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 - 달동네 외과의사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
최충언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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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날씨가 흐리거나 비라도 오는 날에는 몸만 헛헛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방금 전에 점심을 먹고서도 돌아서면 금세 허기가 지는 것처럼 가족이나 친구들과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고서도 돌아서면 무언가 허전하여 채 오 분도 지나기 전에 책을 잡게 되니 말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 까닭에 장마철이면 나는 항상 여분의 책을 준비해 두곤 한다.  오늘 읽은 <달동네 병원에는 바다가 있다>도 그 여분의 책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책이라는 것이 다 읽기 전에는 그 진가를 알기 여려울 때가 많은 물건인지라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는 허더분하다.

 

새벽에 비가 내려 자연스레 손이 간 이 책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태석 신부님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떠오르게 했다.  의사이면서 사제이셨던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오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기록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읽으며 나는 읽는 내내 눈물을 찔끔거렸었다.  이 책의 저자인 최충언님도 의사이다.  정확히 말하면 외과의사이다.  저자는 부산 송도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달동네에서 의사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그들과 정을 나누었던 이야기를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구호병원은 이름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자선병원입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돈 걱정 않고 치료받을 수 있고, 나는 돈 생각 않고 환자를 치료해줄 수 있었습니다.  8년 동안 구호병원에서 일하면서 수녀님들에게 배운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돈은 마귀의 똥'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숙자들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가난의 향기'라며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6)

 

1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

IMF로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1998년 여름, 부산의 한 종합벼원에 근무했던 저자는 대책도 없이 사표를 내고 두 달을 빈둥거리다가 다시 찾은 직장이 마리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구호병원이었다고 한다.  2006년에 그만둘 때까지 8년 동안을 구호병원의 외과 의사로 산 셈이다.  가족들에게서조차 외면당하는 노숙자와 가난한 달동네의 독거 노인들, 멸시와 천대 속에 살지만 돈이 없어 치료도 받지 못하는 외국인 근로자들, 저자는 의사로서 그들을 보듬고 상처를 치료하며, 그들의 삶을 가슴 아파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배부른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것이다.  나누고 나누면 못할 일도 아닐 것인데 힘없는 민중들의 삶은 고달프고 서럽기만 하다.  요한 씨의 겨울나기를 지켜보면서 그의 어깨를 누르는 가난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웃으며 살아가야 하겠지?  목련이 봉오리를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봄이다.  요한 씨의 봄이 '말짱 황'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p.77)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의료기관도 문을 닫는 요즘,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료도 거부되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저자의 행동은 시쳇말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러한 '미친 짓'이 없다면 이 사회는 또 어찌 될 것인가.

저자는 8년을 근무했던 구호병원에 사직서를 내고 후배와 동업으로 남부민의원을 개업했다고 한다.  사직을 했지만 여전히 구호병원의 외과 과장으로서 일주일에 두 번은 구호병원에서 수술도 하고 진료도 한다고 한다.  이어지는 2장은 그때의 기록이다.

 

2장. 삶의 바다가 물결치는 작은 병원 
가난하여 사망진단서도 끊지 못하는 윤 할머니, 달걀 10개를 촌지로 쥐어주는 아주머니, 한센병으로 오그라든 손으로 점심이나 한 끼 사 먹으라며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는 김 할머니, 돈이 없어 무료 진료를 해주다가 환자 유인행위로 취급받던 이야기, 환자 부담금 3천 원이 부담이 되어 진료를 오지 못하는 달동네 사람들, 발가락으로 손가락을 이어 만든 이주노동자와의 우정 등 저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가슴 한켠이 먹먹해졌다.

 

"환자가 나간 뒤 마음이 편치 못해 복도로 나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진찰한 환자가 산복도로를 건너 송도 윗길로 통하는 골목길을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실망한 채 걸어가는 뒷모습을 손에 든 담배가 다 타들어가도록 바라보았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저녁 노을이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또 달동네 작은 병원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p.138)

 

사람의 목숨보다 돈이 더 중한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는 내 살기도 바쁘다며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애써 외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요즘처럼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지는 순간이 오면 나도, 당신도 그렇게 살았던 지난 삶에 일말의 후회가 들지 않을까?  장마철에는 영혼마저 허기가 진다.  나는 몸의 허기를 달래주는 파전처럼, 또는 한 사발의 막걸리처럼 이 책을 읽었다.  영혼의 허기를 달래주는 파전처럼, 또는 막걸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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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ham0 2013-12-05 10:5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30년전에 부산 송도의 구호병원에서 3년간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어쩌면 ...했더니. 역시나입니다.
참 많은 추억이 있는 병원의 이야기에 다시 그곳으로 가보고 싶습니다.

