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속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백 세 시대를 실감하는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장수하는 사람들뿐이니 그마저도 속설인 듯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전두환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남에게 나쁜 짓을 하나라도 더 많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무한정 오래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공기도 맑고 활동하기에 적정한 온도와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산으로 산으로 몰려드는 듯합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시간부터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매일 아침 5시 30분에 집을 나서는 나로서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맘때의 산길에서 부지런한 등산객을 만나는 일이 그닥 익숙한 풍경은 아니지만 근 일 년째 지속되는 코로나 정국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산을 오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반려견의 배설물을 그냥 방치한 채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있고, 조용한 새벽 산길에서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건 없건 큰 소리로 '야호'를 외치는 사람도 있고, 박수를 치면서 크게 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행동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서양의 제왕학으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있다면 동양에는 이종오의 <후흑학>이 있다는 문구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문구를 읽고 혹하여 저 역시 <후흑학>을 서둘러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책 한 권 읽는다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얼굴 뻔뻔한 사람이 될 리는 없겠지만 <후흑학>이라는 책이 있는 줄도 모르는 정치인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후흑의 고수인 양 행동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나저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쓰는 사람이 더 건강할까요? 아니면 포커페이스, 후흑의 뻔뻔한 인간들이 더 건강할까요?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는 말을 떠올리면 후자가 더 오래 살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①욕을 먹기 싫어서 매사에 완벽히 준비하고, 욕을 먹으면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는 사람

②꼭 욕을 먹을 일만 골라하면서도, 욕을 먹으면 화를 내고 싫은 티를 내는 사람

③욕먹을 일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부터 먼저 하는 사람

④“삶에서 남의 평판은 중요치 않아!” 욕을 먹든 말든 오불관언하는 사람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은 먼저 세상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하여 욕을 먹는 사람을 하루라도 더 늦게 만나고 싶어 옥황상제에게 끝없이 청원을 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저승의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까닭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이승의 사람들은 그가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나길 바랄 테지만 저승의 사람들은 그와의 대면을 하루라도 더 늦춰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요. 이승의 삶을 남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건 어쩌면 저승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살 나이를 더할수록 저승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지난 삶을 자꾸만 뒤돌아보게 됩니다. 힐끔힐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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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11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네요.
저는 다른 관점에서 보려 합니다. 오래 사는 건 벌 받을 게 더 남아서라고 보는 거죠.
늙어서도 뉴스에 나오고 욕을 먹는 높은? 분들을 보면 죽을 때를 놓쳤다고 보는 거예요.
편안히 잠들 죽음을 놓치고 아직까지도 받을 벌이 있어서 이승에 오래 남는 거다, 이렇게 보는 거죠. 게다가 치매에 걸려 나중엔 가족에게조차 구박을 받을 처지가 된다면 그게 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생각해 보는 거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꼼쥐 2020-10-11 16:30   좋아요 0 | URL
페크 님의 말씀에 일견 공감하면서도 사는 게 마치 고통의 연속인 양 느껴져 불안하기도 합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인가요? 제가 아마도 살면서 지은 죄가 많아서 더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노후를 살 만큼 살다가 잠자듯이 떠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축복이 없을 텐데 말이죠.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에 대한 부담감 없이 책을 읽고 있는 요즘, 신간보다는 지난날 한두 번쯤 읽었던 책들에 더 눈길이 간다. 곰팡내 나는 낡은 책들에 그렇게 정신없이 빠져들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었던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되돌아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나는 그때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낡은 책갈피에 부적처럼 찔러두었을지도 모르고, 변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펼쳐 든 책의 낱장 곳곳에 깊은 한숨을 묻혀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노년의 삶을 입안 가득 꾸역꾸역 욱여넣던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가만가만 읽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인데,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저릿저릿 슬픔이 밀려오는 건 왜일까?

