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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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서, 인간의 욕망이나 도덕에 대해서, 또는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던 책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던 책이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예약 구매를 통하여 손에 넣었었다.  출간된 책이 하루 아침에 동이 날 것을 염려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기표를 뽑고 내 순번을 기다려야만 원하는 책을 손에 거머쥘 만큼 우리나라의 독서열이 뜨겁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공지영 작가의 작품을 편애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도가니> 이후 계속된 긴 휴지(休止)는 며칠 동안의 기다림에도 갈증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나의 오랜 기다림과는 상관도 없이 책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책을 반쯤 읽었을 때, 남은 반을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었다.  책 한 권을 읽는 데 근 10여 일을 소모한 것은 내게는 참으로 드문 일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책의 앞부분 몇 쪽을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숫제 읽지 않고 책을 덮어버리거나, 재미있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랬던 내가 열흘이라니...  어찌 보면 나는 난생 처음으로 예약 구매를 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오기와 자존심이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실망했던(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몇몇을 소개함으로써 리뷰를 대신하려고 한다.  다분히 주관적일 수도 있고(가끔 동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되잡아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고 각자가 느끼는 점은 열이면 열 모두 제각각일 터이니 신경 쓰지 않겠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가장 실망했던 점은 인물의 평이성이다.  어떤 특색있는 인물이 없다는 얘기다.  소설은 주인공인 정요한 수사(사제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와 W시의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장의 조카인 소희와의 사랑이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요한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수도원 동기인 미카엘과 미카엘의 여자 친구, 갖은 고초를 겪고 남한으로 탈출한 이방인 성직자들과 소설 속에서 인간이 아닌 듯 그려지는 동기생 안젤로 수사,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고 미혼모가 된 모니카와 어린 요한 등.  그들은 하나같이 작가가 바라는 어떤 모습, 또는 독자가 원하는 어떤 모습일 뿐 인간이 갖는 보편성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무한의 에너지가 도덕이나 이성적 판단, 또는 개인의 신앙에 의해 굴복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지 못하였다.  절대적으로 욕망이 승리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인간의 욕망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정요한 수사가 남자로서 갖는 이성에 대한 욕망은 소희와의 입맞춤에서 끝날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는 얘기다.  작가는 교묘한 상황 설정을 통하여 그 선(입맞춤)에서 한 발 물러서고 있다.  특정 종교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는지, 작가가 여자라는 한계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어려서부터의 유교 교육에 세뇌된 탓인지, 또는 '외설'이라는 비난에 직면할까 봐 두려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대학 시절에 내가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의 특성상 나이 지긋한 사회인과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  매매춘이 일반적이었던 당시에 그들 대부분이 약속 장소로 잡는 곳은 호텔의 나이트클럽이나 을지로의 지하 술집이었다.  사무적으로 만났을 때는 그렇게 근엄하고 도덕적으로 보였던 사람들도 열에 아홉은 젊은 여성의 유혹에 백기를 드는 모습을 많이도 보았었다.  나는 그때, 그들을 기다리며 담배 두 개피를 천천히 태우곤 했다.  배설하듯 욕망을 충족한 그들은 멋적게 웃으며 "오늘도 담배 두 개피?"하며 대답하기도 어려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소설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등장인물 대부분이 신과 동물의 중간자, 도덕과 욕망의 경계인으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점도 실망스럽다.  물론 인간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만(도덕적으로 완벽하지도, 죽을 때까지 악한 것만도 아닌) 작가가 예상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이 도덕과 일탈의 경계선에서 마치 외줄타기를 하듯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비열해질 수도 있고, 어떤 인간은(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신의 모습처럼 완벽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꾸준히 그런 것도 아니다.  삶 전체에서 볼 때 그 모습은 변화의 폭이 상당히 넓고 다양하게 전개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에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오히려 단순할지도 모른다.  인간 군상의 실체,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의 책이, 책에서의 그의 묘사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하게 보인다고 느낄 수도 있고, 나는 이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하고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보편적인 삶을 작가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 더럽고 추악하다고 하여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이 '이렇게 하라, 이것이 옳다'고 말할 때 뒤돌아서서 웃는다.  현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도덕적 선택은 아이들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기성세대와 소위 교양과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간혹 현실을 무시한 채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요한 수사님, 악은 수많은 얼굴로 다가옵니다.  사실 사람인 우리가 그것을 식별하는 것은 은총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어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사랑을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모든 폭력, 모든 설득, 모든 수사는 악입니다.  너 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야, 네가 좀 애쓴다고 누가 바뀌겠어, 네가 사랑한들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이......  속삭이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p.239)

 

