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학생들을 동원하는 웅변대회가 많기도 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대개 정부를 찬양하거나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웅변 원고를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온전히 학생에게 맡기기에도 미덥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교내 웅변대회야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이니 참가하는 학생들이 스스로 원고를 쓰고 자발적으로 웅변 연습을 하게 마련이지만, 군 대항 혹은 도 대항 나아가서 전국 대항일 경우에는 학교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니 선생님들도 뒷짐을 진 채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학생이 쓴 원고에 첨삭을 가하고, 방과 후에 남아서 웅변 연습을 지도하고, 다른 학교의 출전자 정보를 빼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학교 대표로 선발되는 학생은 주로 학업 성적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선생님의 말귀도 잘 알아듣고, 주제에 맞게 원고도 잘 쓴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했을 테다.


소심하여 남 앞에 서는 걸 무척이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나도 웅변대회라면 지겹도록 많이 참가했었다. 대개는 담임 선생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발표력이 조금씩 좋아졌던 걸 감안하면 소득이 아주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최근 아랍에미리트를 국빈 방문한 대통령의 연설이 야당과 일부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 장병들에게 "아랍에미리트는 바로 우리의 형제 국가"라면서 "합동훈련을 하고, 작전을 하고, 교육을 하는 이 현장은 바로 여기가 대한민국이고 우리 조국"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무난했다. 이어서 말하길 "형제국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라며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는 맥락에도 맞지 않는 다소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야당과 일부 언론은 '외교 참사'라는 평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는 한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관계를 완전히 복원하였고, 이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 면에서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국제 정세를 모르는 무식의 발로는 맞지만 그게 만약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스라엘'이라고 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아부다비 지속가능성 주간' 개막식 기조연설에서도 '원전 생태계를 빠르게 복원하고'와 같은 행사 주제와 맞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말을 연설 전문에 끼워 넣음으로써 우리나라 대통령의 무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식함이란 한 개인의 쪽팔림으로 끝날 수 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라면 그 무게가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연설만 했다 하면 실수를 반복한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써준 원고로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수를 줄이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기 싫으면 아는 내용만 말해야 한다. 예컨대 모든 연설에서 폭탄주 제조법이라든가 대한민국의 술문화 등에 대하여 말한다면 실수는 거의 없거나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연설의 주제에 맞지 않아 코미디 같은 느낌이 약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떠랴. 실수를 무한반복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더 좋지 않은가. 국익에도 그리고 듣는 이의 정신건강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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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17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셨군요^^
제 생각이랑 어쩜 이리도 일치하시는지..
매번 실수 실수 실수..
대통령이 무식하고 무능한거 죄악이지 않습니까?
남편은 아니라고... 용서가 가능하다는데 전 그말에 반대합니다
참 너그럽기도 하죠!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꼼쥐 2023-01-17 18:27   좋아요 1 | URL
대통령을 대신하여 변명하자면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ㅎ
사법시험에 9수를 한 것처럼 대통령 선거에서 9번쯤 떨어져 봤거나 대통령을 두 번쯤 연임했더라면 좀 잘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늘 술만 마셨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잘 모르겠네요. 대통령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ㅎ

singri 2023-01-17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죽하면 아무것도 하지말고 관저에서 술만 먹어라 하고싶은심정입니다

꼼쥐 2023-01-17 18:28   좋아요 1 | URL
그게 국익을 위해서는 백 번 옳은 선택인 듯합니다.
해외순방만 나갔다 하면 사고를 치니...

북프리쿠키 2023-01-17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란이 아니고
˝이런˝으로 우기지 않을까요 ㅎㅎ

꼼쥐 2023-01-17 18:29   좋아요 1 | URL
그러면 이란이라고 최초 보도한 방송국을 먼저 찾아야 할 듯하네요. 그게 만약 TV조선이라면 어쩌죠? 정정보도를 요구할 수도 없고...

DYDADDY 2023-01-17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정치는 코메디를 넘어 흉측해진지 오래라서 차라리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꼼쥐 2023-01-17 18:31   좋아요 3 | URL
다른 나라 국가가 나올 때도 가슴에 경례를 하고 있고 흠을 잡으려 들면 모든 게 코미디인 듯합니다. 이건 뭐 국격을 떨어트려도 너무 떨어트리고 있으니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의 X맨이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

잉크냄새 2023-01-1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지지리도 모자란 놈이란 생각만 드네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는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더니 그 머저리로 인하여 대통령의 자리가 참 우스워졌어요.

꼼쥐 2023-01-20 15:03   좋아요 0 | URL
대통령 본인도 대통령이란 자리를 우습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겟죠. 해외 동포들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하더군요.

