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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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내게 있었던 시간들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논바닥에 모판이 내던져지듯 말이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이따금 선물처럼 찾아오는 막간의 여유 시간이 무척이나 귀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 시간에 나는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개미처럼 일만 하며 바쁘게 살아도, 베짱이처럼 삶을 그저 즐기기만 해도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게 죽음이라는 생각. 그것은 어쩌면 탄생과 더불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운명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삶 전체를 통해 우리는 대개 죽음을 그저 내가 아닌 타인의 문제로만 인식하거나 자신의 미래에 있을 일이지만 그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낭만의 시기'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시시각각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 '실존의 시기'를 체험하게 된다. 물론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죽을 때까지 '낭만의 시기'를 살다 가거나 자신에게 죽음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인 듯 느껴지지만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둔 채 살아가는 '낭만적 실존의 시기'를 체험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낭만의 시기'에서 '실존의 시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혹은 자신과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그가 이승의 마지막 잠을 혼자서 청했던 그 시각, 나는 제주도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가 혼자서 마지막 글을 수정해 컴퓨터에 다시 저장하고 봉화산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던 그 시각, 나는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보를 보고 누군가 전화를 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p.345)

 

그가 컴퓨터에 저장했다는 유서에는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죽음을 직전에 둔 사람이 마치  넘지 못할 높은 벽처럼 마주했을 '운명'. '운명'에 대한 믿음의 정도는 개인의 종교, 철학, 성장 배경이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낭만의 시기'에서 '실존의 시기'로 전환되는 그 순간에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마치 운명처럼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부모님이나 배우자 혹은 가깝게 지냈던 친구나 존경하던 누군가의 죽음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그리고 내 삶에서 철없고 행복했던 '낭만의 시기'가 이미 저물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는 사실 노무현 당신이 아닌 유시민 작가에 의해 정리되고 노무현 재단에 의해 출간된 책이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전기의 형식으로 또는 자서전의 형식으로 정리한다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마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일대기를 전기가 아닌 자서전의 형식으로 정리했다는 게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마감하는 마침표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누구의 발상이었든 '지극히 유시민답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말이다.

 

"퇴임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자서전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가치 있는 자서전은 거짓과 꾸밈없이 진솔하게 써야 하는데,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으로서 관계를 맺었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현업에 있는 상황이라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더 많이 흐른 후에야 자서전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p.7)

 

훗날로 미루었던 자서전의 집필은 끝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자서전을 써야 할 당신이 여기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은 자서전을 쓰지 못한 일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는 듯하다. 당신이 떠난 지 벌써 십일 년. 당신의 부재로 인해 당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 각자의 삶을 '낭만의 시기'에서 '실존의 시기'로 이끌지 않았을까. 그리고 퇴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당신을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야 만 이명박 대통령과 그를 추종하던 검찰과 국정원, 스스로 기레기를 자처하던 언론들... '실존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5월은 당신의 부재로 인해 매년 대상도 특정할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더해 가고 있다. 올해도 분노와 슬픔의 계절이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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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지만 애초에 머릿속에 떠올렸던 주제와 문장들이 막상 다 쓰고 보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엉뚱한 글이 내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경험. 자신이 쓴 글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글을 쓰기 전의 구상은 까맣게 잊힌 지 오래, 배가 산으로 가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자판을 두들기는 나조차 억제할 수 없는, 방향을 틀어 처음의 생각으로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자각, 그리고 글의 마무리.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닮은 구석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출처도 불분명한 글을 읽으며 '이 글은 과연 누구에 의해 쓰인 글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머리에서 손까지의 거리가 이렇게도 멀었단 말인가.

 

어렸을 적,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도화지를 펼쳤을 때 어떤 그림을 그릴까 미처 구상도 끝나기 전 옆에 있던 어린 동생이 도화지 가득 아무렇게나 쓱쓱 그림을 그림으로써 나의 생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차마 그림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그림이 탄생하는 걸 보며 헛웃음을 웃었던 기억.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도 나는 여전히 기억 속의 어린 동생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로 시작되는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았던 게 아닐까.

