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계절의 순환에 나는 이유도 없이 아득해지곤 한다. 아침 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과 나도 모르게 이불을 여미게 되는 밤 기온과 더없이 맑은 하늘.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오곤 한다.

 

지금이야 '여행'하면 으레 자가용이나 버스가 먼저 떠오르지만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기차'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단조로운 연속음으로 덜컹대는 비둘기호의 느린 기차바퀴 소리, 서 있는 승객들을 우악스럽게 밀어부치며 지나가는 홍익회 아저씨의 특유의 목소리 "심심풀이 땅콩이나 오징어 있어요.", 그런 소음과는 무관하게 차창으로 비껴드는 나른한 가을 햇살, 혼잡한 객실을 유령처럼 떠돌던 매캐한 석유 냄새, 그리고 기차의 더딘 발걸음에 아슴아슴 밀려오는 졸음.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 생활을 했던 나는 정기적으로 기차를 타곤 했다. 대학에서 MT를 갈 때도, 친구들과 여행을 할 때도 언제나 기차를 탔다. 열에 두서너 번은 자리에 앉아 졸았고, 익숙해지지 않는 석유 냄새에 이따금 멀미를 했고, 볼이 미어지도록 삶은 계란을 한 입에 밀어넣는 앞 좌석 꼬마를 부러워했다.

 

열차의 진동에 맞춰 대여섯 시간 흔들리다가 도착지를 알리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깨기 일쑤였고, 플랫폼을 휩쓸고 지나가는 건조한 바람에 남은 잠을 털어냈고, 멀어져가는 열차 꽁무니를 멀거니 쳐다보곤 했다. 역에서 내린 승객들이 개찰구를 향해 밭은 걸음을 옮겨갈 즈음, 제복을 입은 역무원이 개찰구를 열고 검표를 했다. 나는 그 무리에서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승객의 무리 속으로 섞여들곤 했다.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역무원 앞에서는 언제나 주눅이 들었고, 역사를 멀찌기 벗어나서야 마음을 놓곤 했다.

 

가을이면 지금도 나는 문득문득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떠올리곤 한다. 지금은 사라져 아스라한 추억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 열차를 말이다. 여전히 나는 그때의 아날로그식 풍경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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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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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1923 ~ 1996)의 소설 <깊은 강>은 사유가 깊어지는 요즘과 같은 계절에 읽기 좋은 책이다. 이를테면 자극적이거나 화려하지 않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질서와 숨결이 느껴지는 문장 하나하나가 가슴 깊숙이 따스한 즐거움을 안겨주는 소설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의 마지막 장편 소설인 <깊은 강>은 작가가 말년에 신장병으로 복막 투석 수술을 받느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퇴고를 거듭한 작품인 만큼 애착도 깊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생전에 그는 자신이 죽으면 관 속에 자신이 쓴 <침묵>과 <깊은 강> 두 권을 넣어달라는 유지를 남겼을까.

 

소설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소베'라는 인물은 소설을 읽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공감하거나 가슴 언저리가 뜨끔거릴 만한 전형적인 남편상이 아닐까 싶다. '이소베'는 막연히 평균 수명대로 자신이 아내보다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다 뜻밖에도 아내가 먼저 암 선고를 받는 상황을 맞는다. '이소베'의 아내는 임종 직전에 남편에게 에사롭지 않은 유언을 남긴다.

 

" "반드시......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찾아요...... 날 찾아요, 하는 아내의 마지막 헛소리는 생생한 잔상처럼 귓속에 남아 있다." (p.32)

 

아내와 애틋한 애정 표현을 자주 하거나 사랑이 지극했던 것도 아닌 '이소베'는 아내의 열정에 찬 유언 한 마디를 좇아 인도로 떠난다. 인도의 바라나시 근처 마을에 사는 한 소녀가 전생에 일본인으로 살았다는 정보를 들고 말이다.

 

"하지만 외톨이가 된 지금, 이소베는 생활과 인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생활을 위해 사귄 타인은 많았어도, 인생에서 정말로 마음이 통한 사람은 단 두 사람, 어머니와 아내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p.285)

 

