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 아니라면 다들 들로 산으로 외유를 떠났을 텐데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오가는 차량의 행렬도 그저 뜸하기만 했다. 전염병이라는 게 무섭긴 무섭나 보다. 사람들로부터 흔한 휴일 풍경을 앗아갔으니 말이다. 아파트 근처의 야산에 올랐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었고, 나무의 몸통에 귀를 가까이 대면 금방이라도 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릴 듯한, 봄기운이 완연한 날씨였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등산로를 따라 가볍게 산책을 하고 있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 아니라면 평온한 휴일 풍경이었다. 따스한 햇살과 맑은 공기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표정에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다. 행복이란 이렇듯 일상의 평화를 깨지 않는 것임을, 특별하고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공병우 박사의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를 읽고 있다. 오래전에 한국일보사에서 한국 고집쟁이 열 명을 뽑았을 때 1위가 이승만, 3위가 최현배, 6위가 공병우였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삶을 철저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아왔음을 책에서 쓰고 있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사람들과 되도록 사귀지 말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으며 자랐다. 딴 사람으로부터 나쁜 사회물이 들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도 있고, 또 나쁜 돌림병 같은 것에 오염되지 않게 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철저하여, 남의 혼인 잔치나 생일잔치 등에 일절 나가지 않는 괴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사교술은 비록 서툴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진심으로 대한다. 마음에 없는 것을 꾸며서 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척 정이 안 통하는 냉랭한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다음 주 일기예보를 보니 비 소식이 잦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비에 쓸려 깨끗이 씻겨 나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학생들의 개학이 연기되고 감염자가 600명을 넘었다 하니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키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듯 보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0-02-25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병우 박사님의 조부님의 철학도 어떤 경험에서 나오신건지 무척 궁금하네요^^

꼼쥐 2020-02-28 20:14   좋아요 0 | URL
장손인 공병우 박사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나 봅니다. 돌림병이 돌아 혹시 잘못될까 노심초사하셨던 듯.
 
스스로 행복하라 -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 특별판, 샘터 50주년 지령 600호 기념판
법정 지음 / 샘터사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사는 지역에도 코로나19 감염자가 추가되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공포심도 한층 높아졌는지 내일부터는 도서관도 문을 닫는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특별한 약속이나 모임이 없어진 요즘, 휴일이 다가오면 도대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렇다고 집안에 틀어박혀 온종일 책만 읽는다는 것도 못할 짓이고, 인터넷으로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몇 편이고 연속해서 보는 것도 그렇고, 무릎을 칠 만큼 좋은 방안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자기 몫으로 주어진 짧은 시간의 휴식도 나는 이렇듯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되는데, 한정된 시간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 고민하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참으로 딱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 군데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 놓으면 하루에도 해 지는 광경을 몇 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벌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 사증入國 査證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가 보고 싶다." (p.60)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지 벌써 10. 법문과도 같은 스님의 말씀을 인생의 등불로 삼았었던 까닭에 나 역시 스님께 빚을 진 채 살고 있지만 그 말빚을 갚기에는 내 삶이 보잘것없어 늘 미안할 뿐이다. 스님의 글은 언제 읽어도 더없이 좋다. 군더더기가 없이 간단명료한 문장은 핵심을 벗어나지 않고, 이런 뜻일까 아니면 저런 뜻일까 오해할 일도 없다. 그래서인지 스님의 글을 읽으면 복잡했던 머리가 가지런히 정리되는 느낌이다. 맑고 개운해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뜻을 모르고 읽어도 그 느낌은 여전하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가 하는 행위에 의해 인간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비인간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 오로지 인간다운 행위에 의해서 거듭거듭 인간으로 형성되어 간다." (p.179)

 

