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 - 제주 사는 미술치료사의 마음, 예술, 자연 이야기
정은혜 지음 / 아라의정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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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 비해 비교적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따라 이 일 저 일 안 해본 게 없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하는 일마다 진득하니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문과 혼란이 가중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혼란과 동요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혼란한 삶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영문도 모르는 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운명에 거스르는 길을 선택했던 많은 이들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혼란한 삶을 살다 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썼던 엘리자베스 길버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이는 어쩌면 몇 안 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술치료사이자 생태예술가로서 제주에서 살고 있는 정은혜 작가 역시 그런 행운아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록 그녀의 삶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이 좋아하고 운명에 거스르지 않는 길을 스스로 찾아냈으니 말이다. 작가의 산문집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는 그와 같은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방탕한 삶을 살아왔거나 길을 잃고 헤맸던 것도 아닌데 작가는 힘들고 고단했던 길을 돌고 돌아 지금에 이르렀다. 청소년기에 캐나다로 이민 가서 퀸스 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작가가 한국에 와서 미술관 큐레이터를 경험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예술대학(SAIC)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공인 미술치료사가 되었던 작가. 그와 같은 이력만으로도 순탄하고 편안한 삶을 꾸려갔을 듯한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삶을 사느라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미술치료사가 되기 위해서 미술관 큐레이터 일을 포기했고,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서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했고, 서울에서 제주로 올 때는 안정적인 직장과 돈을 벌 기회를 포기했다. 나는 지금의 삶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값을 치렀는지를 잊은 적이 없다. 내 삶에 만족하는 이유가 어쩌면 '잠정적 손해'로 비싸게 값을 치르고 선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53)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갈등과 혼란은 피하기 어렵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확신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일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인지 몇 번이고 되짚어보는 것이다. 작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 세 가지(친구, 자연, 카페)가 제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제주에서 새롭게 형성한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안정된 삶을 기반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모래사장을 기어 다니며 주운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로 설치 작품을 만들고,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상처 없는 이가 없고, 스크래치 없이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없음을 깨달았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험이 다르고, 문화와 나라가 다르고, 전혀 다른 가족 안에서 있었던 일인데도 내 아픔의 계곡과 다른 이들의 아픔의 계곡 사이에 연결된 다리가 있고, 이 다리를 통해 연민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p.207)


작가는 이 책의 원고를 처음 쓰기 시작한 시점이 '삶이 무너지고 관계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때'였다고 회상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그런 시기는 한두 번쯤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닐 터, 삶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의 방식은 서로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시간을 내서 글을 쓰고, 누군가는 신발이 닳도록 숲을 거닐고, 또 누군가는 모든 관계를 끊고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협곡을 벗어났을지라도 자신의 경험만큼은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소중히 전달하고, 자신도 역시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은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괜찮게 여겨진다면 우리가 맺는 자연과의 관계가 좀 달라질까?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누구나 이 순환의 어느 단계 안에 놓여 있다. 이 순환을 잘 받아들이면, 자연을 파괴하고 영원히 살고픈 욕망을 좀 내려놓고 우리가 죽이는 다른 생명들에게 연민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약간은 덜 무서워지지 않을까."  (p.284)


설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리뷰를 쓴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처럼 우리는 명절을 핑계 삼아 삶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뜬 사람들과 다음은 내 차례라는 듯 '아이고' 소리를 달고 사는 친척들과 갓난쟁이를 앞세우고 나타난 젊은 부부며 제법 어른 티가 나는 학생들 그리고... 명절이 아니면 같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없는 여러 얼굴들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삶의 순환이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타인을 통해 나의 변화를 감지하고 왠지 모를 슬픔에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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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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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그녀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솔직함'에 대해 놀라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솔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끝없이 교육받으며 자라왔지만 솔직함으로 인해 받게 된 여러 불합리한 피해들을 경험하면서 솔직함보다는 오히려 숨김이나 외면, 과장이나 허풍, 윤색이나 덧붙임 등에 더욱 익숙해져 온 느낌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된 지금, '솔직함'은 다만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 등장하는 형식적 단어일 뿐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소멸된 언어쯤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른이 하는 말은 대개 촘촘한 여과장치를 통해 걸러진, 자신에게 조금의 피해도 가해지지 않을 듯한 말만 남게 되거나 거짓에 가까운 허풍이나 과장이 주를 이룬다. 이렇듯 어른들의 외면을 받는 '솔직함'이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살아난다.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했다. 나는 죽고, 더이상 심판할 사람이 없기라도 할 것처럼 글쓰기. 진실이란 죽음과 연관되어서만 생겨난다고 믿는 것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p.9)


