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최근 시골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시와 멀어질수록 주민의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최신 트렌드와 유행 코드와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개중에는 은퇴 후 귀촌을 한 사람도 있고, 젊은 시절 나름 패셔니스타라고 자부했던 사람도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건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의 이념과 사상에 따라 그 친밀도가 나뉜다는 점이다. 마을이라 봐야 손바닥만 한 작은 지역이고 가구수도 많지 않은데 설마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 반목하며 데면데면 지내겠느냐 싶겠지만 사실이란다.

 

나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게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보수적 색채가 짙은 사람일수록 현 정권과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과 거친 표현이 수위를 더했다. 말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개 XX라든가 호로 XX라든가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처음 보는 나에게 그런 저속한 표현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품위만 떨어진다는 걸 잘 알 텐데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뱉는 걸 보면서 내가 오히려 당황스럽고 민망하였다. 학력이 낮은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배울 만큼 배웠다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저속함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나의 추론은 경쟁심에서 출발한다는 결론이다. 그들에게 경쟁은 그야말로 총칼을 들고 대치하는 전쟁에 가깝다는 인식이 지배적이고,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한 경쟁에서도 패배는 곧 죽음과 같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이념이 다른 마을 사람들조차 적으로 만들었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 지 오래고 대화와 포용의 상대는 실종되었다. 물론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고, 경쟁의 저변에는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보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빤스 목사가 학력이 낮아서 그런 거친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소위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저속한 언어 사용으로 인해 보수 세력에 대한 민심 이반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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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매년 10월 31일마다 듣게 되는 노래가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라는 노랫말에서 우리는 이별의 슬픔과 계절의 스산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가수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은 그렇게 10월을 대표하는 명곡이 되었다.

 

금년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이용보다는 가수 아이유가 부른 '잊혀진 계절'을 더 많이 들었다는 것뿐. 그러나 올해는 예년과 다른 어떤 것이 있었다. 10월 31일을 몇 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우리에게 속보로 전해진 안타까운 사건. 어업 중 다친 선원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출동했던 소방헬기의 추락. 헬기에는 환자와 보호자 구조대원 등 7명이 타고 있었다. 헬기에 탑승했던 구조대원 중에는 유일한 여성 탑승자이자 소방관으로서 자부심이 컸던 새내기 구조대원과 결혼한 지 겨우 2개월 된 새 신랑 구조대원도 있었다고 했다. 이틀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찾는 수색작업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탑승자의 시신 3구만 겨우 찾았을 뿐이라고 하니 탑승자의 가족들에게는 올해의 10월 31일이 그야말로 '잊혀진 계절'이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가족을 잃은 큰 슬픔으로 인해 '잊을 수 없는 계절'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작가이자 완화의료 분야 종사자이기도 한 샐리 티스데일의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죽음'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래의 범주 속에 '죽음'을 끼워넣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자신은 언제나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삶의 끝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좋은 죽음이란 무엇이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 좋은 죽음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10년 넘게 완화치료 간호사로 일한 샐리 티스데일의 조언을 들어보자.

 

"사람들은 흔히 자기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용히 떠나는 걸 상상한다. 흠, 그야말로 상상이다. 소위 좋은 죽음에 대한 이상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죽음은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도 아니고, 성취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삶과 죽음은 소유물이 아니다. 죽음이 특정 방식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다를 땐 나쁘다고 판단할 것인가? 남들이 원하거나 계획한 방식을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마라.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할 길이다." (p.76)

 

우리 민족에게도 '죽음'에 대한 그와 같은 선입견이 있다. 나이가 들어 숙환으로 별세했을 때 조문을 온 문상객들은 '호상'이라며 상주와 가족들을 위로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호상'이라는 평가는 그야말로 자의적인 해석일 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는 당사자가 아닌 살아 있는 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이다. 저자는 자신의 삶과 일에서 마주쳤던 여러 '죽음'에 관한 일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전 세계 다양한 문화와 전통과 문학에서 찾은 죽음의 일화를 통해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현실적인 조언을 책에 실었다. 