법정 스님이 남긴 글들 중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가려서 뽑았다는 이 책은 1'행복', 2'자연', 3'', 4'나눔'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은 사람도 마음먹고 읽으면 두어 시간이면 다 읽을 만큼 두껍지 않은 책이다.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드셨을 때, 나는 스님이 남긴 추천 도서('내가 사랑한 책들'에 실린 50권의 도서) 목록을 보며 긴 시간을 두고 스님이 권한 책들을 골라 읽었던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3''에 눈길이 갔던 게 사실이다.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욕심만 앞서는 까닭이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 <모모>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폐허가 되어 버린 원형 극장으로 고아 소녀인 모모를 찾아간다. 그들은 모든 것을 그 어린 소녀에게 털어놓는다. 소녀는 다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줄 뿐인데, 방황하는 사람들은 정착을, 나약한 사람들은 용기를, 불행한 사람과 억눌린 사람들은 신념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p.144)

 

우리 모두가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며 어린 왕자처럼 삶과 죽음에 초연할 수는 없지만, 물욕이나 집착에 휩쓸리지 않고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사는 날까지 자유롭고 충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 아니겠는가. 하루하루 날을 더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더해진 삶이 인간이 아닌 비인간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면 본인은 물론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그 시간들이 아깝다 여기지 않겠는가.

 

'누군가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스스로가 다음 생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라는 스님의 준엄한 말씀은 느슨하게 풀어지려는 마음을 한순간에 다잡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요즘, 달리 할 일이 없으니 홀로 걷는 시간만 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도, 지저귀는 새소리와 분주한 청설모의 움직임도 어느 순간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오직 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과연 몇 %의 인간인가?'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을 맞으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일지 않는 걸 보면 나는 폴 발레리의 시구를 그저 눈으로만 읽었나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심원으로 퍼지는 물웅덩이의 파문처럼 나로부터 비롯된 선한 영향력이 가능한 한 멀리 퍼져나갔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예컨대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지구 온난화를 예방하기 위해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이 걷는다거나, 쓰레기를 버릴 때에도 꼼꼼하게 분리배출을 한다거나,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주방세제 사용을 줄인다거나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서 한다기보다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뜻에 공감하고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목적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희망사항으로 그칠지라도 말이다.

 

엘렌 심(Ellen Shim)이 펴낸 <고양이 낸시>는 누군가로부터 비롯된 선한 영향력이 우리 이웃을, 우리 마을을, 나아가서 온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어쩌면 우리들에게 그 실체를 보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만화라는 시각적인 도구를 통해서 말이다. 어느 날 밤, 쥐 마을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 낸시를 평범한 쥐 가족의 가장인 더거 씨가 데려와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랑과 정성으로 돌본다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제가 틀렸었어요... 눈을 가리고 있었던 건 저였어요.

고양이 낸시만 보느라 다른 낸시들을 못 봤어요.

더거씨의 사랑스러운 막내 딸 낸시.

지미의 소중한 동생 낸시.

그리고 모두가 너무나도 아끼는 낸시." (p.224~p.225)

 

짐작하겠지만 고양이 낸시는 쥐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에 버려졌다. 담요에 싸인 채 더거씨 집 앞에. 어른 쥐인 더거씨는 낸시가 고양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오랜 고민 끝에 낸시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더거씨의 아들 지미 역시 낸시를 끔찍이도 좋아한다. 그러나 문제는 마을 사람들의 반대였다. 고양이는 그들에게 가장 위험한 동물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을에서 낸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아기 고양이 낸시를 더거씨 자신은 차마 버릴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하겠노라고 하자, 결국 마을 사람들도 낸시가 고양이라는 사실을 어른들만 알고 아이들에게는 숨긴 채 받아들이기로 한다.