아니 에르노의 소설 대부분이 그렇듯이, 소설 속 주인공인 '나'와 '작가'인 아니 에르노 사이의 간극은 무척이나 좁다. 워낙에 좁은 간극 탓에 소설을 읽는 독자는 '나'와 '작가'를 동일시하거나 그렇다고 믿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작가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와 같은 결과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의 체험을 일부 차용하여 소설화하는, 이른바 '자전적 소설'이나 '성장소설'과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같은 높이에서 놓고 비교할 수는 없다. 이것이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이라고 밖에 달리 말하기 어려운 적나라하고, 원색적인 표현이나 묘사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 스스로도 '그것은 단지 소설 속 주인공의 경험이자 나(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결과'일 뿐 나의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며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슬몃 발을 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런 순간이면 태초의 야만성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사회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충동에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면 내가 저지를 수도 있었을 행위들, 예를 들면 단순히 인터넷에서 그 여자의 이름을 찾아보는 대신 "갈보 같은 년! 더러운 년! 잡년!"이라고 울부짖으며 그녀를 마구 쏘아대는 등의 행위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게다가 권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나는 커다란 목소리로 종종 그런 짓을 저질렀지 않은가. 결국 내가 겪는 고통, 그것은 그 여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p.31)


60여 쪽의 짧은 소설인 <집착>은 '육 년간의 관계를 끝내고 몇 달 전 W를 떠난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말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게 헤어진 후 그가 자신의 아파트를 나와 다른 여자의 아파트로 들어가 살게 되면서 새롭게 생긴 규칙들, 이를테면 전화는 그의 휴대전화로만 해야 하고, 만나는 것도 저녁이나 주말은 절대 안 된다는 것과 같은 전에는 없던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나면서 시작된 질투의 감정. '나'는 결코 사그라들 것 같지 않은 이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이 어디로 이끌려가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내 머리와 가슴과 자궁은 온통 그 여자로 채워졌고, 그녀는 가는 곳마다 나를 따라오며 내 감정을 좌우했다.'고 고백하는 '나'.


"나 자신을 먹잇감이자 관객으로 삼았던 질투에 휘둘리며 상상이 빚어낸 형상들을 끌어내고, 어떻게 제어해볼 새도 없이 머릿속에서 그 수를 불려가던 상투적 표현의 목록을 조사해보고, 저절로 떠오르고 탐욕스럽고 고통스러우며 기어이 진실과, 그리고 행복 -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까 - 의 획득을 노리는 그 모든 내면의 말들을 기술하는 일을 마쳤다. 나는, 6개월 동안 쉼없이 화장하고 강의하고 말하고 쾌락을 누린 여자의 비어 있던 이미지와 이름을 마침내 글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그런 여자가 다른 곳에서, 또다른 여자의 머릿속과 살갗에서 역시 살아있으리라는 짐작조차 못해보고."  (p.69)


감기 몸살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체험을 일주일쯤 하고 나니 책을 읽는 것도, 컴퓨터 화면에서 문장을 이어가는 일도 마치 처음 하는 일처럼 어색하고, 울퉁불퉁 매끄럽지가 않다. 질투 역시 그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다른 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 매일매일의 일상이 마치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그것인 양 정상체온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고열 속에서 행해지는 듯한 착각, 마침내 길고 긴 터널을 벗어나 일상으로 되돌아왔을 때 시큼털털한 후회와 함께 터널 속의 일이 마치 꿈결처럼 아득한 의문부호로 남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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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서 덜컥 몸살이 걸렸다. 요 며칠 들쑥날쑥하던 기온도 문제였겠지만 새벽에 산에서 하는 운동에 더하여 저녁에 계단 오르기를 추가한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몸을 돌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갑자기 이렇게 운동량을 늘리다 보니 몸인들 과부하를 견딜 수 있었을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하루였다. 지나친 운동으로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어제는 지독한 미세먼지까지 퍼부었으니 몸살이 날 만도 했다. 점심을 거른 채 약국에 들러 몸살약을 구입했다. 저녁에는 지인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야 하는데 걱정이다. 이렇게 한 번씩 앓고 나면 '나'에 대하여 곰곰 되짚어보게 된다.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사람이 지나가면 많은 종류의 감정이 남는다. 머문 시간에 비해 많은 슬픔을 남기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기억이 안 날 만큼 휘발된 얼굴 또한 많다. 무엇이 나의 삶에 더 많은 부분이었는지 간단히 설명할 순 없다. 그저 어떤 시간과 풍경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의 기록 방식은 양과 비례하지 않는다. 한 문장이 된 시간이 있기도 하고, 한 권의 책이 된 시간도 있다. 감정만 남긴 시간은 더더욱 많다."  (p.223)


몸은 여전히 으슬으슬 춥고 어깨와 무릎에는 욱신욱신 약간의 근육통이 있다. 약을 사기 위해 약국을 향해 걷고 있는데 인도 가장자리에 텐트처럼 비닐을 치고 농산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무릎에는 담요를 덮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추위를 다 막을 수는 없었던지 무릎의 담요를 몸 위쪽으로 계속해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행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저분들은 도대체 얼마나 팔겠다고 이 추위에 거리로 나온 걸까.


