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결 - 결을 따라 풀어낸 당신의 마음 이야기
태희 지음 / 피어오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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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적당한 마음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노련한 비즈니스맨일지라도 말이다. 때로는 상대방이 원하지 않았는데 내가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어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처럼 관계로 맺어지는 마음의 거리는 지나치게 멀거나 가까워지는 게 다반사, 적당한 거리를 기계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데 답답함이 있다. 평생에 걸쳐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마음의 상처를 평생 지고 갈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는지도 모른다. 작든 크든 말이다.

 

태희 작가의 <마음의 결> 역시 인간의 운명과도 같은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는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안 그런 척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것만 같아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그때는 왜 그랬을까? 지난 시절을 후회하기도 하면서 울고 웃게 된다. 꾹꾹 눌러 참아왔을 뿐 남들에게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들을 조금쯤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긴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안으로만 향했던 마음의 칼날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고민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다. 그런데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다들 비슷한 이유로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잘 했는데 상대방은 왜 그럴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했는데 왜 저런 반응이 나타날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저 사람은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는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서, 내가 생각하는 상식의 틀에 맞춰 생각을 하고 잇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관계에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먼저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한다." (p.233)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삶을 시샘하면서 누가 사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자책을 하고, 때로는 좌절을 하는 바람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였던 게 아닌가. 그러느라 우리는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를 소비했던 건 아닐까. 책에서 저자는 '1부 글로 마음을 펼친다'를 통하여 관계 맺기의 어려움과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여러 상처와 치유법을, '2부 너의 마음을 읽는다'를 통하여 사랑과 이별, 그 영원한 숙제에 대하여, '3부 우리의 결이 같기를 바란다'를 통하여 자기 자신 잘 대하기에 대하여 쓰고 있다.

 

"사람은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을 때 끝까지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주는 힘. 그것이 어쩌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 (p.248)

 

마음의 병은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내도 좋다. 그 사람의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는 말 한마디가 내 상처의 치료제가 되고, 그와 같은 경험이 같은 상처에 대한 면역력을 키운다. 육체의 병은 단 한 번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마음의 상처는 기억이 거듭될수록 병은 깊어지고,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완치란 있을 수 없다. <마음의 결>과 같은 책이 독자의 마음을 다독이고 상처를 잊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새로운 기억이 마음의 상처를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는 한 언제든 상처는 재발하게 마련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떠들썩한 요즘, 겉으로 드러나는 병은 오히려 치료가 쉬울지도 모른다. 정작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마음의 병이 아닐까 싶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는 이제 겨우 2만 명을 넘었을지라도 마음의 병을 앓는 환자는 예전에 벌써 70억 명을 돌파했을지 모르는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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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운명이나 한계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 자연스레 샘솟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 속에는 일종의 패배의식과 같은 감정도 없지 않아서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종종 꺼려지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나이가 들어도 언제나 청소년기의 아이들처럼 꿈을 꾸고, 백 년도 못 살 인생이지만 천 년을 살 것처럼 욕심을 내고, 60, 70이 되어도 항상 헤라클레스와 같은 체력을 유지하도록 교육받아 온 셈인데 그게 과연 옳은 일인지 일견 의심이 들곤 한다.

 

나와 인연이 있는 한 스님은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신 적이 있다. 속세에 사는 사람이나 산에서 수도를 하는 사람이나 인간은 누구나 욕심을 에너지로 사는 것이라고. 그것이 부든, 명예든, 권력이든, 해탈이든, 성불이든, 득도든  간에 목표로 하는 대상이 서로 다를지언정 목표를 향한 욕심이 얼마나 크고 작은가에 따라 사람의 수명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결국 욕심이 없다는 것은 삶의 에너지를 잃는 것이기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그러므로 속세에서 말하는 '내려놓기'란 탐하는 대상을 바꾼다는 의미일 뿐 욕심을 없애는 게 아니라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부터 우리는 '저 사람도 나이가 들면 나와 같겠지.' 하는 연민이 싹트게 마련이고, 타인의 삶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됨으로써 배려를 배우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동지의식과 같다.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의식이 기억하는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흐른다. 일정한 루틴을 따라 큰 변덕 없이 흐르는 몸의 시간은 매번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시간에 한계와 매듭을 지어주는 것은 몸의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사람이 마치 100년은 더 살 것처럼 크게 욕심을 내는 걸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그게 마치 선인 양 가르쳐왔던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한계를 인식한다는 건 결코 좌절이나 패배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모든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배울 수 있는 까닭에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는 것이다.'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 않던가. 겸손하다는 건 자신의 운명이나 한계를 인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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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100호 - 2019.가을
문학동네 편집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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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러운 계절을 살아내자면 때로는 나 죽었소 하고 우직하게 버티는 것도 필요할 터, 겨울은 우리에게 그런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 겨울은 날씨의 변화가 어찌나 심하던지 우직하게 버티는 것은 고사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 탓에 발 빠르게 적응하느라 진땀이 날 정도이니 인내를 배워야 할 계절에 도리어 변덕이 팥죽 끓듯 하는 기분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게 이렇듯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따라 이리 흔들 저리 흔들 요동치는 걸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란 한낱 뜬구름 잡기에 그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계간 문학동네(2019년 가을호)>에 실린 강화길의 소설 '음복(飮福)'은 우리가 속한 사회의 전통이나 문화가 구성원을 얼마나 옥죄고 끊임없는 자기 검열에 시달리게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단편소설이라는 짧은 글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날씨라는 외부요인과는 확연히 다른,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남녀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문화라는 이유로, 전통이라는 명목 하에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민낯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주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2020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선명한 색채로 각인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이렇다 할 친절한 설명도 한 줄 없는데 독자들은 마치 일간지 1면에 실린 메인 사진을 보고 있는 것처럼 소설의 구도와 주제를 선명하게 떠올리는 것이다. 더 이상 보태거나 뺄 것이 없는, 말하자면 군더더기가 없는 명징한 문장이 독자들로 하여금 한 컷의 사진과 같은 뚜렷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게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세나)'7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한 새색시이다. 결혼 후 첫 시댁 제사에 참석한 '''남편(정우)'. ''는 시조부의 제사상에 올려진 낯선 음식과 ''를 향한 시고모의 날 선 감정의 근원을 추적한다. 20년 넘게 간호사로 근무했던 시어머니는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넘치고, 그에 반해 말씀이 없으신 시아버지, 치매를 앓고 있는 시조모 등 시고모의 입장에서 새 식구인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질 만한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 제사가 끝나고 끝나고 음복을 하는 자리에서 듣게 된 시조모의 한마디로 인해 ''는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 공부도 잘하는 시고모의 딸 정원이 약대를 가기 위해 재수를 한다고 했을 때의 기억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던 시조모. ", 너 정원이 재수시키지 마라. 주제를 알아야지. 지가 무슨 약대를 간다고."

