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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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참 예쁜 책이다.  손으로 '쓱'하고 문지르면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 가득 전해질 것 같은.

이 책 <채링크로스 84번지>는 미국의 무명 극작가 헬렌 한프와 체링 크로스 84번지에 위치한 영국의 고서점 마크스 서점 직원들과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책을 매개로 서로의 얼굴도 모른 채 오랜 세월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았던 가슴 따뜻한 편지들로 기득하다.  광고를 보고 우연히 맺어진 인연.  헬렌 한프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토요문학 평론지에 실린 귀하의 광고를 보니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셨더군요.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 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  여기서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아주 고가의 희귀본이나 아니면 이것저것 끄적여 놓은 반스앤드노블스의 학생판으로밖에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절박하게 구하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목록 중 깨끗하면서 한 권당 5달러가 넘지 않는 중고 책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구매 주문으로 여기고 발송해 주시겠습니까?"     (1949년 10월 5일자 편지)

 

서점의 직원들은 조금은 까다로울 수 있는 그녀의 주문 조건에 맞춰 그녀가 원하는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 보낸다.  생면부지의 고객, 게다가 런던에서 뉴욕은 지리적으로 수천 키로나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닌가.  서점의 직원들은 그 한 명의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듯 보였다.  편지가 계속되면서 그들은 고객과 직원이라는 관계를 뛰어 넘어 마치 멀리 떨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듯한 살가운 관계로 발전한다.  때로는 서로를 걱정하고, 때로는 내 일처럼 기뻐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편지는 계속되었다.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하는 사람의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서점상의 따뜻한 마음의 교감은 이들의 편지를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애써 보내준 책에 대해 "세상에 무슨 이런 사악한 신약성서가 다 있어요?" 라고 불평하는 구입자 헬렌 한프. 그 물음에 친절하게 다른 성서를 찾아보겠다고 답하는 서점상 프랭크는 성실한 태도로 그녀의 온갖 불만과 요구에 응답한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하고 외쳤답니다."

 

이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의 영국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직후였으니  많은 이들이 국가의 배급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굉장히 곤란한 지경이었고, 이 재치있는 서적 구매자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건달걀과 햄 세트를 서점 직원들에게 보내는 등 따뜻한 마음을 베푼다.  그리고 그녀의 이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한 서점 직원들은 그녀가 요구하는 서적들을 정성껏 보내 주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보답한다. 물론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작은 편지도 함께 말이다.  심지어 달리 감사의 선물을 구할 수 없었던 서점 직원들은 동네 할머니가 수를 놓은 식탁보를 보내기도 한다.  이에 감동한 헬렌은 그 할머니께도 선물을 보냈다.

 
"친애하는 한프 양, 저는 마크스 서점에서 2년 가까이 도서 목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소포를 보내 주실 때마다 번번이 한몫을 나눠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 빌 험프리스 드림"  

"친애하는 한프 양, 소포에 대한 인사가 없어 혹시 뭐가 잘못된 건 아닌지 염려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를 감사도 모르는 패거리로 생각하셨겠지요. 사실은 제가 그동안 안쓰럽게 바닥난 재고를 채우기 위해 교양 있는 가정을 찾아 전국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중략)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오늘 서적 우편으로 작은 책을 한 권 부쳤습니다. 부디 한프 양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애 시집을 한 권 찾아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글쎄요, 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습니다. - 마크스 서점 프랭크 도엘 드림"

 

이 가슴 따뜻한 편지들을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지 않을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비록 가난한 무명작가로 살았지만 헬렌은 프랭크의 딸과 부인에게도 선물을 보내곤 했다.  영국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던 헬렌이었기에 서점 직원들과 프랭크의 가족들도 그녀의 방문을 무척이나 기다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헬렌은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 끝내 방문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직 책을 매개로 서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며 따뜻한 마음을 나눌 뿐이었다.  짤막한 편지들을 모은 이 책이 가치 있는 까닭은 책과 책을 둘러싼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들의 글을 통해 스미듯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20여년 간이나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의 글은 세월을 지난 지금에까지 많은 의미를 전한다.  이 오래된 편지 교환은 마크스 서점의 오랜 지킴이 프랭크 도엘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프랭크가 죽고 그녀가 출판을 결심했을 때 성인이 된 프랭크의 딸은 흔쾌히 응한다.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한 헬렌의 애도는 영국인 친구에게 보낸 그녀의 편지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 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 허름한 거리의 작은 헌책방에서 알 굵은 돋보기 안경 넘어로 그윽한 시선을 보내주던 아주 오래전의 풍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꽃샘 추위를 녹여줄 따뜻한 마음이 그리운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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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오유란 옮김, 베아트리체 리 그림 / 오래된미래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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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구성의 소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특한 문체와 표현으로 꾸며진 그런 소설이다.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석 달쯤 지냈을 때 맡게 되는 매케하고 칼칼한 먼지 냄새가 난다고 할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치 장마 기간의 축축하고 눅눅한 대기 속에서도 내 옷을 털면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릴 것만 같은 그런 소설이다.  내가 느끼는 작가의 분위기는 그랬다.


