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말고 진보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목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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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기에 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찾아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설사 발견한다 하더라도 구성원 전체를 설득하여 더 나은 쪽으로 혁신을 유도한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단지 사회 구성원 몇몇에 의한 너무나 미약한 목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삐걱거림, 혹은 사회 시스템의 붕괴와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는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고 이를 시정해야만 한다는 강한 신념이 구성원 각자에게 발현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까닭에 사회의 진보는 마냥 더딜 수밖에 없고, 성급한 사회 구성원에게 진보란 언제나 답답한 현실로만 비친다.

 

"국가의 경제적, 재정적 권력이 우리를 움직이긴 하지만, 국가의 지성은 그렇지 않다. 분노의 힘과 시민들의 운동 속에서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가 나타나야 한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속해 있다. 우리는 결코 정부에 속하지 않았으며, 국가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금융권력에는 더더욱 속하지 않는다." (p.274)

 

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충격은 각국 정부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바이러스처럼 빠르게 전파되었던 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한계를 노정하는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금과옥조처럼 추구되던 신자유주의 경제에 대한 회의와 우리의 미래를 맡기기에는 그 제도가 얼마나 부실한가에 대한 실제적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가 작금의 코로나 위기였다. 그런 측면에서 스테판 에셀의 자서전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2010년 그의 나이 92세에 발표한 32쪽 분량의 작은 책 <분노하라>가 세계인들에게 분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말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야 어찌 되든 오직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만을 따져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유리하다면 비록 그것이 범죄에 가까운 행위일지라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정치인들. 자신 입장은 쏙 뺀 채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게 국가 구성원 전체에게 유리하며 그것이 마치 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유일한 길인 양 선전하는 정치인들. 부를 향한 무한대의 욕망을 부추기고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무한대의 축재를 용인하는 정치인들. 예컨대 북한의 김정은이 최근 99% 사망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민들 전체를 불안에 떨게 하고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트렸던 탈북 정치인과 그가 속한 정당의 정치인들은 김정은이 건재하다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일언반구의 사과조차 없었다. 그를 뽑아준 지역구의 국민들도 우매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선적으로 그와 같은 자들을 공천한 정치인들의 잘못이 크다 하겠다. 결국 코로나19와 같은 전 세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분노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용기가,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작금의 위기를 통해 배운다.

 

"내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방관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를 기다리고 잇는 어려움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며 우리에겐 충분히 사용하지 않은 에너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너무 멀게만 보이는 가치들에 대한 열망이 우리 안에 들끓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만일 우리가 불가능을 가능이라고 여긴다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충분한 힘이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 (p.167)

 

외교관으로서 세계 인권 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는 등 현실 정치인이자 사상가였던 저자는 자본의 폭력에 맞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자고 호소했던 '낭만적인 레지스탕스'이기도 했다. 우리가 유럽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미국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나의 지구에서 70억 명의 인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스템 구축에 헌신할 것을 강조했던 스테판 에셀.

 

"나를 바르게 지탱해주었던 첫 번째 힘은 우리 집안이 갖고 있는 일종의 전통 같은 것이었다. 내 부모님의 삶의 핵심이자 유익하며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던 것들의 영향이다. 내 부모님은 한 편으로는 그리스 신들을, 다른 한 편으로는 시를 내게 물려주었다.(중략) 내게 시는 하나의 '증거'였다. 내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는 우리를 활짝 피어나게 해주고, 우리가 맞서 싸우는 세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그로부터 초월하게 해주는 영역이 있다. 시가 바로 그 증거다. 그때 우리는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p.158)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은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다. 그것은 전 인류의 눈이며, 눈물 흘리지 않고는 암송할 수 없는 시들이기도 하다.'라고 했던 스테판 에셀의 명언은 코로나 시대의 전 지구인에게 전하는 위로이자 계명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하는 미국과 서구 유럽의 국가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것은 아마도 그들의 지도자 대부분이 '눈물 흘리지 않고는 암송할 수 없는 시'를 가슴에 품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여길 수 있는, 영혼이 있는 지도자를 둔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도 오늘과 같은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가짜 뉴스도 언제든 퍼뜨릴 수 있는 사이비 정치인을 배제하는 게 이 시대의 진보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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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봄을 즐기기도 전에 때 이른 초여름 날씨에 어리둥절했던 하루였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 날과 근로자의 날 그리고 주말 연휴로 이어지는 달콤한 휴가 덕분인지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코로나19의 진정세가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마트에도 근래에 보기 드문 인파로 북적였다. 미덥지 않은 삶의 동아줄을 확인하면서도 하루하루의 일상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는 자각이 사람들을 저으기 안심시켰는지도 모른다.

