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새해를 시작하는 첫 달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가곤 합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벌써 1월의 끝자락에 와 있으니 말입니다. 개인의 일상도 그렇지만 세계의 변화도 예전과는 달리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국으로 돌변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를 주도하는 건 역시 미국이라 하겠습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이 힘과 무력을 통한 세계의 제패를 달성하려는 듯 피아 구분 없이,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좇아 힘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동물의 왕국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돈 앞에선 의리도, 양심도, 수치심도, 인간애도, 사랑이나 자비도, 어쩌면 인간이 추구하고자 했던 그 어떤 형이상학적 목표도 힘을 잃게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정치가와 그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이 있습니다. 정치에서 힘을 통한 지배는 사실 전가의 보도처럼 쓰여 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야만을 견제하고 약화시키는 역할은 주로 종교와 인간 개개인의 선한 영향력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야만과 이성이 공존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몇몇 종교가 자신들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정치의 시녀를 자처하면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타락한 종교인에 의해 야만의 정치는 더욱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지금처럼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의리를 중시하고 신념이 투철했으며, 자신의 양심에 빗대어 말과 행동을 절제할 줄 알았습니다. 정치에도 은유와 낭만이 존재했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대한민국의 정치는 크게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했던 건 역시 대한민국의 종교였습니다. 침례교의 목사를 자처하는 김 모 목사와 순복음교회의 이 모 목사, 광화문 집회를 이끌었던 전 모 목사, 최근 들어 정치 일선에서 뛰고 있는 손 모 목사 등 정치에 기생하는 정치버러지 같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준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소위 이단이나 사이비로 지칭되던 통일교와 신천지 역시 정치와 결탁하여 세를 확장하고자 했던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종교가 자칫 야만으로 흐를지도 모르는 정치를 정화하고 견제하지는 못할망정 앞장서서 야만을 부추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와 결탁했던 건 이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불교계의 몇몇 지도자들 역시 호시탐탐 정치에 앞장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종교는 단지 허울이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이해찬 전 총리의 영결식이 있었습니다.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그였지만 그도 역시 운명의 신이 내린 결정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듯합니다. 그는 비록 70대 초반의 조금 이른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지만 행복한 정치인생을 살았다고 자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은 힘들었겠지만 낭만과 의리가 살아 있던 시절에, 종교가 야만의 정치를 앞장서서 부추기지 않던 시절에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지키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헌법에서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만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종교인들은 우리 정치를 야만의 시대로 이끌어 가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야만의 정치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은 이제 더 이상 종교에서는 찾을 수 없을 듯합니다. 다만 우리는 개개인의 선량한 양심에 기대어 이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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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전연명의향서 - 죽음을 인식하면 삶은 다시 정의된다
김지수 지음 / 북루덴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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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죽음'에 연관된 책을 자주 읽게 된다. 연초부터 말이다. 리뷰를 쓰기 전에 읽었던 책을 소개하자면 캐나다 출신 조력 사망 전문의인 스테파니 그린이 쓴 <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와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디디에 에리봉의 저서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이 그것이다. 그렇게 이어져 온 독서는 김지수 아나운서가 쓴 <나의 사전연명의향서>에까지 이르렀다. 꽤나 오래전에 읽었던 김영민 교수의 저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빗대어 말해보자면 '연초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쯤 되겠다. 우리 모두 끝이 있다는 것, 언젠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가정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긴다는 건 오늘 하루를, 올 한 해를 의미 있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이 유한하다는 건 불행이 아니라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하나의 질문에서 비롯됐다. "존엄한 삶은 무엇인가?" 여기서 '존엄한 삶'이란 내가 어떤 삶을 존엄하다고 믿는지의 문제이다.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아버지를 떠올렸다. 마음 깊은 곳에 묻어뒀던, 지금까지도 온전히 마주하기 힘든 기억의 일부를 끄집어냈다. 고3이었던 1994년 가을, 아버지는 난치병을 선고받았고 6년간 이름 모를 병과 싸웠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죽음이란 걸 마주했다. 그것은, 난치병의 탈을 쓰고 환자의 장기 하나하나를 망가뜨리며 숨통만큼은 쉽사리 끊지 않는 괴물이었다."  (p.11 '프롤로그' 중에서)


