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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일들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우연과 운명은 바로 이러한 책들의 혼란 속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낸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서정적이고 사려 깊은 좌파 지식인이었던 벤야민의 말이다.(‘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 31 페이지) 그간 책을 가능한 한 통독(通讀)해 왔지만 계속 그렇게 하는 것은 참 어렵고 비효율적인 일이라 생각하는 즈음에 한문학자 정민 교수의 말을 만났다.

같은 책도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 있고, 그냥 한번 보고 지나가야 할 책이 있고, 목차만 봐도 대개 알 만한 책이 있고, 한두 장만 읽어보면 더 볼 것도 없는 책이 있는데 왜 천편일률적인 독서를 하느냐는 것이다.(’궁극의 인문학‘ 314 페이지) 벤야민이 말한 혼란은 기억의 혼란을 말하는데 나는 그것을 정민 교수가 말한 유연한 읽기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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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집 - 종묘, 경복궁, 자금성, 파르테논 신전 새롭게 보기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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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구본준 건축 담당 기자의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은 종묘, 경복궁, 자금성, 파르테논 신전 등 인류의 손꼽히는 건축 문화유산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이다. 인류는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로 종교 건축물과 궁궐 등을 지어왔는데 제목에 나오는 큰 집이란 높거나 긴 건축물들을 의미한다. 저자는 높이가 아닌 길이로 사람을 압도하는 건물로 종묘(宗廟)를 든다. 종묘는 처음부터 길었던 건물이 아니라 차츰 늘어난 경우이다.


물론 조선 왕조의 소멸과 함께 종묘의 확장도 멈추었다. 종묘는 경복궁보다 먼저 지어진 건물이다. 그 만큼 조선왕조는 종묘를 중시했다. 종묘(宗廟)는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조선은 제사를 통해 국가 경영의 틀을 확립하고 국민들에게는 정체성을 부여했다. 종묘의 길이가 늘어난 이유를 알기 위해 오묘제(五廟制)를 알 필요가 있디, 오묘제(五廟制)는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원칙으로 다섯 분만 모신다는 의미가 담겼다. 다섯 위패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자리를 유지했기 때문에 불천위(不遷位)라 불렸다.


그런데 시조(始祖)는 아니지만 훌륭한 평가를 받는 임금이 늘어나면서 불천위가 늘었고 이에 따라 종묘 건물 길이가 늘어났다. 101 미터에 이르는 종묘는 우리나라 목조 건물들중 가장 긴 건축물이다. 종묘는 오른쪽(서쪽)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늘어났다. 서상(西上) 원칙 즉 서쪽을 동쪽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서쪽 즉 남면(南面)한 임금의 왼쪽으로 늘어난 것이다. 모든 나라가 최고 건축물을 처음부터 압도적으로 크고 길게, 그리고 기둥을 줄지어 세워 지었지만(열주: 列柱) 조선의 종묘는 시간과 건물이 함께 성장해나간 유일한 건축물이고 조선은 그런 건축물을 소유한 유일한 나라이다. 종묘가 위대한 이유는 크고 긴 건물이어서가 아니라 나라와 함께 건축물이 성장한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을 보며 숭고(崇古)란 말을 떠올렸다. 숭고(崇高)는 존엄함과 거룩함을 의미한다. 미학적으로 숭고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에드먼드 버크는 숭고를 위험을 바라보면서 몸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라고 표현한 반면 칸트는 우러러보며 두려워 할 대자연을 숭고로 파악했다. 주관적인 면에서 숭고는 주체가 대상에 압도당하면서도 자기를 높이는 데서 오는 쾌(快)와 불쾌(不快)의 혼합감정인 고양감(高揚感)이 드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숭고는 형이상학의 퇴조, 자연과학 또는 심리학의 득세 등으로 빛이 바랜 것이 사실이다.


최고로 신성한 건물을 만드는 방법이 길게 짓기와 높게 짓기이듯 건물을 배치해 숭고함과 위엄을 나타내는 방법도 두 가지이다. 권위를 강조하는 중심축 배치 즉 대칭구조와 부채꼴 배치이다. 전자는 한 건물을 지나면 또 다른 건물이 등장하고 다시 그 다음 건물이 등장하면서 가운데 동선을 따라 공간의 권위를 느끼게 하며 후자는 모든 건물이 시야에 펼쳐지는 부채꼴 배치로 아이맥스 같은 감동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사람의 눈이 미칠 수 있는 최대의 시각폭(eye maximum)을 의미하는 아이맥스는 일반적인 영화 스크린보다 10배 정도 큰 초대형 스크린의 영화를 지칭하지만 본래는 캐나다의 영화제작사인 아이맥스(IMAX corporation)의 필름 포맷을 말하며 이 필름 포맷을 사용해 촬영한 영화를 아이맥스 영화라 한다. 대칭구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건물들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저자는 위대한 건축은 위대한 생각을 담은 건축, 다른 건축에는 없던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추구한 건축이라 말한다.