 

"소설은 내게 나 자신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가냘프고 투명한 '막'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했다. 마치 목소리를 내는 방식처럼 그 막은 세계와 나의 움직임에 따라 진동하면서 글을 쓰게 하는데 대개 그것은 우는 소리를 닮았지만 실제로 눈물에 대한 감촉은 없다는 것. 그렇게 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고통에 대해서 쓰지만 그 고통의 완전한 주인은 될 수 없다는 것, 마음이나 기억처럼 실제로는 감각되지 않는 어떤 세계의 기척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p.109)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글로 옮길 수 있을 때 그는 비로소 작가가 되는 듯하다. 세월로부터, 흐르는 시간으로부터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 때 우리는 이따금 글을 쓰고, 자신이 쓴 글 같지도 않은 글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게 현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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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한 안내서
김지윤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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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15 총선이 끝나자마자 모든 언론들은 제각각 그 결과에 대한 다양한 분석들을 쏟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8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에 있었던 총선에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확보함으로써 겨우 과반을 넘겼던 걸 생각하면 180석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놀라운 결과였다. 이를 두고 한 신문은 대한민국 유권자의 이념 지형이 보수에서 진보로 변화했다는 분석 기사를 실었다. '노동운동 및 민주화운동 세력으로 인식되던 진보가 산업화시대를 대표하던 보수세력을 밀어내고 우리 사회 주류로 등극하는 서막이 올랐다'고도 썼다. 과연 그럴까? 해방 이후 70여 년 동안 쇠심줄처럼 변하지 않던 이념 성향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그토록 쉽게 변할 수 있었을까? 국민 개개인의 이념이 손바닥을 뒤집듯 그렇게나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었던가.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김지윤 박사의 저서 <내 권리는 희생하고 싶지 않습니다(알에이치코리아, 2020)>를 읽게 된 것도 그와 같은 그와 같은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저자가 아산정책연구원 여론분석센터 센터장으로 활동하면서 다년간 한국 사회의 이슈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대한민국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들이 이 책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불균형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고 각자가 자신의 권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주류'라는 안전망을 좇지만, 사실 우리는 대체로 '비주류'이다. 나는 남이 믿거나 말거나 '비주류'라고 말한다. 잘난 것보다 못난 것이 많은 인간이었기에, 비주류 속에서 편안함과 안온함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비주류'로서의 정체성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많은 비주류들과의 교류와 공감을 통해, 코끼리에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길 원한다." (p.10 '프롤로그' 중에서)

 

1장 '여성의 권리는 곧 인권이다', 2장 '나는 약자인가, 강자인가?', 3장 '공동체는 단수인가, 복수인가', 4장 '계급이 쏘아올린 빈곤 곡선'의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의 주장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등 우리 사회의 약자로 분류되는 그들의 삶을 조망하고 점점 더 옅어지는 공동체의 보호막과 확대되는 빈부 격차의 추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가? 에 대한 저자 자신의 주관적 견해와 비관적 전망,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공동의 선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이 책에 담겨 있다.

 

"강한 민족주의가 만든 가장 큰 부작용은 배타성이다. 민족이라는 내 집단 속의 사람들과 끈끈한 애착 관계를 맺고 있다면, 외부인에 대해서는 그만큼 배타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한 '우리'의 관계는 악의적인 '그들'이 있어야 정당성을 가지고 더욱 공공해진다. 특히, '그들'이 '우리'에 비해 열등하거나 비열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면 '우리'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계망에서 선한 당위성을 가진 집단으로 승화된다. 선한 당위성이 강해지면 내가 속한 '우리'는 정의로워진다. '우리' 집단의 존재 가치는 더욱 올라가게 마련이고, 집단 공동체의 자긍심은 절대적인 것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절대적인 존재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지푸라기처럼 버릴 수 있게 된다." (p.179)

 

책에서는 크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의 불균형을 조장하고, 대대손손 그러한 불균형을 세습하며, 불균형의 정도를 확대 재생산하도록 유도했던 세력이 바로 언론이다.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언론이 제 역할을 떠나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기득권 세력의 불법을 옹호하고 감싸줌으로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을 앞장서서 막아주는 역할에 열과 성을 다해왔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 역시 정치권의 비호 속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은 물론이다. 여론을 주도하는 몇몇 거대 언론의 꼭두각시놀음에 국민들마저 놀아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지형이 바뀌고 정보의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유권자의 이념 지형이 바뀐 게 아니라 조작에 가까운 언론사의 농간에서 우리 국민이 빠르게 벗어나고 있음을 4·15 총선의 결과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고가 나면 취약 계층의 사람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고 감염병은 여전히 이들을 가장 악랄하게 공격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존재하는 이 법칙을 외면하지 않고 공격의 총체적 영향력을 줄이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누구나 차별 없이 공격한다며 세상에 뭐 하나쯤은 공평하다는 말을 하고, 그러니까 다 함께 노력해서 극복하자는 정신 승리는 이제 그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p.258 '에필로그' 중에서)

