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부부로 지낸 지 꽤 오래되었다.

그런 처지이다 보니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의 소소한 일상은 주로 아내의 입을 통하여 전해 듣게 된다.  가끔씩 '지금과 같은 아들의 모습은 다시 오지 않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면 아쉬운 마음에 금방이라도 달려가고 싶어진다.  무엇 때문에 사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최근에 아내에게 들었던 아들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하고 싶어 기록해 둔다.

 

#1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는 식으로 딱 부러지는 것을 좋아하는 아내는 아들의 시큰둥한 대답에 번번이 짜증을 내곤 한다.  특히 시간에 쫓기는 아침이면 그 정도는 더하다.  가령 아들과 아내는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가게 마련이다. 

"0 0 아,  밥 더 줄까?"

"아니, 괜찮아."
"괜찮아가 뭐야.  더 먹겠으면 더 달라고 하고, 그만 먹겠으면 안 먹는다고 하면 되지.  더 줘, 말어?"

그제서야 아들은 "그만 먹을래." 한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아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었나 보다.

"엄마가 그렇게 대답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래?  잊어먹었어?"

이 물음에 대한 아들의 대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음...  그렇게 말하면 매정한 느낌이 들어."

요즘도 아들은 괜찮아라고 답한다.

 

#2 

아들은 요즘 체스 게임에 푹 빠져 있다.

체스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실력이야 아직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게다가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고 여기 저기서 줏어 들은 것이니 오죽하겠는가.  얼마 전에는 체스를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와 체스를 두었었나 보다.  결과는 모르긴 몰라도 처참했었겠지.  화가 난 아들은 친구와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었다고 했다.  그 이후 체스에 관련된 책을 사달라기에 <체스 교과서>라는 책을 사주었다.  아들은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컴퓨터와 체스 게임을 즐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험이 코앞인지라 아내는 아들에게 컴퓨터 그만 하고 수학 문제집도 풀고, 다른 과목도 복습을 좀 하라고 했나 보다.  아내가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아들은 갑자기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 오늘 내가 처음으로 체스에서 컴퓨터를 이겼어!"

이에 아내가 "오늘?" 하고 재차 묻자 자신의 잘못을 감지한 아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더란다.

컴퓨터를 안 하고 문제집을 풀겠노라고 철썩같이 약속했는데 너무나 신이 나서 그만 깜박했었지 뭔가.

아내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더 이상 채근을 하지 않고 아들의 말을 들어주었더니 아들 왈,

"그래도 컴퓨터는 착한 것 같아.  졌는데도 '축하합니다.'라고 해."

 

#3

아들의 친구 중에 승주라는 아이가 있다.

밝고 활달한 성격인지라 친구들도 많은 아이다.  그런데 아이의 장난끼가 차고 넘쳐서 학교에서 여학생들을 번번이 놀려대나 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어렸을 적에도 그런 친구들이야 한 반에 한두 명쯤은 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남자 아이들에 비해 여학생들의 성장이 빠르니 힘으로나 덩치로나 남학생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아이는 여학생을 실컷 놀려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때마다 여학생에게 붙들려 맞는다고 한다.  그래도 여전히 놀려대고.

아내에게 아들이 말하기를,

"요즘은 남자가 놀리고 여자가 때리는 시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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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
로스 도널드슨 지음, 신혜연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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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였던가.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8월의 어느 날 나는 뉴질랜드 남단 퀸스타운 근교의 카와라우 다리 (Kawarau Bridge) 한 복판의 점프대에 서 있었다.  같은 교실에서 낯선 언어를 배우는, 국적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인 그들과 함께.  방학이었고 가족과 멀리 떨어진 나와 그들은 적당히 길들여진 호주의 하늘을 갑갑해했다.  우연은 항상 자극적인 무엇인가에 끌리곤 한다.  트레킹이 목적이었던 우리가 '번지점프'로 발길을 돌렸던 것도, 구경만 하자던 우리 모두의 생각이 '그래도 한 명은...'의 느닷없는 결정으로 돌변한 것도.

