는 말을 했다. 분리함으로써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이진경이 주체의 인식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주체 자신이 확인할 길이 없다는 딜레마를 지적하고 나서 곧바로 거울로 자기 얼굴 보기를 예로 든다고 말한다.(93 페이지)


저자는 내용 없는 사상(생각)은 공허하다는 칸트의 말에서 내용은 데이터이고 생각은 계산이라 말한다. 데이터로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계산)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란 칸트의 다른 말에서 개념은 계산으로, 직관은 데이터로 설명된다. 계산을 통해(거쳐) 데이터가 도출된다는 것이다.(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란 칸트의 말은 이렇게 이해된다. 데이터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계산 없는 데이터는 맹목이라는 의미!)


저자는 과학에어 계산과 데이터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란 물음을 받는다면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이라 말할 것이라 말한다.(117 페이지) 저자는 과학에서 계산이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과학이 대화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119 페이지) 그런데 저자는 이진경은 근대과학의 중심에 수학과 계산을 놓는데 그것은 숫자와 계산이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비교하게 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을 숫자들의 질서, 수학들의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계산을 확실한 증거로 본다면 이진경은 계산에서 모든 사물을 계산 가능한 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의를 본다. 저자는 근대철학은 아직 그 잠재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한 악기와 같다고 말한다.(131 페이지) 저자는 이진경이 근대철학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는커녕 주로 근대철학의 문제, 한계, 약점 같은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데 그마저도 현악기의 울림통을 두드리면서 이것이 타악기로서 영 신통치 않다는 격이라고 지적한다.(131 페이지)


저자는 김상환을 비판하는 자리에서도 주체 이야기를 한다. 주체 자신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무릇 주체는 소통이란 것이다.(145, 146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철학판의 불문율은 할거(割據)라 말한다.(148 페이지) 할거란 땅을 나누어 차지해 세력을 형성한다는 뜻이다.(나눌 할, 의거할 거) 저자는 정신현상학의 어느 한 대목을 뚝 떼어다가 헤겔에게 설명해달라고 말하면 한참 고민 끝에 몇 마디 버벅거리다가 그냥 스스로 이해하시면 안 될까요? 하며 난색을 표할 것 같다고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는 헤겔을 조금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거의 누구나 이항대립의 극복, 모순의 해소를 운운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헤겔이 문제삼는 것은 이항대립에 대한 무기력한 이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항대립을 뛰어넘겠다는 낭만주의적 포부의 허망함이다. 저자는 철학이 시장에서 탄생한다는 것도 경이로운 자연 앞에서 탄생한다는 것 못지 않게 진실이라고 본다고 말한다.(181 페이지)


저자는 김상환이 설정한 세 인물 즉 불행한 의식, 성실한 의식, 아름다운 영혼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한다. 김상환은 인문학자인 자신을 불행한 의식과 성실한 의식, 아름다운 영혼의 조합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헤겔을 프랙털 미로, 지옥의 유황 안개 자욱한 미로로 규정하며 거기에 발을 들인 이상 피차 영원히 헤맬 각오를 해야 할 판이니 어떤 해석자가 자신의 길만 옳다고 우길 수 없다고 말한다.(199 페이지)


저자는 태권도에 빗대면 품새보다 겨루기가 바닥에 닿은 철학의 형식으로 적합하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저자는 고맙게도 철학적 정신은 아무리 싸워도 다치지 않는다고 말한다.(305 페이지) 철학에서 겨루기란 대화이다. 맞선 두 사람이 말로 얽히는 과정이다. 이것이 저자가 이해하는 한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의 정체이다. 저자는 서양근대철학, 자기관계, 자율과 책임이 우리에게 유효한 해방의 구호라고 느낀다고 말한다.(311 페이지)


저자는 우리 곁에서 한국어로 활동하는 철학자들을 논하면서 굳이 먼 나라의 헤겔을 끌어들일까? 말한다.(319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배운 헤겔과 이 땅의 많은 지식인이 이야기하는 헤겔이 퍽 다르다는 충격적인 경험이 자신에게 오랫동안 큰 수수께끼였다고 말한다.(320 페이지) 저자는 칸트와 헤겔을 연속선상에 놓고 해석하는 쪽을 선호한다고 말한다.(32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고전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오류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흔히 사람들이 칸트의 사물 자체 불가지론이 서양근대철학 특유의 한계요 머뭇거림이요 후퇴라 말하는 것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해석이라 말한다.(32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칸트는 그 이름도 중후한 존재를 몽땅 내주고 허공에서 나풀거리는 대화를 붙잡은 셈이다. 사물 자체는 칸트와 헤겔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도 즐겨 거론된다. 칸트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한 반면에 헤겔은 알 수 있다고 했으니 두 철학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의 관계는 아스라한 지평선 만큼이나 미묘하다.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는 칸트와 알 수 있다는 헤겔을 차이나는 것으로 보기보다 대화를 살리기 위한 취지에서 완벽하게 한편이라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헤겔을 칸트와 더불어 존재를 대화로 떠받치고 재구성한 철학자로 본다. 이해하기 버겁고 정리하기에도 바쁜 책 읽기를 마치며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닐 것이다. 공부가 깊어지면 다시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내공이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 읽기였음을 고백한다.(스스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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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을 부르는 미술관 - 착시와 환상, 신비감을 부여하다
셀린 들라보 지음, 김성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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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들라보의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의 표지를 장식하는 그림은 페레 보렐 델카소의 ‘비평에서 도망가기’란 그림이다. 이 그림은 트롱프뢰유(trompe - l'oeil: 대상을 실물로 착각하게 할 만큼 생생하게 표현하는 미술 기법) 즉 착시 효과만 노리는 그림은 미술 비평가들의 조롱을 산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비평에서 도망가기’란 제목의 그림은 소년이 창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겁에 질린 채 도망치는 소년은 계속되는 비평에 질려 활동을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인 화가의 불편한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들라보의 책이 예시한 미술에서의 기막힌 거짓말은 트롱프뢰유만이 아니다. 대상을 변형시켜 묘사하는 왜상화법, 이중적이거나 숨겨진 이미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원근법 등도 책이 소개하는 주요 기법이다. ‘눈을 속이다‘, ’또 다른 의미를 담아내다‘, ’형체를 만들다‘, ’시각을 탐구하다‘, ’현실을 초월하다‘ 등 다섯 챕터로 이루어진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은 ’착시와 환상, 신비감을 부여하다’란 부제를 가지고 있다.