이세 신궁(伊勢 神宮)처럼 건물을 짓는 방식을 식년천궁(式年遷宮)이라 한다. 일본의 신사 (神社) 중 하나로 미에 현 이세 시에 자리하고 있는 이세 신궁은 신성한 건물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돌로 짓지 않고 오히려 수명이 짧은 나무로 계속 바꿔 짓는 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렇게 되면 후배들이 건축 방식을 확실하게 배울 수 있다. 바로 옆에 원래 건물이 있어서 더 확실하게 똑같은 건물을 지을 수 있기도 하다. 1500년 전의 목조 기법이 확실하게 전수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최고 여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내궁과 농경의 여신인 도요우케 오카미를 모시는 외궁으로 이루어진 이세 신궁은 두 필지를 마련해 한 필지에만 건물을 짓고 20년이 지나면 헐고 비어두었던 곳에 새로 건물을 짓는 방식을 계속 취해오고 있다. 서기 260년에 시작되어 현재 건물은 62번째라고 한다.(99 페이지) 일본의 이세 신궁은 20년마다 새로 짓는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그러니 언제나 새 건물인 셈이다. 짓는 방식도 독특하다.


대니얼 부어스틴은 이세 신궁을 보고 일본의 목재 건축가들은 예술의 생애는 짧고 예술 창조자는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을 했다. 조소는 내부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건축은 내부가 있다.(조소와 건축 모두 3차원 입체 조형물이다.) 궁궐은 여러 현실적 제약을 신경쓰지 않고 최대한 크고 화려하게 지을 수 있었던 유일한 건축물이다. 신전이 신성한 것을 추구한 개념적 건축이라면 궁궐은 나라와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세속적인 건축이다.


저자는 자금성과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거대 건축물은 그런 건물을 짓는데 동원된 백성들이 치른 엄청난 희생을 간과하게 한다고 말한다. 거대 건축물은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한편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쓴 잔인함을 함께 보여주는 두 얼굴의 문화유산이다.(115 페이지) 저자는 자금성을 보는 우리로서는 그저 감탄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저 놀라운 건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저런 건축으로 주변 나라를 어떻게 놀리려 했는지를 생각해야만 자금성에 속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247 페이지)


저자는 궁궐을 권력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는 거대 시각 장치 또는 무대 장치라 말한다. 보여주기의 극단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시작되었다. 기존 파리의 루브르 궁전 대신 루이 14세는 왕실 사냥터였던 한적한 곳에 궁전을 지었다. 이것이 베르사유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거대 건축이나 토목 공사에 집착한 왕조는 거의 예외 없이 짧게 존재하다 사라졌다.(131 페이지) 경복궁도 그런 예에 속한다. 대원군은 나라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거의 신축 수준으로 경복궁 중건을 강행했고 자금이 부족하자 당백전을 발행해 국가 경제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132 페이지)


경복궁은 아주 큰 궁궐이다.(136 페이지) 경복궁을 자금성과 비교하며 너무 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경복궁이 작은 것이 아니라 자금성이 유난스럽게 큰 것이다. 사실 자금성에 주눅들지 않는 건물이 없다. 경복궁은 72만 제곱 미터의 면적을 가진 자금성의 70 퍼센트 수준인 43만 제곱 미터의 건축물로 결코 작지 않다.(140 페이지) 중국의 면적이 우리나라 면적의 40배임을 감안해보라. 경복궁은 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경복궁 외의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까지 감안하면 면적이 자금성의 두 배 가까이 된다. 사대문 안에서 궁궐들이 차지하는 면적을 보면 서울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궁궐 도시라 할 수 있다.(142 페이지) 경복궁은 자금성보다 먼저 지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의 왕들이 정궁(正宮)인 경복궁보다 이궁(離宮; 임금이 궁중 밖으로 나들이할 때 머무는 곳)인 창덕궁에서 훨씬 더 오래 머물렀다는 점이다.(146 페이지)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것도 극도로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148 페이지)


저자는 자금성의 놀라운 규모에 경외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경복궁이 왜 그렇게 큰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248 페이지) 저자는 경복궁을 덕(德)의 건축물로 부른다.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나라였고 주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었기에 억지로 특별한 효과를 추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249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옥상에 오르면 경복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훨씬 아름다운 경복궁을 볼 수 있는 것이다.(250 페이지)


경복궁은 건축적 관점으로 다시 보아야 할 곳이다. 저자는 건축은 크기나 세월로만 따질 수 없고 그 안에 담긴 문화적 가치 즉 고유한 생각이 건물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말한다.(268 페이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말이 저자의 핵심 전언이다. 저자로 인해 건축에 대해 더한 관심을 갖게 되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궁궐을 필두(筆頭)로 조선사 공부에 더욱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도 하고 싶다. 물론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갖춘 공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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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인문학 - 시대와 분야를 넘나드는 9인의 사유와 통찰
전병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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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인문학이란 말(궁극의 인문학 28 페이지)을 들으면 대화의 필요성,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오늘날 지능에서 중요한 것은 남이 못 본 것을 연결하거나 없던 것을 상상해내는 능력이란 말(30 페이지)은 독서와 생각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 나는 경복궁 단청 시연을 했다. 정전(正殿)인 근정전부터 시작해 사정전, 천추전에서 마무리하는 순서를 뒤집어 사정전, 천추전, 근정전의 순서로 했다. 소나타 형식에 맞춘 것이다. 종결주제를 가장 나중에 배치한 것이다.


