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앙스 - 성동혁 산문집
성동혁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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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진실된 면모는 감동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러므로 대작(大作)은 언제나 큰 고통을 경험한 이의 몫이며, 고통에 대한 진정한 대가는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울림과 감동으로 주어진다. 그와 같은 원칙은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에 친숙하거나 우리네 삶의 대부분이 고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스스로 겸손해지는 법을 터득하고, 거듭되는 고통을 통하여 가장 넓은 폭의 이해력을 획득한다. 고통이 없다면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일부러 고통 속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고통이 유일한 것인 양 불평할 필요도 없다.


소아 난치병 환자로 어린 시절 다섯 번의 대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투병 중에 있는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를 읽었던 대부분의 독자가 큰 감동을 느끼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시인의 산문집을 좋아하는 나의 특별한 기호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고통 속에서 끌어올린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과 인간 본연의 보편적 감성이 책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영혼의 행로를 결코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고통이 지배하는 육체 안에서도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정적 속에서 사뿐하게 상대를 이해해야 할 때가 있다. 상대를 감싼 모든 것이 그의 언어임을 알고 풍경을 눈여겨볼 때가 있다. 세계엔 손잡이가 없다. 그래서 쥐자마자 델 수 있다. 손이 닿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사랑할수록 작은 뉘앙스에 휘청거린다. 시 또한 그러지 않을까. 무엇을 쓰려고 할 때, 그것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일, 그것 앞에서 눈치를 보는 일,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나의 생활이 엉망이 되는 일. 사랑할 때 무심히 넘겨야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 뉘앙스, 말하지 않아도 들어야 하는 말. 당신이 쓰고 내가 읽는 마음. 뉘앙스."  (p.67 '뉘앙스' 중에서)


혹자는 성동혁 시인이 이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기보다 타인의 삶을 그저 관찰하는, 관찰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모험과 도전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기에 비록 이동은 불편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관찰하고, 이를 통하여 깨닫고,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개발되었으니 그도 역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겠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시월이 왔음을 알려주는 다정한 이웃이 있고, 그를 등에 업고서라도 산 위에서의 멋진 풍광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친구도 있다. 그의 병상을 지키는 가족이 있고, 하트 모양 스티커를 건네는 같은 병동의 어린이가 있다. 그로부터 시작된 아름다움이 화선지의 먹물처럼 번져가는 것이다.


"어린이 병동을 다니며 한동안 스티커를 챙겨 다니곤 했다. 간호사 선생님의 명찰에 아이들이 붙여 준 스티커를 자주 본다. 아이들에겐 스티커가 사랑의 표현 방법이다. 감사하게도 내 노트북엔 같은 병실에 있던 아이가 붙여 준 두 개의 스티커가 있다. 은색 별과 파란 하트. 작고 반짝이는 내 부적."  (p.102)


흩어져 있던 십여 년의 기록들 속엔 문득문득 회색빛 슬픔이 그려지기도 하고, 가눌 수 없는 절망이 비틀대기도 한다. 때로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무거운 삶을 짓누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장담할 수 없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시인에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는 것이다. 그를 도와준 의료인들 덕분에 십 대와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의 삶도 이어올 수 있었지만 남들과 다른 불공평한 자신의 삶에 대해 어찌 분노가 없었을까.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우울하지 않고 유쾌한 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슬픔이나 분노, 우울은 이윽고 사라지지 않고 몸이나 영혼 어디에 남았다. 그것들이 삶을 망칠 때가 있기도 했다. 방치하듯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도왔지만 결국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건 스스로의 몫이기도 했다. 쓴다는 건 뭘까라는 질문보다 산다는 건 뭘까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시를 쓰지 않고 휴식을 가졌다. 휴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 년 후엔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다시 살아갔다. 누군가에겐 일 년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내게 그 시간은 시를 쓰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시를 쓰지 않던 긴 시간이었다."  (p.179 '일부' 중에서)


