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나자 하루가 다르게 더위가 물러가고 있다.

그래도 한낮에는 햇볕이 여전히 뜨겁지만

부는 바람이 지난 주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낮에는 연령대가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한 모임에 참석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한담이 오가다가

어렸을 때 부르던 동요 얘기로 옮아갔다.

 

언제부턴가

아름다운 노랫말의 동요를 부르는  아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등하굣길에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흥얼거리곤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동요는 '송아지'인데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로

시작되는 노래인데 '엄마 닮았네'하는 소절에서

'엄마~~'하고 끌어줘야 하는데

아이들은 다들 '엄마가 닮았네'로 불렀다.

 

그랬나 보다.

엄마 소가 송아지를 닮았던 그 시절에는

엄마가 아이들을 닮아 순진했던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각박하고 메마르지 않았나 보다.

 

1984년 MBC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노을>이라는 동요는 가을 향기 물씬한

아름답고 서정적인 가사로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애창동요 1위라고 한다.

 

   노을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빨갛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짓고

초가지붕 둥근 박 꿈꿀 때

고개 숙인 논밭에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가을바람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색동옷 갈아 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물들어 가는 타는 저녁놀

 

엄마가 아이들을 닮았던 그 시절

컴퓨터도 없고 텔레비전도 귀했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많이 그립다.

 

"선생님 모시고 가고 싶지마는/하는 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

하는 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라라라라라라라라 간다나/"는

어떤 동요의 2절 가사인데 노래의 제목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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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8-09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요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요
이병에 가득히 넣어가지고서
라라라라라라라라 온다나 ^^
제목이 '고기잡이'였던가요?

꼼쥐 2012-08-16 14:57   좋아요 0 | URL
딩동댕~~♬ ♪
반갑습니다 ^^
요즘은 아이들이 우리 때보다 동요를 안 부르는 듯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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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는 숙명적으로 피상적인 현실과 삶의 뒤켠에 존재하는 진리의 중간쯤에서 노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는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진리탐구에 깊숙이 개입해서도 안 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여기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예컨대 소설가가 일반 회사원처럼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일정한 룰을 따른다면 대다수의 일반인과 하등 다를 게 없게 되고 그런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다 보면 보편적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하는 소설가의 입장에서 더 이상 그의(또는 그녀의) 글은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그저 그런 글이 되고 만다.  어쨌든 숲 속에서는 숲을 볼 수 없으므로.  나는 가급적 전업작가가 아닌, 소설가를 마치 부업처럼 생각하는 작가의 글을 읽지 않으려 한다.  가급적이 아니라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진리탐구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리탐구는 목숨을 걸 만큼 매력적인 일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이나 공포의 대상은 될 지언정 진리는 보편적 인간에게 쾌락이나 친숙함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주변에 존재한다면 그는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진리에 대한 극단적 두려움 또는 공포를 과감히 극복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가 굳이 보편적 인간의 공포를 소설의 소재로 삼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돈에 초연하거나 득도한 소설가가 아니고서는.

 

가끔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나는 이것 또한 적당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소설을 흉내낸 자전적 에세이 또는 보편성이 결여된 미숙한 소설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구도자가 아니고서는 '나'란 존재는 결코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너희들'의 일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모습을 관찰하여 자신만의 이야기 틀에 담아내는 사람이므로 관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는 이야기는 소설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좋은 소설이 될 리도 없다.

 

위에서 언급한 소설가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소설가에 의해 씌어진 수필이나 산문집은 그닥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면 설령 내용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큰 기대를 품고 어느 소설가의 산문집이나 수필을 읽는다면 열이면 열 만족보다는 실망할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그렇고 그런 신변잡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겠거니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책을 읽는다면 '그래도 생각보다는 좋았다.'는 평을 할 수 있겠다.  이것은 가수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니 소설가를 탓할 일은 절대 아니다.  역으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색이나 무릎을 칠만한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산문집으로 엮어낸 소설가라면 그는 이미 소설가가 아닌 수필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읽었다.  책의 내용은 나의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달리기광'으로 정평이 난 사람이니 달리기에 관한 내용이 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다.    달리기 이외에 작가의 유년시절, 빵집 아들로서의 명절 대목, 부모님의 숨말하기, 서울 삼청동에 살았던 시절의 에피소드 등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 도중에 불쑥불쑥 달리기와 관련된 말이 튀어나오곤 한다.  이제는 어엿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 김연수의 작품치고는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이 리뷰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기하자면 김연수는 소설가이지 수필가가 아니다.