뇌과학자 김대식은 인문학은 ‘왜?‘라는 질문을 하는 데에 중요성이 있음을 알게 한다. 이태수 교수의 말과 상통하는 대목이다. 인문학이란 본래 항상 근원을 캐려 드는 성향이 있는 사람이 하게 돼 있다는 말(16, 17페이지)이다. 김대식 교수는 진정한 이과(理科)는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말한다.(67 페이지) 김대식 교수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진화생물학의 토대를 깔고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71 페이지) 사회의 모든 현상을 뇌과학으로 설명하려 해서도 안된다(72 페이지)고 말한다.


김대식 교수는 반복된 생활이나 뻔한 생각들보다 새로운 경험,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87 페이지) 정보를 수동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역동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뇌 인지 능력에 좋다고 한다. 다양한 운동, 신선한 공기, 멀티 비타민, 충분한 수면, 건강한 음식, 소식 등도 중요하다. 유발 하라리는 생물학은 역사의 기초에 해당한다고 말한다.(95 페이지)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힘(지배력)을 얻는 데는 극도로 우수하지만 그 힘을 자신의 행복으로 바꾸는 데 있어서는 그 만큼 우수하지 못할 뿐더러 훨씬 능력이 떨어지기에 힘은 선조들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그들보다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96 페이지) 하라리는 인간의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상력은 인간 특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인간 불행의 씨앗이라 말한다.


기지(旣知)의 사실이다. 농업으로 인해 인류는 쌀과 같은 단일 식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영양실조, 병해충은 물론 사회적 서열화와 착취, 가부장제 등의 길을 열었다. 하라리는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개별 인간을 초월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인간 사회의 규범이나 가치체계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종교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라리는 역사에 어떤 명확한 방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118 페이지) 하라리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역사 공부가 필요한 시점이라 말한다. 하라리는 인간의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상력은 인간 특유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라리는 단순히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개별 인간을 초월하는 법칙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인간 사회의 규범이나 가치체계라고 한다면 무엇이든 종교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지기 위해 역사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 하라리의 결론이다.(122 페이지) 하라리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손아귀를 느슨하게 하고 우리 머리를 좀 더 자유롭게 사방을 둘러볼 수 있게 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더 많은 가능한 미래들을 볼 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122 페이지) 역사를 모르면 역사의 우연적인 것들을 진정한 본질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서양사학자 주경철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생각을 흔한 오해 중 하나라고 말한다. 반복된다면 예측이 가능할텐데 그렇지가 않으며 지난 경험을 아무리 잘 알아도 예측이 전혀 안된다는 것이다.(128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역사는 학교 수업이나 교과서를 통해 알아온 것이 아니라 문학(과거), 티브이 사극, 영화, 인터넷(현재) 등 가외(加外)의 것을 통해 알았다고 말한다.(135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전문 연구자들의 노력과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 양자가 모두 튼튼하고 서로 교감해야 하는데 양자 모두 부실하고 관계도 미약해 보인다고 말한다.(136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라는 건 세상에 없고 해석된 역사가 진리라 말한다. 문제는 이렇게 말하면 양자가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자료)과 상상은 배타적이지 않다. 최대한 많은 사실을 확보해야 상상이 가능해진다.(141 페이지) 주경철 교수는 역사는 해석된 기억이자 꼼꼼한 상상이라 말한다. 역사가는 예측이 아닌 해석을 한다는 것이 주경철 교수의 결론이다.(142 페이지)


김대식 교수가 진화생물학, 뇌과학 환원주의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듯 주경철 교수도 자본주의를 정의라고 보는 것도 원흉으로 보는 것 모두 문제라 말한다.(151 페이지) 인지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과학이 이성적으로 전진하는 것은 과학자 개인들이 대단히 이성적이어서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동료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하는 과정(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려면 동료 리뷰: peer review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을 통해 합리성이 발현된다고 말한다.(189 페이지) 과학자들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이론을 편애한다.


