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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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지만 내가 '산스장'에서 운동을 하는 시간이면 멋쟁이 할아버지가 어김없이 나타나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윗몸일으키기를 하기 위해 누웠는데 할아버지 역시 내 옆자리에 눕는 게 보였다. 천천히 자세를 잡으면서 다 누울 때까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는 가벼운 신음을 연달아 내고 있었다. 길게 누워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으면서 내게 묻기를, '나는 아직 누울 때 당신처럼 아프지는 않겠지'라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 안에는 나도 너처럼 젊었을 때는 어디에 눕더라도 아프지 않았고, 윗몸일으키기쯤이야 수십 번쯤 거뜬히 해치웠었다는 뉘앙스의 아쉬움과 그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아프지 않다는 대답을 건성으로 하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누운 채 어깨며 허리며 몸 이곳저곳을 두들기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보이지 않던 모기가 ';산스장' 곳곳을 빠르게 돌고 있었다. 아침 기온이 낮고 건조하던 며칠 전과는 다르게 비가 온 후 기온이 빠르게 오르는 바람에 때를 만난 모기들도 덩달아 신이 난 모양이다. 1940년생인 할아버지의 마른 체구에서 빨아먹을 피가 얼마나 있다고 극성스러운 모기떼가 앵앵거리며 달려들고 있었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에 문득 싫증이 나고, 미약하던 의욕마저 뚝 떨어져 사는 게 그저 덤덤하게만 느껴지는 시기가 찾아오면 나는 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는다. 하루키 역시 독자들에게 없는 기운이라도 짜 내서 으쌰으쌰 열심히 살아보라고 권하는 건 아니지만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말을 아무런 감흥도 없이 되뇌고, 겉도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낱낱의 문장을 손가락을 짚어가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래도 기운을 내서 한 번 살아봐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고, 그는 홋카이도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나는 도쿄에서 태어난 동급생과 결혼했고, 그는 오타루에서 태어난 동급생과 결혼했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식물의 씨앗이 변덕스러운 바람에 날려 운반되듯이, 우리도 역시 우연이라는 대지를 목표도 없이 방황한다."  (p.56 '그녀의 거리와 그녀의 면양' 중에서)


하루키의 초기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는 내가 이따금 생각이 날 때마다 펼쳐보는 책이다. 물론 '4월'이라는 특정한 달이 제목에 포함된 까닭에 그해 4월에 읽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매년 4월마다 이 책이 떠오른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단편이라고 하기에도 짧은 18편의 소설이 실린 이 책은 하루키의 열혈 독자들에게는 꽤나 인기가 있는 편이어서 하루키의 팬을 자처하는 나로서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눈에 띌 때마다 읽게 된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히라주쿠의 뒷길에서 나는 100퍼센트의 여자와 스쳐 지나간다. 그다지 예쁜 여자는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뒤쪽에는 나쁜 잠버릇이 달라붙어 있고, 나이도 모르긴 몰라도 이미 서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50미터 앞에서부터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인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내 가슴은 불규칙하게 떨리고,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P.21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중에서)


하루키 소설의 장점은 그의 소설이 분명 현실을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현실에서 미세하게, 이를테면 현실의 공간에서 반 발자국쯤 떨어진 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현실에 지친 독자는 소설을 읽는 동안 현실로부터 살짝 떨어져서(또는 현실을 잠시 잊은 채로) 독서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로부터 발을 뺀 채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다시 현실로 복귀해야겠다는 마음이 슬몃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처방은 그의 에세이에서도 다르지 않다.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도 않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내 생각은 이러이러한데 당신이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당신의 선택의 문제일 뿐 나는 관여하지 않겟어' 하는 식의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다.


"5월의 태양 아래를, 양손에 운동화를 들고 낡은 방파제 위를 걸어가면서 나는 예언한다. 너희는 무너져버릴 것이다, 라고. 몇 년 뒤인가, 몇십 년 뒤인가, 몇백 년 뒤인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너희들은 언젠가 확실히 무너져버린다.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메우고, 우물을 메우고, 죽은 사람의 혼 위에 너희들이 세워 올린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콘크리트와 잡초와 화장터의 굴뚝, 그것뿐이지 않은가."  (P.120 '5월의 해안선' 중에서)


