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서철원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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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를 갖는다는 것은 곧 후줄근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무리 폼나고 멋져 보이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어차피 자신의 일상은 추레하고 너저분한 어떤 것으로 인식될 뿐 일상 자체에서 활력을 얻는 사람은 없는 까닭에 우리는 언제든 이 넝마와도 같은 후줄근한 일상을 과감히 벗어던질 기회를 엿보게 마련이다. 등산을 하든, 독서를 하든, 음악회에 참석하든, 혹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불법적 행위(이를테면 마약이나 매춘과 같은)에 가담을 하든 원인은 모두 우리의 일상 자체가 너무도 따분하거나 빈약한 데서 오는 결과물이 아닐까. 비록 그 형태가 다를지언정 나른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런 직업이 없는 백수의 욕망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주야장천 에세이나 리얼리즘 소설만 읽다가 이따금 판타지 소설이나 역사소설에 눈길을 주는 이유도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욕망에서 보면 다 이해가 된다.

 

그렇게 보면 서철원의 소설 <최후의 만찬>은 독서가의 일탈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제9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책을 선택한 이도 더러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현대가 아닌 조선 정조 시대를 축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기존의 제도와 풍습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취하는 다양한 욕망의 스펙트럼을 매우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사기에 가까운 자기계발서에 찌든 대한민국 대다수 독서가에게 일말의 탈출구를 제시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 오래전 풍남문 앞에서 희디 흰 상천上天으로 밀려나간 두 선비의 삶과 믿음과 십자가의 희망을 생각하면, 삶은 문학보다 어려워지고, 문학은 구원만큼 멀어진다. 구원의 삶이 멀어질 때 서쪽 하늘 별이 된 자들의 숨소리가 이 시대의 오류에 떠밀려 한 점 구름으로 밀려오던 환영은 분명 꿈일 것이다. 그 삶의 거리에 쌓여 있는 삶의 흔적은 미망未忘의 자국일 뿐인데, 격동과 불굴의 말들이 엉키어들면 저 먼 시대 유자儒者들이 남긴 유언은 밤하늘 별빛보다 뚜렷이 들려온다." (p.434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신해년(1791년, 정조 15년)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를 지냈다는 이유로 취조를 당하고 결국 완산 풍남문 앞에서 처형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취조를 담당했던 사헌부 감찰어사 최무영은 윤지충의 집에서 발견된 그림 한 점이 있음을 정조에게 보고한다. 열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즐기는 그림. 윤지충의 말에 의하면 예수와 열두 제자의 식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사본인 이 그림을 본 정조는 서학과 유교가 충돌하는 난세의 어려움을 풀고자 도화서 별제 김홍도를 시켜 그림에 대해 검토하라고 지시한다.

 

"임금의 의도를 김홍도는 단숨에 알아차렸다. 그림을 그린 자와 감상자 사이의 거리는 천차만별이었다. 그 사이에 얕거나 깊은 강이 지날 수 있으며, 가깝거나 먼 산이 가로막힐 수 있었다. 앞이 비치는 투명한 천으로 덮여 있거나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흑단으로 가려질 가능성도 많았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사람들의 머리에 도는 이상과 맞물리기 쉬운 소재이며 시대와 섞이기 좋은 재료였다. 그 때문에 그린 자와 감상자의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p.309)

 

소설에는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와 당시의 실권을 장악했던 노론 세력이 등장한다. 서학의 유입으로 유학의 근간이 흔들리고 이로 인해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였던 정조와 순교를 지켜본 정약용의 나약해지는 신념을 대비시킴으로써 하나의 사건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는지 잘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새로운 이념이나 정치 철학, 혹은 신흥 종교가 그 시대의 기득권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며 이를 도입하기 위한 신지식인들의 반응은 또 어떠했는지 작가는 소설 속에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선 후기 정조 시대의 천주교 탄압을 다룬 그렇고 그런 소설이겠거니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무엇보다 문장 속에 감추어진 작가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적 울림이 좋았고,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 장영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 얽힌 비밀이 있었음을 밝히는 장면도 흥미로웠다. 소설을 극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작가가 창조해낸 여섯 탈춤패 초라니 암살단과 같은 가상의 인물들 역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심장을 쫄깃하게 한다.