폼페이 신비의 별장에 있는 유명한 연작 벽화는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의식을 연출한 것으로 장면과 장면은 그림 속 기둥에 의해 구분되어 있는데 워낙 기둥이 교묘하게 그려져 있어 현실 공간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야기에 속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초의 트롱프뢰유로 볼 수 있는 사례는 기원전 7세기 에트루리아(이탈리아)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자유(grisaile) 기법은 착시 효과를 내는 뛰어난 기법이다. 이는 채도가 낮은 한 가지 색의 농담(濃淡)과 명암만으로 조각 같은 입체감을 내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면서도 예를 갖추어 표현해야 하는 종교적 인물을 묘사하기에 특히 적합했다. 얀 반 에이크는 석상처럼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는 그리자유 기법에 더해 벽감(壁龕) 같은 구조물을 흉내낸 그림을 더해 입체감을 끌어올렸다.


착시 효과의 대가로 빼놓을 수 없는 화가가 미켈란젤로이다. 그가 뛰어난 천장화(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비결은 시점(視點)을 하나로 두지 않고 연속적인 다수의 소실점(消失點)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감상자는 착시 효과를 사방에서 받음으로써 그림 속 장면들에 둘러싸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존 드 안드레아의 ‘마그다(Magda)’는 주목할 만하다. 실물 크기로 실제 사람과 비슷한 그의 작품은 이상적 인체 비례에 관한 법칙과 상관 없이 모델에 따라 인체 비율이 달라진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이미지에 전적으로 휘둘리는 사회 속에서 사진의 거짓된 면이 진실의 근거가 되어버렸음을 지적하는 한편 촛불을 극사실주의적 방식으로 묘사해 바니타스(vanitas; 세속적인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유리잔, 거울, 촛불, 깃털 등을 그리는 것) 장르를 조롱하기도 했다. 르네 비르츠는 사물을 10배로 크게 그림으로써 관람객을 착각의 함정에 걸려 들게 하면서도 그 사실을 곧바로 알려주는 기법을 썼다.


스티커, 포스터, 스텐실, 도자기 등을 이용한 새로운 거리 미술을 주목하게 된다. 이는 그래피티에 비해 회화적인 성격은 크고 그래픽적인 성격은 덜해 때로는 거대한 트롱프뢰유를 연출했다. 독일 화가 에드(1968 - )가 뮐러가 대표적이다. 카예타노 페러(1981 - )는 단순한 형태의 사물을 그것이 전시된 장소나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이상 ‘눈을 속이다’)


대상의 모습을 변형시켜 묘사하는 왜상(歪象) 화법은 그림 실력을 보여주는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와 권력을 풍자하는 이상적인 수법이기도 했다. 에르하르트 쇤이 대표적이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代謝)들’은 바니타스의 의미를 띤다. 이 그림은 여러 저자들에 의해 언급된 유명한 그림이다. 유명한 윌리엄 힐의 ‘아내와 장모’는 심리 테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다.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 마녀처럼 보이는 노파의 이미지를 교묘히 병치시킨 이 그림은 두 형태를 동시에 지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래 들여다 보면 그림이 저절로 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이는 시각 현상이란 원래 기만적이라는 사실과 관계된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림을 이용한 착시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합리적인 현실을 초월하고 전복시키는 세계,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전능함을 격찬하는 이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는 살바도르 달리였다.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저자는 초현실주의 그림을 해독하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을 따라가 보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정신분석의 자유연상을 생각해보게 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언어, 자유연상을 강조했다. 자유연상은 환자로 하여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 감정, 바람, 감각, 이미지, 기억 등을 자유롭게 표현하게 하는 정신분석 기법이다.(이상 ‘의미를 부여하다’)


미국의 사진 작가 신디 셔먼(1954 - )은 스스로 사진 모델이 되어 살아 있는 사람을 작품에 바로 삽입하되 의상과 과도한 분장, 인공 보철구, 조악(粗惡)한 보석 등을 이용해 생명이 없는 마네킹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보는 사람이 곧 알아차릴 수 있는 인위적인 속임수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여성의 미를 숭배하는 고상한 예술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한 것이다. 조각가이자 사진작가인 에반 페니(1953 - )는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속임 효과를 가진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는 실물과의 유사성을 추구하는 미술의 전통과 우리가 인간의 형체를 지각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마크 젠킨스(1970 - )는 거리의 미술가이다. 그는 공공장소에 엉뚱하면서도 시적인 방식의 작품을 남김으로써 타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인물들의 모습을 연출했다. 그의 설치 작품은 “새로운 형태의 트롱프뢰유라 할 수 있다.“(113 페이지) 일본의 미술가 기미코 요시다(Kimiko Yoshida: 1963 - )는 사진 자화상을 정체성을 숨기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는 이런 작업을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사라지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란 말로 요약했다. 이는 라캉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이상 ’형체를 만들다‘)