작년 말에 읽었던 남유하 작가의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역시 이 책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인 김지수 아나운서 역시 죽음 앞에서 마냥 무기력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자신 역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로 인해 보건의료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로 살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위중한 환자들을 만나 취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앓고 있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끊임없는 자살 충동으로부터 벗어나 삶을 끌어안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나쁜 생각의 기세가 나보다 커지면 안 되기 때문에 늘 지켜보고 감시해야 했다.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건 내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노력함에도 몹쓸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에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내 나름의 처방을 내릴 수 있었다. 의사가 개입하는 치료 영역과 별개로 나의 내면을 스스로 돌볼 '통로'가 필요하다는 것. 그건 마음을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돌봄'이어야 했다. 그게 뭔지 당장 알 수 없더라도 내면을 돌볼 수 있는 무언가를 찾겠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았다. 이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p.57)


책은 모두 4개의 장(chapter)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의 투병 과정을 담은 Chapter 1. '아버지는 밤에만 울지 않았다', 취재 현장에서 경험한 말기 환자들의 모습과 그들을 통해 깨달은 것을 기록한 Chapter 2. '존엄한 삶이라면'과 Chapter 3. '정체성을 지킨다면 존엄한 죽음이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았던 존엄한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은 Chapter 4. '나의 사전연명의향서'가 그것이다. 존엄사나 의료 조력 사망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존엄하게 삶을 마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대수명이 늘면서 암 환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존엄한 죽음을 기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와 가족들이 존엄사가 허용되는 나라로 나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평화롭게 맞는다는 게 이렇게나 힘들다.


"요즘 반가운 소식을 자주 접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통계들이 발표되고 있다. 임종 과정에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미리 의사를 밝혀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이 300만 명을 넘겼다는 데 이어, 이러한 사전 서약에 따른 연명의료 중단 건수가 5만 건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임종을 늦추는 의료서비스를 받지 않는 대신 삶의 마지막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다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P220 '에필로그' 중에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았던 기억은 어느 왕조의 오래된 유물처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스러질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아쉽다거나 서럽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그렇듯 삶을 마감하는 그 순간만큼은 크게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존엄한 삶의 출발점은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존엄한 죽음도 결국 그 연장선에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점점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로 관심의 추가 서서히 기울게 된다는 점은 우리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과정인 듯 보인다. 내게 남은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죽음에 이르러서도 저 공원의 푸른 소나무처럼 담담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 바람이 어쩌면 이승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크나큰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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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장군과의 어색한 동거가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매섭다 보니 쉽게 적응하고 가까워지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과거 우리가 어렵고 못 살던 시절 같으면 몸에 걸친 입성도 허술하고, 지금의 추위보다 훨씬 매섭기도 해서 겨울 추위가 아무리 혹독해도 그러려니 하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한겨울에도 도통 추위를 모르고 지내는 터라 추위를 알리는 일기예보에도 지레 겁부터 나게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추위에 대한 엄살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는 뜻이지요. 강추위도 없고, 반짝하는 추위도 길게 이어지는 법이 없다 보니 추위에 대한 내성이 사라진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오늘은 지난 정권의 실세 중 실세였던, 이른바 V0로 일컬어지던 김건희에 대한 1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재판장이었던 우 부장판사는 퇴임 후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자신이 소유한 법적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김건희의 무죄 선고를 내리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듯 보였습니다. 이번 판결로 인하여 그가 판사직에서 물러나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김건희 일가의 집사 변호사로 영전할 가능성이 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스스로 믿게 되었을 듯합니다. 국민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눈 한 번 질끈 감고 양심과 논리에 반하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지요. 사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퇴직 후에 일용직을 해야 하나 아니면 어느 회사 수위 자리를 알아와야 하나 그도 저도 아니면 아파트 경비라도 부탁해야 하나 등 별별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는 게 다반사인데 범죄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던 어느 사모님을 무죄로 사하여줌으로써 평생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그 또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지요.


