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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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삶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 품었던 질문 하나로 인생의 전체 행로가 바뀌었던 사례는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답변을 전제로 하지 않는 질문은 질문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하겠습니다. 비록 그 시한을 못 박을 수는 없다 할지라도 답변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은 참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없는 삶은 삶이라고 정의할 수 없으며 삶 또한 공허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이란 삶에서 필요한 자질구레한 여러 질문들을 추리고, 그것들에 대한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우리가 원자를 쪼개고 최초의 빛을 포착하고 우주의 종말을 예측하는 데는 한 줌의 방정식과 구불구불한 선, 알쏭달쏭한 기호만 있으면 충분하다. 인류의 삶을 지배하는 이 수식들을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조차 더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p.252)


칠레의 젊은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가 쓴 논픽션소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입증을 요하는 과학의 세계가 결국 추상이나 논리만 존재하는 명상의 세계 혹은 철학적 세계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임을 소설적 허구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책에 담긴 화학자,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고, 경쟁자들과 치열한 이론 논쟁을 펼치며, 하나의 완성된 답변을 향해 끝없이 묻고 답합니다. 과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프리츠 하버,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슈바르츠실트, 그로텐디크 등이 보여주는 인간 정신의 확장과 그 한계에 대한 지적 욕망의 분출은 실로 아름답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로서는 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들(영혼이 담기지 않은 수학적 방정식이나 알쏭달쏭한 기호가 대부분이지만)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작가는 그런 결과물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그들의 치열했던 정신적 향연을 논픽션 소설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슈바르츠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조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p.71)


책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화려하게 빛났던 지적 활동의 시기를 작가는 아주 빈약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여 작가적 상상력이라는 풍부한 살을 입히는 작업을 가함으로써 독자들은 차갑게만 느꼈던 과학자의 열정을 피와 살이 있는 인간 영혼의 삶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게다가 전혀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던 각각의 인물들을 역사 속 필연으로 한데 묶음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은 끊이지 않는 장대한 역사의 물결을 느끼게도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찾던 모든 질문의 답변들이 잊히지 않고 영원히 우리 후손들에게 이어지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품게 합니다.


"1907년 하버는 식물 생장에 필요한 주요 영양소인 질소를 사상 최초로 공기 중에서 직접 채취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그는 20세기 초에 전례 없는 세계 대기근을 몰고 올 뻔한 비료 부족 사태와 맞섰다. 하버가 아니었다면 구아노와 초석 같은 천연 비료에 의존하여 농사짓던 수억 명이 영양 결핍으로 사망했을 것이다."  (p.35)


책을 첫 페이지부터 읽었던 독자라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가감 없이 기록한, 흔하디 흔한  과학 논픽션 중 하나라는 생각에 시큰둥 외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페이지 수를 더할수록 시대가 다른 인물들 간의 긴밀한 연관성과 인물들의 지적 성과가 빛나던 시점에 있어서의 생생한 묘사,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는 팽팽한 긴장감 등으로 인해 '과학 논픽션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며 절로 감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작품의 맨 마지막에 실린 '감사의 글'에서 독자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책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과학 논픽션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읽었는데, 일정 부분 허구라는 작가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과학자나 수학자들의 삶에 있어 그들의 성과에 비해 자연인으로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뇌와 숱한 질곡의 시간들은 간과되거나 드러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들도 어쩌면 젊은 시절에 품었던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와 같은 과정은 다른 이의 삶과 하등 다를 게 없을 듯합니다. 다만 모든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로 인해 우리들 각자의 삶은 재평가되고, 저마다 다른 문장으로 기술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질문은 답변을 전제로 존재하고, 우리의 삶도 죽음을 전제로 존재할 뿐입니다.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젊은 시절에 품었던 여러 질문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나는 여전히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질문조차 가려 뽑지 못한 처지이고 보니 매번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사는 게 바빠서'라는 흔한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듯한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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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물이 끓고 있다. 또다시 많은 비가 예보된 바깥의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길게 뽑은 작은 주둥이로부터 파르르 솟구쳐 오르는 하얀 김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찻장에 담긴 녹차 티백 위로 찻물을 붓는다. 연녹색 찻물이 농도를 더하고 나는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입 안 가득 한 모금 들이켰다. 짙게 퍼지는 쌉싸름한 녹차향과 후끈한 열기. 어쩌면 우리는 하나의 생각에 이르기 위해 겉치레에 불과한 많은 행위들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그렇게.


