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 학력 붕괴 시대의 내 아이가 살아갈 힘 - 인생을 개척하는 강인함을 기르기 위한 인간주의 교육의 제시
텐게시로 지음, 장현주 옮김 / 오리진하우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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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의할런지 모르겠지만 학부형의 연령은 아이의 나이에 비례하여 결정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결혼을 늦게 하는 바람에 제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아이의 나이가 어리다면 동창회에 나온 친구들로부터 한참 어린 후배쯤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비교적 학교일에 간섭을 하지 않는 남자들과는 달리 전업주부인 여자들은 '녹색 어머니회'다 '반 모임'이다 해서 학부형들끼리 모이는 경우도 많지만 '급식 당번'이며 '도서관 사서'며 '환경 미화'등 학교측의 요구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경우도 많아서 자신의 나이가 어떻든간에 그들과 어울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부모 중에 '반장 엄마', '부반장 엄마', '미화부장 엄마'를 '불쌍한 엄마 3종 세트'로 꼽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아이를 둔 죄인의 심정으로 그런 모임에 여러 번 참가하다 보면 나이 구분은 온 데 간 데 없고 '몇 학년 몇 반 아무개 엄마'라는, 서열을 따로 물을 필요가 없는 모호한 지위만 남게 마련이고, 사회 생활에서도 아이의 학년에 따라 그렇게 엄마의 서열이 정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합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이 그와 같은 모임에 나가는 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한 정보의 교환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아이의 학교 성적에 의해 엄마의 위신이나 체면이 서는 까닭에 성적은 아이의 학년과 더불어 엄마의 서열을 매기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모임에 참가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고급(?) 정보가 교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이에 대한 교육열 하나는 단연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부모가 된다는 건 자신의 자존심 따위는 개나 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들 경험해 본 것일 테지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년쯤 지나면 '학력 붕괴의 시대가 온다.'라거나 '성적보다는 인성'과 같은 말에 솔깃해지는 게 사실이다. 지쳤기 때문이다. 부모의 기대와는 너무도 다르게 행동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런 생활을 몇 년쯤 하게 되면 아이는 숫제 자식이 아니라 웬수로 보이게 마련이다. 아무튼 내가 <2030년 학력 붕괴 시대의 내 아이가 살아갈 힘>을 읽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의 미래를 심히 걱정하는 까닭에.

 

"규칙을 잘 지키고 매너도 좋으며 얌전하고 말귀를 잘 알아들으며 친구와도 잘 지낸다. 특별히 커다란 트러블도 없고, 언뜻 보기에 별 탈 없이 자라는 모습이다. 그러나 내적 가치, 적극성이나 바이탈러티가 부족하고, 독창성도 없으며, 자기 부정이 강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한다. 이것이 「살아갈 힘」이 약한 아이의 특징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아이들이 수없이 많다." (p.186)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아이들이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게 사실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일관되고 명확했다. '국가주의 교육'이 아닌 '인간주의 교육'을, '주는 교육'이 아닌 '끌어내는 교육'을 통하여 '오래된 뇌'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아이와 학부모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대뇌신피질을 향상시키는 지식 위주의 '주는 교육'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이것이다. 이와 같은 책이나 강연을 들으면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지만 돌아서면 금세 마음이 변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학력 붕괴의 시대가 온다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좋은 대학, 좋은 학벌은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성공 조건이기 때문이다.

 

"3장에서 「살아갈 힘」의 요소로 '의지력', '결단력', '하고자 하는 마음', '자기를 긍정하는 힘', '창조력', '감성' 등을 제시하였고, 7장에서는 서드베리 교육을 소개하면서 '인간적 매력', '적극성', '행동력' '바이탈러티', '교섭력' 등에 대해 다루었다." (p.105)

 

사실 아내와 나는 하나 있는 아들의 교육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내나 나나 공부만 강요하는 호랑이 부모는 절대 아니다.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싫다는 건 시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또래들에 비해 여유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레고를 하거나 영어 동화를 들었다. 영어 학원을 잠시 다니기는 했지만 제 스스로 영어 원서를 읽고 이해하는 수준까지 실력이 향상된 건 순전히 아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결국 공부를 강요하지 않고, 대자연 속에서 실컷 놀게 하고, 충분히「몰입」을 체험시키면 아이들의「살아갈 힘」은 신장되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특별히 어려울 것이 없다. 아이들을 책상에서 일어나게 하고 대자연 속으로 데려가 실컷 놀게 해보자." (p.226)