조르주 쇠라의 분할화법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유명하다. 그랑자트란 커다란 잔(盞)을 의미한다, 섬이 잔 모양이기 때문이다. 물감을 혼합하지 않고(분할해서) 원색의 점을 캔버스에 찍어 그린 이 작품은 제작에 1년이 걸렸다고 한다. 쇠라는 결이 있는 캔버스 표면에 순색의 작은 섬을 수없이 찍는 방식으로 그림의 각 부분을 표현함으로써 멀리서 봤을 때 서로 다른 색의 빛들이 섞여 원하는 색깔이 나타나게 했다. 색깔은 팔레트가 아닌 그림을 보는 사람의 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124 페이지)


척 클로스(1940 - )는 40년 넘게 사진에 담긴 얼굴만을 그렸다. 현실과 현실의 재현 사이의 간극(間隙)을 탐구해온 것이다. 재현은 결국 가공된 이미지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조르주 루스(1947 - )는 르네상스 대가들의 눈 속임 그림과는 반대로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그림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야요이 쿠사마(1929 - )는 감상자에게 작가 자신의 환각을 엿보고 체험하게 하는 작품들을 남겼다.(이상 ’시각을 탐구하다‘)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폭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우리가 정해놓은 사물의 이름은 꼭 그것일 필요는 없으며 더 적합한 이름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마그리트에게 있어서 미술은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실적인 재현의 외관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가시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158 페이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판화 속 풍경은 원근법의 법칙을 정확히 따른 것처럼 보이며 오로지 규칙에만 집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풍경임을 알 수 있다.(164 페이지) 호안 폰트쿠베르타(1955 - )의 작품에서 사진은 세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세상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166 페이지)


마우리치오 카텔란(1960 - )은 착시 현상을 무례함과 불복종의 도구로 활용한다. 그의 작품들은 모든 형태의 권력과 제도화, 신성화를 조롱하는 새로운 형식의 바니타스라 할 수 있다.(이상 ’현실을 초월하다‘) ’착각을 부르는 미술관‘은 착각을 부르는 여러 기법들을 일람(一覽)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작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타 작가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기법을 고안해내는 데 상당한 노고와 철학적 마인드가 필요했으리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저자의 의도가 닿지 않아서이겠지만 현실과 환상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복되는 바이지만 기원 전 7세기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무덤에서 발견된 트롱프뢰유 기법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그림과 문화 유물 등이 전시된 곳(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양가감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효과적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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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이상현 지음 / 효형출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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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의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에 따라 정의되는 건축의 의미를 천착한 책이다. 이는 일방적이지 않은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 주목했다는 의미이다. 저자에 의하면 길들이기는 양방향적이다. 사람이 집을 자신에 맞게 길들이는 것은 집에 길들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에 인용되었듯 처칠은 "우리는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는 말을 했다. 처칠의 이 말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뒷받침한다.


저자는 건축을 필요에 따라 자연과 인간의 머무름과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건축은 쉽게 바꿀(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은 건축에 의해 길들여지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인간에 대한 사회적 이념이 건축적 선택의 기준이 될 때 건축은 인간의 불평등을 구현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된다.(36페이지)


그렇기에 길들이는 우리와 길들여지는 우리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백화점 명품관의 경우 빚어내는 것은 부유한 사람들이고 길들여지는 것은 구매력이 없는 사람들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들이다. 저자의 책은 길들이기에 봉사하는 건축(1부)과 인간을 길드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축(2부)에 대해 논한 책이다. 변화를 유연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건축은 사람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건물과 도시, 즉 공간을 조작하는 기술이다.(45페이지) 길들이기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 중에서 어느 일부만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가능해진다.(46페이지) 길들이기는 서원과 향교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조선의 교육기관이었던 서원과 향교는 선배 유학자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 곳이다.(64페이지)


서원과 향교의 출입문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영혼이 다니는 길로 나뉜다. 건축은 공간을 조작해 사람을 길들인다. 그것은 다른 문화나 예절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67페이지) 양반집과 서원, 향교는 공간 구조와 건물 형태로 행동을 통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효과적인 도구였다. 궁궐은 가장 대표적이다.(69페이지)


경복궁은 배산임수에 따라 뒤에 삼각산을 두고 앞에 남산과 인왕산을 두었다.(남산은 안산, 인왕산은 조산. 안산案山은 가까이에 있는 작은 산, 조산朝山은 그보다 큰 산.) 그런데 경복궁이 뒤로 삼각산을 두고 앞으로는 남산과 관악산을 두었다는 표현보다 경복궁이 삼각산을 등지고 남산과 관악산을 보는 곳에 들어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지 않나 싶다.


물은 멀리 보이는 한강을 큰 물로 삼았는데 작은 물이 없어 청계천을 파 작은 물을 만들었다.(70페이지) 궁궐도 두 영역으로 나뉜다. 왕과 왕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들며 궐내에 기거하는 사람들의 영역, 궐내에 기거하지 않으면서 궐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영역(궐내각사闕內各司)이다. 수정전은 대표적인 궐내각사이다. 임금이 자신을 알현하러 온 신하를 맞는 장소는 근정전과 사정전 뿐이다.