조너선 하이트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애써 사후 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190 페이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21세기는 전통적인 계층적 지식구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 지식(을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229 페이지) 빅데이터 분석가 송길영은 여성이 변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하고 권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한 것이라 말한다.(276 페이지)


한문학자 정민 교수는 글이란 보태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 경험을 이야기한다. 정민 교수는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간결성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군더더기를 빼는 것이다. 형용사와 부사를 적게 쓰라는 말이다. 정민 교수는 한 글자만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이정우 교수는 주희朱熹의 세계는 음표 하나만 빠져도 전체가 무너질 듯한 조화로운 교향악의 세계라는 말을 한 바 있다.: ‘인간의 얼굴‘ 124 페이지)


정민 교수는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절대 다 말하면 안 된다, 그러낼 듯 감춰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의미가 전달되는 글을 써라 등의 옛 말을 전한다.(300 페이지) 정민 교수는 독서에서 가장 착각하기 쉬운 것 중하나가 다독(多讀)의 개념이라 말한다. 같은 책도 여러 번 읽어야 할 책이 있고 그냥 한번 보고 지나가야 할 책이 있고 목차만 봐도 대개 알 만한 책이 있고 한두 장만 읽어보면 더 볼 것도 없는 책도 있는데 천편일률적인 독서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31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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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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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은 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실에 개입하고 싶었고 차이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저자가 비체(abject)라는 개념을 재고하면서부터 용기를 내 쓴 글이다. 어떤 규정된 오늘 상도 아님을 의미하는 비체라는 말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해 학술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개념이다. (부정어를 의미하는 a와 대상을 의미하는 object가 만난 단어인 abject.)


최근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 즉 권력관계에 의한 것이니 약육강식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물론 그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문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은 괜찮다는 투로 말하는 그의 태도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약자에 대한 폭력의 한 부분이 아닐지?


비체는 흐르고 있기에 경계없는 존재, 공포감을 주는 대상이자 더러운 존재로 여겨져왔다. 비체들은 통일된 이념을 갖지 않으며, 남성과의 경쟁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거부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전략을 수행한다.(13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비체의 해방적 잠재성에 주목해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론적 언어는 한계를 가지고 그런 한에서 잠정적일 수 밖에 없다.(15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문제는 뿌리 깊고 광범위한 여성혐오, 그리고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특정 생각이 담론화하는 방식을 문제삼는다. 저자는 게일 루빈, 뤼스 이리가레, 우에노 치즈코 등의 논의로 여성이 대상화, 타자화되는 메커니즘을 논한다.


저자는 여성혐오의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못하는) 논자들을 지적한다. 여성혐오의 구조가 강고하다는 사실을 강조할수록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 아닌가?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집단 내의 다양한 차이들을 논한다. 남성이 남성들이듯 여성 역시 여성들인 것이다. 타자 배제적인 여성적 주체가 되지 않고서 타자화/대상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관건이다. 마사 누스바움에 의하면 혐오는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혐오는 상대가 공격이나 손상을 주지 않을 때에도, 특별히 부당하게 취급되지 않은 경우에도 발생한다.


누스바움에 의하면 혐오에 대한 핵심적인 관념은 전염이다. 혐오 대상은 전염성이 있는 오염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비체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이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비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더럽다고 여겨졌던 것이며 잡힐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것이다.(3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여성들이 비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우리는 또한 여성 혐오를 벗어나는 다양한 비체화의 전략들을 가시화할 수 있다. 젠더 패러디, 가면 쓰기, 잡년 되기와 비참하게 되기, 여성성의 재전유 등은 비체 되기의 전략들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패러디를 원본의 모방이 아니라 모방의 모방으로 보았다. 젠더 정체성에는 어떤 원본도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미러링 역시 젠더들의 패러디이다. 관건은 패러디를 수행하는 비체가 기존의 지배적 남성 주체와 어떻게 다른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녀/ 창녀 구분을 넘어서는 것도 필요하다. 여성들간의 관계만으로도 충족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레스비어니즘, 성의 정상성을 이야기하는 모든 지배적인 사고에 의문을 던지는 퀴어 되기의 전략 역시 여성 혐오에 대항하는 다양한 실천들이다. 문제는 비체가 된다는 것은 혐오의 타깃이 된다는 것이다.


비체는 주체적 인식틀을 벗어나는 급진적 타자이다. 비체 혐오의 깃발은 사랑이라는 욕망의 이름표를 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양한 비체 되기 전략들은 소통이나 연대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시대를 도시화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51 페이지) 도시화는 전 지구, 전 행성 곳곳에 스며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도시적인 것, 도시적 사회 안에 살고 있다.


전지구적 도시화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의 확산을 의미한다. 저자는 도시화를 감정노동과 불가결의 것으로 보며 노동 현장에서 생산에 필요한 감정은 과도하게 요구되는 반면, 불필요한 감정은 억압되고 억제된다고 설명한다. 도시는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기보다 문화의 거점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신념, 젠더 정체성에 대한 관념들은 다양하게 얽혀 있다. 도시적인 삶은 그야말로 다양한 신념체계들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해하기 힘든 급진적 타자를 경험하는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58 페이지)


도시화는 다양한 문화의 거점화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아직 도시적 삶 속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을 피해 가는 문화와 규범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59 페이지) 도시적으로 산다는 것은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감정을 안고 산다는 것이며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감정의 격동을 안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59 페이지)


