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 전날의 무겁고 더딘 시간의 흐름처럼 하늘은 온 종일 어둡고 칙칙한 구름에 가려 시간의 경과를 도통 가늠할 수 없는 하루였어요.  나는 그 거무튀튀한 어둠을 응시하며 냉기가 도는 푸른 빛의 형광등 조명 아래서 긴 하루를 견뎌냈구요.  인터넷에서는 실시간으로 전국의 교통상황을 내보내고 있었지요.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귀성차량의 행렬 속에서 앞 차량의 번호판을 나도 모르게 외우는 것은 얼마나 가치 없고 불행한 일인지요.  나는 그 행렬 속에 끼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우울을 조금쯤 털어낼 수 있었답니다.

 

낮의 어둠은 농도에 있어 밤의 어둠에 뒤진다 할지라도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어깨를 짓누르는 어둠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받치며 한동안 어깨를 웅크렸던 탓인지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어오는 느낌이었어요.  정말이지 이런 날은 뭘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법이지요.

 

그렇다고 설 명절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아니랍니다.  그럴 나이는 한참이나 지났죠.  명절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어쩌면 학창시절에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쭈욱 약간의 중압감과 의무로 명절을 맞이했었던 듯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명절은 차츰, 과거의 낭만은 조금씩 퇴색하고 일 년 중 연휴가 있는 시즌쯤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농도 짙은 어둠이 가볍게 내려앉았습니다.  명절 연휴는 벌써 시작되었군요.  호시노 미치오의 <여행하는 나무>를 읽고 있습니다.  가벼운 어둠 속에서 무거운 문장을 읽으려니 내 몸이 지구 중심을 향해 깊이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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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이유 - 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밥장 글.그림.사진 / 앨리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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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하여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더없이 멋진 말로 정의하였지만 나는 그 중 "여행은 삶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향해 간다."는 루이 페르디낭 쎌린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저서 <밤 끝으로의 여행> 도입부에 나온 말입니다. 여행은 삶의 저편에 속한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쎌린느의 정의는 나로 하여금 여행에 대한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게도 하였지만 때로는 현실과 아주 멀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온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나 현실에 붙잡힌 채 살다 보면 여행은 한낱 상상 속의 그 무엇이 되곤 합니다. '삶의 온도가 빙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그렇게 동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던 후지와라 신야의 고백에 비추어 보면 나에게는 아직 삶의 온기가 조금쯤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세월이 좋아져서 요즘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게 해외여행이라지만 실상 떠나고 싶다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차를 몰고 휑하니 떠난 주말여행이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여행 서적을 읽으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는 게 고작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행은 때로 잊혀진 꿈이자 로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밥장의 <떠나는 이유>를 읽었습니다. 황금같은 주말에 말입니다. 내가 글을 쓴다면 아마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쯤 되지 않을까 싶은, 서글픈 기류가 듬성듬성 떠다니는 주말 오후에 작가와 함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봅니다. 마음 한켠에는 '언젠가는 나도...' 하는 옅은 희망을 품고서 말입니다.

 

밥장의 여행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어쩌면 그의 책은 처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소개를 보면 이런 저런 책을 여러권 집필한 인기 작가인 모양인데 왜 나만 몰랐던 것일까요. 작가는 꽤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더군요.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림에 빠져 아티스트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네요. 여행 마니아로도 유명한 저자는 이 책에서 그가 뽑은 여행의 아홉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 아홉 가지 키워드는 '행운, 공항 + 비행, 자연, 사람, 음식, 방송, 나눔, 기록'입니다.

