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는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나 신년운세를 보는 것이지요.  대개는 재미삼아 하는 일종의 놀이쯤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요즘 신년운세를 보지 않습니다.  믿지 못해서이거나 궁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귀찮아졌을 뿐이죠.

 

제가 어렸을 때는 점집이 참 많았던 듯합니다.  붉은 바탕에 만자 (卍字) 표시가 있는 집은 한결같이 점을 보는 집이었죠.  지금도 더러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보이지는 않더군요.  점도 이제는 다양화되고 첨단화되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으로 이동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에는 점집을 찾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돈을 내고 점을 보았던 것은 아마도 아내와 결혼하기 한두 해 전쯤 아내와 함께 점집을 찾았던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듯합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어느 점집에 들러 가족들 사주며 운세를 모두 보고 와서는 저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적은 한두 번 있었던 듯합니다.  요즘에도 제 주변에는 심심풀이로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곤 합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은 우리 주변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아지는 게 사실인 듯합니다.  못 믿으시겠다구요?  그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지 인간의 길흉을 예측하는 점이나 무슨무슨 예보 또는 예측은 사실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적중률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지만 말이죠.  예컨대 일기예보만 하더라도 단기예보는 잘 맞는 편이지만 장기예보는 적중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주가예측이나 경기예측도 비슷하지요.  이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보는 점보다도 못한 적중률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은 미신으로 치부하며 터부시하는 반면 경기예측이나 주가예측을 두고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개중에는 신기한 예보도 있더군요.  요즘은 미세먼지도 예보를 하고 내년 4월부터는 서울시에서 모기예보제를 시행한다니 점의 종류는 나날이 늘어날 것만 같아요.  예보를 하는 것도 그 주체에 따라 성향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듯 보입니다.  가령 장기 기상예보는 늘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주가예측은 항상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지요.  올해만 하더라도 올 겨울은 눈도 많고 혹독한 추위를 예보했었는데 지금까지는 그렇지도 않은 듯 보이니 적중률은?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이네요.  주가예측도 올초에는 상당히 높게 예상했는데 강보합 정도였으니 예측은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기관에 따라 왜 이런 예측을 하고 사람들은 왜 어떤 예측은 기억하고 어떤 예측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상청 장기예보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말할 경우 이 예보가 맞을 경우 잘 맞는다고 할 테고 맞지 않았을 경우는 날씨가 좋았을 테니 그런 예보가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주가예측은 주가가 상승하든 하락하든 손해를 보는 사람과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 기왕이면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예측을 믿었다가 손해를 본 사람들은 원망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하겠죠.

 

아무튼 예보든 점이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비록 그 기법이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죠.  미래는 신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불확실성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은 점이든 예보든 그 무엇엔가 더욱 의존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과학이 발달해도 100% 정확한 예보는 존재하지 않을 듯 싶군요.  점이든 또는 예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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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2-3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어떤 책 속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이 'AGAINST THE GODS'였던 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구절이 다음 내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 *

확률은, 확률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나올 때만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확률에 대한 의존은 확률을 어느 정도 고려해서「행동해야 한다」는 판단이 설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확률이 우리에게「인생의 지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존 로크(Tohn Locke)가 말했듯이, 신은「우리의 관심사 대부분에」단지 미광(微光)만을 부여하셨다. 내가 여기에 부연해 덧붙인다면,「신은 우리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 하셨다」라고 하겠다. 이는 가정하건대, 신이 우리를 놓고 즐거워하셨던「평범(Mediocrity)」과「수습기간(Probationership)」의 상태에 걸맞은 표현일 것이다.


꼼쥐 2014-01-04 11:39   좋아요 0 | URL
멋진 표현이네요.
신은 정말이지 우리 인간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한 것 같아요. 우리는 그 미광을 붙잡고 떼를 쓰고 있구요. ㅎㅎ

세실 2014-01-0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도서관에도 다가올 인사를 앞두고 유난히 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 어디가고, 누군 어디가고..마치 인사파트에 있는 사람처럼요. 늘 엇나가지만 말의 양은 줄어들지 않네요. 별명이 오뻥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참 다양하죠? ㅎㅎ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해 되시길 빕니다.
새해엔 더 자주 뵈어요~~~~

꼼쥐 2014-01-04 11:41   좋아요 0 | URL
어느 조직에서나 그런 사람은 한둘 있게 마련이지요.
아마도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나 봅니다. 눈치를 주고 주의를 줘도 잘 고쳐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죠.