 

저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한민국 부모의 심정을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여자 친구와 밤을 같이 보내고 싶은 젊은이가 '손만 잡고 잘게.' 라고 약속은 하지만 막상 나란히 누웠을 때 밤새 그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인내력이 필요하거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약속을 어기는 그런... '마찬가지로 학력 붕괴의 시대가 온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조언에 초연해야 하고 아이가 좋은 대학, 좋은 성적을 받음으로써 부모로서 으쓱해지는 그런 느낌을 향유하고자 하는 유혹을 과감히 뿌리쳐야만 한다는 말이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공감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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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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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 또래의 남자들 중에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있기나 할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아무 탈 없이 제대로 성장한 걸 보면 아무튼 난 무엇엔가 단단히 빚을 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의 성교육이라는 게 또래 중 조숙한 아이가 들려주는 근거도 없는 허황한 이야기가 대분분이었지만 이따금 친구의 부모님이 안 계시는 틈을 노려 어둑하고 습습한 친구의 방에서 몰래 보았던 불법 비디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다는 그 불법 비디오로부터 그 시절의 남자 아이들은 성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성교육의 '성'자를 꺼내기 싫어했으니까.

 

요 근래에 들어 전에 비해 성범죄와 관련된 뉴스들이 부쩍 늘었다는 느낌이 든다. P모 가수를 비롯하여 Y모 개그맨, L모 배우 등 연예인 관련 성범죄뿐만 아니라 K모 야구선수 및 지금은 의식불명의 상태에 있는 S그룹의 회장에 이르기까지 그 직업군도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사드와 같은 다른 소식을 스크린 하기 위하여 이런 반갑지도 않은 소식을 중점적으로 보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주로 남자가 되겠지만)의 성도덕이 땅에 떨어졌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나는 그런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같은 남자로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지만 그 정도의 절제력도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대한민국의 앞날이 심히 걱정스러워지기도 한다. 개 돼지와 다름없는, 오직 본능과 쾌락에만 의존하여 살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전형을 내가 사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현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오직 돈과 권력을 최상의 도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현실에서 돈이나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 무분별한 쾌락에 도취되는 것도 과히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오늘은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합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기에 이 법이 썩어가는 우리 사회를 정화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를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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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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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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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百의 그림자>를 워낙 재미있게 읽었던지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황정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한 권 더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게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그러나 단지 생각뿐이었지 인기가 있는 다른 작가의 작품에 정신을 팔다 보니 나는 그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채 '황.정.은'이라는 이름 석 자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도 너무한 일이었다.

 

내가 <百의 그림자>에 매료되었던 건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시적인 문체와 리듬감 때문이었다. 낯선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첫 번째 소개팅을 앞둔 대학생 새내기의 심정으로 두근대거나 설레었던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확인했었다. 황정은, 황정은, 황정은... 그러다 '황'으로 시작되는 다른 작가의 이름과 혼동되기도 했다. 황정은, 황경신, 황하영, 황현진, 황희, 황석영... 아, 황석영은 남자였나?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었다. 소설의 문체나 리듬감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데 소설을 관통하는 분위기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요즘 아이들이 흔히 쓰는 욕설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고 소설 속에서 마치 일상어인 양, 보통명사인 양 쓰이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과격한 용어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전보다 비유가 강해지고 스토리의 생략과 도약이 빈번하여 소설의 흐름을 쫓아가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실성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밤낮없이 호미를 들고 다니며 파고 파고 또 파다가 시신이 나오면 아들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고 아들이 아니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도로 묻어주었다. 아니 그 수고를 뭘 그렇게까지 했느냐면 내 큰아버지라서 할말은 아니지만 죽창을 가지고 이웃들을 막 찌르고 다녔던 개망나니 같은 놈이라도 지 어미한테는 그렇게 귀하고 가치 있는 놈이었던 거야. 알겠냐. 이 나이 되도록 인생을 살고 보니 그렇더라. 사람이 그렇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네 어미도 그렇고 다 그렇게 귀하고 불쌍한 거지. 세상 나고 자란 목숨 가운데 가치 없는 것은 없는 거다." (p.52)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은 고모리에 산다. 말하자면 제 어미의 학대와 폭력 속에서 두 형제가 견딘다. 그들의 어머니도 부친의 학대 속에서 성장했다. 앨리시어 어머니의 아버지, 앨리시어의 외할아버지로부터 전해졌을 폭력의 연결고리가 앨리시어와 그의 동생에게 이르러서도 녹슬지 않고 작동하는 것이다. 앨리시어의 아버지는 재개발 보상금에만 눈이 멀었을 뿐 폭력에 시달리는 제 자식의 문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폭력은 제 스스로 자가증식을 한다. 고모리에 사는 앨리시어의 친구 고미네 집에서도, 그리고 폭력을 수수방관하는 고모리 주민 전체로, 앨리시어와 고미가 폭력을 신고하기 위해 구청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담당 공무원도 폭력을 옹호하거나 못 본 척 외면한다.