 

"여섯 외인이 훔친 세상의 향기는 악의 집행이었을 것이다. 악을 과시함으로써 선을 밝히는 악의 집행이었을 것이다. 여섯 외인이 사면한 악의 진실은 더럽고 추한 냄새를 씻어내려 함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사라진 향기를 되찾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악취를 밀어내고 선으로 물든 깨끗한 향기를 내보내려 한 사투였을 것이다." (P.404)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유일한 국가 조선.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조선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유교의 전통을 잘 알면서도 신념과 양심에 따라 서학을 수용하고 자신의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조선의 선비들이 새삼 대단하게 보이는 건 소설 한 권이 단순히 재미로만 읽히지 않았다는 반증이리라.

 

역사의 진보란 계절의 순환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 속에는 익숙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인간의 잠재된 욕망, 그 작은 일탈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후줄근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변화의 물꼬를 트고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어떤 것들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사실.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친일 후손들의 공고했던 기득권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는 요즘, 그들의 거대한 반격이 검찰과 언론, 거대한 정치세력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몰아치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나른한 일상을 결코 오래도록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기에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서학이 새로운 종교, 새로운 신앙으로 인정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후줄근한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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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잘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정신질환만큼 전염성이 강한 질병도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복제된 듯 같은 질병이 그대로 옮겨지는 여타의 전염병과는 다르게 정신질환의 전염 양상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의 정신질환자로 인해 환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되는 전염의 반경은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치매 질환을 앓고 있는 한 사람을 가족으로 둔 경우 여타의 가족 구성원은 경중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게 마련이고, 심하게는 가족 중 누군가가 자폐증이나 조현병, 혹은 현대인의 대표적 정신질환이라고 하는 공황장애, 조울증, 강박증 등을 앓고 있다면 그 절망감으로 인해 가족 역시 쉽게 전염되곤 한다. 뿐만 아니다. 가족 구성원과 접촉하는 다양한 사람들 역시 우울한 분위기로 인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회적 편견과 좋지 않은 시선으로 인해 새로운 정신질환에 노출될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따지다 보면 정신질환자가 아닌 현대인을 찾는 게 오히려 빠를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최근 출간되는 책도 정신병에 관련된 책들이 많다. 오늘 알고 지내던 스님을 만나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깐 얼굴만 뵙고 오려던 게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그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스님은 현대인의 정신질환의 원인이 자연에서 멀어진 탓이라고 진단했다. 주말에 잠깐 나들이 삼아 찾는 자연만으로는 정신질환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기에 역부족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결국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 묻히게 되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연과 멀어진다면 그 삶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게 스님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자연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현대인의 정신질환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암울한 진단도...

 

그야말로 만산홍엽(滿山紅葉), 가을이 물들고 있다. 자연 속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풍광을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자연에 한껏 취해보는 것도 이 계절이 지나면 어려울 듯하니 말이다. 자연 속에서 명상에 들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지나고 나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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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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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죽음'이라는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세상과 결별하게 되겠지만 그 이전에 겪는 크고 작은 이별을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완전한 이별에 대한 상실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들곤 한다. 그렇다면 삶에서 겪는 의도하지 않았거나 의도된 이별은 과연 무슨 소용일까. 우리에게 어떤 의미, 어떤 철학적 깨우침을 주는 것일까.

