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의 배신 - 습관처럼 야근하는 당신이 꼭 알아야 할 것
니시다 마사키 지음, 김세원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명절이면 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바람에 당혹해 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렇게 내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터져나오는 이야기들을 마땅히 제지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기분좋게 만난 자리이니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도 없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형과 함께 자취생활을 했던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얘기인데 얼마나 자주 들었으면 나의 성장과정을 알 길 없는 조카들도 모두 기억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내 얘기는 횟수를 더할수록 사그라들기는커녕 때로는 더 부풀려지고 지금도 새로운 얘기가 샘솟듯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학창시절의 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요, 중증의 활자 중독증 환자였다.  그렇게 된 데에는 기질적 성향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둘러싼 환경이 주원인인 듯하다.  부끄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하루도 술을 거르는 날이 없었고, 그렇게 술에 취해 귀가하면 많지도 않은 가제도구를 부수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폭언과 손찌검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피해, 친구네 집을 일없이 전전하며 밤늦도록 그들의 집에서 책을 읽곤 했다.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에게 맞지 않으려면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고, 악에 받쳐 바락바락 대드는 엄마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 덕분에 친구들의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다 읽게 되었다.  시골에서 자란 터라 친구들이 갖고 있는 책도 그 나이에 읽을 만한 책은 많지 않았고, 그런 연유로 나는 어른들이 읽는 어려운 책도 가리지 않고 읽어야 했다.

 

내가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던 형을 좇아 도시로 전학을 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보다 기뻤고, 다른 어려움쯤이야 기꺼운 마음으로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도시로 나와 처음 계획했던 일은 잠을 세 시간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책에서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수면시간을 11시에서 새벽 2시까지로 한정하였다.  돌이켜보면 치기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정해놓은 규칙을 지키기 위해 지독하게 버텼다.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면 웃풍이 심한 자취방은 냉기가 감돌았다.  어깨에 담요를 두르지 않으면 책을 읽기 어려웠고, 졸음을 쫓기 위하여 마당 한켠에 있던 수도를 틀어 차가운 수돗물에 한참씩이나 머리를 담그곤 했다.  지금도 큰형은 그랬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때는 동생인 내가 무서웠었다고 말하곤 한다.  새벽의 고요 속에서 한동안 책을 읽다가 정각 다섯 시만 되면 전기밥솥에 쌀을 앉히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할 일이 많았다.  간단한 반찬을 준비하여 도시락을 싸고, 형을 깨워 아침을 먹었다.  가방을 챙기고 자전거로 등교를 하면 길었던 아침시간이 마무리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런 생활은 계속되었다.  늘 상위권을 유지했던 성적과 부러움으로 가득 찬 친구들의 시선이 보답이라면 보답이었다.  '노력과 그에 대한 보상'이라는 긍정적인 피드백은 '어떤 불가능한 일도 내가 하면 가능한 일로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함으로 이어졌고, 신이 있다면 신은 항상 내 편이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4년 장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의 회사 생활을 거친 후 창업을 했다.  단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하지 않았던 나에게 사업의 실패는 뼈저린 것이었다.  실패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금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하는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가던 그때 나는 아내에게 심한 독설을 퍼붓기 일쑤였고,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던 아내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 <노력의 배신>은 '해로운 완벽주의자'의 전형이었던 나를 되돌아 보게 한 책이었다.  어떤 책이든 자신의 얘기를 가감없이 기록한 것이라면 읽는 내내 마음이 거북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다.

 

"완벽주의자는 자신의 실력보다 높은 목표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엄청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인내는 화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게다가 타인에게도 자신과 똑같은 인내와 참을성을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    (p.238)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잠시의 여유도 찾을 수 없었던 나로서는 대학교 앞의 커피숍에서 노닥거리는 학생들이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죽이는 학생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밥벌레'라고 그들을 비웃었다.  나의 아집과 독선은 결국 사업의 실패와 함께 누그러졌다.