 

노인의 후처로 들어간 앨리시어의 어머니는 아직은 젊고 힘이 세다. 앨리시어는 감히 대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 집을 나가라는 고미의 권고에 앨리시어는 결혼을 하여 따로 사는 이복 형과 누나에게 딱 한 번 전화를 한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처지를 말하지 못한다. 고미의 아버지는 고물상을 한다. 고물상을 하면서 노인들에게 사기를 치고 고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고미가 맞던 어느 날 앨리시어는 고미의 아버지를 공격한다. 그 후 고미네 고물상은 문을 닫는다. 그 일이 있던 날 앨리시어의 어머니가 못에 발이 찔리고 형을 찾아 나섰던 앨리시어의 동생은 하수처리장 웅덩이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날도 폭력이 있었다. 아니,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저능한 새끼에서,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가 된다. 저능한 것도 모자라 난폭한 새끼는 좋다. 저능하지도 않으면서 난폭하거나, 무능한데다 난폭하지도 못한 새끼보다는 좋다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 가시처럼 뾰족한 인간이 되어 고모리를 돌아다닌다." (p.116)

 

어른이 된 앨리시어는 어느새 제 어미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말하자면 앨리시어는 '폭력 보균자'가 된 것이다. 아직 발병하지 않은 채 가능성만 지닌. 그렇게 떠돌다가 가장 약하고 치명적인 대상을 만나면 앨리시어의 망령은 누군가에게 스며들어 폭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우리 사회에 바이러스처럼 떠도는 '폭력 인자'가 눈에 보이는 것이다. 소설은, 또는 현실은 '폭력 인자'에 감염된 죽음의 현장만 목격하는 셈이다.

 

"……이제 막 지나가려는 버스를 향해 뛰다가 앨리시어의 체취를 맡을 것이다.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달라붙는다. 앨리시어는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할까."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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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도 너무 더웠던 요 며칠 나는 가급적 외출도 삼가한 채 겨우 숨만 쉬며 살았던 듯합니다. 부식되어가는 세월의 부스러기들이 푸석푸석 손에 만져지는 것만 같은 그런 시간들이었지요. 그런 상태로 한 달쯤 보내고 나면 딱딱하게 굳은 화석이 될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하디흔한 암모나이트 화석처럼 말이지요. 안 되겠다 싶어 '만나자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찮더라도 약속을 잡아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때마침 전화를 준 사람이 정신과 병원을 하는 지인 A씨였습니다.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그분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응했습니다. 그분이 정한 약속장소는 대학가 주변에 있는 한 음식점이었는데 젊은이들의 생기발랄한 움직임 탓인지 그곳은 유독 계절에서 잠시 비껴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꼼짝않고 지냈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일부러 그런 곳으로 불러냈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청년실업이 큰 걱정이라고 내가 말을 꺼내자 그분 왈, 걱정이 되는 건 청년뿐 아니라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직장을 잘 다니고 있는 사람들조차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혹시 쫓겨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전전긍긍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깜짝깜짝 놀라는 통에 정신과를 내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하더군요.