꼼쥐 2013-12-06 16:41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감회가 새로우시겠어요.
 
야밤산책 - 매혹적인 밤, 홀로 책의 정원을 거닐다
리듬 지음 / 라이온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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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책의 효용을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한다 한들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만약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이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비친 독서하는 나의 모습은 무척이나 따분하고, 단순하고, 고집불통의 그것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책에 빠져 사느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맹목적인 행위에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를 찾기는 어렵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책을 읽는지, 왜 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천편일률적인 독서의 효용론 중에서 '그래, 맞아. 그러니까 책을 읽어야 해.'하면서 무릎을 쳐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책을 읽고, 시간이 날 때면 읽었던 책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블로그를 한다. 이 단순하고 권태로운 일을 몇 년쯤 하다 보면 '지금 뭐 하는 짓인가?'하는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대부분의 블로거들이 한두 번쯤은 경험했으리라. 그럼에도 오래된 습관처럼 자신의 블로그를 찾게 되고, 시큰둥해져 며칠쯤 거리를 두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또 궁금해지고... 마치 연애를 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이 책 <야밥 산책>의 저자인 '리듬'(블로그 닉네임)도 그랬을까? 네이버 파워블로거인 작가는 [달콤 쌉싸름한 일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블로그를 방문해 보니 지금까지 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녀의 블로그를 방문했다. 그녀가 쓴 첫 리뷰가 궁금하여 찾아 보니 2007년 3월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삭제하거나 수정하지 않았다면). 책의 제목은 "비프스튜 자살클럽". 리뷰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 보이는 짧고 간단한 글이다. 어떤 블로거도 처음에는 늘 그러하듯.

 

 

"이 책에 담은 책들 역시 나의 독서 경험 그대로를 싣고자 했다. 대부분의 책 관련 책들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누구나 인정한 텍스트의 책을 담아냈지만 기본적으로 내 독서가 비체계적 중구난방으로 시작되었기에, 그리고 나와 같이 책 읽기를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쉽고 재미있는 책이 우선이기에 그저 장르 소설, 만확책이라도 그것이 내게 메시지를 던져준 책이라면 주저 없이 담았다. 블로그 이웃들의 반응도 고려했다. 많은 이웃이 좋아했던 책이라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할 수 있으리라." (p.8~9 '프롤로그'중에서)

 

 

<야밤산책>은 총 4개의 '산책길'로 이루어져 있다(엄밀히 말하자면 '부록'까지 5개). '산책길 하나'에서는 주로 작가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으로 꾸며져 있는 듯하다. [아주 보통의 어느 날]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일상의 어느 날 운명처럼 내 손에 들어왔던 그런 책들. 김중혁의 <뭐라도 되겠지>로 시작된다. '산책길 둘'에서는 달달한 사랑 얘기가 주를 이룬다. [문득 네 생각이 나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장에서 작가가 고른 책들은 초콜릿처럼 달달하고 매혹적이다. 얼마 전에 읽은 한스 에리히 노삭의 <늦어도 11월에는>도 담겨 있다. 작가의 생각과 내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산책길 셋'에서는 꿈과 현실의 문제를 다룬 책들이다. [때로는 구불구불한 꿈]이라는 부제는 작가의 생각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산책길 넷'에서는 고단한 현실과 사회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다. [이왕이면 남다르게]라는 부제는 다들 그만그만하게 사는 우리의 삶에서 이왕이면 움츠러든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살아가자는 작가의 당부라고 읽혔다. 부록에는 독서에 대한 팁이 실려 있다.

 

 

내가 블로그를 한 기간은 작가만큼 길지 않다. 그러나 중구난방으로 책을 읽는다는 점은 그녀와 비슷하다. 누군가 나에게 책은 왜 읽는지, 블로그에 글은 왜 쓰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여전히 '모른다'이거나 '글쎄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블로그로 인해 책과 더 가까워졌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으로 인해 내 삶이 얼마나 변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가끔은 시골 할머니 집에 내려가 아버지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본다. 세로 글쓰기와 많은 한문 때문에 읽기는 힘들지만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을 읽으며 꿈꿨을 소년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나중에 내 책들을 누군가가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끊임없이 책에 밑줄을 긋고 흔적을 남긴다." (p.353)

 