기억의집 2023-01-18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러니 지금 미국이 상대도 안 하죠. 우리 나라 북한문제를 우리 나라만 빼고 미일만 회담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기업들이 대량 구조조정해서 지금 난리라던데.. 노인분들은 자기 자식들 짤려서 좋겠어요!!!

꼼쥐 2023-01-20 15:02   좋아요 0 | URL
미국이 자국의 경제만 우선시하니까 잘나가는 기업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미국 말이라면 뭐 하나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꼴이란 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게다가 일본에게 우리가 빚진 게 없는데 일본이 하자는 대로 모든 걸 양보하는 걸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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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단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도 물론 가까이하지 않는다. 예컨대 공정, 정의, 자유, 객관적, 상식, 용서 등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에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이상적인 낱말들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저한 자기반성 대신에 구체성도 없는 과대망상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어떤 이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분별한 믿음을 표출하도록 유도한다. 그(또는 그녀)가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증거를 제시한 것도 아닌데, 그(또는 그녀)가 마치 정의의 화신인 양 인간 양심의 정수인 양 대우하는 것이다. 이런 몰상식한 처사가 선거판이나 특정인의 강연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하여 일어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일상 다반사에서 늘 있는 일이다.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감정적'이고 사적인 글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줄거리가 없는 서평일 것이다. 이 글이 일반적인 형식의 해제인지 추천사인지 독후감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고통에 대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고통에 대한 고통이란, 침묵과 망각 외에는 고통에 대처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용서'는 이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어야 한다."  (p.50)


정희진 작가의 저서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지극히 사적이며 주관적인 글의 모음이다. 그래서 더 깊이 읽게 되는 책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별적이며 완벽한 객관에 이른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제되는 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게 개별적인 타인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지루해하거나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세 번째 책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정희진 개인의 생각들을 쏟아낸 책이며 그래서 더 값지고 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 실린 27편의 글은 모두 정희진의 생각일 뿐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나 창작을 적당히 모방하거나 답습한 글은 단 한 편도 없다. 정희진의 덕후가 탄생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 글은 <대지의 딸>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좋은 서평은 결국 좋은 독후감이다. 독서 감상문은 쓰는 이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어야 한다. 독후감은 개인의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서평을 쓴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자일 뿐 독자를 대변하는 길잡이가 아니다."  (p.220)


작가는 자신이 '페미니즘'이라는 특정한 사고방식에 집중하는 필자이자, 고통과 몸, 권력과 지식, 젠더와 관계 등 논쟁적인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리영희의 저서 <대화>에 대한 서평에서는 리영희에 대한 인간적 감정과 남자라는 사회적 우월성을 배제한 채 행복한 근대인으로서의 리영희, 권력의 주조 방식을 넘어서는 지성과 인식의 소유자, 한 개인이 특정한 시대에 어느 정도까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최대치를 보여준 인물로서 존경의 마음을 내비친다.


"결국 나는 이 분열에 대해 쓴다. 모든 의미는 차이의 산물이며, 앎은 경계를 인식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진리'가 내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만용을 주었다. 텍스트와의 대화는 독자와 저자 간 갈등의 의미를 정치화함으로써 텍스트를 소통 가능한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mapping)이다."  (p.176)


나는 자신이 하는 모든 연설에서 자유를 강조하고 입만 벌리면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는 어느 정치인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어느 당은 당원 전체가 그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종종 전해 듣곤 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낱말들을 나열하는 그의 연설 자체가 사기인 것처럼 당원들 모두가 그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것도 사기에 가깝다. 로봇이 아닌 이상,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인간이 어떻게 로봇처럼 일괄적인 대오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선전하는 정당은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괴멸한 것처럼 말이다. 정희진의 글이 이 시대에 귀하게 읽히는 까닭은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치와 언론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과거로의 퇴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너와 다르고 너의 생각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탐구하는 것, 사회적 결합과 연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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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권력의 서열과 아내 멧돼지의 질투