세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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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둔하며 감싸주기에는 내게 다가올 비난과 조롱이 두려웠던 그런 사랑을 보았습니다.  내 가슴을 면도날처럼 베며 지나갈 차가운 시선을 감당하기에는 내 용기가 참으로 부족했던 시절이었지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리는 누군가의 눈물이 내 발치에서 시작하여 무릎으로, 가슴으로, 결국에는 머리 끝까지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이후로 다만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깨닫게 될 어떤 것들이 차마 그 시절에는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한껏 뒤로 물러서게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피할 수 없는 밤의 어둠처럼 누군가의 아픔이 언젠가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공지영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떠올릴 때면 책을 펼치기도 전에 눈시울부터 붉어집니다.  모든 인생에는 전성기라는 것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라면 공지영 작가의 전성기는 그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시(詩)에 깃든 자신의 경험과 아픈 과거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책 속에는 무려 40편에 가까운 시가 소개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학창 시절에는 시인이 되기를 꿈꿨었기에 작가는 여전히 수많은 시인들을 흠모하고 그들의 시를 읽으며 안식을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이토록, 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과, 그런 것들을 기꺼이 버텨낸 사람으로 한 번 더 나뉘어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이든 이성이든 가여운 이들이든 혹은 강아지든, 사람은 사랑 없이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사랑하지 않으면 죽어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글쓰기가 이토록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글쓰기는 살아 움직이며, 끊임없이 상처받고 치유하고 있는 영혼을 질료로 삼는다는 걸 알았다는 말입니다."    (p.80)

 

수없이 되뇐 시구가 어느 날 문득 그 사람의 인생으로 되돌려진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그것이 꼭 공지영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저 이름 없는 풀처럼, 그저 바람처럼 그렇게 살다간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한 편의 시처럼, 한 편의 영화처럼 말이지요.  이 책은 산문이면서 'J'라는 익명의 존재에게 쓴 서간체 형식의 글입니다.  ‘J'가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작가에게 있어 중요한 어떤 사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상처와 비밀스러운 속내를 ‘J’에게 털어놓는가 하면 ‘J’를 통해 치유를 받습니다.

 

"J,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릴케를 인용하며 당신은 말씀하셨지요.

    사랑이란 무턱대고 덤벼들며 헌신하여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과 미완성인 사람 그리고 무원칙한 사람과

    의 만남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그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가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계로 이끄는 용기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구절이 제 마음의 어떤 구석을 건드리고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했을까요? 하는 구절 말이지요."    (p.99) 

세 아이의 엄마로, 그 이전에 대한민국의 한 여성으로 작가 공지영이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찬찬히 훑어보노라면 어느 순간 책장을 넘기는 내 손가락에 흥건한 슬픔이 묻어날 것만 같습니다.  기억하시나요?  1997년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영국 내 우울증 환자의 수가 절반으로 급감했다는 사실을 말이죠.  작가가 기록한 일상의 이야기들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 독자의 마음을 두들깁니다.  세상으로부터, 삶과 사람으로부터 상처받고 아파하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고통을 봉헌하는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아픔이라는 듯 말이죠.

 

"지금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서재는 깨끗하고 스탠드도 따뜻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학교로 갔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시간에 결국 저는 이런 질문을 하고 맙니다.  모든 타인들이 떠나고 모든 소유들이 흩어진 후에도 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저는 처음으로 일기장에 그렇게 썼습니다.  세상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그러니 눈을 감지 말고, 책장을 덮지도 말고, 멈추지 말고 앞으로 간다...... 앞으로 가는 길이 아파도 간다......너는 소설가이고 그래서 고맙다, 지영아, 하고."    (p.129)

 

