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습니다만 자신의 노력에 비해 과도한 칭찬을 받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오늘 새벽 산행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어난 탓에 등산로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이 겨울에 비해 배는 증가한 듯합니다. 어차피 빈 손으로 내려올 바에는 쓰레기라도 주워서 내려오는 게 환경에도 좋고, 기분도 좋고 여러 모로 나쁠 게 없으니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자고 생각했었고, 아침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면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려 있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작은 골판지 박스며, 페트병이며, 사탕 껍질이며, 사용한 화장지 등을 두 손에 나눠 들고 내려오는데 오늘 처음 본 아저씨 한 분이 나를 향해 과도한 칭찬을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하시다는 둥 너무나 좋은 일을 하신다는 둥 온갖 칭찬을 늘어놓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하여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줍는 사람 따로 있고, 버리는 사람 따로 있느냐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 대한 성토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스로 그분을 진정시키고 산을 내려오는데 절로 웃음이 났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우리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을 통해서만 삶에서 벗어난다. 그때 우리는 시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어떤 지속을 느끼지만, 곧바로 한층 더 불투명해진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조차 실은 무심하다.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시골길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살해될 수 있다. 그러니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두려운 일은 아니다. 진정 두려운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안에서 모두가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는 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세상의 빛> 중에서)


크리스티앙 보뱅의 지적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26년도 벌써 두 달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다가오는 3월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시시각각 길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윤 : 하나코는 없다 The Last of Hanak'o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13
최윤 지음, 브루스 풀턴.주찬 풀턴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벽 등산로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등산로뿐만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안개에 점령당한 듯했다. 어제 내린 습설이 밤새 낮아진 기온에 서릿발처럼 얼어붙어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낮에는 기온이 꽤 오르겠는걸' 속으로 생각하면서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안개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는 최윤 작가의 소설이 떠올랐지만 끝내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알듯 알듯 하면서도 결국 포기하게 되는 순간의 답답함이란... 이런 경험이 전에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닌데 때로는 입에 붙었던 책의 제목마저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리게 될 때, '나의 기억력도 이제 옛날 같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깊은 한숨과 함께.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자마자 책의 제목부터 확인했다. 그래, 맞아. <하나코는 없다>였지. 왜 그게 떠오르지 않았을까.


"폭풍이 이는 날에는 수로의 난간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안개, 특히 겨울 안개에 조심하라......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p.8)


하나코는 별명이었다. 코가 예뻐서 붙여진 별명.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모임의 어느 한 사람이 하나코에게 전화를 걸면 그녀는 혼자 또는 늘 똑같은 여자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흔쾌히 나와주었다. 그런데 '공기나 혹은 적당한 온기처럼 늘 그들 곁에 있던 하나코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렇게 자주 어울렸으면서도 그들이 하나코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하나코가 살고 있다는 이탈리아로의 출장에 자원한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그는 안개처럼 모호한 하나코의 실체를 되살리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파탄시킨 '그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지금도 역시 떠올리기 싫다는 듯 자꾸만 머뭇거린다.


"그 자신을 포함해 무리들 중의 누구도 하나코에게 자신들의 결혼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 딴 친구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로서는 그저 단순한 부주의였다. 물론 그는 청첩장을 준비하던 때만 해도 그녀에게 보낼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분주한 일정에 밀려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p.62)


남자들의 모임에 홍일점으로 참여했던 하나코. 그녀는 어쩌면 그들 무리 개개인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일종의 어장 관리 차원에서,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지하려는 차원에서 어떤 장신구처럼 이용한 듯 여겨진다. 유쾌하지 않은, 어쩌면 회피하고 싶은 기억을 안고 그는 하나코와의 전화 통화에 성공한다. 서울이 아닌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그는 갑자기 힘이 조금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보러 기차를 타고, 그녀가 말해 준 이름의 거리를 찾아 헤매고,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고, 그녀의 책상 옆에 앉아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그녀의 생활공간으로 초대되고, 이 나라에서 하듯이 집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고 환담을 할 엄두가 나지를 않는 것이다."  (p.74)


그는 하나코와의 통화에서 모임 멤버였던 J나 P도 그저 전화만 하고 방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임의 어느 누구도 하나코와 사적으로는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도 역시 하나코를 만나지 않은 채 로마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그는 분주한 나날을 보냈고, 어느 날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에서 외국 바이어들에게 보낸 홍보 잡지에 실린 하나코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된다. 하나코를 만나지 않고 출장에서 발길을 돌렸던 그는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이삼 년 한 후 그를 포함한 다섯 명의 모임 멤버와 하나코와 그녀의 친구가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낙동강 근처의 어느 식당으로 놀러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하나코와 윽박지르듯 노래를 강요하는 그들 무리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날 이후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졌었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도시. 이제 기차는 불빛이 점점 드물어지는 인적 없는 어두운 풍경 속을 달리고 있었다. 아래 좌석의 승객들도 등받이를 올려 침대를 만드느라 부산하다가 언제부터인가 갑작스러운 침묵이 왔다. 복도의 소음도 점점 더 줄어들고 기차는 짙은 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여전히 세 개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p.82)