 

이천의 한 물류창고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화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지난한 삶의 현장에서 전해지는 암울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옛말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곤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밥이 곧 하늘인 현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위협에 다들 외출도 꺼려하던 요즘, 직접적인 살인 도구인 우레탄폼의 검은 연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야만 했던 그들의 거친 일상은 또 어떠했을지... 때 이른 무더위가 지나던 오월의 첫날, 그래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지. 근로자가 없는 달력에 붉은 글씨의 '근로자의 날'만 선명한...

 

우리는 이따금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과 같은 범죄자는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믿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하다.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목사도, 지난 30여 년 간 자신의 교회에 다니는 여성 신도 9명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거나 추행했다는 전북의 어느 목사도 선천적인 악인으로 보기는 어려울 터, 그들은 다만 범죄가 용이한 환경에 너무나 자주 노출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돈과 권력으로 너무도 쉽게 저지를 수 있었던 범죄와 그런 범죄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처벌은 집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은 그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악의 편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들과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던 사람들. 죄는 다만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 세 번은 비교적 쉬웠던 게 아닐까.

 

샌드위치 패널을 휩쓸고 간 이천의 어느 공사현장의 화마처럼 후끈한 열기가 한반도 전체를 달구었던 오늘, 그래 오늘은 공사 현장의 근로자도 없는 붉은 글씨 선명한 '근로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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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눈
딘 쿤츠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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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잔인하다. 그것은 상상과 체험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디테일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게다가 현실은 소설보다 더 공포스러우며 견디기 힘든 공간이기도 하다. 현실을 주관하는 신은 감정이 없는 반면 소설을 쓰는 인간은 다분히 감정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예컨대 자신이 상상하는 소설 속 한 장면을 글로 표현할 때, '이 정도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혹은 '이것보다 더 나아가면 과장된 거 아닐까?' 하면서 스스로 판단하고 뒤로 한 발 물러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인간의 가치판단이나 도덕적 양심, 혹은 신의 자비와는 무관하게 진행되곤 한다. 인간은 마지막 순간에선 대개 뒤로 한 발 물러서는 게 일반적이지만 신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쁨이나 행복, 또는 행운과 같은 긍정적인 장면은 현실보다 소설이 더 리얼하고 과장되게 마련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행복한 순간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으며 행복하다고 느끼는 찰나적인 그 순간은 너무나 빨리 흐르는 까닭에 현실에서 우리는 그 순간을 미처 감지할 수 없을뿐더러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행복했던 그 순간을 흐릿하게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행복은 언제나 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의 행복은 마치 우리의 바람을 모두 옮겨 놓은 듯 길고 과장되게 마련이며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유혹하면서 현실로 되돌리는 순간을 한없이 늦추곤 한다.

 

"그는 살인을 즐겼다. 세상에서는 비록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할지라도 스스로까지 속일 마음은 없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왜인지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그는 죽음에 무척 매료됐다. 죽음의 형태와 본질과 가능성이 너무나 흥미로웠다.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연구하고 이론을 세우는 데 흠뻑 빠진 그는 자신을 죽음의 전령이자 신의 부름을 받은 사형집행자라고 여겼다. 살인은 많은 면에서 섹스보다 더 짜릿했다." (p.354)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딘 쿤츠의 초기작인 <어둠의 눈>은 외아들 대니를 사고로 잃고 힘들어하는 크리스티나 에번스(티나)가 겪은 4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들이 죽은 지 1년이 넘었지만 길거리에서 아들 또래의 남자아이만 보아도 대니의 얼굴이 겹쳐 보이고, 시도 때도 없이 대니를 떠올리게 되고, 대니가 살아 있는 꿈을 수시로 꾸곤 했다. 1230일 화요일 새벽에도 다르지 않았다. 대니를 낳고도 쇼 댄서로 전전했던 티나는 5년 전 안무가로 전환했다. 그리고 대니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만 달러 예산의 쇼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쇼의 이름은 <매직!>. 그해 1230일은 <매직!>VIP 시사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아들 대니가 살아 있는 심란한 꿈을 꾸던 티나는 집 안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큰 소리에 잠이 깨고 만다. 그것은 어쩌면 아들을 잃은 상실감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던 요즘 <매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걱정하느라 불안감이 커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매직!>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티나가 아들 대니의 방에서 겪었던 이상한 경험은 청소를 도와주는 비비언에게도 이어진다. 멀쩡하던 옷장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가 하면 손도 대지 않은 장난감이 스스로 움직이고 기온이 떨어진 방은 성에가 끼기도 한다. 그리고 대니의 방 칠판에 누군가 써 놓은 '죽지 않았어!'라는 글씨. 티나는 그것이 이혼한 전 남편 마이클의 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집안 전체의 자물쇠를 모두 바꾼 후에도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공포에 휩싸인 티나를 돕기 위해 <매직!> 시사회장에서 만났던 엘리엇이 나타난다. 사실 스카우트 캠프를 떠났던 대니는 캠프 버스가 전복되는 바람에 버스에 탔던 전원이 사망하는 참변을 겪게 되었고,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시신의 훼손이 심했던 대니는 시신 확인 절차도 없이 묻히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티나와 마이클은 아들의 사망 원이도 제대로 모른 채 아들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대니의 방에서 발생한 이상한 일을 겪은 후 티나는 무덤을 열어 대니의 죽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변호사인 엘리엇을 향한 누군가의 협박이 이어지고, 대니에게 있었던 죽음의 진실을 찾기 위한 티나와 엘리엇의 분투가 이어지는데...

