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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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늘 옳았던 건 아니다. 제복을 입은 어느 경찰관 앞에서 했던 어눌한 진술처럼 기억은 언제나 자신이 없었고,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으며,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어떤 이에게 내보였을 때 내게 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미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불안은 내 기억의 끄트머리에 달린 작은 물방울처럼 맺혔는지도 모른다. 땅을 향해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한 작은 물방울. 그런 불안. 적어도 나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은...

 

"빛이 잘 들던 어느 오후, 해가 다 저물도록 불 켜지 않은 방에 누워, 그 방 작은 창으로 들어온 태양빛이 사위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 남자. 매해 봄꽃이 필 때면 코끝에 와닿는 그 향기, 눈부신 색채의 찬란함을 견디지 못해 빛이 다 사라질 때까지, 베란다에 있는 모든 화분에 불을 지르고는 타오르는 꽃의 혼을 킬킬거리며 바라보던 한 남자. 꽃이 재가 되어 흩날릴 때에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웅크린 채 고통스러워하던 한 남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스스로 문을 잠그고 그곳에 남아 있던 한 남자를, 나는 오래 기억하고 또 기억했습니다." (p.151)

 

어떤 소설은 이야기의 윤곽보다 시간에 따른 느낌의 변이만 선명하게 남는다. 온화한 갈색이었다가 새벽녘의 푸른빛이었다가 투명한 흰색이 되기도 하는... 장혜령의 소설 <진주>는 그런 책이었다. 학년 초,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한 뒤 교실에서 그 내용을 발표할 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이십 년 남짓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했던 아버지를 둔 딸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한 이 소설은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반영하듯 일인칭과 이인칭·삼인칭이 혼재되었고, 사건의 기록들이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등장하며, 삽화와 사진·그림 등 시각적 자료들이 텍스트의 중요한 일부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작가가 쓴 시가 묘사의 일부를 대체하기도 하고 그에 덧붙여진 날짜가 수감번호처럼 뜬금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정환경조사서 사건이 있은 후 작가는 엄마와 함께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진주로 가서 감옥에 있던 아버지를 면회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20152, 어른이 된 작가는 다시 비행기에 올라 진주로 향했다. 그렇게 탄생된 소설 <진주>는 작가 자신에 대해서 쓴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의 아버지에 대해 묻고 싶었던 질문들이며, 듣고 싶었던 대답이다. 감옥에 있어 부재했던 상태의 아버지가 그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면, 딸이 중학생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는 '개인적인 삶'에 충실한 평범한 가장이 아니었다. 작가가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버지의 존재가 건넌방에 상주하면서부터 완전히 사라진 셈이었다. 아버지의 동지였던 엄마가 "이제 그만 불의를 참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그 순간에도 딸은 아버지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냐고.

 

안산의 노동자 상담소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소식지를 만들던 아버지와 노동 교회가 운영하는 탁아소 선생님으로 근무했던 엄마. 노동자 자녀들과 함께 컸던 딸은 동요 대신 투쟁가와 민중가요를 불렀고, 경찰을 '짭새'라 부르기도 했다. 추리닝과 슬리퍼 차림으로 딸의 과제물을 들고 학교에 나타났던 아버지를 고개를 돌려 회피했던 딸은, 남편과 떨어져 옷 수선집을 하며 키운 딸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버지에게 가 닿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려 했다. 그때까지 나는 틈만 나면 내 방 불을 끈 채 죽은듯 잠을 청했고, 화장실 가는 소리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유령처럼 걸어다녔으며, 아버지 어머니가 완전히 잠든 시각에 집에 들어오고서도 또다시 새벽까지 집밖을 배회했고, 아침이면 관성처럼 입속에 밥을 떠넣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안의 누군가가 그러한 삶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그 사람은 내게 진주로 가자고 했다." (p.279)

 

하냥 걸어온 저 시간들이 기억의 끄트머리에 달린 물방울처럼 문득 낯설어질 때가 있다. 그 물방울이 햇빛에 말라 공기 중으로 스러지거나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기억의 줄기를 타고 아득히 먼 과거를 향해 불안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원시를 향한 아득히 먼 여정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우주처럼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불안을 딛고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곳에 닿을 수 있다. 작가가 진주로 향했던 것처럼.