 

나는 그렇게 점프대에 섰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처럼 숨을 깊게 들이쉬었고,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강물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곁에선 매캐한 먼짓내를 풍기던 안내 요원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던 나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그의 억센 팔로 붙잡았고, 그 순간 멀리 남반구의 하늘이 잿빛으로 어두워졌었다.  안내 요원의 카운트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했었다.  나는 차마 밑을 보지 못한 채 먼 하늘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쩌면 누군가의 힘에 떠밀렸는지도 모른다.  결국, 먼지처럼 가벼워진 두려움은 강물을 스치는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가끔 도저한 운명의 손아귀에 우연처럼 떨어질 때가 있다.  <청년의사, 죽음의 땅에 희망을 심다>를 쓴 로스 로널드슨도 그랬는지 모른다.  1969년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라사에서 발생한 치사율 90%의 괴질병인 '라사열'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 질병인지 미리 알았더라면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향하던 그의 발길은 한번쯤 주춤 멈추었을지도 모른다.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처음에는 감기나 독감 증상으로 시작하지만 이후 몸 전체에서 체액이 흘러나와 호흡기 장애나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저자는 설치류의 일종인 다유방쥐의 분비물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되는 것으로 알려진 라사 바이러스의 연구를 위해 위험천만의 땅, 시에라리온을 향해 떠난다.   친구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시에라리온 케네마에 위치한 라사병동에서 평생을 의료구호와 라사 바이러스의 치료 및 연구에 몰두했던 애니루 콘테 박사를 만난다.

 

라사 병동에서 콘테 박사와 라사열 사례의 기초 치료를 익혀가던 로스는 어느 날 타지역으로 세미나를 떠나는 콘테 박사를 대신해 라사 병동을 맡게 된다. 그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려 자신의 결정에 목숨을 건 환자들에게 해를 주지는 않을지, 누군가 자신의 어설픈 진료 행위를 탓하지는 않을지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지은이는 환자들과 의료진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열악한 진료 시설과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간호사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는 생명을 지키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 당시에는 의학도의 입장이었지만.  저자는 자신이 라사 병동을 맡게 되었던 순간을 이렇게 썼다. 

"나는 멍한 상태로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어스레한 길 위에서, 나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누가 지나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시아, 빈타, 니니, 그리고 내 책임하에 있는 모든 환자들이 러시안 룰렛 게임처럼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죽음의 운명이 과연 누구의 얼굴에서 멈출지 불안했다."    (p.189)

 

저자는 자신이 맡게 된 라사 병동의 환자들, 라사열 치료에도 불구하고 포도상구균의 감염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두 살배기 시아와 라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린 임산부 등을 치료하는가 하면 원인도 모른 채 죽어 나가는 많은 환자들을 가슴 아파 하기도 한다.  잦은 내전과 고질적인 가난의 굴레 속에서 생명은 너무나도 여리고 하찮은 것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어린 임산부의 아이를 간호사는 당현하다는 듯 엄마에게서 떼어 놓는다.  저자는 그런 모습에 분노하고 그 어린 생명을 살리고자 노력한다.  결국 아이는 살아나고 병원이 떠나가라 울기도 한다.    

 

"비극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연적인 부분이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비극적인 사건들은 종종 인간이 지닌 최악의 본성에서 비롯되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의 최선을 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살고자 하는 희망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희생자와, 이기적인 보상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고귀한 삶을 바치는 의료 종사자들을 만나는 특권을 누린다."    (p.382)

 