몸이 건강하다는 건 타인의 아픔을 세심히 살필 수 없는 , 영혼의 시력 저하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끝없이 아름다움을 찾는 성동혁 시인과 같은 이의 글을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속 다짐을 되새겨야 한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라고. 오늘은 민족 최대 명절인 설날. 많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가족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가족을 잃고 거리에서 명절을 맞는 유가족들도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잠깐 보았던 그들의 모습을, 그 아픔을 우리는 모르는 체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애써 숨겼던 당신의 아픔을 우리가 보았노라고 그들을 응원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혼의 시력을 높여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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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풀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말입니다. 최근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탓인지 대기질이 조금만 나빠져도 금세 반응이 나옵니다. 전에는 하지 않던 기침과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 등이 그런 것입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한겨울 추위가 다시 찾아오는 게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미세먼지의 공습에 이렇듯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는지... 풀리지 않는 과제를 강제로 떠안은 듯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명절 연휴 이틀째인 오늘, 하늘은 여전히 뿌옇고 흐릿합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에세이 <세상의 빛>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크리스티앙 보뱅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해야겠지요. 작가의 명성이나 지적 깊이보다 작가의 문장력에 쉽게 빠져드는 나로서는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단박에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작가의 글을 그동안 어떻게 외면하고 지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사회학자인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은 문학적 글쓰기를 주업으로 하는 웬만한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장력 이상이었습니다. 나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이런 작가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나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글쓰기는 보편적으로 자폐적인 성향을 지닌다. 시인은 말을 하는 자폐인이다. 텅 빈 방 안의 헐벗은 인간. 그는 자신의 빛을 붙잡고 있기에 무엇도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자신의 피부를 뒤집어 놓는데, 피부의 안쪽은 눈부신 색채들로 수 놓여 있다. 자폐는 빛줄기들이 안쪽을 향해 있는, 뒤집힌 태양이다. 겉은 매끄럽고 아무런 감각도 매력도 없지만, 그 안에는 전례 없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한, 아무것도 - 혹은 거의 아무것도 -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을 표현하게 되면, 그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침묵하는 자폐인처럼,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묻는다. 그는 자기 안의 영광 속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는 죽은 존재다."  (p.18~p.19)

얼마나 아름답고 탁월한 시선인지요. '시인은 말을 하는 자폐인'이라는 표현도,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묻는다'는 문장도, '그는 자기 안의 영광 속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는 죽은 존재다'라는 결론도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듯한 지식이지만, 이렇게 단정적으로 또는 적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내심 수긍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이미 많은 작가들이 있고, 여전히 더 많은 작가들이 새롭게 유입되고 있지만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작가는 한정적입니다. 그런 작가들의 면면 속에는 어쩌면 깊은 사유와 끊이지 않는 발견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설 연휴 이틀째인 하루가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딱히 한 일도 없이 미세먼지를 핑계로 제 몸의 살집만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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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fox 2026-02-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도 행복한 한해 되세요~

꼼쥐 2026-02-17 20:2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firefox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6-02-1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늘 편안하고 무탈한 한 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 - 제주 사는 미술치료사의 마음, 예술, 자연 이야기
정은혜 지음 / 아라의정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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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 비해 비교적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따라 이 일 저 일 안 해본 게 없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하는 일마다 진득하니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문과 혼란이 가중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혼란과 동요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혼란한 삶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영문도 모르는 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운명에 거스르는 길을 선택했던 많은 이들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혼란한 삶을 살다 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썼던 엘리자베스 길버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이는 어쩌면 몇 안 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술치료사이자 생태예술가로서 제주에서 살고 있는 정은혜 작가 역시 그런 행운아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록 그녀의 삶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이 좋아하고 운명에 거스르지 않는 길을 스스로 찾아냈으니 말이다. 작가의 산문집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는 그와 같은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방탕한 삶을 살아왔거나 길을 잃고 헤맸던 것도 아닌데 작가는 힘들고 고단했던 길을 돌고 돌아 지금에 이르렀다. 청소년기에 캐나다로 이민 가서 퀸스 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작가가 한국에 와서 미술관 큐레이터를 경험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예술대학(SAIC)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공인 미술치료사가 되었던 작가. 그와 같은 이력만으로도 순탄하고 편안한 삶을 꾸려갔을 듯한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삶을 사느라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미술치료사가 되기 위해서 미술관 큐레이터 일을 포기했고,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서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했고, 서울에서 제주로 올 때는 안정적인 직장과 돈을 벌 기회를 포기했다. 나는 지금의 삶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값을 치렀는지를 잊은 적이 없다. 내 삶에 만족하는 이유가 어쩌면 '잠정적 손해'로 비싸게 값을 치르고 선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53)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갈등과 혼란은 피하기 어렵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확신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일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인지 몇 번이고 되짚어보는 것이다. 작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 세 가지(친구, 자연, 카페)가 제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제주에서 새롭게 형성한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안정된 삶을 기반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모래사장을 기어 다니며 주운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로 설치 작품을 만들고,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상처 없는 이가 없고, 스크래치 없이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없음을 깨달았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험이 다르고, 문화와 나라가 다르고, 전혀 다른 가족 안에서 있었던 일인데도 내 아픔의 계곡과 다른 이들의 아픔의 계곡 사이에 연결된 다리가 있고, 이 다리를 통해 연민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p.207)