 

비록 작가는 블로거로 시작하여 한 권의 책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냈지만, 나는 같은 블로거로서 그녀의 글에 댓글을 다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그녀가 이 책에서 선정한 53권의 책을 다 읽지는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책들 중에서 가끔 내가 읽었던 책을 만났을 때, 나의 느낌과 작가의 느낌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거니와 작가로 인해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늘어나는 것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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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온 편지
조규찬 글.그림 / 이른아침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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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 각자가 내린 정의를 가만히 들어보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는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어쩌면 내가 내리는 정의를 듣고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이란 타인과의 '구별짓기'이다.  외모든, 능력이든, 사상이든, 인격이든, 돈이든, 뭐든 간에 남과 다른 것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성공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고 믿는 것이다.  '차별화'라고 해도 좋겠다.

 

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당연히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내성을 길러야 한다고 본다.  어쩌면 '성공하고 싶다'는 말은 '고독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공감과 연대'보다는 '다름'과 '구별짓기'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박은 이따금 과도한 것으로 보여질 때가 있다.  어떤 이유나 목적도 없이 습관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가 그렇다.  예컨대 제복을 입은 예비군들이 엉뚱하고 기괴한 짓을 할 때도 그런 습관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러한 집단적 광기는 이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선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는 성공의 개념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성공의 결말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항상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공과 만족이 어깨를 겯고 걷기 위해서는 고독에 대한 내성이 필수적이다.  남과 다른 점이 많다는 것, 혹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노력은 타인과의 연대를 일정 부분 갉아 먹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 중의 다수가 공황장애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유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 성공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역으로 말하면 성공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성공한 까닭이다.

 

'나'란 사람은 남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로움을 잘 견디지도 못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성공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 축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엄연한 사실이다.  가수 조규찬의 산문집 <달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뜬금없이 들었던 생각이다.  그도 나처럼 외로움을 잘 견디지 못하고, 그와 비슷한(또는 그보다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부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대단한 성공을 이루어서도 안 되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사람이라는 것이다(이 말은 결코 악담이 아니다). 

 

"한때 내 하루의 시작을 지켜보는 걸인에게 나의 희망찬 걸음걸이를 보여주며, 그도 내가 속한 희망의 대열에 속하기를 바란 적도 있다.  그러나 나와 걸인은 공평한 노을에 젖어든다.  같은 희망과 같은 노을에 의지하며 같은 권태를 느끼는 시한부 존재들이다.  때로는 이와 같은 숙명이 적용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보게 된다.  무언가를 묻는 노인에게 노골적으로 짜증내며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개찰구 옆 매표 창구의 무자비한 중년.  적어도 그만큼은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p.105)

 

나는 사실 연예인이 쓴 어떤 종류의 책도 신뢰하지 못하는 지나친 편견의 소유자이다.  그럼에도 내가 '꽤 괜찮네'하고 느꼈던 책들이 더러 있다.  배우 최강희가 쓴 <사소한 아이의 소소한 행복>도 그 중 하나다.  내가 조규찬의 노래도 변변히 아는 게 없으면서 굳이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가 책의 서문에서 밝힌 발간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이 책의 어딘가가 아들의 삶을 지탱해 줄 여러 기억 중의 하나로 쓰여질 수만 있다면, 나는 이 책을 발표한 일을 변변치 않았던 내 삶에서 이루어 낸 몇 안 되는 의미 있는 일 가운데 하나로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p.5 'prologue'중에서)

 

조규찬은 의외로 글을 잘 쓴다.  한편,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게 느꼈겠지만 그는 정말 소심할 정도로 꼼꼼한 사람처럼 보여기도 한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쪼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일상과 생각들을 일기처럼 기록한 책이지만 가끔씩 만나게 되는 기발한 표현들과 건전한(?) 사고방식에 밀려오는 낮잠을 단박에 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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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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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마저 곱게 넘겨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책이 있다.  내 단단한 손톱이 작가의 여리디 여린 감성에 생채기를 낼 것 같아서 말이다.  때로는 거칠어진 내 호흡마저 신경이 쓰이는데 그럴 때면 쌔근쌔근 잠든 아기의 여린 숨결이 문득 부러워지는 것이다.  김선우 시인의 산문집은 그런 책이다.  시인의 깊은 사색이 낙엽처럼 모이고 모여 독자의 머릿속에서 햇잎처럼 되살아나는 것.  그녀의 산문집은 잔설처럼 소복히 쌓이는 달빛의 음영이다.  또는 그렇게 읽을 일이다.