콘테 박사가 복귀하고 저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짧다면 짧았을 여정을 무사히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심근염으로 병원에 입원한다.  이 책은 그가 환자로 지내던 그 기간에 옮겨 적은 것이다.  책의 내용은 저자가 시에라리온에 도착했던 순간부터 미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치력의 부재와 그로 인한 가난, 질병의 만연은 한 생명을 너무도 쉽게 앗아가곤 한다.  그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던 저자는 내가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번지점프를 했던 그 순간을 떠오르게 했다.  삶이 던져준 우연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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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책 읽기 - 그 시절 만난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시계를 바꿔놓았다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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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우리의 잘못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불가항력적인 어떤 것들 말이다.  삶을 거슬러 올라가면 탄생부터가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고 항변하겠지만 신의 뜻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은 예외로 치자.  다만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가령 사랑이나 연애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흐르는 대상과 자주 부딪히다 보면 세상에는 정말 운명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하는 자조섞인 한탄을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움에 대해,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에 대해 조금은 더 무뎌질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러한 무감각을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야 얻을 수 있는 '뻔뻔스러움'이라는 무기를 하나 더 획득하게 되는 셈이다.

 

나는 요즘 '뻔뻔스러움'이라는 무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에게 있는 다른 수단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이르면 적당한 때에 최후의 방편이려니 하며 이 무기를 빼어들곤 한다.  젊었을 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가끔씩 되풀이하다 보면 그런 대로 스릴도 있고 꽤 유용한 면도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이런 낯 간지러운 상황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독자의 취향이나 편견을 예측하지 못하면서도(사실 예측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둥, 감동적인 내용이었다는 둥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경우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서평이 그렇다거나,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서평도 그러려니 하는 지레짐작은 하지 말기를.

 

독자가 쓰는 서평을 평론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나는 과거에 김현 작가의 평론을 즐겨 읽었지만 작가가 죽은 후 평론은 읽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블로그에 가끔씩 서평을 올리는지라 다른 사람의 서평은 자주 읽는다.  대개의 서평은 일반 독자에 의해 씌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렇게 씌어진 아마추어의 글에 딱히 장르를 부여할 수는 없겠지만 서평은 분명 평론과는 구별되는 면이 있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작품을 평가하는 것도 그렇고, 취향이 서로 다르니 호불호가 제각각인 점도 그렇다.  그러므로 어떤 서평에 대해 객관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 생각해도 한참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젊은 날의 책 읽기>는 서평집이다.  서평집에 대해 서평을 쓸 때마다 매번 당황하게 된다.  마치 내 글에 대한 셀프 서평을 쓰는 것 같아서 말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 책의 저자인 김경민 작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먼저 출판사를 보았다.  <쌤 앤 파커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출판사일 것이다.  사실 나는 책과 출판사를 모두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 기억력이라는 게 영 형편없어서 책의 제목과 지은이를 매치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그런 기억력으로 출판사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출판사를 기억하는 까닭은 최근의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이 출판사의 이름을 자주 보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였고, 출간되는 책을 신중히 고른다는 느낌을 받았기 대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쌤 앤 파커스'에서 출간한 책이기에 무작정 읽었다.  책의 내용은 의외로 좋았다.  단순히 주관적인 평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어줍잖게 프로 흉내를 내는 작가의 글은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편인지라 오히려 이런 책에 정이 간다.  서평의 대상이 된 책은 총 36권이다.  그 중 내가 읽었던 책은 8할을 조금 밑돌 것이다.  그래도 절반은 넘었으니 작가와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제인 에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등 워낙 유명한 책들도 눈에 띄었지만 내 눈을 반짝이게 했던 책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내가 힘들어 할 때 아내가 권했던 책이고,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는 도서관 서가를 기웃대다가 책의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다.  두 권 모두 책의 내용에 비해 이해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 책이다.  두 권의 책에 대한 저자의 평을 잠깐 들여다 보자.