 

"뉴요커의 입맛을 사로잡은 타바론 차는 티 소믈리에가 여러 가지 차를 섞어 그 손님만의 향을 만들어주는 차라고 합니다. 저도 '장소'라는 재료를 섞어서 저만의 여행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이 책은 장소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밥장만의 블랜딩으로 만들어낸 여행의 맛과 향에 가깝습니다." (p.21)

 

열거한 키워드만 보더라도 이 책의 내용을 대강 어림할 수 있겠지요? 그 중 방송과 나눔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그랬습니다. 작가는 이미 EBS <세계문화기행>을 비롯한 몇몇 여행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방송 큐레이터로서의 욕심보다는 타고난 여행 DNA의 촉수가 여행을 도와줄 여러 분야의 냄새를 맡고 그곳으로 뻗어가도록 부추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함께 남수단에 다녀온 적이 있다는 저자는 그곳에서의 경험이 꽤나 강렬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내전이 일어나 갈 수도 없는 그곳을 다시 가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나눔' 편에 잘 드러납니다.

 

"중세의 수도사 테오필루스는 예술가의 재능이 질투라는 지갑과 이기심이라는 창고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하고, 예술가 역시 자신의 재능을 기꺼운 마음으로 예술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예술이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하지 않는데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은 가난하더라도 예술을 많은 이들과 나누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재능나눔으로 벽화를 그리러 가거나 그림을 그릴 때면 조용히 지켜보다 한마디 툭 던집니다. 그 말을 들으면 다시 힘이 솟아납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더라."" (p.289)

 

각 챕터의 끝에 수록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음악’에는 작가가 각각의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을 소개하고 있는데 언급한 음악을 들어볼 수 있도록 QR코드를 수록해 놓은 것도 이채롭습니다. ' 어떻게 일상과 떨어져있으며, 또한 일상과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복합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여행이다.'라고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온도가 임계점 이하로 내려가거나 미지의 세상으로부터 '먼 북소리'를 듣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배낭을 꾸려 홀연 그 낯선 세상으로 뛰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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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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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쉰들러리스트'의 엔딩 크레딧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우주를 구하는 것"이라는 탈무드의 금언과 함께 시작된다.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리스트'의 엔딩 크레딧을 본 후 나는 길어야 3분을 넘지 않는 엔딩 크레딧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의 주제가나 테마음악과 함께 영화 제작을 위해 수고하거나 도움을 준 사람들을 소개하는 엔딩 스크롤(scroll)을 보면서 영화의 마지막을 차분하게 음미하거나 영화의 감동을 되새김질하는 그 잠깐 동안의 여유는 영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필수도구인 셈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는 영혼의 편지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직은 어둠 속에서 차분하고 조용히 흘러가야 할 그 시간이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엔딩 스크롤이 뜨자마자 퇴장을 다그치는 듯 실내가 밝아지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려는 관객들로 소란스러워진다. 나는 영화의 감동이 채 가슴을 적시기도 전에 조급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야 한다. 그런 경험들은 유쾌하다거나 기쁜 일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영화의 감동마저 경감시킨다.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쓰거나 독서 토론에 참석하는 것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엔딩 크레딧을 보며 영화의 감동을 되새기듯 각자의 관점에서 소설을 해석하고, 인상 깊었던 문장을 다시 읽어주고, 궁금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은 소설을 읽는 시간만큼이나 즐겁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학창시절 이후 독서 클럽이나 주말 독서 모임에 나가본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이동진 작가와 김중혁 작가 두 사람의 대화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공감해요. 결국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게속 누군가의 마음을 상상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런 오해도 아예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오해야말로 우리가 결국 겪어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p.69~p.70)

 

이 책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메인 테마 도서로 다루었던 80여 권의 책 중 청취자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외국 소설 7편을 엄선하여 방송 내용을 다시 글로 옮겨 정리하고 보충한 책이다. 나는 사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들어본 적도 없고, 어떤 도서를 테마 주제로 선정했는지도 모르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설 7권은 익히 읽어본 책이었던지라 때로는 무릎을 치며,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에서 시작하여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로 이어지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로 끝맺는다. 나는 이 중에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뺀 나머지 6권의 책에 대해 리뷰를 썼었다. 사실 <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엄청나게 지루함을 느꼈던 터라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소설 초반에 파이가 카톨릭 신부를 찾아가 계속 질문을 던지잖아요. 신은 왜 그랬고 신의 아들은 왜 그랬는지 의문을 갖지만 신부는 '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하구요. 저는 사랑과 믿음이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일단 사랑하게 되면 믿게 되는 거죠. 저 역시 종교는 믿어야 이해하게 된다고 봐요." (p.230)