불행하지도 않으면서 불행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정신과 의사를 하는 꾸뻬씨.
책에서는 중국을 제외하고 다른 지명은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정신과 의사가 가장 많은 나라’와 같은 표현에서 그것이 미국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이런 표현은 마치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여행을 떠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제 독자로서의 임무를 잊고 작가 또는 꾸뻬씨와 같이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의 한 무리가 되는 것이다.


여행은 먼저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익숙한 일상과의 이별이 그것이다.  쿠뻬씨가 자신의 연인 클라라와 이별하듯이.  꾸뻬씨는 자신이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  <푸른 연꽃>에 나오는, 무척이나 지혜로워 보였던 중국 노인은 행복의 비밀을 알고 있을 것만 같아 그런 노인을 찾고자 중국으로 떠난다.
아,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이 여행의 목적은 행복의 비밀을 찾는 것이다. 


성실한 꾸뻬씨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얻은 행복의 비밀도 꼼꼼히 메모한다.  중국에는 그의 고등학교 친구 뱅쌍이 은행에서 근무한다.  꾸뻬씨보다 일곱 배나 많은 돈을 버는 뱅쌍은 늘 일에 묻혀 산다.  자신이 목표하는 삼백만 달러를 위하여.  뱅쌍은 꾸뻬씨에게 고급 술집에서 일하는 잉리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소개해 주고 꾸뻬씨는 그 여인과 사랑을 나눈다.  여행은 가끔 자신의 이성에서 벗어나도록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꾸뻬씨는 한 사원에서 자신이 찾던 노승을 만나지만 그 노승은 꾸뻬씨가 모든 여행을 마친 후에 다시 찾아오라고 당부한다.   꾸뻬씨는 가난한 흑인의 나라로 가는 비행기에서 자신과 같은 정신과 의사인 마리 루이즈를 만나고 그 나라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치료하는 꾸뻬씨의 친구 장 미셀을 만난다.  여전히 메모는 계속된다.  우리는 그가 정신과 의사임을 주목해야 한다.


꾸뻬씨는 루이즈의 초대를 받아 그녀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노상강도에게 차량과 함께 납치된다.  그들의 포로가 되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꾸뻬씨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고 그가 살던 세계에서 가장 정신과 의사가 많은 나라로 향한다.  그는 기내에서 아픔을 호소하는 환자 자밀라를 치료한다.  그녀는 자신의 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생각한다.  꾸뻬씨는 이제 정신과 의사가 많은 나라에서 고등학교 때 자신이 좋아했던 여자 친구 아녜스와 그녀의 남편 제이크를 만난다.  그리고 심리학을 연구하는 아녜스의 주선으로 행복을 연구하는 위대한 교수 던칸을 만나게 된다.  꾸뻬씨는 자신의 메모를 그 위대한 교수에게 보여주고 많은 대화를 나눈다.  여행을 마치고 꾸뻬씨는 다시 중국의 노승과 만난다.  여기서 잠깐 꾸뻬씨의 메모를 훑어보자.


배움1- 행복의 첫번째 비밀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배움2- 행복은 때때로 뜻밖에 찾아온다.
배움3-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 오직 미래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배움4- 많은 사람들은 더 큰 부자가 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배움5- 행복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산속을 걷는 것이다.
배움6- 행복을 목표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배움7- 행복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배움8- 불행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다.
배움9- 행복은 자기 가족에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배움10-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배움11-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이다.
배움12-좋지 않은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기가 더욱 어렵다.
배움13-행복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배움14-행복이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배움15-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배움16-행복은 살아 있음을 축하하는 파티를 여는 것이다.
배움17-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다.
배움18-태양과 바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배움19-행복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배움20-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
배움21-행복의 가장 큰 적은 경쟁심이다.
배움22-여성은 남성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더 배려할 줄 안다.
배움23-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꾸뻬씨는 자신이 그동안 적어왔던 메모지를 노승에게 보여 주며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나 노승은 그가 마음공부를 훌륭히 해냈다고 칭찬하며 그저 같이 걷자고 권한다.   "진정한 지혜는 이 풍경속에서 한 순간에 발견할 수도 있고, 아니면 언제까지나 깊이 감추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노승의말에 꾸뻬씨는 자신이 노승과 함께 바라보는 자연에서 새로운 배움을 얻는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아, 나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꾸뻬씨와 그의 연인 클라라, 친구 뱅쌍과 잉리, 장 미셀, 아녜스와 남편 제이크의 뒷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에 내가 느낀 배움 한 가지를 덧붙이며 끝맺고 싶다.
배움24-행복은 결코 특별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평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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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유난히 포근했습니다.