결국 내가 작가에게 실망했던 까닭은 인간의 욕망이 갖는 스펙트럼을 자의적으로 축소하였거나 현대인의 실제 모습에서 슬몃 도망쳤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망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도덕적이냐 그렇지 못하냐, 이성적으로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철학서나 잠언집에서 다룰 일이지 소설을 쓰는 작가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보편적인 삶,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을 기록하는 것이지 작가가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기초한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인간 본성의 가장 밑바닥을 건드리지 않고 가장 상위의 어떤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어렵다.  전임 대통령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끝까지 비열하고 야비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인간의 본성은 그런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선망하든, 아니면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어쩌면 작가는, 또는 일부 비평가는 인간 본성을, 인간의 적나라한 실체를 문학적으로 미화하고 승화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작가는 인간의 적나라한 실체에세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작가는 조금 비겁했다.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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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11-12 19:39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공지영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였지만, 언제부턴가 점점 공지영의 글들에 공감이 가지 않는 경우가 생기더군요. 특히 소설 보다는 에세이에서...
이 소설도 첫 문장이 상당이 마음에 들었는데, 읽는 속도는 별로 안 나가 되더군요. 그래서 접어 놓고 다른 서평 이벤트 책들을 읽다 보니, 다시 손에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연히 꼼쥐님의 서평을 보게 되고 지금 읽을까 말까 망설이는 중입니다.

꼼쥐 2013-11-13 13:23   좋아요 0 | URL
소설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 경건했어요. 나같은 잡놈이 읽기에는 말이죠. 그러다 보니 공감하기도 어려웠고요. 자연히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죠. 라일락님이라면 혹 다르지 않을까요?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여린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부드럽기 그지없는 비다.  나는 잠깐 산책을 했고, 속삭이는 빗소리를 들었고, 이따금씩 우산을 옆으로 젖힌 채 한두 방울의 비를 맞곤 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모든 생명체의 바쁜 일상은 잿빛 어둠에 묻혀 가뭇하다.

 

아침에 처음으로 내복을 꺼내어 입었다.  사는 게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구나, 생각하며 맥없이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날씨이고, 기온인데 몸은 오슬오슬 추위를 탄다.  어렸을 때는 내복 입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었다.  요즘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몸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거나 유행을 좇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내복을 입었을 때의 답답한 느낌이 싫었을 뿐이다.  예전에는 내복의 두께가 어찌나 두껍고 투박했던지...

 

수능 예비소집 때문인지 수업을 일찍 마친 아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채 저희들만의 언어로 조잘거린다.  이따금 들리는 웃음소리가 유난히 맑다.  은행나무 가로수의 노란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간다.  바람을 머금은 듯한 투명한 빛깔이다.  계절은 또 이렇게 말없이 지나가나 보다.

 

한 잔의 커피를 옆에 두고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었다.

대입 학력고사가 멀지 않았던, 딱 이맘 때쯤에 나는 이 책을 읽었었다.  나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이나 <1984 >보다 르포 형식의 이 책을 더 좋아했었다.  나는 그때 생각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알았다.  나의 부모님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광산촌에서 살고 계셨다.

 

추억이란 때로 까닭도 없이 깊은 슬픔으로 빠져들게 한다.

내가 내복을 꺼내 입은 것도, 하루가 훌쩍 스러지는 것도, 피곤에 절은 후배의 얼굴도 괜스레 슬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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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상 (양장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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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는 안개가 짙었다.

이렇게 농무(霧)가 낀 날의 대기는 달착지근했던 지난 밤의 꿈을 생각나게 한다.  의식이 살짝 걷힌 듯한 틈새로 이치에 닿지 않는 무의식의 장난들이 활개를 치던...  어깨에 매달린 꿈의 무게는 아침운동을 나서는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더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안개 속에서 자맥질을 하는 역한 냄새들.  고무 타는 냄새와 화석연료가 불완전 연소를 할 때 내뿜던 역한 냄새가 비위를 거스르며 내 발길을 붙잡는다.  약간의 편두통이 있었고, 메슥메슥한 고약한 느낌이 있었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에도 어둠은 채 걷히지 않았고, 그 희미한 어둠 속에서 농무는 더욱 짙어진 듯했다.  어느 만화영화의 배경처럼 안개가 낀 숲은 괴괴한 느낌마저 감돌았다.  나는 그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생각했다.  내 의식의 투명한 유리잔에 지문처럼 묻어나는 무의식의 저편.  뜬금없다.  인적이 끊긴 조용한 숲에서 나는 그렇게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렸고, 분주히 나무를 타는 청설모 한 쌍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읽었던 것은 내가 처음부터 무모하게 시작했던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막연히 소일하고 있었고, 다가올 미래는 마치 오늘의 안개처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불안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책을 읽고 있던 내가 남들 눈에는 태평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내 불안의 정도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식을 집중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것이었다.  나는 내 의식을 옥죄어 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순간순간의 기억마저 의도적으로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전화벨이 그친 다음에 그는 말한다.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청소를 하거나 공기를 바꿔 넣거나, 꽃의 물을 바꿔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바꿔 말하면, 넌 영원히 너 자신의 도서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하권 p.449)