 

"이토록 이윽한 몽상과 휴식과 사랑의 시간.  나는 잠깐 발길을 멈추고 저 능선들이 품고 있을 다람쥐며 오소리며 산새들과 작은 벌레들의 꼼지락거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문득 한 목소리를 들은 듯합니다.  목소리이되, 그것은 몸 밖으로 소리를 파열시켜 내어보이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의 몸 속을 물결치며 우웅우웅 복화술로 말하듯 스며나오는 달의 목소리였습니다."    (p.43-44 '귀래에서 달을 보다'중에서)

 

작가는 스물아홉의 나이부터 통과제의처럼 이 글을 썼노라고 고백한다.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다른 아홉 즈음에 '느리게, 머뭇머뭇거리면서 어떤 통과제의의 기록'을 남길 것을 소망한다.  꽉 찬 열을 향해 가는 가파른 고갯길의 그 아홉에 말이다.

 

"시로 풀어내기엔 너무 습습하거나 달뜬 것들, 혹은 너무 메마른 것들의 나신을 벌판 쪽으로 밀어올려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청춘이 내 의식에 남긴 빛과 그림자의 환한 구멍들에 대해.  그리고 나는 내 벗은 영혼을 심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우리의 자유, 나와 우리의 평화는 어떤 속삭임으로 영접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p.4 '책머리에'중에서)

 

 1996년 창작과비평에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던 시인은 2000년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펴내었고, 2002년 첫 산문집으로 이 책 <물 밑에 달이 열릴 때>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죽음'에 매혹되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그 기억에 의해 삶의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는 시인은 자신이 향했던 곳(이를 테면 울릉도, 허난설헌 생가, 강원도 귀래면, 시인의 고향인 강릉 등)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가령 모네,꾸르베,프리다 깔로 등)과 읽었던 책들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생각한다.  여행에서 독서로, 독서에서 그림 감상으로, 그림 감상에서 고요한 사색과 몽환의 세계 속으로, 제 아무리 행위가 변한다 한들 순간의 삶에서 빚어내는 진실의 무늬는 같을 것이다.  시인은 그 탐색의 순간들을 말하려 했다.

 

"일상의 속도 속에 편승되었을 때는 감지할 수 없는 영혼의 떨림, 이 미세한 꿈틀거림은 반(反)속도, 반(反)물질의 상태 속에서 섬세하게 진동합니다.  침묵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는, 속도를 버리지 않고는 만질 수 없는 시간의 결들."    (p.101)   

 

'속세라는 불구덩이 집 속에서 문학을 통해 스스로의 구원을 꿈꾸는 자'라고 말하는 시인은 자신을 시인으로 이끌었던 사람들과, 책과, 영화와, 그림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인연들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의 구성은 형식상으로는 총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주로 기억에 남는 장소와 시인이 되기까지의 성장과 가족사에 대하여, 2부에서는 현실에서 만난 삶의 부조리와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3부에서는 기억에 남는 책에 대하여 쓰고 있다.  얼마나 많은 날들과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모여 이 책으로 태어났는지 생각하게 한다.

 

'오늘을 사는 일이란, 피 한 바가지를 시주받고 피 한 바가지를 시주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라고 썼던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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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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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평론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생소한 직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4만여 가지의 직업이 있다고 하니 내가 모르는 직업이야 허다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싶다.  문학 평론가도 아니고 고전 평론가라니...  아무튼 고미숙 작가는 자칭, 타칭 '고전 평론가'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겨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고전 평론가'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전 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정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정년 자율업!', '학연? 지연? 혈연? 등등과 절대 무관한 100% 노력 및 능력제', '공부+친구+밥 평생 보장'.  물론 그녀만의 주장이다.(확인한 바는 없지만)  그녀의 주장이 맞다고 인정한다면 현대 사회의 '블루 오션'임에 틀림없다.(이런 제길!  진즉 알았더라면 나도 고전 평론가나 될 것을)

 

각설하고, 어떤 주제, 어떤 장르를 들고 나와도 생소하거나 낯설지 않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작가가 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그렇고, 고전 평론가 고미숙 작가가 그렇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그녀의 쫄깃한 문체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고미숙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필수적으로 거쳤을 것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우아한 자세로 앉는다.(의자는 등받이가 있는 푹신한 가죽 의자가 좋겠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에 포개어 앉는다.(일명 '샤론 스톤 자세'가 되시겠다.)  왼손에는 작가의 책을 가볍게 얹는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테이크 아웃한 아이스 에스프레소가 들려 있다.  안경을 낀 독자라면 안경은 가볍게 코끝에 걸친다.  이제 그만하면 자세는 완벽하다.  그러나 작가의 이런 표현을 읽을라치면 자신이 읽던 책을 누가 볼새라 자신도 모르게 가슴 쪽으로 와락 껴안게 되고 커피는 바닥으로 나뒹굴고 만다.