 

알다시피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Walden)>은 월든 호숫가에 본인이 지은 작은 오두막에서 2년 2개월 하고도 이틀을 보낸 경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인데 인간이 문명과 떨어져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개척하면서 깨닫게 되는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의 아름다움을 진솔하게 쓰고 있다. 현대인에게 <월든>은 마치 동화처럼 읽히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와 같은 아름다운 삶에 대한 동경을 가슴 가득 품고 있되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의 한 조각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생생한 기록을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가 숲 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p.135)

 

자신의 인생에서 삶인 것과 삶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마는 우리는 대개 한참이나 지나고 난 후에나 '삶이 아닌 것'을 어렴풋이 깨닫곤 한다. 말하자면 '삶이 아닌 것' 혹은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소중한 삶의 일부인 양 껴안고 살아왔음을 뒤늦은 후회와 함께 깨닫게 되고,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워 온 허섭스레기들을 어쩔 수 없는 삶의 일부로 인정하게 된다. 책에서 소로는 월든 숲속에서 은둔자적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고 종종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친구와 호기심 많은 이웃들이 그의 오두막을 방문하기도 했던 경험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아는 이들 중에서 가장 정신이 온전하고 비뚤어진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어제도 내일도 그러하다. 예전에 우리는 산책과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그럴 때는 세속의 먼지를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인간이었으므로.” (p.411)

 

<월든>이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널리 읽히는 이유는 비단 이 책이 철학적인 메시지만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월든 호수와 숲속의 풍경을 유려한 문체로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동물 친구들과 함께 소개함으로써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독자들은 마치 살아 있는 소로를 만나 그와 어깨를 맞대고 월든 호숫가를, 새들이 지저귀는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그 풍경에 흠뻑 취한 듯한 느낌에 벅차오르는 것이다.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데도 호수의 얼음은 눈에 띌 만큼 호숫물에 잠식되지도 않았고 강처럼 조각조각 깨져서 떠내려가지도 않았다. 물가 쪽은 폭 몇 야드 정도가 완전히 녹았음에도 한복판은 벌집 무늬만 생기고 물이 흥건할 뿐이어서 두께가 6인치 정도로 발이 푹 젖었다. 그러다 다음 날 저녁때쯤 따뜻한 비가 내리고 이어서 안개라도 낀다면 얼음은 안개가 걷힐 때쯤 삽시간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마치 안개에 유괴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p.460)

 

사실 <월든>의 숨은 매력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인용하고픈 문장이,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언제고 다시 읽고 싶은 문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실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해 <월든>은 언제고 다시 읽어도 그 느낌이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롭다는 점이다.

 

길게 이어지던 추석 연휴도 이제 막바지로 향하고 있다. 아슴아슴 멀어지는 기억들을 나는 <월든> 책갈피에 묻어둔 채 아침나절 동네 앞산을 다녀왔고, 소로가 걸었던 먼 나라의 오솔길을 떠올렸으며, 어깨를 겯고 성숙해지는 가을 풍경에 넋을 놓았다. 삶과 삶이 아닌 어떤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가 가을 햇살과 함께 쏟아져 내릴 듯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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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웠던 피부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얇아지는 것인지 조금만 세게 부딪혀도 상처가 나고 멍이 들거나 자주 흉이 지곤 한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상처가 나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 손 치더라도 예전 같으면 쉽게 아물어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한 가벼운 상처조차 예상 밖의 더딘 회복과 회복 후에 남는 볼썽사나운 흉터로 인해 이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가뜩이나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툭툭 불거진 흉터가 더해지면 그야말로 가관이지 싶어서 하는 말이다.

 

지난여름에 시골에 있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텃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쳐놓은 철조망 울타리를 보지 못해 그만 철조망에 바지가 걸려 바지가 찢어졌음은 물론 왼쪽 정강이 쪽에 가벼운 상처를 입고 말았다. 낮게 친 철조망 울타리가 콩잎에 덮여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급히 걷다가 철조망에 걸린 가벼운 사고였다. 아무튼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당한 사고인지라 주인 부부는 미안함에 발을 동동거리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였고 나는 대수롭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랬던 게 벌써 두 달 가까이 지나 계절도 바뀌었건만 그때의 상처는 길게 그어진 흉물스러운 흉터로 남아 있다.