코로나 확진자의 증가세가 가파르지는 않다지만 위중증 환자의 증가세는 가히 폭발적인 듯 보여진다. 15일 0시 기준 위중증 환자 수가 521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하니 6월 25일 50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중환자가 이렇게 늘면 병상은 곧 포화상태를 맞을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지방에서는 중증의 코로나 환자가 입원하여 안심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런 추세라면 전국적으로 코로나 위중증 환자를 받을 수 병상은 모두 소진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도심에서는 77주년 광복절을 맞아 보수단체의 집회가 열리고 있다. 우리는 지난해에도 경험한 바 있지만 이와 같은 대규모 집회 뒤에는 코로나의 급격한 확산세가 뒤따른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는 이를 허용하고 지켜볼 뿐 거리두기나 해산과 같은 적극적인 방역 대책은 세우지 않고 있다. 어쩌면 정부는 '옳다구나!' 하고 반색을 할지도 모른다. 보수단체의 참가자들 대부분이 노인들이고, 그들에게 코로나 확산은 위중증으로 이어질 공산이 큰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위중증 환자를 치료할 병원과 병상 모두 포화상태로 가고 있는데 집회 이후 위중증 환자의 폭증세라도 발생한다면 정부는 대책이 없게 되는 것이다. 가뜩이나 재정이 열악한 마당에 노인들의 자발적인 죽음은 정부가 바라고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용산공원의 임시개방에 속도를 내는 까닭도 그런 연장선에 있다고 보여진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소일거리도 없는 노인들이 발암물질 범벅인 용산공원에 모여 온종일 거닐고 돌아간다면 정부가 원하는 결과는 반쯤 달성한 셈일 테니까 말이다.


현 정부의 이와 같은 재정 및 인구 대책은 '사람이 곧 경제의 한 부품'으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교육부가 미래 인재 양성을 담당하는 사회부처이자 경제부처라고 강조하면서 교육의 목적 또한 경제 발전을 위한 미래 인재 양성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일은 하지 않고 밥만 축내는 노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폐기대상이라고 여길 만도 하다. 세금은 내지 않으면서 의료비와 복지비 등을 통하여 국가 재정만 탕진하는 것은 국가 전체로 볼 때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그러니 이재민의 코로나 확산을 부추기는 것도, 보수단체의 대규모 집회를 반기는 것도, 용산공원에 모이는 노인들의 긴 행렬을 보는 것도 그들은 그저 기쁘기만 할 터, 이제는 다른 어떤 방법이 동원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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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5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롭게 단장한 광화문 광장 걷는데 광화문사거리에서 집회가 있더군요.
🤔

꼼쥐 2022-08-19 19:16   좋아요 1 | URL
아~~그레이스 님은 직접 보셨군요.
그 막무가내의 현장을...
 
비움 : 내 안의 참나를 만나는 가장 빠른 길 요가 수트라 1
오쇼 지음, 손민규 옮김 / 태일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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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오쇼 라즈니쉬의 인기가 인기 연예인만큼이나 높았던 시절이 있었다. 오쇼 라즈니쉬의 저서는 물론이고 '라즈니쉬'라는 이름만 붙으면 뭐든 잘 팔리거나 인기를 끌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던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오쇼는 '이제 자신의 삶을 돌보세요.'라고 말하는 듯했고,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가 성공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요가는 인간의 전 존재와 뿌리를 다룬다. 철학을 다루지 않는다. 파탄잘리가 말하는 요가에서 우리는 생각을 하거나 사색을 하지 않을 거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궁극의 존재 법칙을 알려고 할 것이다. 변형의 법칙, 죽음의 법칙과 재생의 법칙, 존재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법칙을 알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요가를 과학이라 부른다."  (p.19)