소설은 여행사의 패키지 인도 여행을 위해 모인 5인의 인생 역정이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전쟁세대인 이소베, 누마다. 기구치와 전후세대인 미쓰코와 산조 부부. 대학 시절, 카톨릭 신자인 오쓰를 장난삼아 유혹했다가 무참히 버렸던 미쓰코의 자책과 기구한 삶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며 '신이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사랑하는 아내의 환생처를 찾아 나선 이소베, 패전 후 미얀마의 정글에서 굶주림과 질병의 멍에에 갇혀 죽어간 동료들의 구원을 빌기 위해 순례길에 오른 이구치, 자신을 대신해 구관조가 죽어갔다 생각하고 새를 찾아 방생의 길을 마련하려 인도 여행길에 오른 누마다. 대학 시절 사귀었던 오쓰를 버리고 조건에 맞는 남자와 결혼했던 미쓰코는 사제가 되기 위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오쓰를 찾아 신혼여행도 프랑스로 떠난다. 무신론자이면서 냉소적인 성격의 미쓰코는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병원에서 자원 봉사를 하며 지내기도 하였지만 오쓰가 믿었던 신과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그녀는 결국 오쓰를 찾아 인도의 바라나시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생에는 미처 예상할 수 없는 일,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떻게 인도까지 올 마음이 내켰는지, 스스로도 확실히는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이따금 인생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p.169)

 

사제가 된 오쓰는 인도의 빈민가에 머물며 생명이 다한 거리의 가난한 순례자들이나 병자를 갠지스 강의 화장장이나 병원으로 옮겨주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미쓰코는 오쓰와의 만남에서 그녀와 오쓰의 벌어진 거리를 실감한다. 그리고 오쓰가 믿는 신이 그녀로부터 오쓰를 완전히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러나 오쓰가 믿는 신은 심판하거나 저주하는 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범신론적'인 신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일찌기 세례를 받았던 작가 자신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오쓰는 미쓰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갠지스 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하느님)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p.280)

 

미쓰코는 아크사르 바가바티 사원의 지하에서 본 여신 칼리와 차문다 상을 보면서 인간의 위선, 증오와 배신, 전쟁과 학살, 선과 악, 종교와 현실을 생각한다. 언젠가 나는 <십팔사략>을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인간의 본성은 실로 잔인한 것이며,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보다는 악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과, 결국 악함이 선함을 이길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선한 사람을 통하여 깊이 감화되지 않는 한 어떤 노력으로도 구제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었다. 미쓰코가 오쓰를 통하여 변해가듯이. 인간이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주장을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건,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이 광경입니다."라고, 미쓰코의 마음의 어조는 어느 틈엔가 기도풍으로 바뀌었다. "그 사람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저도 섞여 있습니다." 그녀는 이 기도 흉내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p.316~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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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뜨거웠어요.

벌써 가을이라고 불러도 되나 불안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지더군요. 천하장사라도 제 눈꺼풀은 들어올리지 못한다잖아요? 명절 연휴라지만 그저 조용하기만 합니다. 밖에서는 한껏 들뜬 아이들의 초롱한 웃음소리만 들려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 매년 이맘때쯤의 아이들은 다들 시장에 간 엄마를 적당히 기다렸고, 적당히 배고팠고, 적당히 즐거웠고, 더러는 적당히 바빴었어요. 해거름에도 오지 않는 엄마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고, 기나긴 그리움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일 즈음, 강가에는 은빛 억새의 서걱거림이 흐르는 강물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었죠. 밤이 늦어 돌아온 엄마와 늦도록 취한 아버지의 말다툼에 밤새 잠을 설쳤고, 없는 살림에도 젯상을 차리시는 엄마의 바쁜 손놀림에 부스스 잠이 깨곤 했었습니다. 물안개 걷히는 강가에서 겨우 고양이 세수를 마친 우리는 추석빔으로 받은 양말 한 켤레를 기쁘게 갈아 신고는 젯상 앞에 올망졸망 모여 추석 차례를 지내곤 했었죠.

 

이제 그런 풍경은 다시는 볼 수 없겠지요. 아이들은 제각각 흩어져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카톡을 하거나, 텔레비전 화면에 코를 박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사람의 말소리가 사라진 집 안에 온갖 기계음만 가득합니다. 결핍이 풍요로 변하는 동안 우리가 잃었던 것이 비단 사람의 말소리뿐은 아니겠지요.

 