    

삶은 누구에게나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 변화가 좋은 방향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멈출 수 없는 변화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상담해왔다는 저자는 그간의 임상 경험과 최신 학술지식을 통해 ‘노력을 멈추는 기술’을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해로운 완벽주의자'가 '건전한 완벽주의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베스트 셀러 작가이자 영적 스승인 안젤름 그륀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신뢰하고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당신의 삶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라. 그러면 당신의 샘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내가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 나에게 했던 일련의 행동들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 있다면 그들이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사람은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도 가혹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늦은 나이에 실패와 시련을 통해 배웠다.  항상 되물어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인내인가?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것은 아닌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종교가 필요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많은 분들이 "네."라고 대답하겠지요.  물론 "아니오."라고 단언하듯 말하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순간 '나도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닥 선량한(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충실히 믿고 따른다는 의미에서) 종교인이라고 말할 처지는 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종교가 어떤 특정 종교를 염두에 두고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저는 무신론자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의 삶에서 종교는 그 자체로서 필요한 것일까?'하는 질문과 '필요하다면 어떤 시기와 상황이 적절할까?'하는 물음에 답을 구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종교 따위는 필요없는 것일 수도,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일 수도, 또는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짧지 않은 인생 전반에 있어 종교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종교를 선택해야 하겠다고 느꼈던 시점도 정확하고 시기 적절했던 것일까요?  종교 자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그 시기의 적절성 말입니다.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선택한 것은 아닌가요?  아니면 다니던 유치원의 원장 선생님의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마감 임박'이라는 멘트에 나도 모르게 전화를 거는 홈쇼핑의 충동구매와 같은 행태를 보이지는 않으셨나요?  또는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가끔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분들이 어떤 계기로 종교인이 되었는지, 그때의 순간이 자신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는지 의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일 수도 있지만 제가 그랬으니까요.  정신적으로 황폐화되고 누군가의 위안이나 구원이 절실할 때 저는 종교라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동이었던 듯싶습니다.  다들 그렇게 종교를 선택한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던 사업이 내리막길을 걷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배려심이 가득했고,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그의 모습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의 그가 아니란 걸 확인한 사람들은 그의 곁에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결국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종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뿐 아니라 신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책에서는 삶이 축제요, 소풍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일부분인 종교생활도 그런 게 아닐까요?  일종의 정신적 유희나 놀이와 같은 그런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를 선택하는 순간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신적으로 이성적 판단이 왕성할 때, 편안한 삶이 지속되어 지루하고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의 예에서 신은 인간에게 어떤 혜택을 준 것도 아니지만 해를 끼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엾은 인간은 신을 원망합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예컨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눈앞의 곤경을 벗어나고자 사채의 덫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채업자는 그런 사람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지요.  처음에 사채업자는 선심을 쓰듯 그들을 유혹합니다.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그들은 사채업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문제만 해결했을 뿐 더 크고 어려운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사채업자는 이제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을 조롱하고 협박합니다.

 

이건 순전히 제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어리석음은 종교의 선택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을 찾아 떠난 여행』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미국 공영방송 NPR의 해외특파원으로 일하며 전 세계의 전쟁과 가난, 질병 등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고, 그 때문에 만성적인 불안증과 우울증이 더욱 악화됐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인생을 신에게 의지하지는 않았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각종 폭력들을 목격하며 종교와 더욱 거리를 두기도 하였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고 합니다. ‘신과 종교의 관계는 음식과 메뉴판의 관계와 같구나.’라고 말이죠.  “당신의 신을 만나지 못했나요?”는 애당초 틀린 질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신은 잃어버린 자동차 열쇠나 뉴저지 톨게이트 출구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죠.  그는 이 책에서 '신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나의 신을 찾아다니는 대신 신을 만들어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구축하고 조립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내가 조립의 기반으로 삼은 것은 유대교이지만, 지지대는 불교다.  심장은 수피즘으로 되어 있고, 그 밖에도 이 신은 도교의 소박함, 프란체스코회의 너그러움, 라엘교의 쾌락주의 조금을 갖고 있다."    (p.4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나이를 더할수록 점점 답변이 궁해지는 질문이 있다.  내 안에 경험이 하나 둘 늘어날수록, 해마다 쌓인 지식이 그 자리를 넓혀갈수록 답변은 더욱 궁색해진다.  이따금 이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0"으로 수렴하는 지수함수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으면 종국에는 답변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누군가에게 들려줄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채근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 질문을 화두처럼 끼고 살았다.  그게 뭔고 하니 "내 생각이나 주장 중에 오롯이 내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나 될까?"하는 물음이다.  이를테면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말이나 어느 책에서 읽었던 지식, 또는 사회적 통념으로서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을 제외하고 오직 나만의 발견, 나만의 생각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나는 이 질문 앞에서 해가 갈수록 점점 자신을 잃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여러 이유 중에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저자의 생각에 굴복되고 종속되기 일쑤여서 이 질문이 생각날 때마다 독서의 무용론에 빠져들곤 한다.  그렇다고 책을 멀리하는 것만이 능사냐 하면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기본 지식의 습득을 도외시하거나 전폐한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세뇌 현상은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엘리트로 치부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종속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다른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 노예화된 그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살다 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도 수십 명은 말해줄 수 있다.