 

<해변의 카프카>는 서로 관련도 없어 보이는 사건과 인물들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오늘 아침 집 근처의 도서관에서 빌린 <해변의 카프카>를 만10년 만에 다시 읽는다.  그때의 불안했던 내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쨌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간의 추억들이 비 오는 날 솔잎에 맺힌 작은 물방울처럼 조롱조롱하다.  내가 불러낸 기억들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읽었다.  나는 그때 '왜 작가는 하필이면 오이디푸스 신화를 책으로 엮을 생각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했으며, 시간의 비가역성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의 전개 방식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었다.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들은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상권 p.315)

 

한참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나는 한 편의 소설을 매개로 그때의 나를 되돌아 본다.  나는 그때 상상력이 결여된 공허한 인간이었고, 오직 그 불안했던 현실의 한 순간이 훌쩍 다른 시간대로 옮겨지기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그 고통의 순간순간을 한발짝도 뛰어넘지 못하고 주어진 시간들을 꼭꼭 눌러 밟으며 천천히, 아주 느리게 지나쳐 왔다. 

 

"차별당하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인지, 그것은 차별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지.  아픔이라는 것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그 뒤에는 개별적인 상처 자국이 남아.  그렇기 때문에 공평함이나 공정함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엘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즉 쉽게 말하자면, 조금 전 도서관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두 여성 같은 인간들이라구."    (상권p.351)

 

15세의 소년 다무라 카프카를 통하여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10년 전의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입구의 돌'처럼 일본에는 혹시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웜홀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또 다른 시간대로 훌쩍 떠나고도 싶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무라 카프카가 판타지와 같은 환상의 세계를 경험한 후 현실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처럼 삶의 기억들은 아름다운 무늬로 누군가의 가슴 속에 새겨질 수 있음을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결국 소중한 것은 내게 주어진 시간과 그 시간을 밟고 지나가는 나의 기억들임을 다시 읽은 한 편의 소설을 통하여 나는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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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여린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부드럽기 그지없는 비다.  나는 잠깐 산책을 했고, 속삭이는 빗소리를 들었고, 이따금씩 우산을 옆으로 젖힌 채 한두 방울의 비를 맞곤 했다.  겨울을 준비하는 모든 생명체의 바쁜 일상은 잿빛 어둠에 묻혀 가뭇하다.

10월에 출간된 에세이를 둘러본다.  반가운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윤기, 이외수, 잭 캔필드, 안셀름 그륀 신부님...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책'이라는 단어가 있는 책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아주 오래된 습관처럼 나도 모르게 스르르 끌리는 것이다.  저자의 이름에 '잭 캔필드'가 보인다.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다.  물론 다른 많은 작가들이 등장하지만, 나는 오직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의 저자인 잭 캔필드만 보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바라볼 수 있는 권리'가 내게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딱히 종교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안셀름 그륀 신부님을 사랑한다.  그의 따뜻함이 좋고, 밝고 투명한 그의 영혼이 좋다.  게다가 나는 한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던 그 순간에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다.  <자기 자신 잘 대하기>를 비롯하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머물지 말고 흘러라>, <삶을 배우는 작은 학교>, <노년의 기술> 등 신부님이 쓴 주옥같은 책들을 지금도 가끔 들춰보곤 한다.  나는 그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이윤기 작가를 다시 평가할 수 있었던 계기는 그의 산문집 <무지개와 프리즘>을 읽은 직후였다.  나는 이제껏 무릇 작가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에게 가장 결여된 것은 '일관성'이라고 여겨왔었고,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것을 확인하곤 했었다.  작가에게 있어 '변신'이란 '문학적 재능', 또는 '창의성'으로 과대포장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수시로 얼굴을 바꾸는 작가들의 행태에 나는 얼마 간의 역겨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러나 이윤기 작가의 일관성과 뚜렷한 주관, 그리고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빼어난 글솜씨는 금세 나를 사로잡았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나 노련한 작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세간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들로 작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대담집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데 있다.  세상에 드러낼 수 없었던(때로는 드러내는 것을 꺼렸던) 자신의 생각들을 과감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이외수의 생각을 소설가 하창수와의 대담에서 얼마나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물의 가족>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의외성'이었다.  그것은 '독창성'과는 구별되는, 당돌함이나 특이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책을 읽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잊고 있었을 뿐이다.  에세이의 제목 또한 도발적이다.  삭발을 한 그의 얼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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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철학자 - School Library 04
알퐁스 도데 지음, 강승민 옮김 / 종이나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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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하루 종일 목 안이 칼칼했었다.  중국발 스모그가 몰려 온 탓이리라.  그렇다고 중국에 항의도 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면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수산물은 입에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독가스나 다름이 없는 스모그가 몰려 와도 어떤 대책도 없이 손을 놓고 있어야 하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이런 오염이 비단 자연환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 우리가 먹는 음식도 예외는 아닐 듯싶다.  오염된 환경에서 자란 식재료에 각종 향신료와 첨가물이 뒤범벅 되어 이제는 옛맛과의 비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요즘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 한 권 한 권 읽어나갈수록 작금의 오염된 환경에서 생겨난 최근의 책들이 그 오염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하고 지저분해졌는지 새삼 깨닫곤 한다.  화려한 비유나 미사여구,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성적인 묘사 등으로 인하여 책을 읽는 독자는 텍스트를 관통하는 주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눈길이 쏠리게 된다.  책을 쓰는 작가들도 이러한 현상을 익히 인지하고 있을 터,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타락하고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의 얕은 지식이나 유행을 탓함으로써 자신들의 허물을 합리화시키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의 세계, 이를테면 자연환경이나 문명의 이기, 또는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 등의 심각한 오염은 눈으로 쉽게 확인될 수 있지만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고전을 읽지 않는다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글의 오염도를 쉽게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요즘 아이들이 사오십 년 전의 된장국 맛과 지금의 된장국 맛을 비교할 수 없는 이치와 비슷하다.  어떤 기준점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내가 어린 시절에 즐겨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 요즘, 나는 현대 작가들의 글이 너무도 타락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하여 그 글을 즐겨 읽는 독자들의 영혼도 얼마나 심하게 오염되고 있는지 조금쯤 알 것만 같다.