 

그랬다. 철저한 가부장제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시댁은 남편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낯선 음식을 제사상에 올릴 수도 있고, 남편의 기가 꺾일까봐 또래의 여자 사촌이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었다. 남편(정우)을 향한 시고모의 적대감은 고스란히 내게 쏟아졌고, 남자라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체득한 특권을 마음껏 누려온 남편은 타인의 눈치를 보았던 적도, 그럴 필요도 느껴보지 못했던 까닭에 고모의 차가운 시선도 감지하지 못한 채 그토록 해맑을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감정쯤이야 몰라도 되고 무시해도 되는 권력, 우리는 그와 같은 무지를 '선택적 무지'라 부른다. 가정 내에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무지한 권력자와 생존을 위해 언제나 권력자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피지배자의 삶은 어느 한 대에서 그치지 않고 끝없이 대물림된다.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가정 내에서의 권력은 여전히 남자에게 쏠려 있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남성의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이유도 그와 같은 권력 구조에서 비롯된 '선택적 무지'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폐습이 지속되는 이유를 남성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일정 부분 여성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말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듯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혹은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불평등 구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하는 것도 아닌데 성별에 의해 어떤 천부적 특권을 누린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게 아닌가.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잘못을 깨닫는 데서 출발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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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만 틀면 온통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소식이다. 국내의 잡다한 소식들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말하자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뉴스의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인데 일견 잘됐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들어도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때에 따라서는 기분마저 더러운) 잡다한 소식들이 한꺼번에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낄 때 안 낄 때 구분도 하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진모 씨의 객소리도 뉴스가 되는 세상이니 그런 소식들이 뉴스에서 사라진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던 검찰발 기소 소식도 아득히 먼 이야기인 양 아득한 과거로 만들어버렸으니 이 모든 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력(?)임을 감안할 때 고맙고 반갑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 우려되는 점은 중국인에 대한 과도한 혐오 감정과 저만 살고자 하는 지나친 이기주의가 아닐까 싶다.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애를 지닌 한민족의 전통은, 유구한 역사 동안 면면히 이어오던 '()의 문화'는 작금에 이르러 한꺼번에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한에 체류하던 교민의 귀국을 저지하기 위해 트랙터를 동원하여 진입로를 막았다는 소식도, 중국인의 입국을 막아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도대체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다. 자신의 일가친척이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길을 가던 길 잃은 강아지도 어디가 아파 보이면 병원에 데리고 갈 판에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아픔쯤은 거들떠도 보지 않겠다는 심보는 도대체 뭔가.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신종 바이러스는 계속하여 생겨날 터, 그때마다 우리는 발병지의 주민들을 통제하고 나 혼자만 잘살겠노라고 선언할 텐가. 세계 어느 나라도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글로벌한 세상에서 그와 같은 발상을 한다는 건 철이 없어도 너무나 철이 없는 유아기적 행동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철부지 행동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언론은 또 뭔가. 그러니 기레기 소리를 들을 수밖에. 기가 찰 노릇이다. 비싼 말을 사준 대가로 삼성 이재용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고 쉬쉬하며 숨기기에 급급했던 박근혜 정권의 메르스 사태 때도 우리 국민의 인간성이 이보다 더 심하게 망가지지는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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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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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 날씨였다. 길지 않았던 설 연휴를 시샘하듯 온종일 지척지척 겨울비가 내렸고, 바람마저 사뭇 거칠었다내내 어두웠기에 실내에서도 하릴없이 불을 밝혔다. 안온한 우울이 축축하게 묻어나는 오후, 아슴아슴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쫓아가며 책을 펼쳤다. '그래, SF 소설을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지.' 하는 생각이 슬몃 들었던 것이다. '미래를, 혹은 과학을 논한다는 건 언제나 황량한 느낌이 들게 마련이니까. 메마르고 거친 느낌을 중화하는 데는 역시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끈적끈적한 우울이 방안 가득 퍼지는 날씨가 좋지.' 가족들과 헤어져 숙소로 복귀했던 나는 그렇게 내처 책을 읽었다. 쓸쓸함을 넘어 청승맞은 느낌마저 감도는...