 

독서를 하면서 드는 이런 자괴감 또는 속절없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서 그만의 주장이나 생각이라고 여겨지는 말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괜한 부아가 치밀고 때로는 까닭없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며,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책『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를 읽었을 때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35세의 젊은 나이에 마이크로소프트사 일본법인의 사장으로 취임했던 저자는 비즈니스계를 통틀어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독서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가 권하는 일명 '초병렬 독서법'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독서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초병렬 독서법'은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에 쌓아두고 다양한 책을 동시에 섭렵하는 방식이다. 즉 거실과 침실, 화장실, 부엌 등 가는 곳마다 여러 권의 책을 놓아두고 동시에 읽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선정에 있어서도 장르가 다른 책, 예를 들어 학술서적과 소설, 시집과 경제서적처럼 서로 연결고리가 거의 없는 극단적인 것들을 권한다.  저자는 또한 베스트셀러만 따라 읽는 사람은 원숭이와 같다고 말하는데 읽는 독자에 따라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모든 책을 완독할 필요는 없다고도 조언한다. 즉 무조건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Brillat Savarin)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말해 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맞혀보겠다.”  이 말은 책에도 적용된다. 어떤 책을 읽는지 알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예컨대, 비즈니스 실용서만 읽는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같은 부자가 되는 요령을 알려 주는 책이나 성공 비법을 소개하는 책만 편식하듯 읽는 사람은 장담하건대 중산층 이하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만일 당신이 “내 취미는 독서고요, 최근에 읽은 책은 『해리포터』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구제불능이다!”라고.  다른 사람이 터득한 요령이나 성공 비법을 따라 하기나 하는 사람이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그런 사람은 동물원의 원숭이보다 나을 게 없다. 원숭이도 인간을 곧잘 따라 하지 않는가. 남이 알려 주는 기술에 의존하는 한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응해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내고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일으키는 힘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p.6 - p.7  '프롤로그' 중에서)

 

일본인 중에는 자신만의 독서법을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의 저자인 다치바나 다카시를 비롯하여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의 저자인 마쓰오카 세이고,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을 쓴 이토 우지다카와 이 책『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의 저자인 나루케 마코토 등 그동안 독서법에 대하여 내가 읽었던 책도 여러 권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나 독특한 발상에서 볼 때 다치바나 다카시와 나루케 마코토는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아 보인다. 

 

"나는 딸아이가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일류기업에 입사하는 것도, 그리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자기 인생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꼭 정치가나 의사와 같은 화려한 직업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테러리스트가 되면 어떠랴.  체 게바라처럼 낭만과 사상을 가진 테러리스트라면 그것도 근사한 일 아닌가(모든 혁명은 테러로부터 시작되었다!)."    (p.109 - p.110)

 