그늘에는 아직 도시의 검은 때를 뒤집어 쓴 잔설들이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데도 말입니다.

팔랑거리는 바람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화단 가득한 철쭉의 여린 가지에는

어린 잎들이 뾰족뾰족 머리를 내밀더군요.

 

이번주에는 휴일이 하루 끼여있어

한주가 빠르게 흘러갈 듯합니다.

게다가 다음 주 월요일이면

입학식과 더불어 대부분의 학교가

개학을 할 테니 학생을 둔 집에서는

개학 준비로 이래저래 분주하겠지요.

 

가뜩이나 짧은 2월이 싱겁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지나고 나니

되레 그리워질 듯합니다.

계절에 앞서 몸도 마음도 나른해지는 걸 보니

성급한 춘곤증이 몰려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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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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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서점 나들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 라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그러나 새책의 책장을 넘길 때 속살을 내보이는 것이 못내 부끄러운 숫처녀의 순결처럼 '빠닥' 소리를 내며 휘어졌다 펴지는 종이의 약한 탄력에도 야릇한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애서가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공통분모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서점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 열심히 읽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또는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만이라도 알고 싶은 지나친 갈증이 하나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도 오랫동안 책을 사랑한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좋아하게 된 시기가 언제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육남매의 다섯째였던 나는 도회지에 나가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다녔던 형이나 누나들과는 달리 여동생과 나는 부모님과 함께 시골에서 살았다.  그때만 하더라도 늘 술에 취해 사셨던 아버지와 하숙을 쳐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과 별 말씀이 없으셨던 할머니는 내가 속했던 반쪽의 가족 구성원이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한 날이면 언제나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그 대상이 어머니였다가 다음으로 나와 여동생에게 급기야는 이를 제지하시는 할머니에게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발걸음이 늘 무거웠다.  나는 집에 들러 가방만 벗어놓고 밤이 늦을 때까지 친구네 집을 돌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의 손찌검을 피해 밖으로 돌면서도 집에 남아 있는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잊고 지낼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불안감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친구네 집에 있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우리집에는 책이라곤 거의 없었지만 내가 방문하여 시간을 보냈던 여러 친구들의 집에는 읽지 않은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아버지의 폭력 덕분이었다.  나는 현실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책이 좋았다.  언젠가 한 번은 작은 서점 앞을 지나다가 나도 크면 서점 주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생계도 유지하면서 평생 책을 읽으며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중학교 때 도시로 나와 형과 함께 자취를 하면서도 책을 좋아하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보고 싶은 책을 구입할 수는 없었지만 도서관 근처에 살았던 까닭에 맘만 먹으면 언제든 책을 빌려 볼 수는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내 손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은 이제 독서의 즐거움과 함께 소장의 기쁨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내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르곤 했던 작은 서점이 있었다.  지하철역을 막 빠져나와 골목길로 접어드는 초입에 위치했던 그 서점은 유리 안쪽의 실내를 환하게 밝혀 놓은 채 나를 유혹하곤 했다.  지금도 나는 아들과 함께 하는 서점 나들이를 좋아한다.  매대에 쌓인 신간들을 둘러 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배가 고플 때까지 책을 읽는 재미와 책에 빠져 내게 눈길도 주지 않는 아들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최적의 약속 장소였던 대형 서점의 나른한 시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루이스 버즈비'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책을 좋아하여 서점 직원으로 10년, 출판사 외판원으로 7년을 보냈고, 지금도 일주일에 다섯 번은 서점엘 간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산호세의 작은 서점 ‘업스타트 크로 앤드 컴퍼니’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그곳에서 4년, '프린터스'에서 6년을 일하고 출판사 외판원으로 7년 등 삶의 대부분을 서점에서 보냈던 그는 이 책에서 탐서가로서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책과 서점의 역사, 위대한 출판업자와 출판의 역사 및 서점만이 갖는 독특한 분위기 등 그가 경험하고 느꼈던 전반적인 것들을 흥미롭게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디지털 세대를 살았던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그 느낌이 나와 다를지도 모른다.  그저 인터넷 클릭 몇 번으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 요즘, 굳이 시간을 따로 내어 서점을 방문하고, 번잡한 사람들 틈에서 몇 번이고 어깨를 부딪혀가며 책을 고를 까닭이 그들에게는 없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서점에서 보내는 느긋한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일상과 서점에서 나왔을 때 느끼는 약간의 허기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겪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도서 문화 literary culture 는 우리 사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역할은 막중하다.  사람들은 서점에서 그 문화를 만날 수 있으며 수천 년 동안 그치지 않고 흘러온 창조와 상상력의 강에 지류로 결합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도 이런저런 생각과 견해를 자유롭고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고, 또 그런 자리에 스스럼없이 끼어들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점이다.  서점에서우리는 많은 타인 속에 홀로 서 있는 외톨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타인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289~290쪽) 