 

"실제로 수용소의 포로처럼 모든 자유를 빼앗긴 인간에게 무엇이 남을 수 있었을까.  때로는 하루하루 생존에 몸부림치는 한 인간으로, 때로는 다른 이들을 조용히 관찰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정신과 의사로 수용소의 삶을 견딘 저자는 단 하나의 자유는 분명 남아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질 것인지를 선택하는 자유였다.  오직 이 자유에서만 적절할 정도로 희미하고 가느다란 희망인 삶의 의미가 나왔던 것이다.  조각난 삶을 이어 붙이는 유일한 접착제인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평 中에서 p.72-p.73)

 

"카톨릭 신자인 나로서는 에버렛의 무신론자 전향에 100퍼센트 공감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뜨거운 존경과 지지를 보내고 싶다.  그는 그 전까지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편견, 신념, 가치관, 사고 체계, 보편 이론 등등을 완전히 버린 채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자신의 내면을 치열하고 정직하게 바라봤으니까.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다름을 이렇게 바라보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기에."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서평 中에서 p.279)

 

누군가의 말을 100퍼센트 이해하고, 100퍼센트 공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평을 쓰는 까닭은 나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공감을 구하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부차적인 이유로만 보여진다.  서평을 쓰는 사람의 자세는 본인이 먼저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이해하겠다는 선언이며 자신의 의지를 담은 자발적인 각서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블로그에 서평을 쓰면서도 내 생각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으려 애써왔다.  그에 앞서 내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받아들임'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경민의 글은 아주 화려하거나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지도 않다.  그렇다고 못 썼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는 말이다.  아직 풋풋함이 남아있다고나 할까.  저자도 언젠가는 프로 작가의 글처럼 화려한 수사로 책의 전全면을 메울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그저 맑음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쌤 앤 파커스' 출판사의 선택도 탁월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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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침 운동을 나서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밤새 뭔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주차해 놓은 차량의 유리에는 온통 알 수 없는 무늬들이 얼룩져 있었다.  잠들기 전, 그러니까 자정이 넘은 시각에 잠시 외출을 했던 나는 그 시각까지 하늘에선 그 어떤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내가 잠들었던 새벽녘의 짧은 시간 동안 비인지, 눈인지, 그 중간쯤의 어떤 것이었는지가 소리도 없이 내렸다는  얘기다.

 

산을 오르는 입구에는 침목을 박아 놓은 계단이 있다.  그 계단 위도 하얗게 얼어 붙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산의 중턱에 있는 묏등에도, 낙엽이 쌓인 숲 언저리에도 비인지, 눈인지, 중간쯤의 그 무엇인지가 하얗게 쌓여 있었다.  4월이라는 날짜 관념이 무색해졌다.  분홍빛 진달래의 눈인사도 오늘따라 차갑기 그지없다.  산에는 이제 제법 나뭇잎 티가 나는 새순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치장하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좁쌀만한 새순이 겨우 움을 틔웠었는데...  끝내 닭이 되지 않을 듯하던 병아리들이 어느새 중닭이 되어 나타나 어미닭 흉내를 내는 것처럼 뾰족한 새순은 어느새 그럴 듯한 나뭇잎이 되었다.

 

산의 능선에 있는 운동 기구와 나무 의자도 온통 얼어 있다.  윗몸일으키키대도, 철봉도, 평행봉도...  결국 나는 조금 더 걷기로 한다.  이렇게 오래도록 걷는 날에는 한동안 잊고 지내던 것들이 떠오르곤 한다.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삶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슬픔 뿐이야.  기쁜 일,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시답잖은 일들은 그저 삶의 양념에 불과해.  그런 것들은 쉬이 잊혀질 뿐더러 오래 기억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해.  우리가 삶의 경험에서 삼키는 것은 오직 슬픔 뿐인 셈이지.  그래서 우리는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눈물을 흘리는 거야.  처음과 끝을 슬픔으로 채우는 것은 중간 과정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고 볼 수 있지."

 

산을 내려올 때는 이미 해가 저만치 떠 있었다.  우듬지에서 녹은 물이 '후두둑 후두둑' 비처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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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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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한창이다.