스가 아쓰코가 쓴 <밀라노, 안개의 풍경>도 떠오른다. 안개, 하면 습관적으로 떠오르던 김승옥의 <무진기행>도 언젠가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제목이 뭐였더라, 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창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낮에는 기온이 제법 올랐었다. 산책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던 날씨. 늦은 점심을 먹었던 나는 사무실 근처의 공원을 천천히 걸었고, 봄 햇살에 눈이 녹는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모이를 찾는 비둘기떼가 이리저리 날아 올랐다 다시 내려앉곤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가 들면서 나는 새롭게 맞는 날들이 특별한 감정의 소모가 없는 무던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쁘거나 너무 슬픈 또는 지나치게 화가 나는, 예컨대 평소에 비해 과도한 감정적 소모조차 견디기 힘든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쇠약해지는 기력 탓에 극심한 감정의 소모에 필요한 에너지를 미처 충당하지 못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을 소모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검증한 바는 없지만 말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어가는, 이를테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내세우지 않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남들에게 까칠하게 대하지 않는 수더분한 성격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 역시 내게 일어난 큰 변화 중 하나라면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창밖에는 한겨울에도 자주 보지 못하던 눈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살았던 세세한 흔적들도 저 눈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그 기억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욕심조차 한낱 부질없는 꿈임을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내가 살았던 흔적 역시 초봄에 내리는 저 눈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쉽게 녹아 사라질 수만 있다면 저승으로 향하는 발길이 조금 가볍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국 작가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을 읽고 있습니다. 100여 쪽 남짓의 얇은 소설이지만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인 듯합니다. 이 책에 대한 '추천의 글'을 쓴 정여울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소설에는 삶이라는 거대한 파노라마가, 인간의 부조리와 상실과 치유와 극복의 모든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군가 내 귓가에 집요하게 무언가 간절한 사연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이 다 끝난 줄로만 알았던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위대한 사랑과 희망의 목소리를.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상실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시작되고, 지속되고, 항상 우리 마음속에서 끝내 살아남을, 위대한 희망과 사랑의 이야기를."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차량들이 줄을 지어 달려갑니다. 이렇게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 우리는 잊고 있었던 어느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끝없이 불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행복했던 감정들을 야금야금 소모합니다.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기진한 듯 나른한 피곤이 몰려옵니다. 여전히 눈은 그치지 않고 눈꺼풀의 무게만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firefox 2026-02-25 0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눈오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눈꽃들을 보면서 즐거웠는데, 그 여운을 꼼쥐님 글에서 다시 느껴봅니다.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꼼쥐 2026-02-25 16:59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하루 사이에 날씨가 급변해서 웬만한 눈은 다 녹아버린 듯합니다. 날씨가 어찌나 좋던지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두려움이란 말 따위 - 딸을 빼앗긴 엄마의 마약 카르텔 추적기
아잠 아흐메드 지음, 정해영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규칙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남은 삶도 규칙적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삶이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깨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말 중 하나가 '나만 조심한다고 해서 사고가 안 나는 것은 아니야.'인 것처럼 자신의 삶을 열심히, 앞만 보고 성실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주어진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삶이란 나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와 이어짐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작업이기도 하고, 그와 같은 관계를 나 역시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할 수만은 없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일지라도 가족에게 발생한 끔찍한 사고를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로 인하여 나의 삶이 180도 달라질 수 있음을 어찌 계산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의 국제 탐사보도 특파원인 아잠 아흐메드가 쓴 르포르타주 <두려움이란 말 따위>가 출간되었다. 무너진 공권력과 이 틈을 비집고 성장한 마약 카르텔이 멕시코 지역사회를 어떻게 붕괴시키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범죄 르포르타주 <두려움이란 말 따위>는 마약 카르텔 조직에 의해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범인을 직접 추적해야 했던 미리암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멕시코 타마울리파스주(州) 산페르난도 지역에 살고 있던 미리암 로드리게스와 루이스 살리나스 부부에게는 큰딸 아잘리아와 아들 루이스 엑토르, 막내딸 카렌을 둔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고질적인 외도와 그 반작용으로 대학생이었던 카렌이 엇나가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2년 전이었던 2014년 1월, 플로리스트를 비롯한 세타스 일당이 카렌을 납치했다. 미리암은 애걸복걸하며 세타스의 모든 지시에 따랐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몸값까지 지불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카렌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정부 당국에서는 탄원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형식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등 미리암을 외면했다."  (p.12)