그들 각자의 이름도 모르고, 거래조차 한 적 없으니 그들의 얼굴은 내 기억 속에서 며칠이 지나기 전에 휘발되고 말겠지만, 나는 그 잠깐의 스침만으로도 한아름의 슬픔을 안게 되었다. 사는 게 별것 아니라는 말은 살 만한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구차한 낭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추위 속에서 들고 나온 농산물을 팔아야 하는 저 할머니들에게 그런 말은 어쩌면 배 부른 소리쯤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명절이 코밑인데 변덕스러운 날씨가 힘겹게 겨울을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욱신욱신 어깨가 쑤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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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2-0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조리 잘하세요.

꼼쥐 2026-02-12 18:4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덕분에 나은 듯.
 

매서웠던 동장군의 기세도 한풀 꺾인 오후, 오늘은 입춘입니다. 오늘 아침 기온도 며칠 전의 기온과는 확연히 달라졌던 까닭에 무거운 코트를 벗어던지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봄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듯했습니다. 산의 계단을 지나 능선 부근의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데 등 쪽으로 은근히 땀이 차올랐습니다. 매일 아침 산스장에서 마주치는 멋쟁이 할아버지를 만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지난가을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시던 할머니 한 분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하고 멋쟁이 할아버지가 먼저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는 "아, 네. 안녕하세요." 하고 답례를 하셨습니다. 그동안 왜 안 보이시나 걱정을 했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할머니는 그동안 너무 추워서 나오지 않고 집에서만 지냈다며 근황을 전해주셨습니다. "에이, 꽁꽁 싸매고 다니면 안 추워요." 하며 할아버지는 두꺼운 외투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툭툭 두들겨 보이셨습니다. "이제 날씨도 풀렸으니 매일 나와야지요." 하는 말을 남기고 할머니는 산을 내려가셨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풀 속 그늘에는 지금도 녹지 않은 잔설이 희끗희끗 겨울의 잔상을 흩뿌리고 있었지만 어렵게 겨울을 난 사람들은 다시 봄을 준비하고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한 권의 책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이 쓴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입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책의 줄거리를 되짚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관찰 대상인 '어느 서민 여성'은 사실 저자인 에리봉의 어머니로서 평생 불행한 삶을 사셨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때 버려졌던 에리봉의 어머니는 고아원에서 성장하다가 열네 살에 학업을 그만둔 후 '무슨 일이든 하는 하녀'가 되었다가 가정부로, 이어서는 공장노동자로 일을 했고 죽을 때까지 공공임대주택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50년에 아버지와 결혼해 55년을 해로했지만 "두 분이 서로 사랑하거나 존중하는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다"고 에리봉은 회상합니다. 요양원에 입소한 어머니가 예전에 알았던 또래 여성과 마주쳐서는 각자의 남편을 향한 '원한과 증오'를 주제로 지치지도 않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마리즈 콩데의 자전 에세이 '민낯의 삶'의 한 대목을 떠올립니다. "왜 남자들은 여자들의 삶을 이렇게 망쳐놓을까?"


"어머니가 내게 창밖의 가수, 과자를 든 아이, 옷장 위의 남자, 소파 위의 개들에 관해 말했을 때, 난 거의 같은 생각을 했다. 그녀도 '다 끝났다'고. 그럼에도 나는 신체적, 정신적 노쇠의 과정이 어떤 리듬으로 일어날지 자문했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던 아버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물건(안경...)을 잃어버렸다. 어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아주 명석했으며, 기억을 잃지도 않았고, 그녀를 보러 가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우리는 정상적으로 수다를 떨 수 있었고, 그녀의 이야기는 대개 조리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환각을 느꼈다."  (p.105)