'삶의 권태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시시때때로 일상이 지겨워지고 나른한 권태에 짓눌리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우울증과 같은 만성적인 질병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외투에 붙은 먼지처럼 가볍게 툭툭 털어버릴 수 있는, 일시적인 감기처럼 지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나이가 들고 이곳저곳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일상의 나른한 지겨움은 조금씩 정도를 높여간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할 때 하루키의 책은 그와 같은 증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처방책이 될 수도 있다. 책을 싫어하는 사람도 일단 한 번 그의 작품에 빠져들어 볼 필요가 있다. 속는 셈 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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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 기온이 많이 올라 마치 초여름의 날씨처럼 더워졌습니다. 어느 해였을까요. 역대 최장 기간 장마라는 기상청 예보에도 불구하고 강수량은 오히려 다른 해에 비해 줄고,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흐렸던 날이 많아 비교적 선선한 여름을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다들 장마 기간이 맞느냐며 기상청의 예보를 못 미더워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기상청의 예보는 단지 예보일 뿐 중계가 아닌 까닭에 정확히 맞출 가능성은 있지만 반대로 언제든 틀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는 듯합니다. 올해 장마는 6월 19일 제주서부터 남부지방은 6월 23일, 중부지방은 6월 25일경 시작되어 제주는 7월 20일, 남부 7월 24일, 중부는 7월 26일경 끝이 날 것이라는 예보가 있습니다만 예보는 예보일 뿐 어떻게 달라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4월 초순에 유럽 여행을 떠났던 아들이 오늘 귀국했습니다. 아들은 4월 9일 출국하여 뮌헨을 경유하는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첫 여행지인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런던 여행을 마친 아들은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이동하여 두 번째 여행지인 파리에서 지내다가 기차를 타고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하였고, 그곳의 여행을 마친 후 비행기를 타고 니스로 이동하였고, 니스 여행을 마친 후 비행기를 타고 스페인 바셀로나로 향했습니다. 바르셀로나 여행을 마친 후 다시 사리아로 이동하여 사리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115km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포르투의 포르투로 이동하여 여행을 하고, 마지막 여행지인 리스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리스본 여행을 마친 후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오늘 인천공항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계획과 항공권 구매 및 숙박 예약 등을 군에서 제대하지 않았던 작년 말에 미리 해 놓았던 까닭에 중동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이전 가격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빡빡한 여행 일정을 본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셨지만 말입니다.


벤 몽고메리가 쓴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을 읽고 있습니다. 67세의 나이에 3,500킬로미터의 애팔치아 트레일을 146일 만에 완주하였으며, 77세에는 AT를 세 번이나 완주한 최초의 인물인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장대한 여정을 기록한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많은 산악인들이 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동네 뒷산을 오르는 것도 힘겨워하는데 말입니다. 애팔치아 트레일을 다룬 책을 읽었던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봅니다. 예전에 나는 빌 브라이슨이 쓴 <나를 부르는 숲>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른 코스이기는 하지만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걸었던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 역시 감명 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그녀는 방문을 닫고 가방을 내려놓은 후 거울 앞에 섰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은 누군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날파리가 눈 근처를 물어뜯어 부어올랐다. 입고 있던 스웨터는 온통 찢어진 곳으로 가득했다. 머리는 엉망이었고 발은 부르텄다. 엠마는 자기가 마치 하수구에서 기어 나온 주정뱅이 같다고 생각했다. 떠돌이. 예순여섯 살이나 먹고 실패한 인생."  (P.35)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가 떠오릅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여자, 미래, 그 모든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게 진주가 건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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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서용선의 일상을 따라나서다
고진예 지음 / 희종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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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화가와 관련된 책을 자주(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읽게 된다. 얼마 전에는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를 다룬 책 <숲과 강 그리고 안젤름 키퍼>를 읽었고, 그때의 느낌이 워낙 특별해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읽은 <화가 서용선의 일상을 따라나서다> 역시 특별했다. 그러나 책을 읽기 전에 나는 화가 서용선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었다. 고진예 작가가 쓴 이 책은 화가 서용선의 일상에 더하여 화가와 작가의 대화 내용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화가의 생각과 사상이 녹아들게 하고 있다.


"그는 역사화는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교수진에서는 민중화나 역사화를 그린 분이 없었고, 앵포르멜 이후의 세대와 그의 이전 교수진들을 포함해서 그런 류의 그림을 그린 분이 없었다. 그가 그린 조선시대의 그림은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된 시점에 접근 방법을 시도해 본 그림이라고 한다. 비록 그가 민주화 투쟁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역사의식은 투쟁이 아닌 지적 사고의 발현으로 그림에 표출된 것은 아닐까. 또한, 그에게 역사화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신문 연재로 읽던 역사 소설에 연이 닿아 있다고 한다. 역사 소설은 화가인 그가 문학적 텍스트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계기로서 친근하게 다가온다."  (P.183~P.184)