무엇보다도 나같은 도시내기들에겐 문명에 의지하지 않은 채 온몸으로 계절을 체감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계절이 머무는 시간이 너무나 짧은지라 '아, 봄이 왔구나'하면 어느새 더위가 저만치서 손짓을 하곤 한다.  음미하기엔 턱없이 짧은 계절은 그래서 아쉽다.  나는 매년 까닭없이 봄을 앓는다.  멍하니 서서 창밖을 응시하는가 하면, 아직은 시린 벤치에 앉아 할 일을 잊기도 하고, 춘곤증과는 다른 의욕 상실의 무기력증을 며칠씩 안고 살 때도 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고는 해도 딱히 농사를 지어 본 경험도 없는데 매년 봄이면 아련한 향수처럼 시골 생활을 그리워 하는 걸 보면 내 몸의 어느 한 편에 밀알처럼 작은 유전자가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매년 봄이면 습관적으로 찾아 읽는 책이 있다.  모든 일을 작파하고 당장 시골로 갈 수도 없는 처지인지라 약간의 대리 만족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누군가의 '시골 생활기'를 읽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은 책만도 줄잡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권수를 넘어선 걸 보면 나의 도시 생활도 꽤나 힘들고 고단했나 보다.

 

이런 나의 봄앓이를 부채질한 것은 며칠 전에 걸려온 큰형의 전화였다.  막 선잠이 들었던 나는 취기어린 형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고, 횡설수설하며 길게 이어지는 통화에 '나쁜 소식은 아니구나'하며 안도했었다.  그날 형은 자신이 퇴직하면 홍천에 가서 살겠노라고 했다.  그것이 현실 가능한 계획인지, 아니면 큰형 혼자만의 바람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형에게도 나와 다르지 않은 시골 유전자가 갑자기 되살아났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형의 통화는 배터리가 다 소모되어 '뚜뚜' 소리를 내다 강제 종료될 때까지 이어졌었다.

 

내가 읽은 시골 생활기 중에 단연 으뜸은 야마오 산세이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다.  그 외에도 여러 권의 책을 읽었지만 마음에 와 닿는 책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도 생각나는 책이 있다면 오병욱의 <빨간 양철지붕 아래서> 정도가 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올해 또 다른 책을 골라 읽었다.  책의 제목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KBS 1TV <인간극장>에 출연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하는데 나는 기억에 없다.  남편과 아내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출신의 엘리트로서 더 잘 알려져 있는 듯했다.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Part 1 우리는 행복을 선택했다"에서는 시골 생활을 선택하게 된 경위와 무주 '나무네 집'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이 씌어져 있고,  "Part 2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는 무주에서의 삶이, "Part3 결혼은 또 다른 연애의 시작"에서는 부부가 24시간 붙어서 사는 시골 생활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Part4 공감공락共感共樂 "에서는 부부의 가치관이 실려 있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지금 행복을 선택한다.” 는 말은 그들이 시골로 가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였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들의 용기와 결단력이 마냥 부럽기만 하고 부부의 선택에 박수와 응원을 아낄 마음은 없지만, 최고 학벌을 지닌 부부였기에 가능한 결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천박한 의심도 아니 할 수가 없다.  어쩌면 그들은 설령 시골 생활에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든 도시로 다시 돌아와 남들만큼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부부의 근황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지금은 제주도에 정착하여 작은 펜션을 운영하며 '바람 도서관'이라는 작은 도서관도 개관한 모양이다.  귀농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들만의 팁과 노하우가 자세하게 씌어져 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 비교적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한 장면은 어느 해 가을의 모습이다.  드문드문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가는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나는 누렇게 마른 갈대밭에 누워 서걱이며 지나는 바람과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던 갈대 머리와 배경처럼 흐르던 흰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길게 멈추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 장면 속에 평생의 '평화'를 담았다.  나의 피 속에 시골 DNA가 심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지 싶다.  나는 올해도 심하게 봄앓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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