우리는 대개 자신의 삶이 영원한 듯 생각하거나 끝에 대해 일절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상에서의 행복을 반감시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삽니다. 그렇게 회피로 일관하던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실재하는 어떤 것으로 확인되는 바람에 우리는 몹시도 당황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낮에 점심을 같이 했던 지인 한 분이 이르기를 요양원에 계시던 자신의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 갔고, 위독하다는 의사의 말에 가족 전체가 모였었고, 계속해서 혈압이 떨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죽음이 멀지 않은 듯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생명이 사그라드는 게 슬픈 까닭은 그와 함께 다가오는 봄을 맞을 수 없는 까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봄을 알린다는 오늘은 입춘. 봄을 닮은 우울이 흐린 하늘에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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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잉 아이 - Dying Ey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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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든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주로 '분노'나 '화'를 그 잣대로 삼는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철이 든 사람으로 분류한다는 뜻이다.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도 들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한다는 얘기 아닌가?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이 들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다음 생을 기대하면서. 21세기의 유행은 철이 들지 않은 채 죽는 것이라서 그래,라고 말한다면 뭐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것도 유행에 속할지 아닐지의 문제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유행에 동참하고자 일부러 철이 들지 않은 채 죽었다는 게 믿기지는 않지만, 아무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다잉 아이>는 철이 들기도 한참 전인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억울하게 죽은 한 여인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미스터리 호러'에 가까운 이 소설은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으스스한 공포를 안겨주기도 하고, 작가 특유의 독특한 구성 방식을 구축함으로써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그 결말을 알 수 없게 한다.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 독자는 아니지만 머리가 복잡하거나 독서 권태기에 빠져들 때 읽으면 어느 정도 즉각적인 효과를 보곤 해서 이따금 생각이 날 때마다 읽곤 한다.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코가 맹맹하고 으슬으슬 감기 기운이 있을 때 먹는 타이레놀의 효과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신스케는 형사 재판의 판결이 떨어진 직후부터 '양하'에서 일했다. 판결 내용은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이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는 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해도 상관없었지만, 에지마가 손을 써 한동안 치즈코의 가게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에지마의 머릿속에는 그래야 신스케가 불필요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란 배려와 더불어, 사고에 대해 알고 있는 '시리우스' 단골손님의 시선을 의식한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p.91)


소설의 주인공인 아메무라 신스케는 에지마가 주인인 '시리우스'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지마의 차를 운전하다가 교통사고를 냈고, 그 사고로 기시나카 미나에라는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이후 집행유예로 풀려난 신스케는 '양하'로 자리를 옮겨 새 생활을 시작한다. 영업이 끝나갈 시간에 찾아온 한 남자의 습격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신스케는 기억의 일부를 잃게 된다. 신스케를 공격했던 사람은 죽은 미나에의 남편인 기시나카 레이지였고, 그 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자신이 저지른 교통사고 당시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던 신스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기억을 되찾는 일에 매달린다. 여기에는 동거녀였던 나루미의 실종이 한몫했다.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 집 안을 깨끗이 정리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물건 역시 마구 옮겨져 있었다.


"나루미가 없어졌을 때 그녀의 화장대에 드라이버가 놓여 있었다. 자기 방에서는 본 적 없는 십자드라이버였다. 혹시 나루미가 그 드라이버로 세면실 거울을 떼어 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것을 훔쳐 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짚이는 게 있었다. 신스케가 퇴원해 돌아와 보니 집 안이 싹 바뀌어 있었다. 마치 대청소를 마친 뒤처럼 보였다. 나루미가 그 '무언가'를 찾으려 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집 안을 그렇게 바꿔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p.275)


신스케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사고 전후의 내막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날 운전을 했던 당사자는 신스케가 아니라 에지마였고, 미나에의 자전거를 치고 갑자기 핸들을 틀어 차선을 넘는 바람에 옆차선에서 과속을 하던 페라리 한 대가 에지마가 운전하던 벤츠와 충돌한 후 미나에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게다가 페라리를 운전했던 것은 건설회사 직원인 기우치가 아니었고, 기우치의 약혼녀이자 건설회사 사장의 딸이었던 미도리였다. 음주운전을 했던 미도리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던 기우치 역시 사고 당사자가 아니었던 셈이다. 미나에의 마지막 눈빛을 기억하고 있던 미도리는 레이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고, 방문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미도리는 점차 사망한 미나에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광고 인형을 전문적으로 만들었던 레이지의 도움을 받아 미나에의 얼굴로 변신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체중을 감량하고 식습관까지 닮아갔다.


"기시나카 미나에가 죽어 갈 때의 눈. 생명이 꺼지기 직전까지 그녀는 집념의 빛을 번뜩였어. 삶에 대한 집착의 빛,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죽어야 하는 무상의 빛, 자신을 그런 꼴로 만든 상대에 대한 증오의 빛이었지.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끔찍한 눈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p.395)


미나에의 모습으로 화한 미도리는 복수를 위해 신스케의 주변을 맴돌게 되고, 기억을 잃었던 신스케 역시 우여곡절 끝에 기억의 대부분을 회복하면서 다시 에지마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동거녀였던 나루미의 행방을 묻게 되는데...


지금 당신에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철이 덜 들었거나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남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어떤 목사는 대통령 이름을 들먹이면서 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공공연히 떠들기도 한다. 그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의 지능은 세살배기 어린애에 불과한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가 철이 들기를 기대한다는 건 죽은 나무가 되살아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때로 '분노'를 통하여 살아갈 에너지를 얻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시기는 마냥 늦어지게 된다. 내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어느 목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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