2007년부터 약 1년 동안 매주 경기도 양평에 있는 화가의 문호리 작업실을 찾아 화가와 대화를 나누고, 변해가는 바깥 풍경을 기록하고, 화가가 던진 사유의 조각들을 조용히 맞춰 왔다. 책을 읽는 독자는 먼저 그의 그림에 눈길이 간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골격에 강렬한 원색의 굵은 터치는 마치 8,9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의 걸개그림과 닮은 듯하다. 2000년대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단 관련 역사 서사를 주제로 그가 그렸던 그림들은 여러 점의 자화상과 더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인상을 받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역사적 운명에 대한 반항일지도 모른다. 역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은 또 다른 역사가 되어 후손에게 전달될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은 영원성이 있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예술을 통해 그들이 말하려 했던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해. 물론 행동도 좋으나 문학을 하는 사람이면 문학으로서 깊이를 가져야 한다는 거야. 만약 시간이 많이 지나 역사적 상황을 경험하지 않은 앞으로의 세대가 그들의 글을 읽었을 때, 글에서 깊이보다 작가의 울분과 신경질만 느껴진다면 훌륭한 글이 아니라는 거지."  (P.28)


서용선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가 그림만 잘 그리면 되지 공부가 뭔 필요야.' 하는 생각은 애저녁에 사라지게 된다. 그림의 깊이는 결국 화가의 사유와 깨달음의 정도에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용선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 대부분이 서로 비슷한 느낌과 감동을 공유하는 걸 보면 화가 본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사유의 깊이가 그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화가의 진정성이나 현실을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화가의 가치관이 그림과 함께 투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흐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의 그림 속에서 삶의 진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인 고진예 작가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서용선 화가의 작품을 아끼는 까닭은 일반 민중의 현실과 삶의 진실이 그림을 통하여 가감 없이 전달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가 본인도 천형처럼 느껴지는 삶의 고단함이 역사의 은유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자신의 그림에 담으려고 애쓴 듯하다.


"문자는 이미 음성적 속성을 갖지. 우리가 문자를 눈으로 읽을 때 본다는 것은 빛의 파동에 의해 시각적인 형태로 감지되잖아. 그래서 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파동을 인지한다는 거야. 그것은 이미 소리 형태를 보인다는 거지. 미술에는 이미지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이미지는 이미 현실이고 실체가 있는 거지. 왜냐하면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이미지는 재현적이지만, 이미 현실에 놓인 공간 안에 존재하기에 실체가 있는 현실적 이미지라는 거야. 우리는 실체가 없는 그린다고 하지만 그림이라는 것은 늘 공간 안에 놓이고 공간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거지."  (P.155)


오늘 아침,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등산로에는 안개가 자욱했었다. 그 시각에도 어디론가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들의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허연 버짐처럼 더께더께 피어나고 있었다.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그 한컷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길 수는 없었지만, 화가 서용선의 핏발 선 눈빛의 자화상이 처진 어깨를 한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내내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삶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었다. 끊이지 않고 힘겹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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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부여란 때론 어떤 간절함에서 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지닌 준법정신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준법정신이란 이를테면 법을 잘 지킨다는 절대적 통념도 있겠으나 사회적 관습이나 자신이 세운 어떤 규칙 또는 가까운 사람들이 나에게 갖는 기대나 바람 등을 무시하지 않고 잘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준법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한 사람이 미루지 않고 실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간절함에서 오는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한 사람에게 어려서부터 주입된 준법정신과 그에 따른 실천 연습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소위 '밥상머리 교육'으로 불리는 유아기적 훈련은 개인의 준법정신을 함양하고 이를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훈련을 강화함으로써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생각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꽤나 좁혀주는 듯합니다. 이것은 비단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감지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것 역시 그와 같은 훈련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교육이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는, 이른바 완벽한 교육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던 자크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판단 기준이 서기도 전에 타인에 의해 형성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무척이나 많이 습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그 기준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결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 나쁘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요. 공동체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용인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기준, 사회 생활에서 유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 등을 미리 습득함으로써 사회에 진출했을 때 크게 당황하지 않고 적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더 유리한 선택을 취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지면서 자신의 자녀를 자유분방하게 키우겠다는 부모들이 늘고 있는 듯합니다. 시쳇말로 '금쪽이'로 키우겠다는 뜻이지요. 제 주변에서도 그런 부모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자녀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자녀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또는 인생의 고비마다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간절함이 발현되기를 기다리며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인데, 과연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간절함에 기대어 의지를 불태웠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에게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간절함보다는 보이지 않는 어떤 의무감과 같은 준법정신을 바탕으로 수많은 고비들을 넘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말입니다.