 

"석양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저문다. 우리는 위태로운 삶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다. 눈앞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변화무쌍한 삶에 간절히 매달린다. 우리는 나날이 빛나는 특별한 삶을 찬미한다. 하지만 태어난 모든 것에는 죽음이 따른다. 아무리 다정하고 완벽한 만남도 결국엔 헤어짐이 있다. 우리는 스러져가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 뺨에 와 닿는 숨결, 물 한 모금, 힘없이 떨어지는 단풍,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우리 자신의 삶." (p.298)

 

저자의 결론은 간단하다. 죽음을 터부시하면서 마냥 피하고 등질 게 아니라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정확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풍성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극복함으로써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자는 게 저자의 주장일 수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을 위해 부록에 실린 죽음 계획서와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장기와 조직 기증, 조력사 등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나는 신문에 실리는 사망 기사를 즐겨 읽는다. 짤막한 기사에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놀랍도록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목록을 훑어보면서 거의 대부분 늦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한다. 고백건대, 나한테는 그 점이 무척 중요하다. 텔레비전을 보면, 연쇄 살인범 손에 죽거나 청초한 모습을 간직한 채 암으로 죽거나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아주 많다. 하지만 미디어가 심어준 믿음과 달리, 우리는 대개 지구상에 존재했던 대다수 사람들만큼, 혹은 그들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p.184)

 

어제는 '내게도 사랑이', '풍문으로 들었소' 등으로 유명한 가수 함중아가 향년 67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은 우리의 곁을 서성이며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처한 운명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오늘을 산다. '죽음'이 선명할수록 삶은 소중해진다. 다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로 탁해진 대기 속에서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자태가 선명했던 하루였다. 어쩌면 가을은 '죽음'을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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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午睡)를 즐기기에 가을이라는 계절은 아깝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께느른한 햇살이 거실 바닥을 반쯤 점령하여 세상은 온통 나른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걸. 투명한 가을 풍경이 눈꺼풀에 걸려 아른아른 멀어져 갈 즈음, 동네 놀이터에선 까르르까르르 아이들 해맑은 웃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또는 할머니의 옛이야기처럼 귓가에 퍼지더라. 이쯤 되면 밀려오는 졸음을 나로서도 어찌할 재간이 없었던 게야.

 

그렇게 한두 시간을 잤던 것 같아. 아무 걱정도 없이. 정말이지 평화로운 세상이었어. 일어나 보니 글쎄 텔레비전만 홀로 떠들고 있지 뭐야. 구경꾼도 없는 방에서 지치지도 않고. 잠도 덜 깬 멍한 정신으로 커피 한 잔을 마셨어. 달달하고 텁텁한 커피 믹스 특유의 향이 잠도 깨지 않은 나를 깊은 수렁으로 이끄는 듯했어. 온몸에 묻은 나른함을 털어내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열었어. 소슬한 바람이 목을 타고 어깨까지 파고들더군. 가벼운 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가을이 깊어간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을 거야. 문득 드는 쓸쓸함,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우울. 이창래의 소설 <영원한 이방인>을 읽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내려놓게 되더군. 재미가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우울했거나, 잠이 덜 깼거나, 시간이 아까웠던 게지. 계절은 여전히 석양에 빛나는 노란 은행나무의 껑충한 우듬지에 걸려 있었을 테지. 오수를 즐기기에는 가을의 오후는 너무 짧았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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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을 팝니다 - 왠지 모르게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의 비밀
신현암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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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럴 수밖에. 그만큼 경험이 많아진 탓이고, 이미 알고 있거나 한두 번 가본 곳을 다시 찾았을 때 처음 느꼈던 설렘은 반감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설렘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같은 장소, 같은 사람을 만날지라도 매 순간 처음의 설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설렘을 느끼기 위해 굳이 다른 장소, 다른 사람, 다른 음식을 경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도 '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진다'는 말이 마치 사실인 양 하는 데 한몫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설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엄밀히 말하자면 영혼이 깊어질수록) 설렘의 대상이 물질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차츰 옮겨질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만 하더라도 예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시시한 나뭇잎이나 작은 꽃잎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자연의 신비에 가슴이 두근거리곤 하니까 말이다.

 

신현암 팩토리8 연구소장이 쓴 <설렘을 팝니다>를 읽으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람은 여전히 시각적인 정보를 통한 감성의 자극에 많은 부분 지배되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상인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다. 30년 동안 삼성과 CJ의 마케팅 담당자로, 프로젝트 기획자로, 삼성경제연구소 책임연구자로 일해 온 그의 경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단 한 번도 마이너의 세계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고자 2018년 한 해에만 102일간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설렘에 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자동차로 가려면 도쿄에서 여덟 시간 걸리는 아오모리현 이나카다테(논에 다른 색의 벼를 심어 나폴레옹, 메릴린 먼로 등을 형상화한 라이스 아트로 유명한 곳)부터 야마구치현 산골짜기의 조그마한 양조장, 히로시마현의 숨겨진 한천 전문점 등을 다녔습니다. 모두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이 모두를 책에 담고 싶었지만 지면의 한계상 도쿄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p.14 '머리말' 중에서)