 

장혜령의 <진주>를 읽고 나는 군더더기처럼 나의 기억을 덧대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았고, 술에 취하지 않은 시간보다 취한 시간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불안을 술을 매개로 하여 잊어보려 한 셈인데, 당신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그것에 대한 울분은 가족을 향한 폭력으로 풀었다. 당신의 습관적인 폭력과 중독 증세는 길게 이어졌던 병원 생활과 함께 끝났지만 가족 모두에게 심어준 그 암담했던 기억들을 다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기억의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불안의 물방울을 보고 있다. 당신이 세상에 없는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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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출판사에서 발간한 유수진의 저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에는 눈길을 끄는 문장들이 제법 많았다. '제법 많다'고 말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책들이 제목만 달리 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통에 때로는 현기증이 날 정도인지라 책의 제목은 고사하고 인상 깊었던 문장도 이 책에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저 책에서 읽은 것인지 헷갈릴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EBS의 펭수가 유행을 타자 수많은 짝퉁 펭수가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그렇고 그런 책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책을 출간하는 저자는 나름 최선을 다하여 준비했을 텐데 말이다.

 

"말도 글처럼 기록이 된다면 우린 조금 더 신중하게 말하게 될까? 나는 펜과 종이를 쥐고 함부로 글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주 짧은 편지를 쓰는데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몇 시간을 끙끙 앓는 사람들도 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이 편지를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면 보관 기간 동안 편지 속에 적힌 말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테니까.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했던 사람들도 글로 상처를 준 적은 없다. 그들이 써준 글은 오히려 눈물 나게 고맙고,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마 그 글은 말을 할 때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고민해서 썼을 것이다." (p.88)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방법은 그저 계속해서 이 방향, 저 방향을 왔다 갔다 하며 바라보는 방법뿐이다. 너를 바라볼 수 있는 360도의 방향 중 오직 1도의 방향에서 바라본 모습만 가지고 너를 판단해왔던 건 아닌지, 내일은 또 다른 방향에서 너를 바라봐야겠다." (p.112)

 

"글 쓰는 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부엌에서 들리는 밥 짓는 소리처럼 꾸준하고 성실했으면 좋겠다. 때로는 지루하고 재미없게 느껴질지라도 이제는 안다. 애초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이란 것을. 그저 가족들이 오늘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생 아침밥을 지은 엄마처럼, 나의 생각 조각들을 차곡차곡 문장의 형태로 쌓아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왠지 오늘은 글을 쓰는 내 모습 위로 밥 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p.180)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아무에게나 씀으로써 나는 덜 위험해지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글 쓰는 일에 가까워지고 있다." (p.184)

 

시간은 하나, 둘 손가락을 꼽아가며 세어보지 않으면 그 흐름을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을 지척에서 느껴보지 않으면 1년 단위의 큰 뭉텅이로 휙휙 내던져진 듯 여겨지곤 한다. 벌써 2월의 초순. 갑자기 추워진 날씨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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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대범한 밥상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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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작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작가와 작가가 쓴 글 사이의 거리를 어림하곤 한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만 9.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여전히 20111월의 순간을 마치 어제의 일인 양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입버릇처럼 되뇌던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는 말이 어느 것 하나 거짓이 아님을 그의 글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실제 겪었던 경험을 작품 속에 오롯이 투영하는 일은,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과 작가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여럿 후배 작가들에게 무거운 숙제로 남겨졌을지도 모른다.

 

소설집 <대범한 밥상>에는 표제작인 '대범한 밥상'을 포함하여 총 열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중 내가 오늘 읽었던 작품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제목의 소설.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었던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소설은 가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슬픔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표출되고 가식 없는 눈물과 울음을 통해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노래했던 김현승 시인의 눈물에 나오는 시구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에서 제목을 따온 이 소설 제목의 의미는 '가장 마지막까지 갖고 있는 것'이다.