그래서 근정전과 사정전으로 가는 길에는 임금의 권위를 드러내고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장치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73 페이지) 임금이라 해서 근정전에 항상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74 페이지) 임금보다 더 높은 사람(가령 중국의 황제)이 나타나면 임금도 신하들처럼 근정전 바깥에서 그를 받들어야 했다.(74 페이지) 물론 중국의 황제가 아닌 그의 궐패(闕牌; 임금을 상징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 패) 가지고 온 사람이다. 신하들이 길들여졌다는 것은 거기에 치밀하고 구체적인 의도가 깃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티브이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전각 사이의 골목을 지나 때로 나지막한 통문이나 작은 협문을 지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 오히려 고증을 제법 잘 한 것이라 말한다.(91 페이지)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푸코가 언급햐 원형감옥 생각을 할 법하다. 길들이는 것은 원형감옥만이 아니라 우리의 건물 그 중에서도 궁궐도 그런 의도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양반집과 궁궐은 모두 신분 질서를 길들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98 페이지)


물론 길들인다고 하기보다 각인시킨다고 하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신분 질서가 아주 명확하게 반영된 도시다.(98 페이지) 수선(首善)은 한양의 별칭이다. 이는 국가적 예의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도시에서는 유교적 신분 질서를 강제하는 어떤 장치도 눈에 띄지 않는다.(107 페이지) 물론 오늘날의 도시도 사람을 길들인다. 현대 도시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잣대는 동선의 효율성이다.(108 페이지)


동선의 효율성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생활을 하기 위해 움직이는 양의 총합이 가장 적은 공간을 의미한다.(물론 동선의 효율성이 도시 공간 구조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것 말고 정량화해서 누구라고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240, 241 페이지)

현대인들은 경제적 능력 유무로 나뉘는 공간의 위계적 구조에 길들여지고 있다.(113 페이지) 수도를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길들이는 집단과 길들여지는 집단이 달라진다.(115 페이지) 양반집은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를 구분하는 것으로, 향교나 서원은 계단을 통해서, 궁궐은 임금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에서 길들이기가 시도된다.(123 페이지)


서원과 향교에는 두 개의 주요 공간이 있다.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다. 이 가운데 우월한 공간은 대성전이다. (132 페이지) 경복궁의 경우 근정전 앞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 중 동서행각에 여느 행각과 형태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루를 설치해 근정전 앞마당의 우월함을 강조하도록 했다.


이것들은 모두 신분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예들이다. 경복궁에서 가장 눈에 띄는 루는 경회루이다.(137 페이지) 길들임의 의도를 가진 건축에서 거리를 조작할 때는 물리적으로 실제 접근이 가능한 거리에서 심리적 거리만 멀게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138, 139 페이지) 건축에서 심리적 거리를 조작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 접근성을 통제해 심리적 거리를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영역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건축에서는 시선의 방향과 이동 방향, 좌우와 동서남북을 이용해 우월을 정한다.(146 페이지) 오른쪽보다 왼쪽이 대체로 우월하게 여겨진다. 경복궁의 경우 왕이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세자의 공간을 두고 오른쪽에 신하의 공간을 둔다. 세자의 공간은 동궁이고 신하들의 공간은 궐내각사이다.(146 페이지) 왕은 항상 남쪽을 면하도록 자리를 잡는다. 동양의 예법에서 왕은 남면(南面)하고 신하는 북배(北背)하게 되어 있다.(146, 147 페이지)


건축으로 길들이지 않기(2부)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건축을 길들이기의 도구로 사용해온 한편 그 의도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왔다는 말을 더한다. 저자는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특별한 구조를 언급한다. 이 홀은 형태적으로 대칭이나 주조를 피했다.


주조는 매스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중앙부에 가장 크고 높고 묵직해 보이는 부분을 만들어서 이것을 중심으로 좌우의 시각적 무게를 비슷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조는 대칭 효과를 통해 균형과 안정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시각적 초점을 형성하면서 주조가 다른 자리보다 중요한 위치임을 즉 우월한 위치임을 나타낸다.(208 페이지)


형태적으로 대칭이나 주조를 피했다는 것은 대칭이나 주조를 사용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의도적으로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더 나아가 아주 낮은 기단을 사용해 대칭이나 주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더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대칭이나 주조가 가져다주는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를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공연장 내부로 통하는 여러 개의 출입구를 분산 배치했다. 그럼으로써 당연히 여러 개의 작은 로비가 만들어져 함께 분산 배치되었다. 심지어 내부 객석까지도 여러 개의 구역으로 분산 배치하고 이들 구역 간의 물리적 이동이나 시각적 소통을 제한하기까지 한다.