진흙 목욕을 즐기는 우리 멧돼지들에게 있어 날씨는 꽤나 민감한 문제입니다. 웬만하면 참고 견디는 게 일상인 우리들입니다만 춥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는 멧돼지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조건이지요. 그런 날에는 가뜩이나 먹이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는 몇 배의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따뜻했던 날씨 덕분에 2023년 새해를 기분 좋게 시작했습니다만 어제부터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편차가 심해서 어떤 곳은 침수가 되기도 했고, 어떤 곳은 비가 눈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날씨는 여전히 푸근합니다. 비가 그치고 다음 주에는 다시 또 추워진다고 합니다만 나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아내 멧돼지와 함께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집에서건 밖에서건 아내 멧돼지가 무섭습니다. 이처럼 아내 멧돼지를 극도로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은 무척이나 오래된 일입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의 성격과는 다르게 아내 멧돼지는 앞뒤 가리지 않는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차이에서부터 나는 아내 멧돼지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이긴 하지만 아내 멧돼지를 두려워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성격 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뒷골목 시절 내가 저질렀던 온갖 비리를 아내 멧돼지가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인간 세계의 속담이 멧돼지 세계에서 통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내가 털끝만 한 흠이라도 잡혀 갈라서는 날에는 나의 비리가 만천하에 밝혀지는 걸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약점을 아내 멧돼지라고 모를 리 없습니다.


다른 멧돼지들은 모르는 사실입니다만 리더 멧돼지로서의 나의 권력은 한낱 허울뿐인 권력일 뿐 모든 권력은 아내 멧돼지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멧돼지의 속성 상 다산과 개체수 조절에 별 관심이 없는 관계로 나는 한때 나와 공부도 같이 했고, 뒷골목 생활도 했던 암컷 멧돼지 한 마리를 다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직에 임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아내 멧돼지로부터 온갖 욕설과 비난을 들어야만 했고, 어떻게 하면 그 암컷 멧돼지를 자를 수 있을까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사직서를 제출한다기에 나는 단칼에 해임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 암컷 멧돼지에게 특별한 애정이나 관심이 없다는 걸 아내 멧돼지에게 간접적으로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그 암컷 멧돼지는 머리도 좋고, 얼굴도 예뻐서 젊은 시절 많은 수컷 멧돼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아내 멧돼지인지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나는 사실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를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날리면 멧돼지보다는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에게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정책이라면 뭐든 강력하게 지지하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의사는 아내 멧돼지와 나의 선대 멧돼지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나의 선대 멧돼지뿐만 아니라 나의 똘마니 멧돼지들의 조상들 역시 과거 일본 멧돼지들이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식민지 시절 당시 많은 보살핌과 지원을 받았으므로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게 멧돼지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멧돼지들이 죽고 강제 노동에 끌려갔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에 반하는 야당의 멧돼지들이나 일반 멧돼지들의 저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력하게 막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알던 암컷 멧돼지를 부위원장직에 임명했던 나의 실수를 만회하고 아내 멧돼지로부터 신뢰와 애정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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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1-1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이 5년 동안 연재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꼼쥐 2023-01-15 14:2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제는 대한민국의 존립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는 것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
백은선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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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글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나를 체감하지 못하는 무중력의 공간에서, 영혼도 제압당한 상태로 글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그저 멀뚱히 지켜보는 일은 현실에서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상당히 다르다. 타자에 의한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나 좌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전에는 맛볼 수 없었던 신선한 글맛 혹은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완성된 형태의 글의 영역을 체험하는 느낌은 특별하거나 다소 생경하다. 누군가가 글을 통하여 세태에 찌든 나의 영혼을 순간적으로 정화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그런 특별한 체험은 내가 원한다고 언제든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글을 쓴 직후에는 정신적으로 고양된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는 글을 쓰는 데서 오는 기쁨보다는 책을 읽는 데서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교훈이나 감동은 물론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해 신선한 충격이나 새로운 경험을 덤으로 체험하게 된다. ‘말’과 ‘시’와 ‘삶’과 ‘여성’이라는 각 부의 제목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는 결코 녹록지 않은 핵심 키워드를 부의 제목으로 선정하여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풀어간다. 독자들은 어쩌면 서문에서 밝힌 작가의 도발적인 문장에 움칫 놀라 본문을 읽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날지도 모르겠다.


"선한 것을 믿고 싶지만 대체로 불신하기를 좋아하며 아름다움보다 추함에 끌리곤 한다. 가능태를 따져보는 것을 습관처럼 내재하고 있지만 쉽게 감동하기도 쉽게 차가워지기도 한다. 불안 때문에 수다스러워지고 수치심에 입을 다물곤 한다. 산문을 쓰기로 한 것이 큰 실수라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하고 후회하는 것이다. 과거를 곱씹지만 현재만 알고 싶다. 엉망진창이지만 꽤나 성실한 사람의 성실하고 엉망인 삶에 관한 글. 읽으면 좋고 안 읽으면 더 좋다. 보세요. 나의 우울을."  (P.5 '들어가며')


1부 '말'에서 작가는 N번방과 문단내 성폭력 문제를 짚고 있다. 며칠 전에도 성추행 당사자였던 고은 시인이 침묵을 깨고 다시 작품 활동을 개시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최영미 시인에 의해 밝혀진 그의 추악한 실체가 5년 전의 일이었다.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보란 듯 문단에 복귀한 것이다. 백은선 시인 역시 우리 문단에서 성희롱과 추문의 대상이 되는 여성 작가들에 대해 쓰고 있다.


