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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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이다. 내가 만만하거나 편해 보여서 그러는지 아니면 그곳 지리에 유난히 밝을 것처럼 보여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있는 곳의 사방 십 미터 이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은 죄다 내게로 몰려들곤 한다. 그리고는 약간의 쭈뼛거림이나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다짜고짜 묻곤 하는 것이다. "말씀 좀 물을게요. 여기에 가려면..." 젠장, 나도 초행인 걸 어쩌란 말이냐. 이런 일이 누적될 때마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는 '그래, 결심했어. 이제부터 까칠해지자.' 다짐하곤 했다.

 

내가 선천적으로 길을 잘 안내해줄 것 같은 특유의 분위기를 갖고 태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꼬장꼬장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까칠하기로 치자면 '오베' 뺨친다고 말할 수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에 나오는 '오베' 말이다. 그는 사실 냉정하다거나 까칠하다기보다는 실없이 웃지 않을 뿐인데 철없는 독자들은 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는 속으로는 한없이 여리고 정이 많은 사람이지만 헤살헤살 잘 웃거나 사근사근하게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색깔의 전부였다. 그녀를 보기 전까지 그가 사랑했던 유일한 건 숫자였다. 그에게 유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라곤 없었다. 그는 따돌림을 당하지도 않았고 따돌리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스포츠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중심에 있었던 적도 없었고 겉돌았던 적도 없었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p.57~p.58)

 

이 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오베'들을 위한, 세상으로부터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는 모든 '오베'의 항변이자 그들을 위한 변론인 셈이다. 무뚝뚝하지만 정의감이 넘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오베는 열여섯에 고아가 된다.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오베. 그는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기차 청소부를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나 운명의 여인 소냐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오베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결코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춤을 춰본 역사가 없었다." (p.153)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오베의 삶에 어느 날 불행이 찾아온다. 교통사고로 뱃속의 아이를 잃고 소냐는 불구의 몸이 된다. ADHD를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소냐는 셰익스피어를 읽게 하며 하루하루를 헌신하다가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소냐와 함께 40년 동안 한 집에서 살고, 같은 일과를 보내고, 한 세기의 3분의 1을 한 직장에서 일했던 오베는 이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아야 한다. 그게 사람들이 했던 얘기였다. 그녀는 선을 위해 싸웠다. 결코 가져본 적 없는 아이들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오베는 그녀를 위해 싸웠다." (p.280)

 

오베는 자살을 결심하고 이제 막 자살을 결행하려는 순간 이웃집에 젊은 부부가 이사를 온다. 오베는 자신의 자살을 막은 젊은 부부와 어린 두 딸에게 처음에는 까칠하게 대하지만 점점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동안 지켜온 원칙과 소신은 마을에 새로 이사온 다른 사람들과 번번이 부딪쳐 말썽을 일으킨다. 그런 그들이 못마땅한 오베는 죽은 아내 생각이 간절해진다. 소냐는 그를 완전히 이해했던 단 한 명의 이웃이자 동지였던 셈이다. 목을 매 자살하려던 그는 방법을 바꿔 차고에서 차의 시동을 켜 놓은 채 배기가스에 의한 질식사를 시도하는가 하면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총기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에 의해 그의 자살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는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 남자였다. 훈장이나 학위나 칭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래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소냐는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 남자를 꼭 잡았다." (p.206)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자부심.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 어떤 길을 택하고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나사를 어떻게 돌리고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자부심.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은 인간이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였던 세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p.371)

 

오베는 결국 자신이 의도했던 자살은 실패하지만 마을의 이웃사촌들을 위한 여러 일을 참견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 오베가 자살을 결심했던 이유도 따지고 보면 주변에서 그를 이해할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베와 마을 사람들이 펼치는 시끌벅적한 여러 에피소드는 갈등과 분열을 거쳐 진한 감동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p.436~p.437)

 

첫인상은 무뚝뚝하고 까칠해 보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진국인 사람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웃의 어른들은 모두 그랬던 것 같다. 내 아들, 내 손자가 아닐지라도 누구든 잘못을 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곤 했다. 그 시절에는 '오베'가 너무나 흔했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 더 이상 '오베'는 보이지 않는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백주 대낮에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어두운 골목길에서 여학생을 희롱하여도 누구 하나 그들을 막지 않는다. '오베'가 사라진 이 시대의 골목골목엔 CCTV만 덩그러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 존재할 세상의 모든 '오베'를 위하여,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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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 유품정리사가 떠난 이들의 뒷모습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
김새별 지음 / 청림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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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죽은 자를 찾아 애도하며 전국을 떠도는 주인공 시즈토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린 소설이지요. 내게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도 이따금 무심결에 떠오르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지요. 이 소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현대 사회의 가장 큰 병폐는 '삶과 죽음의 완벽한 분리'에 있다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생각의 지나친 비약인지도 모르지만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을 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전국의 어느 마을을 가더라도 삶과 죽음은 항상 같은 공간에 있었습니다. 생명의 탄생도 늘 우리 곁에 있었지요. 자신이 태어나고 살던 집에서 죽음도 함께 맞았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이른 나이부터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자연의 섭리로 순수히 받아들일 수 있었고, 가족 구성원의 배웅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떠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지요.