많은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공연에 집중하는 동안 가능하면 사람들과의 부딪힘을 최소화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몰려 있음에도 번잡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이런 지향성은 공연 감상에 있어서 최고의 질을 제공하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201 페이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의 설계자는 한스 샤로운(Hans Bernhard Scharoun; 1893 - 1972)이다. 한스 샤로운이 설계한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주조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기단(基壇; 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가 되는 단)도 없고, 수평성을 강조하는 도구 즉 열주랑(列柱廊: stoa)도 없다.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이렇게 설계한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쓰인 건축에서 이런 장치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연장을 나치 때의 불괘한 기억이 떠오르는 형태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샤로운은 출입구와 로비를 분산시키고 객석을 여러 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누었고, 공연장 안에서는 다른 구역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는데 이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질서 정연하게 한곳을 바라보는 공간 구조가 나치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되살린다고 판단한 결과이다.(21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이는 한스 샤로운이 나치식의 길들임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역시 또 다른 길들이기의 시작이라 말한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를 부정하는 길들이기라는 것이다.(212 페이지) 저자는 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사회에서 권위주의와 전체주의가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해 우리사회에서 지극히 필요한 체제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 때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길들이기의 도구였다고 비판받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저자의 견해에 반대한다. 사람들이 전체주의와 권위주의를 원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도 의도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치는 이전 시대의 건축물들이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선전을 위한 건축을 구체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체제에 길들이기 위해 건축물을 지은 것이다. 즉 적극적 의도를 가진 것이다. 반면 한스 샤로운은 나치식의 길들이기가 싫어 그들이 실현시킨 건축 양식을 거부한 것이다. 즉 소극적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두 경우를 같은 차원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길들이기에 초점을 맞춘 결과 길들이기와 새로운 길들이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거론한 사례들 가운데 크게 관심을 끄는 것은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우리가 공기처럼 숨쉬는 자본주의에 대한 멀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시대는 예법의 나라이다. 저자는 수도를 옮겨서 길들여짐을 깨운다는 글을 통해 수원 화성(華城)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정조의 화성 건설은 천도(遷都)에 버금가는 시도였다. 정조가 화성을 짓기로 한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 참배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정조는 화성 내에 대규모 상업시설과 군사시설을 설치했다.


정조는 화성으로의 인구 유입 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개혁을 하고자 했다. 저자는 정조의 화성 건설을 한양을 중심으로 길들여진 세력 관계에 변화를 주려고 했다.(261 페이지) 다른 자료를 더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이렇듯 길들여진 세력 관계에 변화를 주고자 시도한 임금이 정조 말고 또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대중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습관이나 관습에는 주술적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279 페이지) 이 말에 이어지는 말은 건축가는 길들이기를 위해서만 봉사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건축은 길들여진 상태를 흔드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건축은 다른 예술보다 더 강력한 방식으로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289 페이지) 건축이 사람을 길들일 수 있고 새로운 가치를 길들임(주입시킴으로써라고 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말이 불편하면 새로운 가치를 ‘스미게 함으로써‘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으로써 기존의 가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의 책을 읽고 나니 건축과 철학 박사 학위를 가진 브랑코 미트로비치의 ’건축을 위한 철학‘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저자의 논지는 길들이기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하나의 모범 사례로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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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함께 춤을
이동용 지음 / 이파르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니체와 함께 춤을’은 이동용 교수가 니체가 28세에 쓴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해설한 책이다. 530여 페이지의 압도적 분량이 눈길을 끄는 해설서이고 ‘비극의 탄생’을 상세하게 반복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비극의 탄생’은 쉽지 않은 책이다.“, ”니체의 전집 중 가장 논리적인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9 페이지) ‘니체와 함께 춤을’이란 제목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에서 연유했다.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제발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의 다리도 들어올려라. 그대들 멋지게 춤을 추는 자들이여,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다!”(문예출판사 출간 황문수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96 페이지)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인들에 관한 니체 자신만의 생각을 서술한 책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3 페이지) 니체는 쇼펜하우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처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했을 때 음울한 정령을 경험했다.


이 책으로부터 니체가 접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이다. 물론 니체는 염세주의에서 더 나아가 허무주의를 정초(定礎)했다. “니체에게는 이제 오직 인생, 오직 삶, 오직 이 땅 뿐이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지금과 여기일 뿐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95 페이지) 이것이 허무주의이다. 허무주의란 이 곳, 이 세상 외의 곳은 없다는 개념을 담은 주장이다. 우리를 규정하는 신을 죽이고 인간에 대해 희망을 갖자는 메시지를 담은 주장이다.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은 인간애를 의미한다. 얼핏 허무주의란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고자 했다면 니체는 삶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집착하고자 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84 페이지) 허무주의 철학은 “신은 죽었다.“로 대변된다. 니체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 몰입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93 페이지) 어떻든 이처럼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비극이란 개념이다. 비극이 탄생했다고 하니 슬프고 허무한 일, 나쁜 일이 생긴 것이 생겼다고 생각할 법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다르다.


그가 말한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이중성에 의해 생겨나는 바람직하고 유용한 것이다. 니체는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아카넷 출간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 47 페이지) 비극은 허무를 견디고 삶을 계속하게 하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에우리피데스를 사주(?使嗾)해 비극을 단번에 흔적도 없이 몰락시켰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논리에 집착해 비극을 죽인 인물, 이 세상을 무의미하고 헛된 그림자로 간주하고 이념계에 불과한 이데아를 염원하는 염세주의 철학자로 보았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자체를 음악이라 선언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54 페이지) 아폴론이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이라면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酒神)이다. 언어가 아폴론적인 영역에 속한다면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영역에 속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180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평안과 평온을 가져다 주는 것 즉 모든 것을 설명해줌으로써 만족하게 해준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말로 형용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1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의 원칙을 미화해내는 힘(‘니체와 함께 춤을’ 368 페이지)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근원적 일자(一者)와 관련된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3 페이지)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이고, 그 음악을 모태로 한 비극이고, 황홀경에서 쏟아내는 무아지경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고, 신비로운 어스름한 빛 속에서 탄생하는 환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97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현상적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본질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69 페이지) 니체 철학이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조각가의 예술이 아폴론적인 예술이라면 비조형적 예술인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99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빛/ 조형(造形)/ 개인/ 꿈을 의미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어둠/ 파괴/ 망아(忘我)/ 도취를 의미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121, 123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그 둘이 모여 하나가 될 때 비극이 탄생한다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71 페이지)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도덕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주체로 보았다. 니체는 순수하게 심미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76 페이지)