여성 비체들은 여성혐오가 지닌 혐의를 폭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여성혐오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한다.(71 페이지) 저자는 여성 비체들이 여성혐오 세력과의 완전한 동일시(미러링)로 인해 비체성이 탈각(脫殼)되는 것을 우려한다.(73 페이지) 저자는 감정적 결속만으로도 자족한다면 이들은 말을 원치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 없는 한 연대 세력은 형성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75 페이지)


저자는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의 탈경계성은 역설적으로 언어적 경계를 필요로 하며, 비일관성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상정하지 않는 변이의 과정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설득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76 페이지) 저자는 인정(認定)이 나와 타자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한 라캉의 말대로 나는 어느 정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해서 타자의 욕망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와 타자의 욕망이 어디서 결합할 수 있는가, 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모든 타자들과의 연대를 이룰 수 없음에 주의하자. 새로 부상한 비체들의 말 만들기는 기존의 페미니즘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고 혼종(混種)의 성격을 띨 수도 있으며 다양한 입장 차이로 나아갈 수도 있다.(79 페이지) 저자는 페미니즘들의 역사는 잡히지 않는 여성 비체를 주권의 사각지대에 남겨놓지 않기 위한 시도였다고 말한다.(79 페이지)


국내의 경우 여성혐오의 부상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의 경제적 위기감 및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기점으로 분석된다. 중요한 것은 여성 혐오는 남성들이 여성과 경쟁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의문은 경제적 위기로 인한 불안감은 왜 분배투쟁으로 연결되지 않고 여성혐오로 나타났는가, 이다.(84 페이지) 주목할 것은 평등주의자 퇴색하고 무한 경쟁만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불안이 난민, 이주민, 유색인, 성소수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로 투사(投射)되었다는 것이다.(84 페이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치개혁의 실패와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를 제도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의 것이자 자연적인 것으로 느끼게 하는 전략이 먹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대안적 질서를 생각하기보다 실망과 좌절, 허무와 무관심 등에 빠지거나 혐오와 같은 반동적 복고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임옥희는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는 반동, 심리적으로는 퇴행의 시대로 규정했다. 앞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피의자는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저자는 성취원리에 따르는 도시적 삶 속에서 경제적 차원의 요구는 인정의 수사학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91 페이지) 문제는 성취원리가 제도적, 물질적 차원들과 결합하지 않은 채 개인적 경쟁 관계만을 부추기도록 작동하면서 병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계발하여 변신하기 바쁜 개별화된 개인으로만 남는다. 홀로 자기계발을 함으로써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부담을 안는 시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이다. 저자는 도시적 삶의 양식이 되어 가는 과열된 성취원리에 따른 개인의 경쟁을 성취인정을 둘러싼 투쟁으로 명명한다.(93 페이지)


저자는 여성을 혐오하는 집단들이 강한 인정욕망을 드러내는 일차적인 이유를 성취원리, 성취인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인정(認定) 행위가 궁극적인 변화와 연결되지 않은 채 과거의 관계를 재생산하기만 한다면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99 페이지) 규범적 인정은 언제나 물질적 변화와 함께한다. 제도적, 물질적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자아계발의 경쟁은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다.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폐해는 젠더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저자는 남성 독자들이 있다면 자문하라고 요구한다. 즉 여성의 자율성과 권리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대학 내 압도적인 남성 전임 교수 비율을 조정하거나 여성에게 부과되는 양육과 돌봄의 책무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거나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거나 여성노동의 저임금화를 극복할 물질적 토대를 고민하는 일을 방기하거나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 라고.(10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개인들로 흩어져 과열된 성취인정에 몰두하는 남성들은 끊임없는 자기과시의 경쟁에 몰두하게 되고 무한 경쟁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남성들은 집단적 남성성을 고착시키는 젠더관계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를 상쇄하려 한다.(102 페이지)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논리 안에서 남성의 정체성과 젠더관계를 교란하는, 새롭게 부상하는 여성 주체는 비체로서 혐오된다.(104 페이지)


저자는 젠더 내부의 개별적 차이를 고려하는 가운데 젠더 정체성에 대한 성찰적 변화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들이 물질적, 제도적 보완장치 없이 유동적 성취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시대이다. 위기감에 내몰린 남성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해줄 지배적 남성성을 유일한 안전 장치로 활용한다.(107, 108 페이지) 물질적, 제도적 변화를 부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비체로 혐오되는 것이다. 물질적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성취원리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뿐이다.(108 페이지)


저자는 소리를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과열된 상호 인정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상호성, 자율성의 상호확장이 가능한 미래의 젠더관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10 페이지)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인정 투쟁은 분배투쟁과 교차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110 페이지) 저자는 구성적 외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구성적 외부란 우리를 구성하는 외부라는 의미이다.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려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불가피하다. 이로부터 그들이라는 외부는 우리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 전제라는 말이 가능하다.