2부 '시'에서 시인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가 어떻게 위안을 주는 존재였는지, 그럼에도 자신의 소망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안팎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소망을 쟁취해야 한다고 응원과 지지의 말을 건넨다. 3부 '삷'에서 시인은 코로나19 시대의 반복되는 일상과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온갖 공포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더 오래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사랑의 힘이 시를 쓰게 하고, 시를 쓰는 데서 사랑이 온다는 믿음.


"말과 글은 이만큼이나 멀고 아득하다.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 내면에서 정확히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사람이 내밀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될 때와 그것을 마침내 글로 쓸 수 있게 될 때의 순간을 절대로 쉽게 예상하거나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p.197)


4부 '여성'에서 시인은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들, 개인에게 분열증을 야기하는 한국 사회, 기후위기를 조장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를 거론하며 이와 같은 문제적인 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여성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여성 서사에도 '성녀' 혹은 '악녀' 프레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점이 존재하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여성들 스스로 함께 실천하며 단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이니까 멋지게 굿바이를 날리며 퇴장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아직 할말이 더 있는데 못한 것 같고 갑자기 너무 아쉽고 그렇다. 그렇지만 나는 진짜 궁핍해지지 않는 이상 절대 다시는 산문집을 내지 않을 것이라 다짐 또 다짐한다. 산문을 쓰는 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느낌인 것 같다(내가 임금이란 소리는 아니고)."  (p.271~p.272)


세상에는 내가 미처 읽지 못한 무수히 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존재조차 모르는 책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책을 읽고, 이따금 취미 삼아 글을 쓰고, 그러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곤 한다. 이전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백은선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내내 피하고 외면했던 것이 하나 있다. 성장 과정에서 시인도 나만큼 힘들었구나 하는 점. 그럼에도 일부러 피했던 까닭은 성장과정이 적당히 힘들었던 사람은 그걸 자랑할 수 있겠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던 사람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으로부터 동질감이나 동료 의식을 느끼기보다 먼저 외면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무의식에 가까운 본능이리라.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피폐했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 그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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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떠난 운동장은 휑한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눈석임물이 얕은 물길을 내어 흐르고, 빈 운동장을 독차지하듯 길냥이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산책에 나섰습니다. 푸석푸석한 오후의 겨울 햇살이 운동장 한가득 퍼져갑니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먹이를 찾는 듯 포릉포릉 가볍게 날고 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길냥이들이 까치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위험을 감지한 까치가 밭은 울음소리를 내며 경고성 엄포를 놓아 보지만 길냥이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길냥이들의 짓궂은 태도에 까치는 그만 포기하고 저만치 날아가버렸습니다. 운동장은 다시 길냥이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겨울 햇살이 약간의 온기를 뿌려주는 동안 눈석임물이 졸졸 소리를 내어 흐르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햇빛을 쪼이다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하루하루의 일상은 언제나 평화롭고 푸근합니다. 어제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 팟빵의 오디오 매거진 <월말 김어준>이 책으로 출간된 것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반갑기도 했고 말이죠.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월말 김어준 part 1'이라고 쓰인 책등을 발견하였을 때 뭐랄까, 오래된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서가 옆에 서서 책을 잠시 펼쳐보고 다시 꽂아 놓을 생각이었는데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책을 대출하고 말았습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절정을 이루어야 할 시기에 예년보다 따뜻한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봄이 멀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백은선의 산문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한 가지 면만 가진 사람도 없고 한 가지 성격만 가진 인간도 없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슬프고 이상하고 안도하고 그런 반복을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는 게 내게 남은 삶을 탕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것은 나뿐이야."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삶이 두서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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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3-01-10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어준 책 어려워보여요.tbs서 내쳐지더니 유튜브에서 첫방으로 슈퍼챗 세계 1위찍었다고. 왠지 유튜브도 불안하긴하지만요ㅋ .
5세후니 일 잘 하네요;;ㅡㅡ

꼼쥐 2023-01-12 15:55   좋아요 0 | URL
팟빵에서 가끔 들었던 내용인지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서인지(건방지게)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유튜브 방송은 동접자가 여전히 20만에 육박하고 슈퍼챗도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