니체는 ‘도덕은 삶을 부정하는 의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태양신인 아폴론은 시(詩)의 신이고 조형력의 신이고 예언하는 신이기도 한데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꿈과 연결시킨다. 니체가 말하는 꿈은 창작을 위한 정신적 활동 중 하나이다.(니체가 말하는 꿈은 허무맹랑한 것 즉 공상 같은 것이 아니다.) 이건지 저건지 알 수 없는 흐릿한 형상은 아폴론적인 것과 상관이 없다.(‘니체와 함께 춤을’ 117 페이지) 꿈은 아름다운 가상(假想)이다. 적절한 한계 설정에 의해서만 가능한 지혜로운 평정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창조를 위한 아름다운 가상을 보게 해줌으로써 모든 인간을 완전한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버린다.(‘니체와 함께 춤을’ 127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이 개별화의 원리에 의한 자기인식이라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자기 포기를 통한 새로운 개체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09 페이지)


디오니소스가 삶에 대한 고통으로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면 아폴론은 그에 대한 치유의 손길을 뻗쳐준다. 그러다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생겨난 개별적인 인간이 자신의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디오니소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34 페이지) 니체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지적하자. 니체는 신을 죽인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정당화하는 신을 찾았다.


또한 음악이 없다면 인생은 하나의 오류(‘우상의 황혼’ 참고)라 말했는데 이는 삶을 견디게 하고 허무감을 이기게 하는 비극으로서의 음악을 말한다. 아폴론적인 가상은 삶을 계속해서 살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삶으로서 유혹이 넘치는 가상인데 이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지혜가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157 페이지) 플라톤이 건강한 국가를 위해 비극을 거부했다면 니체는 건강한 인생을 위해 비극을 필요로 했다.(‘니체와 함께 춤을’ 157 페이지)


니체는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일 뿐이고 합창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183 페이지) 비극에서 관객은 그 자체가 비극을 이루는 구성요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84 페이지) 비극은 형이상학적 위안을 준다. 니체도 형이상학을 인정했다. 다만 삶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렇다.(‘니체와 함께 춤을’ 193 페이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서로 필요로 하는 힘이다. 아폴론적인 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서정시로 말을 하게 했다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노래를 하게 한다.


황홀경의 소리는 이성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적 지혜는 끔찍하다. 현실에 대한 구토증을 이끌기 때문이다. 의지는 위기에 봉착한다. 이때 다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폴론적인 힘이다. 디오니소스적 도취자는 자신의 변신을 통해 자기 밖에서 새로운 환영을 자신의 현 상태의 아폴론적 환상으로 보게 된다.(‘니체와 함께 춤을’ 212 페이지)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이라는 흥미로운 구도가 있다.


괴테는 거인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언급했다. 1) 괴로워할 줄 알고, 2) 울 줄 알고, 3) 즐길 줄 알고, 4) 기뻐할 줄 알고, 5) 신의 종족을 존경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136 페이지) 니체는 신을 죽이고 인간을 살리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던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43 페이지) ”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거인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거인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의 지혜는 영원한 고통의 대가로 획득했다. 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무엇인가 얻고자 하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도 신을 죽이려면 얼마나 큰 고통을 치러야 할까?“(‘니체와 함께 춤을’ 243 페이지)


프로메테우스나 오이디푸스를 포함한 그리스 무대의 유명한 인물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공 디오니소스가 가장(假裝)한 인물들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257 페이지)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부활만을 희망으로 보았다. 그런데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죽었다.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는 서사시의 연극화를 해답으로 발견했다. 서사시는 사물과 사실을 관조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서사시인은 사물과 일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설명하는 데 주력할 뿐이다.


묘사된 사건의 내용과는 어떤 내면적 관계도 요구되지 않는 그런 소크라테스적 경향을 받아들인 예술을 니체는 아폴론적인 예술영역이라 칭했다. 그런데 이는 니체가 비극의 두 가지 충동으로 설명했던 아폴론적인 것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짝짓기되지 않은 아폴론적인 것을 말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297 페이지) 저자는 디오니소스적 음악의 세계를 이해해야 니체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디오니소스 무대에서의 진정한 배우는 무감각한 냉담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니체와 함께 춤을’ 312 페이지)


에우리피데스의 연극은 아폴론적 요소 위에서만 세워졌다. 니체가 비판하는 핵심은 이 부분이다. 비극의 종말과 함께 그리스인은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고 이상적 과거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이상적 미래에 대한 믿음까지도 포기했다. 이성의 시대가 펼쳐짐으로써 신화시대도 끝장이 났다.(‘니체와 함께 춤을’ 317 페이지) 소크라테스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런 그와 함께 이성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꿈과 도취 상채가 교묘히 오가는 상황은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이성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니체와 함께 춤을’ 319 페이지) 이런 상황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부도덕한 것이 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 또는 플라톤에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인들은 거짓말을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니체는 미학적 소크라테스주의가 비극을 죽인 살인의 원칙이라 단호하게 평했다.


