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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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스 페르민의 <눈>은 한 권의 소설인 동시에 시집이며 시집인 동시에 소설이다. 이와 같은 구성을 통하여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목표는 분명한 듯 보인다. 궁극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은 '시'이며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결국 소설에서 집약되는 '눈'이라는 것이다. '눈(雪)'은 백색인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無)이며 '눈멂'을 통한 흑색 공간과도 맞닿아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한 편의 꿈인 동시에 어느 날 꿈속에서 보았던 아련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생일날 아침 유코는 은빛 강가에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승려의 미간이 깊은 실망을 나타내며 찌푸려졌다. 태양이 물결무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개복치 한 마리가 자작나무들 사이를 지나 나무다리 아래에서 사라졌다. "시는 직업이 아니야.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흘러가는 물이다. 이 강물처럼 말이다." 유코는 고요하게 흘러 사라지는 강을 깊이 바라보았다."  (p.11)


신도 승려였던 유코의 아버지는 아들 유코가 승려 혹은 군인이 되길 바랐다. 유코는 결국 아버지와의 타협책으로 겨울에만 77편의 시를 쓰기로 한다. 눈에 매료되었고, 7을 숭배하는 시인이었던 까닭이다. 유코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이 또한 의미가 있어서 유코가 쓰는 하이쿠 역시 열일곱 음절로 구성되는(5-7-5) 짧은 시로 한 음절도 더할 수 없다. 눈과 하이쿠에 매료되었던 유코의 시는 외부의 주목을 받게 되고, 궁정 시인이 방문하기에 이른다. 궁정 시인은 유코의 시에 색이 결여된 것을 지적하면서 소세키 선생에게서 배움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소세키 선생을 찾아 나섰던 유코는 도중에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유코를 구원한 것은 이미지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세키를 구원한 것도 하나의 이미지였다. 주인공 유코와 스승 소세키의 삶이 젊은 여인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로 엮인다. 다만 유코가 보았던 것은 죽어 있는 여인이었고, 무사였던 소세키가 본 것은 '직선의 단 한 줄에 삶과 생명이 걸린' 곡예사, 즉 프랑스 파리에서 온 네에주(눈)였다.


"소세키의 눈에 그녀는 한 편의 시였다. 한 폭의 그림이었고 서예였다. 춤이었고 음악이었다. 그녀는 네에주였다. 눈. 예술의 모든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p.78)


네에주와 소세키는 결혼하여 딸(봄눈송이)을 낳고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네에주가 마지막 줄타기 공연을 시도하기 전까지. 네에주의 공연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사함들. 너무도 높은 곳에서 하얀 점처럼 나아가던 그녀는 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추락하여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소세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딸의 교육과 예술에 전념한다. 밤낮으로 자신의 아내를 그리며 눈을 혹사하던 소세키는 실명하고 만다. 유코는 자신이 보았던 네에주의 시신을 소세키에게 알린다. 유코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지만 소세키는 네에주를 보러 가자는 유코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자신이 갈고닦은 예술을 유코에게 가르친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사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p.100)


소세키는 네에주 옆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온 유코는 다채로운 색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흐른 어느 날 봄눈송이가 찾아온다. 유코는 봄눈송이와 혼인한다. 유코는 궁정 시인의 길을 포기하고, 봄눈송이는 곡예사가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둘은 사랑한다.