 

이 책에 선정된 7편의 소설이 각각의 작가가 쓴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동진 작가와 김중혁 작가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은 따로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명작이고 작가의 역량이 종합적으로 잘 표현된 작품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체실비치에서>나 <암스테르담>을 더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 이동진 작가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해변의 카프카>를 김중혁 작가는 <땅속 그녀의 작은 개>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선호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두 명의 작가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때로는 일반 독자가 생각하지 못하는 전문적인 분야로 안내하여 책을 읽는 독자를 곤혹스럽게 할 때도 있지만, 책의 저자와 소설의 주제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가 하면 '내가 뽑은 문장'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소설 속 최고의 문장을 소개하고 있다. 대담집이라는 게 대체로 산만하거나 주제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은데 체계적으로 기술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작가에게 나는 대체로 우호적인 입장이지만 그 중 무라카미 하루키와 밀란 쿤데라는 광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인지 하루키 작품의 평에 있어서 '평행우주'론은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행우주에 관한 생각을 지금 막 떠올린 것은 아니구요, 이 책을 읽다가 느껴진 것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행우주에 대한 신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는 시간에 관한 문제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때 없어진 것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다른 차원에 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또 놀라운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장을 구분할 때 평행우주에 대한 생각을 적용하는 것 같아요. 화자를 계속 엇갈리게 넣는다든지 하면서요. <1Q94>가 전형적으로 그렇고 <태엽 감는 새>도 일부분 그렇고 <해변의 카프카>도 그랬거든요." (p.311)

 

나는 지금껏 한 명의 작가에 의해 씌어진 독서 일기나 비평, 혹은 책을 소개하는 글을 주로 읽어 왔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말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어느 블로거의 리뷰에 댓글을 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입체적이면서 신선하다. 게다가 자신도 이미 다 읽었던 책이라면 그들 옆에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충동이 절로 든다. 독서 토론은 그야말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감동을 되새기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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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림원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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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단 며칠의 짧은 휴가를 받은 내가 얼굴만 겨우 아는 누군가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어느 작은 마을을 산책하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  휴가는 한번쯤 지루함을 느낄 만큼 길지 않아야 하고, 짧아서 오히려 아쉬움이 남는 그런 정도면 좋겠고, 동행하는 사람은 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하여 내 속내를 스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이라면 좋겠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어도 서로를 어색해 하거나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고, 혹여라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산책에 방해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외딴 곳이었으면 좋겠다.  하루키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무중력의 삶'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소설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의 한시적인 삶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하루키 소설은 대개 흥미진진한 전개와 몰입도를 보여주지만 결국에는 특유의 허무주의로 귀결되곤 한다.  소설 속에 기이한 사건들이나 의미심장한 장면들이 많지만 그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나 깔끔한 결말 없이 독자들의 판단에 내맡기는 식이다.  등장인물 중 누구에게도 삶을 움켜쥐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그저 스쳐지나는 풍경처럼 비춰진다는 것이다.  상세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어느것 하나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의 개성과 특유의 스타일이 가장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는 이 작품을 통하여 '군조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하게 된다.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은 1970년 8월 8일에 시작하여 8월 26일에 끝나는 18일 동안의 이야기로서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는 주인공 '나'가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인 항구도시로 내려와 겪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인 '쥐'와 바에서 맥주를 마셔대며 보낸다.  '내'가 '쥐'와 친해지게 된 계기는 사고 때문이었다.  둘은 만취하여 운전을 하다 차가 거의 박살날 정도로 큰 사고를 낸다.  그러나 둘 다 숙취에 시달릴 뿐 다친 데 없이 멀쩡하다.  21살의 '나'와 22살의 '쥐'는 그렇게 어울려 지낸다.  어느 날 '나'는 바의 화장실에서 만취해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하여 집까지 바래다 주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녀와 친해진다.  그러나 그녀와 친해질수록 알 수 없는 고독감이 커져만 간다.