 

낸시도 무럭무럭 자라 오빠 지미와 함께 학교에 가게 되었다. 낸시는 분홍색 머리핀을 좋아하고, 공놀이보다 공주님 놀이를 더 좋아하고, 친구들보다 유난히 큰 자신이 너무 뚱뚱한 건 아닌지 고민을 하기도 한다. 생김새도, 좋아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 다르지만 마음씨 고운 낸시를 아이들은 좋아한다. 그런 낸시를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주는 건 역시 오빠 지미다. 친구들 사이에 낸시가 끼임으로써 아이들 간에 문제가 생기거나 학교 생활이 불편해지는 건 전혀 없다. 오히려 '보드랍고 풍성한 꼬리, 새하얗고 북실한 털, 남들보다 큰 키'를 가진 낸시가 있음으로써 친구들의 학교 생활은 더욱 즐겁고 풍성해진다.

 

"우와아!! 엄청 크다!!!

나 뭔지 알아!! 책에서 봤어!!

벌써?!

저 큰 키!! 저 북실한 털!! 북쪽에서 온 쥐가 분명해!!!" (p.94~p.95)

 

아기 고양이 낸시로 인한 갈등과 혐오의 조장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적극 실천함으로써 더욱 끈끈한 우정이 샘솟게 하는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은 만화다. 가뜩이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유럽인이 아시아인을, 아시아에서는 다시 한국인이 중국인을 혹은 한국인이 일본인을, 더 나아가 한국에서는 서울 사람들이 대구 사람들을 마치 타 종족을 보는 듯 혐오하고 배척하는 요즘, 사려 깊은 동물들이 보여주는 사랑과 평화의 어울림은 마치 엊그제 보았던 눈 내리는 풍경과 맞닿아 있는 듯했다.

 

우리는 갈등과 혐오가 난무하는 소위 '막장 드라마'를 빠져들며 보는 경향이 있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내뱉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하디 순한 드라마는 그닥 인기가 없는 게 현실이다. 지금은 치우고 없지만 나 역시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던 과거에는 막장 드라마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보곤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무자비한 드라마를 왜 그렇게 열심히 보려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전염병의 확산으로 공포와 혐오가 일상화된 탓인지 마음 따뜻해지는 만화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이따금 만화를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런 계획이나 대책도 없는 나날들이 흘러가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흘려보낸 날들이 지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음을 우리는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나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년에서 1월과 2월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시기일지도 모른다. 지키지도 못할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피곤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지켜나가려고 애를 쓰는 시기. 지나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지난해 내가 시골에서 만났던 어르신 중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던 분이 있다. 평생을 건설회사에서 보냈다는 그분은 정년퇴직을 하고 홀로 귀농을 하신 분이었는데, 시골에 와서 곰곰 생각을 해보니 직장 생활을 했던 수십 년 동안 오직 승진을 목적으로 밤잠을 설쳐가며 영어 공부에 몰두했던 게 도대체 다 무슨 소용이었나 싶더란다. 시골에 와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그 많은 세월을 투자했다는 게 당사자인 자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더라는 말씀이었다.

 

그분과 함께 근처의 겨울 낚시터를 방문했었다. 나는 낚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낚시터의 호젓한 분위기는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낚시 바늘에 지렁이도 꿸 줄 모르는, 낚시에는 초보 축에도 끼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종종 낚시터를 찾곤 한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호수 위에 초록빛 야광찌가 별빛처럼 떠있는 풍경이라든가, 석양이 비껴가는 오후의 호수 수면 위로 곱게 이는 물비늘이라든가, 물안개와 함께 깨어나는 아침 풍경이라든가 아무튼 낚시터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풍경들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름보다는 낚시꾼의 발길이 뜸한 겨울 낚시터를 선호한다. 외진 곳에 좌대 하나를 빌려 빈 낚싯대를 드리운 채 몇 시간이고 있다 보면 세상 사는 게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고, 하늘을 나는 새들이 슬몃 부러워지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어떤 소설가는 너무 유명해서 그의 작품이 오히려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말하자면 작가의 명성으로 인해 작품이 역차별을 받는 셈인데 그것은 어쩌면 독자들의 기대심리 탓인지도 모른다. 유명세를 타는 작가의 작품에는 여타의 작가와 구별되는 뭔가 다른 점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잔뜩 품고 책을 집어 든 독자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실망만 커지게 마련이고 급기야 다 읽지도 않은 책이 책장에 꽂힌 채 먼지만 쌓이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고전의 범주에 드는 책들이 대체로 그런 신세를 면키 어려운 까닭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셰익스피어가 그렇고, 프루스트가 그러하며, 장 그르니에나 보르헤스가 그럴지도...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그와 같은 측면이 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오히려 평범하다는 이유로 폄훼되거나 가치 절하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번역본이 아닌 영어 원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의 진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거나 작품 속에 숨겨진 매력을 재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기자로 근무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전쟁과 같은 참혹한 현장을 누볐던 여러 경험들이 쌓여 작가 내면에 공고하게 다져진 인생철학이 작품 속에서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비로소 깨우치게 된다.