8,90년대를 지나쳐 온 사람들은 시에 대한 막연한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력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제도적 자유를 꿈꾸던 그 시절에 시는 곧 영혼의 탈출구였고, 욕망의 해방구였으며, 궁극의 아름다움이었다. 시는 작가가 정의하지 않은 무한의 아름다움이었으며, 구석구석 묘사하지 않은 상상의 공간이었으며, 흰 여백에 그려진 나만의 꿈이었다. 수많은 '계절들이 시간의 모래시계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시간이 되면 언젠가 시를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움켜쥔 손 안에서 화석처럼 구르고 있었다. 앤 카슨의 소설 <빨강의 자서전>을 떠올리게 하는 막상스 페르민의 <눈>. <눈>을 읽는다는 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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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능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원도 많지 않고, 국토의 면적도 좁은 대한민국의 경제 여건 상 국제 무역을 통한 수익의 창출은 필수적입니다. 달리 먹고살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에서 남쪽보다는 북쪽에 더 많은 자원이 매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통일이 되지 않는 한 그마저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북쪽을 통하지 않고서는 대륙과의 연결이 요원한지라 우리가 사는 남쪽은 마치 하나의 섬과 다를 바 없다 하겠습니다. 바다를 통한 교역은 물류비용도 비용이지만 많은 위험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내가 아랍 에미리트에 파견된 싸움 멧돼지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혹은 그들 앞에서 가오 좀 잡아보려는 차원에서 했던 중대한 실언으로 인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우리의 배들에 나포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게 술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술을 많이 먹은 다음 날이면 유난히 말이 많아지고 실수도 잦아지는 걸 보면 이제 내 몸도 예전과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알코올 중독을 넘어 알코올성 치매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나의 실수로 기인한 일들이지만 똘마니 멧돼지들이 어떻게든 수습을 하겠지요.


다른 건 별로 부럽지 않은데 전임 리더 멧돼지의 능력 중 부러운 게 딱 하나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던 능력입니다. 나는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이래 단 한 달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하였는데 그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그와 같이 탁월한 능력을 선보일 수 있었을까요. 그 능력만 제외하면 내가 그보다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뒷골목 멧돼지들을 동원하여 나의 지시에 저항하는 멧돼지들을 잡아들이거나 겁을 주는 능력, 소문내기 멧돼지들로 하여금 나를 찬양하는 기사만 쓰도록 하는 능력, 나와 뜻이 같은 멧돼지들을 집으로 불러 밤마다 술을 마시는 능력 등 내가 자신할 수 있는 능력은 차고도 넘치니까 말입니다. 결혼 전에는 여러 암컷 멧돼지들과 어울리는 능력도 탁월했으나 지금은 젊은 멧돼지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아무튼 무역수지 적자가 매달 이어지고 누적액도 점차 커지다 보니 환율이 폭등하고 수입 물가가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나와 내 주변의 부자 멧돼지들은 사는 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수입 물가가 오르고 날씨마저 강한 한파가 이어지다 보니 난방비 폭등이라는 둥 교통비며 전기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이 웬 말이냐는 둥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일반 멧돼지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수출이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지요. 없는 능력을 전임 리더 멧돼지로부터 꿔올 수도 없고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뒷골목 멧돼지들을 동원하여 다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지만 그것만은 안 된다는 똘마니 멧돼지들의 만류와 다른 나라의 소문내기 멧돼지들이 나에 대한 비판 기사가 연일 계속되는 바람에 꾹 참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 편 멧돼지들의 대표를 뽑는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내가 지명한 멧돼지의 인기가 높아지지 않아 걱정입니다. 여러 멧돼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상에 올라 다른 멧돼지를 치받는 퍼포먼스 한 방이면 당선이 될 텐데 그게 뭐 어렵다고 절절매는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리더인 내가 대표 멧돼지로 출마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속에서 열불이 납니다. 등신 같은 놈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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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3-01-29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수는 어찌 보낼지ㅋㅋ

꼼쥐 2023-01-30 17:3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아무래도 철수 땜시 밤잠을 설칠 듯한데...

라로 2023-01-29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등신같은 놈들!!! 아 넘 웃겨요!ㅎㅎㅎ

꼼쥐 2023-01-30 17:34   좋아요 0 | URL
주인공에 빙의되어 글을 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본심이 나온 듯...
 
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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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종교, 문화, 정치 등 삶의 전반을 두루 감싸는 여러 외부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책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물론 그런 용도라면 영화도 그에 못지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으나 영화는 단편적 역사를 이해하거나 역사 속 특정 사건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용이할 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후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 나라의 발전 단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분명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어 보인다. 예컨대 고인이 되신 박경리 여사의 <토지>를 읽음으로써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시기에 대한민국 민초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볼 수 있으며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통하여 한국전쟁의 비극과 극심했던 이념 대결을 마치 그 시대를 살아본 것처럼 눈에 그릴 수 있지 않은가.