 

코로나 정국을 겪으면서 우리는 국가의 리더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안위가 달라짐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지만 40년 전 그날의 광주 시민들이 겪었던 참혹했던 경험을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그저 언론으로만 접했던 나는 동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가슴 한켠에는 언제나 광주 시민들에 대한 커다란 부채의식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어제 있었던 5·18 기념식장에서 연설을 하던 대통령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공동체의 연대와 약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대한 부단한 저항.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하루 지난 오늘, 나는 마음속으로 가만가만 되뇌어 본다. '희생을 보고 외면하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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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진정되는가 싶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확산세에 있는 분위기이다. 그래서인지 뉴스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착잡하다기보다 화가 나거나 괜한 짜증이 나는 듯했다. 그동안 국민 모두가 극도로 신경써왔던 개인위생이나 모임 자제, 여행이나 불필요한 외출의 자제 등 개인이 누려야 할 사적인 자유를 기꺼이 반납한 채 숨죽이며 지내왔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일종의 배신감이나 허탈감마저 느껴졌던 탓이리라. 자제해왔던 비난의 화살이 클럽을 방문했던 젊은 사람들과 확진자들에게 쏟아지는 걸 보면서 일견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도 아닌데 그런 비난은 너무 과도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이런 비상시국에 조금 더 참을 것이지 생활 방역으로 전환하자마자 유흥을 즐기기 위해 나섰던 그들의 잘못이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몇 달째 지속되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매일 반복되는 구질구질한 일상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겹고 흔해빠진 일상을 반복하면서 별일 없이 산다는 건 차라리 축복이다. 생각해 보니 이러한 일상을 그림으로 그린 예술가가 있었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식사 전의 기도>, <시장에서 돌아옴>, <카드로 만든 집> 등 가정생활과 인물을 다룬 샤르댕의 그림은 정물화에서처럼 소박하고 평범하게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여 시간을 초월한 인간의 평범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평을 받는다.

 

"컵과 양파와 커피포트와 한 송이 꽃, 아니면 빵과 솥과 냄비와 계란... 너무도 흔하고 흔한 것이어서 가끔은 귀찮고 성가시며 지루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매일 보고 먹으며 사용하는 것이기에 중요하기도 하고, 그것이 없다면 살아가는 일 자체가 어렵다는 점에서, 필요 불가결하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그 어느 것도 하찮지 않다. 모든 것이 고상하고 고귀할 수는 없으나, 내팽개쳐도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지극히 일상적이고 범속한 것 이외에 달리 고귀한 것은 없다. 가장 평범한 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다. 샤르댕의 정물화에서는 각 사물의 특성이 그 어느 것 하나 지워지거나 무시되지 않고 두드러져 보인다. 제각각의 구체성 속에서 자신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내세운다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사물의 서열관계는 완화되고 존재론적으로도 평등해 보인다." ("예술과 나날의 마음" 중에서 p.124)

 

<예술과 나날의 마음>을 쓴 문광훈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샤르댕 역시 나날이 반복되는 일상의 정경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여성이 주로 담당했던 집안일, 젊은이와 아이의 행동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담겨있다. 그는 별 의미 없이 되풀이되는 허드렛일의 포착이야말로 세속적 순간의 덧없는 망실을 이겨내는 어떤 세계의 창출로 이어지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라고.

 

주말에 내리던 비는 모두 그쳤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이 짙푸른 어둠처럼 깊어지고 있다. 조금씩 되살아나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 다른 사람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 나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대를 생각하는 이 밤이 부디 평범한 일상으로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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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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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고향을 묻는 이유는 단순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자는 이유,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는 듯했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영남과 호남으로 대표되는 극한적 대립은 말할 것도 없고, 실재하는 전쟁에 의해 70여 년의 세월 동안 분단국가로 살아온 또 다른 이름의 고향, 남한과 북한. 그리고 실향민이라는 이름의 디아스포라. 어쩌면 그것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모국에서 살아가면서도 마음속의 모국을 잃어버린, 간절히 가고 싶어도 다시는 갈 수조차 없는, 모국을 떠나온 그 어느 나라의 국민보다 못한, 그야말로 디아스포라가 아니지만 가장 비극적인 디아스포라이기도 한 그 이름은 실향민. 나는 몇 년 전 속초의 아바이마을에서 만난 주름살 가득했던 어느 노인을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는다.