 

'국민은 개·돼지'라는 식의 엉뚱한 발언만 하지 않으면 정년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그리 만만한 게 아닌가 봅니다. 내가 세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게지요. 저녁을 먹고 헤어질 때 보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은 들어갈 때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 생기발랄해 보이지는 않더군요. 단순히 느낌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2,3년 뒤에 있을 그들의 모습이 짠하게 다가와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에 건강이나 잃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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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는 날도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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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똑같은 글을 써도 글쓴이의 성격이나 개성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작가가 있다. 마치 자신의 글 속에 영혼의 빛깔과 무늬를 안 보이는 곳에 몰래 숨겨 놓기라도 한 듯 말이다. 독자는 책의 한 페이지 또는 누군가 인용한 단 하나의 문장만 읽어봐도 '그래. 이건 아무개의 글이 확실해.' 라고, 단박에 알아채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런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글 속에 영혼의 문장(紋章)인 양 자신만의 고유한 표식을 새겨넣을 수 있는 작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작가의 집에 정중히 초대된 느낌을 받곤 한다. 하여, 나는 작가가 따라 준 차 한 잔을 마시며 작가와 긴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마스다 미리'는 내게 그런 작가로 비쳐진다. 작가는 자전거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들고 있던 곤충 채집상자의 모래가 쏟아져 어쩔 수 없이 모래를 쓸어 담는 아이를 도와주며 다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망상에 빠지는 버릇이 있어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하거나 마흔의 나이에 친구와 함께 '저스포 축제'(저스트 40이 된 축하 여행)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남에게 의지하거나 응석 부리는 것이 서툴러서' 오래된 치통을 안고 살기도 하고, 서점에서 자신의 책을 들춰보기만 하고 사지는 않는 독자에게 직접 책을 사서 선물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게 되는 날 오래 머물렀던 집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는가 하면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도 못한다. 그런 자신을 뻔히 알고 있는 작가는 '앞으로도 철없는 어른인 채 나이만 먹어갈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한다.

 

"나는사람을 싫어하면 온 마음이 싫음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싫은 사람은 싫어만 하는 게 아니라, 용서한다거나 용서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차원을 넘어서 무작정 싫어한다. 싫어한 채 잊고 살다가, 이따금 무슨 계기로 아아, 싫어하길 잘했어, 와하하, 하고 확인한다. 싫어하는 사람이 좋아한다고 했던 음식조차 싫어하고, 싫어하는 사람과 친한 사람도 좀 싫어진다." (p.133)

 

그러나 그녀의 글이 항상 철없는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전문대생 시절에 그렸던 서양화를 귀중품이라도 되는 양 끌어 안고 사시는 엄마에게 창피하니까 제발 버리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죽을 때까지 갖고 있을 거라는 말에 가슴이 짠해지기도 하고, 젊은 엄마와 네다섯 살짜리 남자아이가 공원 벤치에 앉아 작은 돌멩이 밥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며 며칠 전 뉴스에서 본 사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물 주세요, 라고 부모에게 애원했지만 끝내 굶어 죽고 만 사건이었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좋은 인생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지만, 연극의 여운을 가슴에 안은 채 욕조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으니, '인생, 이런 느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천천히 밀려왔다." (p.65)

 

기모노를 멋지게 차려 입고 외출할 생각에 부풀어 기모노 입기 교실을 수강하고, 감기에 걸린 날 출근하는 남자친구의 귀가 시간을 묻게 되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원작으로 읽고 애니메이션의 훌륭함에 감동하기도 하고,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매료되어 피아노 교실을 수강하기도 하고, 새로 산 로봇 청소기를 보며 기특하다고 칭찬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어른이 된 지금도 어린 아이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니까 이러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일기와 다름없는 그녀의 글에 감동하게 된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주인공 제제를 떠올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마음을 바꿔먹으려고 애쓰지만, 검지 하나조차 얌전히 두지 못하는데, 내 몸에서 가장 큰 '마음'을 간단히 조정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침울할 때는 그런 식으로 암시를 걸어 어떻게든 자신을 뜻대로 하려고 애쓰는 나." (p.208)

 

제제가 그랬듯 작가도 어쩌면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하고 묻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작가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어린 새'를 떠나보낼 결심을 하지 않고 누군가의 가슴에도 희미하게 살아 있을 그 새를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우리가 이따금 꿈꾸었을 평온한 일상을 가만가만 들려주거나 특별하지 않았던 그녀의 어린 시절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완벽하게 행복한 하루가 인생에 몇 번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은 그 한 번에 들어가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니, 잠깐만. 꽃가루 때문에 눈이 엄청나게 가렵다. 완벽한 행복까지는 앞으로 한걸음." (p.203)

 

살아간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도 마음 속에 있는 '당신의 무늬'를 완벽하게 지우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순전히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마음 속에 '당신의 무늬'를 간직한다는 것, 그 무늬결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마스다 미리의 수필집 <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는 날도>를 읽으면서 문득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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