작가는 이 책의 원고를 처음 쓰기 시작한 시점이 '삶이 무너지고 관계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때'였다고 회상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그런 시기는 한두 번쯤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닐 터, 삶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의 방식은 서로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시간을 내서 글을 쓰고, 누군가는 신발이 닳도록 숲을 거닐고, 또 누군가는 모든 관계를 끊고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협곡을 벗어났을지라도 자신의 경험만큼은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소중히 전달하고, 자신도 역시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은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괜찮게 여겨진다면 우리가 맺는 자연과의 관계가 좀 달라질까?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누구나 이 순환의 어느 단계 안에 놓여 있다. 이 순환을 잘 받아들이면, 자연을 파괴하고 영원히 살고픈 욕망을 좀 내려놓고 우리가 죽이는 다른 생명들에게 연민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약간은 덜 무서워지지 않을까."  (p.284)


설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리뷰를 쓴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처럼 우리는 명절을 핑계 삼아 삶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뜬 사람들과 다음은 내 차례라는 듯 '아이고' 소리를 달고 사는 친척들과 갓난쟁이를 앞세우고 나타난 젊은 부부며 제법 어른 티가 나는 학생들 그리고... 명절이 아니면 같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없는 여러 얼굴들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삶의 순환이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타인을 통해 나의 변화를 감지하고 왠지 모를 슬픔에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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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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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그녀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솔직함'에 대해 놀라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솔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끝없이 교육받으며 자라왔지만 솔직함으로 인해 받게 된 여러 불합리한 피해들을 경험하면서 솔직함보다는 오히려 숨김이나 외면, 과장이나 허풍, 윤색이나 덧붙임 등에 더욱 익숙해져 온 느낌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된 지금, '솔직함'은 다만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 등장하는 형식적 단어일 뿐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소멸된 언어쯤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른이 하는 말은 대개 촘촘한 여과장치를 통해 걸러진, 자신에게 조금의 피해도 가해지지 않을 듯한 말만 남게 되거나 거짓에 가까운 허풍이나 과장이 주를 이룬다. 이렇듯 어른들의 외면을 받는 '솔직함'이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아난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p.9)


아니 에르노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이, 소설 속 주인공인 '나'와 '작가'인 아니 에르노 사이의 간극은 무척이나 좁다. 워낙에 좁은 간극 탓에 소설을 읽는 독자는 '나'와 '작가'를 동일시하거나 그렇다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와 같은 결과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의 체험을 일부 차용하여 소설화하는, 이른바 '자전적 소설'이나 '성장소설'과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같은 높이에서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이라고 밖에 달리 말하기 어려운 적나라하고, 원색적인 표현이나 묘사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그것은 단지 소설 속 주인공의 경험이자 나(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결과'일 뿐 나의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며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슬몃 발을 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런 순간이면 태초의 야만성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사회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충동에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지를 수도 있었을 행위들, 예를 들면 단순히 인터넷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대신 "갈보 같은 년! 더러운 년! 잡년!"이라고 울부짖으며 그녀를 마구 쏘아대는 등의 행위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게다가 권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종종 그런 짓을 저질렀지 않은가. 결국 내가 겪는 고통, 그것은 그 여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p.31)


60여 쪽의 짧은 소설인 <집착>은 '육 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몇 달 전 W를 떠난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말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게 헤어진 후 그가 자신의 아파트를 나와 다른 여자의 아파트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새롭게 생긴 규칙들, 이를테면 전화는 그의 휴대전화로만 해야 하고, 만나는 것도 저녁이나 주말은 절대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전에는 없던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나면서 시작된 질투의 감정. '나'는 결코 사그라들 것 같지 않은 이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이 어디로 이끌려가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내 머리와 가슴과 자궁은 온통 그 여자로 채워졌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나를 따라오며 내 감정을 좌우했다.'고 고백하는 '나'.