 

작가가 지적하고 있듯 서점은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공간이라는 점에서 요즘의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야 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 속에 묻혀 사라져가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한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막 한글을 깨친 아이가 떠듬떠듬 책을 읽어내려가는 모습과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할아버지의 따스한 눈길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희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서점은 바로 그런 곳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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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걷고 싶은 길 - 길은 그리움으로 열린다
진동선 지음 / 예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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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까지 오느라 참 많이도 걸었다.

내가 걸었던 수많은 길.  산비탈을 올라 종국에는 숲으로 이어지던, 아침이면 학교로 이어지는 폭이 좁은 그 길에서 길섶의 아침 이슬에 바짓단이 함초롬히 젖던, 미루나무 길게 늘어선 신작로길에 뽀얀 먼지가 일고 한낮 찌울매미 서럽게 울던, 그리고 한겨울 눈보라에 손을 호호 불며 걷던 그 많은 길들이 이제는 내 마음속 상상의 길이 되고 말았다.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길섶에 수더분히 놓인 생명 하나와도 인연을 맺고 싶었던 그 아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저녁 습기로 풋풋한 그 길에서 문득 하늘을 보면 성깃성깃 별들이 돋아나고 있었는데...

 

진동선 작가의 <그대와 걷고 싶은 길>은 얇은 책이다.  대도시 뒷길이나 휑한 뒷골목을 20년 넘게 찍어오고 있다는 작가.  누구에게나 길은 인간으로서 갖는 숙명적인 고독과 미지에 대한 동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뽀얗게 타는 햇살의 여백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듯한 그리운 추억들을 마음껏 그려보는 장소이기도 하다.  어릴 적 아스라히 보이던 언덕 너머의 먼 미래를 꿈꾸던 장소이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작가가 길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런 보편적 그리움에 더하여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했다.

 

"길을 통한 고독과 그리움의 풍경은 아무래도 누님과 관련이 깊다.  시집살이를 못 견뎌 친정으로 도망쳐온 누님이 신작로에서 울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길에 대한 강한 낙인이다.  자갈밭 신작로에 드문드문 전봇대가 휑하게 서 있던 그날의 길 풍경을 잊지 못한다.  이후로 신작로와 전봇대가 늘 눈에 들어오고 지금도 그런 풍경 앞에서 목이 메는 까닭은 누님이 안긴 유년의 상처이다."    (6쪽)

 

이 책에서 작가는 파리의 뒷골목, 이태리 볼테라의 시골길, 독일의 로맨틱가도 등 아름다운 길들을 찍은 사진과 그 길에서 건져올린 사색의 알갱이들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짧은 글귀들이 전하는 울림을 생각하노라면 다음 장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가 멍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면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옛날의

 

인생에는

가고 싶지 않은 길도 있고,

돌아보고 싶지 않은 길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길을 가야 한다면

그것은 아픔이다.

 

아픔은 '어쩔 수 없음'에서 온다.

사랑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그럼에도 다시 그 길을 가야 한다면

그것은 한때 모든 걸 걸었던

아름다웠고 사랑했던

그 옛날의 시작 때문이다.

    (31쪽)

 

 

 

바야흐로 봄이다.

아침에 내가 보았던 공원 벤치에는 봄햇살에 살포시 젖는 사람들과 그 앞에서 줄넘기를 하며 깔깔대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휘감아 도는 산책로와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있었다.  사는 것이 아픔이라면 아픔 한 조각쯤 가슴에 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아픔을 보듬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것이 끝을 알 수 없는 이 길을 걷는 이유가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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