엘리프 샤팍의 소설 <이브의 세 딸> 역시 튀르키예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사실적으로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소설이라고 하겠다. 사실 튀르키예는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면 문학적으로 매우 낯선 나라인 게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참전국으로 정치적으로는 '형제국'이니 '우방'이니 하면서 매우 가까운 나라인 것처럼 말하지만 튀르키예의 종교와 문화 혹은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지 않을까 싶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엘리프 샤팍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과 영국, 요르단과 스페인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정치학자, 역사학자로서 튀르키예의 역사, 종교, 젠더 문제, 정치적 혼란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쓴다고 알려진 그녀는 이 책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역량과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날반트오올루 가의 구성원들이 튀르키예의 모든 국민들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작가는 그들 각자에게 하나하나의 집단을 대신할 수 있는 특징을 부여함으로써 가족 간의 갈등이 곧 현재 튀르키예가 처한 여러 갈등의 축소판일 수도 있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듯했다.


"페리는 창밖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물고기나 시인에게 일어났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삶의 슬픈 조각들을 찾아 조심스럽게 숨겨 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표, 냅킨, 동전을 모으듯이 그녀는 '슬픔 수집'을 했다."  (p.146)


소설은 날반트오올루 가의 막내딸인 페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날반트오올루 가에는 선박기관사이자 진보적 성향의 아버지 멘수르, 광신적 무슬림 원리주의자인 엄마 셀마, 좌익 성향의 큰오빠 우무트, 무슬림이자 극우 성향의 작은 오빠 하칸이 있다. 막내딸인 페리는 극과 극으로 대립하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만 아버지를 지지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진보적 성향의 큰오빠가 공산주의 가담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후 아버지인 멘수르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에 빠져 살게 되며 엄마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아버지를 좋아하는 페리는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평소 책을 좋아하던 페리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뜸해지면서 더욱 책에 빠져든다. 결국 페리는 그토록 갈망하던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영국으로 떠난다. 대학에서 페리는 이집트 출신의 미국인 학생 모나와 이란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한 쉬린과 어울리며 그녀의 인생 자체를 뒤흔든 아주르 교수를 만나게 된다.


"지적인 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것이 끝나면 변하고 다른 사람이 된다. 물론 옆에 있는 사람도 변한다. 자신의 의견을 재고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문제로든 누구와도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변화에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토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마음을 닫아 버릴 것이다. 기꺼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화할 수가 없다. 과거에 나는 이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렇다."  (p.281)


소설은 아드난의 아내이자 딸 데니스의 엄마가 된 2016년 현재의 페리와 1980년대 유년 시절의 페리에서부터 2000년대 대학생이었던 과거의 페리를 교차하여 서술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페리가 대학생이 되기 이전의 시기에 있어서는 주로 날반트오올루 가의 가족 구성원들을 통한 종교와 이념의 갈등 문제, 빈부 격차와 정치적 혼란 등 튀르키예 내부의 문제가 거론되며 페리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튀르키예 외부에서 바라본 여러 문제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둘째 오빠 하칸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순결을 문제 삼아 처녀성 검사를 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나 9.11 테러를 바라보는 시각 등 문화와 전통이라는 탈을 쓰고 자행되는 구시재적 관습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특히 페리가 아주르 교수의 수업(신에 대한 철학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토론식 수업)에 참여하면서부터 깊어지는 이브의 세 딸들(페리, 쉬린, 모나)의 관계와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흥미롭다.