 

작은 충격에도 상처를 입고 오래도록 남은 흉터를 지켜보는 건 비단 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듣게 되는 섭섭한 말 한마디에도 꽁한 매듭이 지어지고 마음의 상처가 되어 오래도록 서운한 마음을 품고 지내는 걸 보면 마음도 몸을 닮아가는 듯하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천성이 꽁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오해하기에 딱 알맞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수록 세포의 재생 능력이 떨어져 일단 상처가 나면 회복도 더디고 흉터도 오래가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렇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중년을 지나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해갈수록 삶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까닭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 몸에 오래도록 흉터를 남기기도 하고, 뒤돌아서면 까맣게 잊을 듯한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고 오래도록 꽁 하고 품은 마음의 흉터로 남겨두는 건 삶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닐까. 그렇게 몸과 마음의 흉터를 통해 삶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연습은 결국 죽음이라는 가장 큰 흉터를 통해 이승의 기억을 저승의 어느 빈자리에 통째로 옮겨 놓기 위한 예행연습은 아닐까. 나는 오늘도 우수수 흩어지는 가을바람에 가슴 한켠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상처를 입고 지난여름에 몸에 새긴 흉터를 보며 가물가물 잊히는 기억을 가만가만 더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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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27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흉터로 남겨두는 건 삶의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한 것.
멋진 해석이십니다. 일리가 있어요.

꼼쥐 2020-10-04 12:33   좋아요 0 | URL
그래서인지 나이가 들수록 편협하고 속 좁은 인간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별것 아닌 사소한 말에도 토라지거나 섭섭해하기 일쑤이고...
 
그럴 땐 바로 토끼시죠 - 하기 싫은 일은 적당히 미루고 좋아하는 일은 마음껏 즐기는 김토끼 묘생의 기술!
지수 지음 / 카멜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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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나는 책을 읽고 리뷰를 쓰겠다는 생각도,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의 갈래들을 붙잡겠다는 생각도 없이 되는 대로 무작정 책을 읽거나 떠오르는 상념들을 그저 무심히 흘려보내면서 하루하루를 건너왔던 것인데,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인간관계의 법칙처럼 글을 쓰는 일도 이와 같아서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내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어떤 현상으로 인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곡을 만드는 등의 소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게으른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도 마음 한켠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음을 휘젓는 어떤 현상의 원인을 캐거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는 등 현상에 대한 일반적인 호기심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예술가들에게는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현상으로부터 멀찌기 떨어진 채 떠오르는 그때그때의 주관적인 상념들을 하릴없이 끄적일 뿐이다.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쓰겠다는 생각이 사라지자 단행본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너무 쉽게 끝나버리는 결말이 다소 싱겁게 느껴지기도 했고, 몇 날 며칠을 두고 길게 이어지던 독서가 마냥 그립기도 했던 까닭이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이따금 머리가 무거울 때면 김용 작가의 무협지를 읽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독서는 한없이 가벼워지거나 두터웠던 벽이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진 듯 체계도 없이 무뎌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옮아왔고, 아들은 짧았던 여름방학을 마치고 비대면의 2학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으며, 더위가 사라진 아침 등산로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지수 작가의  에세이 <그럴 땐 바로 토끼시죠>를 펼치면서도 리뷰를 쓰겠다, 미리 작정을 하고 읽었던 건 아니지만 오래간만에 찾은 나의 블로그가 너무 휑뎅그렁한 느낌이 들었던 까닭에 리뷰를 핑계 삼아 뭐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지난가을 밴쿠버에 계신 작가의 엄마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전날 '너무 골치 아프게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것, 잘 맞는 것을 찾으라고' 전화를 통해 말씀하셨고, 작가는 자신의 첫 책인 이 책을 통해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에 답을 해야만 했었다고 했다.