특검의 15년 구형에 대하여 1년 8개월을 선고한 것을 보면 재판장의 노력이 눈물겹도록 가상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불공정한 판결이 아니었느냐고 말이지요. 돌이켜보면 요양원을 운영하던 그의 오빠 역시 수십억 원을 횡령하였지만 불구속 송치되었고, 요양원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고 동종 전과도 있는 그녀의 엄마는 검찰에 숫제 송치조차 되지 않은 걸 감안할 때 김건희에 대해 1년 8개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집행유예로 풀어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공정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일반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선고 결과이겠지만 말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아니라 만 명에게만 평등한 것'이라고 했던 고 노회찬 의원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법은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규정하였던 김건희에 대해 사법부는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녀에게 한껏 낮은 자세로 머리를 조아렸던 것입니다. 일개 공무원 신분인 그가 퇴임 후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구걸하기 위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한낮에도 바람이 몹시 차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화끈화끈 열이 오릅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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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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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신의 허점을 찾아 숨바꼭질을 하듯 찾아 헤매야 할까.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야 할까.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모든 게 바뀐 상황에서 그 결과를 어쩔 수 없는 처분처럼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일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반짝반짝 빛나는>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작가는 이따금 너무나 낯선 설정으로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물론 소설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작가가 설정한 상상력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변주되는 것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의 설정은 유교주의 지배를 받는 아시아권 사람들에게는 마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천형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 녀석과 결혼을 하다니, 물을 안는 것이나 진배없지 않으냐." 그때 등에 으슬으슬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나무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전, 섹스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순간 시아버지는 움찔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그러고는 슬며시 웃었다. 나는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어, 서둘러 일어났다.  (p.20)


그렇다. 일주일 전에 결혼한 쇼코와 무츠키는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다. 아르바이트 삼아 이탈리아어를 번역하는 쇼코는 알코올 중독자인 동시에 조울증을 앓고 있다. 의사인 무츠키는 지나친 결병증을 지닌 사람인 반면 동성애자로서 동성 애인인 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거짓말이라고는 도무지 할 줄 모르는 무츠키는 쇼코가 곤에 대해 물을 때마다 사실대로 말해준다. 잠들기 전 침대 시트를 다림질하는 일을 제외하고 음식이면 음식, 청소면 청소 집안의 모든 일은 무츠키가 도맡아 한다. 너무나 순박하고 착한 무츠키에게 쇼코는 그 어떤 불만도 없다. 무츠키를 위해 곤과의 관계를 허락하기도 하고, 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한다. 형식적인 아내이기는 하지만 무츠키는 이와 같은 쇼코의 배려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차는 한밤중을 똑바로 달린다. 오늘 밤 곤을 만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쇼코의 기분을, 나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하도록 긴 하루였다. 어머니의 가시 돋친 목소리와 장인의 험악한 표정, 눈물짓는 장모의 손수건 모양과 고개 숙인 아버지의 옆얼굴. 후회하지 않아. 마음속으로 쇼코에게 말한다. 일찌감치 등받이를 뒤로 넘기고 기댄 곤은 코를 골고 있다. 입은 반쯤 열려 있다."  (p.200)


무츠키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쇼코의 마음은 점점 무츠키에게 기운다. 육체적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같은 공간에서 그와 함께 지내는 삶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무츠키는 쇼코의 절친인 미즈호를 통하여 쇼코의 옛 애인인 하네기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쇼코는 미즈호와 그녀의 아들 유타, 그리고 하네기 씨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게 된다. 이 모든 게 무츠키의 계획이었다는 걸 알게 된 쇼코는 크게 화를 내고 미즈호와는 절교를 선언한다. 그렇게 흘러가던 어느 날 무츠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장인 장모와 시어머니는 결국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츠키와 쇼코는 남들과 다른 자신들의 관계에 심한 압박을 느낀다.