저자는 비체를 지배적 젠더 체계 내부에서 혐오되기 위해 만들어진 구성적 외부라 말한다.(115 페이지) 이 구조가 얼마나 강력한지 성토하는 대신 구성적 외부인 비체들에 의해 체계가 균열되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115 페이지) 저자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 해석에 따라 가부장제에서 남근을 가지려는 자와 남근이 되고 싶은 자로서의 성차가 어떤 소외를 겪게 되는지 살펴본다. 저자에 의하면 라이트의 라캉 해석은 가부장적 조건에서조차 여성들은 상징계의 안팎을 드나드는 비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117 페이지)


라이트에 의하면 남성들은 상징계 안에서 거세되고 소외된 채 이러한 결핍을 여성에 대한 환상으로 대신한다. 저자는 도시화와 함께 가부장제의 조건들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여성과 남성들이 정해진 성차의 종속과정을 좀 더 벗어날 가능성 역시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도시화가 과열됨으로써 여성혐오라는 퇴행이 생기기도 했지만 젠더의 영역 구분을 뒤흔드는 더 큰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자는 비체를 지배적 젠더 체계를 교란하는 유령이라 부른다.(122 페이지)


저자는 비체에 의한 비체의 혐오를 여성 혐오 집단의 혐오보다 더욱 통탄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수치심이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에 기원하는 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공격성- 나르시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거나 폄하하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125 페이지) 혐오하는 자가 자기 정체성의 뚜렷한 경계를 지키기 위해 대상을 혐오하듯 수치심을 갖는 자는 완벽성과 완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존성을 드러내는 타자를 공격할 수 있다.


혐오하는 자가 대상을 비체로 보는 믿음 체계를 갖고 있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자는 대상을 자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환경으로 규정한다.(125 페이지) 저자는 비체들간의 소통에서 동정심은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동정심은 자신이 타자에 비해 우월한다는 전제하에 베푸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는 동감 역시 인간의 유사성 또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상상적으로 타자에게 동감하기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바 한계를 갖는다고 말한다.(129 페이지)


저자는 공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공감에 의해 추동되는 배려의 윤리는 자아와 타자의 결합과 상호의존성을 흔쾌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공감은 타자를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132 페이지) 자아와 타자가 다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공감은 타자의 곁에서 타자의 경험에 참여하는 가운데 타자의 다름을 경험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공감이 비체와의 관계, 그리고 비체들간의 연대를 추동하는 윤리적 감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33 페이지)


저자는 버틀러는 자아가 있고 타자가 자아 밖에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아는 오히려 타자의 발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말할 것이라 말한다.(135 페이지) 저자는 공감을 통한 연대는 소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36 페이지) 저자는 공감은 어렵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137 페이지) 저자는 도시 사회를 부정적인 것으로 본 한편 도시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도시화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본 르페브르를 예로 들며 자신의 논의도 같은 차원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혐오도 분노도 아닌 공감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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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를 위하여 - 작가 츠바이크, 프로이트를 말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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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보다 스물 다섯 살이나 어린 동료이자 제자였던 스테판 츠바이크는 쉬운 설명으로 프로이트 사상의 탄생 배경을 풀어낸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프로이트를 위하여는 그가 쓴 프로이트 평전, 그리고 그가 프로이트와 나눈 편지들을 묶은 책이다. 19세기를 윤리적으로 지배한 것은 칸트(Kant)가 아니라 위선(cant)이라는 말로 운을 뗀 츠바이크는 그렇게 100년 동안 모두가 모두에게 자기를 감추고 자기를 말하지 않은 결과 심리학은 정신적으로 뛰어난 문화의 한복판에서 전례 없는 침체기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츠바이크는 프로이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 프로이트의 센세이셔널한 데뷔에서부터 자세히 서술해 나간다. 프로이트는 모든 신경증은 성적 욕망을 억압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선입견 없이 자명하게 규명했다. 프로이트는 예의범절이 아니라 솔직함을 중요시했다. 츠바이크는 프로이트를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58 페이지), 거물급 파괴자, 우상 파괴자(62 페이지), 섬세한 관찰자(70 페이지), 환상 파괴자(76 페이지), 무미건조함의 천재(79 페이지)라 부른다. 그리고 프로이트 이전의 심리학을 낡은 심리학이라 부른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근본적 갈등을 위선에서 학문으로 변모시킨 사람이다. 70세가 되었을 때 프로이트는 개인을 검사했던 자신의 방법을 신에게까지 시도하는 최후의 과업을 수행했다.(63 페이지) 프로이트는 자기만의 심연에 이르는 위험한 길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프로이트는 항상 단계를 밟아 내려가면서 모든 불확실한 지점들을 주의 깊게 또한 전혀 도취 없이 진술한 첫 번째 사람이다.(76 페이지) 츠바이크의 프로이트 평전을 읽으면 프로이트가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고 비타협적인 방식으로 어려운 길을 자초한 신념의 사람임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는 평생 무의식을 탐구한 사람이다. 프로이트 이전에도 무의식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알지 못했다. 프로이트는 모든 심리적 활동이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단호히 역설했다.(98 페이지) 책상이 어둠 속에 있어 보이지 않거나 빛 아래 있어 보이거나 여전히 책상이듯 심리학에서 무의식은 의식과 똑같이 심리 공간에 속한다.(99 페이지) 프로이트에 와서야 무의식이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왔다.(99 페이지) 츠바이크는 결정을 내려야 할 모든 상황에서 무의식적 의지를 고려하지 않는 사람은 착오에 빠진 사람이라 설명한다.(100, 101 페이지)