저자는 정치적으로는 소크라테스를 아제비 재판을 통해 독배를 마시게 함으로써 민주주의자들이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마신(魔神)이 이겼고 이 싸움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설명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329 페이지) 소크라테스의 정신 속에서는 너 자신만을 알라는 명령어가 시사하듯 ‘너‘로만 가득차 있다. 거기에 ’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비극적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음악이 전하는 형이상학적 위로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사람,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해야 알아듣는 전형적인 이론적 인간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87, 388 페이지)


소크라테스는 낙천주의자다. 알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인간은 사물의 근거를 천착하고 가상과 오류에서 진정한 인식을 분리해내는 일을 한다. ‘오직 이성’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세상을 경직되게 한다. 소크라테스적 경향은 우리 눈에 지금 보이는 것을 그림자로 파악했다. 만족하지 못했기에 이상향을 그리워한 것이다. 이데아만이 진정한 세계라고 믿으면서 만족할 줄 모르는 낙천주의적 인식은 먼 곳만을 바라본다.(‘니체와 함께 춤을’ 363, 364 페이지)


음악에서 비극 예술이 탄생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의 힘에서 발견된다. 진정한 음악의 정신은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에 도달하게 해준다. 음악은 개체를 파멸시키지만 또 다른 세계로의 영입을 가능하게 해준다.(‘니체와 함께 춤을’ 374 페이지) 진정한 자유는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자유가 주어진다.(‘니체와 함께 춤을’ 377 페이지)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허무주의 철학의 근본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382 페이지) 믿고 따라온 논리의 결과 앞에서 파멸을 예감하는 이론적 인간의 위기, 그것이 현대의 위기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07 페이지) 모든 것을 알려고만 하는 충동이 현대인을 위기로 몰고 있다. 모르면 불안하다. 니체는 오페라의 등장을 소크라테스적 문화의 산물로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419 페이지) 니체가 염원한 것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재탄생이었다.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건강을 위협할 정도의 끔찍한 진리를 깨닫게 했다면 이제는 아폴론적인 충동이 건강회복의 마법을 보여준다. 물론 아폴론적인 것이 확고해지면 해질수록 권태와 구토증으로 또다시 위기기 초래되는데 이때 다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구원의 힘으로 작용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459 페이지) 타당한지 자신할 수 없지만 나는 쉬운 길과 고전이 아닌 다이제스트, 묵직한 진실이 아닌 즐거운 것만 찾는 시대는 비극이 사라지고, 고통이 외면받는 시대의 새로운 버전이란 생각을 한다.


전대호가 ‘철학은 뿔이다’에서 분류한 존재파와 주체파의 대립(?)이 생각난다. 물론 이 대립은 비극과 이론의 대립과 무관하다. 전대호는 존재파는 주로 자연의 광활함 앞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고 주체파는 시장의 난장판에서 철학의 동기를 얻는 사람이라 말한다. 니체는 비극이 사라진 시대의 음악이 아폴론적 내용을 근본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묘사수단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니체와 함께 춤을’ 459 페이지)


진정한 예술가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완벽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뤄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둘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472 페이지) 플라톤은 사람을 약하게 한다고 비극을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혼탁한 감정은 카타르시스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화된다고 보았다.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해석을 따랐다.(‘니체와 함께 춤을’ 483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최초로 연구한 사람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491 페이지) 그러나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비극을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01 페이지) 비극적 신화는 오로지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아폴론적 예술 수단을 통해 형상화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니체와 함께 춤을’ 486 페이지) 에우리피데스 이후 사라진 비극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마치 그것이 비극인 양 여겨지는 것이 문제이다.


저자는 말로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 애호가들로 넘치는 시대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니체는 고통을 극복하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가상, 새로운 미화의 가상, 희망, 이런 것이 삶을 삶 속에 붙잡아두게 해준다. 희망을 가지는 것도 능력이다. 그 희망의 힘을 전하는 것도 능력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23 페이지) ”인간은 환상이 필요하다. 이 세상 이 대지를 위한 환상이어야 한다. 지금과 여기를 버리고 내세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세를 버리고 끔찍하기 짝이 없는 지금과 여기의 실존을 받아들이는 환상이다.“(‘니체와 함께 춤을’ 524 페이지)


아폴론적인 힘은 세상의 더러운 꼴들을 아름다운 베일로 덮어주고 그것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니체와 디오니소스는 니체와 차라투스트라처럼 둘이면서 하나이다. 디오니소스는 미학적 차원에서 거론되는 개념이고 차라투스트라는 도덕의 이름에서 등장한다.(‘니체와 함께 춤을’ 529 페이지) 디시 한번 말하는 바이지만 니체 특히 ‘비극의 탄생’은 환희와 고통, 비탄과 감동이 뒤범벅된 채 전전반측하듯 씨름하듯 읽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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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100% 활용법
요한 이데마 지음, 손희경 옮김 / 아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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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100% 활용법의 저자 요한 이데마의 다음의 글이 주의를 끈다. 교향곡 감상은 40, 영화 관람은 두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미술관에서는 미술작품과 얼마나 시간을 보낼지 당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문화유산 해설 공부를 함께 하는 공대(工大) 출신의 한 선배는 자신이 받았던 공대 수업과 너무 다르게 문화유산 해설은 창의적이고 자유롭다는 말을 했다. 맞지만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문화유산 해설 수업이 무조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우리가 지금 받는 수업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그 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어떻든 나는 요한 이데마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선사 시대 사람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린 이유를 추론하는 글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들이 동굴에 벽화를 그린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 미술을 위한 미술 즉 즐기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 2) 영적 차원이라는 것, 3) 기후 변화로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 등이다.