 

"점차 좁아지는 지역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차를 몰자 위풍당당한 숲이 그들에게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티나는 그 압도감에 경외심을 느끼는 동시에 불안했다. 이 깊은 산속에 대니와 다른 스카우트 단원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 신비하고 불안할 정도로 원시적인 숲은 경외감과 두려움을 자아냈으리라." (p.383)

 

아들 대니를 향한 티나의 헌신적인 사랑과 소시민의 희생쯤이야 눈을 질끈 감고 전개되는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의와 이에 맞서는 소시민의 용기, 그리고 남녀 간의 진실한 사랑 등 어쩌면 한 편의 영화에나 담길 듯한 여러 요소들이 한 권의 소설에 절묘하게 버무려진 이 소설은 작위적인 느낌마저 진하게 풍긴다는 평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의 사고가 죽음으로 은폐되었던 어두운 진실이 하나 둘 밝혀지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인간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불의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한 단면들. 소설은 늘 그렇듯 선과 악의 구도 속에 감춰졌던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지고야 만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에 우리가 계속하여 빠져들고 몰입하는 까닭은 아마도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대립을 끝없이 성찰하고 다스리려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내면의 탐욕을 세세히 알지 못하는 게 현실, 현실은 언제나 소설보다 더 잔인하고 공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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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가볍게 넘을 수 없는 힘든 고비 몇 개쯤은 겪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기면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말하자면 지금 겪고 있는 이 위기가 인생 전체에서 가장 큰 위기일 것만 같은, 앞으로도 없고 이전에도 없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쯤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길 수 있다면' 하면서 그 순간을 이겨나가게 될 것이다. 습관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쳐 온 위기는 상대적으로 아주 작게 느껴지거나 그 시절이 몹시도 그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위기가 해외에서는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지만 국내에서는 바야흐로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불안하다. 지금보다 더욱 심각한 코로나19의 확산이 재발한다고 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폭탄을 각자의 손에 쥔 채 불안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맥스 포터의 소설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을 읽었다. 160여 페이지의 비교적 얇은 이 소설은 하나의 산문시와 같은 생소하면서도 난해한 형식의 작품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하나의 느낌이 오롯이 남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읽는 이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을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하나의 관념으로서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지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슬픔이 장기 프로젝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떠안은 이 고통은 그 속도를 늦추거나 올리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p.144)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세계적인 대유행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의 엄마였거나, 아빠였거나, 아들이었거나, 딸이었고, 며느리 혹은 사위였을, 혹은 누군가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였을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전염'이라는 강력한 위협에 몸을 웅크린 채 제대로 된 작별 의식도, 슬픔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제대로 된 애도의 계획도 없이 우리는 그 모든 걸 '다음'으로만 미루고 있다. 달력 한 장을 넘기면 달력 상단에 5월이나 6월이 아닌 '다음'이라는 달이 등장할 것만 같은 작금의 시간 앞에서 우리는 치밀어 오르는 '슬픔'마저 유보해야 한다. 4월이 가면 '다음'이라는 막연한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동체의 불안을 우리는 그저 봄바람에 마음을 씻는 것처럼 요 며칠 거세게 불었던 봄바람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코로나19의 시간도 그렇게 훌쩍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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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4-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잘 정리된 글을 읽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꼼쥐 2020-04-27 17:39   좋아요 0 | URL
칭찬 댓글에 저 역시 기분이 좋아집니다. 감사합니다.^^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1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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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쓴 지 꽤나 오래되었다. 책을 읽고 간단한 소회를 남기는 게 주목적이었으나 때로는 넋두리나 한탄에 가까운 글을 남기기도 하였고, 언론에 떠도는 온갖 잡다한 소식들에 대한 편향적인 찬사나 울분을 표하기도 하였고, 불현듯 떠오르는 추억이나 세상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야말로 무익한 생각들을 두서도 없이 늘어놓은 적도 있다. 한마디로 글을 쓴 당사자인 나조차도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듯한 잡글들의 나열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전보다는 글을 쓰는 횟수도, 쓰고자 하는 열정도 많이 줄어든 게 사실이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는 있다. 그렇다면 왜? 어떤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아니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마땅한 대답은 여전히 안갯속이지만 말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중 그 첫 번째인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여성학 연구자인 저자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끝없이 고민했던 흔적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글쓰기가 주업이 아닌 나와 같은 일반인은 '나는 왜 쓰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 수는 있으나 내 앞에 놓인 다급하고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그와 같은 질문은 그저 뜬구름처럼 여겨지기 일쑤이고, 그런 까닭에 몇 날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경우는 숫제 없지 싶은 것이다.