 

"살아 본 바에 따르면 삶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까지 많은 경험을 해 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젊어서 그런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P.295)

 

나는 어느 정도 작가의 의도와 뜻하는 바를 공감하며 읽었지만 다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작가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등산이 마치 막걸리나 마시기 위한 핑곗거리 또는 등산을 가장한 여자 후리기로 묘사한 대목에서는 매일 아침 산을 오르는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술도 마시지 못하고 여자를 꼬시는 능력도  없지만 산은 누구보다 좋아한다.  반면에 작가와 내가 생각이 일치했던 것은 "사람이 너무 좋은 게 콤플렉스"라는 대목이었다.  살다 보면 사람 좋다는 말이 칭찬만은 아님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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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글은 다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져서 좋다.  때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쿵쾅거리며 뛰던 가슴도 착 가라앉고, 한동안 차분해지는 느낌.  아픔이 많은 사람은 그 아픔으로 인해 다른 사람도 보듬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나 보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이자 예의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순간순간 그것을 잊고 지낸다.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가 갖고 있는 정치 혐오증은 어쩌면 대통령 한 사람으로 인해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건국도 이제 반세기가 훌쩍 지났건만 역대 대통령 중에 모든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는 대통령이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그가 출마를 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국민들의 염원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이념과 마음이 똘똘 뭉쳐진 하나의 국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소설과 같은 현실이 있다.  아니 소설보다 극적인 현실이라고 말해야 한다.  일상에 지치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가 기계처럼 흘러간다고 느낄 때, 나 스스로가 거대한 기계의 작은 톱니바쿠처럼 느껴질 때, 세상을 보는 시각을 조금만 바꾸어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한다.

 

 

 

 

 

 

 

 

얼마 전 화가였던 내 친구가 죽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가끔 안부를 묻고, 소원하다 느끼면 작은 식당에서 만나 된장찌개를 사이에 두고 말없이 밥을 먹던 친구.  그는 자식과 아내를 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돈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입방아를 찧지만 나는 그게 다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내 방에 걸린 그의 그림은 여전히 슬픈 미소를 짓고 있지만 이제 그 친구는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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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해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면 많이 지쳤다는 의미다.

삶에 그닥 신중하지도,

그렇다고 무한정 건방지지도 않은 나는

적당한 주기마다 일탈을 꿈꾸고,

싫증을 내고,

누군가 듣지 못할 낮은 소리로 육두문자를 읊조려 보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나름대로 상상하곤 한다.

 

물론 그것도 잠시 동안이다.

나는 금세 시들해져

풀 죽은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지만

오늘처럼 더위에 지쳐

숙소로 돌아온 날

무엇인가 먹어야한다는 당위성은

소심함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과 아내는 지금

속초의 어느 펜션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친정식구들과의 긴긴 이야기들을 풀어 놓겠지만

이 세상 누군들 외롭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는

케케묵은 소리를 혼잣말처럼 하는 나는

무심한 더위에 괜한 시비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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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공연히 내세우는 구실' 또는 '잘못한 일에 대하여 구차스럽게 말하는 변명'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핑계는 결국 '정당하지 못한 일을 획책하는 사람의 자기합리화' 또는 '안 좋은 결과에 대한 책임 회피'임이 분명해진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유난히 화를 잘 내는 아이가 있다.

어느 날 나는 그 학생만 따로 불러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게 화를 잘 내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고.  그러나 내게 돌아온 답변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말이었다.  그 학생은 자신이 그동안 화를 자주 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학생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경중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그 학생과 비교하여 크게 낫다거나 모자르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때 학생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사람들은 어떤 일의 결과(주로 나쁜 결과가 해당되겠지만)에 대하여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안 좋은 일인 줄 알면서 행동할 때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핑계를 대곤 하지.  우리가 핑계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단다.  왜냐하면 핑계가 습관처럼 굳어지면 어떤 일의 결과를 초래했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지.  즉, 자신이 말한 핑계가 그 일의 원인이라고 자기 자신도 굳게 믿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야.  언제부턴가 자신의 말에 자신도 속게 된다는 뜻이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실패나 좌절을 겪을지라도 그 원인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일어 설 수 있지만 실패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지난 시간과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언제든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단다.  이런 의미에서, 즉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핑계가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야.

더구나 우리가 하는 핑계의 대상이 늘면 늘수록 내가 화를 내야만 하는 대상도 비례하여 늘어나는 것도 문제란다.  혹시 아빠도 운전하시면서 화를 자주 내는 편이니?" 

 

아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렇다고 답했다.

"사실 나도 가끔은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있어.  내 앞으로 갑자기 끼어든 차로 인해 큰 사고가 날 뻔한 경우가 더러 있었거든.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가 서행운전을 했었거나 방어운전을 했었더라면 그 운전자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우고 화를 낼 이유는 없었던 듯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경우지.  자, 그러면 보자.  만일 내가 문제의 원인을 '나의 실수'로 파악했더라면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화를 냈었을까?  주먹질 일보직전까지 말이야.  아마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이런 것처럼 책임을 다른 대상에게 돌리면 나는 그 대상에게 화가 나는 법이지.  날씨가 덥다고 화를 냈다면 그 대상은 '하느님'이 되어야 하나?  문제의 원인은 내가 체력적으로 약해서 더위를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일에 있어 결과가 안 좋은 이유는 대부분 그 원인이 내게 있단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한 편이니 그 원인이 내게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화를 내지는 않을 거야.  너가 그 동안 자주 화를 내었던 것도 사실 네가 그 원인을 잘못 파악했던 것이고, 네가 원인이라고 지목한 여러 대상들에게 한낱 분풀이를 한 것에 불과하단다.  실수나 실패를 통하여 배운다는 것은 일의 결과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에 있는 법이지.  나는 너의 능력을 믿고, 앞으로는 네가 어떤 나쁜 결과에 직면하더라도 그 원인을 정확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이는 요즘 화를 내지 않는다.

내 앞이라서 조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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