 

"건물이고 차들이고 형체는 지워지고 거기서 내뿜는 불빛만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게 마치 혼령이 너울너울 자유롭게 교감하는 것 같더라구요. 마음이 편안하고도 슬펐어요. 세상을 하직하면서 한평생의 헛되고 헛됨을 돌아보는 기분이 그런 거 아닐까요. 편안한데도 이상하게 위로받고 싶었어요." (p.295)

 

주인공인 ''가 손위 동서인 형님과 전화 통화를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상대편인 형님은 발화가 생략된 채 ''의 발화만으로 진행되는 까닭에 마치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실제로 나는 고 박완서 작가의 사후 1주기를 추모하여 연극 무대에 올려진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2012년의 어느 가을날 충무아트홀에서 본 기억이 있다. 연극인 손숙의 가슴 절절한 연기 덕분에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눈물 콧물을 다 쏟았고, 연극이 끝난 후 허기진 가슴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었다.

 

"자식을 겉을 낳지 속까지 낳는 건 아니란 말도 그래서 생겨난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하죠? 말끝마다 형님은 꼭 그런 소리를 하시더라, 마치 오금을 박듯이. 이럴 때는 전화로 얘기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녜요, 전화로 말하면서도 전 형님의 시선을 느껴요.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걸 모르는 사람을 바라볼 때의 기분 나쁜 눈길 말예요." (p.304)

 

소설의 내용은 힘든 시기를 함께 겪어온 형님에게 스스럼없이 꺼내놓는 ''의 한풀이도 있고,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몰라주는 형님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뒤섞여 있다. 그런 아픔을 꺼내놓기에는 세대가 같은 손위 동서가 적격이었는지도 모른다. '생때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 물건들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물건들이 미운 건 아마 그 질김 때문일 거'라고 말하는 ''의 고백은 버려진 낙엽처럼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즐거웠던 기억이 물건보다 속절없다'는 말도...

 

''는 친하게 지내던 동창 명애의 권유로 또 다른 동창 집으로 내키지 않는 문병을 가게 된다. 동창은 병든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아들은 교통사고로 뇌와 척추를 다치고 나서 하반신 마비에다 치매까지 앓고 있었다. 동창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파파할머니가 된 친구는 누워만 있는 아들이 혹여라도 욕창이 생길까봐 말라빠진 몸으로 기골이 장대한 아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걸 보면서 명애와 ''는 도와주려고 아들의 몸에 손을 대 보지만 아들은 괴성을 지르며 거부한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인 동창은 '이 웬수덩어리가 또 효도하네'라고 말한다. ''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가 몹시도 부러워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 거 아뉴?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형님은 어디까지나 절벽 같아야 해요. 형님은 언제나 저에게 통곡의 벽이었으니까요. 울음을 참고 살 때도 통곡의 벽은 있어야만 했어요. 통곡의 벽이 우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대요." (p.321)

 

작가가 살아 있던 과거에 여러 매체에서 작가를 볼 때마다 나는 '저렇게 야리야리한 몸으로 어떻게 그 모진 세월을 건너왔을까?' 속으로 생각하곤 했었다. 작가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독자와 만난다는 건 어쩌면 작가를 마음 놓고 울게 한 '통곡의 벽'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 박완서에게 글쓰기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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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라는 게 본디 뚜렷한 선을 그어 이쪽과 저쪽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입춘도 지난 오늘, 겨우내 따뜻했던 날씨는 오늘부로 급전직하 계절을 거꾸로 되돌린 것만 같다. 기온도 기온이지만 바람의 기세가 매섭다. 그 바람에 공기는 더없이 맑아졌지만 말이다. 하나가 좋아지면 하나가 나빠지게 마련, 인생사 새옹지마(人生事 塞翁之馬)라는 말이 다시 곱씹어진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우려가 큰 탓인지 웬만한 모임은 줄줄이 취소가 되고 있다. 업무 목적의 만남도 악수를 생략한 채 짧게 끝내는 걸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평상시에도 이렇게 용건만 말하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하는 바람이었다. 특별한 용건도 없으면서 질척질척 시간만 허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실 전염력이 조금 높다 뿐이지 지금 진행되는 경과를 보면 웬만한 독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혹여 마스크라도 쓰지 않고 나서면 내가 마치 큰 범죄라도 저지른 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살 만큼 산 듯 보이는 노인이 완전무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그닥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기를 쓰는 것인지... 인명은 재천이라는데 말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선거철이면 으레 상대방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전략, 소위 흠집 내기 식 네거티브 전략이 난무하지 않아서 좋다. 지금쯤이면 없으면 말고 식의 아무 말 대잔치가 난무하고 네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승산도 없는 말싸움이 치열했을 터인데 어떻게든 싸움을 걸어보려고 해도 백약이 무효인 상황인 듯 보인다. 심지어 중앙일보는 50대 후반의 실직자 진중권 씨의 딱한 사정을 감안하여 용돈이라도 챙겨줄 심산으로 뉴스도 되지 않는 그의 말을 연일 신문에 실어주고는 있지만 국민들에게 전달되지는 않는 듯하다. 오늘 만났던 한 사람은 진중권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되묻기조차 하는 걸 보면. 그러니 네거티브 전략이든 뭐든 당장 선거운동에 나서야 하는 야당으로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마냥 달갑지는 않을 터, 어떻게든 이 국면을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모습이다.