 

김초엽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구매했던 건 열흘도 더 지난 일이었다. 메마른 날씨로 인한 건조한 분위기 탓이었던지 아니면 일이 바쁘다는 핑계가 발목을 잡았던 것인지 좀처럼 독서에 속도를 붙이지 못했던 나는 두 자리 숫자의 페이지를 겨우 넘긴 채 책상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위치만 바꿔놓고 있었다. 그렇게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듯한 위기를 겨우 막았던 건 어제의 궂은 날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울한 감정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그런 날씨에 혼자라는 외로움과 커피 한 잔이 더해져 나는 그만 우울함에 취해 정신마저 몽롱해진 기분이었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즐거움만을 주던가요? 공포, 외로움, 슬픔, 고독, 괴로움…… 그런 것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죠. 그러니까 이건 어차피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 아닙니까?" (p.214 '감정의 물성' 중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는 표제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비롯하여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스펙트럼', '공생 가설',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등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포스텍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김초엽 작가는 1993년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비해 지극히 세련되고 정제된 문장과 자신의 전공을 십분 살린 전문적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멋들어진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장르소설로 분류되는 SF소설은 몇몇 마니아 집단을 제외하면 독자층이 그닥 두껍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SF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인간 존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파헤치는 테드 창과 같은 걸출한 작가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나 역시 테드 창의 작품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SF소설 마니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SF소설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아보지 못할 세상, 다음 세대나 그다음 세대나 겨우 살아볼 수 있는 세상을 지금 세대가 겨우 맛보기로 미리 앞당겨 살아보는 것이기에 인간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한탄 혹은 인생 자체의 덧없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고를 철학적 전제로 하는 SF소설은 소설 전반에 흐르는 감정이 '우울'일 수밖에 없고, 나 역시 비슷한 성향의 인간이고 보니 SF소설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지. 언젠가는 이곳에서 우주선이 출항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슬렌포니아 근처의 웜홀 통로가 열리지 않을까……. 자네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 붙잡지 못해 아쉬운 기회비용이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아니라네." (p.177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중에서)

 

김초엽의 소설은 SF소설의 기본적인 특성을 잘 살린, 말하자면 기본기에 충실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만 하더라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안나는 냉동 수면의 '안티프리저'라고 불리던 유기물질 혼합 용액을 연구하던 과학자로서 남편과 아들을 먼저 외계 행성인 슬렌포니아로 떠나보내고 혼자 지구에 남아 남은 연구를 계속하다가 과학의 발전으로 슬렌포니아로 가는 항로가 영영 끊겨버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게 된 불쌍한 노인이다. 자신이 개발한 딥프리징 기술을 통해 동결과 해동을 반복하면서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이 출발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안나는 오늘도 폐기 예정인 우주 정거장에서 슬렌포니아로 가는 우주선을 기다리고 있다. 삶의 영역이 우주로 확장되었지만 인간의 생명이 유한한 것도, 과학의 발전이 인간에게 반드시 기쁜 일만 선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다른 작품에서도 감지된다. '스펙트럼'에 등장하는 할머니 과학자도, 공생 가설에 등장하는 류드밀라도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잊혀진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잊지 않는다. 과학이 비록 인류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제공하고는 있지만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되살리지는 못한다는 것을 곰곰 되새기면서.

 

"순례자들은 누구를 사랑했을까. 그들은 남미에, 서부 미국에, 인도에, 모두 흩어져서 살겠지. 그들은 아주 다채로운 모습으로 여러 방식의 삶을 살겠지. 하지만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p.53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중에서)

 

SF소설이라는 게 본디 과학을 통해 한계 너머의 세상을 갈구하면서도 사랑, 희망, 그리움 등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속성을 이해하려 드는 것처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한계 내에서 안주하려는 이중적인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SF소설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날씨가 중요하다고 믿는다예컨대 맑고 건조한 날씨에는 SF소설에 손이 가지 않다가도 어제처럼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는, 방안 가득 우울이 내려앉은 날에는 내가 닿을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멀고 먼 원시 과거의 누군가를 향해 따뜻한 악수를 청하고 싶은 것이다. SF소설은 그렇게 쓰이고, 또 그렇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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