 

"머리 없이 몸뚱이뿐인 시신을 경찰이 무언가로 가려 덮는다. 가스관을 고칠 배관공을 부르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호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한다. 호텔 직원이 빨간 눈을 하고 복도 대리석 바닥의 핏자국을 지우고 있다. 죽은 사람은 나도 아니고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다. 엊그제는 과달라하에서 긴 하루를 보냈고, 어제는 상당히 추운 밤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아침 배가 고플 뿐이다." (p.142)

 

논객이지 저널리스트였던 샤를 페기는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라고 썼다. 진실을 말한다는 건 어쩌면 저널리스트의 사명이자 행동강령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진실은 상당히 주관적일 경우가 많다.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진실이 저널리스트에게 주어지는 한 말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소설가는 거짓을 통해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라고 했던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말에 비추어 보면 허구로서의 진실이 사실로서의 진실보다  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헤밍웨이 역시 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글을 쓰는 사람의 고민은 변하지 않습니다. 작가 자신이 변할지언정 고민은 언제나 같습니다. 작가의 변치 않는 고민거리는 어떻게 진실만을 말할까, 무엇이 진실인지 깨달은 후에 이것을 어떻게 글에 녹여내어 독자의 삶 일부가 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p.233)

 

<더 저널리스트:어니스트 헤밍웨이>에는 고교 졸업 후 열여덟의 어린 나이에 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약 25년 동안 작성한 400여 편의 기사와 칼럼 중 작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기사를 선별하여 실었다. 10대 후반이었던 1919년에 '캔자스 시티 스타'의 기자가 된 헤밍웨이는 1921년에 '토론토 스타' 특파원으로 유럽으로 건너갔고,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북미 뉴스 연합' 통신원으로 활약했다. 기자 생활을 통해 익힌 직설적이고 간결한 문장, 대화체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는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게다가 당시의 시대 상황을 통해 인간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인간의 고통,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을 확인하면서 작가로서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했다.

 

"좋은 글이란 진실을 쓰는 거지. 작가가 인간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얼마나 충실하게 삶을 살았는지에 비례해서 이야기가 더 진실되게 느껴지거든. 그래야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 거야. 작가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아야지. 물론 몰라도 운 좋게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지. 판타지 소설을 쓰든가. 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가짜 글을 지어낼 수밖에 없어. 가짜로 지어낸 글을 몇 번 쓰다 보면 더 이상 양심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p.245)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이 작가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일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의 여러 덕목 중 다른 어느 것보다도 경험을 중시했던 헤밍웨이에게는 그가 경험했던 기자로서의 삶이 훗날 그의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여러 장면들을 생생하게 되살리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경험으로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고 했던 그의 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인생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깨닫는 만큼 성장하고, 성장한 만큼 삶은 가치와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헤밍웨이의 저널리즘 작품만 선별하여 소개하는 이 책은 헤밍웨이의 진실된 면모에 대한 독자들의 갈증을 조금쯤 풀어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