 

불교 경전 법화경에는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명징한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만난 사람은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가버린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會者定離去者必返)'는 이 말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들리지만 결국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만남을 꿈꾸고 새로운 이별에 번번이 절망하며 상처 받는다. 만남과 헤어짐의 무의미한 반복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혜택은 어쩌면 영혼의 성숙과 이를 통한 예술로의 승화가 아닐까 싶다. 그런 까닭에 예술은 개인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탄생하는 고통의 산물이다.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는 노래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예술가는 그림으로 시위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어쩌면 몽상가 혹은 혁명가. 자신이 선택한 종목보다 한 움큼 더 느끼고 한 발치 더 앞서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그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별하고 굉장한 일이 아닌, 이미 포화 직전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63)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첫 번째 소설 <물 만난 물고기> 역시 주인공 '선'이 '진짜 예술가가 되기 위해 떠난 여행길에서 매력적인 여인 '해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선아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을 싫어한다는 해야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소원들에 공감하며 순간순간 떠오르는 노랫말을 기록하고, 선아 역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음악가가 되기를, 진정한 예술가 되는 꿈을 꾼다. 얼룩말을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보고 싶다는 해야,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삶에서의 자유를 동경하는 해야와 어울리면서 선아 역시 세상의 틀에서 자유로워진 자신을 느낀다.

 

"나는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든 해야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침실에 눕혀주었다. 곤히 잠겨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눈에 띄었다. 그녀를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못했으면 난 이 마지막 여행 이후로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음악가보다 환경미화원이 더 멋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야는 나의 음악에서 결핍된 자리를 정확히 채워주고 있었다. 그녀의 말과 생각은 나를 번뜩이게 만들었다." (p.114~p.115)

 

사실 이 소설은 전문 소설가의 작품에 비하면 독자의 기대에 한참이나 뒤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유명인들이 수필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예술관을, 자신의 가치관을, 그리고 삶의 목표나 지난 삶에 대한 회상을 두서도 없이 써내려갔던 것과는 다르게 소설이라는, 일반인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야에 도전함으로써 음악인으로서의 일탈과 자유를 향한 의지를 피력했다는 점에서 나는 이찬혁의 도전을 칭찬해주고 싶다.

 

"해야는 한 권의 책이에요. 그녀의 시작과 결말은 정해져 있는 거죠. 하지만 그녀가 그걸 의식하면서 따라가는 건 아니에요. 그녀가 순간순간 만들어나가는 게 곧 그녀의 이야기인 한편, 자신이 결정적인 순간에 어떠한 역할을 할지는 이미 결정이 끝났다는 거예요." (p.150)

 

어떤 소설이든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이야기는 만들어지고, 사랑과 이별, 욕망과 성취, 절제와 일탈 등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을 그리며, 결국 한 편의 소설은 작가 내면에 존재하는 삶의 의미를 이끌어내곤 한다. 아무리 좋은 소설이라도 독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리 하찮은 소설이라도 독자 모두가 싫어하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는 다양한 소설을 통해 자신의 전체적인 삶을 계획하고, 따라해 보고, 수정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다만 우리에게 정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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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라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80대 후반에서 90대의 노인들을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아파트 주변의 산책로에서도, 동네 경로당에서도 90 언저리의 노인들을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100세 시대'가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하는 의문이 이따금 들곤 한다. 90대의 부모와 70대의 자식이 함께 늙어간다는 건 차라리 비극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이미 늙어서 제 한 몸조차 간수할 수 없는 자식의 모습을 일 년 삼백육십오일 지켜본다는 게 과연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이유도 있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던 과거와 다르게 자식이 없거나 많아야 한둘인 요즘에는 대부분의 노인들이 요양원이나 노인병원과 같은 집단 수용소에 보내진 채 하릴없이 세월만 보내다가 쓸쓸히 죽어가는 게 '100세 시대'의 보편적인 모습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마저 축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렇다면 죽음을 맞는 나이는 몇 살이 적당할까? 물론 한 살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은 사람도 많겠지만 내 생각에는 60대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 나이에 늙어가는 자식을 볼 리도 만무하고,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리지 않는 한 죽는 날까지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60년이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웬만한 일은 다 겪어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이라고 삶도 죽음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게 인간이고 보니 그저 생각으로만 그칠 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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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삭줍기 환상문학 1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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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동안 쉼 없이 글을 쓰다 보면 글을 쓰지 않는 일상의 순간에도맥락없는 단어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떤 날은 '돌연', '불현듯', '과연' 등과 같은 부사가 내 머릿속을 놀이터 삼아 온종일 휘젓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이내', '겻불', '부지깽이'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 명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주로 산길을 거니는 아침 시간이나 노을을 바라보는 잠깐의 여유 시간에 진해지게 마련인데 자맥질하듯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그중 맘에 드는 단어들을 골라 멋진 글로 구성하기에는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참 뒤떨어진 나로서는 언감생심 욕심에 불과할 뿐 결국 머리만 어지럽힌 채 잠깐의 여유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 이런 변명은 물론 글재주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나의 결함을 방어하기 위한 치졸한 수단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마치 몽유병과도 같은 단어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나는 '간헐적 단식'이 아닌 '간헐적 글쓰기'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게 또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글을 쓰는 일이 낯선 일이 된 까닭에 한 편의 짧은 글을 완성하는 데도 전에 없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도 하고, 전에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단어들이 떠올라 고민이던 게 이제는 숫제 꼭 써야 할 단어조차 좀체 떠오르지 않는 지경에 이르러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고민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쥐어짜며 끙끙대서 겨우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도 한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다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 마음먹었던 것도 꽤나 오래전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내 붓방아만 찧고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그러다가 나는 또 몇 권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리뷰는 쓰지 않았다. 자본주의 태동기에 쓰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마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할수록 황금만능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소설 속 주인공 슐레밀은 자신의 그림자를 팔라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기다렸다는 듯 선뜻 팔아넘기고 만다. 대신에 그는 금화가 고갈되지 않는 마법의 주머니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돈이 업적과 덕성보다 훨씬 중요할지라도, 그림자야말로 그러한 돈보다 훤씬 더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양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쳤지만 지금은 단순한 돈 때문에 그림자를 바치고 만 것이었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P.33)