"집으로 돌아오자, 왠지 맥이 축 빠지고 피로가 몰려왔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핌즈를 전자에일에 섞어 마신다. 가능하면 무츠키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협력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 봐야 하룻밤만 넘기면 되는 일이다. 나는 반짝반짝 닦인 바닥에 엎드리고 누워, 베란다 너머로 저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뺨이 싸늘해서 상쾌한 기분이다. 눈을 감고 온몸으로 귀 기울인다. 정겹고 청결하고 편안한 방의 기척. 이러고 있으면 무츠키에게 안겨 있는 것 같다."  (p.211)


사회적 인식과 관습에 얽매인 관계 속에서 아무런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두 사람과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곤. 책을 읽는 독자는 무겁고 착잡한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물론 소설은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동화적 결말로 끝이 나고는 있지만 소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답답한 마음에 속이 터질 듯하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읽어나가는 과정이 그저 힘에 겨울 뿐이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쇼코를 보면서 '우리가 육체적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 사랑할 방법은 과연 없단 말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작가 역시 비슷한 문제를 거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개인의 성적인 취향이나 기호를 떠나 서로의 영혼을 깊이 관찰하고 상대방의 매력에 이끌릴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인가.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처럼 서로의 순수한 영혼에 이끌려 플라토닉한 사랑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날씨가 조금 풀린다는 기상청 예보가 무색하게 바람에 섞인 한기는 여전히 냉랭하기만 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시린 느낌을 더하고 있다. 겨울 추위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 추위 때문에 마냥 움츠러들 게 아니라 겨울을 온전히 사랑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듯하다. 쇼코와 무츠키가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사랑법을 찾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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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게 불던 칼바람의 기세가 오늘 낮부터 조금 누그러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체감할 수 있는 강력한 한파가 길게 이어지고는 있지만 인간 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처럼 추위 속에서도 우리는 몇몇 반가운 소식들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것으로만 보였던 주가지수 5000을 가볍게 돌파하였다는 소식과 내란범에 대한 사법부의 단죄가 마냥 느슨하게만 보여 답답했는데, 재판부 역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반 국민과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눈높이에서 내란범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판 결과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검찰이나 사법부는 재임 기간 중에 받을 수 있는 국민의 신망이나 존경보다는 퇴임 후에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사적 이익에 더 많은 관심을 두어 왔던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고위 공직자나 재벌이 저지른 비리에 대해서는 적당히 눈을 감아왔고, 이를 통하여 소위 엘리트 그룹의 부정부패는 공고히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판사나 검사 역시 퇴임 후에는 그들 그룹에 소속되어 막대한 부를 획득하는 것은 물론 인맥과 교류 속에 대대손손 권력과 부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정의의 편에 선다는 건 어지간한 결단이 아니고선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이인자였던 한 전 총리만 보더라도 온갖 비리에 대한 설이 무성했지만 단 한 번도 처벌되지 않고 지금껏 호의호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도 역시 엘리트 그룹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던 까닭입니다.


한 전 총리에 대한 재판을 담당했던 이진관 판사 역시 온갖 유혹과 회유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도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갈등이 없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한 전 총리가 윤석열의 내란에 동조하여 호가호위를 꿈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법부의 정의와 이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질끈 눈을 감은 채 소수 엘리트 그룹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단 한 번 안면을 몰수한다면 자신은 물론 자손 대대로 탄탄대로를 걷게 될 텐데 그 유혹을 뿌리친다는 게 어디 쉽기만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진관 판사는 정의와 이를 열망하는 국민 다수의 편에 섬으로써 퇴락하는 사법부의 신뢰를 다시 살렸음은 물론 국민의 염원을 일부 해소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내란에 가담했던 모든 정황을 밝히고 그들 모두에 대한 처벌이 완료된 것은 아니지만 답답했던 국민의 마음이 조금쯤 풀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엊그제 시작한 것만 같았던 2026년 1월도 벌써 마지막 한 주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에서 겪게 되는 혹독한 시련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아주 작은 희망을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발견하기도 합니다. 지난 일주일의 혹독한 칼바람 속에서 몇몇 따뜻한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용기는 우연히 발견된 작은 희망의 결합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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