나는 이 가운데 1번을 지지하고 2번이라도 괜찮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미술관을 찾아 미술 작품을 즐기고 미술 책을 열람하지만 때로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이다. 즉 원시인들도 미술을 즐겼는데 미술 작품과 관련 책들을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 양가감정과 통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미술과의 만남은 기대한 것처럼 언제나 잘 되지는 않는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인용하며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흥미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권태감을 드러낸다는 말을 던진다.


미술관 100% 활용법은 미술관 방문을 뜻깊은 기억으로 바꾸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어쩌면 내가 미술관에서 양가감정을 느끼곤 하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거나 그것에 감동받음으로써 미술과 개인적인 연결고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기대가 좌절로 변한 것이 누적되다 보면 새 기대를 갖는 한편 축적된 기억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불편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미술관 다리(museum legs)는 미술관에서 가만히 서 있는 사이사이 오랫동안 천천히 걸은 후 생기는 다리의 통증을 말한다. 어제 나는 조선왕릉 다리(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legs)를 겪었다. 선정릉에서. 성종의 무덤에서 정현왕후의 무덤으로, 다시 중종의 무덤으로 순례를 했는데 드넓은 공간 때문이기보다 불규칙적인 걷기와, 생각을 하며 오래 서 있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주 겪어야 할 일...


저자는 미술은 굉장한 자극이라서 회복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최고의 풍경화는 멜랑콜리, 자부심 또는 노스탤지어 같은 정제된 감정을 전달하고 그런 감정들이 반대로 삶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 있으니 그저 풍경을 즐기는 데 그치지 말고 그 풍경에 당신의 내면에 불꽃을 일으키는 감정을 느껴보도록 하라는 말을 한다. 이는 미술은 벽에 걸려 있는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과 만날 때에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말과 들어맞는다.


반 고흐는 액자 없는 그림은 영혼 없는 육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전하며 저자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당신은 미술관 전체를 당신의 경험을 틀짓는 액자로서 여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미술은 정의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태를 굳이 애매하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셈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의 옳은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미술을 정의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술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약간의 맥락과 올바른 마음가짐이라 말한다. 저자는 미술관이 다른 어떤 곳보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데 열린 마음을 갖게 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명작을 발견하고 나면 꼬리표 따위는 잊어버리고 미술을 즐기라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아이들은 미술관에 따라다니기 마련인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태도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독제이다.


저자는 효과적인 설명에 대해 거론한다. 이는 간결하고 특징적이며 당신이 미술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53 페이지) 저자는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촉감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말을 인용하며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미술관 세계에서 어떻게 직접 선을 대볼 수 있는지 가르쳐준다. (만질 수 있는지) 물어보라는 것이다. 일부 미술관은 만질 수 있거나 원래 만지게 되어 있는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은 무엇일까? 비관론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미술관은 미술의 묘지라는 말이 그것이다. 저자는 미술관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확장하거나 재고하라고 말한다. 이는 미술관의 의미를 찾는 내 상황에 잘 맞는다. 저자는 갤러리 가이드를 만나라고 말한다. 그들은 놀라운 배경 지식을 가진 존재들이다. 다만 우리가 편한 마음으로 나름의 의미를 구축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가이드들이 필요하다.(75 페이지) 이는 문화유산 해설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저자는 속도를 늦춰달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술가들이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려 만든 작품을 너무 빨리 지나친다.(평균 9. 모나리자의 경우 평균 15.) 저자는 미술관을 체크리스트라 생각하지 말고 메뉴라 생각하라고 말한다. 모든 작품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미술작품은 존재하지 않기에 탐구하고 자신과 연결짓는 것이다.


효과적인 가이드들은 사려 깊고 도전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의견을 전한다.(88 페이지) 어느 유명 정치인이 이 드로잉을 아주 좋아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비디오가 우리 개개인의 일상에서 겪는 싸움에 관해 무엇을 가르쳐줄까?...한편 관람객으로서 가이드 투어에 기여하려면 무엇보다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질문하기를 두려워 하지 말고 특히 같이 간 사람들이 묻기 무서워 하는 것들을 질문하라....


날카롭고 예상치 못한 질문은 가이드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할 수 있으며 재치와 독창성 있는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89 페이지) 미술관 관람객의 다섯 유형이 흥미를 끈다. 1) 경험 추구형, 2) 조력자형, 3) 재충전형, 4) 전문가형, 5) 탐험가형... 나는 탐험가형이다. 특정 전시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일반적으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를 바라는 유형이다. 그들은 자기 의견이 확고하며 스스로의 방식을 찾는 데 익숙하다.(102 페이지)


더 읽을거리로 제시된 책들은 대개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들이 아니다. 몇 권의 책이 눈에 띄는데 나에게는 미리엄 엘리아의 우리는 갤러리에 간다가 마음에 든다. 부모와 아이들이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기 쉽도록 통속 소설에 버금갈 만큼 재미 있고 다채로운 책을 쓴 저자이다. 미술관 100% 활용법은 미술을 보는 눈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책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과 안목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하는 책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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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6-11-0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관 다리는 느껴봤지만 조선왕릉 다리를 아직 느껴보지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 부끄럽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벤투의스케치북 2016-11-0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반갑습니다. 조선왕릉도 시간나면 한 번 가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