 

사실 이 작품은 소재의 특이성이나 스토리 구상의 기발함 때문이 아닌 하루키의 문장력이 인상적이다.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와 신선한 문장들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나는 이따금 이 책을 들춰 볼 때마다 이것이 하루키의 초기작이라는 생각을 잊곤 한다.  이제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한 풋내기 소설가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자연스러운 전개와 막힘 없는 문장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죽은 인간에 대해 무슨 말을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에 대해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죽음으로, 그녀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살아남은 우리들은 해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는다.  때로 나 자신이 한 시간 단위로 나이를 먹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그것은 진실이다."    (p.109)

 

작품 전체에서 느껴지는 상실감과 공허함은 하루키 문학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특이한 에피소드와 세밀하고 감성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독자들에게 툭 던져놓는 듯한 작가의 전개 방식은 어떤 결말이나 해석을 유보한 채 그 전권을 독자들에게 떠넘긴다.  때로는 작가의 이런 태도가 불만일 때도 있지만 전체의 맥락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관되게 유지하는 작가의 필력은 참으로 대단하구나 느끼게 된다.  하여 하나의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나는 여름이 되어 그 거리로 돌아가면, 늘 그녀와 걷던 길을 걷고, 창고의 돌계단에 앉아 혼자서 바다를 바라본다. 정작 울고 싶을 때는 오히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법이다." (p.169)

 

하루키 자신의 본모습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재미있다.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지금은 반쯤 잊혀져 기억도 아련한 그의 소설이 돌연 생각날 때가 있다.  오늘도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고 다 읽을 때까지 책을 놓지 못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몹시 언짢은 일이다. 거짓말과 침묵은 현대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는 두 가지 거대한 죄라고 해도 좋다. 실제로 우리는 곧잘 거짓말을 하고, 심심하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일년 내내 조잘거리고 그것도 진실밖에 말하지 않는다면, 진실의 가치 따위는 없어지고 말지도 모른다."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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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2월은 마음도 몸도 늘 바쁘다.

일년 중 가장 날수가 적은 달이기에 마음 단단히 먹고 알차게 보내야지 다짐하지만 언제나 빈 결심으로만 끝날 뿐 무엇 하나 제대로 끝을 맺었던 적은 없었던 듯하다.  그저 '벌써 3월이야?' 하는 놀람의 말로 지난 2월을 아수워했을 뿐이다.  올해는 숫제 게획도 세우지 않았다.  흐르는 대로 두고 보다가 가벼운 마음으로 3월을 맞을 셈이다.  다만 2월이 다 가기 전에 좋은 에세이 두어 권 읽었으면 싶다.

 

 

 

내가 헤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편견없는 '책사랑' 때문이다.  평생에 걸쳐 책을 좋아했던 그의 한결같음은 문장 곳곳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평생 기교로 책을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마음으로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  헤세는 흔들림 없는 마음을 자신의 영혼에 담아 아무리 우려내어도 마르지 않을 깊은 울림의 글을 남겼다.

 

 

 

 

 

 

 

 

교육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의 대표 작가이자 교육 실천가인 하이타니 겐지로를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작가가 40대 무렵에 쓴 산문을 모았다는 이 책이 나의 시선을 끌었던 이유는 '상냥함'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전국민이 분노 조절 장애를 앓고 있는 듯한 요즘의 우리에게 상냥하다는 말은 너무나 멀어진 느낌이 든다.

 

 

 

 

 

 

 

 

'TED'에서 강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밋밋한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함께 없던 힘도 짜내어 주먹을 불끈 쥐게 되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스(moth)'는 처음 들었다.  테드만큼이나 유명한 스토리텔링 이벤트라는데 말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내가 강제윤 시인을 알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허균의 <숨어사는 즐거움>을 읽으려 했는데 나는 그만 강제윤의 <숨어사는 즐거움>을 읽고 말았다.  저자가 다른 같은 제목의 책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물론 책이 맘에 들지 않았으면 단박에 던져버렸겠지만 처음 접한 그의 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그 후로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더 오래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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