우리나라에 전파된 오쇼 라즈니쉬의 사상과 가르침은 가히 선풍적이었다. 인간 의식의 발전 단계를 규명하고 현대인의 영혼에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설파해 온 그의 명성은 종교 지도자를 넘어 성인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듯했다. 인도의 운명을 바꾼 열 명의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그는 미국 작가 탐 로빈스(Tom Robbins)에 의해 "예수 이후로 가장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했다. 우리나에서도 무용가 홍신자를 비롯하여 작가 류시화, 개그맨 장두석 등이 오쇼 라즈니쉬의 제자로 입문하여 그의 사상과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지켜보라. 식별하라. 동양에서는 이를 비베크(vivek), 즉 식별지(識別智)라 한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식별하라. 계속해서 식별해 나가라. 나 아닌 모든 것을 제거해 나가라. 그러면 어느 순간 처음으로 참나와 대면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참 존재와 만나게 될 것이다. 나 아닌 모든 것을 쳐내라. 가족도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쳐낼 수 없는 공의 상태에서 자신의 참 존재가 드러난다."  (p.235)


오쇼 라즈니쉬의 저서 『비움: 내 안의 참나를 만나는 가장 빠른 길』은 우리가 영혼의 중심으로 파고들어 궁극의 행복에 도달하도록 하는 요가 수트라의 방법을 소개한다. 이를 통하여 요가의 진정한 목적이 마음으로 하여금 주체의 말에 따르도록 하고, 내면 가장 깊은 곳의 영혼이 하라는 대로 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마음이 미래나 과거를 향하지 않으면 내면으로 향할 수 있으며 우리의 참 존재는 지금 여기에 있지 미래나 과거에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들을 모두 비움으로써 참다운 나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요가에서는 모든 것이 방편이다. 요가의 목적은 인간의 의식을 완전히 깨우는 데 있다. 가슴에 한 조각의 어둠도 남기지 않고 온 집안을 빛으로 환하게 밝히는 일이다.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의 식별을 흔들림 없이 수행하면 무명은 흩어진다.' 여기에서 보듯 요가의 핵심은 무명을 없애는 것이다."  (p.410)


1990년대 어떤 동기나 유인도 없이 유행에 쫓기듯 오쇼 라즈니쉬의 책을 몇 권 읽었던 나는 책등에 먼지만 쌓여가고 있는 오쇼 라즈니쉬의 책을 아득한 추억과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때의 나는 2022년의 나를 과연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오늘 그의 또 다른 저서 『비움: 내 안의 참나를 만나는 가장 빠른 길』를 읽으면서 지난 과거로, 과거로만 빠져드는 것을 보니 그가 말하는 참 나를 만나는 것은 애저녁에 포기해야 하겠다. 그러나 해가 바뀌고 내 마음에도 봄이 찾아오면, 봄날의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명상에 들어 참다운 나를 대면한 채, 불변의 행복을 맞볼 날이 찾아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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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있었던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그들도 역시 현재의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역량이나 자질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음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대통령 깜이 아니었음에도 대통령이 되도록 여론을 조작하고, 국민들을 선동하고, 지지세를 넓히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이 남는다. 대통령 깜이 아닌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으면 국가의 미래는 암울할 테고, 그들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들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함량 미달의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일까?

 

추측컨대 그들 역시 정권욕이 강했던 게 아닌가 싶다. 국정 전반에 대한 지식이 탁월하고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강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그를 보좌하는 밑에 사람들은 일에 치이고 피곤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대통령으로 뽑으면 자신들의 권한과 역할은 자연스레 늘게 마련이고, 그럴수록 궁지에 몰린 대통령은 그들에 대한 의존이나 구조 요청이 급증할 터, 그럴 때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요구를 하나 둘 꺼내 놓으리라 마음먹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놓고 보니 대통령의 능력은 해도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형편없고,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가의 권력이 무지한 대통령에게 집중되지 않다 보니 너도 나도 한 자리씩 꿰차겠다고 다들 난리를 친 게 아닐까. 말하자면 윤핵관을 비롯한 변방에 있던 자들까지 이참에 한몫 챙기자는 심산으로 대통령실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던 게 지금의 국정 난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물론 지금도 진행 중에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당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고 하던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으로 추락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통령 한 사람 잘못 뽑은 게 이렇게 큰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온 국민이 실감하는 요즘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눈 떠보니 후진국'의 기로에 서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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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2-08-14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공감합니다!ㅠ