어떤 행동이나 말 또는 주장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방식과 체계를 확립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때로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 하여 괜한 트집을 잡거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비난하고 멀리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일종의 열등의식이라면 열등의식이겠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이제는 제발 그런 짓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오히려 나와 의견이 다른,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과 의견이 다른 그들의 주장을 듣고 싶다.  솔직히 나는 그들이 부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꽃, 나무, 풀 모두가 가을을 예감하는 기운을 머금고 있을뿐 아직 본격적인 가을의 현란하고 강렬하고 환희에 찬 색들을 펼쳐 보이지도 않았음에도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색채를 띤 적이 없는'듯한 가을이다.  나는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맘때쯤이면 습관처럼 할머니를 떠올리곤 한다.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의 그늘에서 더부살이를 하셨던 나의 할머니.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작은 체구에도 언제나 손에서 일을 놓지 않으셨던 억척스러운 분이셨다.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고 온종일 술에 절어 살아갈 때에도 날품을 팔아 번 돈으로 손주들 용돈을 챙겨주시곤 했다.

 

언제였던가, 쫓기듯 서울로 이사를 했던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탄식처럼 말씀하셨다.  이제는 당신이 죽어도 묻힐 땅 한 뙈기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고.  나는 그 말 속에서 할머니가 진정으로 아쉬워했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 첩첩산중의 산골에서 살았던 우리 가족은 농사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아버지 탓에 고만고만한 나이의 어린 형제들과 일밖에 모르셨던 어머니, 자식의 방탕을 당신 탓으로만 돌리셨던 할머니는 종일 밭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된 농사일에 지칠 법도 하였건만 할머니는 틈틈이 꽃을 가꾸셨다.  꽃씨가 귀했던 당시에도 할머니는 분꽃,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 코스모스, 해바라기, 해당화 등 여러 꽃씨를 잘도 구해 오셨다.  변변한 정원은 고사하고 빈터도 마땅치 않았던 시골집에서 할머니는 꽃을 심을 자리를 어쩌면 그렇게 잘도 골라내셨을까.  담장 밑, 장독대 주변, 화장실 가는 길,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물을 길어 먹었던 실개천 옆의 샘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길 양옆으로는 코스모스가 가득했고 뒷열에는 듬성듬성 키 큰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었다.

 

나는 가을 햇살이 뽀얗게 내려 앉던 그 코스모스길과 깨끗하게 비질 된 마당 한 켠에서 시들어가던 봉숭아 꽃잎을 생각하며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었다.  정갈한 머릿결처럼 비질 자국이 선명한 그 길을 유년 시절의 내가 꿈결처럼 걷고 있다.  살랑거리는 코스모스 꽃잎의 리듬에 맞춰 나는 그 길에 작은 발자국을 얹고 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왔을 때 나의 할머니가 잃었던 것은 어쩌면 철마다 꽃을 피우던 그 작은 꽃밭이었는지도 모른다.  꽃을 가꾸면서 잠시 잊을 수 있던 삶의 시름과 자연 속에서의 무한한 위로를 어린 손자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으리라.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은 절제하는 습관에서 나온다.  이런 능력은 원래 누구나 타고났으나 현대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왜곡되고 잃어버린 채 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얼마간의 유쾌함, 사랑, 그리고 서정성 같은 것들이다.  이런 작은 기쁨은 이른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눈에 띄지도 않고 일상생활 속에 흔하게 흩어져 있어서 일에만 열중하는 수많은 사람의 둔한 감성으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찬사를 받지도 못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p.71)

 

나의 할머니가 그랬듯 헤르만 헤세도  일생 동안 그리고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꼭 정원을 만들고 가꾸었다고 한다.  작가이자 화가이고 한때는 포도농사로 생계를 꾸렸을 만큼 솜씨 좋은 원예가였던 헤세가 31~77세 사이에 자연에 대해 쓴 글을 모은 이 책에서 그는 간결하고도 투명한 문체로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그에게 정원 일은 혼란과 고통에 찬 시대에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었고 작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청량제였다.