의미도 모른 채 불렀던 어린 시절의 한 줄 노랫자락이 어느 순간 확연한 의미와 함께 나의 가슴을 포근히 감싸듯 한 줄의 시구가 때로는 나를 울리고 그 울음으로 인해 나는 치유됩니다.  아마 작가도 그랬겠지요.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라는 책의 제목은 이라크의 저항시인 압둘 와합 알바야티의 〈외로움〉이라는 시에서 인용한 문구라고 합니다.  작가가 인용한 시는 다양합니다.  D.H. 로렌스의 <겨울 이야기>, 기형도의 〈빈 집〉, 김남주의 〈지금은 다만 그대 사랑만이〉,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

 

한 해를 보내며 새해를 기다리는 이맘때쯤이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아픕니다.  삶은 그렇게 아픈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아픔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픈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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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3-12-30 13:41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은 책인데, 참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2013년 서재의 달인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꼼쥐 2013-12-31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두 번째 읽었는데 전에는 어떻게 느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다시 읽어보니 좋은 책이다 싶기도 하구요. 물론 작가는 한창 어려운 시기를 넘던 순간이었겠지만 말이죠.

이렇게 축하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감사합니다. ^^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 멋지게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인생의 기술 53
이근후 지음, 김선경 엮음 / 갤리온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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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 중에 <꽃보다 누나>가 있다.  세간에 화제가 되는 프로그램인지라 어제는 우정 시간을 내어 방송을 보았다.  짐꾼 이승기와 더불어 배우 윤여정, 김자옥, 김희애, 이미연이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는 좌충우돌 단체 여행기이다.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하고, 크고 작은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유명 연예인의 속내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어느덧 회갑을 넘긴 윤여정과 김자옥의 가슴 뭉클한 우정과 결혼 17년차라는 김희애의 연애담 등 예능으로서의 재미도 쏠쏠했다.

 

어제의 방송분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맏언니 윤여정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윤여정은 그것을 "쓸쓸하고 씁쓸하다"고 말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일반인이 아닌 여배우로서, 또는 배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나이 든다는 것은 슬프고도 덧없는 느낌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연기력은 높아질 수 있지만, 잡을 수 없는 나이의 흔적에 대해 슬퍼하고 있었다. 윤여정은 “물론 배우로서는 나아갈 수 있지만, 외모는 흉해진다. 점점 흉해지는 내 꼴이 나도 싫은데…”라며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속내를 담담히 전했다.  그 장면에서 나도 일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구도 흐르는 세월을 피할 수 없고 언젠가는 죽음과 함께 그의 삶도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문득문득 아연해질 때가 있다.  죽음만큼 더한 진리는 없다.  젊어서는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진리로 인해, 차츰 나이가 들면서 재판관 앞에 선 피고처럼 가슴 한켠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노년의 삶은 두려움으로 시작되는가 보다.  아직은 새파랗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내 나이에도 나이 든다는 것이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는 걸 보면.

 

이근후 박사의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노년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라'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말함으로써 인생의 후배이자 그의 저서를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나는 많은 부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신기하다. 주위에는 밤에 자다가 세상을 떠난 동창이나 선후배가 많다. 나 또한 내일이 반드시 예약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와! 눈떴구나! 하하하!' 하고 쾌재가 터져 나온다. 그 순간의 찰나적인 신비감이라니!"    (p.21) 

 

50년간 정신과 전문의로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76세의 나이에 최고령이자 수석으로 사이버 대학을 졸업하고, 삼 대 열세 가족과 한집에서 대가족을 이루어 사는 등 누구보다 즐겁고 재미있는 노년을 보내고 있는 노학자라고 한다.  언제였는지 기억엔 없지만 저자의 대가족이 사는 '예띠의 집'을 TV에서 보았던 적이 있다.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 원장으로 청소년 성 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을 펼치고 있고, 매년 의료 봉사를 위해 네팔을 방문하며, 시 낭송 모임과 영화 동아리 세미나에 참석하고, 청탁 원고를 쓰고 있다고 한다.  큰아들이 결혼한 뒤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다는 저자는 삶의 매 순간을 정말 낙관적으로 사는 분인 듯했다.