 

최근에 나는 알퐁스 도데의 소설 <꼬마 철학자>를 다시 읽었다.  내가 알퐁스 도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별>이라는 작품을 읽은 후였다.  그때는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련함과 애틋함이 가슴속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었다.  조금의 시차는 있었겠지만 <별>을 읽은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나는 <꼬마 철학자>를 읽었었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담은 <꼬마 철학자>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 어떠했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부피가 두툼한 이 책을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아껴가며 읽었던 것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고, 이 책의 주인공인 다니엘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처럼 나도 이제는 그리움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새로 출간되는 많은 책을 읽었었고, 물과 공기처럼 담백한 글들은 내 관심에서 차츰 멀어졌었다.  '퓨전'이라는 명목으로 본래의 맛을 잃어버린 요즘의 음식에 내 입맛이 길들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합성 조미료와 향신료를 제거한 음식을 다시 먹어본다면 그 밋밋함에 질색을 하며 물러나지 않을까?        

 

"생제르맹 데 프레 광장의 성당 오른쪽 모퉁이에 있는 6층 건물의 지붕 밑에는 내 가슴을 저리게 하는 창이 하나 나 있다.  바로 형과 내가 살던 방의 창이다.  그곳을 지나칠 때면 지난날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거리를 내려다 보면서 먼 훗날 등 굽은 할아버지가 되어 처량하게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를 띄우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 같은 자크 형과 그 높은 곳에서 살 때 생제르맹 종탑의 낡은 시계는 어김없이 매 시간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었다.  젊음과 패기로 넘쳐 났었던 그 시절로 단 몇 시간 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종을 울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온 정열을 다해 시를 썼던 시절이었다."    (p.262)

 

이 책의 어디에서도 화려한 비유나 단번에 마음과 눈을 사로잡을 만한 현란한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극적인 반전도 없다.  그저 담담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마치 나른하고 지루한 오후의 시간들이 천천히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화려하지도, 모험과 스릴이 넘치는 것도 아님을 작가는 조용히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상한 꿈을 꾸어도 그저 웃어넘기고 마는 사람이라면, 뭔가 미래의 일을 예감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불안에 시달려본 적이 결코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철통 같은 두뇌로 오직 현실만 인정하고 미신 따위는 떠올리지 않는 냉철한 실증주의자라면,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도 초자연적인 것은 믿지 않고, 논리로 설명해낼 수 없는 것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펼쳐질 남은 이야기들은 영원한 진실만큼이나 사실이다.  여러분은 믿지 않겠지만......"    (p.460) 

 

진리와 도덕에 대한, 삶의 진면목과 사랑의 가치에 대한 기준점마저 사라진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체념하기에는 아까운 너무도 소중한 것들이 우리 곁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도 오염되고 훼손된다는 사실이 그저 섬뜩할 뿐이다.  '아, 글도 오염되는구나!'하고 느꼈던 나의 생각이 허망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인도 모른 채, 거부하지 않고, 좋든 싫든 시대의 변화를 다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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