꼼쥐 2022-08-14 14:54   좋아요 2 | URL
작금의 정부 여당과 대통령의 행태를 보면 해도 너무한다 싶습니다. ㅜ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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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400쪽이 넘는 긴 이야기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같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다는 건 웬만한 내공으로는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작가도 감정이 있고, 자신의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까닭에 기쁨과 슬픔, 격정과 좌절의 파고에 흔들리지 않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감정의 파고에 휩쓸려가며 정신없이 써 내려가다 보면 현실에서 작품을 쓰는 '나'는 사라지고 자신이 구축한 소설의 세계 한 귀퉁이에 깊이 자리를 잡은 소설 속의 '무명 씨'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가가 1인칭 소설을 기피하는 이유도 어쩌면 소설의 세계와 나의 현실을 착각하거나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장편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호흡으로 써 내려간 수작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건축이라는 전문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삶과 사랑, 자연과의 조화 등을 잔잔하고 평온하게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담담하고 밋밋한 매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만다. 우리가 슴슴한 육수와 담백한 메밀면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평양냉면의 깊은 맛에 시나브로 중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건축을 전문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테지만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소설이니만큼 이 참에 건축 분야에 대해 어깨너머 지식을 쌓는다 생각하면 불만은 조금 사그라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비는 한 시간 남짓해서 그쳤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 매미는 이제 암놈 부르기를 단념했는지 지짓 하고 짧게 울고는 계수나무에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p.151~p.152)


소설 속에서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무라이 슌스케는 일본의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가 모델이었다. 또한 요시무라 준조는 우리나라 건축가 승효상의 스승인 김수근의 스승이기도 하다.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의 소장인 무라이. 그는 수줍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건축 설계에 있어서만큼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면을 견지하고 있다. 건축학도로서 무라이 슌스케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나'는 별 기대감 없이 무라인 건축설계사무소에 지원하였고, 오랫동안 신규 채용을 하지 않았던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가 '휠체어 타는 식구가 있는 가족을 위한 집 설계' 플랜을 제출한 '나'(사카니시 도오루)를 채용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카니시 군은 그렇게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의 일원이 된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데 좋다, 고."  (p.271)


무라이 건축설계사무소는 도쿄의 기타아오야마에 위치해 있지만 매년 여름이면 고지대의 화산 기슭에 있는 아오쿠리 마을의 사무실에서 생활한다. 국립 현대 도서관의 설계 경합을 앞두고 있는 무라이 설계사무소 직원들은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의 여름 별장인 아오쿠리 마을의 사무실에서 도서관의 설계에 매진하는 한편 '선생님'과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아오쿠리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설계사무소의 직원은 대부분이 남자였지만 선생님의 조카인 마리코와 직원인 유키코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물론 신입사원인 사카니시 군에 비하면 마리코나 유키코는 둘 다 연상의 여인이었지만 말이다.


설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무라이 선생은 뇌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지고, 경합에서는 패하게 되어 매일 아침 설계실을 채우던 연필 깎는 사각사각하는 소리의 겹침은 옅어져 갔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선생님'의 건축 철학을 간직해 온 '나'는 숲 속 여름 별장으로 운명처럼 다시 들어선다. 별장 안에 그대로 놓여 있는 국립도서관의 하얀 모형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무언가 억누를 수 없는 것이 쓰러져가는 여름 별장을 향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렇게 한 세대가 저물고 자신도 역시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의 일몰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 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 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되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  (p.416)


숲을 통과하여 불어오는 바람처럼 소설은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진행된다. 작가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가볍게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가면서 닫혔던 커튼 사이로 한 뼘 진리의 햇살을 전해주고 있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름다웠던 건축물도 언젠가 그 쓰임을 다하고 스러지는 것처럼. 그러나 푸르렀던 여름날의 추억은 각인된 채로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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