 

"사태가 이런 지경인데도 한미당국자들은 하나같이 확률상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광우병에 걸린 소라도 위험물질만 제거하면, 먹어도 상관없다는 망언(!)을 한 의원도 있었다(미친!).  사스 때는 단 한 명의 의심 환자도 출현하지 않았건만, 그 생난리를 떨더니, 광우병은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한다."    (p.55)

 

그렇다.  고전을 다루는 작가이니만큼 글의 문체나 내용도 클래식(?)하고 우아할 것이라고 믿었다면 착각도 심한 착각이었음을 곧 깨닫게 된다.  '우아'는커녕 시정잡배의 말투에서 조금 정제된 정도라고나 할까?  작가는 교양과 도발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든다.  그렇다고 책의 내용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녀의 이런 '거침없음'은 '우아함'으로 치장한 독자의 얄팍한 지식을 여지없이 깨트린다.  여성의 글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작가는 이 책에서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근대성과 우리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섯 편의 한국영화를 통해 '지금 여기', 곧 근대의 풍경과 서사를 스케치한 것이다.  위생권력, 민족과 역사, 그리고 언어, 연애와 성, 한(恨)의 미학적 장치, 가족과 신(神), 이동과 접속 등.  이 항목들은 지난 100년간 한국인들의 일상과 무의식을 지배해온 핵심기제들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이 지금 어떤 시대적 조건에 발딛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삶과 사유를 조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여섯 편의 영화를 보라!"    (p.5 '책머리에'중에서) 

 

책의 내용은 1.'괴물'(위생권력과 스펙터클의 정치), 2.'황산벌'(거시기! 표상을 전복하다), 3.'음란 서생'(포르노그라피와 멜로, 그 어울림과 맞섬), 4. '서편제'('한'(恨)과 '예술'의 은밀한 공모), 5.'밀양'(가족, 고향, 신:출구없는 욕망의 폐쇄회로), 6.'라디오스타'('이주민'들의 접속과 변이)이다.  우리가 한번쯤은 보았을(또는 들었을) 듯 싶은 영화들이다.  작가는 이 영화들을 통해 근대화 과정에서의 가족 파괴와 인간 소외를 작가만의 시선으로 통찰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수용된 모델은 기독교 가운데서도 개신교(특히 장로교와 감리교)다.  잘 알고 있듯이, 천주교는 이미 조선사회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수차례 '피의 순교'를 치른 바 있다.  따라서,개항기에 유입된 미국 개신교의 주류는 처음부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이나 의료선교를 통해 일상을 파고드는 전략을 택했다.  그와 동시에 정기적으로 부흥회나 사경회(査經會 일정 기간 동안 교인들이 성경공부를 하거나 성경강의를 듣기 위해 모이는 모임)를 열어 사람들의 신앙심을 고조시키는 한편, 청년회나 부녀회 등 각종 써클활동을 통해 일상의 리듬을 장악하는 역동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개신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구역을 장악하는 능력이 탁월한 건 그 때문이다."    (p.196)

 

모르긴 몰라도 작가의 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녀의 '치열함'에 있을 듯하다.  고전은 읽기 어렵고,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배경지식 또한 필요하다.  그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다.  꾸준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언저리에도 이르기 어렵다는 얘기다.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맘놓고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위트와 유머, 또는 도발적인(?) 문체가 아무런 바탕도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인간한테 고립감보다 더 두려운 것이 또 있을까?  연예인이 되고 싶은 것도, 정치가가 되고 싶은 것도,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것도, 그 모든 욕망의 근저에는 홀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욕망이 어느 순간, 전도되어 버린다는 데 있다.  배경을 지워 버리고 오직 혼자만 빛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혼자만 빛날 수 있다는 어이없는 환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되고, 가족과 연애가 블랙홀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다."    (p.241)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쓴 글을 읽을 때는 그 익숙함에 다소 나른해지고 금세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썼느냐에 따라 흥미는 배가되기도 하고 시들해지기도 한다.  고미숙 작가의 야생성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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