명절 연휴만 되면 이상하게 잠이 쏟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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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어른아이에게
김난도 지음 / 오우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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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일이다.  가뭇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란 존재가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는 게.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철학적 사유는 아니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신기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나이만 먹는 건가 하는 우울한 생각에 이를라치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축 쳐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이렇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차를 타고 마음의 어둠 속으로 긴 여행을 하다 보면 삶을 덧없어 하는 나의 한숨 소리와 그 속절없음에 쏟는 나의 넋두리가 들리는 듯하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문득 생각하면 아득해지곤 한다.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한번쯤 되돌아보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절박한 순간에도 언제나 '나중에'라는 유보 버튼을 누른 채 세월의 흐름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누군가의 아들에서 누군가의 남편으로, 누군가의 아버지로, 또는 장성한 조카가 결혼을 하여 젊은(?) 나이에 본의 아닌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예전에는 없던 수많은 관계가 새로이 형성되는 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였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쯤 어른이 되었던 걸까?  과연 나는 내 나이에 맞는 '다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일까?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이 책은 이제 흔들리며, 어른의 문턱에 선 당신을 생각하며 썼습니다.  조금 먼저 어른이 된, 가끔은 아직도 어른 행세에 서투른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쓴 책입니다.  책이란 '말하는' 매체인데, 이 책을 통해 '듣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저는 어른의 비밀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따뜻하고 열린 경청자가 되고 싶습니다.  읽기만 하면 결론에 다다를 뿐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그간 꾹꾹 눌러온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세요."    (p.14  '프롤로그' 중에서)

 

작가의 지시에 따라 나는 어렵게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아직도 어른 행세에 서투른 '나'이지만 말이다.  후회와 반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삶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후회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생활과 인생은 다른 것임을 진즉에 구분하지 못했던 불찰'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아갈지도 모르지만.  가장으로서 생활에 필요한 돈만 벌어오면 내게 지워진 모든 책임은 끝났다는 식의 자세.  단지 생활인으로서의 의무만 다하겠다는 편협함은 인생 자체를 어렵게 한다.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을 쓰고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일에 소홀하다면 인생 자체는 꼬이게 마련이다.  나는 이제껏 그리 하지 못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게 시작이지 싶다.  아기가 대소변을 가릴 줄 알게 되는 시기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지워진 운명적 삶의 굴레는 어느 순간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견뎌내는 것이다.  꼭 하루씩만 살아내자.  그러기 위해 반드시 외워야 할 주문이 있다.  독실한 신도가 몸을 접듯 간절하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되내어야 하는 주문이.  아모르파티.  네 운명을 사랑하라."    (p. 77)

 

작가는 위로받지 못하는 '어른아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일과 사랑, 가족, 인간관계, 자아실현 사이에서 외줄을 타듯 위태위태 흔들려야만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취직, 월급, 결혼, 섹스, 가족, 결혼, 소비 등의 문제를 끼고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건네는가 하면 그래도 괜찮다 다독인다.

 

"언제나 어디서나 프로가 될 수는 없다.  내가 매일 하는 딱 한 가지 일에서 프로가 되기도 어려운 것이 삶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신에게 조금만 너그러워지자.  그래야 더 잘할 수 있다."    (p.286)

 

비록 나는 나이만 어른인 채 살고 있지만 비단 그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잘 안다.  겉으로는 완벽한 듯 보이는 사람도 그 이면에는 누구나 허당인 구석이 한 군데는 있는 법이다.  그것 때문에 때로는  잠 못 드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운명이고 인생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는가.  그것은 다만 누구나의 인생일 뿐이고, 죽는 순간까지 철들지 않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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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이 코앞이다.

이맘때면 당연히 느껴야 할, 또는 그렇다고 믿는 '여유로움'과는 사뭇 동떨어진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이 이어진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면 연휴가 주는 푸근함보다는 피곤의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진 느낌마저 들게 마련이다.  명절은 그저 의례적인 것, 어쩔 수 없는 행사쯤으로 사고의 폭이 한없이 좁아진다.  내가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는 독서가 아닐까 싶다.

 

 

카피라이터 '정철'의 작품 중 처음 읽었던 책이 <인생의 목적어>였다.  카피라이터 하면 으레 떠오른 것이 기발한 발상과 말장난에 가까운 유희가 아닐 수 없지만 나는 그 책을 읽고 '정철'이라는 한 인간에 대해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저변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씨와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인에서 오는 묘한 느낌은 글을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 책의 내용은 어떨지 모르지만 '정철'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반갑기 그지없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은 언제나 말랑말랑한 감성을 자극한다.  피곤하고 무기력한 시간이 계속될 때 그녀의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왠지 모를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인간답지 않게 살아가는 나에게 '인간다움'의 모르핀을 주사하는 느낌이다.  나는 그 모르핀을 맞고 몇 달쯤 거뜬히 살아내곤 한다.

 

 

 

 

 

 

 

 

주말부부로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취미로 삼았다.  학창시절에 나는 그림에는 그야말로 젬병이었다.  그랬던 내가 그림을 배우고 연습한다는 사실에 아내는 놀라워했다.  잘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느긋함이 용기를 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그림에는 젬병이지만 아무튼 나는 그림을 그린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얼마 전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참상을 보면서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국가 차원의 입장표명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것이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적어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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