 

그러나 현대적인 병원이 생기면서 삶과 죽음은 철저히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진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낯설고 불편한 공간일 수밖에 없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게 얼마나 큰 불행인지요. 그러나 김새별의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읽어보면 병원에서 맞는 죽음마저도 행복인 양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독사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고독사는 그가 얼마나 고독하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고독하게 살았는가를 말해준다. 병 때문이든 스스로 목숨을 끊든, 그 쓸쓸한 삶이 고독사를 불러오고 그 자리에는 비워진 술병, 높다랗게 쌓인 쓰레기, 텅 빈 냉장고, 먼지 앉은 바닥, 때로는 명품 의류와 번쩍거리는 보석들이 증거로 남는다. 삶의 의지를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들이 죽은 것은 아마도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p.158)

 

'유품정리사'라는 생소한 직업의 저자는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들을 이 책에 짤막짤막한 글들로 옮겨 놓았습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의 글이 특별히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실화가 주는 무게감도 있으려니와 목격되지 않는 숱한 죽음에 얽힌 기막힌 사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그 죽음 하나하나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개별적인 것이었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는 이유가 있ㅇㅆ습니다. 삶과 죽음이 분리된 이 시대에 그것은 곧 닥칠 훗날 내 죽음의 모습일 수도 있는 까닭입니다. 스크랩된 다른 블로거의 글이 내 블로그에서 마치 내 글인 양 읽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동안 만난 외로운 죽음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 가족이나 이웃의 단절, 유품에서 나온 자녀들의 사진.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적 도움이나 위로보다는 그저 따뜻한 안부 인사 한마디였을 뿐인지도 모른다." (p.233)

 

죽음이 흔한 세상에 함구하며 외면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닌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볼 일입니다. 나와 너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인생에서 단 하루의 삶만 허락된 사람도 철저하게 죽음을 외면하는 세상,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징조나 기미만 보여도 삶과 죽음을 구분짓기 위해 미리 문을 걸어 잠그고 이쪽 편의 삶을 지키려 애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죽음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내 어렸을 적에 보았던 것처럼 죽음은 항상 삶에 깃들어 있음을 명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죽음을 영영 회피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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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이라서 하는 말이지만 추억은 만드는 게 아니라 가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분재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도 그렇듯 자신이 선택한 식물을 잘 가꾸고 다듬어 좋은 분재로 만드는 것처럼 추억도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 경험으로는 그게 맞는 것 같다. 아무리 하찮은 경험도 시시때때로 떠올려 생각해 보면 '그래, 그때는 참 좋았지'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심지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던 기억도 시간이라는 필터에 걸러지면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지...

 

요즘 들어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딱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나는 그닥 살가운 손자는 아니었다. 할머니의 꼿꼿한 성격 탓에 우리는 서먹하고 데면데면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손주들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깊었던지... 힘들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손자들을 얼마나 대견해했던지...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꾸중을 들었던 옛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곤 한다. 많은 식구에 먹을 거라곤 옥수수와 고구마가 전부였던 시골의 작은 집에서 겨울은 추위보다도 허기 때문에 나기 힘든 계절이었다. 해가 짦은 겨울이면 우리는 초저녁에 이른 저녁을 먹은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러나 새벽이 되면 배가 고파 잠에서 깨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우리는 부뚜막에 올려 놓은 삶은 고구마를 몰래 꺼내 먹곤 하였다. 잠귀가 밝았던 할머니는 그때마다 우리를 심하게 야단치셨고 우리는 그게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빈 속에 찬 고구마를 먹고 혹여라도 탈이나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그리 하셨을 텐데 그때는 정말 할머니가 야속하고 미웠었다.

 

찜통더위라는 말이 어울리는 요즘이다.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 때문에 늦은 밤 잠에서 깨면 나도 모르게 문득 할머니 생각을 하곤 한다. 모가 나고 아팠던 추억도 되풀이하여 떠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리운 추억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럴 때 나는 추억은 만드는 게 아니라 가꾸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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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어찌나 덥고 후텁지근하던지 동네의 한 커피숍에 들러 늦은 시각까지 있었습니다.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음료수 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채 하릴없는 시간만 죽이고 있었죠.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은 '어서 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하고 바랄 때는 시간은 마치 느림보 거북이처럼 도통 그 속도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조명이 어두워 책을 읽기도 어려웠고 구석 자리에 홀로 앉은 남자가 여기저기 시선을 돌리면 괜히 치한으로 오해받지나 않을까 걱정되기도 해서 차라리 눈을 꾹 감은 채 커피숍 내부에 떠도는 잡다한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한 채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한밤중에 만나야 할 무슨 긴박한 볼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볼일을 핑계삼아 피서를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제가 평일에 머무는 아파트에도 에어컨은 있지만 저는 왠지 혼자 있을 때 에어컨을 튼다는 게 무슨 크나 큰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좀체로 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처의 커피숍으로 피서를 간 것이지만 말입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음원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사람들은 저마다 소통의 목적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는구나.' 하는. '그러므로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서로에겐 먼 외계에서 온 이방인에 불과하구나.' 하는.