"그녀는 쉬린처럼 용감하지도 못했고, 자신감도 없었다. 그리고 모나처럼 독실하지도 않았고, 지구력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페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p.494)


소설은 그렇게 끝을 향해 간다. 그럼에도 갈등은 봉합되거나 잘 마무리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내내 온갖 갈등과 분열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누군가에 대한 애착이 깊어져 서로를 '영혼의 단짝'인 양 기억할지도 모른다. 삶의 아이러니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종국에는 조금씩 닮아간다는 점이다. 시간이라는 믹서기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잘게 부서지고 또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뒤섞이곤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지켜나간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신의 내면에 남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할 수 있는 단 한 톨의 정체성을 지켜낸다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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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습니다. 몸 안에 스미는 공기도 더없이 맑고 깨끗한데 다만 코끝을 스치는 쨍한 추위가 어깨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가뜩이나 명절 연휴 이후의 하루는 더욱 고되고 힘든 시간인데 동장군의 기세가 희미하게 남은 의욕마저 꺾어버립니다. 다 올랐다 싶은 산의 정상에서 가파른 계단을 만난 셈입니다. 삶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의외의 현실로 인해 무너지곤 하는 법이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이것은 다만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명절 연휴의 마지막날이었던 엊그제 새벽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입 재수를 한 3명의 친구들을 위로하는 차원인지, 아니면 그들보다 1년 먼저 대학 생활을 경험한 선배로서의 입장인지 나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3박 4일 일정의 여행 계획을 세워 나에게 알렸을 때, 아비로서 혹은 삶을 먼저 살아 본 선배로서 거절할 명목은 딱히 없었던 듯합니다. 물론 아껴 쓴다고는 하지만 만만치 않은 여행 경비가 부담이 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아들은 일본 여행 다음으로 제주도 여행이 잡혀 있습니다. '2023 제2회 전국 장애·非장애 대학생 창업경진대회' 참가 목적으로 2월 7일부터 2월 10일 일정의 제주도 여행이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대학 여학생의 코딩 과제를 도와준 인연으로 함께 대회에 참가하자는 제안을 받고 얼떨결에 참가하게 된 행사인데 오프라인에서 미처 얼굴도 보지 못한 팀원들과 잘 지내게 될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게다가 팀원들 대부분이 여학생들인 듯한데 숫기 없는 아들이 어떻게 버텨낼지...


이번달에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생각자도 못한 도시가스요금 청구서를 받았던 일입니다. 집에서는 겨우 잠만 자고 나오는 나에게 있어 도시가스는 난방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비해 2배 이상 오른 고지서를 받고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습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던 듯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1년에 월급이 2배씩 오르는 것도 아닌데 생활 물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니 대통령 하야 투쟁이라도 해야 할 듯합니다. 지하철 요금, 도시가스 요금, 전기 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은 우리와 같은 서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하늘은 맑고 동장군의 기세는 매섭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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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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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소설은 감각적인 반면 관념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곧 가독성을 중시하는 작가의 성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지적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소설가는 대개 관념적인 글에 매료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고, 작가와 독자들 사이의 간극이 멀어지는 지점도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 발현되는 시기라는 걸 작가들은 잘 모르는 듯하다. 독자들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관념적인 성향에 매몰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고상하고 우아한 어떤 지식인을 닮아가는 양 생각하는, 일종의 지적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리고 마는 소설가들을 나는 많이도 보아 왔다. 독자들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그들은 대개 세상이 자신의 재능을 몰라준다고 원망하는 데 자신의 시간을 탕진하곤 한다.


"우리가 사는 건물에 도착해 보니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고장나 있었다. 혹시 엘리베이터를 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인생이 선택에 달렸고 우리가 택한 길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잇지만 그건 순 헛소리다. 이 일만 봐도 알 수 잇다. 계단으로 올라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나 우리가 3층에 도착할 거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가혹한 운명이 장난을 걸어오면 어느 길을 택하든 똑같은 곳에 다다르게 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p.15)


스티븐 킹의 소설 <나중에(LATER)>는 어린 소년 제이미 콘클린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1인 작가 에이전시의 대표인 티아는 아들인 제이미를 돌보며 자신의 주 수입원인 작가들의 저작권을 관리한다. 어릴 적부터 죽은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제이미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직후부터 그 혼이 사라지는 며칠 동안만 대화가 가능하며, 이때 혼령들은 진실만을 답한다고 어머니인 티아에게 말했었다. 이런 아들의 능력을 반신반의하며 기이하게 생각하던 티아는 이웃에서 사망한 노부인(버켓 교수의 부인)이 숨겨둔 반지의 위치를 정확히 듣고 찾게됨으로써 아들의 능력을 확실히 믿게 된다.