평범한 주부에 지나지 않았던 미리암은 현실을 직시한 후 딸을 납치한 자들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추적에 나선 지 2년 만에 추적 명단 속 6명은 교도소에 수감됐고, 4명은 세타스의 거점을 습격한 해병대에 사살됐다. 이 모든 과정에 미리암이 관여했다. '아마추어 수사관'으로 활약했던 것은 물론 딸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한 DNA 검사 역시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딸의 복수를 위한 집요한 추적 과정에서 가족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카렌의 유골을 수습하고 납치범을 잡아 법정에 세우면 그 위험한 범죄 조직에 맞서는 행위를 그만두겠다던 미리암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권력의 부패와 범죄조직과의 유착으로 인해 자신과 같은 납치 피해자 가족은 수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하였고, 그들의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종 피해자 가족들은 굴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경계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못지않게 불확실함에 시달린다. 상실감이라는 유령과 살며 가족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고문당한다. 희망은 자식이나 남편, 동생, 사촌의 유해라도 찾겠다는 열정이 되기도 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소진시키기도 한다."  (p.208)


4년간 관련 인물을 수백 시간에 걸쳐 인터뷰하고 2만 쪽이 넘는 사건 파일과 재판 기록을 입수해 사건을 재구성했던 저자의 노력 때문인지 범죄 현장을 취재한 논픽션이라는 느낌보다는 범죄 스릴러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멕시코 혁명 이후 탄생한 '걸프 카르텔'이라는 마약 범죄조직의 역사·지역적 배경을 다루면서 걸프 카르텔 조직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범죄조직 '세타스 카르텔'을 다루고 있다. 세타스는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인 산페르난도를 중심으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범죄를 수시로 저질렀고, 이들을 두려워한 마을 주민들 역시 그들을 신고하거나 증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직 딸의 복수를 위해 나섰던 미리암은 실종 피해자 가족 모임을 이끌면서 범죄조직에 맞서 싸웠다. 자신의 안위를 등한시한 채 말이다.


"죽음과 시신 훼손이 일상이 된 곳에서는 당국의 무능함과 냉담함과 무관심도 일상이 된다. 너무 지친 피해자 가족들은 더 이상 당국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그 사실이 폭력으로 엉망이 된 상황을 수습할 책임이 있는 자들을 더욱 둔감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악순환이었다."  (p.318)


한 국가의 치안은 오직 그 나라의 공권력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성숙과 국민 전체의 의식 수준이 그 나라의 치안과 질서 수준을 결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공권력은 시민의 감시나 재촉이 없다면 너무나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처럼 범죄조직에 대한 시민의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범죄는 활개를 치고 이에 맞서야 할 공권력은 더욱 움츠려들게 마련인 것이다.


길었던 겨울도 끝이 보이고 있다. 친위 쿠데타라는 가장 무시무시한 악의 카르텔을 맨몸으로 막아냈던 우리 국민의 용기는 세계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자행되었던 내란과 이를 극복했던 경험이 우리에게 맨몸으로 저항할 용기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까닭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 국민의 용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용기는 우리 국민 전체의 높은 시민의식에서 비롯된다. 보이는 것은 언젠가 닳아 없어질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국민 각자의 시민의식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 명절 연휴가 끝난 엊그제 오후의 께느른한 시간에는 국민 전체의 눈과 귀가 지귀연 재판부로 쏠렸었습니다. 명절이나 여행은 기다리는 시간이 설레고 두근거릴 뿐 막상 닥치면 피곤함과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인해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명절 후에 맞는 출근 첫날은 저마다의 사정을 터놓고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피곤의 그늘과 느린 발걸음만으로도 힘듦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습니다. 가뜩이나 힘든 하루를 꾸역꾸역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피고인에 대한 1심 선고 생중계는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재판정은 낯선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가보고 싶지 않은 기피의 공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끊이지 않는 선전 선동으로 다수의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윤석열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지켜보는 것은 일반 형사재판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귀연 재판부가 내린 형량에 비해 그가 읊었던 판결문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판결문 곳곳이 논리에 맞지 않았던 것은 물론 그가 썼던 비유나 역사적 사실의 언급에 있어서도 상황에 맞지 않거나 일반인도 그 오류를 쉽게 지적할 수 있는 문장들이 여럿 등장했습니다. 국민적 관심사가 집중된 재판의 재판장으로서 그처럼 형편없는 판결문을 낭독한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게 만든 장면이었습니다. 재판을 지휘하고 판결문을 쓰는 일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그렇게 부실한 판결문을 대중 앞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어쩌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거나 사법적 정의는 지나가는 개에게나 줘버린 못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집 <한나 아렌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惡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대체로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여전히 '윤어게인'을 외치며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걸 보면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비상계엄이 성공하고 그들의 계획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란의 우두머리인 윤석열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는 하지만 '악惡이 위대하다는 통설'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법부의 일부 재판관들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절 연휴 뒤에 맞는 첫 번째 주말, 계절은 이제 겨울을 벗어나 봄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악惡이 위대하다'고 믿는 내란의 잔존 세력에 의해 정치적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비상계엄을 저지했던 대한민국 국민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면 '윤어게인을' 외치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선善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믿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겨울의 한파가 그때 이후에는 조금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