 

"세상을 살수록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면 예술성이 발현될 여지는 줄어든다. 예술가로 사는 것은 아무리 따져봐도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시간과 체력을 투자해 공들여 글을 쓴 후, 종이와 나무와 지구 그리고 자신을 마주하기 민망했던 일은 어느 작가에게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주, 매우 많이." (p.203)

 

그렇다. 이 책은 김토끼를 그린 지수 작가의 첫 번째 에세이이자 평생을 예술가로 살겠다는 저자의 다짐이기도 하다. STEP 1. '도망칠 준비되셨나요?', STEP 2. '일단 뛰고 보는 거지', STEP 3. '지금 필요한 건, 호흡', STEP 4. '나의 페이스메이커들에게', STEP 5. '발길 닿는 곳 어디든'의 5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소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오지랖으로부터 한 발 물러서 오직 자신만의 보조와 속도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회사만큼 내 시간과 건강에 비싼 값을 쳐주는 곳이 없다고 해도, 나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곳에 언제까지고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한 번뿐인 인생, 한정된 시간과 체력을 최대한 의미 있는 곳에 쓰는 것이 '돈 벌려면 치사해도 참고 사는 거야'라는 말보다 나에게는 더 당연하니까." (p.125)

 

하늘이 점점 드높아지고 있다. 계절이 깊어갈수록 그에 따라 세상도 더욱 투명해져야 하는데 사는 날을 늘려갈수록 세상은 점점 더 모르는 곳이 되어 가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단절된 삶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막연한 상황도 모든 게 남의 일처럼 무덤덤해지는 요즘, 한 권의 책을 읽으면 으레 그에 상응하는 한 편의 리뷰를 써야만 했던 얼마 지나지 않은 나의 과거가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무작정 책을 읽고, 휑뎅그렁한 풍경을 지우기 위해 한 편의 리뷰를 쓰고 있다. 무심한 시간이 무덤덤한 일상을 쓰레기처럼 던져 놓는다. 하루가 어찌 흐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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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개신교에 대한 반감과 조롱, 부패한 목사들에 대한 비난과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개신교계와 비개신교계 간의 분열과 반목 등은 보수와 진보로 대변되는 우리나라만의 극단적인 정치지형과 맞물려 불필요한 손실을 초래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전 국민적 차원의 비난이나 정치권 전체의 성토가 없었던 건 대형교회의 막강한 조직 동원력이 한 표가 아쉬운 정치인들에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선거 당락의 열쇠처럼 작용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선거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자 바둑판 위의 요석처럼 인식되어 왔던 것인데, 이런 까닭에 개신교계 목사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인의 당선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개신교계에 유리한 각종 세제 혜택과 정치 편향적 목사들에 대한 특권을 보장받아 왔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권력 누수와 불평등한 조세 구조로 인한 폐해는 모두 선량한 국민들의 몫으로 남겨졌고, 수십 년 동안 개선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보수 단체와 전현직 야당 국회의원 그리고 사랑제일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세력들에 의한 광화문 집회와 그로 인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규모 확산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언젠가 터질 게 터졌다는 인식이 강한 듯하다. 그리고 늦은 감은 있지만 그들의 민낯을 속속들이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다행스러운 사건이라고 평하는 걸 듣게 되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국적 확산으로 인해 누가 확진자인지 알 수 없는 극도로 불안한 환경이 지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성이 존재하는 사람들조차 검사를 기피한다거나 방역 당국 종사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확진자들조차 어떤 음모설을 주장하거나 하는 등 비상식적이고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는 개신교계와 보수 단체의 행태를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면서 교회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극단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극우적 보수단체와 일부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교회라는 단일 대상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열렬한 개신교 신자마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을 못 하게 되었다. 전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회에 다닌다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을 함으로써 나에 대한 이미지가 광화문 집회에 참가했던 일부 비상식적인 교인들과 동일시되거나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반사회적인 인물로 여겨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생각해보면 교회의 추락이 이처럼 급격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게다가 단 한 번도 반성이나 뉘우침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개신교계의 자각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순식간에 도출할 수 있었던 것도 획기적인 일로 여겨진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아무리 공고했던 세력도 결국에는 그 끝이 있게 마련이고 우리는 2020년의 대한민국 코로나 정국에서 그 사실을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오늘은 처서, 영원할 것 같은 더위도 곧 끝이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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