 

"언젠가 선배 교수가 연구소를 찾아왔을 때 일이다. 나와 한담을 나누던 중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며느리가 시어머니, 그러니까 내 아내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아내가 무슨 일을 부탁하는 것 같았다. 며느리는 "예? 그럼 언제까지 하면 되나요?"라고 묻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 그건 안 되겠는데요." 며느리가 자리를 비우자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자네 며느리가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 같아. 며느리 교육 한번 제대로 시켰구먼." 선배의 눈에는 시어머니의 부탁을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단박에 거절하는 며느리가 마뜩찮았던가 보다. 정작 시아버지인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선배 교수 말대로 며느리 교육은 내가 '제대로' 시켰다. 큰아들이 결혼한 뒤 나는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p.42~43)

 

이 책은 모두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53가지의 귀중한 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렇다고 이 책에 실린 가르침이 '이렇게 살아라'하고 말하는 나이 든 사람의 준엄한 지침이라고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재미있는 일만 골라 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들을 재미있는 쪽으로 만들어 갔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관상동맥협착, 담석 등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자동차와 손목시계, 휴대전화가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원시인 취급한다. 자식들은 내가 이기적이라고까지 한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내는 필요할 때 바로 통화를 할 수 없어 답답하고, 자식들은 내가 외출할 때 자동차로 모셔다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전용 자가용 '택시'가 있으니 절대 눈치 보거나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p.298)

 

몇 년 전부터 아내와 떨어져 살고 있는 나는 같이 살았던 때보다 아내와 아들녀석에 대하여 궁금한 게 배는 많아졌다.  아내도 그런 모양이다.  지난 크리스마스날에도 아내는 내게 물었다.  내가 아내에게 말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느냐고.  그렇게 물었던 이유인 즉, 그 전보다 내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생각해도 나는 많은 면에서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 중 하나는 집착이 약해졌다는 점이다.  돈에 대해서도, 명예나 체면에 대해서도, 심지어 미래에 대해서도 나는 예전의 생각에서 많이 멀어져 있다.  대신에 나는 지금 당장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 집중하고 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고 있음이다.  책의 제목처럼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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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일은 증오를 사랑으로 갚는 것, 버려진 자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곱씹어 생각할수록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가뜩이나 2013년의 막바지에 이른 요즘의 대한민국 정세를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도노조의 파업과 민주노총 사무실의 강제진입을 보면서, 그리고 얼마 전 개봉한 '변호인'의 흥행을 보면서 마음이 그닥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찰의 강경진압을 보면서 저는 8,90년대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 장면이 보여지곤 했으니까요.  오죽하면 대학가 주변의 상인들은 민방위 훈련을 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셔터를 여닫아야 했겠습니까.

 

현 정부의 이와 같은 행태는 집권초기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대치 상황이 전 정권에서 발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신기할 뿐입니다.  저는 노무현 정부가 물러날 즈음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예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모두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제 의견에 반하는 분도 물론 있겠지요.

 

다들 보셨겠지만 참여정부의 초기에 있었던 평검사와의 대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 어느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던(어쩌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권위주의의 탈피는 그때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민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삶에서도 성공과 과오는 있게 마련이지요.  어쩌면 과오가 아홉이라면 성공은 그 중 하나쯤만 되어도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과오를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삶은 더욱 위대한 것이겠지요.

 

제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과오로 언론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과 참여정부와 척을 지는 반대파를 제거하지 못했던 것을 꼽는 분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뜨뜻미지근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은 자유보다는 오히려 억압과 복종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이들은 그런 환경보다는 오히려 자유와 개성에 더 익숙하겠지요.  그 정점은 역시 참여정부 시절이었구요.

 

민주주의의 기반인 자유와 평화를 누려본 사람들은 억압과 복종을 결코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지요.  저처럼 그나마 나이 든 사람들은 억압적인 환경을 여러 번 경험했던지라 지금 그런 환경에 다시 처한다고 할지라도 적당히 견딜 수 있겠지만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어디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참여정부가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노무현 대통령의 위대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도 일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과오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심어준 것은 그의 위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정의에 기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저와 다른 의견이 있는 분들은 오히려 공권력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도 분명 있을 겁니다.  현 정부를 책임지는 분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구요.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히틀러나 뭇솔리니도 자신의 행동이 틀리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곧 전체주의에 다름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과 그것을 모두 수용할 때 가능한 제도입니다.  불협화음과 시끄러움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지요.