무의식은 근원적 의지(102 페이지)이며 각 사람들의 가장 깊은 비밀(105 페이지)이다. 매순간 일거수일투족에서 무의식의 술렁임을 억눌러야 한다고 말하는 츠바이크는 어떻게 그 무의식이라는 어스름의 나라로 내려갈 것인가에 대해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심리적 영역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거나 우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109 페이지) 프로이트는 실수는 생각 없음이 아니라 억압된 채 밀려들어가 있던 생각의 자기 관철이라 보았다.(109, 110 페이지) 츠바이크는 꿈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프로이트 방법론이 새로운, 일종의 성격학적 의도에서 꾀한 것은 꿈 언어를 사고 언어로 변환하는 것이다.(115 페이지) 꿈속에서는 시간이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였던 것과 우리인 것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이다.(115 페이지) 우리가 우리 자신에 관해 짐작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우리는 꿈을 통해 안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이라는 공식은 구슬처럼 가지고 놀 수 있었다.(119 페이지) 프로이트는 꿈이 이야기하는 것을 섣불리 진짜 내용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121 페이지) 꿈은 내적 체험을 상징을 통해 고백한다.


꿈 작업과 꿈 내용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꿈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꿈이 원래 말하려던 것이야말로 심리 생활의 무의식적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프로이트는 꿈이 우리의 심리적 균형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임을 처음으로 입증했다. 온종일 갇혀 있던 우리의 욕구들을 꿈이라고 하는 안전지대에 풀어놓을 때 우리는 감정생활로부터 그 악령들을 떼어내고 잠이 피로라는 독성 물질로부터 신체를 구해내는 것처럼 과도한 압력에 짓눌린 우리의 영혼을 자기 이탈 속에서 풀어준다.(125 페이지)


우리가 꿈이라는 안전지대에 우리의 갇혀 있던 욕구를 풀어놓는 것은 괴테가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로 하여금 자살하게 함으로써 해소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126, 127 페이지) 인식만이, 오직 적극적인 자기 인식만이 정신분석적 의미의 치유를 가져다준다.(130 페이지) 정신분석은 모든 준비된 고백, 모든 문서화된 것을 거부하고 심리 생활의 기억들을 가능한 한 많이 자유분방하게 내어놓으라고 환자에게 주의를 준다.(136 페이지) 한 사람 안에 자신의 질병을 없애기 위해 정신분석가를 찾아오는 환자가 있고 무의식적으로 병에 집착하는 환자가 있다.(139 페이지)


모든 정신분석은 전투이다.(140 페이지) 한편 정신분석은 예술적 과정이다. 인내력이 중요하다.(141 페이지) 정신분석의 이상적 치료는 환자가 신경증 시위를 불필요하다고 인식해 자신의 감정 에너지들을 망상과 꿈으로 허비하지 않고 생활과 업적으로 해방시킬 때 완성된다.(142 페이지)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술이 심리 치료 영역에서 최종적이자 결정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146 페이지) 프로이트는 현실 속의 에로틱한 욕구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저지당해 좌절될 때 신경증이 발생한다고 표현했다.(성적병인론)


프로이트는 에로스나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리비도, 쾌감 충동, , 성 충동이라고 표현했다.(153 페이지) 츠바이크는 리비도를 해소되고자 하는 맹목적인 힘, 어디를 겨눌지 모르는 활의 장력, 빠져나갈 어귀를 찾지 못한 강물의 소용돌이치는 힘으로 설명한다.(154, 155 페이지) 프로이트는 성의 개념을 생리적인 성행위에서 분리시켰고 저급한 심리적, 신체적 행위라는 펀견과 모욕으로부터 해방시켰다.(155 페이지) 프로이트는 유아 성욕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츠바이크는 유아가 걷기 전에 걸을 수 있는 잠재력을 두 다리에 지니고 있듯, 말할 수 있기 전에 언어 욕구를 지니고 있듯 성욕도 목적에 맞는 행동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하는 유아 속에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말한다.(158 페이지)


구강기는 오래 가지 못한다. 어린이는 자기 신체에 경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161 페이지) 건조하고 직설적인 프로이트의 문체와 달리 츠바이크의 문체는 수사적이고 비유적이다. 가령 젖먹이의 자가 성애 및 범성애 형태와 사춘기의 성애 사이에는 욕정의 겨울잠이 있다는 표현을 보라. 프로이트는 생식 행위 이외의 방식으로 쾌락을 충족하려는 사람들을 성도착자의 범주에 넣었다. 체험이 모든 심리 형성의 형식을 결정하는 정신분석에서는 각 개인을 오직 개별적으로 그의 과거 체험에 근거해 이해한다.(166 페이지)