 

히말라야의 아시아 흑곰 얘기를 좀 해볼까요?

아시아 흑곰은 털이 검기 때문에 사냥감인 인도 엘크 사슴의 눈에 띄기 쉽습니다. 특히나 히말라야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설산에서 곰의 움직임은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렇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업는 일 아니겠어요?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죠. 산 아래쪽에서 생활하는 사슴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아시아 흑곰은 산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아 눈밭을 굴러내려갑니다. 산비탈을 굴러 내려가면서 몸에는 눈이 달라붙게 되고 곰의 몸은 이내 눈덩이로 변하여 사슴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는 방심한 사슴을 덮친다고 합니다. 영리하지요?

 

그러나 영리하다는 표현은 곰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사슴의 입장에서는 영악하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하겠지요. 우리는 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신이 유리한 쪽에서 행동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마치 곰과 사슴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조차 외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은 제 스스로 외계인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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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 1
김재식 지음, 정마린 그림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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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대한민국에는 멘토가 넘쳐났다. 넘치는 건 멘토뿐만 아니라 필요로 하는 정보는 무엇이건 차고 넘쳤다. 그러나 정보가 늘어날수록 비례하여 두려움도 증가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불과 이십 몇 년 전, 넉넉 잡아 삼십 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정보는 접근 가능한 몇몇 사람들만의 전유물로만 존재했었다. 그러므로 그 시절의 사람들 대부분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삶에 돌진했었고, 사전 지식도 없이 오직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지식을 쌓아나갔다. 삶은 모험이었고, 지식은 모험으로부터 얻어지는 값진 수확물이었다. 2015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지식이나 정보는 고작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떠도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아무도 그 흔하디 흔한 정보를 제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려 들지 않았다.

 

외식을 하러 나갈 때도, 버스 시간을 알고자 할 때도, 심지어 퇴근 후 자신의 집으로 향할 때도 정보를 찾는 일은 빼놓지 않았다. 비록 한 번 쓰이고 버려질 정보였지만 사람들은 공을 들여 검색을 하고, 조금이라도 실수를 줄여보려는 듯 찾을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모조리 뒤져보곤 하였다. 사는 데 드는 시간보다 오히려 살아가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나 편히 살기 위한 사전 지식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사는 것보다 살기 위한 준비 작업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었다. 경쟁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신이 검색한 지식의 양이 항상 부족한 듯 느껴졌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이제는 양으로서의 지식 그 자체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동전 수집을 하듯 비슷비슷한 지식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건 대한민국 국민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중학교에 입학할 때도,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대학교에 입학할 때도, 연인과 사랑할 때도, 결혼할 때도, 아이를 낳을 때도, 부모가 되고 늙어갈 때도, 심지어 죽어갈 때에도 자신이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를 찾아 사람들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썩은 고기를 향해 돌진하는 하이에나처럼 말이다. 실수를 줄여보겠다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직 검색을 위한 정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자신이 가진 정보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획득한 새로운 정보만을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정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정보 획득에 뒤쳐졌다는 공포가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정작 삶을 살아보기도 전에 '삶은 두렵다'는 정보부터 배워야만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사람들 모두는 머릿속 정보는 하등 필요없는 것으로만 여겼다. 삶은 부딪쳐 깨닫는 것이지 미리 알고 이것저것 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겁날 것 없이 돌진하는 장갑차처럼 사람들은 삶을 향해 무모한 도전을 계속했다. 삶은 제 몸뚱아리 하나를 불사르겠다는 의욕 충만한 젊은이들의 전쟁터였다. 사랑이나 결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배우자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심지어 사지가 멀쩡한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알지 못한 채 두 사람은 만났고 평생을 함께 살았다. 짝이 정해진 순간부터 사람들은 '인물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잘 생겨서 뭐해'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김재식의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을 읽으며 내게 들었던 생각들이다. 책을 다 읽은 후 저자의 면면을 살펴 보니 페이스북과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대표 커뮤니티인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의 운영자로서 그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2004년에 시작된 ‘사랑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은 사랑의 슬픔과 기쁨과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전하는 ‘사랑 멘토’로 성장해, 현재 200만 명에게 위안을 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정작 '사랑을 잘 해보겠다'는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사랑에 대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정보 찾기에만 열중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몰릴 수밖에.

 

때로는 사랑에 관한 좋은 글귀를, 또는 짧은 체험담을, 혹은 시의 형식을 띤 짧은 사유를 담은 이 책은 사랑에 대한 정보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어지간히 인기를 끌 만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사랑은 직접 체험하는 것이지 생각에서 머무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할 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대담함뿐이다. 사랑을 하면서 우리가 겪는 갖가지 실수들, 이를테면 오해와 갈등 심지어 이별까지도 하나하나 겪고 헤쳐나가겠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이것저것 재느라 시간을 다 보낸다면 자신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아는 게 없다는 두려움이다. 지식에 비례하여 삶이 풍요로워지는 건 절대 아니다. 허술한 여행이 더 기억에 남는 것처럼 무모한 사랑이 더 많은 추억을 남겨주는 법이다. 인생에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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