 

슐레밀은 비록 자신의 그림자를 잃었지만 마법의 주머니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얻으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다. 그에게는 더없이 충성스러운 하인 벤델이 있었고, 그림자가 필요할 때는 기꺼이 그의 곁에 서주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없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온전히 얻지 못하며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인의 도움 없이는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음은 물론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주변만 맴도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결국 자신의 왕국에서도 쫓겨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의 그림자를 사 간 정체불명의 사내가 찾아온다.

 

"우리는 단지 동일하게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수레바퀴처럼 그 안에 맞물려 있는 거야. 일어나야만 하는 일은 일어나는 법이며, 그러한 섭리가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지. 결국 내 운명에서, 그리고 내 운명을 공격하는 이들의 운명 속에서 나는 그러한 섭리를 존중하는 것을 배웠던 거야." (p.92~p.93)

 

정체불명의 사내는 자신에게 영혼을 팔면 그림자를 되돌려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슐레밀은 그의 제안을 거절한 채 방랑길에 오른다. 그리고 전 세계를 떠돌던 슐레밀은 한 때 자신의 하인이었던 벤델의 고향 근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자신에게서 받았던 금화로 벤델은 '슐레밀 병원 재단'을 설립하였고, 슐레밀은 자신의 이름을 딴 '슐레밀 병원'에서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온 슐레밀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벤델과 과부가 된 미나의 대화를 듣게 된다.

 

"아니에요, 벤델 씨, 기나긴 꿈을 꾸고서 마음속에서 다시 깨어난 이후 저는 평온하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었어요. 이제 저는 평온한 마음으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신을 공격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주인이자 친구에게 봉사하는 것도 내면이 평온한 행복감으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p.129)

 

이 소설의 작가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프랑스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독일로 망명을 해야 했고 평생을 독일인으로 살아야 했다. 말하자면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그는 독일과 프랑스 어느 한 편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이자 외톨이였다. 그런 까닭에 슐레밀에 투영된 자신의 삶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듯한 이 소설은 작가의 의도와 주제가 쉽게 드러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어떻든 황금만능주의로 치닫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는 과거에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유효하다는 점이다. 검찰과 언론에 대한 국민의 개혁 요구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요즘,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림자마저 팔아치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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