2008년 리먼 사태에 휘말려 가세가 기울게 된 티아는 사무실을 외곽으로 옮기고, 씀씀이도 줄이면서 힘겹게 에이전시를 운영한다. 그녀가 의지할 만한 구원처는 시리즈물 베스트셀러 작가인 토머스가 유일했다. 그러나 토머스 씨는 그의 베스트셀러 시리즈의 완결편인 <로아노크의 비밀>을 쓰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게 되고, 선인세까지 지불한 마당에 책을 출간하지 못하면 파산에 이르게 될 지경에 처한 티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죽은 혼령과 대화할 수 있는 아들의 능력에 기대를 걸게 되는데...


티아의 가까운 친구인 리즈 더튼은 뉴욕 경찰청에 근무하는형사인데, 어느 날 그녀의 여벌 제복에서 코카인이 발견되고 티아는 이 일로 불같이 화를 낸 후 그녀와 결별한다. 마약 운반에 개입되어 있던 더튼 형사는 동료들의 눈밖에 난 상태였고, 직장에서도 해고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더튼 형사는 폭발물을 설치한 후 자살한 테리올트의 행젖을 쫓는다. 폭발물이 설치된 정확한 장소만 알 수 있다면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고는 면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더튼 형사는 자신의 차에 제이미를 강제로 태운 후 테리올트의 혼령을 찾아 떠난다. 총기 자살로 엉망이 된 얼굴의 테리올트 혼령을 만난 제이미는 그 끔찍한 형상에 놀라 달아나고 싶었지만 더튼 형사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한다. 더튼 형사는 결국 폭발물이 설치된 장소를 제보함으로써 자신의 직장을 지키게 된다. 그러나 일주일이면 사라질 줄 알았던 테리올트 혼령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나타나 제이미를 괴롭힌다.


"나는 귀갓길에도 줄곧 (그때쯤에는 이미 버릇이 되어서) 태리올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그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주 좋은 징조였으나 사실 놈이 영원히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은 포기했다. 놈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잇는 불쾌한 존재였다. 그저 내가 대비하고 있을 때 놈이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p.206)


제이미를 괴롭히는 테리올트와의 문제를 그 누구에게도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던 제이미는 결국 예전에 살던 집의 이웃이었던 버켓 교수를 찾아간다. 사망한 부인의 반지를 찾아주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자세히 전해 들은 버켓 교수는 제이미에게 해결책을 알려준다. 그리고 제이미는 실행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테리올트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직장에서 해고된 더튼 형사가 다시 제이미를 찾아와 협박을 함과 동시에 자신의 일을 도와줄 것을 강요하게 되는데...


"어린애로 산다는 건 불리한 점이 많다. 잘 들어보길 바란다. 그중에 세 가지만 꼽으면 여드름, 학교에서 비웃음을 안 사려면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결정해야 하는 고뇌, 수수께끼 같은 여자아이들이다. 도널드 마스든의 저택에 다녀온 후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납치 사건 이후) 나는 어린애라는 사실이 유리할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리에서 기자들과 TV 카메라의 난투극을 겪을 일이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내가 직접 출석해서 증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p.332)


내일부터는 민속 최대 명절이라는 설 연휴가 시작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거나 들어보았을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이번 연휴에 그의 작품 한두 권쯤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캐리>, <샤이닝>,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븐>,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등 그는 공포 소설 뿐 아니라 SF, 판타지, 서스펜스를 넘나드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까닭에 독자들의 선택지도 충분하지 싶다. 1947년생인 작가가 지금도 여전히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지만 천생 작가인 스티븐 킹의 소설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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