"나 자신을 먹잇감이자 관객으로 삼았던 질투에 휘둘리며 상상이 빚어낸 형상들을 끌어내고, 어떻게 제어해볼 새도 없이 머릿속에서 그 수를 불려가던 상투적 표현의 목록을 조사해보고, 저절로 떠오르고 탐욕스럽고 고통스러우며 기어이 진실과, 그리고 행복 -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까 - 의 획득을 노리는 그 모든 내면의 말들을 기술하는 일을 마쳤다. 나는, 6개월 동안 쉼없이 화장하고 강의하고 말하고 쾌락을 누린 여자의 비어 있던 이미지와 이름을 마침내 글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런 여자가 다른 곳에서, 또다른 여자의 머릿속과 살갗에서 역시 살아있으리라는 짐작조차 못해보고."  (p.69)


감기 몸살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체험을 일주일쯤 하고 나니 책을 읽는 것도, 컴퓨터 화면에서 문장을 이어가는 일도 마치 처음 하는 일처럼 어색하고, 울퉁불퉁 매끄럽지가 않다. 질투 역시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 매일매일의 일상이 마치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그것인 양 정상체온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고열 속에서 행해지는 듯한 착각, 마침내 길고 긴 터널을 벗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시큼털털한 후회와 함께 터널 속의 일이 마치 꿈결처럼 아득한 의문부호로 남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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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서 덜컥 몸살이 걸렸다. 요 며칠 들쑥날쑥하던 기온도 문제였겠지만 새벽에 산에서 하는 운동에 더하여 저녁에 계단 오르기를 추가한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몸을 돌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갑자기 이렇게 운동량을 늘리다 보니 몸인들 과부하를 견딜 수 있었을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하루였다. 지나친 운동으로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어제는 지독한 미세먼지까지 퍼부었으니 몸살이 날 만도 했다. 점심을 거른 채 약국에 들러 몸살약을 구입했다. 저녁에는 지인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야 하는데 걱정이다. 이렇게 한 번씩 앓고 나면 '나'에 대하여 곰곰 되짚어보게 된다.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사람이 지나가면 많은 종류의 감정이 남는다. 머문 시간에 비해 많은 슬픔을 남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기억이 안 날 만큼 휘발된 얼굴 또한 많다. 무엇이 나의 삶에 더 많은 부분이었는지 간단히 설명할 순 없다. 그저 어떤 시간과 풍경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의 기록 방식은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한 문장이 된 시간이 있기도 하고, 한 권의 책이 된 시간도 있다. 감정만 남긴 시간은 더더욱 많다."  (p.223)


몸은 여전히 으슬으슬 춥고 어깨와 무릎에는 욱신욱신 약간의 근육통이 있다. 약을 사기 위해 약국을 향해 걷고 있는데 인도 가장자리에 텐트처럼 비닐을 치고 농산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무릎에는 담요를 덮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추위를 다 막을 수는 없었던지 무릎의 담요를 몸 위쪽으로 계속해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행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저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팔겠다고 이 추위에 거리로 나온 걸까.


그들 각자의 이름도 모르고, 거래조차 한 적 없으니 그들의 얼굴은 내 기억 속에서 며칠이 지나기 전에 휘발되고 말겠지만, 나는 그 잠깐의 스침만으로도 한아름의 슬픔을 안게 되었다.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말은 살 만한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구차한 낭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추위 속에서 들고 나온 농산물을 팔아야 하는 저 할머니들에게 그런 말은 어쩌면 배 부른 소리쯤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명절이 코밑인데 변덕스러운 날씨가 힘겹게 겨울을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욱신욱신 어깨가 쑤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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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2-0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조리 잘하세요.

꼼쥐 2026-02-12 18:4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나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