 

급변한 날씨 탓인지 거리에는 몸을 옹송그린 채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망자가 속출했던 메르스 사태 당시에는 모든 게 국민 탓이라고 했던 조선일보는 사망자 한 명 없는 현 시국에서는 모든 게 정부 탓이란다. 어쩜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 있는지... 추위 탓인지, 우리나라 보수 언론의 민낯이 부끄러워서인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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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결 - 결을 따라 풀어낸 당신의 마음 이야기
태희 지음 / 피어오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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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적당한 마음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노련한 비즈니스맨일지라도 말이다. 때로는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는데 내가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처럼 관계로 맺어지는 마음의 거리는 지나치게 멀거나 가까워지는 게 다반사, 적당한 거리를 기계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데 답답함이 있다. 평생에 걸쳐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의 상처를 평생 지고 갈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작든 크든 말이다.

 

태희 작가의 <마음의 결> 역시 인간의 운명과도 같은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는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안 그런 척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것만 같아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그때는 왜 그랬을까? 지난 시절을 후회하기도 하면서 울고 웃게 된다. 꾹꾹 눌러 참아왔을 뿐 남들에게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조금쯤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긴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안으로만 향했던 마음의 칼날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고민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다. 그런데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다들 비슷한 이유로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잘 했는데 상대방은 왜 그럴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했는데 왜 저런 반응이 나타날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저 사람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는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서, 내가 생각하는 상식의 틀에 맞춰 생각을 하고 잇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관계에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먼저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한다." (p.233)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삶을 시샘하면서 누가 사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자책을 하고, 때로는 좌절을 하는 바람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였던 게 아닌가. 그러느라 우리는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를 소비했던 건 아닐까. 책에서 저자는 '1부 글로 마음을 펼친다'를 통하여 관계 맺기의 어려움과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여러 상처와 치유법을, '2부 너의 마음을 읽는다'를 통하여 사랑과 이별, 그 영원한 숙제에 대하여, '3부 우리의 결이 같기를 바란다'를 통하여 자기 자신 잘 대하기에 대하여 쓰고 있다.

 

"사람은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때 끝까지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주는 힘. 그것이 어쩌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p.248)

 

마음의 병은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내도 좋다. 그 사람의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는 말 한마디가 내 상처의 치료제가 되고, 그와 같은 경험이 같은 상처에 대한 면역력을 키운다. 육체의 병은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마음의 상처는 기억이 거듭될수록 병은 깊어지고,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완치란 있을 수 없다. <마음의 결>과 같은 책이 독자의 마음을 다독이고 상처를 잊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새로운 기억이 마음의 상처를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는 한 언제든 상처는 재발하게 마련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떠들썩한 요즘, 겉으로 드러나는 병은 오히려 치료가 쉬울지도 모른다. 정작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마음의 병이 아닐까 싶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는 이제 겨우 2만 명을 넘었을지라도 마음의 병을 앓는 환자는 예전에 벌써 70억 명을 돌파했을지 모르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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