 

"복잡한 문제군요! 어디서 왔냐는 말이 암시하는 바가 뭔지부터 따져봐야 해요. 분만실이 위치한 언덕의 지리적인 위치를 암시하는지, 마지막 진통이 시작되는 순간에 머물고 있는 나라의 국경을 암시하는지? 부모님 혈통인지? 유전자, 조상, 방언인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출신이 창조물이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한번 입으면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하는 옷 같은 거죠. 그건 저주예요! 아니면 약간의 운이 들어 있는 능력이랄 수 있어요. 재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장점과 특권을 만들어내는 능력 말이죠." (p.44)

 

우리는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보스니아 내전을 기억한다. 19924월부터 199512월까지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일어난 국제적인 무력 충돌 말이다. 치열했던 전투와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 인종 청소, 집단 강간과 대학살 등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끔찍했던 전쟁. 소설 <출신>은 그 오래전 기억과 맞닿은 채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면서 지금은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의 현재가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장담할 수 없는 미래가 또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스니아 내전이 터졌을 때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작가는 치매를 앓다가 2년 전 세상을 뜬 자신의 할머니를 회상하며 '우리 할머니 크리스티나가 기억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기억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던 그 시점에 작가는 난민 신분에서 벗어나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한 자필 이력서를 쓰면서 자신과 연관된 오래전 기억을 수집해야만 했던 것인데 그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인 동시에 지구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모국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작은 추도이자 헌사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연속성 위에 드문드문 공란을 남겨둔 채 파편처럼 이어지는 기억. 작가는 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와 함께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크로아티아를 넘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로 도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을 세르비아 국경까지 무사히 인도한 후 비셰그라드로 돌아갔다. 그렇게 반년 동안 할머니를 돌보셨던 아버지. 그 후 아버지도 독일행을 택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신분은 모두 잃었다. 조국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정치학자였던 어머니도, 경영학자였던 아버지의 신분도 한낱 과거로 남았을 뿐 독일에서 어머니는 큰 세탁 공장에서 뜨거운 수건에 묻혀 살았고, 독일어를 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할 뿐이었다. 이마저도 불안불안하게 이어오던 부모님은 인종 청소가 자행되는 비셰그라드로의 추방을 염려하여 1998년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했다. 그리고 미국 연금 생활자 신분이 된 지금 부모님은 크로아티아에 살고 있다.

 

작가 역시 독일에서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 작가로서의 삶을 끝없이 '증명'해야만 했고, 이방인인 자신으로 인해 토착민인 주변의 독일인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모든 규칙'을 상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의 부당한 대우와 편견을 통해 가족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좀 더 편하게, 부드럽게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출신'으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게 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로 인해 비셰그라드에서 그녀가 누렸던 행복했던 삶을 기억 속에 저장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비셰그라드 출신이라는 이유가 부당한 차별과 불공평한 대우의 시발점이었다면 할머니에게는 행복의 원천이자 지금의 불행을 잊게 하는 행복의 방부제였던 셈이다.

 

'한 번 입으면 영원히 입고 있어야 하는 옷 같은 것''출신'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처럼 전개되는 소설 속에서 '출신'은 어느새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다. 과거에 대한 회상과 주변 인물의 일화가 모여, 그 모든 과거와 현재가 끝없이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출신'이 형성되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끝없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속초에서 만난 북한 출신의 어느 노인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의 과거는 오롯이 과거 자체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 '나의 반항은 일종의 적응이었다.' 독일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방식에 걸었던 기대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반항은 출신의 숭배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 그런 소속감과 함께 우리의 가장 작은 공통분모는 '충분하다'였다." (p.295)

 

지나온 삶이 한 번 지운 일기장처럼 희미해지는 날이면 나는 아바이마을에서 만났던 어느 노인을 떠올리곤 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공통분모로 그와 나의 희미한 기억들이 위치도 정해지지 않은 이 땅의 어느 곳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든든해지곤 했다. 나의 기억이 그에게도 닿아 나처럼 든든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았다. 할머니의 행복했던 기억이 작가에게 든든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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