츠바이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정신분석을 지탱하는 데 중요 역할을 했지만 완공 이후 제거해도 전혀 위험하지 않은 간이 버팀목들 중 하나가 아니라고 본다.(167 페이지) 츠바이크는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이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유일한 심리적 힘이라고 일원론조로 이야기학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한다.(170 페이지) 프로이트는 리비도에 대립되는 충동으로 자아 충동, 공격 충동, 죽음 충동 등을 제시했다.(170 페이지) 학술이론으로서 정신분석은 충동들과 무의식의 우세를 사수한다. 치료방식으로서 정신분석은 이성을 인간에 대한, 인류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로 사용한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모순이다.(187, 188 페이지)


츠바이크는 정신분석의 한계를 논한다. 오로지 개인에 관한, 개별적 영혼에 관한 학문인 정신분석은 공동체의 의미나 인류의 형이상학적 사명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190 페이지) 츠바이크는 정신분석에 정신종합이 더해져야 할 것이라 말한다. 영혼의 은밀한 속박들을 넘어 영혼의 자유를, 영혼이 자기 존재를 넘어 삼라만상을 향해 굽이친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192 페이지) 우리는 프로이트 덕분에 처음으로 개인의 중요성을, 모든 인간 영혼의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가치를 새롭고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199 페이지)


프로이트는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경증을 앓지 않는 러시아인들도 분명 도스토예프스키의 거의 모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양가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211 페이지) 프로이트는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에게서 내면의 위대한 겸손함과 예술가에게 드문 성품을 봅니다"란 말을 한다.(238 페이지)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괴테상 수상을 축하하며 그것이 프로이트가 오래 전에 받았어야 할 노벨상을 수상하는 데 길을 마련해 줄 것이라 말한다.(255 페이지)


프로이트는 두 가지 점에서 츠바이크를 비판한다. 자유연상 기법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이 어린 시절의 꿈으로부터 꿈에 대한 이해를 얻었다는 기술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262 페이지)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에게 자신은 결코 정신분석의 방법과 체계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일에 전념하지 않았다며 많은 부분에서 독자적으로, 외부인의 시선으로 고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고 말한다.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업적 전체에 견줄 만한 인물로 니체를 꼽는다.(264, 265 페이지)


프로이트는 츠바이크의 '예레미아', '감정의 혼란' 등 악마에 시달리는 인간들의 정신생활을 파헤친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큰 즐거움을 느꼈음을 고백한다.(275, 276 페이지) 츠바이크는 자신의 시대를 정신이 사라진 시대로 보며 그런 시대에는 지적인 권위가 필요하며 자신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소수라 덧붙인다.(291 페이지) 프로이트는 츠바이크에게 자신은 츠바이크가 묘사한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애쓴 츠바이크의 지극한 호의를 기꺼이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307, 308 페이지)


프로이트는 전기 작가에게는 정신분석가의 경우와 비슷하게 전이(轉移)라는 개념으로 파악되는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308 페이지) 츠바이크는 심술궂게도 신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내다보는 재능을 주셔서 지금 몰려오는 일을 4년 전부터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고 말한다.(311 페이지)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에게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프로이트의 저작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자임을 전하며 그가 프로이트를 무척 뵙고 싶어 하며 프로이트에게 달리보다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325 페이지)


츠바이크는 달리를 자신들의 시대의 유일한 천재 화가이자 시대를 뛰어넘을 유일한 사람, 자기 신념의 열렬한 옹호자, 프로이트를 따르는 예술가들 중 가장 믿음직한, 은혜를 아는 제자이기도 하다고 소개한다.(328 페이지) 프로이트는 츠바이크에게 "당신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었지 파도가 밀려와도 꿈쩍 않는 갯바위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고 말한다.(314 페이지) 프로이트는 자신이 초현실주의자들을 바보로 여긴 경향이 있었는데 달리는 다르다며 그의 그림의 기원을 정신분석적으로 탐구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말한다.(334 페이지)


프로이트는 자신은 정신분석 지망생을 난처하게 하는 것을 꽤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가 어느 정도의 의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검증하고 헌신성의 정도를 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335 페이지) 구강암 악화로 고생하던 프로이트는 1939923일 모르핀 과다 투여에 따른 쇼크로 숨을 거두었다.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에게 당신께서도 우리 모두처럼 이 시대만을 아파하고 신체적 고통은 더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351 페이지)


츠바이크가 프로이트를 니체에 견준 것은 유명하다. 그런데 프로이트와 니체는 너무 대조적인 문체와 스타일을 보였다. 관심거리이다. '프로이트를 위하여'는 츠바이크의 정신분석적 통찰력이 빛나는 책이다. 문학적으로도 손색없는 프로이트 평전(그리고 두 박사가 주고 받은 편지글, 프로이트에 대한 자료 등)은 정신분석학의 배경과 프로이트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헤아리는 데 꼭 필요한 책이다. 프로이트를 위하여읽기는 츠바이크와 프로이트라는 두 지적 거인의 면모를 다시 확인한 읽기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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