 

책의 내용과는 다른, 살짝 샛길로 빠진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나는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사실 책이라는 게 문자를 통한 일종의 환상을 독자들 머리에 심는 일인데, 이에 더하여 아무런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 전자책으로 읽을 경우 모든 게 다 환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이의 질감을 수시로 맛보면서 지금 내가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작은 위안 혹은 안정감을 얻곤 한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은 이런 물리적 현실 세계를 환상의 세계로 점점 치환해가는 현상을 보이곤 한다. sns를 통해 알게 된 맛집을 직접 방문했을 때의 실망감은 다들 한두 번쯤 겪어보았을 터, sns라는 환상과 물리적 세계의 간극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다.

 

각설하고 다시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 책은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쿄의 21개 공간을 분석하고 한 번 방문했던 고객이 그 공간을 다시 찾고 싶어 하는 이유를 밝힘으로써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의 비밀, 말하자면 설렘 전략을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은 전통 경제학의 기본 전제인 '합리적인 소비자'라는 전제를 무력화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과학의 발전은 환상의 세계를 넓혀가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식당은 가장 겸연쩍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대면 상황을 배제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50분을 '한 끼 알바'에 할애한 뒤 식권을 붙이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 식권이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때에 사용하면 됩니다. 서로 만나지 않기에, 식권을 제공하는 사람의 진정성은 돋보이고 받는 사람의 불편함도 없습니다." (p.82)

 

일본 아베 총리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관계의 악화는 일본 관광에 직격탄을 날렸고, 우리나라 관광객의 대부분은 동남아나 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런 마당에 '왠지 모르게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의 비밀'이라는 부제로 일본 도쿄의 21개 핫플레이스를 소개하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sns의 발달로 전국 맛집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맛과 가격의 가성비만 따질 게 아니라 소비자의 '설렘'을 기본 마케팅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게 아닐까. 굳이 도쿄를 방문하라는 게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면 배우는 게 좋지 않은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정원 규모는 5000평 정도로 크지도 작지도 않습니다. 정원 중심부로 들어가면 다실도 있고 연못도 있습니다. 오감을 모두 끌어올려 정원을 즐겨봅니다. 크게 심호흡을 합니다. 울창한 숲 덕분에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봅니다. 새소리,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취합니다. 손으로 이것저것 만져봅니다. 돌, 나무, 풀 어느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몇 시간 거닐어도 좋습니다. 복잡한 도쿄의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하면서 말이죠." (p.270)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곳에는 사람이 덧입힌 인공의 조형물이 하나 둘 추가되기도 하고,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추억이 더해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공간은 사람에 의해 덧입혀진 환상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무형의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공간이라는 물리적 세계를 점차 환상의 세계로 뒤바꾸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엊그제 들렀던 괴산 문광의 은행나무 가로수길이 지금도 여전히 생각나는 까닭은 그 공간에 담긴 내 영혼의 시간이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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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리얼미터가 조사한 '국가사회기관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국민들은 대통령을 가장 신뢰하는 기관으로 꼽았고(25.6%), 신뢰도가 가장 낮은 3개 기관은 경찰·국회·검찰로 조사됐다고 한다. 2년 전 한 여론조사 기관이 '국민 신뢰회복을 위한 개혁이 가장 시급한 기관'을 묻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에 따르면 '법원, 검찰 등 사법기관'이 1위, '국회'가 2위, '신문사, 방송사 등 언론기관'이 3위로 나타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한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논하기 위해서는 법원이나 검찰 등 사법기관과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다. 그럼에도 국민의 의식 수준은 한참 앞서가는 데 반해 우리나라의 검찰과 언론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국민들은 끝없이 '공정'과 '정의'를 외치고 있건만 검찰과 언론을 통제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국회도, 당사자인 검찰과 언론도 개혁은 그저 공염불로 그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구조인 그들이 국민들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개혁에 동참할 리 없다는 게 중론이다. 사익을 지킬 게 많은 그들로서는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대의를 위한 '공정'과 '정의'보다는 그들 가까이에 있는 사익의 유혹이 더욱 큰 것이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검찰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여의도로, 서초동으로 모여들고 있다. 우리는 결코 잃을 게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비열하고 편파적인 권력구조를 우리 다음 세대까지 물려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 당장 우리에게 떨어지는 사익은 별게 없을지라도 우리는 다만 희망을 노래하고 '공정'과 '정의'를 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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