 

"미국 취향으로 변한 현대인들의 음악성이란 건축을 소유하는 것 이상이 아니고, 반짝거리는 니스 칠이 된 자동차가 아름다움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이 되고 말았거든.  그런 것에나 만족하고 즐기는 반쪽자리 인간에게 시험 삼아 예술수업을 한번 해보게.  꽃이 시드는 것, 장미가 밝은 잿빛으로 변하는 모습을 생생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온갖 생명과 모든 아름다움의 비밀로서 함께 체험하도록 가르쳐보게나.  그들은 아마 놀랄 것이네! "    (p.97 - p.98)

 

독자들에게 위대한 작가의 글일수록 극과 극의 평가가 내려진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의 이 책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그렇게 읽혀지고 또 그런 평가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작가가 깨달았던 진리의 깊이를, 작가가 누렸을 삶의 평화와 그 크기를 독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자연이 주는 커다란 기쁨과 환희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라져가는 계절의 모습을 글로, 그림으로 하나라도 더 남겨두지 못해 아쉬워했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글은 손자들의 행복한 삶을 그렇게도 갈망했던 내 할머니의 모습을 닮았다.

 

나는 이 가을에 내 유년의 그때로 되돌아가 코스모스 물결이 일렁이던 그 길을 온종일 걷고 싶다.  가을 햇살이 부서지던 애기 젖살처럼 뽀얀 그 길에서 돌아가신 내 할머니와 긴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밤이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도 싶고, 까르르 웃고도 싶다.  삶이 지나치게 빠른 도시인의 일상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가슴에서 거꾸로 나이를 먹는 듯합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도 제 가슴 속에서는 제 키만큼 큰 가방을 메고 유치원으로 향하던 때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말하자면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던 유아기의 그때로 퇴행을 거듭하곤 합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가 세월에 비례하여 쑥쑥 자라는 것과는 정 반대의 길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추석 명절에 처갓집을 방문하였을 때 저와 동서들에게 빛 바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시며 하셨던 장인어른의 말씀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든이 넘은 장인어른이 다섯 살 무렵에 찍었다는 가족사진이었습니다.  칠십 년도 더 지난 사진 속에서 당신은 뭔가에 잔뜩 주눅 든 모습이었습니다.  장인어른은 사진과 함께 그때의 추억 한 토막을 들려주시면서 한껏 그리움에 젖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쓸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깜박깜박 잘 잊어버리는데 지난 일들은 어제 일처럼 또렷해."라고 말이죠.

 

주말부부로 지내는 내게 아들은 각별한 그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석에 함께 보냈던 시간이라야 고작 며칠이었지만 그 며칠도 친척들과의 어수선한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아들과 단 둘이서 호젓하게 보낸 시간은 불과 몇 시간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화를 통하여 매일매일의 아들의 일상을 전해 듣고는 있지만 그리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부풀려지는 경우가 허다하죠.  그런 까닭에 나는 아들을 만날 때마다 허락도 없이 아들의 물건들을 뒤적이곤 합니다.  아들의 손때가 묻은 레고 모형과 스케치북과 독서록 등. 그런 흔적들은 내 가슴 속에서 언젠가 아들의 지금 모습을 떠올리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석에 우연히 보았던 '고래'에 대해 쓴 아들의 영어 스피치 원고를 고치지 않고 옮겨 보았습니다. 

  

Whales are animals which live in seas. But they are not fish. They are mammals like humans. There are more than seventy- five different kinds of whales living all around the world's seas. We can divide whales into two main kinds: toothed whales and whalebone whales.  Toothed whales have teeth and hunt food by their teeth. Whalebone whales have baleens, which are like mustaches.  They use baleens to filter the food from the water by drinking and spitting water. Whales are born in water but they don't  die. It's because their tail comes out first and their mother pushes the baby to breathe. The baby knows that it shouldn't breathe until he or she reaches the surface. There are many kinds of whales. Many whales move in groups. Groups can be two or three upto hundreds of whales. The columns of water are actually their breath that is mixed with the cold air. Many people hunt whales. We should protect our giant friends living in seas. We can protect them by protesting whale hunting and telling our friends about it, too.  Thanks for listening to my speech!

 

아들은 내 가슴 속에서 여전히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지만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모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아내도, 부모님도, 형제들도 모두 내 마음 속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리움의 세계에서는 항상 시간이 거꾸로 흐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