 

"나는 글쓰기의 '세 요소'가 정삼각형 같은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상호보완적이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핵심은 윤리다. 소재에 대한 태도와 글쓰기 방식이 정치적 입장과 미학을 결정한다.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 사상의 핵심은 재현의 윤리이다." (p.15)

 

소위 글쓰기의 '3대 요소'라고 하는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문장)에서 저자는 글쓰기의 윤리학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글을 쓰는 이의 자세와 맞닿아 있다. 자신이 '나쁜'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글을 쓰는 과정이 자신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고, 글쓰기는 곧 자신을 끝없이 성찰하는 검열 과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일종의 취미이자 유희인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글쓰기의 윤리는 다른 무엇보다 앞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대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의 됨됨이는 윤리라는 보편적 논쟁 앞에서 언제나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 간의 소통이 sns를 통한 문자의 영역으로 전환된 요즘, 글쓰기는 몇몇 특정인의 영역으로 국한되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좋든 싫든 모든 이에게 강요되는 대중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는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바로 문자화하는 이른바 '문자화 된 말'로서의 기능으로 전환되었다. 글을 쓰는 자신도 오타로 인한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 잘못된 문장 구성으로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소통 수단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의 글쓰기가 음성언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끝없이 속도를 추구하다 보니 빠른 글쓰기의 부작용이 속속 드러나기도 하고, 과거 글쓰기의 장점이었던 깊이 있는 사고는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1'윤리학과 정치학은 글쓰기의 핵심이다', 2'당사자의 글쓰기는 혁명의 꽃이다', 3'글쓰기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읽었던 책을 중심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김형경의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필두로 제러미 리프킨의 <생명권 정치학>, 유시민의 <표현의 기술>, 기형도의 <기형도 산문집>, 켄트 너번의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크리스토퍼 레인의 <만들어진 우울증>, 일연의 <삼국유사>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은 주제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인용되고 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눈에 띄었던 <기형도 산문집>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희망을 부숴야 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여행기는 "희망에 지칠 때까지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였다. 흔히 회자되는 루쉰의 말도 희망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땅 위에 길이 없는 것"처럼 원래 희망도 없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실행의 고단함을 강조한 말이다. 희망은 삶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을 집약한다. 미래 지향, 긍정, 바람사람들은 이 말을 편애한다. 희망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표현 그대로 생각하면 절망(切望)이 희망적이다. 절망은 바라는 것을 끊은 상태, 희망은 뭔가 바라는 상태. 어느 쪽이 더 '희망적'인가?" (p.93)

 

나는 예전의 어느 글에서 '희망''생명이 유한한 자의 조급함'이라고 쓴 적이 있다. 용어에 대한 정의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는 단어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 아닌가.'라고 썼던 기형도 시인의 정의와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는 그의 고백은 29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시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표현 가능한 정의이자 고백이었을 터, 삶은 이렇게도 다채롭다는 걸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읽었던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은 밀린 숙제처럼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무한반복의 질문지가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길을 걷고 있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카페 유리창 너머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어느 시인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모호한 의미의 문장을 떠올리면서 나는 문득 '나는 왜 쓰는가?'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 시간 동안 행복했었다는 고백을 댓글에 쓸 거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없었지만 내 글로 인해 생각할 거리를 얻었다거나 내 글로 인해 어떤 주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고백은 듣고 싶기도 하다. 비가 내리는 초저녁의 바깥 풍경을 보면서 오히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처럼, 그렇게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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