 

영화 '변호인'이 흥행몰이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민주주의 제도 자체에 커다란 위협이 엄습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자유를 향유했던 사람들은 억압과 굴종의 시대를 결코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현 정부의 성공 여부는 그것에 달려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하고, 더 많은 대화를 시도하는 것 그것이 정답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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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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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어린 시절, 부모님이나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자신의 경험담을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번 들었는데요, 저는 그때마다 '왜 어른들은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고,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로 들어서 재미도 없는데 왜 저렇게 또 침을 튀겨가며 되풀이하는 걸까?  지겹지도 않나?' 하고 생각했었죠.  제가 그때의 동네 어른들 나이쯤 되고 보니 어느 순간 저도 그들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지 뭡니까.  참 우습죠?

 

지구별에서 인간의 삶이 지금까지 영속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지겨운 얘기를 되풀이하여 후손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인간의 DNA에는 자신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전하도록 입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때 들었던 얘기가 하나같이 재미없던 것은 아니었어요.  이따금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것도 있었죠.  어쩌면 제가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알게 모르게 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아크라 문서>는 제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삶에 필요한 교훈들만 가려 뽑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사실로 이해하기에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분위기가 흐르니까요.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만 있다면 말이죠. 

 

소설은 십자군의 침략이 눈앞에 닥친 시점에서 예루살렘의 군중이 콥트인 현자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서 군중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현자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책이 있지요?  예언자 알 무스타파가 세속에 나와 자신의 통찰을 속인들과 이야기하는 문답형식의 책 말입니다.  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입니다.  혹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형식은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주제가 그렇고, 문체가 그렇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문장이 아름답고 여성적인 섬세함이 돋보이는, 어쩌면 시에 가까운 듯 보이는 반면, <아크라 문서>는 비유나 시적인 운율이 배제된, 강건하고 논리정연한 문체로 쓰여 있습니다.  두 책에서 같은 주제로 쓰인 대목을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듯합니다.

 

 

"사랑이 그대들을 부르면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험하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들을 싸 안을 땐, 몸을 내어 맡기라,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들에게 상처를 줄지라도."    ('예언자' 중 '사랑'에 대하여)

 

"인생의 목표는 사랑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이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 때문에 눈물이 호수를 이루는 곳으로,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눈물의 땅으로 가게 되더라도!  눈물은 감출 수 없다.  울 만큼 울었다고 생각될 때도 눈물은 쉼없이 흐른다.  그러나 우리가 슬픔의 계곡을 오래도록 걸을 운명임을 인전하는 순간, 눈물은 이내 그친다.  고통스럽더라도 마음을 계속 열어두기 때문이다."    (p.91)

 

파울로 코엘료는 이 소설의 배경으로  전쟁 직전의 절박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운명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콥트인 현자를 바라보며 질문을 합니다.  패배, 고독, 변화, 아름다움, 목표, 사랑, 시간, 성교, 믿음, 우아함, 행운, 기적, 불안, 죽음, 충심, 평화, 성령 등에 대하여.  어쩌면 죽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시간에야 우리는 가장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에 모여 현자에게 질문을 하는 군중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까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 현자가 들려주는 답변은 곧 작가 자신이 터득한 성찰의 결과물이자 독자들에게 전해줄 교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참 지루하게 읽었습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쓴 것처럼 깊은 성찰의 결과물은 언제나 재미없고 밋밋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책에선가 이미 읽었음직한 문구들, 극적인 장면도, 현란한 수사도 없이 단순하게 이어지는 문장들, 파울로 코엘료는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소설 형식의 자기계발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제 자신이 남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평범함 독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행간을 읽는 재주는 제게 없었습니다.  그저 '지루하다' 느꼈을 뿐이지요.  "기쁨의 웃음이 흘러넘치는 그 샘이 다음 순간에는 슬픔의 눈물로 가득 차게 된다"고 `예언자`에서 칼릴 지브란은 말했습니다.  지루함이 흘러넘치는 그 샘이 다음 순간 깨달음의 기쁨으로 가득 차는 순간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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