부모의 자녀 교육에 있어 오롯이 자녀의 선택에 맡겨두고자 하는 부분은 그 영역이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부모에게나 있을 테지요. 천주교를 믿는 우리 부부도 아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세례를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종교만큼은 본인이 알아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아들은 종교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필요하다고 믿게 되면 스스로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겠지요. 이와 같은 결정은 우리나라의 종교 중 일부가 정치세력화한 데서 기인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아이들을 상대로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주입하고 그와 같은 행동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자신들의 수족처럼 부리겠다는 발상은 마치 그루밍 범죄를 연상케 합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공공연히 종교는 그루밍일 수밖에 없다고 떠벌리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종교를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나는 뉴욕에 사는 여동생의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했었습니다. 안부를 묻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만 대학원에 다니는 큰조카와의 통화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조카는 비록 힘이 약한 여성의 입장이지만 이스라엘의 잔인성을 목격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시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최근 들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며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이나 그보다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정의는 어쩌면 학교나 종교단체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정의와 사랑이 싹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당신이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어야 할 시간에 잠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준법정신의 부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실천력은 의지나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준법정신의 발현에 가깝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어릴 적 밥상머리 교육이 어떠했는지 한 번쯤 되돌아볼 듯합니다. 어쩌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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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시린
김보겸 지음 / 사람과가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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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말은 감정의 폭의 크지 않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은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두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는 반대로 아름다운 노을에 하염없이 빠져들거나 일출의 장관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예술가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을 다른 정상인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기준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인은 예외로 한다는 규정 또한 갖고 있지 않다.


김보겸 작가의 에세이 <서른에 시린>을 읽는 내내 나는 그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것은 MBTI 성격유형검사에서 T나 F로 분류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T로 분류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예술가도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서란 다소간의 성향적 특성은 있을지언정 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명확하게 나눌 수는 없다. 누구나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말로 표현되면 현실을 정의하는 것 같아 숨을 쉴 수 없던 것을 나는 시로 썼고, 시를 쓰며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시를 쓴 까닭은, 내 마음을 움직였던 여운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다. 시가 주는 언어로 삶을 바라보는 노력은 사람들이 쉼을 갖고 싶을 때 하나의 답이 될 거라고 전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다."  (p.52)


제목에 나이를 뜻하는 어떤 단어가 포함된 책이나 노래를 만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나의 기억 회로가 제목이 의미하는 정확한 나이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까닭에 텅 빈 머릿속이 한동안 멍한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김보겸 작가의 <서른에 시린>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에 'ㄴ' 받침이 들어가는 첫 순서이기도 한 '서른'이라는 나이가 아득히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른, 마흔, 쉰, 예순... 우리는 그렇게 나이가 들고 시나브로 성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 잔잔한 파동을 좋아한 것 같다. 사람들로 가득 찬 술집보다는 테이블이 몇 안 되는, 사장님의 손때가 묻은 식당이 편하고 정이 간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찌개와 아침에 새로 한 듯한 김치, 사장님만의 특수 간이 되어 있는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우면 술을 마시기 전인데도, 그 정경이 참 맛있게 느껴진다. 식당을 오고 간 지 십여 년은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주방을 드나들며 반찬을 가져가는 단골손님의 넉넉한 웃음마저 정겹다."  (p.133~p.134)


사람의 마음도 나이가 듦에 따라 수분을 잃고 푸석푸석 건조해지게 마련, 다들 동안의 육체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촉촉한 감성을 유지하는 동심의 마음을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천천히 늙는다는 건 그 사람의 정서에 여전히 생명의 물기를 머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까닭이다. 젊은 사람들이 매우 논리적이거나 바른말만 하는 어른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정서 역시 타인의 감정에 녹아들지 못한 채 점점 메말라가는 것이다.


"때마침 노을이 졌고, 노을 끝에 닿은 아내의 표정이 맑아 마음에 담았다. 생각해 보니 맑은 사람을 꿈처럼 담는 일에도 여러 감정이 요동쳤고, 그럼에도 그 감정의 끝에는 아내가 있었다. 시간에 무뎌지면 마땅히 느껴야 할 계절조차도 사전에 박힌 이름처럼 건조하게 지나갈 때가 있는데, 아내를 만나 마르지 않은 계절들을 보냈다. 한 사람을 내 안에 담는 일이, 한 세상을 담는 일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안 후로 한 걸음씩 하루를 놓는 일에 늘 다정하려 애쓴다. 시린 마음의 끝에서도 변하지 않고 아내의 손을 잡는다. 그대 잇기에 한순간 꿈처럼 빛날 수 있었다."  (p.45~p.46)


지난 3월에 군을 제대한 나의 아들은 4월 9일에 출국하여 유럽 전역을 돌고 있다. 서른의 끝자락에 선 작가가 이렇게 흔들렸던 것처럼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 아들 역시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복학 준비를 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서른'이라는 나이를 경험하겠지만, 그것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통과의례라고 말해주고 싶다. '서른을 아끼고 싶은 마음에 서른이 시리다'고 썼다는 작가는 어쩌면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시점에 '마흔에 시린'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한 어떤 것에 끝없이 매달린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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